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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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지섬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6000년경 영국 해협이 형성되면서 유럽 대륙에서 분리되었다. 신석기 시대 농부들이 정착하여 고인돌과 멘히어를 건설했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중세 시대에는 해적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으며, 백년 전쟁 중 프랑스에 점령되기도 했다. 근세 시대에는 중립 특권을 얻었지만, 사략 활동과 이민,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는 석재 산업과 원예 산업이 발전했으나,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금융 산업과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 회복을 이루었으며, 21세기에도 다양한 산업이 공존하며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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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섬의 역사 | |
---|---|
지도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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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기원 |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 |
초기 역사 | 브르타뉴인이 정착 롤로의 통치 |
노르망디 공국 | 933년: 노르망디 공국에 합병 1066년: 잉글랜드 정복 후 잉글랜드 왕의 소유 |
잉글랜드-프랑스 관계 | 1204년: 프랑스가 노르망디 본토를 점령, 건지는 잉글랜드 왕의 소유로 남음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전략적 중요성 부각 |
자치권 획득 | 12세기 후반: 상당한 자치권 획득 자체 법률, 관습, 제도를 발전시킴 |
중세 시대 | 해적과 프랑스의 침략에 시달림 밀수 산업 번성 |
근세 시대 | 영국 내전 당시 왕당파 지지 미국 독립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해상 무역 기지 역할 |
제2차 세계 대전 | 독일군 점령 (1940년 ~ 1945년) 주민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저항 운동을 펼침 |
전후 | 경제 성장과 현대화 관광 산업 발전 |
정치 | |
정치 체제 | 영국 왕실 속령 |
입법 기관 | 건지 의회 |
행정 수반 | 건지 총독 |
지리 | |
위치 | 영국 해협 |
면적 | 약 78 제곱킬로미터 |
지형 | 해안선, 절벽, 해변, 구릉지 |
기후 | 온화한 해양성 기후 |
사회와 문화 | |
언어 | 영어, 프랑스어, 건지 방언 (Guernésiais) |
문화적 영향 | 브르타뉴, 노르만, 영국 문화의 영향 |
경제 | 금융 서비스, 관광 산업, 농업 |
2. 선사 시대
기원전 6000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영국 해협이 형성되면서 오늘날 건지섬과 저지섬의 영국 왕실령이 된 지역이 노르망디의 곶에서 분리되었다.[1] 이후 신석기 시대 농부들이 해안에 정착하여 오늘날 섬 곳곳에서 발견되는 돌멘(고인돌)과 멘히어(선돌)를 건설했다. 이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건지섬에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기원전 6000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영국 해협이 형성되면서 건지섬과 저지섬은 노르망디의 곶에서 분리되었다.[1] 이후 신석기 시대의 농부들이 해안에 정착하여 오늘날 섬 곳곳에서 발견되는 돌멘(고인돌)과 멘히어(선돌)를 세웠다. 건지섬에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두 개의 입상 거석이 있으며, ''L'Autel du Dehus''라는 이름의 돌멘에는 ''르 가르디앵 뒤 통보''(Le Gardien du Tombeau, 무덤의 수호자)로 알려진 돌멘 신이 모셔져 있다.[2]
933년 프랑스 왕 라눌프는 코탕탱 반도와 함께 건지섬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 롱소드 지배하에 두었다.[8] 건지섬과 다른 채널 제도는 중세 노르망디 공국의 마지막 영토적 잔재를 상징한다.[8] 이 섬들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전통적인 칭호는 국가 원수로서 노르망디 공작이었으며, 군주가 여성일 경우에도 남성형 칭호인 '공작'을 사용했다.[9]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 노력의 일환으로, 교황 식스토 4세는 1483년 교황 칙서를 발표하여 건지섬에 "중립의 특권"을 부여했다. 이 칙서에 따라 섬과 그 항구,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범위까지 중립 영토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파문에 처해졌다.[4] 1548년에는 왕실 헌장을 통해 중립성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지위는 약 2세기 동안 유지되다가,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건지섬의 사략 활동을 문제 삼아 이 특권을 폐지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건지섬에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선사 시대 유적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두 개의 입상 거석이 있으며, 생마틴 교회 입구에 있는 ''라 그란 메르 드 침키에르''(침키에르의 할머니)는 특히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또한 ''L'Autel du Dehus''로 알려진 돌멘에는 ''르 가르디앵 뒤 통보''(무덤의 수호자)라는 이름의 돌멘 신이 새겨져 있다.[2]
3.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는 로마인들이 섬에 정착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헤르쿨라네움 지역과 스페인에서 발견된 암포라 유물은 당시 건지섬이 지역 무역뿐만 아니라 장거리 무역망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인트피터 항구에서는 서기 1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창고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같은 항구에서 3세기경의 갈로-로마 시대 선박 난파선이 발견되어 "아스테릭스"라는 별칭이 붙었다.[3] 이 배는 로마 시대의 화물선으로 추정되며, 정박 중이거나 좌초되었을 때 화재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당시 잉글랜드산 은, 브르타뉴산 도자기, 와인 항아리 등이 유럽 서해안을 따라 배로 운송되며 활발히 교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4]
웨일스의 그웬트 왕국 출신으로 후에 브르타뉴 돌(Dol)의 수도원장이 된 성 삼손은 건지섬에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4. 중세
브리튼인들이 브리튼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건지섬을 포함한 채널 제도(옛 이름은 '레누르'[6])를 점령했다. 당시 건지섬은 '사르니아' 또는 '리시아', 저지는 '안지아'로 불렸다. 과거에는 건지섬의 원래 이름이 '사르니아'라고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크섬의 라틴어 이름일 수 있다.[7] 그럼에도 '사르니아'는 섬의 전통적인 명칭으로 남아있다. 고윈트 왕국 출신으로 훗날 브르타뉴 지방 돌의 수도원장이 된 성 삼손은 건지섬에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로 여겨진다.[8] 발(Vale) 지역에는 성 삼손의 조카인 성 마글로르에게 헌정된 예배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서기 968년경에는 몽생미셸의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건지섬 북부에 공동체를 세웠다.
1020년,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는 건지섬을 코탱 자작령과 베생 자작령으로 나누었다. 베생 자작령은 1137년경 후계자 없이 공작에게 귀속되어 '왕의 봉토'(Fief le Roi프랑스어)라 불리게 되었다.[10] 전통에 따르면, 1030년경(또는 1032년) 로베르 1세 공작(정복왕 윌리엄 정복왕의 아버지)이 에드워드 참회왕을 돕기 위해 잉글랜드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건지섬에 피난했다. 그는 성 미카엘 수도원의 환대에 감사하며 현재 '클로 뒤 발레'(Clos du Valle)로 알려진 땅을 수도사들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또한 1061년경 해적들이 섬을 공격하자, 윌리엄 공작은 삼손 다네빌(Samson d'Anneville)을 파견하여 이들을 격퇴하게 했다. 그 공로로 삼손 다네빌은 섬 서쪽 절반을 '아네빌 봉토'(Fief d'Anneville)라는 이름으로 하사받았고, 수도사들은 동쪽 절반인 '르 피에 생 미셸'(Le Fief St Michel)을 받았다. 삼손 다네빌은 노르망디에서 많은 이주민을 데려와 정착시켰으며, 윌리엄 공작은 사우마레즈(Saumarez), 생 마르탱(St Martin) 등 다른 노르만 영주들에게도 건지섬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 무렵 섬 대부분이 경작되었고 10개의 교구로 나뉘었으며, 각 봉토에는 영주와 주민 간의 분쟁을 처리하는 장원 법원이 설치되었다.
다른 설에 따르면,[11] 삼손 다네빌은 윌리엄 공작을 도와 건지섬에서 베생 봉토를 소유했던 나이젤 드 생 소뵈르(Néel de Saint-Sauveur)와 싸웠다고 한다. 나이젤은 1047년 결정적인 발-에-둔 전투에서 패배하여 브르타뉴로 도망쳤고, 그의 건지섬 봉토는 몰수되었다. 이 전투는 시인 와스가 그의 시 《루의 로망》에서 묘사했다. 어떤 설이든 삼손 다네빌은 건지섬의 본격적인 봉건제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여겨진다. 섬의 봉건적 질서는 노르만 정복 이전부터 상당히 규제되어 있었다.
1066년, 윌리엄 정복왕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었지만, 프랑스 왕에게 봉건적 충성을 바쳐야 했기에 건지섬을 포함한 프랑스 내 영토는 별개의 실체로 계속 통치했다.[13] 윌리엄 정복왕 사후 노르망디는 아들 로버트 2세에게, 잉글랜드 왕위는 윌리엄 2세에게 상속되었으나, 1106년 헨리 1세가 노르망디를 다시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령에 통합했다.[14] 이후 건지섬은 잉글랜드 왕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노르망디와 프랑스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1142년경에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가 노르망디 공작을 대신하여 건지섬을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10]
1204년, 존 왕이 필립 2세에게 노르망디 본토를 빼앗기면서 채널 제도는 유럽 대륙과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다.[4] 이 사건 이후 건지섬은 영국 왕국의 왕령으로 남게 되었으며, 1259년 파리 조약을 통해 헨리 3세의 영토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러나 대륙과의 고립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섬에 영향을 미쳤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교역이 제한되거나 금지되었고, 평화 시기에도 대륙의 해적과 해군의 공격을 반복적으로 받았다.[4] 중세 시대 동안 건지섬은 "등화 기술"(거짓 등불로 배를 유인하여 난파시키는 행위)을 사용하는 해적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섬의 방어를 위해 요새들이 강화되었고, 전문 군인들과 함께 건지 민병대가 창설되었다. 민병대는 1331년에 처음 활동 기록이 나타나며, 이후 600년 동안 섬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섬의 모든 성인 남성은 민병대 복무 의무가 있었다. 백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건지섬은 더욱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 1336년과 1337년에는 망명 중이던 데이비드 브루스의 공격을 받았고,[15] 1338년에는 프랑스군이 사크 섬을 점령하여 기지로 삼았다. 1339년부터 프랑스(카페 왕조)는 건지섬 본토를 2년간 점령했으며, 코넷 성은 7년 동안 프랑스군의 수중에 있었다.[4] 이러한 프랑스의 공격은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8]
1348년에는 흑사병이 섬에 도달하여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1372년, 프랑스 왕에게 고용된 아라곤 용병들이 웨일스 출신 망명 귀족 오와인 라우고흐(이본 드 갈르(Yvon de Galles)라는 이름으로 건지섬에서 기억되는)의 지휘 아래 섬을 침략했다. 오와인과 그의 검은 머리 용병들은 훗날 바다 건너에서 온 요정들의 침략이라는 형태로 건지섬의 전설에 흡수되었다.[16]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건지섬 주민들은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고, 1394년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는 섬에 새로운 칙허장을 부여하여 영국 본토에서의 통행료, 관세 및 부과금을 영구히 면제해 주었다.[15]
14세기에는 조선 기술이 발달하면서 항구를 이용한 건지섬의 무역이 증가했다. 때로는 무역 조약을 활용하기도 했지만, 관세 지불을 피하기 위한 밀무역도 성행했다. 당시 건지 선박들은 12ton에서 80ton 규모로 작았으며, 8명에서 20명의 선원이 탑승했다.[4] 전쟁 시에는 적국의 선박을 나포하는 것이 합법적이었으나, 이는 평화 시에도 국적을 가리지 않는 해적 행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1441년에는 건지섬의 자유, 관습, 관례가 Le Précepte d'Assise프랑스어라는 문서에 성문화되었다.[10]
5. 근세
16세기 중반, 건지섬은 노르망디 출신 칼뱅주의 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메리 1세의 가톨릭교 복귀 정책과 개신교 박해 기간 동안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556년, 세 명의 건지 여성(건지 순교자)이 그들의 개신교 신앙을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여성 중 한 명의 갓난아기도 함께 희생되었다.[17] 당시 집행관이었던 헬리에 고셀린은 주변 성직자들의 의견에 따라 아기 역시 어머니의 죄를 물려받았으므로 함께 처형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큰 분노를 일으켰고, 헬리에 고셀린은 결국 섬을 떠나야 했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건지섬에서 가톨릭교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7세기 잉글랜드 내전 시기, 건지섬은 의회파를 지지했다. 이는 섬 내에 칼뱅주의를 비롯한 개혁 교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찰스 1세가 섬의 방어에 소홀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19][20] 하지만 섬 전체가 완전히 의회파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섬의 남서부에서는 일부 왕당파의 봉기가 있었으며, 특히 세인트 피터 포트 항구를 지키는 캐슬 코넷은 총독 피터 오스본 경이 이끄는 왕당파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18] 의회파를 지지하는 세인트 피터 포트 마을은 캐슬 코넷을 지속적으로 포격했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1651년 12월, 캐슬 코넷은 마침내 항복했다. 이는 영국 제도에서 항복한 마지막 왕당파의 거점이었다.[21]
5. 1. 17~18세기 무역과 이민
17세기와 18세기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한 전쟁은 건지섬의 선주들과 선장들에게 유럽 본토와 가까운 섬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기회를 제공했다. 많은 상인들은 사략 면허장을 얻어 자신들의 상선을 면허를 받은 사략선으로 전환했다.[4] 이는 매우 수익성이 높은 활동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초 10년 동안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건지섬 사략선들은 608척의 전리품을 획득했다.[4] 하지만 이러한 활동에는 위험도 따랐는데, 같은 기간 동안 약 50척의 선박이 손실되기도 했다.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박의 지분을 나누어 투자했고(예: ⅛ 지분), 성공할 경우 비용을 제외한 전리품의 일부를 배당받았다. 이 덕분에 배에 직접 타지 않고도 부를 축적한 섬 주민들이 많았다. 투자가 늘면서 선박은 점차 커지고, 더 많은 선원을 태우고, 무장도 강화되었다. 18세기 말, 8년간 지속된 미국 독립 전쟁 동안 건지섬과 올더니 사략선들은 총 221척의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그 가치는 981300GBP(현재 가치로 약 1억 파운드)에 달했다.[4] 건지섬은 영국의 적을 봉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뉴펀들랜드 대구 무역은 1700년경까지 건지섬에게 중요했지만, 작은 건지섬 선박들은 밀수 무역이 더 수익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세기 말 밀수가 감소할 때까지 밀수품을 구매하여 판매하는 사업이 섬에서 성행했다.[4] 밀수가 줄어들면서 합법적인 사략 활동이 가장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17세기 말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저지섬의 치안 판사였던 조지 카터렛에게 북미의 땅을 하사하여 뉴저지로 명명한 사건이나, 채널 제도의 상선들이 뉴잉글랜드를 방문하면서 섬 주민들이 해외에 사업을 설립하고 정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세기 초부터 건지섬 주민들은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22] 대표적인 예로, 1810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이주민들이 건지군을 설립했다.[4]
사략과 이민 외에도 일반적인 무역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어업은 항상 중요한 산업이었다. 편물(뜨개질)은 중요한 가내 수공업이었고, 해외 선적을 통해 목재, 설탕, 럼주, 석탄, 담배, 소금, 섬유, 완제품, 유리, 와인 등 다양한 상품과 함께 이민자들을 운송했다. 주요 교역 대상은 유럽, 서인도 제도, 아메리카 대륙이었다.[4]
6.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의 침략 위협에 대비하여 섬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다. 포트 조지(Fort George)는 이러한 목적으로 건설된 영국군의 주요 주둔지로, 1780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12년에 완공되었다. 이 시기 건지섬은 사략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때부터 이어진 사략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런던에서 발급된 5,632건의 사략 면허장 중 건지섬 선장들이 약 70척의 선박(5~500톤 규모)으로 602건을 받았다.[4] 사략 면허장은 약탈 가능한 선박과 소유주를 명시했으며, 선박들은 더 튼튼하게 건조되고 무장도 강화되었다. 영국은 사략법을 제정하여 전리품 가치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법적 분쟁을 줄이려 했다.
19세기 초, 건지섬은 세계 해상 무역에서의 성공과 석재 산업의 발달로 극적인 번영을 누렸다. 섬의 지형도 크게 변했다. 건지섬 북쪽 끝을 조수 간만의 섬으로 만들었던 조수 해협인 르 브레이 뒤 발(Le Braye du Valle)은 1806년 영국 정부에 의해 방어 목적으로 배수되고 간척되었다. 이 간척지의 동쪽 끝에는 세인트 삼손(St. Sampson's) 항구가 들어섰고 (1820년부터), 서쪽 끝은 르 그랑 아브르가 되었다. 세인트 삼손 항구를 가로지르는 "더 브리지"(The Bridge)라는 도로는 과거 만조 시 두 지역을 잇던 다리의 흔적이다. 군대의 이동 편의를 위해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고 주요 도로는 포장되었다.[27] 이러한 인프라 건설 자금은 1815년부터 무채무 화폐 창출 방식으로 조달되기도 했다.[23]
해상 무역은 섬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나, 증기선의 등장과 함께 항해선 중심의 무역이 쇠퇴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윌리엄 르 라셰르(William Le Lacheur)와 같은 인물은 유럽과 코스타리카 간의 커피 무역을 개척했으며, 코르베 가문은 과일 수출 회사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24] 조선업 역시 184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으나, 철선 건조 요구가 높아지면서 쇠퇴했다.[4] 채석업은 19세기에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했다. 건지섬 화강암은 품질을 인정받아 런던 브리지 건설과 런던의 여러 주요 도로 포장에 사용되었으며, 섬 북부에는 수백 개의 채석장이 생겨났다.[25] 원예업도 발전하여, 초기에는 포도 재배를 위한 온실이 사용되었으나 이후 토마토 재배로 전환되어 1860년대부터 매우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관광 산업이 성장했으며, 건지섬은 피난처나 은퇴 후 정착지로서도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곳에 망명했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마멀레이드를 생산했던 던디의 제임스 케일러 회사(1857-1879)처럼, 영국의 높은 설탕세를 피하기 위해 건지섬에 잠시 기반을 두었던 경공업 기업들도 있었다.[26]
1821년 섬의 인구는 20,302명이었고, 그중 절반 이상인 11,173명이 세인트 피터 포트에 거주했다. 1901년에는 섬 전체 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다.[27] 1813년, 건지섬 의회(States)는 자체 동전 발행 허가를 영국 추밀원에 요청했다. 추밀원은 왕립 조폐국에서 주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인했으나, 1830년에 처음 발행된 동전은 버밍엄의 R. Boulton & Co.에서 제작되었다. 이 때문에 건지 파운드 동전에는 전통적으로 군주의 초상이 들어가지 않았다. 프랑스 통화는 1921년까지 건지섬에서 법정 통화로 사용되었다.[14]
한편, 섬에서는 부랑자, 범죄자, 그리고 '토착민'이 아닌 빈곤층을 추방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1842년부터 1880년까지 약 10,000명이 추방되었는데,[27] 이는 교구의 빈민 구제 부담을 줄이고 외부 빈곤층의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27] 이러한 추방 대상에는 외국인과 결혼한 현지 여성의 자녀나, 건지섬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거주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세기 말에는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오랫동안 저항이 있었지만, 학교에서의 영어 교육 도입,[27] 법원에서의 영어 사용 확대,[27] 선거권 개혁 등이 추진되었다. 또한, 비토착민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 특히 원치 않는 추방이나 경미한 채무 불이행에 대한 즉결 체포 및 구금 관행에 대한 개선 요구도 제기되었다.[27] 당시에는 이민자가 아무리 부유하거나 오랫동안 거주했더라도 토착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7.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약 3,000명의 섬 주민이 영국 원정군에서 복무했다. 이 중 약 1,000명은 1916년 왕립 건지 민병대에서 창설된 왕립 건지 경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28] 1917년 8월, 건지섬은 대잠수함 프랑스 비행정 비행대를 유치하여 코넷 성 근처에 격납고를 설치했다. 이 기지는 25척의 독일 잠수함을 격침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건지 명예의 전당에는 건지 자치령 출신이거나 왕립 건지 경보병에서 복무한 1,343명이 등재되어 있다.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 또한 건지섬에 영향을 미쳤다. 실업자들은 에드워드 8세가 1935년에 개통한 Le Val des Terres를 포함하여 해안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일자리를 얻었다.[30]
7. 1. 제2차 세계 대전
대부분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건지섬 관할구는 1940년 6월 30일부터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점령 이전에 건지섬 전체 인구 41,000명 중 17,000명이 영국으로 대피했으며, 여기에는 건지 어린이들의 80%가 포함되었다. 이 아이들은 전쟁 동안 영국에서 친척이나 낯선 사람과 함께 살았고, 일부는 가족과 재회하지 못했다.[31]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점령한 독일군은 1,000명 이상의 건지 주민들을 독일 남부, 특히 비베라크 안 데르 리스 근처의 ''Lager Lindele''(린델레 수용소)와 라우펜(Laufen)의 Oflag VII-C 근처 수용소로 추방했다. 추방된 사람들 중에는 국무 통제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민간인들의 ''사실상'' 수장이었던 앰브로스 셔윌 경(후에 서 앰브로스 셔윌)도 있었다. 건지섬 출신인 셔윌 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군에서 복무했으며 나중에 건지섬 치안 판사가 되었다. 유대인 혈통의 섬 주민 3명은 프랑스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32] 올더니에서는 강제 노동자(대부분 동유럽 출신)를 수용하기 위해 4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는데, 그 중 2개는 SS가 운영했다. 이들은 영국 땅에서 운영된 유일한 강제 수용소였으며, 올더니의 프랑스어 이름인 '오리니' 아래 기념물로 기념된다.
점령 법률은 독일 수비대에 의해 시행되었다. 예를 들어, 벽과 건물에 "V-for Victory" 표시를 칠하는 사람을 신고한 정보원에게는 보상이 주어졌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려는 섬 주민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관행이었다.[33]
건지섬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섬의 전략적 가치에 비해 매우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예를 들어 4문의 노획된 구식 러시아 305mm 해군 대포가 바테리 미루스에 설치되었다.[34][35] 독일의 방어 시설과 개조는 여전히 눈에 띄며, 코넷 성과 풍차에 추가된 시설이 포함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연합군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섬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대서양 방벽(해상 침략으로부터 유럽 대륙을 방어하려는 나치의 시도) 건설에 사용된 재료의 20% 이상을 채널 제도에 투입했다. 여기에는 포대 건설에 사용된 47000m3의 콘크리트가 포함되었다.[35] 대부분의 독일 요새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일부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36][37]
1944년 말, 독일군이 고립되어 프랑스에서 물자를 가져올 수 없게 되자 기아가 섬을 위협했다. 적십자가 전세낸 SS ''베가'' 호가 적십자 구호품과 기타 필수 물품을 섬으로 가져왔다.[38]
건지섬과 저지섬은 1945년 5월 9일에 해방되었으며, 이 날은 현재 두 섬에서 해방 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7. 2. 전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건지섬 주민들은 삶을 재건해야 했다. 특히 독일 점령 이전에 영국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친척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섬으로 돌아왔다. 점령 기간 동안 많은 건물이 연료로 사용할 나무를 떼어가면서 손상되었고, 섬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다. 관광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성장하던 산업도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철을 과도하게 징수한 것에 대한 후회도 있다. 식량 배급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1940년대 후반, 섬은 점령 기간 동안 건물에 가해진 손상을 수리했다. 어업이나 채석업과 같은 많은 전통적인 사업은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이에 섬 주민들은 다른 기회를 모색했는데, 항구가 작고 운송 비용이 비싸 상품 수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무역 통제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건지 섬 사업체는 마테우스 로제(Mateus (wine)) 와인을 영국에 공급하는 권한을 확보했고, 이 와인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이 되기도 했다.[39]
1960년대에 섬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다. 관광 산업이 다시 중요해졌고, 원예 산업, 특히 토마토 재배가 호황을 누려 한때 연간 5억 개의 토마토를 수출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북해 유전에서 생산된 저렴한 연료가 네덜란드의 토마토 재배자들에게 공급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네덜란드산 토마토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자 건지 섬의 토마토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고, 1970년대 말에는 100년 역사의 토마토 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었다.[40] 한편, 대규모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로 섬으로 이주하는 것을 더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도록 하는 제한 조치가 도입되었다.
토마토 산업이 쇠퇴한 1970년대부터 건지 섬은 금융 산업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성장하기 시작한 금융 사업은 1980년대에 호황을 맞으며 중요한 고용주로 자리 잡았다. 성장 산업에서 사무직 중심 환경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지만, 금융업은 높은 수익과 급여를 제공했고, 섬은 이를 통해 장기적인 자본 지출 계획을 지원할 수 있는 수입원을 확보했다. 1990년대에는 자가 보험 및 펀드 관리와 같은 관련 산업으로 다각화하면서 낮은 실업률을 유지했다.
반면, 1980년대에는 스페인 등 해외 휴양지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관광 산업은 쇠퇴했다. 이에 건지 섬은 고급 관광 시장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경공업 분야에서도 일부 사업체들이 운영되었다. 전자 회사인 텍트로닉스(Tektronix)는 1957년부터 1980년대까지 건지 섬에서 공장을 운영했으며, 안경 체인점인 스펙세이버스(Specsavers)는 1984년 건지 섬에서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건지 섬의 영국과의 헌법 및 무역 관계는 브렉시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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