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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루키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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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루키아 왕조는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데칸 고원을 지배했던 세 개의 밀접하게 관련된 왕조, 즉 바다미 찰루키아, 서찰루키아, 동찰루키아로 구성되었다. 찰루키아 왕조는 카르나타카 지역에서 기원했으며, 초기에는 바다미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찰루키아는 데칸 지역을 통치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찰루키아 시대는 힌두교, 자이나교의 번영과 함께 건축 및 문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찰루키아 건축 양식은 남인도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다미 찰루키아는 라슈트라쿠타에 의해 멸망했고, 서찰루키아는 호이살라, 야다바 등의 세력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동찰루키아는 촐라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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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루키아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찰루키아 왕조의 최대 강역
찰루키아 왕조의 최대 강역
기본 정보
현지 이름ಚಾಲುಕ್ಯ
다른 표기ಚಾಲುಕ್ಯ
존속 기간 시작543년
존속 기간 끝753년
이전바카타카 왕조
이전 깃발South_Asia_historical_AD375_es.svg
이전카담바 왕조
이전 깃발Indian Kadamba Empire map.svg
이후라슈트라쿠타
이후 깃발Badami-chalukya-empire-map.svg
이후동찰루키아
이후서찰루키아
이후 깃발Western-chalukya-empire-map.svg
수도바타피
통용어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민족칸나다인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정부 형태군주제
지역중부 인도
통치자
지도자 칭호마하라자
재위 기간543년 ~ 566년
609년 ~ 642년
655년 ~ 680년
746년 ~ 753년
지도자 이름풀라케신 1세(초대)
풀라케신 2세
비크라마디트야 1세
크리티바르만 2세(말대)
기타

2. 기원

찰루키아 왕조의 초기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존재하지만, 존 키이, D.C. 시르카르, 한스 라즈, S. 센, 카마트, K.V. 라메쉬, 카르마카르 등 저명한 역사가들은 찰루키아 왕조의 창립자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지역의 바다미 출신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2][3][4][5][6][7][8][9][10][11][12]

서기 733년 ~ 745년에 비루파크샤 사원에 있는 옛 칸나다어 비문인 승리의 기둥.


일부에서는 찰루키아가 2세기의 이크슈바쿠 비문에 언급된 안드라 이크슈바쿠의 가신 '칸다칼리키 렘마나카' 족장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카마트는 이 가설이 혈통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칸다칼라키 가신은 스스로를 '히란야카고트라의 바시슈티푸트라'라고 칭했지만, 찰루키아는 비문에서 스스로를 '마나브야사고트라의 하리티푸트라'라고 칭했는데, 이는 초기 영주인 바나바시의 카담바와 같은 계보이다. 이는 찰루키아가 카담바의 후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찰루키아는 이전에 카담바가 통치했던 영토를 장악했다.[13]

동찰루키아의 후대 기록에서는 아요디아의 통치자가 남쪽으로 와서 팔라바를 물리치고 그 공주와 결혼하여 풀라케신 1세의 아버지인 비자야디트야를 낳았다는 북부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가 K.V. 라메쉬, 초프라, 사스트리에 따르면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에서는 자야심하가 풀라케신 1세의 할아버지, 라나라가가 아버지로 확인되었다.[14][15][16][17] 카마트와 모라에스는 남인도 왕가와 북부 왕국을 연결하는 것이 11세기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바다미 찰루키아 기록 자체에는 아요디아 기원설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한다.[18][19]

북부 기원 이론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각되었지만, K.V. 라메쉬는 북부인들의 초기 남부 이주가 조사할 가치가 있는 '뚜렷한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20] 그는 아요디아와의 가족 관계에 대한 비문적 언급이 없고, 칸나다어 정체성은 족장과 왕으로서 성공을 거둔 카르나타카 지역으로 일찍 이주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찰루키아 제국 왕들에게는 조상의 칸나다어권 원주민 기원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21] 12세기 카슈미르 시인 빌하나의 글에서는 찰루키아 가문이 수드라 카스트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문헌에서는 크샤트리야라고 주장한다.[22]

역사가 장 호우벤, 카마트, 그리고 D.C. 시카르는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칸나다어산스크리트어로 적혀있다고 언급했다.[23][24][25] N.L. 라오에 따르면, 비문은 자신들을 '카르나타스'라고 칭하고, '프리야갈람(Priyagallam)', '노두타겔봄(Noduttagelvom)'과 같은 칸나다어 명칭을 사용했다. 일부 찰루키아 왕자의 이름은 칸나다어 '아라사("왕" 또는 "최고")'로 끝난다.[26][27] 라슈트라쿠타 비문은 '바다미 카르나타발라(카르나타의 힘)의 찰루키아'라고 명명한다. S.C. 난디나트는 "찰루키아"라는 단어가 농업용 도구와 관련된 칸나다어 단어 살키(Salki) 또는 찰키(Chalke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8][29] 일부 역사가들은 찰루키아인들이 농경인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추정한다.

서찰루키아 왕조의 궁정 시인은 찰루키아의 조상 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창조자인 브라흐마가 산디아 (황혼) 의식에 참여했을 때, 인드라는 그에게 다가와 지구상에서 증가하는 악을 종식시킬 수 있는 영웅을 창조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요청을 받은 브라흐마는 꾸준히 출루카-잘라(손바닥에 있는 봉헌의 물)를 들여다 보았고, 찰루키아의 조상인 위대한 전사가 나왔다.[37]

찰루키아는 스스로가 사프타 마트리카스("일곱 신성한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으며 시바, 비슈누, 참문디, 수리야, 쿠베라, 파르바티, 비나야카, 카르티케야 등 많은 신의 숭배자라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찰루키아를 구자라트차울루키아 왕조와 연결짓는다.[38] 프리티비라지 라오의 후기 사본에 따르면 차울루카야는 아부산의 화덕(Agnikund)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그니쿨라 이야기는 비카네르 요새 도서관에 보존된 프리티비라지 라오 원본에는 언급되지 않는다.[39]

비크라마디트야 6세(11세기 이후)의 닐라군다 비문에 따르면, 찰루키아는 원래 59명의 왕이 통치했던 아요디아 출신이며, 나중에 이 가족 중 16명이 남인도로 이주해 군림하였다. 빌하나는 가족의 첫 번째 구성원인 "찰루키아"가 브라흐마 신의 "손의 구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40][41] 일부 족보 기록은 아요디아 기원을 가리키며 찰루키아가 수리야밤사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42][43][44]

루이스는 찰루키아가 이라크의 "셀레우키아" 부족의 후손이며, 칸치푸람의 팔라바와의 갈등은 고대 셀레우키아와 "파르티아" 간 갈등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마트는 이 이론이 유사하게 들리는 부족 이름을 기반으로 혈통을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45]

2. 1. 칸나다 기원설

찰루키아 왕조의 초기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지만, 존 키이, D.C. 시르카르, 한스 라즈, S. 센, 카마트, K.V. 라메쉬, 카르마카르 등의 역사학자들은 찰루키아 왕조가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바다미 지역의 원주민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2][3][4][5][6][7][8][9][10][11][12]

일부 학자들은 찰루키아가 2세기의 이크슈바쿠 비문에 언급된 '칸다칼리키 렘마나카'라는 족장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카마트는 이 가설이 혈통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찰루키아는 스스로를 '마나브야사고트라의 하리티푸트라'라고 칭했는데, 이는 그들의 초기 영주인 바나바시의 카담바와 같은 계보였다. 이는 찰루키아가 카담바의 후손일 가능성을 보여준다.[13]

동찰루키아의 후대 기록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요디아의 한 통치자가 남쪽으로 와서 팔라바를 물리치고 그 공주와 결혼하여 비자야디트야를 낳았고, 이 비자야디트야가 풀라케신 1세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K.V. 라메쉬, 초프라, 사스트리 등의 역사학자들은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을 통해 풀라케신 1세의 할아버지는 자야심하, 아버지는 라나라가임을 확인했다.[14][15][16][17] 카마트와 모라에스는 남인도 왕가의 혈통을 북부 왕국과 연결하는 것은 11세기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바다미 찰루키아의 기록 자체에서는 아요디아 기원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8][19]

많은 역사학자들이 북부 기원 이론을 기각했지만, K.V. 라메쉬는 북부인들의 초기 남부 이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20] 그는 찰루키아가 칸나다 지역으로 이주하여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칸나다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21] 한편, 12세기 카슈미르 시인 빌하나는 찰루키아 가문이 수드라 카스트에 속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문헌에서는 그들이 크샤트리야라고 주장한다.[22]

역사가 장 호우벤과 카마트, 그리고 D.C. 시카르는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칸나다어산스크리트어로 적혀있다고 언급하였다.[23][24][25] N.L. 라오에 따르면, 그들의 비문은 자신들을 '카르나타스'라고 칭했고, '프리야갈람(Priyagallam)', '노두타겔봄(Noduttagelvom)'과 같은 토착 칸나다어 명칭을 사용했다.[26][27] 일부 찰루키아 왕자의 이름은 칸나다어 용어 '아라사'로 끝난다.[26] 라슈트라쿠타 비문은 '바다미 카르나타발라(카르나타의 힘)의 찰루키아'라고 명명한다. S.C. 난디나트는 "찰루키아"라는 단어가 농업용 도구와 관련된 칸나다어 단어인 살키(Salki) 또는 찰키(Chalke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8][29]

서찰루키아 왕조의 궁정 시인은 다음과 같이 찰루키아의 조상 신화를 설명한다.

"창조자인 브라흐마가 산디아 (황혼) 의식의 수행에 참여했을 때, 인드라는 그에게 다가와 지구상에서 증가하는 악을 종식시킬 수 있는 영웅을 창조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요청을 받은 브라흐마는 꾸준히 출루카-잘라(손바닥에 있는 봉헌의 물)를 들여다 보았고, 찰루키아의 조상인 위대한 전사가 나왔다."[37]

찰루키아는 스스로가 사프타 마트리카스("일곱 신성한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으며, 시바, 비슈누, 참문디, 수리야, 쿠베라, 파르바티, 비나야카 및 카르티케야를 포함한 많은 신의 숭배자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찰루키아를 구자라트차울루키아 왕조와 연결짓기도 한다.[38] 그러나 아그니쿨라의 이야기는 비카네르의 요새 도서관에 보존된 프리티비라지 라오의 원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39]

비크라마디트야 6세의 닐라군다 비문에 따르면, 찰루키아는 원래 아요디아 출신이었고, 나중에 이 가족 중 일부가 남인도로 이주해 군림하였다.[40][41] 일부 족보 기록은 찰루키아가 수리야밤사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42][43][44]

루이스는 찰루키아가 이라크의 "셀레우키아" 부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카마트는 이 이론이 유사한 부족 이름을 기반으로 혈통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45]

2. 2. 북부 기원설



찰루키아 왕조의 초기 기원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지만, 존 키이, D.C. 시르카르, 한스 라즈, S. 센, 카마트, K.V. 라메쉬, 카르마카르 등 저명한 역사가들은 찰루키아 왕조의 창립자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 지역의 바다미 원주민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2][3][4][5][6][7][8][9][10][11][12]

일부에서는 찰루키아 왕조가 2세기 이크슈바쿠 비문에 언급된 안드라 이크슈바쿠의 가신 '칸다칼리키 렘마나카' 족장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카마트는 이 가설이 혈통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칸다칼라키 가신은 스스로를 '히란야카고트라의 바시슈티푸트라'라고 칭했지만, 찰루키아 왕조는 비문에서 자신들을 '마나브야사고트라의 하리티푸트라'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초기 영주인 바나바시의 카담바와 같은 계보이다. 따라서 찰루키아 왕조는 카담바 왕조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이전에 카담바 왕조가 통치했던 영토를 장악했다.[13]

동찰루키아의 후대 기록에서는 아요디아의 한 통치자가 남쪽으로 와서 팔라바를 물리치고 공주와 결혼하여 풀라케신 1세의 아버지인 비자야디트야를 낳았다는 북부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K.V. 라메쉬, 초프라, 사스트리 등 역사학자들은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에서 풀라케신 1세의 할아버지는 자야심하, 아버지는 라나라가로 확인된다고 밝혔다.[14][15][16][17] 카마트와 모라에스는 남인도 왕가와 북부 왕국을 연결하는 것은 11세기의 대중적인 관행이었으며, 바다미 찰루키아 기록 자체에는 아요디아 기원설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8][19]

많은 역사학자들이 북부 기원설을 기각했지만, 표명학자 K.V. 라메쉬는 북부인들의 초기 남부 이주가 조사할 가치가 있는 '뚜렷한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20] 그는 아요디아와의 가족 관계에 대한 비문 기록이 없고, 칸나다어 정체성은 족장과 왕으로서 성공을 거둔 카르나타카 지역으로 일찍 이주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찰루키아 왕조의 조상이 칸나다어권 원주민이라는 생각은 찰루키아 제국 왕들에게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21] 12세기 카슈미르 시인 빌하나는 찰루키아 가문이 수드라 카스트에 속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크샤트리야라고 주장한다.[22]

2. 3. 기타 가설

찰루키아 왕조의 초기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존 키이, D.C. 시르카르, 한스 라즈, S. 센, 카마트, K.V. 라메쉬, 카르마카르 등 저명한 역사가들은 찰루키아 왕조의 창립자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지역의 바다미 출신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2][3][4][5][6][7][8][9][10][11][12]

일부에서는 찰루키아가 2세기의 이크슈바쿠 비문에 언급된 안드라 이크슈바쿠의 가신 '칸다칼리키 렘마나카' 족장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카마트는 이 가설이 혈통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칸다칼라키 가신은 스스로를 '히란야카고트라의 바시슈티푸트라'라고 칭했지만, 찰루키아는 비문에서 스스로를 '마나브야사고트라의 하리티푸트라'라고 칭했는데, 이는 초기 영주인 바나바시의 카담바와 같은 계보이다. 이는 찰루키아가 카담바의 후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찰루키아는 이전에 카담바가 통치했던 영토를 장악했다.[13]

동찰루키아의 후대 기록에서는 아요디아의 통치자가 남쪽으로 와서 팔라바를 물리치고 그 공주와 결혼하여 풀라케신 1세의 아버지인 비자야디트야를 낳았다는 북부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가 K.V. 라메쉬, 초프라, 사스트리에 따르면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에서는 자야심하가 풀라케신 1세의 할아버지, 라나라가가 아버지로 확인되었다.[14][15][16][17] 카마트와 모라에스는 남인도 왕가와 북부 왕국을 연결하는 것이 11세기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바다미 찰루키아 기록 자체에는 아요디아 기원설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한다.[18][19]

북부 기원 이론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각되었지만, K.V. 라메쉬는 북부인들의 초기 남부 이주가 조사할 가치가 있는 '뚜렷한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20] 그는 아요디아와의 가족 관계에 대한 비문적 언급이 없고, 칸나디가 정체성은 족장과 왕으로서 성공을 거둔 카르나타카 지역으로 일찍 이주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찰루키아 제국 왕들에게는 조상의 칸나다어권 원주민 기원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21] 12세기 카슈미르 시인 빌하나의 글에서는 찰루키아 가문이 수드라 카스트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문헌에서는 크샤트리야라고 주장한다.[22]

역사가 장 호우벤, 카마트, 그리고 D.C. 시카르는 바다미 찰루키아 비문칸나다어산스크리트어로 적혀있다고 언급했다.[23][24][25] N.L. 라오에 따르면, 비문은 자신들을 '카르나타스'라고 칭하고, '프리야갈람(Priyagallam)', '노두타겔봄(Noduttagelvom)'과 같은 칸나다어 명칭을 사용했다. 일부 찰루키아 왕자의 이름은 칸나다어 '아라사("왕" 또는 "최고")'로 끝난다.[26][27] 라슈트라쿠타 비문은 '바다미 카르나타발라(카르나타의 힘)의 찰루키아'라고 명명한다. S.C. 난디나트는 "찰루키아"라는 단어가 농업용 도구와 관련된 칸나다어 단어 살키(Salki) 또는 찰키(Chalke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8][29] 일부 역사가들은 찰루키아인들이 농경인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추정한다.

서찰루키아 왕조의 궁정 시인은 찰루키아의 조상 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창조자인 브라흐마가 산디아 (황혼) 의식의 수행에 참여했을 때, 인드라는 그에게 다가와 지구상에서 증가하는 악을 종식시킬 수있는 영웅을 창조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요청을 받은 브라흐마는 꾸준히 출루카-잘라(손바닥에 있는 봉헌의 물)를 들여다 보았고, 찰루키아의 조상인 위대한 전사가 나왔다.

찰루키아는 스스로가 사프타 마트리카스("일곱 신성한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으며 시바, 비슈누, 참문디, 수리야, 쿠베라, 파르바티, 비나야카, 카르티케야 등 많은 신의 숭배자라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찰루키아를 구자라트차울루키아 왕조와 연결짓는다.[38] 프리티비라지 라오의 후기 사본에 따르면 차울루카야는 아부산의 화덕(Agnikund)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그니쿨라 이야기는 비카네르 요새 도서관에 보존된 프리티비라지 라오 원본에는 언급되지 않는다.[39]

비크라마디트야 6세(11세기 이후)의 닐라군다 비문에 따르면, 찰루키아는 원래 59명의 왕이 통치했던 아요디아 출신이며, 나중에 이 가족 중 16명이 남인도로 이주해 군림하였다. 빌하나는 가족의 첫 번째 구성원인 "찰루키아"가 브라흐마 신의 "손의 구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40][41] 일부 족보 기록은 아요디아 기원을 가리키며 찰루키아가 수리야밤사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42][43][44]

루이스는 찰루키아가 이라크의 "셀레우키아" 부족의 후손이며, 칸치푸람의 팔라바와의 갈등은 고대 셀레우키아와 "파르티아" 간 갈등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마트는 이 이론이 유사하게 들리는 부족 이름을 기반으로 혈통을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45]

3. 역사

찰루키아 왕조는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600년 이상 동안 인도의 데칸 고원을 지배했으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각각 개별적인 세 왕조로 통치했다.


  • '''바다미의 찰루키아''' (초기 찰루키아): 6세기8세기 사이에 통치.
  • '''칼야니의 찰루키아''' (후기 찰루키아): 바다미의 찰루키아와 형제 왕조.
  • '''벵기의 찰루키아''' (동찰루키아): 바다미의 찰루키아에서 파생.


산스크리트어칸나다어로 된 여러 비문은 바다미 찰루키아 역사에 대한 주요 사료이다. 망갈레샤(578)의 바다미 동굴 비문, 풀라케신 2세의 페다바두구루 비문, 칸치 칼리사나타 사원 비문, 비크라마디트야 2세의 파타다칼 비루파크샤 사원 비문(모두 칸나다어) 등이 중요하다.[30][31] 풀라케신 1세의 바다미 동굴 비문(543), 마하쿠타 기둥의 망갈레샤 비문(595), 풀라케신 2세의 아이홀 비문(634)은 오래된 칸나다 문자로 쓰여진 중요한 산스크리트어 비문이다.[32][33][34]

당시 외국 순례객들의 기록은 바다미 찰루키아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현장은 풀라케신 2세의 궁정을 방문하여 그의 효율적인 통치에 감명받았다고 기록했다. 사산 황제 호스로 2세는 풀라케신 2세와 사절단을 교환하기도 했다. 현장은 풀라케신 2세가 제국을 99,000개의 마을로 구성된 3개의 '마하라슈트라카'로 나누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카르나타카, 마하라슈트라, 콘칸을 포함했을 것이다.

바다미의 브후타나타 사원 단지.

3. 1. 바다미의 찰루키아 (6세기 ~ 8세기)

6세기 굽타 제국과 그 후계 국가들의 쇠퇴로, 빈디아산맥 남쪽의 데칸 지역과 타밀라캄 지역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작은 소왕국들이 난립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제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46] 543년 풀라케신 1세가 찰루키아 왕조를 건국하고,[47][48][49] 바타피(오늘날 카르나타카주 바갈코트구의 바다미)를 수도로 삼았다. 이들을 '바다미의 찰루키아(ಬಾದಾಮಿ ಚಾಲುಕ್ಯ)'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카르나타카주 전체와 데칸고원안드라프라데시주 대부분을 포함하는 제국을 통치했다.

왕위를 물려받기 전 에레야라는 이름을 가졌던 풀라케신 2세[50]데칸고원 전역을 지배하였으며, 바다미 왕조에서 제일 유명한 왕이 되었다.[51][52] 그의 치세에 찰루키아 왕조는 본격적인 전성기로 돌입하였으며, 풀라케신 2세는 인도 역사상 주목할만한 왕 중 하나로 간주된다.[53][54][55] 그의 왕비들은 남부 카나라 지역의 알루파 왕조와 탈라카드의 서강가 왕조의 공주들이었는데, 이들 왕조는 찰루키아 왕조와의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로 친밀한 유대를 맺었다.[56][57] 풀라케신 2세는 찰루키아 제국의 남쪽 국경을 팔라바 왕국의 북쪽까지 확장하고, 나르마다 강둑에서 푸슈야부티 왕조의 하르샤 왕의 남진을 저지하였으며, 데칸 남동부에서 비슈누쿤디나 왕조를 격파하였다.[58][59][60][61] 아이홀 비문에 따르면 풀라케신 2세는 제국을 3개의 마하라슈트라카(각각 99,000개의 마을로 구성)로 나누었으며, 이 제국은 오늘날의 카르나타카, 마하라슈트라, 해안 콘칸 지역을 장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2][63] 당시 풀라케신 2세의 궁정을 방문했던 당나라 승려 현장은 왕의 효율적인 행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는 풀라케신 2세와 사신을 교환하기도 하였다.[64][65][66] 그러나 642년 팔라바의 왕 나라심하바르만이 바다미를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함락시키면서 찰루키아 왕조의 확장을 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풀라케신 2세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67][68]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는 풀라케신 2세 사후 내분과 팔라바 왕조의 13년간의 바다미 점령으로 잠시 쇠퇴하였으나,[69][70] 비크라마디트야 1세가 팔라바족을 몰아내고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그는 "라자말라"라는 별칭을 얻었다.[71] 이후 찰루키아 왕조는 비크라마디트야 치하에서 번영하였고, 비자야디트야(696년 ~ 733년) 왕은 37년간 통치하며 수많은 사원을 건축하였다.[72][73]

비크라마디트야 2세의 치세(733년 ~ 744년)에 찰루키아 왕조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톤다이만달람 영토 정복과 팔라바 왕국의 난디바르만 2세에게서 거둔 승리는 그의 유명세를 인도 전역에 떨치게 하였다. 그는 정복자임에도 팔라바 왕국의 국민들과 수도 칸치푸람의 기념물에 자비를 베풀어 존경을 받았다.[74][75][76] 찰루키아 왕조는 팔라바 왕조에게 반다비를 점령당했던 굴욕을 되돌려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카날라사나타 사원에 칸나다어 승전비를 세웠다.[77][78]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아랍 침입자들이 찰루키아 통치하의 남부 구자라트를 침공했으나, 나브사리의 찰루키아 총독 아바니자나슈라야 풀라케시에 의해 패배하고 쫓겨났다.[79] 비크라마디트야 2세는 칼라브라 통치자를 정복하고, 타밀 지역의 판디아, 촐라, 체라 등 전통적인 왕국들을 지배하였다.[80]

753년 라슈트라쿠타의 왕 단티두르가가 키르티바르만 2세를 몰아내면서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81] 바다미 찰루키아는 전성기에 남쪽의 카베리 강에서부터 북쪽의 나르마다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3. 2. 칼랴니의 찰루키아 (10세기 ~ 12세기)

라슈트라쿠타의 통치하에 데칸의 상당 부분이 있었을 때, 찰루키아 가문은 200년 이상의 휴지 기간 후인 973년에 그들의 재산을 되살렸다. 이 제국의 왕들의 계보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현대의 문학적·비문학적 증거와, 서찰루키아 왕들이 초기 찰루키아 왕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칭호와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한 이론은 서찰루키아 왕들이 6세기의 유명한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와 같은 혈통에 속했다고 주장하지만,[82][83] 다른 서찰루키아 비문학적 증거는 그들이 초기 찰루키아와는 무관한 별개의 혈통이었음을 시사한다.[84]

타르다바디를 통치했던 라슈트라쿠타 봉신인 타일라파 2세(1000년, 비자푸르 지역)는 라슈트라쿠타의 카르카 2세를 전복시키고 서부 데칸에서 찰루키아 통치를 다시 확립했으며, 이후 옛 찰루키아 제국의 영역 대부분을 회복했다.[85][86] 서찰루키아는 200년 이상 데칸을 통치했으며, 남인도의 촐라 제국, 그리고 그들의 사촌인 벵기의 동찰루키아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왕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통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87][88] 50년간 지속된 그의 통치 초기부터 그는 기존의 사카기원을 폐지하고 비크라마기원을 열었다.[89][90] 이후 대부분의 찰루키야 비문은 이 새로운 기년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야심차고 숙련된 군사 지도자였다. 그의 지도력 아래, 서찰루키아는 벵기(안드라 해안)에 대한 촐라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고 데칸의 확고한 지배 세력이 될 수 있었다.[91][92] 서찰루키아 시대는 칸나다어 문학과 산스크리트 문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시기였다.[93][94] 12세기 말 호이살라, 판디아, 카카티야 왕조, 데바기리의 야다바 왕조가 등장하면서, 칼야니의 찰루키아 제국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95]

3. 3. 벵기의 찰루키아 (7세기 ~ 12세기)

풀라케신 2세는 616년에 오늘날의 안드라프라데시주 해안 지역에 해당하는 동부 데칸을 정복하여 비슈누쿤디나 왕조의 잔당들을 물리쳤다. 그는 621년에 그의 형인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를 총독으로 임명했다.[96][97] 동찰루키아인들은 원래 칸나다인이었다.[98] 풀라케신 2세가 죽은 후, 벵기 부왕령은 독립적인 왕국으로 발전했고 넬로르와 비사카파트남 사이의 지역을 포함했다.[97][99]

8세기 중반 바다미 찰루키아 제국의 쇠퇴 후, 서부 데칸의 새로운 통치자인 라슈트라쿠타와 동찰루키아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그 후 2세기 동안, 동찰루키아인들은 라슈트라쿠타의 종속을 받아들여야 했다.[100] 비자야디티야 2세(c. 808–847)와 같은 드문 군사적인 성공을 제외하면, 찰루키아가 독립을 축하할 수 있었던 것은 비마 1세(c. 892–921)의 통치 기간 중이었다. 비마 1세의 죽음 이후, 안드라 지역은 다시 한번 계승 분쟁과 라슈트라쿠타에 의한 벵기 문제에 대한 간섭을 목격했다.

동찰루키아의 운명은 1000년에 바뀌었다. 그들의 왕인 다나르나바는 텔루구 초다 왕 비마에 의해 973년에 전투에서 죽었고, 비마는 그 후 27년 동안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요했다. 이 시기 동안 다나르나바의 두 아들은 촐라 제국으로 피신했다. 초다 비마의 촐라 영토인 톤다이만달람 침략과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은 촐라-찰루키아 관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비록 라자라자 1세의 통치하에 있었지만,[101] 다나르나바의 장남인 사크티바르만 1세가 1000년에 벵기의 통치자로 즉위했다. 그 당시 서부 데칸의 주요 권력으로서 라슈트라쿠타를 대체했던 서찰루키아는 촐라와 해안가 안드라 왕국 사이의 이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벵기 지역에서 증가하는 촐라의 영향력을 뿌리뽑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00][102]

동찰루키아 왕조는 초기에 칸나다어와 문학을 장려했지만, 이후 지역적인 요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텔루구어를 중요시하였다.[103][104] 텔루구어 문학의 성장은 동찰루키아 덕분이다.[105]

4. 행정 및 군사

찰루키아 왕조는 마가다와 사타바하나의 행정 제도를 본받아 제국을 여러 마하라슈트라카(주)로 나누고, 이를 다시 라슈트라카(만달라), 비샤야(구), 보가(10개 마을) 등으로 세분화했다.[65][106] 알루파, 강가, 바나, 센드라카와 같은 봉신들이 다스리는 자치구도 있었다.[107] 지역 집회와 길드는 지역 문제를, 마하자나(학식있는 브라만) 집단은 바다미(2000명)와 아이홀(500명) 등의 아그라하라(고등 교육 기관)를 담당했다. 헤르준카(하중세), 키루쿨라(소매 상품세), 빌코드(판매세), 판나야-베텔 세금, 싯다야(토지세), 바다라불라(왕실 지원세) 등 다양한 세금이 있었다.[107]

찰루키아 군대는 보병, 기병, 코끼리 부대, 그리고 강력한 해군으로 구성되어 풀라케신 2세가 빈디야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108] 당나라 승려 현장은 전투 전 코끼리에게 술을 먹였다고 기록했다.[65][109] 레바티드비파(고아주)와 푸리 정복은 해군력 덕분이었다. 라슈트라쿠타 비문에는 찰루키아 군대를 "카르나타카발라"라고 칭송했다.[110][111]

4. 1. 행정

찰루키아 왕조의 행정은 마가다와 사타바하나의 행정 기구를 모델로 삼았다.[65] 제국은 여러 마하라슈트라카(주)로 나뉘었고, 마하라슈트라카는 다시 라슈트라카(만달라), 비샤야(구), 보가(10개 마을)와 같이 카담바 왕조가 사용했던 다사그라마 단위와 비슷한 하위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낮은 수준의 정부에서는 카담바 양식이 우세했다. 비크라마디야 1세의 산잔 판에는 다사그라마라고 불리는 토지 단위까지 언급되어 있다.[106] 제국의 속주 외에도 알루파, 강가, 바나, 센드라카와 같은 봉신들이 지배하는 자치구가 있었다.[107] 지역 집회와 길드는 지역 문제를 담당했다. 마하자나(학식있는 브라만) 집단은 바다미(2000명의 마하잔)와 아이홀(500명의 마하야)과 같은 아그라하라(가티카 또는 "고등 교육 기관")를 담당했다. 헤르준카(하중에 대한 세금), 키루쿨라(수송 중인 소매 상품에 대한 세금), 빌코드(판매세), 판나야-베텔 세금, 싯다야(토지세), 바다라불라(왕실 지원 세금) 등의 세금 제도가 존재하였다.[107]

4. 2. 군사

찰루키아 군대는 잘 조직되었으며, 풀라케신 2세가 빈디야산맥을 넘는 데 성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108] 찰루키아 군대는 보병, 기병, 코끼리 부대와 강력한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찰루키아 군대가 전투 전에 술에 취한 수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65][109] 찰루키아 왕조가 인도의 동쪽 해안에 있는 레바티드비파(오늘날의 고아주)와 푸리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해군력 덕분이었다. 라슈트라쿠타 비문은 강력한 찰루키아 군대를 나타낼 때 "카르나타카발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110][111]

5. 사회와 종교

찰루키아 왕조 시기에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고, 데바다시가 정부에 의해 인정되었다. 일부 왕들은 후궁(가니카)을 거느렸고,[114] 과부들이 언급된 기록으로 보아 사티 풍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인도 고전 춤인 바라타나탐의 전신인 현자 바라타의 나티야샤스트라가 인기가 있었고, 왕실 여성들이 정치 권력을 누리기도 했다.[115] 비자야디티야의 여동생이자 비자얀카 왕비였던 쿰쿠바데비는 자이나교 사원을 세웠고,[116] 비크라마디티야 2세의 왕비들은 사원을 봉헌했다.[117]

바다미의 바이슈나바 석굴 사원 No. 3, 서기 578년.


시바파비슈누파가 번성했고, 특히 비슈누파의 인기가 더 많았다.[118] 파타다칼, 아이홀, 마하쿠타 등에 사원이 세워졌고, 인도 북부 성직자들이 초대되었다. 베다의 희생제, 종교적 맹세와 선물이 중요했다.[119] 바다미 왕들은 비슈누, 시바, 카르티케야, 가나파티, 샤크티, 수리야, 사프타 마트리카( "일곱 어머니들")와 같은 힌두교 신들에게 사원을 바쳤고, 아슈바메다("말 희생제")도 행해졌다.[120]

자이나교도 중요한 종교였으며, 바다미 석굴 사원 중 하나는 자이나교도에게 바쳐졌다. 아이홀 단지에는 마구티에 있는 사원을 포함하여 자이나교 사원들이 세워졌다.[121] 풀라케신 2세의 궁정 시인은 자이나교도였고, 비나야바티 왕비는 트리무르티("힌두 삼주신")를 위한 사원을 봉헌했다.[120] 불교는 쇠퇴하고 있었으며, 바다미, 아이홀 등은 주요 학문의 장소였다.

5. 1. 사회

찰루키아 사회에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존재했고, 데바다시들은 정부에 의해 인정되었다. 일부 왕들은 많은 존경을 받았던 후궁(가니카)을 거느렸으며,[114] 비냐바티와 비자얀카와 같은 과부들이 기록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사티 풍습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데바다시들은 사원들에 존재했다. 남인도의 고전 춤인 바라타나탐의 전신인 현자 바라타의 나티야샤스트라는 인기가 있었고, 많은 조각품들과 비문에서 나타난다.[115] 왕실의 일부 여성들은 행정에서 정치적인 권력을 누렸다. 비자야디티야의 여동생이자 비자얀카 왕비였던 쿰쿠바데비(알루파 왕 치트라바하나의 왕비이기도 함)는 유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었고,[160] 여러 교부금을 하사하는 동시에 풀리게레에 아네사제바사디라고 불리는 자이나교 사원을 세웠다.[116] 비크라마디티야 2세의 왕비들인 로카마하데비와 트라일로키야마하데비 역시 교부금을 냈고, 아마도 각각 파타다칼에 있는 로케스바라 사원(오늘날의 비루파크샤 사원)과 말리카르주나 사원을 봉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17]

5. 2. 종교



시바파비슈누파 모두 바다미 찰루키아 시대에 번성했지만, 비슈누파의 인기가 더 많았다.[118] 파타다칼, 아이홀, 마하쿠타와 같은 곳에 유명한 사원들이 세워졌고, 인도 북부에서 성직자(아르카)들이 초대되었다. 베다의 희생제, 종교적 맹세(브라타)와 선물(다나)의 수여가 중요했다.[119] 바다미 왕들은 베다 힌두교의 추종자들이었고 아이홀레의 인기 있는 힌두교 신들에게 사원을 바쳤다. 비슈누, 시바, 카르티케야, 가나파티, 샤크티, 수리야, 사프타 마트리카("일곱 어머니들")와 같은 힌두교 신들의 조각상은 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바다미 왕들은 또한 아슈바메다("말 희생제")를 행했다.[120] 다산의 여신인 라자 가우리의 숭배도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는 자이나교도 중요한 종교였다. 그러나 왕조의 왕들은 세속적이지 않았고 자이나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바다미 석굴 사원들 중 하나는 자이나교도에게 바쳐졌다. 마구티에 있는 사원을 포함하여 자이나교 사원들은 아이홀 단지에도 세워졌다.[121] 풀라케신 2세의 궁정 시인인 라비키르티는 자이나교도였다. 비나야바티 왕비는 바다미에서 트리무르티("힌두 삼주신")를 위한 사원을 봉헌했다. 트리무르티, 하리하라, 아르다나리슈와라의 조각상들은 그들의 관용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이다.[120] 불교는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쇠퇴하고 있었다. 이것은 현장의 저술로 확인할 수 있다. 바다미, 아이홀, 쿠르투코티, 풀리게레(오늘날 가다그구의 락시슈와르)는 주요 학문의 장소였다.

6. 문화

바다미 찰루키아는 북쪽 왕국들과 비교했을 때 다른 기준의 동전을 주조했다.[112] 이 동전들은 나가리와 칸나다 문자로 된 명각을 지니고 있었다.[24] 망갈레샤의 동전은 앞면에 사원, 뒷면에 '램프 사이의 통로' 또는 사원이라는 상징을 새겼다. 풀라케신 2세의 동전은 앞면에 정면으로 사자가, 뒷면에 사원이 새겨져 있었다. 동전의 무게는 4그램이었고, 옛 칸나다어로 훈(또는 호누)이라고 불렸으며, 파나(또는 파남)와 쿼터파나(현대의 칸나다어에 해당하는 하나 - 글자 그대로 "돈"을 의미함)와 같은 단위들을 가지고 있었다.[113] 가다아나라고 불리는 금화는 나중에 바라하(왕실의 상징)라고 알려지게 된 파타다칼의 비자예스와라 사원의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112]

6. 1. 건축

바다미 찰루키아 시대는 남인도 건축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이 왕조의 왕들은 힌두교 시바 신을 위해 많은 사원들을 지었다. 이들의 건축 양식은 "찰루키아 건축" 또는 "카르나타 드라비다 건축"이라고 불린다.[123][124] 이들에 의해 지어진 거의 100개의 기념물들, 즉 암각(석굴)과 구조적인 것들이 오늘날의 카르나타카 북부 바갈코트 지역의 말라프라바강 유역에서 발견된다.[125]

파타다칼에 지어진 드라비다 양식의 비루파크샤 사원(서기 740년).


찰루키아의 사원 건축 활동은 3단계로 분류될 수 있다.

  • 초기 단계: 6세기 마지막 분기에 시작되어 많은 석굴 사원들을 낳았다. 아이홀레에 있는 세 개의 기본 석굴 사원들(베다 사원 하나, 자이나교 사원 하나, 불교 사원 하나)과 바다미에 있는 네 개의 발전된 석굴 사원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바다미의 3번 석굴인 바이슈나바 사원은 서기 578년에 지어졌다.[157] 이 석굴 사원들은 단순한 외부와 달리 기둥, 홀(만타파), 성소(셀라) 등으로 구성된 정교한 내부를 가지고 있다.[128]

  • 2단계: 아이홀레(약 70개의 건축물이 존재하며 "인도 사원 건축의 요람 중 하나"라고 불려왔다[130])와 바다미에서 이루어졌다. 6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131][132][133]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라드 칸 사원, 메구티 자이나교 사원(634), 두르가 사원(북인도 양식과 남인도 양식의 통합[122]), 후치말리 구디 사원 등이 있다.

  • 3단계: 8세기에 지어져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파타다칼의 구조 사원들은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의 절정과 성숙기를 나타낸다. 바다미에 있는 부타다 사원 그룹도 이 시기의 것들이다. 파타다칼에는 남쪽 드라비다 양식 6개, 북쪽 나가라 양식 4개의 사원이 있다. 남쪽 양식의 상가메스와라 사원(725), 비루팍샤 사원(740–745), 말리카르주나 사원(740–745)이 유명하다.


춤추고 있는 시바, 바다미 No. 1 석굴


서찰루키아의 통치 기간은 데칸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시기였다. 그들의 건축은 8세기의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과 13세기에 대중화된 호이살라 건축 사이의 개념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139][140]

이 시기에 만들어진 주목할 만한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 이타기에 있는 마하데바 사원[145][146]
  • 라쿤디에 있는 카시비스베바라 사원[147][148]
  • 쿠루바티에 있는 말리카르주나 사원[148]
  • 바갈리에 있는 칼레스바라 사원[149][150]
  • 담발에 있는 도다 바사파 사원[151][152]
  • 하베리에 있는 시데스바라 사원[153][154]
  • 안니게리에 있는 암르테스바라 사원[155][156]


동찰루키아는 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주 알람푸르에 훌륭한 사원들을 지었다.[157][158]

6. 2. 문학

산스크리트어칸나다어로 된 여러 비문은 바다미 찰루키아 역사에 대한 주요 사료이자 증거이다. 망갈레샤(578)의 바다미 동굴 비문, 서기 700년 카페 아라바타의 기록, 풀라케신 2세의 페다바두구루 비문, 칸치 칼리사나타 사원 비문 및 비크라마디트야 2세의 파타다칼 비루파크샤 사원 비문(모두 칸나다어)은 찰루키아 언어에 대한 더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30][31] 풀라케신 1세의 바다미 동굴 비문 (543)과 마하쿠타 기둥의 망갈레샤 비문(595), 그리고 풀라케신 2세의 아이홀 비문(634)은 오래된 칸나다 문자로 쓰여진 중요한 산스크리트어 비문의 예시이다.[32][33][34] 찰루키아의 통치기 동안 타밀라캄으로 알려진 지역 이외의 인도 아대륙 지역에서 칸나다어가 산스크리트어와 함께 비문의 지배적인 언어로서 전파되는 것을 볼 수 있다.[35] 칸나다어 전설이 있는 바다미 찰루키아의 여러 주화가 발견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 기간 동안 칸나다어가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36]



궁정 시인 라비키르티가 산스크리트어와 칸나다어로 쓴 풀라케신 2세의 아이홀레 비문(634년)은 고전시로 꼽힌다.[32][159] 자신을 어둠의 사라스바티라고 표현한 시인 비자야나카의 몇 구절이 보존돼 있다. 그녀는 찬드라디티야 왕자(풀라케신 2세의 아들)의 왕비였을 가능성도 있다.[160] 서찰루키아 시대 산스크리트어로 유명한 문인으로는 힌두교의 율법을 다룬 책 미타크샤라를 저술해 명성을 떨친 비자나네슈와라와 마나솔라사라는 학구백과를 편찬한 저명한 학자 소메슈바라 3세 등이 있다.[161]

바다미 찰루키아 시대부터 칸나다 문학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162] 비문들은 칸나다어를 "자연어"라고 부르고 있다.[163] 트리파디(세 줄) 미터로 700년경에 쓰인 카페 아라바타의 기록은 칸나다어 시학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164][165] 자야키르티에 의해 나중에 인용된 카르나테스와라 카타는 풀라케신 2세의 찬미가이며, 이 시기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65] 현재 현존하지 않지만 독립적인 참고 문헌[166]을 통해 알려진 다른 칸나다 작가로 추정되는 인물들로는 프라브리타를 저술했다고 알려진 스야마쿤다차리야(650)와 논리에 대한 장황한 해설인 추다마니의 저자일 가능성이 있는 스리바라다데바(650 또는 그 이전, 투무불루라차리야라고도 불림)가 있다.[162][167][168][169]

동서찰루키아의 통치는 각각 칸나다어와 텔루구어 문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9세기에서 10세기까지 칸나다어는 이미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들을 보았다. 칸나다 문학의 "세 가지 보석"인 아디카비 팜파, 스리 폰나 및 라나가 이 시기에 속했다.[170][171] 11세기에, 텔루구어 문학은 난나야 바타를 첫 작가로 하는 동찰루키아의 후원 아래 탄생했다.[171][172]

참조

[1]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arnataka: (from Pre-historic Time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Jupiter Books 2001
[2] 문서 N. Laxminarayana Rao and Dr. S. C. Nandinath have claimed the Chalukyas were Kannadigas (Kannada speakers) and very much the natives of Karnataka
[3] 서적 Ancient India Chand and Company 2007
[4] 서적 Advanced history of India: From earliest times to present times, Part-1 Surgeet publications 2007
[5] 서적 John Keay 2000
[6] 문서 Quote:"They belonged to Karnataka country and their mother tongue was Kannada" 1999
[7] 문서 The Chalukyas of Badami seem to be of indigenous origin 2001
[8] 서적 Kanarese Dynasties Moraes 1931
[9] 서적 Moraes 1931
[10] 서적 2003
[11] 서적 1947
[12] 서적 1984
[13] 문서 Pulakesi I of Badami who was a feudatory of the Kadamba king Krishna Varman II, overpowered his overlord in c. 540 and took control of the Kadamba Kingdom 2001
[14] 서적 1984
[15] 문서 From the Badami Cliff inscription of Pulakesi I and from the Hyderabad record of Pulakesi II which states their family ancestry 2001
[16] 서적 1955
[17] 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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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Vikramanakadevacharitam 1984
[23] 서적 Indian Epigraphy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965
[24] 서적 2001
[25] 서적 1996
[26] 문서 Professor N.L. Rao has pointed out that some of their family records in Sanskrit have also named the princes with "arasa", such as Kattiyarasa (Kirtivarman I), Bittarasa (Kubja Vishnuvardhana) and Mangalarasa (Mangalesha) 2001
[27] 저널 Journal of Indian History Department of Modern Indian History, University of Allahabad
[28] 문서 Dr. Hoernle suggests a non-Sanskrit origin of the dynastic name. Dr. S.C. Nandinath feels the Chalukyas were of agricultural background and of Kannada origin who later took up a martial career. He feels the word 'Chalki' found in some of their records must have originated from 'salki', an agricultural implement 2001
[29] 서적 1947
[30] 서적 2001
[31] 서적 1984
[32] 서적 2001
[33] 웹사이트 Badami Chalukyans' magical transformation http://www.deccanher[...] 2005-07-26
[34] 저널 The Mahākuṭa Pillar and Its Temples 197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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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적 Early Aryans to Swaraj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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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The Andhras through the ages Sri Saraswati Book De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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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웹사이트 The Southern India: Coinage of the Chalukyas http://prabhu.50g.co[...] Prabhu's Web Page On Indian Coinage 200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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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논문 Chronology and Development of the Chāḷukya Cave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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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논문 The Pārvatī Temple, Sandur and Early Images of Agast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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