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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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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리비아의 역사는 티와나쿠 문명의 흥망성쇠, 잉카 제국의 지배,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거쳐 독립, 19세기 페루-볼리비아 연합의 성립과 태평양 전쟁, 20세기 자유주의 정부, 차코 전쟁, 볼리비아 혁명, 군사 정권, 민주화, 그리고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시대를 거쳐 현재 루이스 아르세 정권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사건들로 이어진다. 특히, 20세기에는 원주민들의 권리 신장과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두드러졌으며, 2019년의 정치적 혼란과 2020년의 정권 교체를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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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역사
지도
기본 정보
볼리비아 국기
국기
볼리비아 국장
국장
국가볼리비아 다민족국
수도수크레
사실상의 수도라파스
공용어스페인어
케추아어
아이마라어
과라니어
면적1,098,581 km²
인구11,673,029 명 (2020년)
통화볼리비아노 (BOB)
정치
정치 체제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대통령루이스 아르세
부통령다비드 초케우앙카
역사
독립1825년 8월 6일 (스페인으로부터)
경제
명목 GDP (2023년 추정치)449억 2천만 달러
1인당 명목 GDP (2023년 추정치)3,670 달러
기타
국가 코드BOL
ISO 3166-1BO / BOL
국가 도메인.bo
전화 코드+591

2. 스페인 점령 이전 시기

현재 볼리비아 지역은 2000여 년간 사람이 살아왔으며, 아이마라족(Aymara)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볼리비아 서부, 페루 남부, 칠레 북부에 정착했다. 현재의 아이마라족은 자신들을 볼리비아 서부의 티와나쿠(Tiwanaku)에 존재했던 발달된 문명과 연관짓는다.

볼리비아 원주민의 문화는 산소가 부족하고 토양이 척박하며 기상 이변이 심한 해발 고도 환경인 알티플라노에서 발전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인구는 대부분 코차밤바 주와 추키사카 주의 알티플라노 계곡에 집중되어 있었다. 감자는 티티카카 호수 근처에서 기원전 8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퀴노아는 약 3,000~4,000년 전에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구리 생산은 기원전 2000년에 시작되었다. 라마, 알파카, 비쿠냐는 가축화되어 운송, 식량, 의류에 사용되었다.

볼리비아의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기원전 1500년경에 티티카카 호수 남동안에 출현한 치리파 문화 이전의 자세한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66] 그러나 주변국의 고고학 조사와 일부 유적에서 출토된 첨두기 등으로부터 뷔름 빙기 말기에는 이미 인류가 어떤 형태로든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6][67] 호수 자원은 이후에도 인류 생활의 중심으로 기능하며 치리파 문화로 이어졌다.[68]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1000년의 전기에는 호안의 동식물 채취·수렵 생활이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800년까지의 중기에는 낙타과 동물 사육과 농경 등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50년에 걸쳐 후기에 들어가자 제사 의례가 시작되어, 기단과 지하식 광장과 같은 유구를 볼 수 있다.[69]

기원전 200년에 들어 티티카카 호수 동안의 티와나쿠 유적을 중심으로 한 티와나쿠 문화가 출현한다. 이 문화는 1150년경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III기라고 불리는 300년부터 500년에 걸쳐 대형 제사 건조물이 출현하는 등 큰 발전을 보였다.[69] 티와나쿠 지역은 해발 4000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온난한 동부의 코차밤바나 광물 자원이 풍부한 남부의 아타카마 사막 방면으로 확대되어 주변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태양의 문이나 폰세 석상에서 보이는 투누파와 조인과 같은 문양이 와리 문화 등으로 파급되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70][71] 다만, 이러한 진출이 직접적인 지배 하에 이루어진 것인지, 교역 등을 포함한 간접적인 접촉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70]

15세기 후반에 들어 케추아족이 일으킨 잉카 제국에 의한 정복이 시작되어 볼리비아 지역은 콜라수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72]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현재 공용어 중 하나가 된 케추아어가 보급되었고, 고도의 도시 문명이 번성했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는 극히 고도의 기술 수준의 건조물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73]

2. 1. 티와나쿠 문화

티와나쿠의 최전성기 영토, AD 950경


볼리비아 서부에 위치한 티와나쿠(Tiwanaku)는 아이마라족(Aymara)이 이 지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의 아이마라족은 자신들을 이 티와나쿠 문명과 연관짓는다. 티와나쿠는 기원전 1200년 전에 농업 기반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서기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도시로 성장하여 안데스 남부의 중요한 지역 세력이 되었다.

티와나쿠는 도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는 대략 6.5 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15,000 - 30,000명 가량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위성 이미지를 이용한 결과, 티와나쿠의 세 주요 계곡을 가로지르는 "범람충적 평야"(flooded-raised field) 농업(아이마라 언어로는 suka kollus)의 범위를 지도로 그려본 결과 인구 부양능력은 285,000명부터 1,482,000명 사이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기 400년경에 티와나쿠는 지역적 지배세력으로부터 침략적 국가로 성장하였다. 티와나쿠는 그 세력권을 [https://en.wikipedia.org/wiki/Yungas 융가스(Yungas)]까지 넓혔으며 자신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페루, 볼리비아, 칠레의 다른 문화들에게 전파하였다. 티와나쿠는 식민지 개척, 무역협정, 국가종교 창설 등을 통해 세력을 넓혔으며, 다른 문화들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윌리엄 이스벨(William H. Isbell)은 “티와나쿠는 서기 600년에서 700년 사이에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때 민간건축에 대해 규모가 큰 기준(monumental standards)을 확립하여 거주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고 언급하였다. 티와나쿠는 엘리트 계층이 다른 모든 지역으로부터 얻은 식량의 잉여분을 얻음으로써 모든 주민들 사이에 식량을 재분배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됨으로써 그 지위를 획득하였다. 티와나쿠에서

그들의 권력은 서기 950년까지 이러한 자원잉여 이용을 통해서 계속 커져갔다. 이 시기에 티티카카 분지의 강우량이 크게 감소하였다. 엘리트 계층을 위한 잉여식량이 바닥나자 그들의 권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티와나쿠는 권력의 주요 원천인 식량생산이 말라붙음으로 인해서 약 서기 1000년경에 사라져 버렸다.

태양의 문

2. 2. 잉카 통치 시대

잉카 제국의 확장 (1438–1527)


1438년에서 1527년 사이에 잉카 제국은 대규모 확장을 시작하여 현재 볼리비아 서부 지역의 대부분을 획득하였다. 9대 황제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1438년-1471년 통치)의 통치 하에 잉카의 확장이 증가하였다. 그의 아들 토파 잉카 유판키 역시 1471년-1493년의 재위기간 동안 잉카의 국토를 넓혔다. 15세기에 잉카인들은 아이마라족과 티티카카 호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볼리비아 서부지역은 잉카 국토의 한 부분이 되었다.

잉카인들이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 고원지대의 나머지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원주민들은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잉카 제국은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케추아어)를 정복한 영토에 퍼뜨렸다. 잉카인들은 티티카카 호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외를 적용하였는데 그들은 아이마라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볼리비아인들에게 키푸 등 여러 가지 농업기술이 전파되었다. 잉카인들은 정교한 도로 체계, 관개시설, 산비탈의 계단식 경작지를 구축하였다. 잉카 제국이 정복한 지역은 에콰도르 안데스 지역, 페루, 칠레 북부, 그리고 아르헨티나 서북부 등 남아메리카의 2,000마일에 걸친 제국이 형성되었다. 잉카 제국은 볼리비아 알티플라노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지배하였지만 지배형태는 복지국가였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이 제공되었다. 다른 잉카인들과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인들은 매년 일정한 날짜의 노역을 해야 했다.

3. 스페인 식민지 시기

스페인이 가장 많은 은을 캐내간 세로 리코(Cerro Rico) 은광


스페인 식민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볼리비아 지역은 “고지대 페루”(Upper Peru) 또는 “차르카스”(Charcas)라고 불렸으며 리마 부왕령 관할하에 있었다. 지방 정부는 추키사카(Chuquisaca) 또는 라 플라타(La Plata, 현재의 수크레)에 위치한 차르카스 왕립 심의원(審議院, Real Audiencia)이라는 기구로부터 권한을 받았다. 볼리비아의 은광은 스페인 제국의 부를 대부분 책임졌으며 세로 리코 소재지로 유명한 포토시는 오랫동안 서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제국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식민지들의 성공적 관리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주로 독립지향적인 정복자들을 통제하는데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곧 그 주요한 목적은 왕실의 수입원을 유지하는 것과 인디오 주민들로부터 재화와 노동을 공물로 모으는 것이 되었다. 이를 위해 스페인은 신세계에 다양한 기관들이 상호견제하는 정교한 관료기구를 만들어내었으며 지방관료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율성을 누렸다.

‘고지대 페루’(Upper Peru)는 처음에는 페루 부왕령의 한 부분이었다가 1776년에 새롭게 설립된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그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로 편입되었다. 부왕령은 ‘심의원’(audiencia)의 보좌를 받는데 이 기구는 동시에 법적 항소를 심의하는 최고재판소이기도 하며 부왕이 부재할 경우에는 행정 및 집행권력을 갖기도 하였다. ‘고지대 페루’의 부유함과 리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리마 당국은 1558년에 추키사카(현재의 수크레) 시에 심의원을 새로 설치하게 되었다. 추키사카는 특히 포토시의 행정중심 및 농산물 공급중심으로써 중요하게 되었다. 이 심의원의 관할지역은 차르카스(Charcas)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추키사카를 중심으로 반경 100리그(leagues)(=1,796km2)를 포괄하였으나 얼마후 산타크루스와 현재의 파라과이에 속하는 영토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쿠스코 지역 전체도 포함하게 되었다. 심의원의 의장은 이 지역내에서 사법적 권한뿐만 아니라 행정 및 집행권력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해당되었고 보다 중요한 결정은 리마에서 내려졌다. 이러한 상황은 ‘고지대 페루’의 경쟁심과 독단성에 대한 명성을 낳게 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에 의해서 더 강화되었다.

16세기의 포토시 은광


1545년, 원주민 디에고 와르파에 의해 볼리비아 남부에서 포토시 은광이 발견되었다.[75] 이 은광의 발견 이후, 포토시는 알토 페루 지배뿐만 아니라 신대륙의 경제와 권력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되었다.[76] 1570년대까지 은의 길이라고 불리는 리마에서 쿠스코를 거쳐 포토시에 이르는 도로가 정비되었고, 특히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12만 명에서 16만 명이 거주하는 서반구 최대 도시로 발전했다.[78] 동시에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이 지역에서의 광산 노동은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사고와 질병 등으로 인해 노동에 종사한 다수의 선주민들이 희생되었다.[78] 포토시에서의 광업을 위한 노동력은 부왕 톨레도에 의해 제도화된 미타(원주민 노동력 할당 제도)에 의해 징발되었다.[79][80]

스페인은 시민들에 의해서 선출되는 시정부에서 왕권을 대표하는 코레히도르(Corregidor, 시장)와 같은 왕실 관료들을 통해서 식민지들을 보다 작은 행정단위로 통제하였다. 19세기 말에 스페인은 왕실의 수입을 증대하고 남용을 제거하기 위해서 행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는 행정주(intendancy) 시스템을 만들어내었는데 이는 왕을 직접 대표하는 고위 관료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스페인 왕실이 지방정부들을 간접적으로만 통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행정절차들을 중앙집권화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오로페사(Oropesa)의 백작인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부왕이 지방귀족의 권리를 확인하였으며 그들에게 지방자치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왕실은 결국 스페인인 관료들인 인디아 코레히도르(corregidores de indios, 인디아 지역의 시장들)를 임용하여 인디언들로부터 공물과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인디아 코레히도르들은 또한 상품을 수입하여 인디오들이 그것을 구매하도록 강제하는 폭넓은 권력남용이었는데 이는 이들 관료들에게는 엄청난 부의 원천이 되었지만 인디오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분노를 일으켰다.

‘고지대 페루’의 최초 정착자들과 함께 성직자 및 교직자들도 오게 되면서 인디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552년에 ‘고지대 페루’의 주교 관할교구가 라 플라타에 설치되었고, 1605년에는 라파스와 산타크루스 역시 주교 관할교구가 되었다. 1623년에 예수회는 ‘고지대 페루’ 최초의 대학인 추키사카의 산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왕립 및 주교 고등대학을 설립하였다. 식민통치와 기독교 개종에 대한 인디오들의 반응은 다양하였다. 많은 인디오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결별하고 스페인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시장경제에 진입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특히 새로운 공물 평가제도에 저항하기 위해서 법원을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또다른 인디오들은 자신들의 관습을 가능한 한 최대로 고수하면서 일부는 백인 통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지역적이고 대부분 조직화되지 않은 반란들이 식민통치 기간 내내 발생하였다. 볼리비아와 페루에서는 18세기에만 100여 번의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공식적인 잉카 신앙은 급속히 사라져갔지만 인디오들은 지역의 인디오 통치자들의 보호하에서 그들의 토속 종교예식을 지속해갔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디오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토속 종교의 상징들이 편입된 새로운 민속적 가톨릭이 발전하였다. 초기의 인디오 반란들이 반기독교적이었다면, 16세기 말의 반란들은 메시아적 기독교 상징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적이면서도 동시에 반 스페인적이었다. 교회는 지역 인디오 종교들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예를 들어 1582년에 라 플라타의 주교는 인디오들이 티티카카 호숫가에 ‘코파카바나의 검은 성모’를 위한 성소(sanctuary)를 짓는 것을 허용하였다. 코파카바나는 예로부터 아이마라 족의 전통적 종교중심지였다.

포토시 은광의 매장량이 급격히 고갈되기 시작하자, 카를로스 3세1776년 알토 페루를 페루 부왕령에서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으로 편입하고, 새로운 세금을 창출하며, 판매세(알카발라)를 인상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은 알토 페루의 사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정도로 큰 동요를 일으켰고, 1781년 람파 지방의 투팍 아마루 2세의 반란을 시작으로, 칼랑가스, 파리아, 차얀타, 시카시카, 파카헤스 등지에서 잇따라 반란이 발생했다.[81]

볼리비아 독립의 선구자,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이러한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라카레하의 교정관이었던 세바스티안 데 세구롤라가 군사 지휘관으로 대응했지만, 잇따른 반란에 병사와 무기 지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각지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82] 같은 해 3월에는 라파스를 목표로 하는 '''투팍 카타리의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군의 규모는 아이마라 족 계열 원주민을 중심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규모였고, 소동 진압에는 무려 184일이 소요되었다.[82]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카디스를 점령하면서 스페인의 해외 영토 간 연계가 약화되었고, 독립 운동의 기운이 높아지게 되었다. 1809년에는 라파스와 추키사카에서 크리오요(현지 스페인계 백인)에 의한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체포되어 처형된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는 후에 "볼리비아 독립의 선구자"라고 불리며 현재까지도 존경받고 있다.[83]

3. 1. 스페인에 의한 정복

프란시스코 피사로, 디에고 데 알마그로, 에르난도 데 루케는 스페인 탐험대를 이끌고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다.[7] 1524년, 탐험대는 "비루"(Biru, 후일 페루로 변경)라는 전설적인 황금의 땅을 찾아 파나마에서 출발해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했다.

잉카 제국은 급속히 팽창하면서 내부적으로 취약해져 정복이 매우 쉬웠다.[7] 1527년 잉카 황제 와이나 카팍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었다.[7] 아타우알파는 형을 물리쳤지만, 1532년 스페인 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권력은 아직 확고하지 않았다.[7] 아타우알파는 산악 지배자가 해안도 지배한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피사로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의 영구 주둔과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면서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 전투가 벌어졌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호위병 12명을 처형하고 그를 몸값 방에 가두었다. 1년 후, 잉카의 수도 쿠스코가 함락[7]되어 새로운 스페인 정착지로 재건되었다.

피사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잉카인들은 곧 저항을 시작하여 식민지 시대 내내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7] 1537년, 스페인이 꼭두각시 황제로 세운 만코 잉카는 반란을 일으켜 "신 잉카" 국가를 재건했다.[8] 이 국가는 1572년 스페인이 반란을 진압하고 투팍 아마루를 쿠스코 광장에서 처형할 때까지 스페인에 저항했다.[8] 이후 볼리비아 고지대에서 일어난 반란은 투팍 아마루 2세의 대반란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조직되었다.[8]

스페인 통치 초기 20년 동안 볼리비아 고지대(당시 상부 페루 또는 차르카스 왕립 아우디엔시아) 정착은 피사로 군대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 군대 간의 내전으로 지연되었다.[8]정복자는 잉카 영토를 분할하여 북쪽은 피사로, 남쪽은 알마그로가 통제했다.[8] 1537년 알마그로가 만코 잉카 반란을 진압하고 쿠스코를 점령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8] 1538년 피사로는 알마그로를 처형했지만, 3년 후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했다.[8] 피사로의 형제 곤살로 피사로가 페루 고지대를 장악했으나, 곧 스페인 왕실에 저항하는 반란에 휘말렸다.[8] 1548년 곤살로 피사로가 처형된 후 스페인은 권위를 회복하고, 라 파스 시를 설립하여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켰다.[8]

3. 2. 스페인 식민 행정

스페인 식민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볼리비아 지역은 '고지대 페루' 또는 '차르카스'라고 불렸으며 리마 부왕령 관할하에 있었다.[10] 지방 정부는 추키사카(현재의 수크레)에 위치한 차르카스 왕립 심의원(Real Audiencia)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10] 볼리비아의 은광은 스페인 제국의 부를 책임졌으며, 세로 리코 은광으로 유명한 포토시는 서반구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10]

스페인은 식민지들을 작은 행정 단위로 통제하기 위해 왕실 관료(코레히도르)를 임명하고, 행정 절차를 중앙집권화했다.[11] 17세기 초 '고지대 페루'에는 4명의 코레히도르가 있었다.[11] 18세기 말, 스페인은 왕실 수입 증대와 남용 제거를 위해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행정주(intendancy) 시스템을 도입했다.[12] 1784년 스페인은 '고지대 페루'에 4개의 행정주를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의 라파스, 코차밤바, 포토시, 추키사카 주를 포괄하는 것이었다.[13]

3. 3.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한 점증하는 불만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으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급감했고, 18세기에 스페인이 더 많은 공물 금액을 요구하고 강제 광산 노동(mita) 날짜를 늘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79][80]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토착 문화 파괴는 인디오들의 알코올 중독을 심화시켰고, 코카 잎 사용도 늘어났다. 16세기 말에는 포토시에서만 1년에 50만 페소의 코카가 거래되었는데, 이는 95,000 바구니의 코카가 소비된 것이다.

식민 통치에 대한 인디오들의 불만은 투팍 아마루 2세의 대반란으로 이어졌다. 교육받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투팍 아마루 2세는 1770년대에 인디오들에 대한 코레히도르(인디아 지역의 시장)의 가혹한 처우에 분노했다. 1780년 11월, 투팍 아마루 2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잔인한 코레히도르들을 처형했다. 그는 스페인 통치 전복이 아닌 개혁을 위한 운동이라고 주장했지만, 자치 지역을 요구했다. 이 봉기는 곧 혁명으로 발전하여 페루와 볼리비아 안데스 지역에서 약 60,000명의 인디언들이 참여했다.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투팍 아마루 2세는 1781년 5월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고지대 페루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되었고, 1780년 초 포토시에서 봉기를 주도한 인디오 추장 토마스 카타리는 투팍 아마루 2세보다 한 달 먼저 스페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또 다른 반란 지도자인 훌리안 아파사는 투팍 카타리라고 불렸으며, 1781년에 100여 일 동안 라파스를 포위했다. 1782년에는 아이마라 출신 여성 바르톨리나 시사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 스페인은 1783년에야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 수천 명의 인디오들을 처형했다.

18세기 말, 크리오요(신세계에서 태어난 순수 스페인 혈통 후예) 사이에서도 스페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크리오요들은 광업과 농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경제적 영향력이 커졌지만, 스페인 왕실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인한 무역 장벽에 반발했다. 또한, 스페인이 고위 행정직을 반도인(스페인 출생)에게만 주는 것에 분노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대한 강조, 권위와 전통에 대한 의문,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해 크리오요들의 불만을 키웠다. 종교재판소도 니콜로 마키아벨리, 드니 디드로,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페인, 장 자크 루소, 존 로크 등의 저작이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유입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들의 사상은 특히 추키사카 지역 대학에서 교육받은 크리오요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되었다. 고지대 페루의 크리오요들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았으나 폭력성 때문에 거부했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사상과 계몽주의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4. 독립을 위한 투쟁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스페인 황실 당국이 약화되자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볼리비아 역사에서는 1809년을 독립 선언 시기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후 16년 동안의 투쟁을 거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공화국이 세워졌다.

1807~1808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반도 침공은 남아메리카 독립 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고지대 페루(알토 페루)의 엘리트들은 여러 권력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 충성하며, 페르디난드 7세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최고중앙위원회를 지지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식민 통치 개혁을 약속한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환영했고, 일부 관료들은 페르디난드의 누이 카를로타의 섭정을 지지했다. 소수의 급진적 크리오요들은 고지대 페루의 독립을 원했다.

이러한 권력 충돌은 1808년에서 1810년 사이에 고지대 페루에서 지방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독립을 위한 노력의 첫 단계였다. 1809년 5월 25일, 의원들은 의장 가르시아 레온을 물러나게 하고 페르디난드 7세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위원회를 설립했다. 1809년 11월 코차밤바, 오루로, 포토시가 라파스의 위원회에 합류했다. 이 두 반란 세력은 페루와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부왕들이 파견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7년 동안 고지대 페루는 플라타 강 지역 연합 군대와 페루에서 온 왕당파 군대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왕당파들이 아르헨티나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게릴라들은 농촌 지역을 통제하며 6개의 주요 소공화국을 형성했다. 이 지역에서 지역적 애국주의는 결국 전면적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다. 고지대 페루는 1817년까지 페루 부왕령 통치 하에서 상대적으로 평온함을 유지했다.

4. 1.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1820년 이후 보수적인 크리오요들은 차르카스 출신 페드로 안토니오 데 올라녜타 장군을 지지하였다. 올라녜타는 1812년의 자유주의적 스페인 헌법 복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러한 조치들이 왕실에 대한 충성을 위협한다고 확신하여 볼리바르수크레 휘하의 반란군은 물론 자유주의적 왕당파 군대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다. 페루의 왕당파가 1824년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맺은 조건부 항복문서에 그와 그의 군대가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녜타는 그의 지휘권을 놓지 않았다. 수크레가 실질적으로 고지대 페루에 대한 스페인 통치를 종식시킨 전투에서 그를 무찌르기까지 수개월 동안 전투를 지속하였고, 결국 1825년 4월 1일 자신의 부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8월 6일 볼리비아를 독립적인 공화국으로 선포하였으며, 그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진 볼리바르를 기려서 새 공화국의 이름을 따랐다.[129]

5. 19세기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원수의 대통령 재임 기간(1829-1839) 동안 볼리비아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89][90] 산타 크루스는 페루의 내정에 개입하여 페루와 볼리비아를 페루-볼리비아 동맹으로 통합하였다.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재위: 1829년 - 1839년)


이후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거의 모든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으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융가이 평야에서 동맹군이 패퇴하면서 볼리비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거의 60년 동안 쿠데타와 단명한 헌법들이 볼리비아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산타 크루스는 독립 후 쇠퇴한 국토와 경제 안정을 목표로 사회 개혁에 착수했다.[89] 국내 면직물 산업 활성화를 위해 외국산 면제품 수입을 일시 중단하고, 무역항을 제한하고, 관세를 인상하는 등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정부 기능, 교육 기관, 의료 시설을 확충하여 오늘날 볼리비아의 기초를 다져갔다.[90]

19세기 중반, 증기 기술 도입과 새로운 광맥 발견으로 은광 산업은 회복세를 보였다.[92] 볼리비아 태평양 연안에서는 구아노 채굴이 시작되어 농업용 비료로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92]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 광상이 발견되면서, 국경이 불분명했던 칠레와 채굴권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다.

아타카마 사막 근처 지도 (1879년)


1879년 2월 14일, 칠레군은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하는 등 태평양 연안의 볼리비아 광산 요충지를 공략했다. 1873년 페루와 맺은 Tratado de Alianza Defensiva|아리안사 방위 조약 (페루·볼리비아)|label=페루·볼리비아 비밀 조약es에 따라 페루에 원군을 요청했고, 4월 6일 칠레는 조약 파기를 요구하며 페루, 볼리비아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94]

태평양 전쟁 당시 볼리비아군 병사


1884년 발파라이소 조약이 체결(1904년 최종 강화)되어 아타카마 사막 지방을 칠레에 할양하면서 볼리비아는 내륙국이 되었다.[95]

이 전쟁으로 볼리비아 정치는 정당제로 변화했다.[95] 전쟁 후 보수당이 주도권을 잡고 군축과 문민 체제를 수립했다. 1888년 아니세토 아르세 대통령은 상실한 수출 경로 확보를 위해 안토파가스타-라파스 횡단 철도를 부설하고, 은 대신 주석 채굴을 육성했다.

5. 1. 페루-볼리비아 동맹 시기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원수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볼리비아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89][90] 산타 크루스는 페루의 내정에 개입하여 페루와 볼리비아를 페루-볼리비아 동맹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잉카 황제를 이 국가의 선조로 선언하였는데, 이는 지역의 권력 균형을 위협하고 과거 잉카 영토 위에 존재하던 국가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페루-볼리비아 동맹 시기의 볼리비아


이후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거의 모든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으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타 크루스가 이끌던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이 칠레와 페루 반군을 압박하여 파우카르타파 조약에 서명하게 만들었지만, 칠레 의회는 이 조약을 폐기하였다. 페루와 칠레의 반군은 산타 크루스에 대항하여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고, 융가이 평야에서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이는 볼리비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어, 이후 거의 60년 동안 쿠데타와 단명한 헌법들이 볼리비아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1829년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독립 후 쇠퇴한 국토와 경제의 안정을 목표로 사회 개혁에 착수했다.[89] 국내 면직물 산업 활성화를 위해 외국산 면제품 수입을 일시 중단하고, 무역항을 제한하고, 관세를 인상하는 등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정부 기능, 교육 기관, 의료 시설을 확충하여 오늘날 볼리비아의 기초를 다져갔다.[90]

1835년 1월, 산타 크루스는 페루의 친산타 크루스파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페루에 개입하여 아구스틴 가마라를 격파하고, 1836년 10월에는 남북 페루와 볼리비아 3국으로 이루어진 페루-볼리비아 연합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의 경제, 군사적 균형 변화를 우려한 칠레의 디에고 포르탈레스는 1836년 12월에 페루-볼리비아 연합에 선전 포고를 하고, 아르헨티나와 반산타 크루스파와 연합하여 침공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국 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91] 결국 산타 크루스는 유럽으로 망명했고, 지도자를 잃은 페루-볼리비아 연합은 1839년에 붕괴되었다.

5. 2. 태평양 전쟁 (1879-1883)

19세기 중반, 증기 기술 도입과 새로운 광맥 발견으로 은광 산업은 회복세를 보였다.[92] 볼리비아 태평양 연안에서는 구아노 채굴이 시작되어 농업용 비료로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92]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 광상이 발견되면서, 국경이 불분명했던 칠레와 채굴권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다.

1866년, 볼리비아와 칠레는 양국 경계를 남위 24도로 정하고, 남위 23~25도 지역은 공동 개발하여 수익을 나누는 조약을 맺었으나, 인구 비율에서 압도적이었던 칠레에 유리하게 작용했다.[93] 1874년 조약은 칠레 회사 수출 세율 동결에 중점을 두어 볼리비아의 의향과 달랐다.[93] 1878년, 일라리온 다사 대통령은 1874년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안토파가스타의 칠레계 초석 회사에 수출 세율 인상을 통보했다. 회사 측은 이를 거부하고 칠레에 부당함을 호소했다.[93]

1879년 2월 14일, 칠레군은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하고 북상하여 코비하, 메히요네스, 카라콜레스, 카라마 등 태평양 연안의 볼리비아 광산 요충지를 공략했다. 다사 대통령은 1873년 페루와 맺은 Tratado de Alianza Defensiva|아리안사 방위 조약 (페루·볼리비아)|label=페루·볼리비아 비밀 조약es에 따라 페루에 원군을 요청했고, 4월 6일 칠레는 조약 파기를 요구하며 페루, 볼리비아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94]

칠레군은 볼리비아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점령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1880년 5월 26일 Batalla del Alto de la Alianza|알토 데 알리안사 전투|label=알토 데 알리안사es 패배로 사실상 종전을 맞았다.[95] 1884년 4월 4일 발파라이소 조약이 체결(1904년 최종 강화)되어 아타카마 지방을 칠레에 할양, 볼리비아는 내륙국이 되었다.[95]

이 전쟁으로 볼리비아 정치는 정당제로 변화했다.[95] 전쟁 후 보수당이 주도권을 잡고 군축과 문민 체제를 수립했다. 1888년 아니세토 아르세 대통령은 상실한 수출 경로 확보를 위해 안토파가스타-라파스 횡단 철도를 부설하고, 은 대신 주석 채굴을 육성했다. 주석 산업 성장으로 파티뇨 등 주석 재벌이 탄생, 이들은 자유당을 지원하며 국가 영향력을 확대했다.[96]

6. 20세기

20세기 볼리비아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20세기 초반, 인구 대다수인 원주민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교육, 경제, 정치 참여에서 소외되었다.[10] 1932년-1935년 차코 전쟁에서 파라과이에 패배하며 큰 인명 및 영토 손실을 입었고, 이는 지배 계급에 대한 불신과 원주민들의 정치적 각성을 야기했다.[10] 1936년 스탠다드 오일사 국유화, 볼리비아 국영 석유회사(YPFB)가 설립되었다.[10]

1891년까지 주요 수출품이던 은(銀) 수요가 감소하고, 1902년부터 주석이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했다.[96] 1913년 주석은 전체 수출의 70%를 차지했다.[96] 주석 산업 재벌의 지지를 받은 자유당 정권은 1920년경까지 인프라 정비와 도시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소수 권력자가 다수 선주민을 지배하는 구조는 유지했다.[102]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주석 수출이 부진해지며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1932년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은 차코 지역 석유 개발 독점을 위해 파라과이와 전쟁을 벌였으나(차코 전쟁),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102] 볼리비아는 큰 영토와 인명 피해를 보았고, 군부 권위는 실추되었다.[102] 1937년 다비드 트로 루이로바 정권은 스탠다드 오일을 접수, 석유 공사를 설립해 국가 주도 경제 재건을 추진했다.

1941년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등은 민족 혁명 운동당(MNR)을 결성, 광산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주석 재벌에 대항했다.[103] 이들은 1943년 쿠데타로 탄생한 비야로엘 정권에 참여, 포퓰리스트 운동 기반을 다졌다.[103]

1952년 볼리비아 국민 혁명은 멕시코 혁명과 함께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주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0] MNR은 맑스주의 대신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1951년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1952년 4월 9일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가 이끄는 혁명군 봉기로 정규군이 해체되고 혁명이 성공했다.[106][107] 4월 15일 혁명 정부는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와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보편적 투표권 도입, 토지개혁, 농촌 교육 촉진, 주석 광산 국유화 등 개혁이 단행되었다. 아이마라 및 케추아 농민들을 국민 생활에 동참시키려 노력한 점은 볼리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1964년 군사 쿠데타로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정권이 붕괴되고, 약 20년간 군사 통치가 이어졌다.[10] 르네 바리엔토스 오르투뇨 장군은 농민 조합과 협력, 광산 노동자 파업에 대항했다.

1966년 체 게바라는 남미 혁명 거점 마련을 위해 볼리비아에 왔으나, 1967년 미국군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 사살되었다.[109]

1969년 레네 바리엔토스 대통령 사망 후 볼리비아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1971년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대령이 쿠데타로 집권했다. 그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다.[109] 1978년-1980년 부정선거 의혹과 잦은 쿠데타가 발생했고, 1980년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장군 쿠데타로 정권 장악, 인권 침해, 마약 거래, 경제 운영 실패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109]

1981년 군사 반란으로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축출 후, 1980년 선출된 의회가 소집, 새 행정 수반을 선택하며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했다.[10]

6. 1. 20세기 초반

인구 중 반 이상을 차지하는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광산의 원시적인 조건과 대농장의 거의 봉건적인 제도 아래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린 그들은 교육, 경제적 기회, 또는 정치적 참여에 대한 접근이 봉쇄되어 있었다.[10] 차코 전쟁(1932-1935)에서 파라과이에게 패배한 볼리비아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인명과 영토의 거대한 손실은 기존 지배 계급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으며 군대 복무는 토착 원주민들의 정치적 각성을 자극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10] 1936년에 스탠다드 오일사가 국유화되어 ‘볼리비아 국영 석유회사(Yacimientos Petroliferos Fiscales Bolivianos, YPFB)’가 설립되었다.[10] 차코 전쟁 종료로부터 1952년 혁명까지 상충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등장과 새로운 그룹들의 요구는 볼리비아 정치를 격동치게 하였다.[10]

다니엘 살라망카(Daniel Salamanca, 재임: 1931년 - 1934년)


1891년까지 수출액 기준으로 전체의 60%를 차지했던 은은 미국과 독일의 금본위제도 영향으로 급격히 수요가 위축되었다. 대신 급격하게 성장한 것은 주석 산업으로, 1902년 볼리비아의 주석은 수출액에서 은을 추월하여, 1913년에는 수출 전체의 70%를 차지하게 되었다.[96]

이러한 주석 산업을 배경으로 한 재벌을 아군으로 삼은 자유당 정권은 1920년경까지 이어졌다. 자유당은 인프라 정비와 도시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보수당에 의해 굳건해진 과두적 전통 체제를 계승하여, 로스카라고 불리는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선주민을 지배하는 신분 제도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했다.[102] 그러나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주석의 수출은 부진해졌고, 볼리비아는 실업률 증가, 경제적 어려움 등 불안정한 상황에 빠졌다.

1932년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은 미확정 국경 지대였던 차코의 석유 개발 독점을 꾀하여 파라과이에 전쟁을 걸었다('''차코 전쟁'''). 이 전쟁은 1935년까지 이어졌지만, 미국의 중재에 따른 부에노스아이레스 강화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볼리비아는 24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와 6만 5천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차코 전쟁으로 군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인 지배층에 대한 혐오감이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37년 다비드 트로 루이로바 정권은 미국계 기업인 스탠다드 오일을 접수하여 석유 공사를 설립했다. 동시에 광산 은행을 설립하여 주석 수출에 따른 외환 관리를 정부의 관리 하에 두고, 국가 주도로 경제 재건을 실시하는 방침을 세웠다.

1941년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게바라 아르세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민족 혁명 운동당(국민 혁명 운동당, MNR)은 광산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주석 재벌과의 대립 관계를 명확히 내세워, 1943년 쿠데타로 탄생한 비야로엘 정권에 입각했다. 파스는 경제 장관에 취임하여 노동자와 농민과의 관계를 넓혀 과두 지배에 대항하는 포퓰리스트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103]

6. 2. 볼리비아 국민 혁명

멕시코 혁명과 함께 볼리비아 국민 혁명은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있는 사회정치적 사건 중 하나이다.[10] 차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등장한 민족혁명운동당(MNR, 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은 맑스주의를 거부하고 볼리비아의 사회적 현실에 보다 적합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중산층 정치 동맹이었다. MNR은 1941년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와 왈테르 게바라 아르세 등이 주도하여 결성되었으며, 광산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주석 재벌과의 대립 관계를 명확히 내세웠다.[103]

MNR은 괄베르토 비야로엘(1943-1946) 민군 합작 정권에 참여하였으나, 1946년 과두적 광산업주들과 좌파혁명당(PIR)에 의해 물러났다. 주요 인물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6년간 재조직화에 힘썼다. 1949년 10월에는 짧지만 유혈이 낭자했던 내전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51년 5월 6일 제한 선거에서 파스 에스텐소로가 이끄는 MNR이 유효 투표 12만 표 중 45%를 획득하여 승리했다.[105] 그러나 마메르토 우리오라고이티아 정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총사퇴를 감행, 군에 정권을 넘겼다. MNR은 1951년 선거에서 승리하며 재등장했지만, 반대파들은 그 결과를 부정선거로 규정하며 취임을 거부했다.

1952년 4월 9일,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가 이끄는 혁명군이 라파스에서 봉기하여 정규군을 해체하고, 성공적인 혁명을 통해 볼리비아 국민 혁명을 성취했다.[106][107] 4월 15일, 혁명 정권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망명지에서 돌아온 파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와 이후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보편적 투표권이 도입되었고, 대규모 토지개혁이 수행되었으며, 농촌 교육이 촉진되었다. 1952년에는 가장 큰 주석 광산이 국유화되었다.

이 혁명에서 특히 의미있는 것은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유권자의 65% 이상을 차지하는 아이마라 및 케추아 농민들을 국민 생활에 동참시키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MNR이 추구한 정책들은 대부분 조합주의적이고 동화주의적이었지만, 이는 원주민-국가 관계가 갈등적이었던 볼리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 3. 군사 통치

1964년 군사 쿠데타로 파스 에텐쏘로 대통령 정권이 무너졌다.[10]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이 국민혁명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 볼리비아에서 거의 20년간 군사 통치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10] CIA이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미국의 기밀 해제 문서들은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파스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말, 케추아어를 구사했던 바리엔토스 장군은 1953년 농업 개혁으로 결성된 농민 조합과 협력하여 '군부-농민 협약'을 체결했다. 1960년대 내내 바리엔토스는 농민 조합을 이용하여 광산 노동자 파업에 대항하게 했다.

6. 4. 체 게바라의 최후

볼리비아에서의 체 게바라 (1966년)


군사 정권의 수반 레네 바리엔토스 오르투뇨는 반정부 세력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사회주의 혁명을 꾀하던 쿠바는 볼리비아를 "가장 약한 고리"로 여겼다. 1966년 11월 4일, 피델 카스트로와 결별한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남미 대륙 혁명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볼리비아로 건너왔다.[109] 그러나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농민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광산 노동자와의 연대에도 실패했다. 1967년 미국군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농민 게릴라전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무력 혁명을 이론화한 게바라의 전사로, 남미 혁명 운동에서 무장 투쟁 노선은 중대한 좌절을 겪었다.

6. 5. 정치적 혼미

1969년 레네 바리엔토스 대통령 사망 이후, 볼리비아는 약체 정권이 이어지며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군사 쿠데타와 역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1971년에는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반세르 대통령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집권하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109] 1978년 선거가 다시 실시되자 볼리비아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치러진 선거는 부정선거 의혹과 잦은 쿠데타로 얼룩졌다. 1980년에는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장군이 폭력적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가르시아 메사 정권은 인권 침해, 마약 거래, 경제 운영 실패 등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109] 가르시아 메사는 훗날 궐석재판에서 살인 등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 형을 선고받았다.[109] 그는 최근 '나, 독재자'(Yo Dictador)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109]

6. 6. 민주주의로의 이행

1981년 군사 반란으로 가르시아 메사가 축출된 후, 14개월 동안 세 개의 다른 군사 정부가 볼리비아의 심각해지는 문제로 고심했다.[10] 사회 불안으로 군은 1980년에 선출된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새로운 행정 수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10]

7. 1982년부터 현재까지

1982년 10월, 에르난 시레스 수아조가 첫 임기(1956–60)가 끝난 지 22년 만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0] 그러나 심각한 사회적 분열, 악화된 경제 운영, 약한 리더십으로 인해 조기 선거를 실시하고 헌법상 임기보다 1년 먼저 권력을 내려놓았다.[10]

1985년 선거에서 민족 민주 행동당(ADN)의 우고 반세르 장군이 일반 투표에서 다수 득표를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전 대통령 비크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의 MNR과 전 부통령 하이메 파스 사모라의 볼리비아 혁명 좌파 운동(MIR)이 뒤를 이었다.[10] 의회 결선 투표에서 MIR은 MNR 편에 섰고, 비크토르 파스 에스텐소로는 네 번째 대통령 임기를 위해 선택되었다.[10] 1985년 취임 당시, 그는 엄청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10] 경제 생산량과 수출은 수년 동안 감소하고 있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연간 24,000%에 달했다.[10] 사회 불안, 만성적인 파업, 통제되지 않은 마약 거래가 만연했다. 4년 동안, 파스 에스텐소로 행정부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10]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모든 주요 정당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민주주의에 헌신했다.[10] 그러나 1985년 10월의 주석 가격 폭락으로 인해 정부는 20,000명 이상의 광부를 해고해야 했다.[10]

1989년 선거에서는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가 이끄는 MNR이 1위를 차지했지만, 어느 후보도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했고, 헌법에 따라 의회 투표에서 하이메 파스 사모라가 대통령이 되었다.[10] 그는 비크토르 파스 에스텐소로가 시작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이어갔으며, 국내 테러에 대해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10]

1993년 선거는 공개적이고 정직한 선거와 평화로운 민주적 권력 이양의 전통을 이어갔다.[10] MNR은 ADN/MIR 연합을 33% 대 20%의 차이로 물리쳤고, MNR의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0] 그는 공격적인 경제 및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사회 일부 부문의 반대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빈번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10]

1997년 선거에서 ADN의 지도자 우고 반세르 장군은 22%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MNR 후보는 18%를 얻었다.[10] 반세르 장군은 볼리비아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연합을 결성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97년 8월 6일에 취임했다.[10]

7. 1. 2000년 코차밤바 전투

2000년 1월부터 4월까지, 코차밤바에서는 세계 은행과 국제 통화 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추진된 시립 상수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일련의 시위가 벌어졌다. 볼리비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여러 사람을 살해했으며, 시위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했다. 계속되는 혼란과 시민의 압력으로, 정부는 2000년 4월 10일에 민영화를 철회했다.[26]

2001년, 벡텔은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2500만달러 이상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벡텔은 자사의 계약이 부패와 형편없는 서비스로 어려움을 겪던 수도 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지방 정부가 물값을 인상했다고 주장했다. 계속된 법적 다툼은 반세계화 및 반자본주의 단체의 관심을 끌었다. 이 문제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 ''더 코퍼레이션''과 벡텔 웹사이트에서 다루어졌다. 2006년 1월, 벡텔과 다른 국제 파트너들은 격렬한 시위와 국제 투자 분쟁 해결 센터(ICSID)의 벡텔에 유리한 관할권 판결 이후, 볼리비아 정부와의 소송을 0.3달러(30센트)로 합의했다.[26]

7. 2. 2002년 대통령 선거

우고 반세르 대통령은 폐암 진단을 받고 2001년 8월 사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 호르헤 키로가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는 다시 출마하여 NFR의 만프레드 레예스 비야와 코카 재배자이자 원주민 지도자인 에보 모랄레스의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 (MAS)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반대파들은 이 선거가 명백한 부정행위들로 얼룩졌다고 비난하였다.

볼리비아인들이 투표소로 향하기 며칠 전, 미국 대사 마누엘 로차는 볼리비아 유권자들에게 모랄레스에게 투표하면 미국이 외국 원조를 중단하고 자국 시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랄레스는 거의 21%의 득표율을 얻어 산체스 데 로사다를 불과 몇 % 차이로 바짝 뒤쫓았다.

7. 3. 검은 10월

2000년대 초, 볼리비아 가스 전쟁은 점차 심화되는 갈등이었다. 이 전쟁은 볼리비아 남부 지역의 대규모 천연 가스 매장량 개발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2003년 9월, 파업과 봉쇄가 처음 시작되었고, 무력 충돌로 여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곤잘로 산체스 데 로사다 대통령은 시위대의 압력으로 사임했으며, 헌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부통령인 카를로스 메사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다. 로사다는 미국으로 도망쳤다. 메사는 취임하여 시위대의 요구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가 거세지자, 그는 2005년 3월 7일,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며 사임했다가 지지 약속을 받고 철회했다. 2005년 5월–6월, 메사는 다시 사임했고, 수크레에서 급하게 소집된 의회에서 당시 대법원장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벨체가 2005년 6월 9일 밤에 대통령이 되었다. 2005년 12월 4일,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의회를 전면 갱신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7. 4. 2005년 선거와 에보 모랄레스 정권

2005년 12월 선거에서 에보 모랄레스와 사회주의 운동(MAS)당은 54%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역사상 최초의 원주민 출신 볼리비아 대통령이 되었다.[28] 2006년 5월 1일, 모랄레스는 많은 볼리비아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천연 가스전 국유화 약속을 실행했다. 군대가 가스전을 점령하고 외국 기업으로부터 통제권을 회수했다.[28] 많은 가스전은 브라질 최대 에너지 기업인 페트로브라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모랄레스와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 실바 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2006년 10월 29일, 모랄레스 정부는 페트로브라스를 포함한 8개의 외국 가스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여 볼리비아 국영 가스 회사가 가스전에 대한 과반수 지분을 갖도록 하여 국유화를 완료했다.[29]

2007년 8월 말, MAS는 의회가 휴회 중일 때 모랄레스가 대법원 공석을 채우기 위해 취한 조치에 반대 투표를 한 헌법 재판소 판사들을 숙청했다.[31] 이 숙청은 정부 부처 간의 중재 수단을 해체했다.

2008년 5월 4일, 4개의 동부 주에서 자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이들 주는 중앙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선언했다. 4개의 국민투표 모두 통과되었다.[32] 모랄레스는 낮은 투표율을 부분적인 이유로 이 국민투표를 불법으로 간주했다.[33] 2009년 2월, 모랄레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원주민 볼리비아인에게 더 많은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7. 5. 2019년 대선과 정치적 혼란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온 2019년 볼리비아 정치 위기 이후, 임시 대통령 제닌 아녜스는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2020년 10월 18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모랄레스의 지지를 받은 사회주의 운동 후보 루이스 아르세가 승리했다. 그는 이전에 모랄레스 행정부에서 경제 및 공공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58] 2020년 11월 8일, 루이스 아르세는 부통령 다비드 초케우앙카와 함께 볼리비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59]

2021년 3월 12일, 볼리비아 정부는 테러, 선동, 음모 혐의로 전 임시 대통령 제닌 아녜스와 정부 구성원 5명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검찰에 따르면 그녀와 장관들은 2019년 모랄레스에 대한 쿠데타에 가담했다.[60][61]

7. 6. 루이스 아르세 정권

2019년 볼리비아 정치 위기 이후, 임시 대통령 제닌 아녜스는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2020년 10월 18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에보 모랄레스의 지지를 받은 사회주의 운동 후보 루이스 아르세가 승리했다. 그는 이전에 모랄레스 행정부에서 경제 및 공공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58] 2020년 11월 8일, 루이스 아르세는 부통령 다비드 초케우앙카와 함께 볼리비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59]

2021년 3월 12일, 정부는 테러, 선동, 음모 혐의로 전 임시 대통령 제닌 아녜스와 정부 구성원 5명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검찰에 따르면 그녀와 장관들은 2019년 모랄레스에 대한 쿠데타에 가담했다.[60][61] 볼리비아 대외 무역 연구소에 따르면, 볼리비아는 2021년 10월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누적 인플레이션을 기록했다.[62][63][64]

2024년 7월 현재, 집권당 MAS-IPSP(사회주의로의 운동 – 인민 주권의 도구) 내부에는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 지지자와 모랄레스 전 대통령 지지자 간에 깊은 내부 분열이 있었다.[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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