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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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도 금광은 1601년 금맥이 발견된 이후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으며, 202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7세기 초 일본 최대 금광산이었으며, 은 생산을 통해 은 화폐 제작에도 기여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량이 증가했고, 1896년 미쓰비시 합자회사에 매각되어 기계화를 추진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었으며, 1989년 휴산했다. 현재는 관광 명소로 운영되고 있으며, 2024년 세계 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인 강제 노역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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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금광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사도 금광 (佐渡金山, Sado Kinzan) |
다른 이름 | 아이카와 금은산 (相川金銀山, Aikawa kinginzan) |
위치 | 니가타현 |
국가 | 일본 |
광산 정보 | |
생산품 | 은 금 |
소유주 | 불명 |
개장 년도 | 불명 |
폐쇄 년도 | 1989년 |
역사적 지정 | |
지정 유형 | 일본의 국가 지정 사적 |
이미지 | |
논란 | |
강제 노동 | 제2차 세계 대전 중 한국인 강제 노동 피해 발생 |
유네스코 등재 논란 | 대한민국의 반발 강제 노동 역사 반영 여부 쟁점 |
참고 자료 | |
mindat.org | mindat.org |
docstoc.com | docstoc.com |
학습 자료 | 재발견!! 사도 금은산 (중학생 이상 대상) |
2. 역사
1601년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동안 막부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ton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이었다.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으로, 은 화폐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다.[60]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은은 특히 생사 등의 수입 대가로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1603년에는 사도부교 오쿠보 나가야스가 관할을 맡았다.
에도 시대 후반기에는 광맥을 따라 해저 아래 터널로 물이 유입되면서 채굴이 어려워졌다. 막부는 에도의 범죄자와 빈민들을 데려와 강제 노동에 투입했다. 이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사도 광산으로의 유배는 종신형이었다.[28]
메이지 시대 이후, 사도 광산은 정부가 운영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1869년에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했다.[27][26] 1896년에는 미쓰비시 합자회사에 매각되어(이후 미쓰비시 머티리얼) 기계화가 추진되었다. 그 결과, 메이지 시대 말에는 연간 금 생산량이 400kg을 초과하여 에도 시대 생산량의 최고조였던 17세기 초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26]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금 생산이 증대되었고, 1940년에는 광산 역사상 최고 생산량을 달성하여 연간 약 1500kg의 금과 약 25ton의 은을 생산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동원되었다.[29]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사도 광산은 구리 생산에 주력했지만 실적이 좋지 않아 조선인 노동력이 남아돌았다. 1945년 종전 당시 사도 광산에는 24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남아 있었고, 이후 사도를 떠났던 조선인 노동자들도 순차적으로 복귀했다(일부 행방불명). 일본에 영주를 희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니가타 항에서 조선반도로 귀국했다.[29]
1952년 미쓰비시는 사도 광산의 대규모 축소를 결정했고, 1989년에 휴산했다.[23][27] 1989년 휴산까지 사도 광산이 산출한 금은 78ton, 은은 2300ton에 달한다.[26] 현재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100%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가 운영하고 있으며, "사적 사도 금산"으로 일반 공개되는 것과 함께 세계 유산 등록을 목표로[26], 202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30]
'''사도 금광 주요 연혁'''
연도 | 사건 |
---|---|
1601년 | 쓰루코 은광의 광부 3명에 의해 광맥 발견[31] |
1603년 | 사도부교 오쿠보 나가야스 관할. |
1869년 | 관영화.[23] |
1889년 | 궁내성 어료국 소속.[23] |
1896년 | 미쓰비시 합자 회사에 불하.[23] |
1918년 |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에 인계. |
1943년 | 금산 정비령에 의해 금 채굴 구역 중지. |
1967년 |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금산 유적"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 |
1973년 | 사도 금산 주식회사로 독립.[23] |
1989년 | 광량 고갈로 채굴 중지. 미쓰비시 머티리얼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에 경영 인계. |
2007년 | 일본의 지질 백선에 선정. |
2008년 |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됨. 2012년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등록 유형 문화재 등록은 말소.[32] |
2009년 | 키타자와 지구 작업 공장군 터와 오마 지구 오마항 일각 광장 정비. 2010년 굿 디자인상 수상.[33] |
2012년 |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 |
2020년 | 아이카와 지구가 지역에 있어서의 역사적 풍치의 유지 및 향상에 관한 법률 (역사 마을 만들기 법)의 역사적 풍치 유지 향상 지구로 인정. |
2024년 | 이코모스 권고. |
2024년 | "사도섬의 금산"으로 세계 유산 등록. |
2. 1. 초기 역사 (헤이안 시대 ~ 센고쿠 시대)
사도 금광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생 금과 석영 기질의 아르겐타이트 표면 퇴적물은 적어도 헤이안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헤이안 시대의 『고금 이야기집』에는 금사를 채굴하기 위해 사도 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화가 있다.[9]노토 국의 수석 철사 광부가 사도 섬만큼 금을 잘 채취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노토의 영주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진실인지 물었다. 수석 광부는 작은 배와 약간의 음식을 요구하고 사도로 건너갔다. 한 달쯤 지나 영주가 거의 이 이야기를 잊었을 때, 수석 광부는 사도에서 돌아왔다. 영주가 그를 만났을 때, 수석 광부는 천 조각에 싸인 금사를 그에게 건넸다. 그 후, 수석 광부는 갑자기 사라졌고, 영주는 그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수석 광부가 금사의 행방에 대해 질문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사라졌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수석 광부가 가져온 금사는 1,000료만큼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일본어
『고금 이야기집』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11세기 말에는 적어도 사금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전반에 쓰여진 『우지수이 이야기』(우지 대납언 이야기의 수집)에서도 비슷한 일화를 찾을 수 있다.[10]
센고쿠 시대 동안, 사와네 혼마 씨와 카타가미 혼마 씨와 같은 새로운 지역 영주들이 사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섬 전역에서 잦은 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격변은 1542년 쓰루시 은광의 발견과 1593년 니시미카와 금광의 재개발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이 두 곳 모두 이러한 신흥 세력에 의해 통제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 섬은 가와라다 혼마 씨와 하모치 혼마 씨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1589년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군사 작전으로 평정되었고, 1600년까지 우에스기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 기간 동안, 이와미 국에서 도입된 터널 굴착과 같은 최신 기술을 통합하여 금 및 은 광산의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아이카와 광산에서 금과 은의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11]
사도 섬에는 아래 표에 나타난 4개의 주요 금은광을 포함하여 많은 광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23]
주요 명칭 | 대략적인 채굴 시작 시기 | 폐산 |
---|---|---|
니시미카와 사금산 | 헤이안 시대 이전 | 1872년 |
쓰루코 은광 | 센고쿠 시대 | 1946년 |
니이보 은광 | 센고쿠 시대 이전 | ? |
아이카와 금은광 | 에도 시대 초기 | 1989년 |
『고금이야기집』 권26·제15화에 "노토국의 철을 캐는 자가 사도국에 가서 금을 캐는 이야기"라는 항목이 있으며, 전해 들은 내용을 수록하는 형식으로 사도에서 금이 채취된다는 것에 언급하고 있다. 고금이야기집의 성립 연대로 추정되는 11세기 후반에는 적어도 사금 등의 형태로 사도에서 금이 산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덴쇼 17년(1589년)에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의해 혼마씨가 멸망하고, 사도는 우에스기씨 영토가 된다.
아이카와 금은산은 16세기 말에 개발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24], 전국 시대에는 아이카와의 금맥은 미발견 상태였다. 따라서 전국 다이묘인 우에스기 겐신이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쓰루코 은산은 이미 채굴되고 있었다).
2. 2. 에도 시대
1601년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동안 막부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톤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60] 그 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또한 은은 특히 생사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1603년에는 사도부교 오쿠보 나가야스가 관할을 맡았다.
그러나 에도 시대 후반기에 이르러, 천연 샘에서 유입된 물이 광맥을 따라 해저 아래 터널로 들어가면서 채굴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막부는 에도의 거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와 빈민들을 데려와 지역 인력을 보충했다. 이러한 강제 노동자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가장 위험한 작업과 광산 배수와 관련된 중노동에 투입되었으며, 사도 광산으로의 유배는 종신형이었다.
1690년에는 사도 봉행을 겸임하고 있던 오기와라 시게히데가 총 15만 량의 자금을 광산에 투입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여 부흥을 도모했고, 그 결과 일시적으로 증산에 돌입했지만, 결국 이후 쇠퇴의 길로를 걷게 되었고, 이후 에도 시대 중에 왕년의 번영이 돌아오지 않았다.[27]
에도 시대 후기 1770년경부터, 에도나 오사카 등의 무숙인 (부랑자)이 강제 연행되어 와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는데, 이는 본보기의 의미가 강했다고 한다. 무숙인은 주로 수체 인부의 보충에 충당되었는데,[27] 이는 해발 아래로 갱도를 뻗었기 때문에, 대량의 용수로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체 인부의 노동은 극도로 가혹하여, "'''사도의 금산은 이 세상의 지옥, 오르는 사다리는 모두 칼'''"이라고 읊어졌다. 에도의 무숙인은, 이 사도 어용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고 한다. 수체 인부를 수용하는 오두막은 은산 사이의 산 속에 있었으며, 외부와의 교통은 차단되었고, 도주를 막았다. 오두막에서는 사배인이나 오두막머리 등이 감독을 행했고, 그 잔인함은 감옥 이상이었으며, 기한은 없고 죽을 때까지 중노동이 부과되었다.[28]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사도 광산은 정부가 운영하였다. 에도 시대 중반부터 생산량이 줄어들자, 메이지 정부는 1869년에 서양 기술자들을 광산에 파견하여 화약 채굴, 암석 드릴, 펌프 기계 등 서양의 근대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27][26] 그 결과 생산량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1877년에는 서양 기술을 활용하여 근대적인 선광 시설과 일본 최초의 서양식 수직 갱도인 오다테 수직 갱도가 완공되었다.[26]
1885년, 정부는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인 통화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위해 생산량 증가를 더욱 목표로 했다. 갱도 굴착, 독일 기술을 사용한 시설 건설, 오마 항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 1890년에는 광산 기술의 국내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광산 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는 일본 광업 교육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26]
1896년, 황실 자산의 일부였던 사도 광산은 효고현의 이쿠노 광산 등과 함께 미쓰비시 합자회사에 매각되었다. (1918년에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로 개칭, 현재는 미쓰비시 머티리얼) 미쓰비시는 전력의 전력화를 포함하여 사도 광산의 기계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메이지 시대 말에는 광산의 연간 금 생산량이 400kg을 초과하여 에도 시대 생산량의 최고조였던 17세기 초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26]
이후에도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특히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인해 중국 본토에서 전쟁이 확대되면서 대량의 군수품 대금 결제를 위한 수단으로 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이로 인해 사도 광산의 금 생산이 증대되었다.[29] 1940년에는 광산 역사상 최고 생산량을 달성하여 연간 약 1500kg의 금과 약 25ton의 은을 생산했다.[23]
광산 노동자의 관리는 처음에는 미쓰비시 광업으로부터 노동자 고용 및 관리를 위탁받은 "헤야 제도"(납야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 제도는 사도 광산의 노동력 공급에 큰 힘을 발휘했지만, 중간 착취도 많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1899년 이후 노동 쟁의가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1922년 5월에는 650명의 광산 노동자가 참가하는 대규모 노동 쟁의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미쓰비시 광업은 1926년 1월에 노동계를 신설하여 노무 관리를 강화하고, 헤야 제도에서 직영 제도로 경영 방침을 전환하여 노동자의 불만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29] 1904년에는 23개의 병상을 가진 병원(광산 병원)을 설치(1934년 개축으로 병상 수 32개로 증가)하여 광산 관계자의 경비 진단소로 이용되었다.[2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금 결제 수단으로서의 금의 가치는 옅어졌고, 오히려 전쟁에 중요한 자원인 구리, 철, 아연, 석탄의 증산·확보가 중요하게 되어, 사도 광산에서도 구리의 채굴이 증가하는 한편, 금의 채굴은 감소했다. 또한 전시 중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동원되었다.[29] 전시 중에도 사도 광산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1943년 8월에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상공성 차관이 광산 노동자 격려를 위해 사도를 방문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상공, 후생 양 대신으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사도 광업소는 전 종업원 및 현지 아이카와 정민에 대한 감사 위안으로 같은 달 30일 밤에 협화회관에서 만세 낭만 공연회를 개최했다.[29]
1939년 2월, 사도 광산은 징병으로 인한 일본인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13] 당시 한반도는 일본 영토였다. 모집 지역은 주로 충청남도였으며, 마을마다 20명을 모집하면 40명이 지원할 정도로 모집이 성황을 이루었다. 1938년 한국의 가뭄이 지원자가 많았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본 본토에서의 삶을 동경해서 지원했을 뿐이며, 시모노세키나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수가 도망쳤다. 1939년 2월부터 1945년 3월 마지막 모집까지 총 1,200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사도 광산으로 왔다. (동반 가족 제외)
그러나 사도 광산에서 실제로 일한 한국인 노동자 수는 그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1943년 5월 말 현재, 사도 광산에 온 한국인 노동자는 1005명이었으며, 그 중 10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탈출하고, 공상으로 6명이, 개인 질병으로 30명이, 불량 행위로 25명이, 휴가로 72명이, 전출로 130명이 발생하여 실제 한국인 노동자 수는 584명이었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의 평균 근무일수는 약 28일이었고, 평균 월수입은 66.77JPY이었다. 정근에 대한 인센티브도 있었다. 사망 시 회사에서 최대 300JPY을 지급했다. 또한, 일본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회사에서 일본어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를 설립했다.[14]
그러나 식량, 침구, 작업복이 무상으로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고, 사도 광업소는 노동 조건 개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5년, 사도 광산은 구리 채굴에서 부진한 성과를 거두었고 한국인 노동자가 과잉 상태였다. 따라서 같은 해 8월, 사도 광산은 제1차 지원군으로 189명의 노동자를 사이타마현으로 파견하고, 제2차 지원군으로 219명의 노동자를 후쿠시마현으로 파견하여 총 408명의 노동자를 파견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 8월 15일 현재, 244명의 한국인이 사도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다. 패전 직후, 사도에서 제1차 및 제2차 "특별 지원대"로 파견되었던 한국인들이 광산으로 돌아왔다. 후쿠시마 파견대는 8월 26일에 도착했고, 사이타마 파견대는 8월 27일과 28일에 도착하여 총 319명의 노동자가 복귀했다. 파견된 한국인 408명 중 89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들은 사이타마 또는 후쿠시마에서 탈출했거나 8월 15일 이후 사도섬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15]
또한, 전쟁 패배로 인해 사도에서 도망치는 자들과 광산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잇따랐으며, 8월 말까지 사도 광산의 한국인 수는 573명에 달했다. 8월 15일부터 9월 11일 사이에 사도 광산에서 7명의 새로운 한국인이 도망쳤고, 27명이 광산으로 돌아왔다.
전후 1952년, 미쓰비시는 사도 광산의 대규모 축소를 결정했다. 1976년에는 사도 광산 부문이 사도 광산 주식회사로 독립하여 근근이 채굴이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1989년에 휴산했다.[23][27] 1989년 휴산까지 사도 광산이 산출한 금은 78ton, 은은 2300ton에 달한다.[26]
현재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100%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가 운영하고 있으며, "사적 사도 금산"으로 일반 공개되는 것과 함께 "세계 유산" 등록을 목표로[26], 2024년 7월 인도에서 개최된 제46회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결정되었다.[30]


'''사도 금광 주요 연혁'''
연도 | 사건 |
---|---|
1869년 | 관영화[23] |
1889년 | 궁내성 어료국에 소속[23] |
1896년 | 미쓰비시 합자 회사에 불하[23] |
1918년 |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에 인계됨. |
1943년 | 금산 정비령에 의해 금 채굴 구역 중지. |
1967년 | 사도 광산 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금산 유적"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
1973년 | 사도 금산 주식회사로 독립[23] |
1989년 | 광량 고갈로 인해 채굴 중지.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100%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에 경영이 인계됨. |
2007년 | 일본의 지질 백선에 선정. |
2008년 |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됨. 또한, 이들 물건이 2012년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등록 유형 문화재로서의 등록은 말소됨.[32] |
2009년 | 키타자와 지구의 작업 공장군 터와 오마 지구 오마항 일각을 광장 정비. 2010년 굿 디자인상 수상[33] |
2012년 |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됨. |
2020년 | 아이카와 지구가 지역에 있어서의 역사적 풍치의 유지 및 향상에 관한 법률 (역사 마을 만들기 법)의 역사적 풍치 유지 향상 지구로 인정됨. |
2024년 | 이코모스 권고. |
2024년 | "사도섬의 금산"으로서 세계 유산 등록. |
2. 4.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인 강제 노역
1939년 (쇼와 14년) 2월,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 주식회사) 사도 광업소는 일본 제국의 징병으로 인한 일본인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한반도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13] 모집 지역은 충청남도가 80%, 충청북도 및 전라북도가 20%였다. 1개 마을당 20명 모집에 약 40명이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는 1938년 (쇼와 13년) 한국의 가뭄으로 곤궁한 농민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하지만 응모자 상당수는 광산 취업이 아닌, 일본 본토에서의 생활을 원했기 때문에 시모노세키나 오사카 도착 즉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1945년 (쇼와 20년) 3월 마지막 모집까지 사도 광산에는 총 1,2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왔다(동반 가족 제외).
1943년 (쇼와 18년) 5월 말 기준 조선인 유입은 1005명이었으나, 이 중 421명이 줄었다. 감소 내역은 사망 10명, 도주 148명, 공상 송환 6명, 사증 송환 30명, 불량 송환 25명, 일시 귀선 72명, 전출 130명으로, 실제 광산 노동 인원은 584명이었다. 사도에 대한 조선인 동원은 1945년 7월이 마지막이었으며, 노동자만 "여러 차례에 걸쳐 총 1,200명"이었다고 한다.[29]
당시 광산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은 더 힘든 갱내 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는 일본인이 출정, 징병 등으로 젊은이가 적고 고령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조선인 전 징용공들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당받는 등 일본인과 대우가 달랐다고 느꼈다는 증언, "기합"을 넣는다며 맞았다는 증언 등이 있다.[57] 1942년 5월 시점 사도 광산에는 일본인 709명, 조선인 584명, 총 1239명이 일하고 있었지만, "운반부", "반암부", "외운반부", "지주부"와 같은 갱내 노동에 조선인 비율이 높았고, "작업부", "잡부", "제광부", "기타"와 같은 갱외 노동에 일본인 비율이 높았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강제성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58]
임금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 차별이 없었고 평등하다고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 징용공이 자유 계약 노동자보다 임금이 낮았다. 히로세 테이조는 성과급제가 농촌 등에서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에게 불리하며, 필요한 도구비 등을 공제하면 실제로 남는 임금이 매우 적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채택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58] 1941년 (쇼와 16년) 7월 시점 조선인 노동자는 332명, 평균 가동일 약 28일, 평균 월수입 약 67JPY이었다. 개근 장려금이 있었고, 공동 숙사(기숙사), 공동 목욕탕은 무료였다. 3개월 이상 근무자는 생명 보험료를 회사가 전액 부담하고, 사망 시 300JPY 한도로 회사에서 지급했다. 일본어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설립했다. 그러나 식비, 침구, 지하 족대는 자비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기도 했고, 회사 측은 노무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12월 18일부터 사도 광업소는 군수성으로부터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현원 징용령서"가 전달되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성이 높아졌다.[29] 광산 노무계 남성의 수기(1974년)에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때리고 발로 차는. 곁에서 보고 있을 수 없는 폭력", "탄압에 의한 가동과 식사에 대한 불만" 등 가혹한 상태를 나타내는 기술이 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는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고, 1년의 모집이 수년으로 연장되어,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이라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59]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사도 광산은 구리 생산 향상에 주력했지만, 실적이 오르지 않아 조선인 노동력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사도 조선인 중 189명이 제1차 정신대로 사이타마현에, 219명이 제2차 정신대로 후쿠시마현에 보내져 지하 공장 건설 작업에 종사했다.[29] 1945년 8월 15일 종전 당시 사도 광산에는 24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남아 있었고, 이후 정신대로 사도를 떠났던 조선인 노동자들도 순차적으로 복귀했다(일부 행방불명). 일본에 영주를 희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니가타 항에서 조선반도로 귀국했다.[29]
일본은 사도 금광과 조선인 강제노역의 관계를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 전쟁 물자 생산에 필요한 곳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특히 태평양 전쟁 동안 조선인 노동자들을 사도 광산에서 잔혹하게 학대하고 강제 노역을 시킨 곳 중 하나가 바로 사도 금광이다. 1939년부터 1945년 동안 대략 1519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고된 노역을 하였다.[67] 이들은 해방 이후 고국에 돌아왔어도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과 같은 강제노동 후유증에 평생 시달렸다.[68] 이들의 명단은 일본 측의 공개 거부로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69][70] 일본은 사도 금광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에 대한 별다른 사과 표명도 하지 않았고,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쉬쉬하는 태도만 보이고 있다.
2. 5. 현대
1869년 관영화되었다.[23] 1889년 궁내성 어료국에 소속되었으며,[23] 1896년 미쓰비시 합자 회사에 불하되었다.[23] 1918년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에 인계되었다.[63]1943년 금산 정비령에 의해 금 채굴이 중지되었다. 1967년 사도 광산 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금산 유적'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사도 금산 주식회사로 독립하였으며,[23] 1989년 3월 31일 광량 고갈로 인해 채굴이 중지되었다. 이후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100%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Golden Sado)에 경영이 인계되었다.[64]
2007년 일본의 지질 백선에 선정되었다.[65] 2008년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 이들은 2012년 중요 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등록 유형 문화재로서의 등록은 말소되었다.[32] 2009년 키타자와 지구의 작업 공장군 터와 오마 지구 오마항 일각을 광장 정비하여 2010년 굿 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33] 2012년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0년 3월 24일 아이카와 지구가 지역에 있어서의 역사적 풍치의 유지 및 향상에 관한 법률(역사 마을 만들기 법)의 역사적 풍치 유지 향상 지구로 인정되었다. 2024년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이코모스) 권고를 받았으며, 7월 27일 "사도섬의 금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66]
광산 폐쇄 이후, 아이카와 광산을 중심으로 관광 명소로 전환되어, 일본 산업 유산의 일부로 건물과 시설이 보존되고 있다.[16] 아이카와 광산의 400km 터널 중 약 300m가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마네킹과 설명 디오라마를 통해 시설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사도 금광은 일본의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에는 보호 구역이 확대되었다.[17] 202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일본은 한국의 공식적인 항의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데 동의했다.[18] 다른 자료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행정부와 윤석열 대한민국 행정부 간의 타협으로 한국 강제 노동의 사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삭제되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유적의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했다.[19][20]
2024년 11월 24일, 일본 관리들은 사도섬 금광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한국인을 포함하여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을 기렸지만 강제 노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추도식을 보이콧했다.[21][22]
3. 문화재
1967년 사도 광산 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금산 유적"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1] 이후 2012년에는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4] 2008년에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는 2012년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등록 유형 문화재로서의 등록은 말소되었다.[32]
2011년에는 쓰루시 은산 터가 추가되어 "사도 금은산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5년에는 사도 아이카와의 광산 및 광산 마을의 문화경관이 중요문화경관으로 선정되었다.
사도 섬에는 아래 표와 같이 4개의 주요 금은광을 포함하여 많은 광산이 있었는데,[23] 그 중 아이카와는 규모가 크며, 국가의 사적이나 중요문화재, 중요문화경관으로 선정된 유적과 경관이 많이 남아 있어 현재는 사도의 관광 거점이 되고 있다.
주요 명칭 | 대략적인 채굴 시작 시기 | 폐산 |
---|---|---|
니시미카와 사금산 | 헤이안 시대 이전 | 1872년 |
쓰루코 은광 | 센고쿠 시대 | 1946년 |
니이보 은광 | 센고쿠 시대 이전 | ? |
아이카와 금은광 | 에도 시대 초기 | 1989년 |
3. 1. 중요문화재
2012년,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4] 2008년에는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되었으나, 2012년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등록 유형 문화재로서의 등록은 말소되었다.[32]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34]
- 오다테 수직갱 야구라 1기
- 오다테 수직갱 권양기실 1동
- 도유 갱 및 다카토 갱 1소
- 다카토 조쇄장 1동
- 다카토 저광사 및 벨트 컨베이어 야드 1동
- 전차 차고(기계 공장) 1동
- 마노야마가미 다리 1기
- 마노야마시타 다리 1기
3. 2. 사적
1601년 쓰루코 은광의 광부 3명에 의해 광맥이 발견되었다.[31]1603년 사도 봉행 오쿠보 나가야스의 관할이 되었다.
1869년 관영화되었다.[23]
1889년 궁내성 어료국에 소속되었다.[23]
1896년 미쓰비시 합자 회사에 불하되었다.[23]
1918년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에 인계되었다.
1943년 금산 정비령에 의해 금 채굴이 중지되었다.
1967년 사도 광산 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금산 유적"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사도 금산 주식회사로 독립하였다.[23]
1989년 3월 31일 광량 고갈로 인해 채굴이 중지되었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100%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에 경영이 인계되었다.
2007년 일본의 지질 백선에 선정되었다.
2008년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오다테 권양실, 도유 갱, 아이노야마 상부 아치교 및 아이노야마 하부 아치교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 이들은 2012년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등록 유형 문화재 등록은 말소되었다.[32]
2009년 키타자와 지구의 작업 공장군 터와 오마 지구 오마항 일각을 광장 정비하였고, 2010년 굿 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33]
2012년 건조물 3기 4동 1소가 "구 사도 광산 채광 시설"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0년 3월 24일 아이카와 지구가 지역에 있어서의 역사적 풍치의 유지 및 향상에 관한 법률 (역사 마을 만들기 법)의 역사적 풍치 유지 향상 지구로 인정되었다.
2024년 이코모스 권고를 받았다.
2024년 7월 27일 "사도섬의 금산"으로서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국가 사적 "사도 금은산 유적"으로 지정된 곳은 "도유의 왓토", 소다유 마부, 남자와 소수, 오다테 수직 갱구 야구라, 아이노야마 도광장 등 채광 관련 유구·유적, 사도 봉행 터, 구 시보 종루, 구 어료국 사도 지청 청사 등 경영 관련 유적, 또한 사도 광산 개발에 공헌한 사도 봉행 오쿠보 나가야스가 세운 다이안사이다. 2011년에는 쓰루시 은산 터를 추가하여 "사도 금은산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3. 중요문화경관
사도 섬에는 아래 표와 같이 4개의 주요 금은광을 포함하여 많은 광산이 있었다.[23] 그 중에서도 아이카와는 규모가 크며, 국가의 사적이나 중요문화재, 중요문화경관으로 선정된 유적과 경관이 많이 남아 있어 현재는 사도의 관광 거점이 되고 있다.4. 관광
1601년 금맥이 발견된 이후 에도 시대에 중요한 재원으로 개발되었던 사도 금광은 현재 채굴이 중지되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61]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중 약 300m가 관광 노선으로 개발되었다.
광산 폐쇄 이후, 아이카와 광산을 중심으로 관광 명소로 전환하고, 일본 산업 유산의 일부로 건물과 시설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16] 아이카와 광산의 400km 터널 중 약 300m가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사도 금광은 1994년 일본의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에는 보호 구역이 확대되었다.[17] 202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18]
매년 7월 25일 ~ 7월 27일 사이에는 금광 축제가 열린다.[62] 이 외에도, 무숙인 공양제가 4월 셋째 일요일에 열린다.
4. 1. 주요 시설
사도 섬에는 다음 표에 나타난 4개의 주요 금은광을 포함하여 많은 광산이 있었다.[23] 그 중에서도 아이카와는 규모가 크며, 현재는 사도에서의 관광 거점이 되고 있다.주요 명칭 | 대략적인 채굴 시작 시기 | 폐산 |
---|---|---|
니시미카와 사금산 | 헤이안 시대 이전 | 1872년 |
쓰루코 은광 | 센고쿠 시대 | 1946년 |
니이보 은광 | 센고쿠 시대 이전 | ? |
아이카와 금은광 | 에도 시대 초기 | 1989년 |
4개의 주요 광산 중 관광 정비가 진행된 곳은 아이카와 금은산이며, 다른 3개의 광산에 대해서는 니시미카와 사금산에 체험 시설 "사도 니시미카와 골드 파크"가 설치되어 있다.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달하지만, 그중 약 300m가 주식회사 골든 사도에 의해 관광 코스로 공개되고 있다.
- 소타유 갱(에도 금산 그림 두루마리 코스)
- * 손으로 판 갱도 내에, 채굴 풍경을 재현한 인형이 70체 정도 설치되어 있다.
- * 전시 자료관
- 도유 갱(메이지 관영 광산 코스)
- * 트롤리 등 근대 이후의 설비가 전시되어 있다.
- * 도유의 割戸(도유의 割户)
- 가이드 투어
- * 상기 2개의 관광 코스에서 공개되지 않은 갱도를 순회한다.
아이카와 광산에는 근대 시설 유구가 많이 남아 있다.
메이지 시대 중반에 생산품을 출하하고 물자를 반입하기 위한 항구로 축항되어, 현재도 많은 유구가 남아있다.[39]
주변 일대는 중요 문화 경관으로 선정된 마을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2019년 4월에는 정보 발신 거점 시설로서 "키라리움 사도"가 오픈했다.[36][41]
또한, 키타자와 지구에는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이 있다.
5. 조선인 강제노역 논란
일본 제국이 일본령 조선의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킨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사도 광산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일본은 2018년부터 사도 금광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71] 2022년에 유네스코에 다시 등재를 추진하였으나, 사도 금광의 역사에서 에도 막부 시대만 기술하여 유네스코 측으로부터 보류된 적이 있었다.[72]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에는 만장일치가 관례였기에, 대한민국 측의 지속적인 반대 및 거부로 인해 등재되지 못했다.[73][74] 2024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사도 금광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다시 추진하면서 많은 한국인들의 공분을 샀다.[75][76][77] 문재인 정부와 달리 일본에 호의적인 윤석열 정부는 사도 금광의 세계유산 등재에 사실상 동의하며 등재에 합의하였다. 2024년 11월 24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처음으로 추모식이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78]
하지만 일본이 추도식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는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을 보내기로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추도식 전날 추도식에 불참하기로 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하였다. 결국 1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추도식은 대한민국 측의 불참으로 40여 석이 빈 채로 진행되었다.[79]
11월 25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추도식 불참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하였고, 다음날 대한민국 외교부는 "외교부 당국자가 주한 일본 대사관을 접촉하여 한일 협의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밝히며 대응하였다.[80][81] 산케이 신문은 한국의 불참을 꼬집으며 한국의 반일 감정이 지긋지긋하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이쿠이나 아키코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오보였다고 밝히며 한국 탓으로 돌렸다.[82][83] 서경덕 교수는 이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 또한 지긋지긋하다고 밝혔다.[84]
이러한 논란은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북한 정부는 "가혹한 노동에 쓰러진 조선 인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비판했고,[51] 중국 정부는 "이웃 국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시하고 새로운 등록을 시도하는 것은 더 큰 분노와 반발을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했다.[52] 러시아 정부는 "우리는 한국 측의 반응을 이해한다"라고 밝혔다.[53] 일본 공산당 또한 "전시 조선인 강제 노동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며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56]
5. 1. 역사적 사실 은폐
일본은 사도 금광과 조선인 강제노동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세기 일본 제국은 당시 식민지였던 일본령 조선으로부터 노동자들을 강제적으로 끌고 와서 자국의 전쟁 물자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곳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특히 태평양 전쟁 동안 조선인 노동자들을 사도 광산에서 잔혹하게 학대하고 강제적으로 노역을 시킨 곳 중 하나가 바로 사도 금광이다. 1939년부터 1945년 동안 대략 1519명의 조선 각지에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고된 노역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이들은 해방 이후에 고국에 돌아왔어도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과 같은 강제노동 후유증에 평생을 시달리며 고통 속에서 살았다.[68] 이들의 명단은 일본 측의 공개 거부로 인해서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69][70] 즉 일본은 사도 금광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에 대한 별다른 사과 표명도 하지 않았고, 사도 금광 내 조선인 강제 노역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쉬쉬하는 태도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939년(쇼와 14년) 2월, 사도 금광을 경영하는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쓰비시 머티리얼 주식회사) 사도 광업소는 일본인 노동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처음으로 조선반도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 당시 충청남도가 80%, 충청북도・전라북도가 20%를 차지 할정도로 충청남도 지역에서의 모집이 많았다. 1개 마을에 20명 모집 할당에 약 40명이 응모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는 전년인 1938년(쇼와 13년)에 남선에서 대가뭄, 기근이 발생하여 곤궁한 농민이 많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응모자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광산에서의 취업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유롭게 도항한 선배나 지인을 의지하여 내지에서 생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모노세키나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1945년(쇼와 20년) 3월 마지막 모집까지 사도 광산에는 총 1,2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왔다고 한다(동반 가족은 포함하지 않음).
1943년(쇼와 18년) 5월 말 시점에서의 조선인 이입 상황은 1005명에 달했으나, 이 중 421명이 감원되었다고 한다. 감원의 내역은 사망 10명, 도주 148명, 공상 송환 6명, 사증 송환 30명, 불량 송환 25명, 일시 귀선 72명, 전출 130명으로, 실제로 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인원은 584명으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사도에 대한 조선인 동원은 1945년 7월이 마지막이었으며, 노동자만 "여러 차례에 걸쳐 총 1,200명"이었다고 한다.[29]
당시 광산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은 더 힘든 노동인 갱내 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는 일본인이 출정, 징병 등으로 젊은이가 적고, 고령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조선인 전 징용공으로부터는, 깎는 작업 등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당받는 등 일본인과 대우가 다르다고 느꼈다는 증언, "기합"을 넣는다고 칭하며 맞았다는 증언 등이 있다.[57] 1942년 5월 시점에서는 사도 광산에는 일본인 709명, 조선인 584명의 총 1239명이 일하고 있었지만, "운반부", "반암부", "외운반부", "지주부"와 같은 갱내 노동에 조선인의 비율이 높았고, "작업부", "잡부", "제광부", "기타"와 같은 갱외 노동에 일본인의 비율이 높았다(일본인이 100%인 "기타"는 선광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더욱 강제의 정도가 심해졌다고 한다.[58]
임금(급여)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구별이 없고 종종 평등하다고 설명된다. 형식적으로는 미쓰비시 광업의 자료에 따르면 "갱내부에게는 내지인 노무자와 마찬가지로 연령, 경험 등을 고려하여 업무의 종류 및 난이도에 따라 미리 사정된 도급 단가에 따라 그 수입에 따라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징용공이 이 "도급"의 취급을 받아, 우선 자유 계약의 노동자보다 임금이 낮았고, 또한, 히로세 테이조는, 성과급은 농촌 등에서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에게 숙련 광부와 달리 일반적으로 불리하며, 이 임금에서 필요한 도구비 등이 공제되기 때문에 실제로 손에 남는 임금은 극히 적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오히려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성과급 제도의 명목으로 이러한 제도를 채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58] 1941년(쇼와 16년) 7월 시점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수는 332명, 평균 가동일수가 약 28일, 평균 월수입이 약 67JPY이었다. 그 외에 개근 장려금이 있었고, 공동 숙사(기숙사), 공동 목욕탕은 무료였다. 근속 3개월 이상인 자에게는 생명 보험료를 전액 회사가 부담하고, 사망의 경우에는 300JPY을 한도로 회사에서 지급했다. 또한 언어 장해를 없애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어 향상에 힘썼다. 그 외 복리 시설 등에도 여러 배려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식비, 침구, 지하 족대는 자비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가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회사 측은 노무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12월 18일부터 사도 광업소는 군수성으로부터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현원 징용령서"가 전달되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성이 높아졌다.[29] 광산에서 노무계를 맡았던 남성의 수기(1974년) 중에는, 조선인 노동자에 관해, "때리고 발로 차는. 곁에서 보고 있을 수 없는 폭력"이나 "탄압에 의한 가동과 식사에 대한 불만"과 같은 가혹한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술도 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는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고, 1년의 모집이 수년으로 연장되어,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이라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59]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사도 광산은 군수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리 생산의 향상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기대만큼 실적은 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인의 노동력도 잉여를 초래하게 되어, 광산에서는 할 일이 없어 한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도의 조선인 중 189명이 제1차 挺身隊로 사이타마현, 이어서 219명의 조선인이 제2차 挺身隊로 후쿠시마현으로 보내져, 각 현의 지하 공장의 건설 작업에 종사했다.[29] 1945년 8월 15일 종전 시에는 사도 광산에는 244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남아 있었고, 그 후 挺身隊로 사도를 떠났던 조선인 노동자들도 순차적으로 사도로 돌아와(일부는 행방불명), 일본에 영주하는 것을 희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니가타 항에서 조선반도로 귀국해 갔다.[29]
5. 2. 세계유산 등재와 한일 갈등
일본은 2018년부터 사도 금광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시도를 해왔다.[71] 2022년에 유네스코에 다시 문화 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였으나, 사도 금광의 역사에 대해 에도 막부 시대만 기술하였기에 유네스코 측으로부터 보류되었던 적도 있었다.[72] UNESCO 세계 문화 유산 등재에 만장일치가 관례였기에, 대한민국측의 지속적인 반대 및 거부로 인하여 등재되지 못하였다.[73][74] 그러한 가운데 2024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사도 금광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다시 한번 추진함에 따라서 많은 한국인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75][76][77] 문재인 정부와 달리 일본에 호의적인 윤석열 정부는 사도 금광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데 사실상 동의하며 세계유산 등재에 합의하였다. 2024년 11월 24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처음으로 추모식이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78]하지만 일본이 추도식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는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을 보내기로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추도식 전날 추도식에 불참하기로 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하였다. 결국 1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추도식은 대한민국 측의 불참으로 40여 석이 빈 채로 진행되었다.[79]
11월 25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추도식 불참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하였고, 다음날 대한민국 외교부는 "외교부 당국자가 주한 일본 대사관을 접촉하여 한일 협의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밝히며 대응하였다.[80][81] 산케이 신문은 한국의 불참을 꼬집으면 서 한국의 반일 감정이 지긋지긋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이쿠이나 아키코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오보였다고 밝히며 한국 탓으로 돌렸다.[82][83] 서경덕 교수는 이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 또한 지긋지긋하다고 밝혔다.[84]
2024년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는 "사도 금산"의 세계 문화 유산 등록을 결정했다.[46] 대한민국 정부는 사도 금산에 대해 "한국인 강제 노동의 피해 현장"이라고 주장하며 신청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47] 2월 12일 한국의 정의용과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 회담에서 하야시는 "한국 측의 독자적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유감이다"라고 한국 측에 전달했다.[48] 그 후 윤석열 정권으로 바뀐 2023년에는 윤덕민 주일 대사는 일본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은 일본의 문화유산 등록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2015년 유네스코에서 약속한 대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궤도 수정을 보이게 되었으며,[49] 최종적으로는 조선인의 사도 금산에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상설 전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도 등록에 찬성했다.[50]
북한 정부는 "가혹한 노동에 쓰러진 조선 인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 "일본의 명예는 과거 침략과 범죄를 성실히 반성하고 사죄하는 데에 있다", "사도 섬의 금산은 절대로 세계 문화 유산이 될 수 없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1]
중국 정부는 "이웃 국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시하고 새로운 등록을 시도하는 것은 더 큰 분노와 반발을 초래할 뿐이다", "일본은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와 실제 행동으로 역사상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와 국제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2]
러시아 정부는 "우리는 한국 측의 반응을 이해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일본 지도자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인류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를 상대로 지속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3] 당시 러시아는 세계유산위원회 21개국의 위원국(임기 2019년–2023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우려되었지만,[54]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같은 해 러시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러시아가 임기 도중 위원국을 사임했기 때문에 사도 금산 등록을 향해 진전되었다고 보도되었다.[55]
일본 공산당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도 금산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니가타현사(新潟県史)와 지방 자치 단체의 정사(町史)에 기술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정부·자민당 안에는 에도 시대에 한정된 추천이며, 전시 중 조선인의 노동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통용되지 않는 주장", "전시 조선인 강제 노동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6]
5. 3. 국제 사회의 반응
일본은 2018년부터 사도 금광을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시도를 해왔다.[71] 2022년에 유네스코에 다시 등재를 추진했으나, 사도 금광의 역사에서 에도 막부 시대만 기술하여 유네스코 측으로부터 보류된 적이 있었다.[72]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에는 만장일치가 관례였기에, 대한민국 측의 지속적인 반대 및 거부로 인해 등재되지 못했다.[73][74] 2024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사도 금광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다시 추진하면서 많은 한국인들의 공분을 샀다.[75][76][77] 문재인 정부와 달리 일본에 호의적인 윤석열 정부는 사도 금광의 세계유산 등재에 사실상 동의하며 등재에 합의하였다. 2024년 11월 24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처음으로 추모식이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78]하지만 일본이 추도식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는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을 보내기로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추도식 전날 추도식에 불참하기로 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하였다. 결국 1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추도식은 대한민국 측의 불참으로 40여 석이 빈 채로 진행되었다.[79]
11월 25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추도식 불참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하였고, 다음날 대한민국 외교부는 "외교부 당국자가 주한 일본 대사관을 접촉하여 한일 협의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밝히며 대응하였다.[80][81] 산케이 신문은 한국의 불참을 꼬집으며 한국의 반일 감정이 지긋지긋하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이쿠이나 아키코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오보였다고 밝히며 한국 탓으로 돌렸다.[82][83] 서경덕 교수는 이에 반박하는 글을 올리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 또한 지긋지긋하다고 밝혔다.[84]
대한민국 정부는 사도 금산에 대해 "한국인 강제 노동의 피해 현장"이라고 주장하며 신청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47] 2022년 2월 12일, 한국의 정의용과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 회담에서 하야시는 "한국 측의 독자적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유감이다"라고 한국 측에 전달했다.[48] 그 후 윤석열 정권으로 바뀐 2023년에는 윤덕민 주일 대사는 일본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은 일본의 문화유산 등록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2015년 유네스코에서 약속한 대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궤도 수정을 보이게 되었으며,[49] 최종적으로는 조선인의 사도 금산에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상설 전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도 등록에 찬성했다.[50]
북한 정부는 "가혹한 노동에 쓰러진 조선 인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 "일본의 명예는 과거 침략과 범죄를 성실히 반성하고 사죄하는 데에 있다", "사도 섬의 금산은 절대로 세계 문화 유산이 될 수 없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1]
중국 정부는 "이웃 국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시하고 새로운 등록을 시도하는 것은 더 큰 분노와 반발을 초래할 뿐이다", "일본은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와 실제 행동으로 역사상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와 국제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2]
러시아 정부는 "우리는 한국 측의 반응을 이해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일본 지도자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인류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를 상대로 지속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3] 당시 러시아는 세계유산위원회 21개국의 위원국(임기 2019년–2023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우려되었지만,[54]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같은 해 러시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러시아가 임기 도중 위원국을 사임했기 때문에 사도 금산 등록을 향해 진전되었다고 보도되었다.[55]
일본 공산당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도 금산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니가타현사(新潟県史)와 지방 자치 단체의 정사(町史)에 기술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정부·자민당 안에는 에도 시대에 한정된 추천이며, 전시 중 조선인의 노동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통용되지 않는 주장", "전시 조선인 강제 노동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며 일본의 대응을 비판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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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銀山を再現 「きらりうむ佐渡」初日からにぎわう 相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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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성 포기한 굴욕 외교” vs “강제성 포기한 거 아냐”…일본 사도광산 후폭풍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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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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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참배했던 日 정부 차관급 인사, 사도광산 추도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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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79]
뉴스
日, 아이돌 출신 야스쿠니 참배 인사를 사도광산 추도식 대표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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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4-11-25
[80]
뉴스
한국 정부 별도로 사도광산 추도식… "아픈 역사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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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4-11-26
[81]
뉴스
외교부, 日에 사도광산 추도식 관련 유감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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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4-11-26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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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韓に必死で伝えるオールドメディア」自民・木原稔氏 靖国参拝報道に相次ぐ疑問の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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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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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산케이 "韓 반일병 지긋지긋"…서경덕 "정도 지키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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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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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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