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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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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는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건설된 건축물들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를 위한 행정 기구였으며, 청사와 관저는 그 권위를 상징했다. 청사는 1926년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헐고 완공되었으며, 관사는 남산과 용산, 경복궁 북쪽에 차례로 지어졌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총독부의 주요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청사, 대한민국 정부 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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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조선총독부 청사
다른 이름정부-총독부 건물
서울 캐피톨
캐피톨 홀
로마자 표기Joseon-chongdokbu Cheongsa
한자 표기朝鮮總督府廳舍
다른 한자 표기朝鮮總督府建物
로마자 표기 (다른 이름)Joseon-chongdokbu Geonmul
위치종로구, 서울, 대한민국
건축 양식신고전주의 건축
착공일1916년 6월 25일
완공일1926년 10월 1일
철거일1995년 8월 15일 – 1996년 11월 13일
건축가게오르크 데 랄란데
노무라 이치로
쿠니에다 히루시
이미지
1929년 건물의 모습
1929년 건물의 모습

2. 역사

일제는 강제 병합 이후 식민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운영하며 청사와 관사를 건립하고 사용하였다. 초기 총독부 청사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했던 구 통감부 건물을 사용하였으나,[7] 이후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흥례문 일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14] 1926년 완공된 경복궁 내 총독부 청사는 식민 통치의 상징적 건물로 기능하였다.[24]

총독 관저 역시 여러 곳에 건립되었다. 초기에는 남산 왜성대의 구 일본 공사관 건물을 통감 관저 및 총독 관저로 사용하였는데,[46] 이곳은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 병합 조약을 체결한 장소이기도 하다.[49] 이후 용산에도 호화로운 관저가 건립되었으나,[53] 주로 귀빈 접대용으로 사용되었다.[54] 1939년에는 경복궁 후원(현재 청와대 부지)에 새로운 총독 관저인 경무대가 완공되어 사용되었다.[55][58]

광복 이후, 경복궁 내 총독부 청사는 미군정청 청사, 대한민국 정부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활용되다가,[30][33][37]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5년, 민족정기 회복을 명분으로 철거 작업이 시작되어 1996년 완전히 철거되었다.[41][44] 총독 관저 중 왜성대 관저와 용산 관저는 각각 해방 이후 철거되거나 6.25 전쟁 중 소실되었으며,[52][54] 경무대 관저는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로 사용되다가 1993년 철거되었다.[55]

2. 1. 일제강점기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주권을 상실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로써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조선 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한성은 식민 통치의 중심지인 경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은 식민 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그 청사와 관사는 식민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1]

조선총독부는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에 있던 구 통감부 청사를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1907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2층 목조 건물이었으나,[7] 공간 부족으로 증축되기도 했다.[9] 왜성대 청사는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부였기에 독립운동의 목표가 되기도 했는데, 1922년 김익상 의사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 잠입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키기도 했다.[10]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고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내에 새로운 청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의향에 따라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는 경복궁의 정문인 흥례문과 그 일곽을 철거하고 그 자리를 청사 부지로 선정하였다.[14] 이는 경복궁의 경관을 가로막고 조선의 민족정기를 억누르려는 의도가 명백한 배치였다. 해당 부지는 이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명목으로 철거된 상태였다.[15] 1926년 완공된 경복궁 신청사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식민 지배의 권위를 과시했다.[23][24]

한편,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 관리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들을 위한 관사 건설도 본격화되었다. 탁지부 건축소 등을 통해 관사 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는 늘어나는 일본인 관료를 수용하고 식민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총독부 관사는 거주자 직급에 따라 규모는 달랐으나, 대체로 일본식, 서양식, 그리고 한국식 온돌을 절충한 구조를 가졌다.[62]

2. 1. 1. 청사



일본대한제국과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20일 통감부 설치를 위한 관제를 공포하였다. 통감부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서 개청식을 열었다.[7] 처음에는 광화문 육조거리에 있던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청사를 사용하다가,[8] 1907년 2월 28일 남산 왜성대(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 일대)에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 건물로 통감부 청사를 새로 지었다.[7]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본은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조선총독부 청사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비좁아 1910년에 증축 공사를 하여 기존의 ‘一’자형 건물을 ‘口’자형으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사무 공간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1911년에도 별도의 증축 공사가 진행되었다.[9] 일제 강점기 동안 왜성대 총독부 청사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20년에는 조선 총독 암살 및 총독부 파괴 계획이 미수에 그쳤고, 1922년에는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청사에 잠입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다.[10]

광화문통에서 바라본 청사


1926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내에 신청사를 완공하여 이전하였다.[24] 기존 왜성대 청사는 1925년 다이쇼 천황의 결혼 25주년 기념 은사금 17만을 이용하여 은사기념과학관으로 개조되어 1927년 5월부터 사용되었다.[11] 광복 이후 1945년 10월 국립과학박물관으로, 1948년 국립과학관으로 개칭되어 사용되다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12] 현재 옛 터 부근인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 도로변에는 1995년 9월 ‘김익상의사 의거 터’ 표석과 2003년 12월 ‘통감부 터’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13]

조선총독부 신청사 부지로는 현재 종로구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자리와 서울특별시청 자리 등이 거론되었으나,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에 의해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 흥례문 구역이 부지로 선정되었다.[14] 이는 조선의 상징적인 공간을 훼손하여 식민 통치의 위세를 과시하고 민족정기를 억누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해당 구역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으로 사용된다는 명목 하에 청사 신축 이전에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15]

청사 설계는 조선호텔을 설계했던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부터 착수하여 기초 설계를 마쳤으나 1914년 사망하였다.[16] 이후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구니에다 히로시 등이 설계를 완성하였다.[17] 공사는 총독부 직영 체제였으나, 1차 공사는 일본 건설 회사 오쿠라구미(현 다이세이건설), 2차 공사는 시미즈구미(현 시미즈건설) 경성지점이 시공하였다.[18] 1916년 6월 25일 신토 방식으로 지진제를 지내고,[24] 같은 해 7월 10일 착공하였다.[20] 1920년 7월 10일에는 제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휘호가 새겨진 정초석을 설치하는 정초식을,[19] 1923년 5월 17일에는 상량식을 거행하였다.[20] 1926년 1월 4일 건물이 완공되어 시용식을 가졌고,[24] 같은 해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춰 낙성식을 열었다.[21]

총독부 청사 신축은 당초 5개년 계획과 예산 300만으로 시작했으나, 완공까지 10년이 걸렸고 총 675만의 예산이 소요되었다.[22] 건축 과정에는 조선총독부 토목부 건축과 기수였던 박길룡, 이훈우 등 조선인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참여했으며, 일본인 및 중국인 석공 300명과 연인원 2백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20]

완성된 총독부 신청사는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23] 건물은 안뜰을 둔 ‘日’자형 평면에 지상 4층(지층 포함 5층) 규모로, 총 건평은 9,600여 평에 달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벽을 채우고 외부는 화강석으로 마감했으며, 중앙에는 돔을 얹었다. 르네상스 양식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식민 지배 기구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청사 준공과 함께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궁궐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강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넓은 광장이 조성되었다.[24] 건축에는 조선에서 나는 목재, 화강석, 대리석, 석회 등을 주로 사용했고, 공예품이나 조각 등 장식재는 해외에서 수입하기도 했다.[25] 조선은행 본점과 조선호텔에 이어 조선에서 세 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26]

청사 중앙홀 남북 벽면에는 일본인 서양화가 와다 산조가 제작한 벽화 《하고로모》(羽衣)가 설치되었다. 이 벽화는 금강산 선녀 전설과 일본의 하고로모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두 전설의 유사성을 강조하며 당시 조선총독부의 통치 이념인 내선일체를 상징하도록 의도되었다.[27][28] 이 벽화는 1995년 청사 철거 시 분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27] 중앙홀에는 벽화 외에도 일본인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가 제작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29]

2. 1. 2. 관사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제4조에 따라 일본은 조선 정부에 공사관 부지와 건물 공사비를 요구하였다. 1893년에 남산 북쪽(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2-1)에 공사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06년 2월에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07년 1월에 통감부가 남산 왜성대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면서 기존 청사는 통감 관저로 전용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46]

1907년 10월 16일에는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관저를 4일간 숙소로 이용하였다.[47] 1908년에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새로운 통감 관저 설계를 맡았으나, 같은 해 용산에 새로운 통감 관저가 들어서면서 계획에 그쳤다.[48]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이 관저 2층에서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 병합 조약을 조인하는 치욕적인 역사가 있었다.[49]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가 경복궁 뒤편의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 왜성대 총독 관저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 및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개편되어 1940년 11월 22일에 개관식을 거행하였다.[50] 시정기념관으로 개관하면서 강제 병합 조약을 체결한 공간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인 병합조인실이 설치되기도 하였다.[51]

광복 이후 1946년 4월 25일, 민속학자 송석하의 주도로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나 1950년에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흡수되었다. 1954년 6월 연합참모본부가 신설되자 청사로 사용하였고 국립박물관은 석조전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건물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다목적 광장이 건물 위치로 추정된다.[52]

용산 관저 주변 지도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908년, 러일 전쟁 이후 남은 군비잉여금을 사용하여 건축한 것으로 알려진 총독 관저이다.[53] 현재 용산 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관저 부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지번으로는 한강통 11-43에 해당한다.[54] 일설에는 1912년에 하세가와가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하세가와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조선 총독으로 재직하였으므로, 관저는 하세가와가 조선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 소장 관련 도면 중에도 1907년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53]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가 설계하였고, 가타야마는 이 공로로 1908년 6월 대한제국 고종으로부터 훈일등 팔괘장을 수여받았다.[48] 가타야마는 당시 일본에서 아카사카 이궁, 표경관(현재 도쿄 국립박물관 고고유품전시관) 등을 세우며 네오바로크 양식의 궁정 건축을 선도하던 인물이었다. 관저는 2층 건물로, 박공창을 가진 높은 박공지붕과 네오바로크 양식의 입면 장식이 특징이었다.[53] 1908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되었고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54]

용산 총독 관저는 호화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심과 거리가 멀고 전기료 등 유지비 과다, 경비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로 인해 공식 연회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었다.[53] 조선을 방문한 일본 황족이나 서양 귀빈들을 위한 숙소와 연회 장소로 간혹 사용되었으며, 이때마다 대대적인 건물 수리와 조경 공사가 필요했다.[54] 중간에 용산 총독 관저로 관저를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53] 건물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54]

경무대 관저 주변 지도


경무대(景武臺) 총독 관저는 1937년에 착공하여 1939년 경복궁 북쪽 후원(현재 청와대 부지)에 건립되었다.[55] 본래 이곳은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시 지어진 후원 건물 4개 중 하나인 경무대가 있던 자리였다. 조선총독부는 경무대를 비롯한 경복궁 후원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관저의 명칭은 헐린 건물 중 하나인 경무대의 이름을 딴 것으로, 경복궁의 ‘景’과 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武’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56] 1892년(고종 29년)경 그려진 〈수선전도〉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경무대’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57]

1937년 3월 22일 기공식을 시작으로 4월 2일 신축 공사가 시작되어 10월 12일 지진제가 열렸다. 당시 부지의 총면적은 야산을 포함해 171902m2, 관저의 연면적은 1861m2이었다. 1938년에 정초식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13일에 상량식까지 했으나 중일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9월 2일에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다. 1939년 4월 5일에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5일에 준공되어 9월 20일에 낙성식이 있었다.[58]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정면 중앙에 사각 기둥으로 지지되는 캐노피를 두었고 경사 지붕으로 처리하였으며 창문 위쪽에는 차양을 돌출시켰다.[59] 1939년에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왜성대 총독 관저를 시정기념관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총독 관저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58]

1960년대 경무대 모습


광복 이후 총독 관저는 미군정 최고 책임관인 군정장관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은 경무대가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하였다. 명칭은 건물 지붕이 '푸른 기와'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60] 1990년 청와대 본관이 신축된 이후, 구 본관 건물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 10월 15일에 철거되었고[55] 그 자리에는 ‘청와대 구 본관 터’ 기념 표석이 세워졌다.[61]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국내에 일본인 관리가 대거 등용되면서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지어졌으며, 탁지부 건축소의 설립으로 더욱 본격화되었다. 탁지부 건축소가 1910년까지 수행한 공사 중 관사 및 숙사의 비율이 83%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의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관사 건설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심각한 주택 부족에 시달리던 경성부의 주택 보급 안정화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사는 거주자의 직급과 관등에 따라 규모와 시설 등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공통적으로 일본식(일상 생활 공간), 서양식(응접실, 식당, 서재 등 공적 공간), 그리고 한국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한국 전통식(온돌) 공간이 한 주택 내에 절충되어 사용되는 특징을 가졌다.[62]

2. 2.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시절의 청사 (1995년)


철거를 위해 설치된 가림막 (1996년)


1948년 7월 24일, 전 총독부 건물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였다.[30] 같은 날 오후에는 청사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 군단장 존 하지 중장과 제9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열렸다.[31] 미군정은 청사를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렀고, 이를 정인보가 번역하여 중앙청(中央廳)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32]

1948년 5월 10일에는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가 처음 열렸고,[33] 같은 해 7월 24일에는 청사 앞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 선서식이 거행되었다.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열리면서[33]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공식 출범했고, 중앙청은 정부 청사 및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이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유엔군의 서울 수복 직전인 1950년 9월 퇴각하면서 건물에 불을 질러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34] 9월 26일 대한민국 국군이 중앙청을 탈환했지만,[34] 전쟁 이후에도 건물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식민 통치 종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건물을 수리하지 않았다.[2]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1962년 11월 22일,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본청 개청식을 열고 다시 정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35][2] 이후 정부서울청사가 신축되어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정부 기관 건물로 기능했다. 1968년에는 청사 앞의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원래 자리에 광화문을 복원하였다.[36] 1970년대부터는 새로 지어진 중앙청사로 정부 기관들이 이전하기 시작했다.[2]

1981년 5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총독부 건물로 이전하라고 지시했고,[3] 1983년 마지막 국무회의를 끝으로 정부 청사 기능은 종료되었다. 이후 개보수 작업을 거쳐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37][3]

총독부 청사 철거 주장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있었으나 경제적 이유 등으로 보류되었고, 노태우 정부에서도 철거가 추진되다 무산된 바 있다.[38] 1991년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청사 철거 방침을 밝혔으나,[39] 일본의 건축사 연구회가 건축사적 가치를 들어 보존을 요청하기도 했다.[40]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 회복을 명분으로 총독부 청사 철거와 경복궁 복원을 지시하였다.[41] 이 결정은 1994년부터 본격적인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철거 찬성 측은 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며 경복궁을 훼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 측은 역사적 가치와 철거 비용, 건물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 현장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보존 또는 이전을 주장했다.[42][4]

논란 속에서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청사 중앙돔 랜턴 해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철거 보류 동의안을 제출하고,[43] 시민단체가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으나[39]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96년 11월 13일, 청사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다.[44]

철거된 청사의 중앙돔 랜턴과 일부 부재는 천안시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1998년 8월 8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45][4][5] 한편, 청사 건물에서 이전해야 했던 국립중앙박물관은 임시 시설을 거쳐 2005년 10월 28일 용산구 용산가족공원 내 새 건물에서 재개관하였다.[6]

2023년 7월 27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총독부 청사의 그림이 공개되고 있다 (왼쪽)

3. 건축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는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의 상징적 건축물로, 그 건축 양식과 건립 및 철거 과정에서 여러 특징과 논란을 남겼다. 특히 관사는 통감부 설치 이후 늘어난 일본인 관리들을 위해 대량으로 건설되었으며, 한국 전통 양식, 서양식, 일본식 요소가 절충된 독특한 형태를 보였다. 한편, 경복궁 앞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건립 당시부터 풍수 논란, 경복궁 중심축 훼손 문제 등을 낳았으며, 해방 이후 철거 여부를 두고 오랜 기간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3. 1. 양식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 관리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기 시작했고, 탁지부 건축소 설립으로 더욱 본격화되었다. 탁지부 건축소가 1910년까지 수행한 공사 중 관사 및 숙사 건설이 83%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1910년 이후 일제의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관사 건설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경성부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심각한 주택 부족을 겪고 있었는데, 관사의 대량 공급은 이러한 주택난 완화에 일부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관사는 거주자의 직급과 관등에 따라 규모나 설치되는 방의 종류 등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공통적으로 한·양·일 절충식 공간 구성이라는 특징을 가졌다. 이는 일본인을 위한 전통적인 일본식 주거 공간(일상생활 공간)과 근대 서구에서 도입된 서양식 공간(응접실, 식당, 서재 등 공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한국 전통 온돌 난방 방식이 하나의 주택 안에 함께 적용된 형태였다.[62]

3. 2. 논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과정에서 드러난 지반 공사용 나무 말뚝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과 관련해서는 건립 당시부터 철거될 때까지 여러 논란이 있었다.

  • '''대일본(大日本) 형상화 속설'''

북악산,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현재 서울특별시청)의 외관을 조합하면 한자로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하여 풍수지리학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를 상징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63] 그러나 당시 경성부청 설계에 참여했던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 사사 게이이치(笹慶一)는 1926년 《조선과 건축》에서 평면도를 부지 경계에 맞춰 궁형(弓形)으로 설계했다고 기술하여, 설계자는 건물 모양을 ‘本’이 아닌 ‘弓’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63] 또한, 당시 서양 근대 건축에서는 대칭형의 위압적인 평면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건물 안쪽에 안뜰(中庭)을 두는 ‘日’자형 구조가 전형적이었다. 영국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가 설계한 인도 뉴델리의 인도총독부 청사(라슈트라파티 바반)가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건물의 배치가 일본을 상징하는 형태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 '''중심축 훼손 문제'''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벗어난 남북축을 설정하고, 이를 따라 총독부 청사와 광화문, 조선신궁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서울을 재정비하면서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 앞쪽에 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배치했는데, 이는 경복궁의 기존 중심축과 5.7°가량 차이가 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차이가 근대적인 서구식 측량법을 사용한 식민지 시대의 도시 계획과, 풍수지리 및 전통 측량법을 사용한 조선 시대 건축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해의 궤적에 따른 진북과 지구 자기장에 따른 자북이 약 5° 차이가 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중건된 경복궁은 자북을, 총독부 청사와 재배치된 광화문은 진북을 기준으로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65] 하지만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경복궁의 중심축을 무시하고 그 앞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워 궁궐의 경관을 훼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기초 말뚝 설치 문제'''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건물 부지 지하 4.5m 깊이에 박혀 있던 9,388개의 대형 나무 말뚝이 발견되었다. 지름 20~25cm, 길이 4~8m 정도의 이 말뚝들은 가로, 세로 약 6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박은 '쇠말뚝'과 같은 의도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연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건축 공법의 일환으로 설치된 기초 말뚝이었다.[66] 당시 공사 기록에도 백두산압록강에서 가져온 소나무를 터파기 공사 때 지하에 박았으며, 지반에서 솟아나는 물을 양수기로 퍼내며 작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사 해체 당시 지반 안정, 비용, 공사 기간 등을 고려하여 이 말뚝들은 제거되지 않고 그 위에 흥례문 등이 복원되었다.[67]

  • '''철거 논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총독부 건물의 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같은 해 8월,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 식민 통치 종식 50주년이자 경복궁 창건 600주년이 되는 1995년부터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며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미 해방 직후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철거 요구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철거 결정은 한국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대통령과 철거 찬성론자들은 건물이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훼손하기 위해 지어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므로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철거 반대론자들은 건물이 비록 식민 통치의 산물이지만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식민 시대를 기억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울역사나 구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처럼 다른 일제 강점기 건물들이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점, 철거에 드는 막대한 비용, 건물 자체의 건축적 가치 등을 이유로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건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철거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예상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돔 제거를 시작으로 철거가 시작되었고, 1996년 11월 13일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었다. 철거된 건물의 돔 꼭대기 부분(정상탑) 등 일부 잔해는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식민 통치와 그 극복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4][5] 한편, 총독부 건물을 사용하던 국립중앙박물관은 철거 결정에 따라 이전해야 했으며, 임시 시설을 거쳐 2005년 용산구 용산가족공원 내 새 건물에서 재개관했다.[6]

4. 목록


  • 왜성대 총독부 청사: 1907년 남산 왜성대에 통감부 청사로 건립된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 건물이다.[7]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사무 공간 부족으로 여러 차례 증축되었다.[9] 1922년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10] 1926년 총독부가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한 후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사용되었고,[11] 광복 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사용되다가 한국 전쟁 중 소실되었다.[12]
  • 경복궁 총독부 청사: 1916년부터 1926년까지 경복궁 부지 내에 건설된 조선총독부의 주 청사이다.[1]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초기 설계는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드 라랑드(Georg De Lalande)가 맡았고 이후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와 구니에다 히루시가 완성했다.[1]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을 가리고 다수의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물로 여겨졌다.[1] 1926년 10월 1일 공식적으로 완공되어 총독부 사무실이 이전되었다.
  • 왜성대 총독 관저: 1893년 남산 북쪽에 일본 공사관으로 신축되었으며,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 관저로, 1910년 이후에는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46]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치욕적인 한일 병합 조약이 조인되었다.[49] 총독 관저가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 시정기념관으로 개편되어 일제 통치를 미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가[50] 광복 후에는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 합동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정확한 철거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52]
  • 용산 총독 관저: 1908년경 용산(현재 용산기지 부지 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저이다.[53][54]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러일 전쟁 후 남은 군비잉여금을 유용하여 지었다는 설이 있으며,[53]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했다.[48][53] 호화롭게 지어졌으나 도심과의 거리, 유지비 문제 등으로 인해 주로 귀빈 접대용으로 간혹 사용되었고,[53][54] 한국 전쟁 중 파괴되었다.[54]
  • 경무대 총독 관저: 1939년 경복궁 후원 지역의 경무대 등 조선 시대 건물을 철거하고 신축한 총독 관저이다.[55][56]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58] 광복 이후 미군정 사령관 관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며 '경무대'로 불렸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로 '청와대'로 개명하였으며,[60] 1993년 김영삼 정부 시절, 일제 잔재 청산 및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거되었다.[55]

5. 관련 도서


  • 《건축은 없다》, 박민철 외, 간향미디어, 1995년.
  • 《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 보고서》 전2권, 건축사사무소 새한, 국립중앙박물관, 1997년.
  •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김정동, 대원사, 2001년.
  •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순우, 하늘재, 2010년.
  •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허영섭, 채륜, 2010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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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조선총독부 청사·치안시설·전매시설 http://theme.archive[...]
[3] 논문 Japan in the public culture of South Korea, 1945–2000s: The making and remaking of colonial sites and memories https://apjjf.org/20[...]
[4] 웹사이트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https://www.i815.or.[...]
[5] 논문 Building National Identity: The Study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Building (1926-1995) https://arthistory.h[...] Hong Kong University 2021-10-08
[6] 뉴스 (LEAD) national museum-opening https://en.yna.co.kr[...] Yonhap News Agency 2024-12-20
[7] 서적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대원사 2001-10-30
[8] 서적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하늘재 2010-01-15
[9] 서적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10] 서적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11] 논문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5
[12] 웹인용 국립중앙과학관 http://contents.arch[...] 2011-09-05
[13] 서적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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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 보고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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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적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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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뉴스 아방궁으로 썼다는 용산의 제2 총독 관저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0-12-08
[55] 뉴스 <銳角> 靑瓦臺 舊본관 어떻게 철거되나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3-10-13
[56] 뉴스 1960년 경무대, 청와대로 개명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5-12-30
[57] 서적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통령 경호실 200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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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뉴스 서울시청 건물 ‘본’ 아닌 ‘궁’ 본따… 철거 근거없다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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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뉴스 광화문이 경복궁 중심축에서 벗어난 까닭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6-12-04
[66] 뉴스 문체부, 舊조선총독부 지하말뚝 제거않기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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