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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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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령 바스크는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라부르, 바스나바르, 술 세 지역으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바스크인들이 거주해 왔으며, 가스코뉴 지방과 문화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아퀴타니아로 불렸으며, 중세 시대에는 바스코니아 공국과 가스코뉴 공국으로 나뉘어 프랑크 왕국, 나바라 왕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 이후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바스피레네 현(현재의 피레네-아틀란티크 현)으로 편입되었다. 프랑스어와 함께 바스크어가 사용되며, 바스크 민족주의 운동이 존재한다. 경제적으로는 서비스업이 발달했으며, 관광 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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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령 바스크 - 바스크 국민당
    바스크 국민당은 1895년 사비노 데 아라나 고이리에 의해 창당된 가톨릭 및 보수주의 정당으로, 바스크 지역의 독립, 문화, 언어, 인종적 순수성을 옹호하며, 스페인 내전 중 공화국을 지지하고 프랑코 독재 기간에는 탄압받았으나 민주화 이후 온건 민족주의 정당으로 활동한다.
프랑스령 바스크
지도
일반 정보
언어바스크어
가스코뉴어
프랑스어
지방누벨아키텐
하위 구획피레네자틀랑티크주
면적2,967km²
하위 지역
행정
정부 형태지방 정부
공동체Euskal Hirigune Elkargoa
수장Jean-René Etchegaray
관련 기사저지 나바라
라푸르디
술레
명칭
프랑스어Pays basque français
스페인어País Vasco francés
바스크어Ipar Euskal Herria
기타 명칭Iparralde (북부 지역)
Pays basque nord (북부 바스크 지방)

2. 역사

아르멘다리츠의 석조 장식, "이 집은 베티리 에차르테와 아이미아 이리아르테가 지었다"


1732년 프랑스 관세 시스템, 라부르(바욘 포함)는 자체적인 재정 시스템을 보여준다


바스크 라우부루 십자가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은 역사적으로 가스코뉴 지방과 거의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가론 강 서부와 남부에는 아퀴타니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현재 바스크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아퀴타니아로 불렸으며, 이후 루아르 강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 아퀴타니아는 노벰포풀라니아 또는 아퀴타니아 테르티아라고 불렸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쳐, 로마의 봉건 제도에 반발한 바스콘인(바스크인의 조상)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역은 바스코니아 공국(이후 가스코뉴 공국으로 발전)으로 독립했고, 9세기 초에는 바스코니아 백작령이 분리되었다. 이 시기에 바스콘인들은 프랑크 왕국과의 론세스바예스의 전투에 참전했다.

848년858년, 두 차례 프랑크 왕국과 싸운 산초 2세 산체스는 가스코뉴 공작이 되었다. 9세기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순례가 활발해지면서 기독교가 확고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요 경로는 이 지역을 지나갔으며, 마을과 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레네 산맥의 여러 계곡에서 생겨난 작은 정치적 집단은, 후에 라부르와 바스나바르의 작은 카운티로 성장했다. 1020년, 가스코뉴는 바스나바르를 포함한 라부르의 지배권을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에게 양도했다. 그는 1023년에 바스나바르를 자작령으로 삼고, 수도를 바이욘으로 정했다. 1193년까지 바스나바르는 나바라 왕국의 봉토였다. 귀족은 왕의 영지에서 봉건법이나 사법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1191년, 나바라 왕 산초 6세와 아키텐 공작 리샤르(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사이에서 자작령이 분할되어, 바스나바르는 나바라령, 라부르는 아키텐 공작령으로 되었다.

1215년, 바이욘은 라부르 지방에서 분리되어 자치 도시가 되었고, 우스타리츠가 12세기 말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라부르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바이욘은 19세기까지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다. 수르나바라 왕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 자작령이 되었다.[46]

백년 전쟁 종결 후, 라부르와 수르는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1512년부터 1521년까지 카스티야 왕국이 오트나바르(고 나바르)를 침공한 후, 나바라 왕국의 북쪽 변경, 피레네 산맥 지역은 여전히 독립을 지켰고, 위그노 전쟁 중에는 위그노의 거점이 되었다. 이 시대에 처음으로 성경바스크어로 번역되었다. 나바라 왕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음에도, 나바라는 1610년까지 프랑스 왕국과 별개의 독립 국가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령 바스크는 탄압받았고, 바스피레네 현(이후 피레네-아틀란티크 현)이 되었다. 이후 150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프랑스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1857년부터 1877년까지 프랑스인의 해외 이주는 약 31만 명이었지만, 그중 31,000명이 바스피레네 출신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골드러시가 일어난 캘리포니아로 이주지가 바뀌었다.

1857년, 철도가 바이욘까지 부설되었고, 1864년에는 앙데까지 부설되었다. 나폴레옹 3세외제니 드 몽티조비아리츠에서 휴가를 즐긴 것을 계기로 관광 붐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의 민족주의가 이 지역에서 강해졌다.

2. 1. 선사 시대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인간 유해는 약 15만 년 전의 것이다. 아두르 강의 테라스, 비다르의 일바리츠, 생피에르데리브와 무게르에서 몇몇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중기 구석기 시대 (70만~10만 년 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초창기에는 노천에서 살았지만, 나중에는 이스트리츠의 동굴과 같은 곳에서 살았다. 유럽 초기 현생 인류인 크로마뇽인후기 구석기 시대 (9,000–50,000년 전)에 나타났다.[46]

마들렌 시대 (9,000–14,000년 전)의 많은 예술품이 이스트리츠에서 발견되었다.[46]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은 txistu|치스투eu 모양의 구멍 세 개가 뚫린 새 뼈이다. 중석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동굴 밖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동굴은 훨씬 더 나중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도자기, 농업, 가축 사육의 유물이 발견되었다.[46]

신석기 시대 (기원전 4000–3000년)에는 금속 사용 및 농업과 관련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46]

2. 2. 고대

현재 이 지역은 아키타니 부족의 일원인 타르벨리와 시불라테스가 거주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가론 강 남쪽과 서쪽의 모든 지역에 아키타니로 알려진 사람들이 거주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켈트족이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는 초기 바스크족으로 추정된다(아키타니아어 참조).[46]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 지역을 처음에는 아키타니아라고 불렀지만, 3세기 말에는 아키타니아라는 이름이 루아르 강까지의 지역을 포괄하도록 확장되어 노벰포풀라니아(Aquitania Tertiala)가 되었다. 라틴어로 이 이름은 '아홉 부족'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곳에 거주했던 9개의 부족을 가리킨다.[46]

이 지역은 로마화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acumla 또는 -anumla과 같은 라틴어 또는 켈트어 접미사가 있는 많은 지명이 이를 증명한다. 현재 프랑스 바스크 지방 북부에서는 이러한 지명이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루피아크와 가이얀이 있다. 그러나 영토 남동부, 즉 로마화가 덜 진행된 지역에서는 바스크어 접미사가 풍부한 지명이 많다. -ousse프랑스어, -ous프랑스어, -ost프랑스어 및 -oz프랑스어가 있으며, 예를 들어 비스카로스 및 알만도스가 있다. 일부 비문에는 바스크어와 유사한 단어가 있다.[46]

2. 3. 중세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이 침입한 이후, 6세기부터 프랑크족 연대기 작가들은 이 지역을 라고 불렀다.[15] 이 지역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와 구별되었다.

418년, 서고트족은 로마와의 조약에 따라 이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507년 부예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메로빙거 왕조에 패배하여 철수해야 했다.[16] 클로비스 1세 사후, 그의 왕위 계승자들은 북부 영토를 노스트리아와 오스트라시아 중심으로 통합하고 직접 통치했으며, 나머지 영토는 메로빙거 전통에 따라 백작, 공작 등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17]

와 피레네 주변 지역(Vasconum saltusla)에서는 6세기 말 잦은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580년까지 프랑크 왕 킬페리크 1세와 보르도의 ''comes''인 갈락토리오와의 충돌,[18] 587년 공작 아우스트로발드의 침략 등이 기록되어 있다.[19]

4세기 말과 5세기에 로마 봉건제에 대한 바스크족의 반란 이후, 이 지역은 602년에 독립적인 바스코니아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공국은 가론 강 남쪽에 걸쳐 있었으며, 8~9세기에 바스코니아 백작령이 창설되면서 해체되었다. 바스코니아 백작령은 아두르 강 주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20] 공국 창설 후, 프랑크 왕 테우데리크 2세와 테우데베르트 2세는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작 제니알을 내세웠다. 635년부터 638년 사이에 왕 다고베르트 1세는 바스크족 주민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고, 결국 그들은 복종하게 되었다.[21]

8세기에는 두 번째 자치 가스코뉴 공국이 창설되었다. 9세기 말에는 기예르모 산체스가 모든 바스크족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기욤 조프루아는 바스코니아와 아키타니아 공국을 통합했다.

이 시기에 북부 바스크족은 778년, 812년, 824년에 있었던 프랑크족과의 연이은 론세보 계곡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스 상시옹은 프랑크족으로부터 독립하여 바스코니아의 독립 지휘관이 되었지만, 보르도를 점령(844)한 후 아키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카롤링거 왕조의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지지했다. 그는 대머리 카를에게 복종한 후(851) 바스코니아 공작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바스크어는 속 라틴어와 기록된 라틴어에 밀려 점차 피레네 산맥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963년부터 생세베르 마을은 로 불리며, 이는 "바스코니아의 경계" 또는 "바스코니아의 주요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프랑스 바스크 지역을 구성하는 영토의 복음화는 느리고 불안정했다. 9세기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 안정적인 교회 조직이 설립되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들이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길과 마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레네 산맥의 수많은 계곡에서 생긴 작은 정치적 집단은, 후에 라부르와 바스나바르의 작은 카운티로 성장해갔다. 1020년, 가스코뉴는 바스나바르를 포함한 라부르의 지배권을 나바라 왕 산초 3세에게 양도했다. 그는 1023년에 바스나바르를 자작령으로 삼고, 수도를 바이욘으로 정했다. 1193년까지 바스나바르는 나바라 왕국의 봉토였다.

1191년, 나바라 왕 산초 6세와 아키텐 공작 리샤르(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사이에서 자작령이 분할되어, 바스나바르는 나바라령, 라부르는 아키텐 공작령으로 되었다.

1215년, 바이욘은 라부르 지방에서 분리되어 자치 도시가 되었고, 우스타리츠가 라부르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바이욘은 19세기까지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동안 수르나바라 왕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 자작령이 되었다.[46]

백년 전쟁 종결 후, 라부르와 수르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2. 4. 근세

1020년, 가스코뉴는 니브강(에로비)과 해안 주변의 라부르에 대한 관할권을 팜플로나의 산초 "대왕"에게 양도했는데, 여기에는 바스크 하 나바르도 포함되었다.[22] 이 군주는 1023년에 수도를 바욘으로 하는 자작령을 만들었고, 1193년까지 나바라의 왕과 여왕에게 봉신을 제공했다.[22] 이 지역은 1191년까지 앙주 아키텐 공작과 산초 "현명왕"과 리처드 "사자심왕"이 이 땅을 분할하기로 합의할 때까지 분쟁 지역이 되었다.[22] 라부르는 앙주 주권을 유지하고, 하 나바르는 나바라의 통제를 받았다.

이 자작령 아래의 모든 공지, 숲, 물은 왕에게 속했으며, 귀족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귀족은 어떠한 봉건적 권리도 갖지 않았으며, 사법권은 오로지 왕의 손에 있었다. 유일한 존재했던 의회인 빌차르는 세금과 부담금을 분배하는 역할을 했고, 그 대표는 교구의 etxeko-jaun|에체코 야운eu에 의해 선출되었다. 또한, 각 교구의 집단적 재산을 관리하는 교구 의회가 존재했다. 1215년, 바욘은 라부르에서 분리되어 그 순간부터 시의회를 통해 통치했다. 12세기 말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우스타리츠는 라부르의 수도였다. 바욘은 19세기까지 이 지역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북유럽과 연결된 나바라의 항구였다.

한편, 수울(Zuberoa|주베로아eu)은 독립 자작령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체로 나바라 왕국베아른 백작의 주장에 맞서 지지했지만, 때로는 어느 정도 앙주 종주권을 인정하기도 했다.[22] 백년 전쟁이 끝나면서 라부르와 수울은 자치 프랑스의 지방(pays d'état|페이 데타프랑스어)으로서 프랑스 왕실로 넘어갔다.

1512~21년 카스티야에 의한 상 나바르 정복 이후, 여전히 독립적인 나바르의 북 피레네 지역은 위그노 당의 지도자가 되어 프랑스 종교 전쟁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성경이 처음으로 바스크어로 번역되었다.[23] 결국, 나바르의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1620~24년까지 나바르를 형식적으로 독립된 국가로 유지하다가 이 분리가 폐지되었다.

1634년, 아술라르는 그의 문학 작품 Gero|게로eu에서 당시 바스크어의 범위를 대략적으로 묘사했다. 이 언어는 현재 바스크 지방으로 알려진 모든 지방과 "다른 많은 곳"을 포함했다. 아술라르의 저서가 완성된 후, 특히 라부르에서 다른 바스크 작가들이 뒤를 이었다. 이곳은 고래잡이로 번창하는 지역이었다. 1579년, 마르틴 오이하르차발은 항해 안내서인 ''항해 안내자''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뉴펀들랜드와 다른 바스크 전통 어업에서 발견되는 지침과 유용한 랜드마크가 포함되어 있었다. 1677년, 피에르 에체베리에 의해 바스크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이러한 활동은 영국인들이 바스크인들을 대신하면서 점차 쇠퇴했다.

16세기는 프랑스령 바스크 주민들에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1512년에서 1659년 사이에 반복된 프랑스-스페인 분쟁과 30년 동안 지속된 위그노 전쟁은 공포와 불행을 가져왔다.

한편, 보르도 의회에서 제기된 고발은 라부르에 피에르 드 랑크르 의원을 파견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여 약 200명의 여성, 어린이, 사제를 화형시켰다. 피에르 드 랑크르는 라부르의 마녀 사냥에 책임이 있었다. 그는 여성에게 죄 많은 본성이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너무 위험해서 한 명의 재판관이 여성에 대한 재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자는 나약하기 때문에, 여러 남자로 구성된 재판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7세기는 겪었던 재앙을 극복한 후 일종의 르네상스를 경험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수아 라블레가 그의 작품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출판했고, 베르나르 에체파레는 바스크어로 된 최초의 인쇄물을 저술했다.

몰레옹과 바욘의 성을 각각 1449년과 1451년에 정복하면서, 라부르와 술은 프랑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 말 나바라의 앙리 3세(프랑스 국왕으로서는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면서 하나바라는 프랑스 왕실 재산에 편입되었다(프랑스 및 나바라의 국왕이 됨).

2. 5.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세 개의 바스크 지방은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에서 바스크 지방 대표들은 새로운 정치-행정 체제에 반대했지만, 결국 로어 피레네 데파르트망이 설치되면서 베아른과 통합되었다.[24] 바욘 주교구는 확대되어 데파르트망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피레네 전쟁 (1793–95) 동안, 바스크어 사용 금지와 함께 베르트랑 바레르는 "광신은 바스크어로 말한다"라고 선언하며,[25] 민간인 추방 등 가혹한 조치가 이어졌다.[26][27] 이는 많은 바스크인들이 강제 징집을 피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후,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했지만, 몽세 장군의 활약으로 스페인군을 몰아내고 기푸스코아를 점령했다. 바젤 조약 체결 후 평화가 찾아왔다.[2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는 피레네 횡단 무역이 감소하며 경제 침체가 시작되었고, 제1차 카를로스 전쟁 이후 무역 중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모레온의 에스파드류 산업 발전으로 이민 추세가 완화되기도 했다.

3. 지리

프랑스령 바스크는 북쪽으로는 랑드, 서쪽으로는 비스케이 만, 남쪽으로는 남바스크(현재의 바스크 자치구와 나바라)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베아른과 접한다.

프랑스령 바스크는 크게 라부르 (바스크어로 라푸르디), 바스나바르 (저지 나바르, 바스크어로 나파로아 베헤라), 술 (바스크어로 수베로아)의 세 지역으로 나뉜다.

때로는 코트 바스크(바욘에서 앙다예까지의 해안 지역)와 바스크 산악 지방(산이 많고 평지가 적으며, 양과 소 방목이 주산업인 인구 희박 지역)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코트 바스크는 바스크어 사용 비율이 낮고, 바스크 산악 지방은 바스크어 사용 비율이 높으며, 바스크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하는 사람은 약 61%이다.[44]

바욘비아리츠가 대표적인 도시이다. 프랑스 국내 다른 지방이나 바스크 자치구의 비스카이아, 기푸스코아처럼 산업화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름다운 백사장과 소박한 농촌 풍경이 남아 있어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3. 1. 행정 구역

피레네-아틀랑티크 주는 바욘 구, 올로론-생트-마리 구, 포 구의 세 구(''아롱디스망'')로 나뉜다. 프랑스령 바스크는 바욘 구 전체와 올로론-생트-마리 구의 몽타뉴 바스크 구를 포함하며, 베아른의 에스키유, 아라미츠, 제롱스, 아레트 (올로론-생트-마리-1 구)도 포함된다.[44]

프랑스령 바스크는 1789년 프랑스 부서 분할 이전에 몇 가지 수정 사항과 함께 세 개의 기존 역사적 영토를 포함했다.[44]

  • '''라부르''' (Labourd|라부르프랑스어, Lapurdi|라푸르디eu, 가스코뉴어: ): 바욘은 관례적으로 라부르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13세기에 이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몇몇 자치 단체는 라푸르디의 일부로 간주되어 "선출된 의회"와 "프랑스령 바스크 개발 의회"에 속하지만, 역사적인 라푸르디 지역에는 속하지 않았다. 1857년까지 랑드 주에 속했던 부코, 바르도, 기슈, 위르가 이에 해당하며, 위르는 1763년에 라푸르디에 행정적으로 통합되었지만 카메 (비다슈)의 세네샬에서 사법적으로 분리되었다. 라푸르디는 바욘 구에 위치한다.[44]
  • '''바스 나바르''' (Basse-Navarre|바스나바르프랑스어, Behe Nafarroa|베에 나파로아eu, ): 아랑쿠, 카메, 사메스는 바스 나바르에 속하며 선출된 의회와 프랑스령 바스크 개발 의회의 일부이다. 이들은 앙시앵 레짐 동안 닥스 세네샬에 종속되었으며, 나바르에 종속되지 않았다. 비다슈는 주권 공국이었던 지역으로, 프랑스령 바스크 개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 일부임에도 나바르에 속하지 않았다. 반면, 에스코스 (살리에스-드-베아른 구의 마을)는 앙시앵 레짐 동안 나바르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바스 나바르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프랑스령 바스크 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바스 나바르는 바욘 구에 위치한다.[44]
  • '''''' (Soule|술프랑스어, Zuberoa|주베로아eu, ): 에스키유 (앙시앵 레짐 동안 베아른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바스크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술레인의 인구 목록에 포함되지만, 베아른의 일부가 되었으며 프랑스령 바스크 의회에 가입을 요청하지 않았다. 술은 바욘 구와 올로론-생트-마리 구로 나뉘며, 대부분의 코뮌이 여기에 위치한다. 올로론-생트-마리 구의 이 35개 술레 코뮌은 (술레 방언: )라는 시립 연합의 일부이다.[44]


3. 2. 주요 도시

프랑스령 바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바욘(Bayonne|바욘프랑스어)이다. 비아리츠, 앙글레(Angelu|앙글루eu)와 함께 비아리츠-앙글레-바욘(BAB) 도시권을 형성하며, 이 지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공간을 이룬다. 바욘은 하위 현의 정치적 수도이자, 프랑스령 바스크와 랑드 남부를 포함하는 광역 지역의 경제적 수도이다. 다른 중요한 도시로는 생장드뤼즈(Donibane Lohizune|도니바네 로히주네eu), 앙다예(Hendaia|엔다이아eu), 바스나바르의 수도인 생장피에드포르(Donibane Garazi|도니바네 가라지eu), 술의 수도인 몰레옹(Maule|마울레eu)이 있다.[44]

4. 언어

프랑스어가 프랑스령 바스크에서 사용되며, 지방 언어인 바스크어도 사용된다. 프랑스령 바스크 북부 및 북서부에서는 오크어의 일종인 가스코뉴어도 사용된다. 비스케이만 연안 도시에서는 프랑스어 사용이 우세하며 바스크어 화자는 인구의 10% 정도이다. 반대로 내륙에서는 인구 대부분이 바스크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45]

바스크어는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 프랑스 헌법 제2조에 따르면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며, 2006년 지역 언어 존중 관련 법안 추가 시도는 부결되었다.[35]

2006년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령 바스크 주민의 22.5%는 이중 언어 사용자(프랑스어-바스크어)이고, 8.6%는 바스크어를 이해하는 프랑스어 사용자이며, 68.9%는 바스크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바스크어 사용 비율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내륙 지역(하부 나바라와 술)에서는 66.2%가 바스크어를 사용하거나 이해하며, 해안 지역(라부르)에서는 36.9%, B.A.B. 도시 지역(바욘, 앙글레, 비아리츠)에서는 14.2%만이 바스크어를 사용하거나 이해한다. (B.A.B.의 20%는 가스코뉴어를 사용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37]

해안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지배적이지만, 북부 바스크 지방의 농촌 내륙에서는 바스크어가 지배적이며 대다수 인구가 사용한다.[38]

바스크어는 아키타니아어(또는 원시 바스크어)의 연속체이며,[39]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학교에서 학습하고 이 지역 기관에서 부차적인 언어로 사용할 수 있다.

콜도 수아조에 따르면, 프랑스령 바스크에서는 술레 방언과 나바라-라푸르디 방언 두 가지 방언이 사용된다. 라부르와 하부 나바레의 구어는 확정된 경계가 없는 언어적 연속체의 일부이며, 아미쿠스 또는 미세 지방 지역과 술 지방에서 술레 방언으로 이어진다.

나바라-라푸르디 방언과 술레 방언은 다른 바스크 방언과 구별되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스크어 왕립 학술원은 이 지역의 4세기 문학 전통을 고려하여 통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술레 방언과 비스케이 방언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가장 많은 고어를 보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언어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술레 방언은 음운론에서는 혁신적이지만, 어휘와 형태론에서는 보수적이다.

바스크어를 포함한 프랑스의 지역 언어(알자스어, 브르타뉴어, 옥시탄어)는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 표지판에는 이중 언어 표기가 존재한다(바욘과 같은 지역에서는 삼중 언어 표기).

1994년부터 이카스톨라(바스크어 중등학교)는 교육 기관으로 인정받았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42] 현재, 이카스톨라는 협동 조합 시스템에서 학부모와 와 같은 바스크어를 위한 활동을 통해 재정 지원을 받는다.

5. 정치

1963년 엔바타 운동(1974년 불법화)을 시작으로 바스크 민족주의 정치 운동이 나타났으며, 2000년대에는 아베르찰레엔 바타수나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피레네-아틀랑티크를 바스크 지방프랑스어베아른의 두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나눌 것을 주장한다. EAJ, EA 등 다른 민족주의 정당도 있지만, 스페인 바스크에 비해 그 존재감은 미미하다. 2007년부터 이들은 에우스칼 헤리아 바이 선거 플랫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선거에서 약 15%의 득표율을 얻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이파르타라크('북부인'이라는 뜻)라는 무장 단체가 독립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에 해체되었다.

5. 1. 제도 개혁 제안

프랑스령 바스크는 프랑스의 제도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역사적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1997년 1월 29일, 피레네-아틀랑티크 주지사의 명령으로 "바스크 지방"은 프랑스 행정 분류상 으로 인정받았다.[5] 이는 1995년 2월 4일의 파스콰 법(LOADT)[6]과 1999년 6월 25일의 보이네 법(LOADDT)[7]에 따른 것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지방, 즉 특정 장소와 문화에 속하는 사회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영토의 조직 및 개발을 장려한다.

프랑스 사회당, 공화당, 민족주의 정당 등 주요 정당의 선출직들은 의 지리적 조직보다 더 실질적인 기구, 특히 바스크 주 창설을 지지해왔다.[8] 바스크-프랑스 시장의 64%가 이를 지지한다.[9] Association des Élus프랑스어[10]는 정치적 스펙트럼 양쪽에서 활동하는 협회로, 피레네-아틀랑티크 주를 바스크와 베아른 주로 분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94년 프랑스 바스크 지방 개발 위원회가, 1995년 프랑스 바스크 지방 선출직 위원회(Association des Élus du Pays Basque프랑스어)가 창설되었다.

2005년 1월 15일, (바스크 지방 농업 회의소)[11]가 창설되어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축산업자와 농업인들의 이익을 대표하고 증진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그 기능이 규제되고 아키텐 지역 위원회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

2012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모든 도시를 위한 단일 공동체 창설을 제안했고, 2016년 5월 2일에 승인 조건을 충족했다.[12]

2017년 1월 1일, 바스크 지방 도시 연합[13][14]이 창설되었다. 이는 광역 자치 협력 기구(EPCI)로서, 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지만 프랑스 주보다는 적은 공식적인 영토 행정 구조이다. 10개의 도시 연합과 159개의 바스크 코뮌 중 157개, 그리고 하나의 베아른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의 목표는 두 부분으로 나뉜 옛 바스크를 통합하고 독립을 목표로 하는 바타수나와 바스크인의 미래를 바스크인이 결정할 권리를 요구하는 기타 민족주의 정당으로 나뉜다.

1960년대부터 바스크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Abertzaleen Batasuna(fr)[47]는 피레네-아틀란티크주를 ''바스크주''(département basque)와 ''베아른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스크 민족주의당의 프랑스령 바스크 지부 정당), 바스크 연대당(약칭 EA), 바타수나는 역사적으로 지방 선거에서 1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Iparretarrak(en)이라는 민병 조직이 바스크 독립을 요구하며 활동했지만, 지난 10년간은 활동이 정체되어 있다.

6. 문화

1800년대 중반은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를 그리워하며 쇠퇴하던 시기였다. 바스크인들은 공화주의자와 세속주의 자코뱅(샤호가 지지했던 미묘한 입장을 제외하고), 왕당파(전통적인 가톨릭교도)로 나뉘었는데, 결국 왕당파가 이 지역에서 우위를 점했다.[29] 주요 경제 활동은 양치기, 소규모 광업, 농업이었으며, 현지인과 비바스크인을 포함한 세관 관리들의 수가 늘어났다.

1864년 엔다예에 철도가 들어왔고(1880년 모레옹), 바스크 지방 외부로부터 화물과 사람의 이동이 증가하여 특히 해안 지역에서 비바스크인 인구가 증가했는데, 비아리츠가 가장 두드러진 경우였다.[29] 1854년부터는 상류층 관광이 활성화되었는데, 유제니 드 몽티조와 같은 고위 귀족들이 온천에서 치료 목욕을 하고 자연을 즐기기 위해 캄보, 생장드뤼, 비아리츠, 엔다예 등을 찾았다.

1851년, 바스크-아일랜드 출신 학자 앙투안 다바디(안톤 아바디아)가 조직한 첫 번째 로레 호코악eu(복원된 꽃 축제)이 우루냐에서 열렸고, 1897년까지 여러 차례 더 개최되었다. 남부 바스크 지방의 다른 정치적, 문화적 사건들이 프랑스 바스크 지방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교회 관련 단체들(와 같은 정기간행물, 1887년)은 여전히 바스크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바스크어가 더욱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지역 및 가정 환경에 국한되게 되었다. 1914년, 바스크어는 모레옹 시장(수울)에서 지역 중산층 및 상류층 고객들이 사용하던 상거래 언어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바스크 청년들은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국경 너머 기푸스코아와 비스카이아는 유럽 전쟁 지원에 필요한 조선 및 철강 가공 산업으로 번창했지만,[30] 49세 미만의 대륙 바스크인들은 프랑스 북동부의 전선으로 가야 했다.[31] 참호전이 벌어지면서 수천 명의 바스크인들이 군 복무를 거부하고, 탈영하여 남부 바스크 지방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도망쳤다.[32] 전쟁은 큰 피해를 입혔는데, 6,000명이 전선에서 사망했으며, 이는 프랑스 바스크 인구의 3%에 해당한다.[33] 또한 주간지 ''에스쿠알두나''는 "신은 프랑스를 옹호한다"는 논조를 통해 바스크인의 정신 속에 프랑스 국가의 일원이라는 개념을 강화했다.[34]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 바스크 지방은 점령된 프랑스의 일부였고 해안은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요새화되었다.

지난 200년 동안, 이 지역의 인구는 완만하게 증가했다. 1801년 126,493명, 1851년 162,365명, 1979년 226,749명(라부르 79%, 로어 나바레 13%, 수울 8%), 1990년 259,850명(각각 81%, 13%, 6%), 1999년 262,000명이었다. 1997년 1월 29일, 이 지역은 바스크 지방|italic=no프랑스어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공식 ''페이''로 지정되었으며, 여러 활동을 촉진하는 대표 기구가 있지만 자체 예산은 없다.

7. 경제

북바스크 지방에는 29,759개의 기업이 있으며, 인구 1,000명당 107개의 기업이 있고, 2004년과 2006년 사이에 연간 4.5%의 성장률을 보였다.[43]

기업의 66.2%는 3차 산업 (서비스업), 14.5%는 2차 산업 (제조업), 19.3%는 1차 산업 (주로 농업, 농업, 어업 및 임업)에 종사한다. 여기에는 AOC 와인인 이룰레기 AOC가 포함된다.

북바스크 지방은 대부분의 행정 기관에서 피레네-아틀랑티크의 일부이지만, 자체 상공 회의소(CCI 바욘-페이바스크)를 가지고 있으며, 바스크 해안에 기반을 둔 퀵실버 및 볼컴과 같은 기업을 포함하는 보드 스포츠 산업을 중심으로 한 별개의 경제를 가지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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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Basque Eurocity http://www.espaces-t[...] French Govt 2017-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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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Loi n° 99-533 du 25 juin 1999 d'orientation pour l'aménagement et le développement durable du territoire et portant modification de la loi n° 95-115 du 4 février 1995 d'orientation pour l'aménagement et le développement du territoire https://www.legifran[...] République Française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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