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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톡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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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미국에서 열린 대규모 야외 음악 축제이다. 1960년대 반문화와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을 상징하며, 약 40만 명의 관객이 모여 평화와 사랑을 외쳤다. 마이클 랭, 아티 콘펠드, 조엘 로젠만, 존 P. 로버츠가 기획했으며,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지미 헨드릭스 등 30팀 이상의 뮤지션이 공연했다. 이 축제는 영화, 음반 발매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우드스톡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는 등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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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톡 페스티벌
기본 정보
아놀드 스콜닉이 디자인한 홍보 포스터. 원래 새는 플루트에 앉아 있었다.
아놀드 스콜닉이 디자인한 홍보 포스터. 원래 새는 플루트에 앉아 있었다.
위치베델, 뉴욕
좌표41.701°N 74.880°W
참가 인원46만 명 ~ 50만 명 (추정)
개최 연도1969년
설립자아티 콘펠트
마이클 랭
존 P. 로버츠
조엘 로젠먼
우드스톡 벤처스
날짜1969년 8월 15일 ~ 17일 (예정), 1969년 8월 15일 ~ 18일 (실제)
장르포크

블루스 록
포크 록
하드 록
재즈 퓨전
라틴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서던 록
잼 밴드
웹사이트우드스톡 공식 웹사이트
기타 페스티벌
관련 페스티벌1979년
1989년
1994년
1999년

2. 역사적 배경

록 페스티벌뉴욕주 얼스터 군 우드스톡의 예술 공예 운동과 관련하여 이름 지어졌다. 주최자들은 밥 딜런과 같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거주하는 우드스톡에 자신들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이 콘서트를 기획했다.[167]

개최 장소는 인근 서리번 군 베설에 위치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맥스 야스거 소유의 낙농 농장으로 결정되었다. 이 지역은 캐츠킬 산맥으로 불리는 곳으로, 과거 미국 인디언 공동 거주 구역이기도 했다(보호구역은 아님). 일부 마을 주민들은 "히피들이 모이는 야스거 축제"라며 경계했고, 장소를 제공한 야스거는 반대 주민들로부터 우유 구매 중단과 같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167]

주최 측은 처음에 약 1만 명에서 2만 명 정도의 관객을 예상했다. 그러나 유명 뮤지션들의 참여가 확정되면서 사전에 판매된 티켓만 18만 6천 장에 달했고, 예상 입장객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실제 페스티벌 당일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4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166], 이 중 절반 이상이 티켓 없이 입장하면서 페스티벌은 사실상 무료 행사처럼 진행되었다.[167]

이러한 예상치 못한 규모로 인해 페스티벌 자체는 재정적으로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와 라이브 음반 발매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수익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167] 마이클 워들리가 감독하고 마틴 스코세지가 편집에 참여한 영화 《우드스톡/사랑과 평화와 음악의 3일》[168]1970년에 개봉하여 제43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라이브 앨범 ''Woodstock: Music from the Original Soundtrack and More'' (3장 세트)가 발매되었고, 이듬해인 1971년에는 ''Woodstock Two'' (2장 세트)가 추가로 발표되었다.

2. 1. 베트남 전쟁과 반전 운동

1969년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반전 시위가 격화되면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1] 1960년대 초반 젊은 세대가 보여주었던 저항 정신은 다소 약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소위 '꽃 운동(Flower Movement)'에 참여하며 히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1] 이들은 반전, 사랑, 평화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현실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도피적이고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개최되었다. 페스티벌이 열린 사흘 동안 행사장은 공연과 마약, 자유로운 사랑이 넘치는 히피들만의 해방구와 같았다.[1] 당연히 당시 기성세대와 정부는 이 행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언론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대였던 만큼 여론 역시 호의적이지 않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피가 주축이 된 관객들은 악천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큰 사고 없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평화자유를 만끽했다.[1] 이는 후대에 열린 우드스톡 공연들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과 비교했을 때, 1969년 당시 참가자들이 공유했던 독특한 시대정신과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1]

2. 2. 히피 문화와 청년 문화

1969년 미국은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반전시위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1960년대 초 젊은 세대의 저항 정신은 점차 약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소위 '꽃 운동(Flower Movement)'에 동참하며 히피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반전, 사랑, 평화를 주요 가치로 내세웠으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추구하는 다소 도피적이고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이러한 히피 문화가 집약적으로 발현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페스티벌이 열린 사흘 동안 행사장은 공연과 마약, 자유로운 사랑이 넘치는 히피들만의 공화국이자 해방구와 같았다. 당시 기성세대와 정부는 이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언론 역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히피가 주축이 된 관객들은 악천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큰 사고 없이 자신들의 이상을 평화롭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후대에 열린 우드스톡 공연에서 발생한 혼란과 비교했을 때, 당시 참가자들이 추구했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단순한 음악 축제를 넘어, 카운터컬처를 집대성하고 1960년대 휴먼 비잉(Human Be-In)과 같은 인간성 회복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히피 시대의 정점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기록되었다.[167]

3.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기획 및 준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마이클 랭, 아티 콘펠드, 조엘 로젠만, 존 P. 로버츠 네 명의 젊은이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121][18] 이 중 로버츠와 로젠만은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121] 랭은 이미 1968년 마이애미 팝 페스티벌을 공동 기획하여 약 25,000명의 관객을 모은 경험이 있는 프로모터였다.[19]

1969년 초, 뉴욕시에서 미디어사운드라는 녹음 스튜디오를 건설 중이던 사업가 로버츠와 로젠만에게 랭과 콘펠드 측 변호사가 접촉했다. 처음에는 랭과 콘펠드가 뉴욕주 우드스톡 지역에 소규모 녹음 스튜디오를 짓는 데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제안이었으나, 로버츠와 로젠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당시 우드스톡 지역에 거주하거나 자주 방문하던 밥 딜런이나 더 밴드 같은 유명 아티스트들을 초청하는 콘서트를 열자고 역제안했다.[121] 이 새로운 계획에 랭과 콘펠드가 동의하면서, 1969년 1월 '우드스톡 벤처스'라는 이름의 회사가 설립되었다.[121] 이들의 초기 목표 중 하나는 콘서트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우드스톡 지역에 아티스트들을 위한 레코딩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것이었다.[167]

기획 초기부터 네 사람 사이에는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었다. 로버츠는 사업가로서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운영을 중시했지만, 랭은 좀 더 자유롭고 이상적인 방식으로 페스티벌을 구상했다.[21] 이러한 시각 차이는 이후 장소 물색이나 재정 운영 과정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21]

아티스트 섭외는 1969년 4월,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이 출연료 1만달러에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2] 당시 프로모터들은 유명 그룹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계약 이후 다른 주요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23]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본래 영리를 목적으로 기획되었다.[121] 3일간의 행사 티켓은 사전 판매 시 18USD, 현장 판매 시 24USD로 책정되었다. 티켓은 뉴욕시 일대의 음반 매장과 우편 판매를 통해 약 186,000장이 팔려나갔다.[24] 주최 측은 당초 약 5만 명 정도의 관객을 예상했다.[121] 하지만 최종적으로 페스티벌이 열린 장소는 맥스 야스거가 소유한 농장이었으며[167],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들면서 준비 과정에 차질이 생겼고, 이는 결과적으로 페스티벌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1. 장소 선정 과정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처음부터 베델에서 열릴 계획은 아니었다. 원래 축제 장소는 뉴욕주 우드스톡 타운에 있는 알렉산더 타푸즈(Alexander Tapooz) 소유의 부지였다.[43]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수많은 히피들이 몰려드는 것에 반대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기획자인 마이클 랑(Michael Lang)과 아티 콘펠드(Artie Kornfeld)는 서거티스, 뉴욕의 윈스턴 농장(Winston Farm)을 다음 후보지로 생각했으나,[25] 이 역시 토지 소유주와의 소통 문제로 불발되었다.[43]

이에 자금 담당인 존 로버츠(John Roberts)와 조엘 로젠만(Joel Rosenman)이 직접 나서 뉴욕주 월킬 타운에 있는 300acre 규모의 밀스 산업 단지(Mills Industrial Park)를 발견했고, 1969년 봄 1만달러에 임대 계약을 맺었다.[26] 당시 타운 관계자들은 참석 인원을 5만 명 미만으로 예상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대규모 히피들의 유입과 그에 따른 혼란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7월 초, 월킬 타운 위원회는 5천 명 이상의 모임에 대해 허가를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까다로운 허가 조건 때문에 기획자들은 월킬 부지에서의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121]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소 선정 실패와 관련된 논란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오히려 페스티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27]

맥스 야스구어의 1968년 낙농장


시간이 촉박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베델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엘리엇 티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는 2007년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소유한 15acre 규모의 모텔 부지를 제안하며 행사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고, 기획자들에게 낙농가인 맥스 야스구어를 소개해 주었다고 밝혔다.[28] 그러나 페스티벌 기획자 마이클 랑은 티버가 직접 야스구어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부동산 중개인을 소개해 주었고 그 중개인이 자신을 야스구어에게 데려갔다고 반박했으며, 맥스 야스구어의 아들인 샘 야스구어 역시 랑의 주장을 지지했다.[29]

어쨌든 최종적으로 맥스 야스구어가 자신의 농장을 페스티벌 부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야스구어의 농장은 한쪽으로 경사진 자연적인 분지 형태로, 무대를 설치하기에 적합했다. 무대는 언덕 아래쪽에 설치되었고, 근처의 필리피니 연못은 페스티벌 기간 동안 참가자들이 알몸 수영을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121] 기획자들은 베델 타운 당국에도 예상 참가 인원을 5만 명 정도로 알렸다.

하지만 베델에서도 주민들의 반대는 거셌다. "우유를 사지 마세요. 맥스의 히피 음악 축제를 중단하세요"와 같은 표지판이 등장할 정도였다.[30]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델 타운 변호사 프레데릭 W. V. 섀트(Frederick W. V. Schadt)와 건축 검사관 도널드 클락(Donald Clark), 타운 감독관 다니엘 아마투치(Daniel Amatucci)는 페스티벌 허가를 승인했다.[31][32][33][34] 그러나 베델 타운 위원회는 공식적인 허가 발급을 거부하며 클락에게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했다.[35] 이에 조엘 로젠만이 직접 클락 검사관을 만나 설득했고, 결국 클락은 이미 승인된 허가증을 내주었다.[121] 최종적으로 보건부와 농무부의 지원 약속 및 행사 후 모든 구조물을 1969년 9월 1일까지 철거한다는 조건 하에 페스티벌 개최가 확정되었다.[36]

이처럼 장소 선정이 극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너무 늦게 결정된 탓에 기획자들은 행사 준비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행사 시작 불과 3일 전, 로젠만은 울타리와 매표소 설치를 포기하고 무대 완성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미 수만 명의 "얼리 버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행사 당일에는 미처 완공되지 못한 울타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표 없이 입장했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의도치 않게 무료 개방 행사가 되었다.[121]

3. 2. 출연진 섭외

우드스톡 페스티벌에는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섭외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최종 라인업에 포함되지 못한 유명 아티스트들이 많았다. 다음은 출연이 불발된 주요 아티스트들과 그 이유이다.

  • 비틀즈: 당시 애비 로드 앨범 녹음 중이었고 사실상 해체를 앞둔 상태였다. 주최 측은 존 레논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출연을 제안했으나, 레논의 베트남 전쟁 반대 입장과 과거 마약 단속 전력으로 인해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그의 미국 입국을 꺼린다는 설이 있었다. 또한, 애플 코어에서 보낸 플라스틱 오노 밴드 출연 제안 편지가 도착했을 때 주최 측은 월킬 장소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68]
  • 제프 벡 그룹: 페스티벌 직전에 해체되었다. 제프 벡은 "우드스톡 전에 의도적으로 그룹을 해체했다"고 언급하며, 페스티벌에서 그룹의 모습이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69] (그룹의 피아노 연주자였던 니키 홉킨스제퍼슨 에어플레인과 함께 우드스톡 무대에 섰다.)
  • 블루스 이미지: 출연에 동의했으나, 매니저가 "길은 하나뿐이고 비가 올 텐데, 거기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교통 및 날씨 문제를 이유로 만류했다. 결국 밴드는 빙엄턴에서 다른 공연을 가졌다.[70]
  • 버즈: 당시 여러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금전적인 문제도 고려하여 초대를 거절했다. 베이시스트 존 요크는 후에 "우리가 그것이 무엇이 될지 전혀 몰랐다"며 아쉬움을 표했다.[71]
  • 시카고: 처음에는 우드스톡 출연 계약을 맺었으나, 유명 프로모터 빌 그레이엄이 자신이 관리하던 산타나를 대신 출연시키기 위해 시카고의 필모어 웨스트 공연 일정을 우드스톡과 겹치도록 변경하면서 출연이 무산되었다.[72]
  • 블라인드 페이스: 에릭 클랩튼은 출연을 원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반대하여 불참했다.
  • 도어스: 최종 후보였으나 막판에 취소되었다.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는 밴드가 우드스톡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의 2류 복사본"으로 여겨 거절했다고 밝혔으며, 이후 이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73] 다른 한편에서는 리드 싱어 짐 모리슨이 대규모 야외 공연을 기피했으며 암살 위협을 두려워했다는 주장도 있다.[43] 크리거와 드러머 존 덴스모어는 관객으로 페스티벌에 참석했다.[43]
  • 밥 딜런: 당시 우드스톡 타운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페스티벌 출연 대신 1969년 아일 오브 와이트 페스티벌 출연 계약을 선택했다. 개인 사정으로 영국행이 며칠 늦춰졌으나, 결국 아일 오브 와이트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74]
  • 프리: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88]
  • 더 게스 후: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는 전 멤버 랜디 백먼의 주장이 있으나, 보컬리스트 버튼 커밍스는 공식적인 초대가 없었다고 부인하여 정보가 엇갈린다.[75][76]
  • 아이언 버터플라이: 출연 예정이었고 포스터에도 이름이 있었으나, 라과디아 공항에 발이 묶였다. 밴드 측에서 헬리콥터 수송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으나, 주최 측은 "다른 교통편을 찾아보거나, 오지 않을 계획이라면 상황을 명확히 해달라"는 냉담한 답신을 보내 사실상 출연이 무산되었다.[77][78]
  • 잇츠 어 뷰티풀 데이: 주최 측과 구두 합의가 있었으나, 매니저 빌 그레이엄이 자신이 관리하던 산타나의 출연을 더 원했다. 결국 랭과 그레이엄이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고, 그레이엄이 이겨 산타나가 출연하게 되었다.[79][80]
  • 토미 제임스 앤 더 숀델스: 하와이에 체류 중 비서로부터 "뉴욕 북부의 돼지 농장에서 공연 요청이 왔다"는 식으로 페스티벌의 중요성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거절했다. 토미 제임스는 나중에 "우리가 놓친 것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걷어차고 싶었다"고 말했다.[81]
  • 제스로 툴: 이안 앤더슨은 히피 문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연장의 누드, 과도한 음주, 마약 사용 등을 우려하여 출연을 거절했다.[82]
  • 레드 제플린: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매니저 피터 그랜트는 "우드스톡에서는 그저 빌보드에 있는 또 다른 밴드일 뿐"이라며, 밴드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83]
  • 라이트하우스: 출연을 거절했다.[84]
  • 아서 리 앤 러브: 밴드 내부의 혼란과 갈등으로 인해 초대를 거절했다.[88]
  • 마인드 개러지: 페스티벌이 작은 행사일 것이라 예상했고, 다른 곳에서 더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88]
  • 조니 미첼: 처음에는 출연 예정이었으나, 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TV 쇼 ''더 딕 캐빗 쇼'' 출연 일정을 지키기 위해 취소했다. 그녀는 이후 페스티벌에 대한 텔레비전 보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유명한 곡 "Woodstock"을 작곡했다.[85][86]
  • 에스라 모호크: 출연 예정이었으나, 공연장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첫날 공연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87]
  • 무디 블루스: 초기 홍보 포스터에는 이름이 포함되었으나, 같은 주말에 파리 공연 일정이 잡히면서 최종적으로 불참했다.[88]
  • 포코: 출연 기회가 있었으나, 매니저가 로스앤젤레스의 한 학교 체육관 공연을 이유로 거절했다.[89]
  • 프로콜 하럼: 초대를 받았으나, 긴 투어 일정의 마지막이었고 기타리스트 로빈 트로워의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거절했다.[90]
  • 라스칼스: 새 앨범 녹음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거절했다.[91]
  • 레이븐: 전년도 우드스톡 사운드 아웃 행사에서의 좋지 않았던 경험 때문에 초대를 거절했다.[92]
  • 로이 로저스: "Happy Trails"를 부르며 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93]
  • 롤링 스톤스: 초대를 받았으나, 믹 재거가 호주에서 영화 네드 켈리를 촬영 중이었고, 키스 리처즈의 여자친구 아니타 팔렌버그가 아들 말론을 출산하는 시기와 겹쳐 거절했다.[94]
  • 사이먼 앤 가펑클: 당시 명반 혼돈의 다리 앨범 작업 중이어서 초대를 거절했다.[95]
  • 스피릿: 다른 공연 일정이 이미 잡혀 있었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규모를 예상하지 못해 초대를 거절했다.[96]
  • 스틸 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활동했던 밴드로,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이미 다른 공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97]
  • 스트로베리 알람 클락: 페스티벌이 "그렇게 큰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초대를 거절했다.[98]
  • 애플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 (플라스틱 오노 밴드, 제임스 테일러, 빌리 프레스턴): 애플 레코드 측에서 이들의 출연 의사를 편지로 전달했으나, 주최 측이 장소 문제로 정신없던 시기와 맞물려 최종 조율되지 못했다.[99]
  • 자거 앤 에반스: 우드스톡 출연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 출연을 함께 제안받았으나, 멤버 릭 에반스가 음주 운전 사고로 부상을 입어 불참했다.[100]
  • 프랭크 자파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자파는 "우드스톡에는 진흙이 너무 많았다"고 언급하며 출연을 거절했다고 밝혔다.[88]

4. 페스티벌 진행 과정

우드스톡 페스티벌 무대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공식적으로 1969년 8월 15일 금요일부터 17일 일요일까지 3일간으로 예정되었으나, 실제로는 8월 18일 월요일 오전까지 이어졌다.[169] '평화와 음악의 3일'이라는 구호 아래 뉴욕주 베델 인근 맥스 야스거의 농장에서 열린 이 축제에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약 4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다.[168]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입구를 통해 무료로 입장하면서 정확한 참가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축제는 8월 15일 금요일 오후에 시작되어 3일 밤낮으로 총 32팀의 아티스트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다.[57] 하지만 엄청난 인파와 예기치 못한 폭우로 인해 여러 차례 공연이 지연되었고,[169] 행사장으로 향하는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37] 현장에는 음식, 물,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폭우로 인해 진흙탕이 되는 등[41]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드스톡은 참가자들의 수와 상황을 고려할 때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168] 참가자들은 부족한 물품을 서로 나누고 도왔으며, 심각한 폭력 사태는 보고되지 않았다.[49][104] 이는 당시 반문화 운동과 히피 정신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약물 과다 복용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46][47]

페스티벌은 예정된 일정을 넘겨 8월 18일 월요일 오전에야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무대는 지미 헨드릭스가 장식했으며,[44][45] 이때는 많은 관객들이 떠나 약 3만 명 정도가 그의 역사적인 공연을 지켜보았다.[44] 농장주 맥스 야스거는 페스티벌이 끝난 후 "거의 50만 명의 사람들이 3일 동안 음악과 평화를 마음에 품고 보냈다"며, 이 경험이 미국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1]

4. 1. 8월 15일 (금)

오프닝 무대를 연 리치 헤븐스


페스티벌 첫날의 군중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첫날인 1969년 8월 15일 금요일 오후, 포크 가수 리치 헤븐스가 무대에 올라 공연의 막을 열었다. 그는 즉흥곡 "Freedom"을 포함하여 "겟 투게더", "Handsome Johnny" 등을 불렀다.

이어서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스와미 사치다난다가 평화를 기원하는 연설을 통해 축제의 의미를 더했다.

첫날 공연에는 다음과 같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 스위트워터 (Sweetwater): "Motherless Child", "What's Wrong", "Why Oh Why"
  • 버트 섬머 (Bert Sommer): "Jennifer", "She's Gone", "Things Are Going My Way", "Smile"
  • 팀 하딘 (Tim Hardin): "If I Were a Carpenter", "자유의 광장"
  • 라비 샹카르 (Ravi Shankar): 공연 도중 쏟아진 폭우로 인해 중단되었다.[171]
  • 멜라니 (Melanie): "Beautiful People", 밥 딜런의 곡인 "미스터 탬버린 맨"
  • 아를로 거스리 (Arlo Guthrie): "Coming Into Los Angeles", "Walking Down The Line",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
  • 조안 바에즈 (Joan Baez):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그녀는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는 "우리에게 승리를", 노동 운동가 조 힐을 기리는 "Joe Hill", 흑인 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 등을 불렀다.

4. 2. 8월 16일 (토)

퀼이 오후 12시 15분부터 1시까지 공연하며 둘째 날의 문을 열었다. 이후 컨트리 조 맥도날드가 오후 1시부터 1시 30분까지 무대에 섰다. 이는 산타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 예정에 없이 긴급하게 이루어진 단독 공연이었다. 조는 다음 날 자신의 밴드 컨트리 조 앤 더 피쉬와 함께 다시 공연했다.

산타나는 오후 2시부터 2시 45분까지 공연했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공연 내내 메스칼린에 취해 환각 상태였다고 후에 밝혔다.[59] 이들은 「Persuasion」, 「Soul Sacrifice」 등을 연주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3시 55분까지는 존 세바스찬이 공연했다. 그는 원래 출연진에 없었으나, 축제에 참석했다가 예정된 많은 공연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즉석에서 공연을 요청받았다.[60]

키프 하틀리 밴드는 오후 4시 45분부터 5시 30분까지 「Spanish Fly」 등을 포함한 연주를 선보였다. 더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는 오후 6시부터 6시 30분까지 공연했다. 이들은 원래 첫날 공연 예정이었으나 폭우 속 공연을 거부하고 둘째 날로 옮겨졌다.[61] 「Catty Come」, 「This Moment Is Different」, 「When You Find Out Who You Are」 등을 연주했다.

캔드 히트는 오후 7시 30분부터 8시 45분까지 공연하며 「온 더 로드 어게인」, 「A Change Is Gonna Come」, 「Going Up The Country」 등을 불렀다. 마운틴은 오후 9시부터 10시까지 무대에 섰다. 이 공연은 밴드로서 그들의 세 번째 공연이었다.[62] 「Stormy Monday」, 「Blood of the Sun」, 「상상된 웨스턴의 테마」 등을 연주했다.[172]

그레이트풀 데드는 오후 10시 30분부터 밤 11시 50분까지 공연했으며, 36분 길이의 「턴 온 유어 러브 라이트」 연주로 마무리했다. 이 외에도 「St Stephen」, 「Mama Tried」, 「Dark Star」, 「High Time」 등을 연주했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은 자정을 넘긴 12시 30분부터 새벽 1시 20분까지 공연했다. 존 포거티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공연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50만 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기절해 있었다. 마치 단테의 지옥 그림과 같았는데, 모든 시체들이 서로 얽혀 진흙투성이가 된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다: 4분의 1마일 떨어진 어둠 속에서, 이 그릇의 다른 가장자리에서, 어떤 남자가 라이터를 켰고, 나는 밤에 이렇게 들었다, '존,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함께 있어.' 나는 그 남자를 위해 나머지 쇼를 했다."[23] CCR은 「본 온 더 바이유」, 「배드 문 라이징」, 「프라우드 메리」 등을 연주했다.

재니스 조플린은 코즈믹 블루스 밴드와 함께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무대에 올랐다.[63] 「Piece of My Heart」, 「러브 섬바디」, 「아이 캔트 턴 유 루스」 등을 불렀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은 새벽 3시 30분부터 4시 20분까지 공연하며 「에브리데이 피플」, 「Dance to the Music」, 「Music Lover」, 「I Want to Take You Higher」 등을 선보였다.

더 후는 새벽 5시부터 아침 6시 5분까지 공연했다. 공연 도중 애비 호프만이 무대에 난입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64] 이들은 록 오페라 「토미」(「핀볼 위저드」, 「시 미, 필 미」 포함)[173][174][175], 「서머타임 블루스」, 「마이 제너레이션」 등을 연주했다.

토요일의 마지막 공연은 제퍼슨 에어플레인으로, 아침 8시부터 9시 40분까지 이어졌다. 니키 홉킨스가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함께했다. 「화이트 래빗」 등이 연주되었다.

4. 3. 8월 17일 (일) ~ 18일 (월)

조 코커와 더 그리스 밴드는 오후 2시에 무대에 올라 "위드 어 리틀 헬프 프롬 마이 프렌즈" 등을 연주했다.[65] 그의 공연이 끝난 후,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 몇 시간 동안 공연이 중단되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저녁 6시 30분부터 공연이 재개되었다. 컨트리 조 앤 더 피쉬가 두 번째 공연을 가졌고, 이어서 텐 이어스 애프터, 더 밴드, 조니 윈터 (동생 에드가 윈터와 함께), 블러드, 스웨트 & 티어스,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 샤 나 나가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은 어쿠스틱 세트와 일렉트릭 세트를 나누어 공연했으며, 닐 영은 어쿠스틱 세트 대부분에 참여하지 않았다. 샤 나 나의 기타리스트 헨리 그로스는 당시 축제에서 공연한 가장 어린 음악가였다.

축제의 마지막 공연은 지미 헨드릭스가 장식했다. 그는 비로 인한 지연 끝에 월요일 오전 9시에 무대에 올랐다.[67] 이 시점에는 약 40,000명의 관객만이 남아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연을 기다리다가 도중에 떠나기도 했다.[44] 헨드릭스는 자신의 새로운 밴드 '집시 선 & 레인보우스(Gypsy Sun and Rainbows)'와 함께 2시간 동안 공연했다. 그는 밴드를 익스피리언스로 소개받았으나, 이를 정정하며 "우리에게 Band of Gypsies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45] 그의 공연에는 유명한 미국 국가(The Star-Spangled Banner)의 사이키델릭 버전 연주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 우드스톡에 담기며 "60년대 시대정신의 일부"로 평가받게 되었다.[45]

8월 17일 일요일 – 8월 18일 월요일 공연 목록
아티스트시간비고
조 코커 and 더 그리스 밴드오후 2:00 – 오후 3:25「위드 어 리틀 헬프 프롬 마이 프렌즈」 등 연주.[65] 조 코커의 공연 후, 폭풍우로 인해 몇 시간 동안 행사가 중단되었다.
컨트리 조 앤 더 피쉬오후 6:30 – 오후 7:30컨트리 조 맥도날드의 두 번째 공연. 「Rock & Soul Music」 등 연주.
텐 이어스 애프터오후 8:15 – 오후 9:15'Im Going Home''」 등 연주.
더 밴드오후 10:00 – 오후 10:50「더 웨이트」, 「아이 셜 비 릴리즈드」 등 연주. 앙코르를 위해 다시 불려나왔다.
조니 윈터오전 12:00 – 오전 1:05윈터의 동생 에드가 윈터가 세 곡에 참여했다. 「Tobacco Road」 등 연주. 앙코르를 위해 다시 불려나왔다.
블러드, 스웨트 & 티어스오전 1:30 – 오전 2:30Spinning Wheel」, 「'Youve Made Me So Very Happy''」 등 연주. 공연 음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다큐멘터리 영화나 사운드트랙 앨범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66]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오전 3:00 – 오전 4:00어쿠스틱과 일렉트릭 세트가 연주되었다. 닐 영은 어쿠스틱 세트 대부분을 건너뛰었다. 「조곡: 푸른 눈의 주디」, 「블랙 버드」, 「어쩔 수 없는 희망」, 「그위니비어」, 「미스터 소울」, 「자유의 가치」 등 연주.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오전 6:00 – 오전 7:10'Everythings Gonna Be Alright''」 등 연주.
샤 나 나오전 7:30 – 오전 8:00「컴 고 위드 미」, 「The Book of Love」, 「Duke of Earl」, 「춤추러 가자」, 「Teen Angel」 등 연주. 기타리스트 헨리 그로스는 축제에서 공연한 가장 어린 음악가였다.
지미 헨드릭스 / 집시 선 & 레인보우스오전 9:00 – 오전 11:00약 40,000명의 마지막 날 관객 앞에서 공연했다.[67] 「퍼플 헤이즈」, 「부두 차일드 (슬라이트 리턴)」, 「The Star-Spangled Banner」 등 연주.[176]


4. 4. 예상치 못한 문제점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예상치 못한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주최 측은 이렇게 많은 참가자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169] 음향 시설, 음식, 물,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41] 위생 및 응급 처치를 위한 시설 역시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4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까지 쏟아져 행사장은 거대한 진흙탕으로 변했고,[41] 참가자들은 악천후와 식량 부족,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축제를 견뎌내야 했다.[41]

행사장으로 향하는 도로는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37] 아를로 거스리는 뉴욕주 쓰루웨이가 폐쇄되었다고 언급했으나,[39] 우드스톡 박물관 측은 이를 부인했다.[40] 라디오와 텔레비전 보도를 통해 교통 상황을 접한 일부 사람들은 결국 참가를 포기하기도 했다.[102][38]

보안 문제도 발생했다. 당초 예정되었던 346명의 뉴욕 경찰국 소속 경찰관들의 지원은 규정 문제로 철회되었고,[42] 넬슨 록펠러 당시 뉴욕 주지사는 주 방위군 1만 명 투입까지 고려했으나 주최 측의 설득으로 실행하지는 않았다.[102] 결국 설리번 카운티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102] 혼란 속에서 인근 스튜어트 공군 기지의 인력이 질서 유지와 공연자 수송 등을 도왔다.[43]

마약 문제도 심각했다. 축제 기간 동안 총 742건의 약물 과다 복용 사례가 보고되었으며,[50] 안타깝게도 2명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46][47] 또한, 인근 건초밭에서 잠자던 17세 소년이 트랙터에 치여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고도 발생했다.[46][47] 축제 중 출산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으며,[48] 4건에서 8건 사이의 유산이 보고되었다.[49][46][47]

초기 언론 보도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부각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데일리 뉴스''는 "히피 페스티벌 교통 체증", "히피, 진흙탕에 빠지다"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사용했고,[101] ''뉴욕 타임스''는 "캐츠킬의 악몽"이라는 사설을 통해 페스티벌을 "진흙과 침체의 악몽"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101] 미들타운의 지역 신문 ''타임스 헤럴드-레코드''는 현장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이용해 약 56.33km 거리를 오가며 기사와 사진을 실어 날랐다.[26][105][106][107]

하지만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참가자들의 수와 열악한 환경을 고려할 때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168] 4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는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49][104] 참가자들은 부족한 음식과 물품을 서로 나누었으며,[168] 이후 언론 보도에서도 이러한 협력과 관용, 참가자들의 긍정적인 태도가 조명받기 시작했다.[102][103] ''뉴욕 타임스''의 기자 버나드 콜리어는 편집국의 부정적인 보도 압력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의 협력과 관대함을 강조하는 기사를 썼다.[102][103] 농장주 맥스 야스거는 "거의 50만 명의 사람들이 3일 동안 음악과 평화를 마음에 품고 보냈다"고 말하며, 역경을 더 밝고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21]

5.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영향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단순한 음악 페스티벌을 넘어 1960년대 미국의 카운터컬처와 히피 문화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3 Days of Peace & Music|평화와 음악의 3일eng'이라는 구호 아래 열린 이 행사는 당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젊은 세대의 이상과 가치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페스티벌은 초기 기획 단계에서부터 개최지 선정 문제, 지역 주민의 반발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167]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약 4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면서[166] 극심한 혼잡과 함께 음식, 물, 화장실 등 기반 시설 부족 문제가 발생했고, 폭우로 행사장은 진흙탕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참가자들은 큰 충돌 없이 평화와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며 축제를 즐겼고, 이는 '우드스톡 네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경제적으로는 높은 뮤지션 개런티와 예상치 못한 무료 입장객 급증으로 인해 초기에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페스티벌의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우드스톡/사랑과 평화와 음악의 3일`과 라이브 음반이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결과적으로는 상당한 상업적 수익을 달성했다.[167] 이는 대규모 록 페스티벌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문화적으로 우드스톡은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과 더불어 젊은이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어주었으며, 후대 음악가들과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페스티벌에서 보여준 자유와 해방의 분위기,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는 이후 여러 문화 콘텐츠를 통해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의 파격적인 미국 국가 연주로 대표되는 우드스톡의 저항 정신은 같은 해 알타몬트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더욱 부각되었다. 알타몬트의 사건이 60년대 히피 반문화의 어두운 단면과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 반면, 우드스톡은 혼란 속에서도 평화와 이상을 추구했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5. 1. 경제적 영향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초기에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뮤지션들에게 높은 개런티(각각 현금 1.5만달러 요구)를 지급해야 했고, 많은 청중이 입구를 부수고 무임으로 입장하면서 페스티벌 자체는 130만달러의 큰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페스티벌의 기록 영상물과 음반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Woodstock은 개봉 첫 5주 동안에만 2500만달러를 벌어들였고, 이후 발매된 사운드트랙 앨범과 비디오 등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드스톡은 총 5000만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이는 우드스톡이 거대한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음을 의미한다.

페스티벌 이후 다양한 라이브 앨범 및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되었다. 주요 앨범은 다음과 같다.

발매 연도앨범 제목비고
1970우드스톡: 오리지널 사운드트랙과 더 많은 음악 (Woodstock: Music from the Original Soundtrack and More)3-LP (후에 2-CD). 주요 아티스트 곡 샘플링, 무대 안내/군중 소리 포함.
1971우드스톡 2 (Woodstock 2)2-LP. 첫 앨범과 유사하게 무대 안내/군중 소리 포함.
1994우드스톡 다이어리 (Woodstock Diary)이전 두 앨범 미수록곡 포함.[113]
1994우드스톡: 평화와 음악의 3일 (Woodstock: Three Days of Peace and Music)애틀랜틱 발매 4-CD 박스 세트. 미발표 공연 수록 (무대 안내/군중 소리 제외).[114]
1994지미 헨드릭스: 우드스톡 (Jimi Hendrix: Woodstock)지미 헨드릭스의 페스티벌 공연 선별 녹음.
1999우드스톡 실황 (Live at Woodstock)MCA 레코드 발매 2-CD 세트. 지미 헨드릭스의 거의 모든 공연 수록 (래리 리 보컬 곡 제외).
2009우드스톡 익스피어리언스 (The Woodstock Experience)레거시/SME 레코드 발매. 산타나, 재니스 조플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제퍼슨 에어플레인, 조니 윈터의 전체 공연 실황 (개별 및 박스 세트).
2009우드스톡 40년: 야스구르 농장으로 돌아가다 (Woodstock 40 Years On: Back to Yasgur's Farm)라이노/애틀랜틱 레코드 발매 6-CD 박스 세트. 추가 공연, 무대 발표 및 기타 자료 포함.[115]
2009우드스톡 라이브 (Live at Woodstock)조 코커의 전체 세트 라이브. 11곡 중 10곡 미발표 음원.
2019우드스톡 - 백 투 더 가든: 디피니티브 50주년 기념 아카이브 (Woodstock – Back to the Garden: The Definitive 50th Anniversary Archive)라이노/애틀랜틱 발매 38-CD, 36시간, 432곡 박스 세트. 페스티벌 거의 모든 음원 수록 (미발표 276곡 포함). 1,969개 한정판.[116][117][118][119]
2019우드스톡 - 백 투 더 가든: 50주년 기념 익스피리언스 (Woodstock – Back to the Garden: The 50th Anniversary Experience)10-CD 디럭스 세트.
2019우드스톡 - 백 투 더 가든: 50주년 기념 컬렉션 (Woodstock – Back to the Garden: The 50th Anniversary Collection)3-CD 또는 5-LP 샘플러 세트.
2019우드스톡 라이브 (Live at Woodstock)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전체 공연(11곡) 공식 앨범. CD 및 더블 바이닐 LP 발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개최지였던 지역 경제에도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델 우즈가 2018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페스티벌 관련 활동으로 뉴욕주에서 5.6082억달러의 지출이 발생했다. 2006년 이후 베델 우즈에는 29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으며, 2018년에만 214,405명이 방문했다. 이를 통해 172개의 정규직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설리번 카운티의 베델 우즈에서만 509.99999999999994만달러의 직접 임금이 지급되었다.[149]

5. 2. 사회적 영향

1969년 미국은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반전 시위 등 여러 사회 문제가 극에 달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960년대 초반 젊은 세대의 저항 정신은 다소 약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소위 '꽃 운동(Flower Movement)'에 동참하며 히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반전, 사랑, 평화를 외쳤지만,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 사흘 동안 행사장은 공연과 마약, 사랑이 넘치는 히피들만의 공화국이자 해방구와 같았다. 당시 기성세대와 정부는 이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언론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여론 또한 좋지 않았다. 그러나 히피가 주축이 된 관객들은 악천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큰 사고 없이 그들만의 자유로운 축제를 즐겼다. 이는 이후 열린 우드스톡 공연들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비교했을 때, 당시 참가자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짐작하게 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카운터컬처를 집대성한 행사였으며, 1960년대의 휴먼 비잉(Human Be-In)과 같이 인간성 회복을 위한 집회로도 평가받는다. 단순한 음악 축제를 넘어 히피 시대의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최초의 대규모 야외 콘서트였기에 운영 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약 4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면서[166] 혼잡 문제가 발생했고, 행사장으로 향하는 도로는 마비되었으며, 악천후 속에서 긴급용 텐트 등 필수 시설도 부족했다. 그러나 30팀 이상의 공연자와 40만 명의 관객 규모를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축제였다.[168] 참가자들은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고, 행사장에서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170] 폭력 사건은 보고되지 않았으며, 축제가 끝난 후 쓰레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부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돌아갔다.

우드스톡에서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를 지미 헨드릭스가 조롱하듯 연주했던 저항적인 분위기는 같은 해 12월 알타몬트 프리 콘서트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롤링 스톤스가 팬들을 위해 개최한 이 무료 콘서트에는 약 30만 명이 모였으나, 공연 막바지에 경비대로 고용된 오토바이족 '헬스 앤젤스(Hell's Angels)'가 한 흑인 청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드스톡에서도 사망자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낭만적인 분위기에 묻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타몬트의 비극은 즉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언론과 기성세대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이전의 여러 페스티벌에서도 약물 문제나 소요 사태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알타몬트 사건은 1960년대 히피 반문화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으며, 60년대 록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냈다.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과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젊은이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어주었으며,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우드스톡은 참가자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이자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1969년, 변화에 대한 갈망이 들끓던 미국 사회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1960년대 카운터컬처와 반전운동을 대표하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알타몬트의 비극과 대조적으로 우드스톡은 1960년대를 경험한 미국인들에게 "빛나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5. 3. 문화적 영향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단순한 음악 축제를 넘어 히피 문화와 반전 운동의 상징이자, 1960년대 카운터컬처를 집대성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67] 이는 후대의 음악, 영화, 예술 등 다양한 문화 영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페스티벌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우드스톡/사랑과 평화와 음악의 3일`(1970)은 마이클 워들리가 감독하고 마틴 스코세지가 편집에 참여했으며,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하며 페스티벌의 신화를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168][167] 이 외에도 우드스톡 2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우드스톡 다이어리`(1994),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 영상을 담은 `지미 헨드릭스: 우드스톡에서의 라이브`(2005), 페스티벌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조명한 PBS 다큐멘터리 `우드스톡: 시대를 정의한 3일`(2019), 기획 과정을 다룬 `우드스톡 만들기`(2019) 등 페스티벌을 조명하는 다양한 영상물이 제작되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개최 비화를 다룬 엘리엇 타이버의 회고록 `테이킹 우드스탁`은 페스티벌 유치 과정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타이버는 페스티벌의 공식 기획자나 장소 제공자는 아니었지만, 기존 개최지였던 월킬에서 공연 허가가 취소되자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맥스 야스거의 농장을 새로운 개최지로 연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회고록은 뉴욕주 베델에서 부모님의 모텔을 운영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이중생활에 시달리던 그가 우드스톡 유치를 통해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맞이하는 개인적인 성장담이기도 하다. 이 회고록은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에 의해 2009년 동명의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으로 제작되었으며, 이 영화는 1969년 미국 사회의 변화와 그 중심에 있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의미를 탐구하며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기도 했다.[110][111][112] 한국에서는 2010년 6월 개봉했으며, 팝 칼럼니스트 성문영이 번역을 맡았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수많은 라이브 앨범 발매로 이어지며 그 음악적 유산을 남겼다. 1970년과 1971년에 각각 발매된 `Woodstock: Music from the Original Soundtrack and More`와 `Woodstock Two`는 페스티벌의 열기를 전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167] 페스티벌 40주년인 2009년에는 산타나, 재니스 조플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제퍼슨 에어플레인, 조니 윈터 등의 전체 공연 실황 앨범과 이를 묶은 박스 세트 `우드스톡 익스피어리언스`가 발매되었다. 같은 해, 미공개 음원을 다수 포함한 6CD 박스 세트 `우드스톡 40년: 야스구르 농장으로 돌아가다`와 조 코커의 라이브 앨범 `우드스톡 라이브`도 출시되었다.[115] 50주년인 2019년에는 페스티벌에서 연주된 거의 모든 음원을 담은 38CD 분량의 방대한 아카이브 `우드스톡 - 백 투 더 가든: 디피니티브 50주년 기념 아카이브`가 1,969개 한정판으로 발매되었으며, 10CD, 3CD, 5LP 등 다양한 형태의 축약 버전도 함께 출시되었다.[116][117][118][119] 또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전체 공연 실황 앨범 `우드스톡 라이브`가 공식 발매되었다.

2010년, '우드스탁 코리아' 개최 소식이 알려지면서 국내 음악 팬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1969년 오리지널 페스티벌 기획자 중 한 명인 아티 콘펠드가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자신의 트위터에 관련 글을 올리면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179] 당시 한국에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ETPFEST 등 대형 음악 페스티벌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지만, '우드스탁'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팬들의 반응은 남달랐다.[180] 페스티벌은 2010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티켓 예매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연을 불과 일주일 앞둔 7월 30일, 주관사는 돌연 공연 취소를 발표했다. 주된 취소 사유는 미국 우드스탁벤처스가 '우드스탁' 명칭 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과 공연 기획에 필요한 자금 확보 실패였다. 또한, 사전에 출연한다고 홍보했던 밴드 넥스트심플 플랜 측에서 출연 계약이나 합의가 전혀 없었다고 밝히면서 준비 부족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다.[181] '우드스탁 코리아'의 무산은 한국 사회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지닌 문화적 이상과 동경이 현실적인 상업 논리와 미흡한 준비 과정 속에서 좌절된 사례로 남았다.

6. 우드스톡 페스티벌 이후

페스티벌 직후 몇 년 동안, 우드스톡 공동 제작자인 존 로버츠와 조엘 로젠먼은 로버트 필펠과 함께 "무제한 자본을 가진 젊은이들: 전설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축제 비용을 지불한 두 사람이 이야기하다"라는 책을 출판했다.[121]

페스티벌 유치에 역할을 했던 베델의 아마투치 감독은 일부 주민들의 불만으로 인해 1969년 11월 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했다.[122] 표 차이는 매우 근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23] 이후 뉴욕 주 의회와 베델 타운은 다시는 유사한 축제가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 집회를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우드스톡 벤처스를 상대로 약 80건의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주로 인근 지역 농부들이 제기한 것이었다. 페스티벌로 인해 발생한 140만 달러(현재 140만달러에 해당)의 부채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성공으로 마련된 자금 등으로 해결되었다.[102][124] 농장주 맥스 야스거는 1970년 축제 부활을 위한 농장 임대를 거부하며 낙농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125]



1984년, 원래 축제 부지에는 토지 소유주 루이스 니키와 준 젤리쉬가 지역 조각가 웨인 C. 소워드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평화와 음악" 기념 명판이 세워졌다.[126]

이후에도 부지 소유주들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닭 분뇨를 뿌리거나 트랙터와 경찰차로 길을 막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는 즉석에서 열린 20주년 기념 행사에 2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1997년에는 지역 단체가 방문객을 위한 환영 표지판을 설치했고, 베델 타운 역시 점차 축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우드스톡과의 연관성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다.[127]

1979년에는 10주년 기념 콘서트(우드스톡 리유니언)가 열렸고, 이후 1989년, 1994년, 1999년에도 기념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특히 1994년의 25주년 기념 콘서트 'Woodstock II'에는 밥 딜런,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 등이 출연하여 약 3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177] 1999년의 'Woodstock III'에 대해서는 우드스톡 1999 문서를 참조하라.

1996년, 케이블 텔레비전 선구자 앨런 게리(Alan Gerry)가 페스티벌이 열렸던 들판과 무대 구역을 보존 목적으로 매입했다.[128][129] 이 부지는 베델 우즈 예술 센터(Bethel Woods Center for the Arts)의 일부가 되었고, 센터는 2006년 7월 1일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으로 공식 개관했다. 공연은 1969년 당시 무대 위치에서 약 약 457.20m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진 파빌리온 무대에서 열렸다.[130] (원래 무대 부지에는 1984년에 설치된 기념 명판 외에는 다른 시설이 없다.)[131] 2008년 6월에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경험과 문화적 중요성을 기리는 박물관이 센터 내에 문을 열었다.[132] 센터 개관 이후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의 공연(2006년 8월)[133], 리치 헤이븐스의 유해를 뿌리는 행사(2013년 8월)[134] 등이 열렸다.

2016년 말, 뉴욕주 공원, 레크리에이션 및 역사 보존국은 페스티벌 부지와 캠프장으로 사용된 인근 지역을 포함한 600acre 부지를 국립 역사 유적지에 등재하기 위해 국립 공원청에 신청했고,[135] 2017년 2월 공식적으로 등재되었다.

페스티벌 40주년인 2009년에는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고[136],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8월 15일, 베델 우즈 예술 센터에서는 1969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우드스톡 출연진 재결합 콘서트가 8시간 동안 열렸다. 컨트리 조 맥도날드가 사회를 본 이 공연에는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 캔드 히트, 텐 이어스 애프터, 제퍼슨 스타쉽, 마운틴, 레본 헬름 밴드 등이 출연했다.[137] 리치 헤이븐스는 전날 별도 행사에 출연했으며,[138]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와 알로 거스리도 8월 초 베델에서 기념 공연을 가졌다. 영국 켄트의 호크허스트에서도 기념 파티가 열렸고,[139] 일리노이주 우드스톡에서도 아티 콘필드의 축복을 받은 40주년 기념 공연이 개최되었다.[140]

같은 해, 4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음반과 서적이 발매되었다. 레거시/SME 레코드산타나, 재니스 조플린,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제퍼슨 에어플레인, 조니 윈터의 우드스톡 공연 실황 앨범과 박스 세트 ''우드스톡 익스피어리언스''를 발매했다. 라이노/애틀랜틱 레코드는 추가 공연과 무대 발표 등을 포함한 6 디스크 박스 세트 ''우드스톡 40년: 야스구르 농장으로 돌아가다''를,[115] 조 코커는 10곡의 미발매곡을 포함한 라이브 앨범 ''우드스톡 라이브''를 발매했다. 또한, 마이클 랭과 홀리 조지-워렌은 페스티벌 기획 과정을 담은 책 ''우드스톡으로 가는 길''을 출판했다.

2014년 5월, 오리지널 우드스톡 프로듀서 중 한 명인 마이클 랭은 2019년에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 계획을 발표했다.[141] 2019년 1월 9일, 랭은 공식 우드스톡 50주년 기념 페스티벌(우드스톡 50)이 2019년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뉴욕주 와트킨스 글렌에서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142] 3월에는 1969년 출연했던 존 포거티, 카를로스 산타나, 데이비드 크로스비, 멜라니, 존 세바스찬, 컨트리 조 맥도날드, 데드 앤 컴퍼니(그레이트풀 데드 멤버 포함), 캔드 히트, 핫 투나(제퍼슨 에어플레인 멤버 포함) 등을 포함한 라인업이 공개되었다.[143]

그러나 4월 29일, 주요 투자자(덴츠 아이지스 네트워크)가 행사 준비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투자를 철회하고 페스티벌 취소를 발표했다. 주최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144][145] 새로운 자금 조달을 모색했으나, 결국 7월 31일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146][147] 대신 베델 우즈 예술 센터에서 "소규모" 기념 콘서트 주말 행사를 주최했다.[148]

50주년을 기념하여 라이노/애틀랜틱은 2019년 8월 2일, 1969년 페스티벌의 거의 모든 연주를 담은 38장의 CD, 432곡 분량의 방대한 박스 세트 ''우드스톡 - 백 투 더 가든: 디피니티브 50주년 기념 아카이브''를 1,969개 한정판으로 발매했다. 이 세트에는 미발매곡 276곡이 포함되었다.[116][117][118][119] 또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우드스톡 공연 전체를 담은 공식 앨범 ''우드스톡 라이브''도 처음으로 발매되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베델 우즈 보고서에 따르면, 센터는 뉴욕주에서 5억 6,082만 달러의 경제적 지출을 유발했으며, 2006년 개관 이후 290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했다. 2018년 한 해에만 214,405명이 방문했으며, 이를 통해 172개의 정규직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설리번 카운티 내 베델 우즈에서 지급된 직접 임금만 510만 달러에 달했다.[149]

7. 대중문화 속 우드스톡

역사상 가장 큰 음악 축제 중 하나이자 1960년대 후반의 문화적 이정표인 우드스톡은 대중문화에서 여러 방식으로 언급되어 왔다. "우드스톡 세대"라는 구절은 일반적인 어휘의 일부가 되었다.[150] 축제에 대한 찬사와 패러디는 축제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다.


  • 만화가 찰스 슐츠는 1966년부터 등장했지만 아직 이름이 없었던 자신의 반복되는 ''피너츠'' 새 캐릭터 이름을 축제에 대한 헌사로 우드스톡이라고 지었다.[151][152]
  • 1970년 4월, ''매드'' 잡지는 프랭크 제이콥스가 쓰고 세르지오 아라고네스가 그림을 그린 "I Remember, I Remember The Wondrous Woodstock Music Fair"라는 시를 게재하여 교통 체증과 실제로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가는 어려움을 패러디했다.[153]
  • 키스 로버트슨의 1970년 어린이 책 ''헨리 리드의 빅 쇼''는 주인공이 삼촌의 농장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열어 축제의 성공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1973년, 연극 ''내셔널 램푼의 레밍스''는 많은 우드스톡 공연자들을 패러디한 "우드척" 축제를 묘사했다.[154]
  • 타임'' 잡지는 2010년 3월 18일, 잡지의 "10대 음악 축제 명장면" 목록에 "우드스톡의 더 후 - 1969"를 선정했다.[155]
  • 2005년, 아르헨티나 작가 에드가 브라우는 축제를 기념하는 장시 ''우드스톡''을 출판했다. 이 시의 영어 번역본은 2007년 1월 Words Without Borders에 의해 출판되었다.[156]
  • 2017년, 가수 라나 델 레이코첼라에 있는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미국 간의 긴장에 대한 걱정을 보여주기 위해 "코첼라 – 우드스톡 인 마이 마인드"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우드스톡 축제를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하여 향수를 표현했다.[157]
  • 2017년, 포틀랜드 록 밴드 포르투갈. 더 맨은 리드 싱어 존 고얼리가 아버지와 나눈 우드스톡 축제 티켓 스텁에 대한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앨범 우드스톡을 발매했다.[158]
  • 2019년 8월, 미국 우편 서비스는 우드스톡 50주년을 기념하는 영원 우표를 발행했다.[159] 이 우표는 USPS의 아트 디렉터인 안토니오 알칼라가 디자인했으며 2019년 8월 8일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처음 발행되었다.[160] 이 박물관은 록앤롤 명예의 전당과 공동으로 기획한 빈티지 록앤롤 악기, 포스터, 의상으로 구성된 전시회 ''Play it Loud''를 개최했다.[161] 기념식에는 우드스톡 프로듀서 마이클 랭과 조엘 로젠만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더 루츠의 "캡틴" 커크 더글러스가 연주한 ''The Star Spangled Banner''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오리지널 축제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연상시켰다.[162]
  • 2023년, 한국의 한 기획사가 공식적으로 우드스톡의 라이선스를 구매하여 포천에서 축제를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축제 준비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있었고, 결국 개최가 취소되었다.[163][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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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문서 人数については諸説あり。
[171] 문서 1970年に''At the Woodstock Festival''が発表された。
[172] 문서 アルバム『マウンテン・ライヴ 暗黒への挑戦』(1972年)に'Long Red'と'Waiting to Take You Away'が収録された。
[173] 문서 途中、社会活動家のアビー・ホフマンが曲と曲の合間にステージに乱入してホワイト・パンサー党のジョン・シンクレアの投獄に対する抗議の声を上げたが、直ぐにメンバーのピート・タウンゼントにギターで叩き出されてしまった。
[174] 서적 Anyway Anyhow Anywhere: The Complete Chronicle of The Who 1958-1978 Virgin Books
[175] 서적 Who I Am HarperCollins
[176] 앨범 라이ヴ・アット・ウッドストック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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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뉴스 2010 夏, 초대형 록페스티벌이 몰려온다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0-03-24
[180] 뉴스 도어즈 원년 멤버 등 ‘우드스탁 코리아’ 출연진 발표 http://news.khan.co.[...] 경향닷컴 2010-06-03
[181] 뉴스 '우드스탁 코리아' 공연 1주일 남겨놓고 '전격취소'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10-07-30
[181] 뉴스 ‘우드스탁 코리아’ 페스티벌 1주일 남기고 취소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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