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애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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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인애국단은 1931년 김구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결성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일본 요인 암살을 목표로 이봉창 의거(1932.1.8)와 윤봉길 의거(1932.4.29) 등 의거를 실행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한인애국단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며, 1930년대 후반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 단원들의 유해가 봉환되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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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한인애국단 |
한자 명칭 | 韓人愛國團 |
로마자 표기 | Hanin Aegukdan |
다른 이름 | 의생군 |
다른 이름 (한자) | 義生團 |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 | Uisaenggun |
창립자 | 김구 |
창립일 | 1931년 |
해산일 | 1932년 5월 |
소속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본부 | 상하이, 중화민국 (1912-1949) |
이념 | 한국 독립 운동 |
규모 | 약 80명 |
적대 세력 | 일본 제국 |
주요 활동 | |
공격 | 사쿠라다몬 사건 (1932) 훙커우 공원 의거 |
2. 역사
1910년 일본 제국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1] 내분과 재정난으로 1931년에는 붕괴 직전에 놓였다.[2]
1931년 5월, 이봉창은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입하려 했으나, 김구는 단체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만류했다.[2] 같은 해,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구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과 중국 농민 간의 분쟁이 과장되어 반중 감정이 격화되었고,[2] 만주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는 한국 독립 운동의 침체를 극복하고 한국과 중국의 단결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2][4][3]
2. 1. 결성 (1931)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와 김호 등,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하였다.1931년 10월 김구는 미주 동포의 호응을 바탕으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을 강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 항일무장투쟁단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간부는 단장인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 이수봉, 김석, 안공근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만, 최흥식, 유상근 등이었다.[2][3][4]
1931년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김구는 침체된 한국 독립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단체 창설을 제안했고, 국무회의는 이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처음에는 조소앙이 이 단체를 의생군(義生軍)이라고 명명하고 김구를 단체의 지도자로 임명했으나, 김구가 잠든 사이 아이가 이름이 적힌 종이를 찢어 김구가 직접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체 예산의 절반을 배정받았고, 임무 수행 방식에 대해 상대적인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단체 구성원은 약 80명이었다.[2][3]
2. 2. 주요 활동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1931년에 설립한 조직으로, 일본 주요 인물 처단을 목표로 했다.[5] 주요 활동으로는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가 있다.1932년 1월, 이봉창은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0월 10일 처형되었다.[5][6]
1932년 4월,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등 여러 일본군 고위인사를 사상케 하였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은 "백만 명의 중국 군인이 실패한 일을 한 명의 한국인이 해냈다"며 높이 평가했다.[7][8][9]
그 외에도 1932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이 일본 비행기 격납고 및 탄약고 폭파를 계획했으나 1월 28일 사건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유진식과 이덕주가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11][12][13][8] 5월에는 조선공산당이 혼죠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 우치다 고사이 남만주 철도 사장 등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5]
2. 2. 1. 이봉창 의거 (1932. 1. 8)
1931년 말, 김구는 일본어에 능통한 이봉창을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봉창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적국의 수괴를 처단하겠다는 내용의 선서문을 작성하였다.[27]이봉창이 천황 암살에 대한 의지를 보이자, 김구는 히로히토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이봉창은 상해를 출발, 12월 19일 고베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1월 8일 관병식이 거행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봉창은 김구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28]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가 일어났다. 이봉창은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國民日報)》는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撃日皇不幸不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았다. 다른 중국 신문들도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일본의 항의로 폐간당하기도 했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일왕을 폭살하지는 못했으나, 완바오산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을 호전시키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28]
이봉창은 체포되어 1932년 9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29]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30][5][6]
2. 2. 2. 출운도 (이즈모호) 폭파 미수 (1932. 2)
죄송합니다. 주어진 원문 소스에는 '출운도 (이즈모호) 폭파 미수 (1932. 2)'에 대한 내용이 없어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2. 3. 일본군 비행장 폭파 미수 (1932. 3)
1932년 3월 25일 10시 5분, 일본군 비행장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실종되었으며, 1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비행장을 폭파시킨 사람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3일, 조선공산당(KPO)은 일본 비행기 격납고와 탄약고를 폭발물로 파괴하는 작전을 계획했으나,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이 패배하면서 실행하지 못했다.2. 2. 4. 조선총독 암살 미수 (1932. 3)
김구는 윤봉길 의거 직전 한인애국단 단원인 이덕주, 유진만을 국내로 파견해 조선총독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하라고 지시하였다.[11][12][13][8] 1932년 4월 이덕주와 유진만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계획을 실행하다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거사는 실패했다. 이덕주는 7년형을 선고받은 후 3년 뒤 1935년 2월 해주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유진만은 광복 후까지 조용히 살다가 별세했다.2. 2. 5. 다롄 의거 미수 (1932. 5)
김구는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사장 우치다 고사이 등을 암살하기 위해 유상근, 최흥식을 다롄으로 파견하였다.[16] 1932년 4월 25일에 유상근은 윤봉길이 사용했던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하이를 떠나 5월 4일 다롄에 도착했고 이성발 형제, 최흥식과 거사를 준비하던 중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발각되는 바람에 최흥식이 체포되었다.[16] 고문과 심문으로 유상근의 거처를 알아냈고 유상근 마저 체포되었다. 이성발 형제도 유상근이 체포된 지 다음 날 체포되었다.[16] 거사는 실패했고 유상근은 뤼순감옥에서 13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옥사하였고,[17] 최흥식은 수감 중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정확한 순국일은 알 수 없다.2. 2. 6. 윤봉길 의거 (1932. 4. 29)
1932년 2월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천궈푸(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했다. 3월 3일 김구는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져 포기하였다. 얼마 후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파견하기로 하였다.1932년 4월 26일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내용의 선서문을 작성하였다.[31]
1932년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아침식사를 하였다. 윤봉길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영원한 이별의 기념으로 김구에게 건네고, 오전 7시경 거사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32] 이날 일본 제국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윤봉길 의거(훙커우 공원 사건)가 거행되었다. 윤봉길은 상해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河端貞次)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 일본 제국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거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한인의 반일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커다란 고무작용을 하였으며, 소식을 접한 중국인들은 모두 윤봉길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장제스가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고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33]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에게 총살형이 집행되었다.[34]
1932년 4월 29일, 한국독립당 당원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주최 행사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윤봉길은 자살용으로 두 번째 폭탄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그는 군중에게 린치를 당할 뻔했지만,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구출되었다.[7] 이 사건은 큰 주목을 받았고,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악명 높게 만들었다.[8] 장제스(Chiang Kai-shek) 중화민국(1912-1949) 총통은 "백만 명의 중국 군인이 실패한 일을 한 명의 한국인이 해냈다"고 말했다.[9] 장제스는 1945년까지 한국독립당에 자금과 보호를 제공했다.[5][10]
2. 3. 거사 이후
1932년 4월 말 상하이 폭탄 테러 이후, 한국독립당과 특히 김구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김구의 공격 계획 참여는 상하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일본 정부 기관은 그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60만엔의 현상금을 걸었다.[18][19][20] 일본 경찰 당국은 한국독립당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기 위해 서둘렀으며, 김구를 포함한 많은 한국독립당 관계자들은 1939년까지 여러 차례 거처를 옮기며 피신했다.[18][19][20] 한국독립당의 존재는 1932년 10월 김구가 공격 계획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2]이 사건으로 한국독립당의 활동은 심각하게 방해받았으며, 1939년까지 정상적인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21] 한국독립당은 1932년 이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 공격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친일파 옥관빈 등의 암살로 이어지기도 했다.[22]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이 공격으로부터 중국과 한국의 관계 개선이라는 이득을 보았다.[23][24] 1932년 이전 한국독립당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어 주로 기부금에 의존했으나, 중국 국민당은 1934년부터 한국독립당에 자금과 보호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는 1945년 한국 해방까지 계속되었다.[5][10]
2. 3. 1. 김구 피신 및 장제스와의 제휴 (1932)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는 군무부장 김철과 함께 행동하며, 교통대학 체육교사였던 한국인 선궈췐(신국권)의 주선으로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였다.[35]1932년 5월 9일, 김구는 상하이의 여러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자신임을 밝혔다.[36][37] 이후 일제는 김구에게 60만엔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의 배후에 임시정부의 김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구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아졌고, 임시정부로 들어오는 자금도 늘어나 재정난이 해소되었다.
김구가 일제에 수배되자,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진과부)에게 김구를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천궈푸는 상하이의 피치 박사 집에 숨어 있던 김구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조직부에서 일하던 샤오정(소쟁)에게 이 일을 맡겼다. 샤오정은 평소 잘 알던 추푸청(저보성)에게 부탁했다. 추푸청은 중국 국민당 당원이자 저장성(절강성) 주석을 지낸 자싱(가흥)의 유지였다.[38]
1932년 5월 14일,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를 거쳐 자싱으로 이동해 추푸청의 집에 피신했다.[35] 이후 장제스-천궈푸-샤오정-김구 간의 연락망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주로 편지로 연락했는데, 중국 국민당의 공패성이 남경과 자싱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했고, 중국 국민당에서 일하던 박찬익도 이 역할을 맡았다. 천궈푸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38]
1931년 김구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을 설립했다. 이들은 일본 국내와 중국 등지에 단원을 보내 암살과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사쿠라다몬 사건과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이 있다.
상하이 폭탄 테러 이후, 김구와 한국독립당(KPG)은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김구의 공격 계획 참여는 상하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일본은 김구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한국독립당의 존재는 1932년 10월 김구가 공격 계획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비밀이었다.[2]
이 사건으로 한국독립당의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고, 1939년까지 정상적인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21] 1932년 이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이득을 보았다.[23][24] 중국 국민당은 1934년부터 한국독립당에 자금과 보호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는 1945년 한국 해방까지 계속되었다.[5][10]
2. 3. 2. 언론 활동 및 해체 (1935~1936)
1935년 12월 19일 한인애국단 명의로 구국운동에 나선 중국 학생대표들에게 보내는 글(「한인애국단에서 中華全國來京학생대표에 보내는 글」)이 발표되었다.[25] 이날은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날이다.[25]1936년 3월 1일에는 한인애국단 명의로 「3 · 1기념일에 대한 격문」이 발표되었고,[25] 4월 29일에는 한인애국단 명의로 「한인애국단이 중국혁명동지에게 삼가 고하는 글」이 발표되었다.[25] 4월 29일은 훙커우 공원 의거를 결행한 날이다. 8월 29일에는 한인애국단 명의로 「國恥紀念日에 愛國同志에 檄함」이 발표되었다.[26]
이러한 공식 활동 이후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2. 4. 해체 이후
한인애국단은 193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약화되었지만, 그 정신은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단원들의 의열 투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광복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 단원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는 과정은 국민적인 관심사였다.2. 4. 1. 7의사 유해 환국 (1946)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와 김청광, 김석영, 홍성주, 박상조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했다.[39] 이 중 윤봉길과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원이었다.
1946년 6월 15일 낮 12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추도회가 열렸다. 추도회 후 유골은 봉안소에 안치되었고, 김구 총리 일행은 당일 동래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부산발 해방호 열차에 유골을 싣고 출발하였다.[40]
1946년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3열사의 유해를 모신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장의 안내로 귀빈실에서 잠시 휴식한 다음, 소년군을 선두로 태고사에 유해가 안치되었다.[40][41]
1946년 7월 7일 아침, 수만 명의 시민이 태고사(太古寺)에 운집했고, 국민장 행렬은 오전 10시 삼의사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과 함께 효창공원으로 향하였다.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을 비롯한 각 정당, 단체, 학교 대표자 등 5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행렬은 안국정 사거리, 종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에 이르렀고, 금정(錦町, 현 용산구 효창동)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봉창의 출생지이다. 효창공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2시 40분이었다. 오후 2시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된 후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42]
3. 서훈
인물 | 서훈 내용 |
---|---|
이봉창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윤봉길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이덕주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유상근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최흥식 |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유진만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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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奉昌 宣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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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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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인 애국단의 의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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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0 30권 한인애국단 Ⅲ(재판기록) > 李奉昌 재판기록 > 5. 판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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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李奉昌 사형집행 금 10일 오전 9시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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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宣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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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광복을 위한 중국정부의 지원에 대한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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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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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인 애국단의 의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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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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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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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金九 일파의 기타 동정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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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虹口公園 폭탄투척사건 주모자 金九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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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金九, 자신이 虹口公園 폭탄투척사건의 주모자임을 스스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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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2권 대중국 외교활동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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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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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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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거행, 유해는 서울 태고사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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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6-16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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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김구 등 담화와 安慰式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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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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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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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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