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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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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니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마니교를 창시했으며,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영지주의 등의 가르침을 융합한 독특한 교리를 설파했다. 마니는 스스로를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라고 칭했다. 그는 샤푸르 1세의 후원을 받으며 선교 활동을 펼쳤으나, 바흐람 1세의 박해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마니의 사후, 마니교는 동서로 퍼져나가 중국에서도 한자어로 마니교(摩尼教)로 불렸다.

2. 명칭

"마니"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2] 바빌로니아-아람어 ''Mânâ'' [광채]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만다교인들은 "계몽된 주/왕"을 의미하는 ''mânâ rabba''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3] 헤게모니우스의 《아르켈라우스 행적》(4세기)에는 약간 경멸적인 "어떤" (Manes quidam)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14][33]

마니의 이름은 여러 형태로 변형되었는데, 그리스어로는 Mannichaios, 라틴어로는 Mannichaeus (Mannam fundens, "만나를 쏟아붓는 자") 등으로 나타난다.[14][33] "마니"는 히브리어 이름 메나헴("위로자" 또는 "위안자")의 애칭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4][33]

마니(Mani/Manes)라는 명칭은 근대유럽에서 유래되었다. 원래의 시리아어로는 "마니/마네"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파흘라비어, 파르티아어, 소그드어, 아랍어, 근세 페르시아어 등에서는 이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으며, 한자로는 "마니(摩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는 "마네스(Manes)", 라틴어에서는 "마네스/마니카에우스(Manes/Manichaeus)", 콥트어에서는 "마니카이오스(Manichaios)"라는 형태로 전해졌다.[42]

"마니" 자체는 시리아어권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쿠르비키오스'''"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파르티아인의 혈통을 가진 마니의 본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42]

마니의 존칭은 시리아어로 "살아있는"을 의미하는 "하이예(Haiye)"와 "스승"을 의미하는 "마르(Mar)"가 있으며, "마니 하이예(Mani Haiye)", "마르 마니(Mar Mani)" 등으로 불렸다.[42]

3. 생애



이 작품과 20세기에 발견된 다른 증거들은 마니를 역사적 인물로 확립한다.[16]


  • 216년: 마니 출생.
  • 224년: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4세가 아르다시르 1세에게 패배하여, 사산 제국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를 계승하고, "제왕"의 칭호를 계승.
  • 228년: 마니, 이때 첫 번째 계시를 받음.
  • 236년: 마니, 이때 두 번째 계시를 받고 아버지의 교단을 떠남.
  • 241년: 아르다시르가 사망하고, 아들 샤푸르 1세가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
  • 242년: 마니의 첫 번째 선교. 샤푸르와의 회견을 가짐.
  • 272년: 샤푸르 사망. 아들 호르미즈드 1세가 사산 제국의 왕이 됨.
  • 273년: 호르미즈드 1세 사망. 바흐람 1세 즉위.
  • 277년: 이때, 카르티르가 대마그가 되어 모든 이단을 처벌. 마니 사망.


마니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근처, 바빌로니아의 나흐르 쿠타 지역에 있는 마르디누 마을이나 아브루미야 마을에서 태어났다.[20][21] 그의 아버지 파틱(Παττικιος, 푸툭/Futtuqfa)은 에크바타나(현재 하마단) 출신으로 엘케사잇의 일원이었고, 어머니 마리암은 파르티아 혈통이었다.[42]

마니는 바빌론에서 엘케사잇 공동체 내에서 자랐다. 엘케사잇은 표면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였지만, 에비온파의 영향으로 천상의 사도들이 반복적으로 화신한다는 믿음 등 영지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46] 12세와 24세에 "천상의 쌍둥이"('syzygos')의 환영을 보았고, 아버지의 종파를 떠나 예수의 참된 메시지를 설교하라는 부름을 받았다.[24][25]

마니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 마르디누 마을에서 귀족 출신 아버지 파티크와 왕족 캄사라간 가문 출신 어머니 마르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파르티아의 귀공자'라고도 할 수 있는 출신이었다.[42]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유대교, 기독교, 피타고라스 학파, 마르키온파, 미트라교 등 다양한 사상·종교가 뒤섞여 있었다.[45] 파티크는 엘카사이파에 들어갔고, 마니는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길러졌지만, 4세 때 아버지에게 인도되어 엘카사이파 내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46]

마니는 교단에서 시리아어, 파흘라비어 등을 배우고, 『아담의 묵시록』, 『세트의 묵시록』, 『에녹서』 등 외경 문헌들을 섭렵했다.[47] 12세 때 의 '계시'를 처음 접했으며,[48] 성장한 후에는 마르키온과 바르 데이산의 저작, 『요한행전』, 『베드로 행전』, 『토마행전』 등을 애독했다.[49]

240년경, 24세에 파라클레토스 (알 타움)로부터 계시를 받고 개교했다. 그는 스스로를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로 칭했다.[50][51]

마니는 사카족이 거주하던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인도로 건너가 힌두교불교를 연구했다.[8] 알 비루니는 마니가 페르시아에서 추방된 후에야 인도에 갔다고 말했지만,[27] 이는 오류이거나 두 번째 여정일 수 있다.[8]

242년에 페르시아로 돌아온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페르시아어로 쓴 유일한 저서 ''샤부르간''을 헌정했다. 샤푸르 1세는 마니교로 개종하지 않고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했지만, 마니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그를 궁정으로 불렀다.[8][28] 마니는 공중 부양, 순간 이동, 신유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며, 회화에도 능했다.[8][29]

마니는 크테시폰으로 향하던 중,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아르사케스 왕조가 무너지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란 고원의 우르미아호 부근 간자크에서 소녀의 을 고쳐주고, 그 대가로 소녀와 그의 자매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수개월 후, 마니는 티그리스강 하구 마이산 주의 파라트에서 배를 타고 인도 데이브에 상륙했다. 투란·마크란·파르단 등 아프가니스탄 남부·파키스탄 서남부·인도 동남부에서 활동하며, 불교도였던 투란의 왕후 귀족과 고빈데샤라는 현자를 개종시켰다. 2년간의 인도 선교를 통해 마니는 불교 지식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인도의 마니교 공동체는 이후 소멸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기독교인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0]

인도에서 마이산으로 돌아온 마니는 사산 왕조의 마이산 총독 미흐르 샤 또는 왕의 동생이자 호라산 총독인 페로즈를 개종시켰다. 이후 샤푸르 1세를 알현하고, 자신이 발명한 '''마니 문자'''로 기록한 『샤푸라칸』을 헌상했다. 마니는 의사로서 궁정에 초빙되었고, 샤푸르는 마니를 총애하여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52]

크테시폰은 셈족 주민이 많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해 있었고, 샤푸르는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로아스터교 외에도 다양한 종교를 용인했다. 마니교 역시 그 중 하나로서 활동을 허가받은 것으로 보인다.[53]

242년에 돌아온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을 소개했고, 페르시아어로 쓰인 자신의 유일한 저서인 ''샤부르간''을 헌정했다. 샤푸르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유지했지만,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를 혼합한 마니의 가르침을 옹호했고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다.[8][28] 마니는 공중 부양, 순간 이동 및 신유를 포함한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며, 회화 화가로도 명성이 높았다.[8][29]

궁정에서 직책을 얻은 마니는 교회 제도를 정비하고 성전, 서간, 미니어처 제작에 관여했으며, 선교는 제자들에게 맡겼다. 파티크나 압사쿠야를 시리아 속주에, 앗다 등을 이집트 속주에, 자크 등을 팔레스타인에, 가브리야브를 아르메니아 왕국에, 마르 암모를 중앙아시아에 보내는 등 사산 왕조 안팎으로 교세를 확장했다.[54] 특히 가브리야브는 샤푸르의 장남이자 아르메니아 국왕 호르미즈드 아르다시르에게 접근했고, 암모는 파르티아 왕족 아르다반과 함께 파르티아 지방에서 현지 귀족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54] 마니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이 동서로 널리 퍼진 것에 만족한 듯,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에 종사했다.[54]

마니교 교의에는 조로아스터교 신관단에게 불쾌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조로아스터교 신화를 표절하여 마음대로 개변하고, 선신 오흐르마즈드(아후라 마즈다)는 악신 아흐리만(앙그라 마이뉴)에게 패배했으며, 조로아스터는 실패한 예언자로 취급되었다. 마니교 교회는 본래 조로아스터교 신관단의 명칭인 '데엔 마즈데슨'을 자칭하여 국내에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55]

샤푸르 1세의 후계자인 호르미즈드 1세는 짧은 기간 통치했지만 마니를 계속 후원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바흐람 1세는 조로아스터교 개혁가 카르티르의 추종자였으며, 마니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30]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하고 호르미즈드 1세가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바흐람 1세 시대에 카르티르의 세력이 확대되었고,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마니는 좌천되었다.[56]

바흐람 1세는 274년에 마니를 투옥했고, 마니는 한 달 안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니는 제자 우즈지, 세 명의 여성, 중앙아시아에서 온 암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또한 옥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집필 활동도 했다고 전해진다. 추위와 쇠사슬에 묶인 상황 속에서 노령의 마니는 쇠약해졌고, 석방 요구가 있었지만 바흐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56] 자료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날들을 방문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죽음은 그의 영혼이 빛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8]

마니의 최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설과,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후 이 잘렸다는 설이 있다.[57] 마니의 추종자들은 마니의 죽음을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의식적인 비유로 십자가형으로 묘사했다. 알 비루니는 바흐람이 마니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말한다. 그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그의 시신이 곤디샤푸르 대도시의 정문 위에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31] 이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32] 그의 시신이 사후 참수형을 통해 훼손되었고 그의 머리가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것이 장식의 원래 출처일 수 있다.[33] 후세의 마니교도들이 남긴 문서 등에 따르면, 가죽이 벗겨진 마니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랍어일화집에는 이 채워진 마니의 가죽이 종종 사산 왕조 통치하의 시가지 성문에 매달려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최근 나타난 파르티아어 자료에서는 옥중에서도 자유롭게 신자와 면회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알려져 비교적 온건한 상황에서 옥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61][58]

마니의 옥중 모습은 우즈지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교주의 죽음은 마니교도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서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유하여 "순교", 동방에서는 붓다의 열반에 비유하여 "열반"이라고 칭해졌다.[59]

3. 1. 유년기

마니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근처, 바빌로니아의 나흐르 쿠타 지역에 있는 마르디누 마을이나 아브루미야 마을에서 태어났다.[20][21] 그의 아버지 파틱(Παττικιος, Futtuq)은 에크바타나(현재 하마단) 출신으로 엘케사잇의 일원이었고, 어머니 마리암은 파르티아 혈통이었다.[42]

마니는 바빌론에서 엘케사잇 공동체 내에서 자랐다. 엘케사잇은 표면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였지만, 에비온파의 영향으로 천상의 사도들이 반복적으로 화신한다는 믿음 등 영지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46] 12세와 24세에 "천상의 쌍둥이"('syzygos')의 환영을 보았고, 아버지의 종파를 떠나 예수의 참된 메시지를 설교하라는 부름을 받았다.[24][25]

마니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 마르디누 마을에서 귀족 출신 아버지 파티크와 왕족 캄사라간 가문 출신 어머니 마르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파르티아의 귀공자'라고도 할 수 있는 출신이었다.[42]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유대교, 기독교, 피타고라스 학파, 마르키온파, 미트라교 등 다양한 사상·종교가 뒤섞여 있었다.[45] 파티크는 엘카사이파에 들어갔고, 마니는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길러졌지만, 4세 때 아버지에게 인도되어 엘카사이파 내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46]

마니는 교단에서 시리아어, 파흘라비어 등을 배우고, 『아담의 묵시록』, 『세트의 묵시록』, 『에녹서』 등 외경 문헌들을 섭렵했다.[47] 12세 때 의 '계시'를 처음 접했으며,[48] 성장한 후에는 마르키온과 바르 데이산의 저작, 『요한행전』, 『베드로 행전』, 『토마행전』 등을 애독했다.[49]

240년경, 24세에 파라클레토스 (알 타움)로부터 계시를 받고 개교했다. 그는 스스로를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로 칭했다.[50][51]

3. 2. 선교 활동

마니는 사카족이 거주하던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인도로 건너가 힌두교불교를 연구했다.[8] 알 비루니는 마니가 페르시아에서 추방된 후에야 인도에 갔다고 말했지만,[27] 이는 오류이거나 두 번째 여정일 수 있다.[8]

242년에 페르시아로 돌아온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페르시아어로 쓴 유일한 저서 ''샤부르간''을 헌정했다. 샤푸르 1세는 마니교로 개종하지 않고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했지만, 마니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그를 궁정으로 불렀다.[8][28] 마니는 공중 부양, 순간 이동, 신유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며, 회화에도 능했다.[8][29]

마니는 크테시폰으로 향하던 중,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아르사케스 왕조가 무너지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란 고원의 우르미아호 부근 간자크에서 소녀의 을 고쳐주고, 그 대가로 소녀와 그의 자매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수개월 후, 마니는 티그리스강 하구 마이산 주의 파라트에서 배를 타고 인도 데이브에 상륙했다. 투란·마크란·파르단 등 아프가니스탄 남부·파키스탄 서남부·인도 동남부에서 활동하며, 불교도였던 투란의 왕후 귀족과 고빈데샤라는 현자를 개종시켰다. 2년간의 인도 선교를 통해 마니는 불교 지식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인도의 마니교 공동체는 이후 소멸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기독교인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0]

인도에서 마이산으로 돌아온 마니는 사산 왕조의 마이산 총독 미흐르 샤 또는 왕의 동생이자 호라산 총독인 페로즈를 개종시켰다. 이후 샤푸르 1세를 알현하고, 자신이 발명한 '''마니 문자'''로 기록한 『샤푸라칸』을 헌상했다. 마니는 의사로서 궁정에 초빙되었고, 샤푸르는 마니를 총애하여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52]

크테시폰은 셈족 주민이 많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해 있었고, 샤푸르는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로아스터교 외에도 다양한 종교를 용인했다. 마니교 역시 그 중 하나로서 활동을 허가받은 것으로 보인다.[53]

3. 3. 교회의 형성

242년에 돌아온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을 소개했고, 페르시아어로 쓰인 자신의 유일한 저서인 ''샤부르간''을 헌정했다. 샤푸르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유지했지만,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를 혼합한 마니의 가르침을 옹호했고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다.[8][28] 마니는 공중 부양, 순간 이동 및 신유를 포함한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며, 회화 화가로도 명성이 높았다.[8][29]

궁정에서 직책을 얻은 마니는 교회 제도를 정비하고 성전, 서간, 미니어처 제작에 관여했으며, 선교는 제자들에게 맡겼다. 파티크나 압사쿠야를 시리아 속주에, 앗다 등을 이집트 속주에, 자크 등을 팔레스타인에, 가브리야브를 아르메니아 왕국에, 마르 암모를 중앙아시아에 보내는 등 사산 왕조 안팎으로 교세를 확장했다.[54] 특히 가브리야브는 샤푸르의 장남이자 아르메니아 국왕 호르미즈드 아르다시르에게 접근했고, 암모는 파르티아 왕족 아르다반과 함께 파르티아 지방에서 현지 귀족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54] 마니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이 동서로 널리 퍼진 것에 만족한 듯,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에 종사했다.[54]

마니교 교의에는 조로아스터교 신관단에게 불쾌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조로아스터교 신화를 표절하여 마음대로 개변하고, 선신 오흐르마즈드(아후라 마즈다)는 악신 아흐리만(앙그라 마이뉴)에게 패배했으며, 조로아스터는 실패한 예언자로 취급되었다. 마니교 교회는 본래 조로아스터교 신관단의 명칭인 '데엔 마즈데슨'을 자칭하여 국내에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55]

3. 4. 순교

샤푸르 1세의 후계자인 호르미즈드 1세는 짧은 기간 통치했지만 마니를 계속 후원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바흐람 1세는 조로아스터교 개혁가 카르티르의 추종자였으며, 마니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30]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하고 호르미즈드 1세가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바흐람 1세 시대에 카르티르의 세력이 확대되었고,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마니는 좌천되었다.[56]

바흐람 1세는 274년에 마니를 투옥했고, 마니는 한 달 안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니는 제자 우즈지, 세 명의 여성, 중앙아시아에서 온 암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또한 옥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집필 활동도 했다고 전해진다. 추위와 쇠사슬에 묶인 상황 속에서 노령의 마니는 쇠약해졌고, 석방 요구가 있었지만 바흐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56] 자료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날들을 방문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죽음은 그의 영혼이 빛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8]

마니의 최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설과,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후 이 잘렸다는 설이 있다.[57] 마니의 추종자들은 마니의 죽음을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의식적인 비유로 십자가형으로 묘사했다. 알 비루니는 바흐람이 마니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말한다. 그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그의 시신이 곤디샤푸르 대도시의 정문 위에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31] 이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32] 그의 시신이 사후 참수형을 통해 훼손되었고 그의 머리가 전시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것이 장식의 원래 출처일 수 있다.[33] 후세의 마니교도들이 남긴 문서 등에 따르면, 가죽이 벗겨진 마니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랍어일화집에는 이 채워진 마니의 가죽이 종종 사산 왕조 통치하의 시가지 성문에 매달려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최근 나타난 파르티아어 자료에서는 옥중에서도 자유롭게 신자와 면회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알려져 비교적 온건한 상황에서 옥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61][58]

마니의 옥중 모습은 우즈지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교주의 죽음은 마니교도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서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유하여 "순교", 동방에서는 붓다의 열반에 비유하여 "열반"이라고 칭해졌다.[59]

4. 사후

마니의 사후, 바빌로니아로 피난한 제자 시신은 교단의 지휘를 맡았고, 이후 마니교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로마 제국 등으로의 전도에 힘썼으며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마니교의 전례에서는 마니의 수난을 "베마"(베ー마)라고 하며, 제례의 날이 되었다。

마니교는 후에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중국에까지 퍼졌다. 마니는 "가르침의 정수"의 복음 전도를 중시하여, 스스로 저술한 교전을 각 언어로 번역하게 하고, 입교자를 얻기 위해 각지에서 우세한 종교의 교의에 접근했다. 조로아스터교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을, 서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동방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등, 각 지역마다 포교 목적으로 유연하게 용어 및 교의를 변형시켰다. 이 결과 세계 종교로 발전했지만, 교의의 일관성은 유지되지 않았다。

5. 교의

마니의 가르침은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르키온주의,[34] 헬레니즘랍비 유대교, 영지주의 운동, 바빌론 및 기타 메소포타미아 종교,[35] 그리고 신비주의 종교의 가르침을 "결합",[36][13] 계승하고 능가하기 위해 의도되었다.[34] 마니교는 선과 악의 엄격한 이원론적 우주론에 기반하며, 이는 마니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당시 많은 영적 전통의 "친숙한 신화적" 요소였다.[36]

마니는 20대 중반에 교육, 자기 부정, 금식, 정결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알 비루니에 따르면, 마니는 신약성경에서 약속된 ''보혜사''이자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다.[37] 그러나 Lodewijk J. R. Ort는 마니의 등장의 최종성에 대한 확정적인 언급은 마니교 경전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39] 기독교 종말론에 따르면, 역사의 종결 시점에 최후의 심판을 수행하는 것은 마니가 아니라 예수이다.[40]

마니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선언했으며,[34] 현존하는 마니교 시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극도로 존경하며 찬양한다. 마니교 전통은 또한 마니가 예수, 조로아스터, 역사적 부처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적 인물의 환생이라고 주장한다.

마니의 추종자들은 "선택자" (''electi'')와 "청취자" (''auditores'') 계급으로 나뉘는 교회 구조로 조직되었다. 오직 ''electi''만이 법을 엄격하게 따르도록 요구받았으며, ''auditores''는 그들을 돌보며 환생 후에 차례로 ''electi''가 되기를 희망했다.

마니교는 유대교·조로아스터교·기독교·영지주의, 더 나아가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니교 교단은 전도지에서 기독교나 불교를 칭하며 교세를 교묘하게 확장했다.[48] 유대교의 예언자의 계보를 계승하여, 자라투스트라·석가모니·예수를 예언자의 후계자로 해석하고, 마니 스스로도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은 예언자이며, "예언자의 인장"임을 주장했다. 또한 바울의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계율주의를 부정하는 한편, 영지주의의 영향에서 지혜인식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악 이원론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마니교는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으며, 그 종교 형식(유대교·기독교의 계승, 예언자의 인장, 단식월)은 로마 제국 및 아시아 각지로의 전도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졌다.[57][62] 4세기에는 서방에서 융성했지만, 6세기 이후에는 동방으로도 퍼져, 중국에서는 한자로 "마니교(摩尼教)"라고 표기되었다.[48][63][64] 마니교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4세기~5세기교부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57][65] 7세기무함마드에 의한 이슬람교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무함마드 또한 "예언자의 인장"을 스스로 칭한 사람 중 한 명이다.[61][66]

6. 저작

마니는 세계 종교의 교조로서는 드물게 스스로 경전을 저술했지만, 그 대부분은 산실되었다.[57] 마니의 정전은 원래 시리아어로 쓰인 6개의 작품과 페르시아어로 쓰인 한 작품, 즉 ''샤푸라간''을 포함한다. 그의 저서 중 완본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여러 언어로 된 방대한 양의 자료들과 더불어, 그의 작품에서 발췌된 긴 시리아어 인용문을 포함하여 수많은 단편과 인용문이 존재한다.

마니의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샤푸라칸만이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여졌고, 그 외에는 마니의 모국어인 시리아어로 쓰여졌다. 또한, 그것을 기술하기 위해 마니는 시리아 문자를 개량하여 새로운 마니교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리아어로 쓰여진 마니의 저작은 흩어졌지만, 그리스어·콥트어·라틴어·소그드어 등의 각 언어로 번역된 단편으로 남아 있다.[67]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부분의 예로는 ''샤푸라간''(중세 페르시아어), ''거인서''(여러 언어로 된 수많은 단편), ''근본 서한''(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장문의 인용[68]), 그의 ''생존 복음''(또는 ''대복음'')의 여러 단편, 테오도르 바르 코나이가 인용한 시리아어 발췌문, 그리고 ''쾰른 마니 문서''에 수록된 그의 ''에데사 서한'' 등이 있다. 마니는 또한 마니교의 창조와 세계 역사를 표현하고 설명하기 위해 많은 그림과 회화가 포함된 독특한 마니교의 성서인 ''아르장''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9종의 작품이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67]


  • 『샤푸라칸』은 마니가 쓴 최초의 책으로, 샤푸르 1세에게 헌정되었으며, 예언자론과 묵시 문학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투르판에서 발견된 마니교 문서 속에 주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언자론에서는 마니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는 예언자의 역사에 이어져, 인도에서는 붓다,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 서방에서는 예수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바빌론 땅에 "예언자의 인장"으로서 마니가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묵시 문학 부분에서는 신약성서·에녹서からの引用が多い。종말에는 "지혜 세계의 신(클라데샤리야즈드)"이라고 불리는 "빛의 예수"가 강림하여, 선인과 악인을 심판한다. 마니는 여기서 『마태오 복음서』25장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리고 태양의 전차를 탄 미흐르야즈드가 세계를 대화재로 파괴하고, 남은 올바른 영혼을 회수한다. 후에 사산 왕조 황제들의 마니교 박해가 명확해지면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다.

  • 『복음서』는 샤푸라칸의 속편적인 내용으로, 아마도 정식 명칭은 『살아있는 복음서』이다. 그 외에 『위대한 살아있는 복음서』, 『성스러운 희망의 복음서』 등으로도 불렸다. 시리아 문자의 알파벳·알레프에서 타우까지의 22문자를 관으로 한 22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쾰른의 마니교 사본』에 세 개의 단장이 남아 있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를 자칭한다. 자신이 받은 계시가 아버지와 함께 엘카사이파 세례 교단에 속했을 때, 하늘에서 "쌍둥이"의 도래를 받았을 때의 일이라고 자서하고 있다. 신약 성서からの引用과, 그것에 대한 마니의 주석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단장에서는 "불멸의 복음서"라고 부르며 "숭고한 오묘, 위대한 행위"를 나타냈다고 표현하고 있다. 콥트어의 『마니교 시편』에서는 이것을 "저작의 왕", "마니의 신약 성서"라고 부르며 존숭했다.

  • 『보물창고』는 마니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호교론의 성격을 가진다. 세 개의 단장이 잔존하고 있는데, 그 중 두 개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한 마니교 반박서에 의한 것이다.[68]

  • 『비밀의 서』는 바르다이산파나 마니교 비판에 대한 반론 등이 생각되는 호교적 작품이다. 이븐 안 나딤의 『피흐리스트』에 총 18장의 목차와 개략이 실려 있다. 외경 자료가 많이 인용되어, 그것이 마니의 해석으로 예수에게 적용된 것은, 이 책이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의 기독교도 공동체에 접촉했고, 또한 후기의 저작임을 나타낸다.

  • 『전설』은 마니의 신화 체계를 나타낸 "전설"이다. 그리스어로는 "플라그마테이아"이며 일반적으로 "논고"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mythoi)와 동의어일 것으로 생각된다. 마니교도 이외에도 자주 읽히고, 반박 대상이 되었다. 테오도로스 바르 코나이와 이븐 안 안디임에 의한 마니교 신화 체계의 기록도, 이 책에 의했을 것이다.

  • 『화집』은 마니 자신이 그린 화집이다. 마니의 화력을 발휘하여, 복잡한 『전설』의 신화 체계를 신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각화한 것이다. 『복음서』를 그림으로 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오히려 『전설집』의 내용을 그림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화집에 의해 이란에서는, 한참 후대에도 "마니"라는 이름이 화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어의 마니교 문서 『법의략』에서는 『대문하익도』로 명명되어 "대이종도"(위대한 두 원리의 그림)라고 설명되어 있다.

  • 『거인들의 서』는 『에녹서』의 "거인들의 이야기"를 발췌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마니는 새롭게 저술했다. 콥트어 문서 『케파라이아』에서 마니 자신에게 "파르티아인의 소원에 의해 쓴 것"이라고 말하게 했으며, 구체적으로는 파르티아인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제자 마르 암모의 소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파르티아어·중세 페르시아어로는 "카완"의 제목이며, 『법의략』에서도 "구환"이라고 음역된다.

  • 『서간』에서 마니는 각지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제자들과, 모든 문제에 대해 많은 서간을 주고받았다. 『피흐리스트』에서는 76개의 표서가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본서』라고 불리는 서간에 대해 반박서를 썼다.[68]

  • 『시편』과 『기도』에서 마니는 두 개의 시편과 기도를 저술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니에게 귀속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7. 원천 자료

20세기까지 마니의 생애에 관한 신뢰할 만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븐 알나딤이 938년에 출판한 《피흐리스트》에 담긴 마니의 생애에 관한 내용이나, 비루니의 주장, 《악타 아르켈라이》와 같은 4세기 논쟁서들에 담긴 내용은 전설, 중상 비방, 찬양 등으로 치우쳐 있었다.[75]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피흐리스트》의 내용은 가장 신뢰할 만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피흐리스트》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세 번째 사자(Third Ambassador)"라는 표현 대신 "바시르(bašīr)"(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화가 마니(Mani the Painter)"라는 토포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75] 이는 《피흐리스트》를 제외한 이슬람교 전통 문헌에서 "화가 마니"라는 토포스가 "한 종교의 창시자"라는 토포스를 거의 대체한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1969년 상(上)이집트에서 발견된 쾰른 마니 코덱스(고대 그리스어 양피지 코덱스)는 기원후 400년경의 저작으로, 마니의 종교적 생애와 영적 발전에 대한 성인(聖人) 전기적인 설명과 마니의 종교적 가르침, 저작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마니에 대한 서방 기독교 전통은 5세기에 기록된 역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기초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스키티아누스는 엠페도클레스피타고라스의 교리를 기독교에 도입했고, 그의 제자 부다스 (테레빈투스)는 자신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신비의 서, 복음서, 보물, 머리라는 네 권의 책을 썼다. 그는 악마에 의해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41]

예로니모에 따르면 아르켈라우스는 "마니케우스"와의 논쟁에 대한 기록을 시리아어로 썼고, 이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는 분실되었고, 발췌본을 제외한 이 작품은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라틴어 번역본으로만 남아 있는데, 그 연대와 진실성은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1세는 칼케돈의 헤라클레안이 마니교도에 반대하는 책에서 ''아르켈라우스의 논쟁''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 헤게모니우스에 의해 쓰여졌다고 말했다.[41]

라틴어 기록에 따르면 "마네스"는 궁정에서 도망친 후 로마 메소포타미아의 카스차르(카르차르)라는 도시에서 마르켈루스에게 편지를 보냈고, 마르켈루스의 요청에 따라 아르켈라우스 주교와 종교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그는 논쟁에서 패배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도중에 디오도리데스라는 마을의 사제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아르켈라우스가 사제를 대신하여 나타나 그를 다시 물리쳤다.[41]

아르켈라우스는 "마네스"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는데, 스키티아누스는 "사도 시대에" 살았고, 테레빈투스는 부다스라는 이름이 자신에게 부여되었다고 말했으며, 산에서 천사에 의해 길러졌고, 페르시아 예언자와 미트라의 아들에 의해 사기꾼으로 판명되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41]

논쟁에서 그는 구체, 두 개의 발광체, 영혼의 윤회, 그리고 신에 대한 ''프린키피아''의 전쟁에 대해 가르쳤고, "코르비키우스"(코르비쿠스)가 테레빈투스의 책을 번역했다. 그는 토마스, 아다스, 헤르마스라는 세 명의 주요 제자를 만들었고, 그는 그들에게 기독교인의 책을 구하도록 보냈다.[41] 라틴어 이야기에 따르면, 마네스는 아라비온으로 돌아와 페르시아 왕에게 체포되어 살가죽이 벗겨졌고, 그의 시체는 새들에게 맡겨졌으며, 그의 피부는 공기로 채워져 도시 문에 걸렸다.[41]

화가 마니가 부크람-구르(바흐람) 왕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모습. 알리-시르 나바'이의 16세기 그림, 샤크루히아(타슈켄트).


중국 차오안 사원의 마니상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에 반대하여 종파 운동을 일으킨 화가로 묘사된다. 그는 샤푸르 1세에게 박해를 받아 중앙아시아로 도망쳐 제자들을 만들고 사원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동굴에 미리 식량을 준비해 놓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며 1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뒤, 1년 후에 그 동굴에서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그들은 1년 후에 그곳으로 돌아와 그를 발견했고, 그는 그들에게 '에르겐크'(아르장)라고 불리는 삽화가 담긴 책을 보여주며 천국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41]

그 후 그는 많은 추종자를 얻었고, 샤푸르가 죽자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새로운 왕 호르미즈다스는 그 종파에 가입하여 보호하고 마니에게 성을 지어주었다. 다음 왕 바흐람은 처음에는 마니를 지지했다. 그는 몇몇 조로아스터교 교사들과 그가 논쟁을 벌이게 한 후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고 그의 피부를 채워 매달았다. 그 후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인도와 중국으로 도망쳤다.[41]

마니의 생애를 전하는 역사적 문서로는 다음 두 가지가 알려져 있다.[69]

  • Hegemonius영어의 Acta Archelaila(4세기)
  • 이븐 안 나딤의 《피흐리스트》(10세기 말)

8. 한국과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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