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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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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동만은 정치인이자 기업가인 아버지와 국어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였고,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후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으나, 국정원 개혁 과정에서 갈등을 겪고 사퇴했다. 그는 북한 연구, 인문학, 과거사 진실 규명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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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만
기본 정보
출생1950년 09월 18일
직업역사학자, 대학교수
소속상명대학교
분야역사학 (한국 근현대사)
학력서울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경력
주요 경력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연구위원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저서
주요 저서《해방전후 한국사회의 재인식》
《한국 근대사》
《만들어진 친일》
《역사학연구》
《분단체제 극복의 전망》
《친일파 99인》 (공저)
《친일인명사전》 (공저)

2. 생애

2. 1. 초기 활동

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서동만은 정치인과 기업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서문수와 중학교 국어교사로 활동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아버지는 한때 이기붕의 비서관을 지냈다 한다.

아버지 서문수는 일제강점기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였다. 그러나 일본 유학을 했다가 학업도 못 마치고 학병으로 끌려가 도중에 하차해야 했다.[3] 해방 후에는 한국 국군에 입대 소령으로 예편하고, 한때 자유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서문수는 자유당 간판으로 경북 경산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3] 이기붕이 집권 자유당 2인자로 ‘서대문 경무대’ 소리를 들으며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아버지 서문수는 이기붕의 비서를 지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기붕 일가는 몰락했다.[3]

어머니는 그걸 보고 어릴 때부터 절대 정치하지 말라고 훈계하셨죠.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도 기가 막히죠. 4·19 학생 데모 때문에 몰락했는데 아들놈이 데모를 해서 사장 자리에서 잘리게 됐으니까요.

저는 자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세미나를 했어요. 그러다 아버지한테 걸리면 일장 설교를 듣곤 했죠. 아버지는 전형적인 TK여서 말할 수 없이 보수적이셨어요. 아버지와 영 안 맞는 게 있었어요.[3]

4.19 혁명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아버지 서문수는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서문수는 후에 코오롱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냈다.[3] 어려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 수시로 마찰하곤 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대학교 때 학생운동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어머니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다니던 숙명여중 국어교사였다.[3] 1980년대 초에 서 교수는 강금실 변호사의 전 남편 김태경씨와 친하게 지내며 번역 일을 했다.[3] '김태경씨가 강 변호사와 연애할 때 함께 자주 만났지요. 한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강 변호사는 어머니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있어 저희 집에 자주 놀러왔다[3]' 한다. 또한 강금실의 서울대 동기이기도 했고 그와는 술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1972년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2. 1. 2. 학창 시절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75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다.[2]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 교내에서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유인물을 뿌리다 붙잡혀 구속됐다. 영등포지원 1심에서 징역 7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3] 이때 재판장이 바로 고영구 당시 부장판사였다.[3] 고영구 판사는 그의 형을 감형해주었다 한다. 원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은 서 피고인은 징역 3년 혹은 3년6월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징역 2년을 선고했으니 1년가량 더 깎아준 셈이다.[3] 그밖에 그의 아버지 서문수의 로비도 작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어떤 유력자한테 부탁하셨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3]'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코오롱 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올라갔던 아버지 서문수는 1978년 아들이 긴급조치로 구속되는 바람에 해직을 당해 서울 무교동 코오롱빌딩 지하에서 일식집을 경영했다.[3] 그러나 코오롱 그룹의 특별 배려로 일식집을 하게 됐다. 회사에서 위로조로 가게 자리를 내준 것이었다.[3] 한편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는 그의 논문을 자주 읽어봤다 한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 집에만 계실 때 많이 약해지셨죠. 제가 쓴 박사논문을 다 읽으셨어요. 할 일도 없으시니까. 아들이 도쿄대에서 박사학위 받은 걸 무척 흡족해하셨어요.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했다가 학업도 못 마치고 학병으로 끌려가 도중에 하차하셨거든요.[3]'라 한다.

2. 1. 3. 대학 생활

1978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유신반대 데모를 벌여 구속됐다. 김철수, 부윤경과 함께 주동한 시위에는 줄잡아 1500여명이 참가했고 경찰기동대가 폭력 진압할 때까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일부 학생은 봉천동과 신림동으로 나누어 진출해 ‘유신 철폐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벌였다.[3]

그러나 그가 머물던 하숙방에는 금서로 지정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 있었다. 당시 서동만의 지도교수였던 김학준 교수는 서동만이 형사들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보고 정치학과 동기생인 김장권에게 “동만이 집에 가서 책을 치우라”고 시켰다.[3] 당시에는 구속학생의 방을 압수수색해 금서(禁書)가 나오면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추가 기소했기 때문이다.[3]

김학준의 배려로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서동만일본어은 "저도 시위 전날 위험한 책을 미리 치워놓았죠. 그런데 제가 붙잡혀가고 장권이가 와서 보스턴백으로 한 가방 또 가져갔다더군요. 긴급조치 시대에는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죠. 장권이는 저와 일본 유학 때도 만나 우정을 나눴어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다 2003년 겨울에 암으로 죽었어요. 아까운 인재죠."라고 회고했다.[3]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하여 1981년 2월 서울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대학원 진학 시험에서 떨어졌다.[3] 그에 의하면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해 무사히 졸업했어요. 그런데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외부의 지시가 있었죠. ‘빵잡이(교도소 다녀온 학생)’들은 다 떨어뜨리라는. 학교로서는 불가항력이었어요.'라고 한다.[3]

2. 2. 청년기 활동

2. 2. 1. 민청련 활동

1983년 9월 30일에는 김근태, 이해찬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던 민청련에서 장영달, 이해찬과 함께 일했다.[3] 민청련이 조직될 때 75학번 긴급조치 9호 복역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민주화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편집했다. 직장에 다니느라 언더(지하)에서 역할을 했으며, 드러내놓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한다.[3]

2. 2. 2. 일본 유학 생활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히토쓰바시 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 그의 영향과, 일본에 친척이 사는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일본행을 선택했다. 1986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대학교 종합문화연구학과에 진학, 와다 하루키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와다 하루키일본 망명 중인 김대중을 지지하고 그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서동만에 의하면 김대중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을 도운 와다 하루키가 친북으로 찍히면서 자신도 도매끔으로 찍혀서 귀국을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3]

안기부에 의해 반한 운동가로 낙인찍힌 그는 1988년 출국한 이후, 1995년까지 귀국을 주저하였다. 1988년 일본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1990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론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1995년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국제관계론 박사를 받았다.

2. 2. 3. 연구원, 학문 활동

1995년 귀국하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에서 2년간 북한학 담당 객원연구위원으로 재직하다가 1997년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로 일하였고, 그해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가 되었으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 회원이 되었다. 이어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됐다. 그해 상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 부교수가 되었다.

그는 교양과정에서 '북한사회론'과 '민족과 통일' 등을 가르쳤다. 그밖에 북한사회학, 외교학 등에 대한 과목을 담당하였다. 또 가끔 '남한정치'도 가르치는데 두 과목이 주 과목이었다[3] 한다. 그는 '교양과정 학생들한테 사회과학 책을 소개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백낙청 선생이 쓴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소개합니다.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인문학적인 글이 도움이 됩니다.[3]'라고 밝히기도 했다. 2001년 3월 상지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그해 상지대 부교수가 되었다.

그는 문헌학자로도 활동했다. 2000년대 초 국내 학자중 북한관련 일본문헌에 가장 정통한 학자의 한 사람으로도 꼽혔다.[4] 그는 스승 와다 하루키의 동북아 공동체론에 공감했고, 노무현동북아 균형자론과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한다. 와다 교수가 주창하는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동북아 공동체 형성에 큰 영향을 받은 서 실장의 생각은 노 대통령의 동북아중심 구상과 맥이 닿는다는 분석이다.[4]

2. 3. 노무현 정부 시절

2. 3. 1. 노무현 정부 초반

2002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정책위원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자의 대선캠프 정책특보로 활동하였다.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대통령에 당선되자 2002년 12월부터 2003년 3월까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뒤 상지대 부교수와 민화협 정책위원으로 복귀하였다.

2003년 3월 27일 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가 4월 6일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임명되었다.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의 임명으로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으로 재직하였다. 인준 초기 친북좌파 논란에 시달렸으나 일부 언론의 변호 등으로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 초기 그는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에 임명되었을 때 '북한 개혁 개방론자', '친북좌파' 등의 이념 성향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국정원의 인사·조직·예산 등을 총괄하며 국정권 개혁에 앞장섰다.[1]

2004년 그는 국가정보원 개혁의 적임자로 지명되어, 국정원 기조실장 후보자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정부 청와대는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으로 기용하자니 국회, 특히 야당과의 관계 악화가 걱정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니 인선작업 장기화에 따른 국정원 개혁 차질 등 국정운영 부담 및 정국 주도권 약화가 우려[5]'된다며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발탁한다.

2. 3. 2. 국정원 기조실장 인사청문회 과정

2003년 3월 국가정보원장 인사청문회를 마친 여야 간사는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는 인준하되,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서동만 교수(상지대)에 대해선 이념성을 문제삼아 반대하기로 합의하였다.[6] 서동만 교수는 외교통일안보 분과 인수위원 시절부터 국정원 개혁 청사진을 마련한 주도적 인물로, 향후 국정원 개혁의 핵심역할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었기 때문이다.[6]

인수위 출신들은 이같은 여야 합의가 국정원 개혁을 차단하려는 정치권 및 국정원내 일부 세력들의 합작에 의한 '제2의 최장집 사건' 시도가 아니냐며 강력반발하였다.[6]

국회 정보위원회는 22일 고영구 후보에 대한 국정원장 공개 인사청문회와 고 후보와의 1시간반동안 비공개 회의가 끝난 뒤 정형근 한나라당간사와 함승희 민주당간사가 공동 브리핑을 통해 "고영구 국정원장은 수용하되 서동만 기조실장은 수용할 수 없다"는 합의사항을 밝혔다.[6] 정, 함 의원은 "정보위 의원들이 국정원장 1명이 개혁성향이 있으면 됐지 차장급은 현장경험이 많은 실무자들로 구성해야 한다. 개혁을 위해서 외부에서 충원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6] 함승희 의원은 특히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서동만 교수가 국정원 정무직을 맡기에는 이념노선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채택하기로 여야간사간에 합의가 이뤄졌다"며 "이같은 내용을 담은 인사청문회 경과 보고서를 29일 본회의에 보고한 뒤 임명권자인 노무현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6]

여야가 "고영구 국정원장은 OK, 서동만 국정원 기조실장은 NO"로 합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회 정보위원회는 23일 오후 전체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의 인사청문회 경과 보고서를 채택할 예정이었다.[6] 정형근 한나라당간사는 이와 관련, "고영구 후보자에 대해선 청문회에서 여러 얘기가 나왔음에도 임명동의를 해줘야 할 것으로 보지만, 서동만 교수는 이념편향이나 정보 비전문가라는 점 때문에 핵심보직을 맡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공개리에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6]

2. 3. 3. 여야의 담합 문제

민주당 간사인 함승희 의원은 "서동만 교수는 제네바 협의가 깨진 것도 미국이 약속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등 시종 북한측 입장"이라며 "서 교수는 친북성향이어서 국정원의 정무직에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다수 제기됐다는 점을 부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6] DJ정부시절 국정원장을 지냈던 천용택 의원은 "서교수는 서해교전에 대해 현장 지휘관이 지시한 것이어서 김정일의 책동이 아니라고 하는 등 편향돼 있는만큼 국정원 전체를 운영하는 기조실장을 맡으면 큰일난다"면서 "대통령의 결심은 내가 지지해줘야 하지만 이것만은 안된다"고 강력한 반대입장을 밝혔다.[6] 동교동계의 김옥두 의원 역시 "고영구 후보자는 사회경험이나 개혁성 등에 비춰 문제는 있지만 원장 업무를 수행할 것으로 보지만 서동만 교수는 예산과 인사 등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조실장에는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6]

이같은 여야 합의는 그러나 서동만 교수와 함께 인수위 시절 국정원 개혁작업을 했던 인수위 관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과 의혹을 사고 있다.[6] 인수위 출신의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의원들이 서동만 교수의 전문성 운운하지만 서 교수야말로 국정원의 현행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가장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인물"이라며 "인수위 시절 국정원 개혁방향에 대한 빽빽한 보고서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고 밝혔다.[6] 그 관계자는 이어 "여야 정치권이 전례없이 국정원장이 아닌 기조실장을 문제삼고 나온 배경 자체가 의심스럽다"며 "여기에는 서교수가 기조실장이 될 경우 현재 특정지역 출신들로 편중돼 있는 인사체계를 혁파하려 할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특정지역 출신들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6]

국회 정보위는 2003년 4월 23일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결과 보고서 채택을 놓고 여야간 논의를 거듭한 끝에 여야 합의로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해서는 '부적절', 서동만 교수에 대해서는 '불가'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채택했다.[7] 기조실장 내정설이 나돌던 서동만 상지대 교수에 대해 여야가 같은 목소리로 '불가' 의견을 내게 된 데는 핵심 요직인 기조실장에 서 교수가 부임하면 정보기관 '정치개입' 문제가 다시 불거질 염려가 있는 만큼 이를 제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됐다.[7]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고 후보자는 국정원을 과거와 다르게 개혁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본다"며 "청문회에서 특별한 문제가 나온 것도 아니고 한나라당이 이념ㆍ성향을 문제삼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7] 그러나 이 관계자는 서 교수에 대해서는 "우리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7] 한편 이날 오전에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서 교수는 서해교전을 지역단위 우발사건으로 규정하는 등 편향적이고 과격한 국가관을 갖고 있고, 고 후보자는 간첩을 평화주의자라고 했던 전력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 당 정보위원 사이에 이렇게 하려면 국정원을 없애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오갔다"고 참석했던 박종희 한나라당 대변인이 전했다.[7]

2. 3. 4. 기조실장 임명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은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에 따른 국가정보원 수뇌부 후속인사를 확정, 발표했다. 관심을 모았던 국정원 기조실장엔 서동만 상지대 교수 임명을 강행했다.[8]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과 관련, "자질과 도덕성을 문제로 삼았다면 국회의견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분열주의적 이념공세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으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청와대 브리핑>>이 전했다.[8] 이날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은 국정원 인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나라당은 서 교수가 과격하고 친북적이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며 "특히 북한을 잘 아는 것과 친북은 달라 한나라당 생각이 우리와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 보좌관은 또 "서 교수는 통일, 안보분야의 전문가로 개혁성향의 인물이어서 국정원 개혁의 적임자"라고 강조했다.[8]

그동안 “서 교수 임명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한나라당도 이번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며 바짝 긴장하였다.[8] 당시 한나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은 여야 밀월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며 "노무현 대통령 측근세력들인 민주당 신주류가 신당창당을 선언한 데 이어 서동만 교수까지 기조실장에 임명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정치행보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8] 따라서 한나라당은 동원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강경대처한다는 방침이었다.[8]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은 이와 관련, 지난 27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청와대가 연속적으로 최악의 수단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만일 서 교수마저 임명한다면 국민이 아무도 국정원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했었다.[8]

한나라당은 서 교수의 국정원 기조실장 임명이 현실화할 경우 인사청문회법 개정, 정치적 예산삭감 등의 카드를 밀어붙이면서 강도 높은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박 대행은 이와 관련, “부득이 지금과 다른 모양의 2단계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8] 그러나 노무현은 기조실장 임명을 강행했고, 한나라당과 수시로 갈등하는 이유가 됐다. 한때 한나라당에서는 국가정보원을 처로 격하시킬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2. 4. 국가정보원 개혁 작업

2. 4. 1. 인사 개혁

국가정보원에 들어간 뒤 그는 편중된 특정 지역 인사들을 정리, 해고, 분배 등 인사 개혁을 실시했다.[3]

{{인용문2|들어가 보니까 국정원 개혁은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상당 부분 진전돼 있더군요. 다만 인사 면에서 지역편중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각했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 주류가 바뀌었어요. 정권안보 차원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그랬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 스스로 심각한 피해자가 아닙니까. 국정원은 가해자적 역할을 했던 거죠. 김 전 대통령 집권 후 국정원 내부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인적 청산이 이뤄졌던 거죠. 김대중 정부 후기에는 지역편중 인사가 심각했어요.}}

그에 의하면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인사특혜가 있었다고 한다. 취임과 동시에 운영차장으로 격상되면서, 국가정보원 예산과 기획업무 외에 인사에도 일부 참여할 수 있었던 그는 지역편중 인사와 김대중 정부 때의 정실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해고, 전출시키면서 한때 논란이 일기도 했다.[3]

2. 4. 2. 정치관여 기능 축소

국가정보원 운영차장 겸 기조실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국가정보원의 정치 관여 기능을 대폭 축소, 삭제하였다. 그리고 정치권에 대한 개입을 줄여 나갔다.

국정원이 직접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면은 줄어들었죠. 그렇지만 오해할 만한 소지는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조직과 업무 면에서 그런 부분을 축소했습니다.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본연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구를 재편했습니다. 일단 큰 틀은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정착시키다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3]

국내 부문의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개입권한을 그는 줄이거나 폐지했다. 이 점 때문에 내부 직원들의 반발과 반대에 봉착해야 했다. 그밖에 국가정보원이 정권옹호 활동 근거를 삭제하고, 국정원이 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것도 서동만은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금지시켰다.

국내 정치 부문은 대폭 축소했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보고는 하게 돼 있죠. 과거에는 이 일을 하는 대규모 조직이 있었죠. 정치경제 부문을 분리했죠. 대통령께서 정치 부문을 이용 안 합니다. 몇 차례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입니다. 정권안보적인 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거죠.[3]

그는 국내 정치부분, 인물 내사 사찰 관련 조항을 대폭 삭제, 수정했다. 그는 후일 인터뷰에서 '국내 정치 부문은 대폭 축소했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보고는 하게 돼 있다', '정권안보적인 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 안보적인 기능을 축소한 것에 대해서 국정원 일각과 보수주의 단체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2. 4. 3. 국정원장과의 갈등과 퇴진

이후 부서장 인사에서 국정원장이던 고영구와 수시로 반발했다. 전임자 혹은 전임 원장들의 특정지역, 학맥 인사들을 대폭 물갈이, 좌천하거나 해임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문제제기를 하다가 갈등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부서장 인사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가정보원 인사위원회에서 제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게 수용되지 않았고, 거꾸로 문제제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고 원장이 문제를 삼았죠. 그래서 그만두게 된 겁니다.[3]'라고 밝혔다. 그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원만한 인사를 하기 위해 일정한 정도의 인사 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능하면 빨리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고 했죠. 그것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3]' 한다. 그러나 수시로 원장 고영구와 인사안배를 놓고 이견을 보였고, 노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2. 5. 생애 후반

2004년 2월 10일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직을 사퇴하고 상지대학교로 돌아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에서 북한, 통일, 외교 관련 과목을 강의했다.[3] 2004년부터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칼럼을 기고했다.[3] 박헌영 전집인 이정 박헌영 전집 간행위원회 간행위원으로도 참여했다.[3]

{{인용문2|원경 스님이 낸 박헌영 전집에 대해 북쪽에서 엄청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제 스파이'로 규정해 처형한 사람의 전집이니 달가울 리 없지요. 간행위원이 수백 명인데 저도 포함돼 있습니다. 간행위원들 중에 북조선과 학술교류를 하는 분들이 곤란한 경우를 겪었다고 합니다.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기원이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니까요.[3]

조선노동당 역사에서 남로당은 없어진 겁니다. 완전한 소멸이에요. 1949년 북조선로동당남조선로동당이 합쳐져서 조선노동당이 됐잖아요. 그런데 한 쪽의 우두머리가 미제 스파이가 됐습니다. 1956년에 열린 3차대회에서 남로당을 없애버린 거예요. 박헌영의 처리 문제는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기원이나 정통성과 직결되니까 역사를 다 바꿔버린 겁니다. 그 정도로 박헌영 사건의 파장이 컸던 거죠.[3]}}

그는 조선로동당이 정통성이 결여된 집단이라고 평가했다.

2008년 2월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했으나, 강단과 언론 활동은 계속했다.[9] 2009년 5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일산 국립 암센터에 입원, 6월 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3. 사상과 신념

3. 1. 인문학과 교양론

그는 인문학과 교양 교육이 뛰어난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지적했다. CEO(최고경영자)가 사업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신변잡기를 말하는 것처럼, 대학 4년 동안 교양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다.[3] 북한을 주제로 한 학기 내내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사고할 수 있는 시기는 대학 때뿐이며, 졸업하면 이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3]

또한 그는 2000년대 이후 학생들이 취직과 스펙에만 목을 매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3] 그는 요즘 학생들이 학점밖에 생각하지 않고, 취직을 위해 컴퓨터, 영어, 직업 교육에만 매달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현실이 그러니까 나무랄 수만은 없지만, 과거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기(氣)가 살아있었다며, 지금 학생들이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3]

3. 2. 북침설에 대한 비판

노무현 정부 당시 혹은 그 이전부터 친북좌파, 주사파로 몰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 북침 주장, 또는 미군 북침설은 부인, 비판하였다. 그는 '북침은 기본적으로 북측의 공식 입장이죠. 냉전시대에 중국,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그 입장을 취했죠. 다만 서방에서도 북침설을 취하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죠. 이른바 수정주의 학파죠.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학설을 일부에선 북침설이라고 보았는데, 엄밀하게 검토하면 북침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남북 사이에 전개돼온 국지전(局地戰)의 충돌 끝에 능력 있는 북쪽이 밀고 내려온 걸로 보는 거다. 소련과 중국의 자료가 나오면서 북침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북측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북침[3]'이라고 했다.

3. 3. 친북 좌파 논란

2003년 4월 22일 국회 정보위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서동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친북좌파임을 알 수 있다고 발언했다.[3] 홍준표는 서동만이 주체사상파이며, 개혁세력으로 포장된 친북좌파들이 국정원을 점령하면 가는 방향이 자명하다고 공격했다.[3] 서동만은 이에 대해 "홍준표 의원뿐만 아니라 다른 의원 중에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몇 있어요. 실제 직접 읽고 한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3]

국정원 기조실장 인사청문회 무렵,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인은 서동만의 박사학위 논문과 각종 기고문, 발언록을 읽어보고 서동만은 주체사상파가 아니라는 칼럼을 썼다.[3] 권영빈은 '북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경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식 햇볕론자다. 한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을 근거 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그 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풍토가 문제다.'라고 지적했다.[3] 서동만은“저도 그 칼럼을 읽고 깜짝 놀랐어요. 제 이름까지 박은 칼럼이 나오니까 고맙기도 하고…. 나중에 만나봤더니 제 논문을 상당 부분 읽었더군요.”라고 회상했다.[3]

3. 4. 과거사 관련 문제

서동만은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직원들의 입장에서 과거사 규명과 관련해 찬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과거사 규명을 지지하는 직원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3] 국가정보원이나 전직 안기부, 중앙정보부 입장에서는 업무 특성상 반발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3. 5. 국정원 직원들의 애환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등의 영화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국정원 일부 직원들이 의욕을 잃거나,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였다.[3] '문제가 되는 사건의 직접적인 지휘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에는 거의 퇴직했어요.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말단 직원들이죠.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직원들의 심적 고통이 커요. 특히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예컨대 그런 영화가 몇 편 있지 않습니까.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등에서 정보부가 가해자로 나옵니다. 직원들이 자녀들과 같이 그런 영화를 보러 갔다가 낯뜨거워 혼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3]'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사람들은 직무의 특성 때문에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고 평생 숨기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며, 자기가 공을 세워도 대놓고 잘했다고 내세울 수도 없다고 하였다. 국가정보원 직원들은 명예와 업무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며, 외부에서 어떻게 보느냐와 별개로 자기가 속한 기관의 이미지라든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평가받느냐에 대해 민감하다고 한다.[3] 그래서 과거사 청산이 대다수 직원한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3] 그는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3. 6. 박헌영, 남로당에 대한 분석

서동만은 김일성이 정통성이 취약했던 탓에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려고 박헌영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숙청한 것이라고 분석한다.[3] 리승엽 등 남로당파는 금강정치학원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남조선 출신자를 모아 군사훈련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는 우려할 만한 존재였다.[3]

황호택 기자는 남로당원들이 박헌영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는데, 박헌영김일성에게 미제 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자 남쪽의 남로당 생존파 대다수가 김일성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는 증언을 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서동만 역시 이에 동의했다.

서동만은 박헌영의 처형을 '한국 공산주의, 진보주의의 비극'으로 규정했다.[3] 1947년~48년 동유럽이 강제적으로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지만,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연안계들이 좌천되는 것에 그쳤다.[3]

서동만은 박헌영 숙청이 남북 양쪽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 이후 최대의 정변이었다고 평가한다. 남로당계가 숙청됨으로써 남북 간의 정치적 연계가 단절되었고,[3] 김일성박헌영을 처형한 것이 남북한 간의 이질화, 적대화의 큰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3. 7. 박정희 당선과 남로당의 관련성 분석

서동만은 김형욱의 회고록인 김형욱 회고록을 인용하여 윤보선의 사상 공세 때문에 박정희가 집권 초기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3] 6·25전쟁이 끝나고 남쪽에 잔류해 생존한 남로당원들은 상당수에 달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자수한 사람들을 사면해줬기 때문이다.[3]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얼마 안 되는 1956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해 유효투표의 30%에 해당하는 216만표를 얻었다.[3]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에게 남로당 계열의 표가 쏠렸을 것으로 판단했고 결국 조봉암은 이로 인해 ‘사법살인’으로 내몰렸다.[3] 서동만은 조봉암이 죽게 된 이유가 남로당 계열의 표심이라고 분석하였다.[3]

한편 서동만은 이 남로당원의 표심이 박정희 당선에 기여했다고 분석하였다.[3]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여순반란 사건 관여와 남로당 가입 전력을 폭로하자 조봉암의 득표율이 높았던 지역에서 박정희의 지지도가 깜짝 놀랄 만큼 상승했다는 것이다.[3] 물론 중앙정보부의 이 분석은 극비에 부쳐졌다.[3]

3. 8. 3김 정치, 학생운동권에 대한 분석

박정희 체제가 남긴 부산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패권정치와 학생운동권을 꼽았다.[3] 3김 시대의 부작용도 결국 박정희 시대의 연장 측면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학생운동 출신이 많은데, 4·19세대, 6·3세대, 3선개헌세대, 긴조(긴급조치)세대 등이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고 밝혔다.[3]

경제 발전은 이루었지만 정치에는 전면적인 부작용을 안겨줬고, 지역주의가 본격화된 것도 박정희 시대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신세를 지고 있지만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으며, 그 악영향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박정희를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규정하였다.[3]

4. 가족 관계

서동만은 본부인 강옥초와 사별하였고[1], 후에 다시 부인을 얻었다.[9] 사망 당시 유족으로는 부인과 딸이 있었다.[9] 본부인 강옥초는 1961년 출생, 2004년 사망하였으며,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다. 강옥초는 2004년말 우울증을 앓던 중 강원도 원주시 오크벨리 리조트에서 자살했다. 강옥초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1992년부터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하여 '지역문화 연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두번째 부인은 김진영으로,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이다. 아버지는 정치인, 기업인인 서문수이다. 누나는 서은경(徐恩京)으로, 한국존타클럽 회장이다.[12]

5. 저서 및 논문

5. 1. 저서

저서로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한반도 평화보고서', '북한의 개방과 통일전망', '북조선 연구' 등이 있다. 특히 <북한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 1945~1961>은 북한연구의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5. 2. 번역서


  • 한국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9)

5. 3. 논문


  • 解放朝鮮일본어에 관한 인민민주주의론의 형성과정(석사학위 논문) (일본 도쿄대 대학원, 1990)
  •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성립(박사학위 논문) (일본 도쿄대 대학원, 1995)
  • 북한농업집단화 연구(1995)
  • 북한 당.군관계 연구,일본의 행정계획(1997)
  • 일본의 재정개혁(1998)
  • 일본의 금융개혁(1999)
  • 동북아시아 안보협력의 현황과 전망, 북한연구방법론,북한 연방제의 변화(2000)
  • 북.일 수교의 전망과 대응
  • 북미.북일관계의 변화와 대응(2001)

참조

[1] 뉴스 '[강금실 행보] 강금실·서동만 결혼설의 진상' http://newsmaker.kha[...]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2006-07-27
[2] 뉴스 고 서동만 교수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한반도의 미래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9-06-05
[3] 뉴스 서동만 국가정보원 전 기조실장 인터뷰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04-11
[4] 뉴스 서동만 기조실장 프로필 http://www.kgnews.co[...] 경기신문 2003-04-30
[5] 뉴스 청와대 `서동만 카드' 고심 http://legacy.www.ha[...] 한겨레 2003-04-27
[6] 뉴스 "고영구는 OK, 서동만은 NO"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3-04-23
[7] 뉴스 고영구 '부적절' 서동만 '불가' http://news.naver.co[...] 매일경제 2003-04-23
[8] 뉴스 盧,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 강행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3-04-30
[9] 뉴스 북한전문가 서동만 교수 별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9-06-05
[10] 뉴스 "서동만의 좌절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현실"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9-06-08
[11] 뉴스 상지대, 서동만 장학기금 설립 http://www.kado.net/[...] 강원도민일보 2009-11-07
[12] 뉴스 한, 비례대표 박세일·이군현 상위순번 유력 http://news.hanko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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