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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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상학은 1830년 또는 1845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철종 때 칠석제에 합격하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승정원 좌승지, 한성부 좌윤 등을 거쳐 안동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안악군수로 전임되었으며, 1890년 사망했다. 그는 개화 정책 시기 일본에 파견되어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5개국 주 유럽 특파전권대신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관료였다. 1830년 또는 184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청송 심씨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심경택이었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고, 이후 1873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등 중앙 관직과 세자시강원 설서,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며 학문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1881년에는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근대 문물을 시찰하는 등 개화 정책에도 관여하였다.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활동했고, 성천부사, 안동부사, 안악군수 등 지방관으로도 근무하였다. 189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2. 생애
2. 1. 생애 초반
1830년(순조 30) 또는 1845년(헌종 12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본적지는 경기도 장단군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효정공 심경택(沈敬澤)이고, 어머니는 목사 등을 지낸 조이순(趙臣+頁淳)의 딸인 양주 조씨이다. 할아버지 심의복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고조부 심건지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장인이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외할아버지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순익(李純翼)의 딸인 연안이씨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하여, 14촌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했다. 첩에게서 얻은 아들 심완섭은 초기에 날품팔이로 생활하다가 나중에 재산을 모아 철원군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심영은 심완섭의 아들이다.
1863년(철종 14) 9월 철종이 직접 주관한 칠석제(七夕製)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으나, 실제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865년(고종 2) 1월 고종이 주관한 춘도기(春到記) 강(講), 부, 치사 시험에서는 치사 부문 2등을 하여 바로 회시에 응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후 음서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의금부 금오랑이 되었다.
1867년(고종 4) 식년시(式年試)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1868년(고종 5) 3월에는 고종이 직접 주관한 인일제에서 4등을 하여 고종으로부터 직접 《규장전운》을 하사받는 등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873년 7월,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서 직접 주관한 칠석제(七夕製)에서 3등으로 합격하여 과거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열린 문과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30등으로 급제하였다. 급제 직후 권지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었고, 7월 19일에는 부사정, 7월 21일에는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다. 그해 12월에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였으며, 1874년 1월에는 좌직주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정원 좌직주서와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사관(史官)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같은 해 3월 병으로 인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곧 복직하여 1875년까지 좌직주서와 춘추관 기사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경연관이 되어 경연(經筵)에도 참여하였다.
1875년에는 규장각에 들어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받았으나 실제 직각에 임명되지는 못했다. 이듬해에는 본관록과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이 올랐다. 이후 동벽(東壁)에 선발되어 홍문관과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쳤으며, 이조 참의와 예조 참의 등을 역임했다. 겸직으로는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맡아 당시 세자였던 척(훗날 순종)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1876년에는 부교리와 교리에 임명되었고, 중학교수직에도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여 중학교수직에서는 해임되었다. 1877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어영청 종사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잠시 부사과로 직책이 바뀌었다가 다시 부수찬 겸 어영청 종사관으로 복귀하였으며, 그해 6월에는 병조 정랑, 12월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880년에는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같은 해 8월, 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하였고, 이때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상이 내려질 때 함께 상을 받아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1881년에는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되어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에는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로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순찰하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후 통리기무아문이 7사(司) 체제로 개편되면서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 관련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2. 3. 생애 후반
1884년 (고종 21년) 관제 개편 때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자리를 옮겼다.[2] 같은 해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등 5개국을 담당하는 주유럽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나, 병 때문에 사퇴하고 귀국했다.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지만, 재직 중 병이 생겨 다시 사퇴하였다. 이 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에는 부호군, 첨지 등을 지냈으며, 다시 그해 8월 부호군에 임명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1885년 2월에 돌아왔다.
1886년 (고종 23년) 4월에는 이조참의를 거쳐 그해 7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86년 10월에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부사(冬至副使)로 선발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1887년에는 다시 전라우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4월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기 직전인 1887년 4월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며칠 뒤 동지돈녕부사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병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고, 또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호조참판을 지냈다. 이 해 8월 15일 정부당상(政府堂上)에 임명되었고, 9월 7일 고종이 전강에서 유생들을 시험할 때 시험관(考官)으로 참여하였다.
1887년 (고종 24년) 11월 7일 승정원좌승지에 임명되었고, 12월 24일에는 한성부좌윤, 1888년 (고종 25년) 1월 4일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2월 3일 다시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888년 (고종 25년) 12월 9일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임명되어 부임지로 가던 중, 12월 13일 안악군 자리가 비었다는 이유로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발령이 변경되었다. 1890년 (고종 27년) 5월 10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2. 4. 사후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불일면 경릉리(현, 북한 개성특별시) 산 좌쪽 언덕의 자좌(子坐)에 있다. 그의 서자 심완섭의 묘는 장단군 서면 상리 건좌(乾坐)에 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참조
[1]
문서
순원왕후의 외삼촌 심능적(沈能迪)이 심상학의 증조부, 심영의 5대조가 된다.
[2]
문서
예조는 외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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