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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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1938년 창단된 일본의 프로 야구팀으로, 난카이 전기 철도를 모체로 시작하여 여러 차례 팀명과 연고지를 변경했다. 난카이 호크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거쳐 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이르렀으며, 퍼시픽 리그에서 22번, 일본 시리즈에서 11번 우승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 시리즈 4연패를 달성하는 등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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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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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영문 명칭 | Fukuoka SoftBank Hawks |
일본어 명칭 |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
창단일 | 1938년 2월 22일 |
연고지 | 오사카부 (1952년 ~ 1988년) 후쿠오카현 (1989년 ~ 현재) |
홈구장 |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 |
수용 인원 | 40,142명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 |
별칭 | '타카' (鷹, 매) |
구단 색상 | 혁명 옐로 검정 하양 회색 |
마스코트 | 해리 호크와 호크 가족 |
구단주 | 손 마사요시, 고토 요시미쓰 |
모기업 | 소프트뱅크 그룹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주식회사 |
구단 회장 | 왕정치 |
구단 사장 | 고토 요시미쓰 |
단장 | 미카사 스기히코 |
감독 | 고쿠보 히로키 |
선수회장 | 슈토 우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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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명칭 변천사 | |
이전 팀 명칭 | 난카이군 (1938년 가을 ~ 1944년 5월 31일) 긴키 닛폰군 (1944년 6월 1일 ~ 1945년) 그레이트 링 (1946년 ~ 1947년 5월 31일) 난카이 호크스 (1947년 6월 1일 ~ 1988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9년 ~ 2004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5년 ~ 현재) |
이전 홈구장 | 헤이와다이 구장 (1989년~1992년) 오사카 스타디움 (1950년~1988년) 고시엔 구장 (1948년~1949년) 난카이 나카모즈 구장 (1939년~1947년) 사카이 오하마 구장 (1938년) |
리그 우승 기록 | |
리그 우승 횟수 | 22회 |
리그 우승 연도 | 1946 1948 1951 1952 1953 1955 1959 1961 1964 1965 1966 1973 1999 2000 2003 2010 2011 2014 2015 2017 2020 2024 |
일본 시리즈 우승 기록 | |
일본 시리즈 우승 횟수 | 11회 |
일본 시리즈 우승 연도 | 1959 1964 1999 2003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 기록 |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 횟수 | 8회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 연도 | 2008 2009 2011 2013 2015 2016 2017 2019 |
포스트 시즌 기록 | |
일본 시리즈 출전 횟수 | 21회 |
일본 시리즈 전적 | 11승 10패 |
일본 시리즈 출전 연도 | 1951 1952 1953 1955 1959 1961 1964 1965 1966 1973 1999 2000 2003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 2024 |
아시아 시리즈 출전 횟수 | 1회 |
아시아 시리즈 출전 연도 | 2011 |
플레이오프(전·후기제) 횟수 | 1회 |
플레이오프(전·후기제) 전적 | 1승 0패 |
플레이오프(전·후기제) 우승 연도 | 1973 |
플레이오프(2004-2006) 횟수 | 3회 |
플레이오프(2004-2006) 전적 | 0승 3패 |
플레이오프(2004-2006) 출전 연도 | 2004 2005 2006 |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전 횟수 | 15회 |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적 | 8승 7패 |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전 연도 | 2007 2009 2010 2011 2012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2 2023 2024 |
기타 정보 | |
공식 웹사이트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공식 웹사이트 |
유튜브 채널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공식 유튜브 채널 |
2. 역사
1938년 3월 1일, 난카이 전기 철도를 모회사로 하는 '''난카이 군'''(南海軍)이 창단되었다(운영회사는 "난카이 야구 주식회사").[45] 간사이 사철 계열에서는 한신 전기철도, 한신급행전철(한큐)에 이어 세 번째 프로야구 구단이었다. 호소노 세이와 고바야시 이치조가 난카이의 테라다 신키치 사장과 오하라 에이이치 이사에게 창단을 권유했고, 테라다의 결단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거지는 오사카부사카이시의 사카이 오오하마 구장이었다.
3월 29일에 열린 일본직업야구연맹 총회에서 가입이 승인되었지만, 나고야 킨샤치군의 야마구치 이사무가 반대 의견을 낸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반대 이유는 이미 1937년도부터 8팀으로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카이 군의 출전을 인정하면 9팀으로 개최하게 되어 일정상 1팀은 경기에서 제외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한다. 오사카 타이거스 상무 호소노 세이가 난카이의 가입이 인정되지 않으면 탈퇴도 불사하겠다고 말했지만, 총회에 참석한 서기 노구치 츠토무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러한 험악한 분위기는 없었다고 한다.
연맹과 리그 참가 각 팀은 조건부 가입을 결정했다. 이는 춘계 리그 참가가 개막이 다가오고 있어 일정 편성의 조정이 어려웠던 점도 고려되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수를 보강하고 그 실력을 고려하여 추계 리그부터의 참가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으며, 춘계 리그는 일종의 리그전에 참가할 수 없는 준가입 팀 대우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카이 군은 추계 리그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2. 1. 난카이 전기 철도 시대 (1938년 ~ 1988년)
1938년 난카이 전기 철도를 모회사로 하는 '''난카이군'''(南海軍)이 결성되면서 난카이 호크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간사이 지방에서는 한신 전기 철도, 한신 급행 철도에 이어 세 번째 프로 야구단이었다.난카이군은 일본 직업 야구 연맹 총회에서 조건부 가입 승인을 받고 1938년 추계 리그부터 리그에 참가했다. 첫 공식 경기는 라이온군과의 경기였으나 패배했고, 리그 첫 승리는 나고야 긴코군을 상대로 거두었다. 그러나 첫 시즌은 11승 26패 3무로 8위에 그쳤다.
1939년에는 나카모즈 구장이 완공되었지만, 공식 경기는 주로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렸다. 쓰루오카 가즈토가 홈런왕을 차지하며 활약했지만, 팀은 5위에 머물렀다.
1940년에는 한큐 군과의 경기에서 2대 32로 대패하는 등 선수들의 징병으로 인한 전력 약화로 어려움을 겪으며 8위에 그쳤다.
1941년에는 요쿠 군과 나고야 긴샤치 군의 합병으로 8개 구단 체제가 되었고, 투수진의 활약으로 4위를 기록했다.
1942년에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주력 선수들이 징병되면서 전력이 약화되어 6위에 그쳤다.
1943년에는 선수 부족과 간토 다케오의 병사로 더욱 어려움을 겪으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1944년, 전시 기업 통합 정책에 따라 난카이 철도가 간사이 급행 철도와 합병하여 긴키 닛폰 철도(긴키 닛폰군)가 되었고, 구단명도 '''긴키 닛폰 군'''(近畿日本軍)으로 변경되었다. 선수 부족으로 인해 6개 구단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긴키 닛폰 군은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오카무라 토시아키가 타격왕을 차지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1946년에는 팀 이름을 '''긴키 그레이트 링'''(Kinki Great Ring)으로 바꾸고 JBL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1947년 중반, 난카이가 긴키 닛폰 철도로부터 분리되면서 팀 이름을 '''난카이 호크스|南海ホークス일본어'''로 변경했다.
1950년, 일본 프로 야구(NPB) 재편 후 호크스는 퍼시픽 리그에 배정되었고,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 초창기 20년 동안 10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1959년 일본 시리즈, 1964년 일본 시리즈)을 차지하며 강팀으로 군림했다.
1964년에는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일본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 야구에 진출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는 장기간의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88년 시즌 후 다이에에 매각되어 '''후쿠오카 다이에이 호크스'''(福岡ダイエーホークス)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난카이 시대의 주요 선수로는 노무라 가쓰야, 미나가와 무쓰오, 가도타 히로미쓰 등이 있다.
2. 1. 1. 창단
1938년 3월 1일, 난카이 전기 철도를 모회사로 하는 '''난카이군'''(南海軍)이 결성되었다. 한신 전기 철도, 한신 급행 철도에 이은 간사이 지방의 세 번째 프로 야구단이었다. 한신의 호소노 노보루와 한큐의 고바야시 이치조가 난카이에 야구단 설립을 권유하여 결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같은 해 3월 29일, 일본 직업 야구 연맹 총회에서 난카이군의 가입이 승인되었다. 나고야 긴코군의 야마구치 이사오가 반대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당시 연맹 이사장이었던 스즈키 류지는 "누가 말했는지 확실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8개 구단으로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에, 9팀이 되면 경기 일정이 복잡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오사카 타이거스는 난카이의 가입이 승인되지 않으면 연맹에서 탈퇴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건부 가입이 결정되어 추계 리그부터 합류하게 되었다. 연고지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사카이 오하마 구장으로 결정되었다.
2. 1. 2. 전쟁 전
1938년 7월 22일, 난카이의 첫 공식 경기인 '제2회 요미우리 우승 대회'에서 라이온군에게 패배했다.[45] 8월 27일 추계 리그 개막 후 첫 경기인 도쿄 자이언츠전에서도 패배했다. 9월 6일, 나고야 긴코군을 상대로 리그 공식전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45] 추계 리그 최종 성적은 11승 26패 3무로 8위에 머물렀다.1939년에는 본거지 구장으로 나카모즈 구장이 완성되었으나, 공식전은 주로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이나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렸다. 쓰루오카 가즈토가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선수층이 얇아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리그는 연중 1시즌제였으며, 통합 5위를 기록했다.
1944년, 전시 긴축 정책으로 난카이가 긴키 닛폰 철도와 일시적으로 합병하면서 팀 이름이 '''긴키 닛폰'''(Kinki Nippon)으로 변경되었다.[46]
2. 1. 3. 전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1945년 일본 야구 리그(JBL)가 중단된 후, 1946년에 팀 이름을 긴키 그레이트 링(Kinki Great Ring)으로 바꾸고 JBL 챔피언십을 차지했다.[8] 이 이름은 몬트리올 캐나디언스나 뉴욕 양키스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옛 이름인 야마토를 번역한 것이다.1947년 중반, 난카이가 긴키 닛폰 철도로부터 분리되면서, 오사카에 주둔한 미군들 사이에서도 재미있다고 인기가 많았던 팀 이름을 변경하기로 결정하고, 1988년 팀 매각까지 사용하게 될 '''Nankai Hawks|난카이 호크스일본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8] 팀 이름은 당시 날개 달린 바퀴였던 난카이의 로고에서 따왔다. 콘도르(Condors)라는 이름도 고려되었지만, 팀을 감독하는 난카이 대표가 대머리였기 때문에 거부되었고, 카디널스(Cardinals)도 클럽의 색상을 유지하고 싶어서 거부되어 결국 호크스(Hawks)라는 이름으로 정해졌다.
일본 프로 야구(NPB)가 1950년에 JPBL을 재편성한 후, 호크스는 마이니치 오리온스, 한큐 브레이브스, 도큐 플라이어스, 다이에이 스타즈, 니시테츠 클리퍼스, 킨테츠 펄스와 함께 퍼시픽 리그에 배정되었다.[8] 선수 겸 감독 쓰루오카 가즈토(1946년부터 1958년까지는 야마모토 가즈토(山本和則)로 알려짐)의 지휘 아래, 퍼시픽 리그 초창기 20년 동안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중 하나가 되어 1959년과 1964년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10차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8] 츠루오카는 1946년부터 1968년까지 감독직을 맡았고, 1952년 선수 은퇴 후에는 전임 감독이 되었다.
1964년, 호크스는 유망주 투수 무라카미 마사노리와 다른 두 명의 젊은 선수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싱글A 소속팀인 프레스노 자이언츠(Fresno Giants)에 야구 "교환 학생"으로 보냈다.[9] 같은 해 9월 1일, 무라카미는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셰이 스타디움(Shea Stadium)에 등판하며 일본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 야구에 진출했다.[9]
2. 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대 (1988년 ~ 2004년)
1988년, 다이에 백화점 체인이 구단을 인수하면서 팀명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변경되었다. 다이에는 규슈 지역에 브랜드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호크스는 간사이 지역 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구단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크스는 1997년까지 리그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 4시즌 동안은 이전 라이온스의 홈구장이었던 헤이와다이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다.1993년, 호크스는 후쿠오카 돔(현재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으로 홈구장을 이전했다. 후쿠오카 돔은 일본프로야구(NPB) 최초의 개폐식 지붕 구장이었다. 비효율적인 설계와 높은 운영비, 후쿠오카의 다습한 기후 때문에 지붕은 특별한 경우에만 열렸다.[12][13] 호크스는 후쿠오카 돔 이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제한이 있던 2021년을 제외하고 매년 패시픽 리그 평균 관중 수 1위를 기록했다.[14]
1995년,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팀 재건에 나섰다. 오 사다하루는 200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한 후 단장으로 옮겼으며, 2024년 현재 84세의 나이로 호크스 이사회 의장으로 남아 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네모토 리쿠오 전 감독은 팀 사장으로 임명되어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이시카와 아키라는 조지마 겐지, 사이토 가즈미, 마쓰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다다히토, 가와사키 무네노리, 고쿠보 히로키 등 유망한 아마추어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이시게 히로미치, 아키야마 고지, 구도 기미야스 등 FA 선수 영입도 이루어졌다.
1999년, 호크스는 1973년 이후 처음으로(후쿠오카 팀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주니치 드래건스를 꺾고 1964년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구도 기미야스는 1차전 완투승과 13탈삼진을 기록했고, 아키야마 고지는 1999년 일본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다시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패했다. 2003년, 호크스는 일본 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5년 만에 두 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매 경기 홈팀이 승리했다.
2. 2. 1. 홈런 기록 논란
2001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뛰던 터피 로즈가 오 사다하루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으나,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고의사구를 당하며 기록 경신에 실패했다. 2002년 알렉스 카브레라도 55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고의사구를 당했다.2. 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대 (2005년 ~ 현재)
2005년, 소프트뱅크 그룹에 인수되어 팀명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변경되었다.2011년, 모든 부문에서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며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48]
2014년,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15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꺾고 일본 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 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다.
2024년, 20번째 퍼시픽 리그 페넌트를 확보했다.
3. 팀의 특징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홈구장인 후쿠오카 PayPay 돔의 1루 측뿐만 아니라 3루 측 관중석도 대부분 호크스 팬들로 채워진다. 이는 본거지가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다른 구단의 홈구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팀 팬들이 찾기 힘들고 현지 팬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와는 약 250km, 같은 리그인 오릭스 버펄로스의 교세라 돔 오사카와는 약 600km 떨어져 있다.
2012년 통계 기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주최 경기 1경기 평균 관중 수는 33,933명으로 퍼시픽 리그 1위이다. 전체로 확대하면 요미우리 자이언츠(40,333명)와 한신 타이거스(37,886명)에 이어 3위이다. 1993년 이후 관객 동원이 200만 명에 육박하며, 후쿠오카 돔(현재의 후쿠오카 야후오쿠! 돔)이 개장한 1993년부터 2012년까지 20년 연속으로 주최 경기 관중 수는 퍼시픽 리그 1위를 기록했다.[14]
3. 1. 난카이 시대
1948년 프랜차이즈제 도입 당시 한신 고시엔 구장을 본거지로 잠정 결정했다. 1950년 9월 12일 오사카 구장이 완성되면서 본거지를 이전했고, 같은 해에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후지이데라 구장을 이용했다. 난카이 시대의 팀 컬러는 녹색이었다.난카이 전철이 주요 주주로 있던 마이니치 방송은 1959년 방송국 개국 당시 오사카 구장에서 진행되는 전 경기의 독점 중계권을 체결했다. 이 해 난카이가 일본 제일을 달성하며 1961년 발행된 마이니치 방송의 역사에서는 당시를 '일대 히트'라고 표현했다. 이 성공으로 난카이 측은 TV 중계의 묘미를 알게 되어 1960년 계약에서는 인기를 근거로 방영권료를 크게 인상해 요구했다. 마이니치 방송은 홈 35경기에 대해 우선 방송 계약을 체결했으나, 방영권 상승을 우려해 1961년 난카이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TV 야구 중계 자체를 크게 줄였다(단, 마이니치 방송과의 관계는 규모를 대폭 축소하면서도 다이에에 매각하기 전까지 유지했다). 그 후 도쿄 키국의 발언권이 강해져 간사이 지역에서도 닛폰 TV 방송망 등 주요 키국 계열의 요미우리전 전국 네트워크 중계로, 요미우리와 같은 센트럴 리그 소속 한신 타이거스의 경기를 자주 방송했다. 이 때문에 기존에 퍼시픽 리그 인기가 높았던 간사이에서도 야구 인기가 센트럴 리그로 옮겨갔고, 퍼시픽 리그와 난카이의 인기는 하락했다. 그 결과 난카이의 TV 중계는 더욱 감소하며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한신에 대한 일극 집중으로 한신전 방송 확보를 노리는 방송국들의 관심도 옮겨갔다.
팀 성적이 좋아 오사카에서 호크스 인기가 높았던 시절에도 경영난으로 항상 침체되어 난카이 내 호크스의 입지는 작았다. 일반적으로 철도 회사가 구단을 경영하는 경우, 한신의 고시엔 구장, 긴테쓰의 후지이데라 구장, 세이부의 세이부 돔처럼 모회사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 곳에 구장을 두고 자사 철도 이용객 증가에 기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난카이는 난바라는, 난카이 이외 철도(긴테쓰, 오사카 지하철 등)로도 이용할 수 있는 곳에 구장이 있어 매년 적자를 내고 본사가 보전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당시 전철 노동조합에서 임금 인상 때마다 "야구에 지원할 돈이 있으면 임금을 인상하라", "빨리 구단을 팔아라"라며 흑자 전환되지 않는 구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비슷한 상황은 연선 외부에 생긴 오사카 돔 이전 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도 나타났다).
1938년 3월 1일, 간사이 사철의 난카이 철도를 모회사로 하는 '''난카이 군'''(南海軍)이 창단되었다(운영 회사는 "난카이 야구 주식회사"). 간사이 사철계에서는 한신 전기철도, 한신급행전철(한큐)에 이어 세 번째 프로 야구 구단이었다. 한신의 호소노 세이와 한큐의 고바야시 이치조가 난카이의 테라다 신키치 사장과 오하라 에이이치 이사에게 창단을 권유했고, 테라다의 결단으로 결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탄생 당시에는 『난카이 호크스 40년사』에서 "진통의 고통을 모르는 너그러움으로 울음소리를 냈다"라고 묘사되었다. 본거지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사카이 오오하마 구장이었다.
3월 29일 열린 일본직업야구연맹 총회에서 가입이 승인되었지만, 이 총회 상황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증언이 있다. 당시 연맹 회장 스즈키 류지는 "옛날 일이라 누가 말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나고야 킨샤치군의 야마구치 이사무가 반대 의견을 낸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반대 의견은 이미 1937년부터 8팀으로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카이 군의 출전을 인정하면 9팀으로 개최하게 되어 일정상 1팀은 경기에서 제외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한다. 한편 오사카 타이거스 상무 호소노 세이가 난카이 가입이 인정되지 않으면 탈퇴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총회에 참석한 서기 노구치 츠토무의 보고서에는 그러한 험악한 분위기는 없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선수는 감독과 선수를 합쳐 14명으로 수적으로도 적었다. 그러나 연맹과 리그 참가 각 팀은 조건부 가입을 결정했다. 이는 춘계 리그 참가는 개막이 다가와 일정 편성 조정이 어려웠던 점도 고려되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수를 보강하고 그 실력을 고려하여 추계 리그부터 참가를 인정한다"는 것이었으며, 춘계 리그는 일종의 리그전에 참가할 수 없는 준가입 팀 대우로 시작했다. 따라서 추계 리그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1938년
7월 22일, 남해(南海)의 첫 공식 경기인 '제2회 요미우리 우승 대회' 라이온 군전(고라쿠엔 구장)에서 선발 류세 쇼가 3회 3실점으로 강판되는 등 5대 8로 패했다. 7월 28일, 사카이 오오하마 구장에서 한큐 군과의 '남해 결성 기념 경기'가 열렸으나 3회 2점을 선취했지만 곧바로 우천 취소되었다. 8월 27일 추계 리그 개막 후, 남해의 리그 공식 경기 첫 경기인 도쿄 거인 군전(고라쿠엔)에서 거인에게 3점을 먼저 내준 뒤 남해가 동점을 만들었으나, 구원 등판한 빅토르 스타르힌에게 막히고 결승 타점까지 허용하며 3대 4로 패했다. 9월 6일 나고야 킨샤치 군전(고라쿠엔)에서 3대 2로 승리하며 공식 경기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처음 참가한 리그전에서는 11승 26패 3무로 9팀 중 8위에 그쳤다.
;1939년
이 해 중모즈 구장이 완공되었지만, 공식 경기는 주로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렸다. 응모로 빠진 이와모토 요시유키를 대신해 쓰루오카 히토시가 주장으로 취임했다. 쓰루오카는 첫해부터 10홈런으로 구단 최초 홈런왕을 획득하는 등 활약했지만, 이 해를 끝으로 응모되어 종전까지 팀에 복귀하지 못했다. 리그는 연중 1시즌제가 되었고, 편의상 춘하추 3시즌제가 되었지만, 남해는 춘계, 하계에는 패했지만 추계에는 승리하여 연간으로는 선두 거인과 25게임 차의 5위에 그쳤다.
;1940년
4월 6일 한큐 군전에서 2대 32로 대패했다. 쓰루오카 등 응모로 빠진 주력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승률 .283으로 선두와 45.5게임 차의 8위에 그쳤다. 이 해 유료 입장객 수는 88만 명 가까이로, 이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오프 시즌에는 도쿄 6대학 야구 선수, 한큐에서 이시다 미쓰히코, 요쿠 군에서 온도 마사이치 등을 영입하는 등 이전에는 없었던 선수 보강에 나섰다.
;1941년
요쿠 군과 나고야 킨샤치 군의 합병으로 8개 구단 체제가 되었다. 선수들의 응모는 계속되었고, 투수진은 칸다 타케오와 가와사키 토쿠지 2명이 전 경기의 8할을 던지는 상황이었다. 춘계, 하계는 각각 12승 16패로 패했지만, 추계는 거인과 끝까지 선두 다툼을 벌였다. 이미 거인의 연간 우승이 결정된 후였지만 최종전에서 1게임 차로 거인과 맞붙었으나 2대 3으로 패하며 19승 9패를 기록, 연간으로는 처음으로 승리하며 43승 41패로 4위를 기록했다.
;1942년
전년 12월 시작된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주력 선수들의 응모가 이어졌고, 전력 보강으로 중학교 출신 선수들을 다수 영입했지만, 다음 해부터 주력이 된 베소 아키히코를 제외하고는 전력이 되지 못했다(베소는 이 해 2경기만 등판). 가와사키가 병으로 결장하면서 칸다에게 비중이 더해졌지만, 춘계는 개막부터 23경기까지 거인과 1승 차로 선두를 달렸으나 이후 4연패로 선두 자리를 빼앗겼고, 하계도 개막 5연승 후 12경기에서 1승 11패로 순위가 하락하여 선두 거인과 26.5게임 차의 6위에 그쳤다.
;1943년
가와사키 등이 응모로 빠지고, 전년까지 2년간 팀을 지탱했던 칸다가 7월에 병으로 사망하는 등 전력 저하가 계속되었다. 2년 차 베소가 투수진의 중심이 되어 5월 26일 다이와 군전에서 구단 최초 노히트 노런을 달성[45]했지만, 춘계는 최하위 한큐와 1.5게임 차의 6위에 그쳤고, 하계는 2승 11패를 기록한 7월 29일 감독을 가토 기사쿠로 교체했지만, 이와 전후로 6연패와 4연패를 기록하는 등 6승 19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추계는 개막 2승 1패 후 11연패를 기록한 뒤 반등하지 못하고 구단 역사상 최악의 성적인 승률 .185, 5승 22패 1무로 최하위에 그쳤고, 연간으로도 선두 거인과 28.5게임 차의 최하위에 머물렀다. 투수진은 베소와 마루야마 니사오 2명이 던지는 상황이었지만, 마루야마는 이 해를 끝으로 응모되었다.
;1944년
전시 기업 통합 정책(육상교통사업조정법)에 따라 난카이 철도는 간사이 급행 철도와 합병, 같은 해 6월 1일 긴키 닛폰 철도(近鉄)(킨테쓰)가 되었고, 구단명도 '''긴키 닛폰 군'''(近畿日本軍)(킨키닛폰군)[46]으로 개칭했다.[46] 잇따른 선수 징병으로 1943년에는 20명, 1944년에는 14명(당시 6개 구단을 합쳐도 90명이 채 되지 않음)의 선수로 경기를 치렀다.
이 해에는 니시테쓰 군과 다이와 군이 해산하여 6개 구단 체제가 되었다. 춘계는 3승 12패로 최하위에 그쳤다. 하계는 그동안 5년 연속 우승했던 자이언츠의 에이스 스타루힌[47]이 활동할 수 없게 된 것도 있어, 한때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부진하여 긴키 닛폰은 자이언츠와 동률 3위를 기록했지만, 전 구단에 걸쳐 선수 징병이 잇따르면서 리그전 개최가 어려워져 전전 시대 리그전은 하계로 종료되었다. 긴키 닛폰 군으로서의 마지막 경기는 8월 27일 자이언츠전(고시엔)으로, 긴키 닛폰이 6대 1로 승리했다. 추계에는 9월, 리그전 대신 일본 야구 총진군 우승 대회의 도쿄 대회(고라쿠엔)와 오사카 대회(고시엔)가 개최되었지만, 단독 팀 편성은 어려워 긴키 닛폰은 한큐와 혼성팀을 구성하여 출전했다. 연간 성적은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쳤지만, 오카무라 토시아키가 타율 .369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3. 2. 후쿠오카 시대
1993년, 호크스는 홈구장을 헤이와다이 스타디움에서 북서쪽으로 2.2km 떨어진 후쿠오카 돔(현재의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으로 이전했다.[12] 후쿠오카 돔은 일본 프로 야구(NPB) 최초의 개폐식 지붕 구장이었으며, 2023년 에스 콘 필드 홋카이도가 개장하기 전까지 유일한 개폐식 지붕 구장이었다.[12] 그러나 비효율적인 설계, 높은 운영비, 후쿠오카의 다습한 기후 때문에 지붕은 특별한 경우에만 열린다.[12][13]후쿠오카 PayPay 돔은 1, 3루 측 관중석 모두 호크스 팬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본거지가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고, 다른 구단의 홈구장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호크스는 후쿠오카 돔으로 이전한 이후,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제한을 제외하고 매년 퍼시픽 리그에서 연간 평균 관중 수 1위를 기록했다.[14] 1993년 이후 관객 동원이 200만 명에 육박하며, 후쿠오카 돔 개장 이후 20년 연속으로 주최 경기 관중 수는 퍼시픽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호크스 구단은 세토야마 류조 사장과 그의 보좌진의 감독 하에 신인 선수 발굴 및 육성과 FA 영입을 병행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1995년에는 오 사다하루를 감독으로 영입하여 200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게 했으며, 이후 단장직을 거쳐 2024년 현재 84세의 나이로 호크스 이사회 의장으로 남아 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14]
이시카와 아키라는 유망한 아마추어 선수들을 영입하는 임무를 맡아 조지마 켄지, 사이토 가즈미, 마츠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다다히토, 가와사키 무네노리, 고쿠보 히로키 등을 영입했다. 또한, 아키야마 고지, 구도 기미야스 등 FA 선수 영입도 활발히 진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호크스는 1999년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주니치 드래건스를 꺾고 1964년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구도 기미야스는 1차전 완투승과 13개의 삼진을 기록했고, 아키야마 고지는 MVP로 선정되었다. 200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신 타이거스를 꺾고 우승했다.
202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4연승으로 꺾고 우승하며, 197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후 최초로 3년 이상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기록한 팀이 되었다.
2021년에는 60승 62패 21무로 퍼시픽 리그 4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구도 기미야스 감독이 사임했다.[25]
2022년에는 후지모토 히로시가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야나기타 유키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시즌 초반 8연승을 기록하고, 히가시하마 나오가 무안타 경기를 달성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26][27] 시즌 마지막 날 지바 롯데 마린스에게 패하며 오릭스 버펄로스와 동률을 이루었고, 타이브레이커 결과 오릭스가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28]
2022년 10월 10일, 호크스는 4군(3군 팜팀) 창단을 발표했다.[29] 2023년 시즌을 앞두고 콘도 겐스케, 로베르토 오수나, 아리하라 코헤이를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31][32]
2023년 시즌에는 퍼시픽 리그 3위를 기록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서 마린즈에 패했다. 이후 고쿠보 히로키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아담 워커를 트레이드하고, 야마카와 호타카를 영입했으며, 리반 모이넬로, 카터 스튜어트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33][34][35]
2024년에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9월 23일 20번째 퍼시픽 리그 페넌트를 확보했다.[36] 91승 49패 3무를 기록했으나, 2024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에게 패하며 소프트뱅크 시대 이후 첫 일본 시리즈 패배를 기록했다.
4. 역대 감독
미타니 하치로
가토 기사쿠
가토 기사쿠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9년, 1961년, 1964년, 1965년)
(1959년, 1964년)
(1999년, 2000년, 2003년)
(1999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10년, 2011년, 2014년)
(2011년, 2014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4년)
(2015년, 2017년, 2020년)
(2015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