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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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욘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모리스코 반란 진압, 지중해에서의 활동, 저지대 총독 임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나,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욘은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명성을 얻었으며, 사후에도 소설,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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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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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
본명 | 요한 폰 외스터라이히 (Johann von Österreich) |
출생일 | 1547년 2월 24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레겐스부르크 |
사망일 | 1578년 10월 1일 |
사망지 |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뮈르 근처 부지 (현재의 벨기에) |
매장일 | 1579년 5월 24일 |
매장지 |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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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통치자 | 펠리페 2세 |
직책 |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
재임 기간 | 1576년–1578년 |
이전 |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 |
계승 |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군사 경력 | |
충성 | 스페인 제국 신성 동맹 (1571년–1573년) |
복무 기간 | 1568년–1578년 |
소속 | 스페인 해군 스페인 육군 |
계급 | 카피탄 헤네랄(스페인 제국) 제네랄리시모(신성 동맹) |
지휘 | 지중해 갤리 함대 그라나다 왕국 군대 신성 동맹군 플랑드르 군대 |
주요 전투 | 바르바리 해적과의 전쟁 제2차 알푸하라 반란 궤하르 점령 갈레라 포위전 세론 전투 티홀라 점령 파둘레스 전투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레판토 해전 나바리노 포위전 튀니스 원정 80년 전쟁 나뮈르 점령 젬블루 전투 니벨 포위전 필리프빌 포위전 레이메남 전투 |
가문 | |
가문 | 합스부르크 |
아버지 | 카를 5세 |
어머니 | 바르바라 블롬베르크 |
자녀 | |
자녀 정보 | 마르가레타 데 아우스트리아 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
2. 유년기
욘(Juan)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 출신의 가수 바르바라 블롬베르크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1547년으로 추정되나, 1545년 2월생이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불명확하다.[24] 그의 어머니 바르바라는 곧 브뤼셀의 궁정 관료 히에로니무스 케겔과 결혼하였고, 아들에게 헤로민(Jeromín)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헤로민은 3살 반 무렵 어머니와 떨어져 황제의 오랜 친구 아드리앙 드 부아에게 맡겨졌다가, 다시 플랑드르 지방의 궁정 악사 프란스 마시와 그의 스페인 아내에게 보내졌다. 그는 프란스 부부를 따라 마드리드 교외의 레가네스 마을로 이주하여 스페인어를 배웠다. 7살이 되던 1554년 여름, 황제의 명령으로 바야돌리드 인근 비야가르시아 데 캄포스에 있는 황제의 성 집사장 돈 루이스 데 키하다에게 위탁되었다. 헤로민은 키하다의 아내 도냐 마그달레나 데 울로아의 보살핌 아래, 라틴어 교사 기예른 프리에도, 예배당 신부 가르시아 데 모랄레스, 시종 후안 갈라르사의 도움을 받으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1]
1556년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 유스테 수도원에 은거하기로 결정하면서 집사장 루이스 데 키하다를 불렀다. 1558년 여름, 카를 5세는 키하다 부부와 헤로민에게 쿠아코스 데 유스테 마을로 이주하라고 명했다. 카를 5세는 인근 유스테 수도원에 머물렀고, 11살의 헤로민은 그해 9월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카를 5세는 1554년 6월 6일 작성한 유언 부칙에서 "독일에서 과부가 된 이후, 나는 '헤로니모'라는 이름의 미혼 여성에게서 사생아를 얻었다"고 인정했으며,[2] 1558년 마지막 유언에서는 헤로민을 공식적으로 아들로 인정하고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당부했다.[3]
카를 5세의 유일한 적자이자 후계자인 펠리페 2세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1559년 브뤼셀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펠리페의 누이이자 욘의 이복 누이인 포르투갈의 공주 후아나는 1559년 5월 바야돌리드에서 헤로민을 만났다. 바야돌리드에 정착한 펠리페 2세는 키하다에게 헤로민을 데리고 사냥에 오도록 명했다. 1559년 9월 28일, 산타 마리아 데 라 산타 에스피나 수도원에서 펠리페와 헤로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4] 펠리페가 나타나자 키하다는 헤로민에게 말에서 내려 왕에게 예를 표하라고 지시했다. 헤로민이 예를 표하자 펠리페는 그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헤로민이 모른다고 답하자, 펠리페는 그들이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임을 밝히며 그를 껴안았다. 이후 펠리페는 그를 "나의 사랑하는 동생"이라 부르며, 유아기에 사망한 자신의 동생 이름을 따 "후안(Juan)"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펠리페 2세는 1560년 13세가 된 헤로민을 바야돌리드 궁정으로 불러 서자로서 인정하고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라고 칭하게 했다. 이로써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나, 왕족과 주권 군주에게만 허용되는 "전하(His Highness)"라는 존칭 대신 그란데스 계급의 귀족에게 사용되는 "각하(His Excellency)"라는 칭호로 불렸다. 욘은 왕궁에 거주하지 않고, 루이스 데 키하다를 집사장으로 하는 별도의 가구를 유지하며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펠리페는 카를 5세가 욘에게 할당한 수입을 보장하여 황제의 아들이자 국왕의 형제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공식 행사에서 욘은 왕족의 맨 뒤, 그란데스 계급의 맨 앞에서 행진했다.[3][5] 1562년 왕실은 욘에게 15,000 두카토를 배정했는데, 이는 그가 가깝게 지냈던 이복 누이 후아나 공주에게 배정된 금액과 동일했다.
욘은 펠리페 2세가 새로 맞이한 왕비 이사벨 데 발로이스 및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돈 카를로스와 나이가 비슷하여 자주 어울렸다. 욘보다 12살 많은 이복 누이 후아나 공주도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조카딸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카테리나 미카엘라의 세례식 등 궁정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기들을 세례대로 옮기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귀족의 사생아는 보통 성직자가 되는 길을 걸었지만, 욘은 이를 거부하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유지에 따라 욘을 자신의 아들 돈 카를로스, 그리고 카를 5세의 또 다른 사생아인 마르가레테의 아들인 조카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함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현재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 보냈다. 세 사람은 인문학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의 제자인 오노라토 우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파르네세에 따르면, 욘은 대학 시절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어 사생아로 두 딸을 두었다고 한다. 첫째 딸은 수녀가 되었고, 둘째 딸은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했다. 또 다른 사생아 아들도 있었으나 유아기에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이 아들의 죽음에 펠리페 2세가 관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욘은 브뤼셀에서 만난 힐레혼트 판 페인과 결혼하여 아들 요한네스를 얻었으나, 펠리페 2세의 경고와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아들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3. 군사 경력
오스트리아의 욘은 아버지 카를 5세와 이복형 펠리페 2세가 성직자의 길을 걷기를 바랐던 것과는 달리, 군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을 쌓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1565년, 욘은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함대에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던 몰타섬을 구원하려는 함대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펠리페 2세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바르셀로나로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함대에 합류하지 못했다. 1566년에는 황금양모 기사단의 기사로 서임되었다.
1568년 21세가 되던 해, 펠리페 2세는 욘을 스페인 지중해 함대의 제독으로 공식 임명했다. 그는 국왕의 신뢰받는 조언자이자 카스티야 사령관이었던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와 산타 크루즈 후작 알바로 데 바산과 같은 경험 많은 베테랑들의 지도 아래에서 실질적인 지휘 경험을 쌓았다. 그의 초기 임무는 스페인 해안을 순찰하며 당시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바르바리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카르타헤나에서 고문들과 회의를 가진 후, 3개월간 해적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북아프리카로 항해하여 오란과 멜리야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후 욘은 그라나다 왕국에서 발생한 모리스코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1571년에는 신성 동맹 함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등 중요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
3. 1. 모리스코 반란 진압
1567년 1월 1일자 칙령은 그라나다 왕국, 특히 알푸하라스 지역의 모리스코(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에게 그들의 관습, 언어, 의복, 종교적 관습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반발하여 1568년 말, 약 200개 마을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지역 군사 책임자였던 그라나다의 몬데하르 후작과 무르시아의 로스 벨레스 후작은 전략적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오스만 제국과 바르바리 해적 또한 배후에서 반란을 지원했다.
1569년 4월, 국왕 펠리페 2세는 몬데하르 후작을 해임하고 욘을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욘의 양아버지였던 루이스 데 키하다는 부관으로, 루이스 데 레케센스는 고문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그라나다에 도착한 욘은 병참과 훈련을 통해 군대를 신중하게 재조직했다. 동시에 루이스 데 레케센스와 알바로 데 바산은 해안을 순찰하며 바르바리 해적의 보급을 차단했다.
욘은 펠리페 2세에게 공세 전환 허가를 요청했고, 왕의 승인을 받아 잘 보급된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떠났다. 그는 그라나다 인근의 반군을 진압한 후 과딕스를 거쳐 동쪽으로 진군했으며, 이탈리아 출신 베테랑 부대가 합류하여 군사력은 12,000명으로 늘어났다. 1569년 말에는 구에하르시에라를 점령했다.
1570년 1월 말, 욘은 반란군이 점령한 갈레라 요새를 포위했다. 포위 공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욘은 포병과 전략적으로 설치된 지뢰를 동원하여 총공격을 명령했다. 1570년 2월 10일, 갈레라는 함락되었고 욘은 도시를 파괴하고 폐허에 소금을 뿌렸다. 이 과정에서 400명에서 4,500명 사이의 주민이 사망했고, 2,000명에서 4,500명 이상이 노예로 팔렸다.[6][7]
이후 세론 요새로 진군하던 중, 욘은 머리에 총탄을 맞았으나 헬멧 덕분에 무사했고, 그의 곁에 있던 양아버지 루이스 데 키하다는 치명상을 입어 2월 25일 카닐레스에서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키하다의 죽음을 위로하면서도, 지휘관은 전투의 한가운데가 아닌 안전한 곳에서 군대를 지휘해야 한다고 욘을 꾸짖었다. 그러나 욘의 부하들은 그의 군사적 재능이 책상물림으로 알려진 펠리페 2세보다는 그의 아버지 카를 5세를 닮았다고 여겼으며, 그를 "전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욘은 이후 알메리아 강 중류 계곡을 지배하는 테르케 마을을 점령했다.
1570년 5월, 욘은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인 엘 하바키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욘의 연이은 승리와 반란 지도자들 사이의 내분으로 다른 마을들은 항복하거나 분열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바르바리 해적들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인 키프로스 공략에 집중하면서 스페인 반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1570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마지막 진압 작전이 수행되었다.
반란의 재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1571년 2월, 펠리페 2세는 그라나다 왕국의 모든 모리스코를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다. 욘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 강제 이주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인간적 비참함"이라고 묘사했다.
3. 2. 레판토 해전
교황 비오 5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맞서기 위해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신성 동맹 참여를 촉구했다. 펠리페 2세는 이에 동의하며 로마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욘을 신성 동맹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펠리페 2세는 키프로스를 구원하는 것 외에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튀니스를 재점령하여 시칠리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스페인 해안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 알제를 궁극적으로 정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3] 이는 그의 아버지 카를 5세가 1541년 알제 정복에 실패했던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욘이 그라나다에서 모리스코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로마에서는 신성 동맹 결성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1570년 여름, 펠리페 2세는 교황의 제독 마르칸토니오 콜론나가 지휘하는 함대에 스페인 분견대를 파견하여 키프로스로 보냈다. 이 분견대는 유명한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의 조카인 제노바 출신 지안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끌었다. 그러나 9월 오스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 도리아는 계절이 늦었다는 이유로 키프로스 진격을 반대했고, 곧이어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가 함락되고 항구 파마구스타만 남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연합 함대 내부에 불화가 생기고 결국 철수하게 되었다.[25][8]
1571년 5월, 신성 동맹이 정식으로 출범하자 펠리페 2세는 욘에게 총사령관 임명장과 상세한 지시를 전달했다. 욘은 7월 말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함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9월 중순 메시나에서 베네치아, 교황령, 토스카나, 사보이, 파르마 등 여러 세력이 참여한 신성 동맹 함대와 합류했다.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도 직접 함선을 타고 참전했다. 도리아는 이번에도 계절이 너무 늦어 파마구스타가 함락되었을 것이라며 출정을 반대했지만, 욘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연합군 내부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여 출정을 강행했다.[26][8]
욘이 이끄는 신성 동맹 함대는 코린토스 만 입구의 나프팍토스(레판토)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마주쳤다. 오스만 함대는 여름 내내 작전을 펼치며 일부 병력을 해산했지만 여전히 300척에 가까운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신성 동맹 함대는 207척의 갤리선과 6척의 중무장 갤리어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1571년 10월 7일, 오스만 함대는 파트라스 만에서 나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욘은 에키나데스 군도를 통과하여 함대를 이끌고, 좌익에 베네치아 함대, 우익에 도리아가 이끄는 함대, 중앙에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함대를 배치하고, 산타 크루스 후작에게 후위를 맡겼다. 각 진형에는 참여국의 함선들이 고루 섞여 배치되었고, 양익과 중앙에는 갤리어스가 2척씩 배치되어 화력을 지원했다.
정오 무렵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성 동맹의 갤리어스가 강력한 포격으로 오스만 함대의 진형을 무너뜨렸고, 접근해오는 오스만 함대의 중앙과 우익에 신성 동맹의 우세한 화력이 집중되어 큰 피해를 입혔다. 전투 중에는 훗날 『돈 키호테』의 작가가 되는 24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도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8] 오스만 함대의 좌익을 지휘하던 알제 총독 울루치 알리는 도리아가 이끄는 우익을 유인하여 신성 동맹 함대의 중앙과 분리시키려 했다. 도리아의 함대가 중앙에서 멀어지자, 울루치 알리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생긴 틈새로 파고들어 욘 함대의 우측에 있던 몰타 기사단 소속 갤리선 세 척을 격파했다. 그러나 욘은 즉시 반격에 나섰고, 후위에 있던 산타 크루스 후작의 함대가 울루치 알리를 공격했다. 결국 울루치 알리는 휘하 함대의 절반 정도만 이끌고 간신히 전장에서 탈출했다.
전투는 신성 동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스만 함대는 거의 괴멸되었고 수천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신성 동맹 측은 1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지만, 10,000명 이상의 기독교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9] 저녁 무렵 폭풍이 몰아치자 신성 동맹 함대는 항구로 철수해야 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 이후, 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하(폐하)" 또는 "왕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는 처음에 펠리페 2세가 왕족 서열을 이유로 그에게 이러한 존칭 사용을 금지했던 것과는 다른 대우였다. 펠리페 2세가 공식적으로 이 존칭을 허락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욘의 빛나는 업적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고 펠리페 2세도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3][5]
3. 3. 지중해에서의 활동
1568년 21세가 되던 해에 이복형 펠리페 2세는 욘을 스페인 지중해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했다. 욘은 국왕의 친구이자 카스티야 사령관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와 산타 크루즈 후작 알바로 데 바산 같은 숙련된 지휘관들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해안을 순찰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신성 동맹이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저지대 국가에서는 위그노(개신교도)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스페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알바 공작이 반란 진압에 나선 사이, 펠리페 2세는 욘에게 함대를 신성 동맹에 맡기고 프랑스의 동향을 살피도록 명령했다. 함대는 그리스 해안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늦여름 욘이 함대에 복귀했을 때, 신성 동맹은 오스만 제국 영토인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메토니 성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오스만 군대의 증원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욘은 그해 겨울을 나폴리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복 누나인 파르마 후작부인을 만나 자신의 사생아 양육을 부탁했다. 당시 나폴리 총독이었던 그랑벨 추기경은 경험 많은 외교관으로, 욘은 그에게서 국가 경영과 북유럽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1572년 5월 교황비오 5세가 선종하자, 스페인을 불신하게 된 베네치아는 1573년 스페인과 별도로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가을, 욘은 튀니스를 정복하여 스페인 식민 정부를 다시 세웠다. 스페인 정부는 튀니스 항구와 카를 5세가 1535년 튀니스 점령 당시 건설했던 라굴레트 성을 파괴하라고 조언했지만, 욘은 이를 거부하고 튀니스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성을 건설했다. 욘과 산타 크루즈 후작은 다음 목표로 알제 점령을 계획했다.
그러나 1573년 저지대 국가의 반란이 다시 격화되면서 욘의 자금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알바 공작의 후임 총독으로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더 경험 많은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가 임명되었다. 1574년, 스페인의 주요 거래 은행이 있던 제노바 공화국에서 도리아 가문이 이끄는 집권 세력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욘은 자금 문제로 인해 제노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울루치 알리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함대가 튀니스를 점령했다. 욘은 급히 팔레르모로 가서 병력을 모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튀니스를 잃고 실망한 욘은 1575년 마드리드로 돌아왔다가 다시 제노바로 향했다. 저지대와 지중해 양쪽 전선에서 막대한 전쟁 비용이 지출되자 펠리페 2세는 국채 상환 중지를 선언했고, 이로 인해 주요 채권자였던 제노바 공화국의 정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욘은 산타 크루즈 후작과 함께 크게 줄어든 함대를 이끌고 나폴리 근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집중했다.
4. 저지대 총독 시절
1576년 전임 총독 루이스 데 레케센스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의 욘은 펠리페 2세에 의해 저지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0] 그는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격화되던 저지대의 상황을 안정시키라는 임무를 받았으나, 개인적인 야심과 맞물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577년 5월 브뤼셀에 입성하여 잠시 평화를 유지하는 듯했으나,[10] 같은 해 7월 나무르를 점령하며 저지대 주들과의 합의를 깨뜨리고 다시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11] 1578년 1월 젬블루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11] 같은 해 8월 레이메남 전투에서는 패배하였다.[11]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나무르 인근 야영지에서 티푸스에 걸려 1578년 10월 1일 사망하였다. 그의 저지대 총독 재임 기간은 약 2년에 불과했으며, 저지대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4. 1. 총독 임명과 초기 활동
1576년 저지대 총독 레케센스가 사망하자[10],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오스트리아의 욘에게 저지대 총독직을 제안했다. 욘은 이 임명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로마에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1세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구출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저지대 총독의 지위가 이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욘은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펠리페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계획을 알리고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펠리페 2세는 욘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메리 1세 구출 계획에는 동의했지만, 자금 부족을 이유로 들며 저지대 지방의 평화를 우선적으로 회복할 것을 요구했고, 외교적 수단을 통해 이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국왕의 지시를 받은 욘은 종교 전쟁이 한창이던 프랑스를 거쳐 저지대로 향했다.당시 저지대에서는 여러 이유로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반란의 핵심 세력은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회 강요에 반발하는 과격한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이슬람 세력과 싸웠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욘에게 개신교는 이단에 불과했지만, 일각에서는 개신교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반란을 잠재울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빌럼 판 오라녜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는 저지대 17개 주 가운데 홀란트와 제일란트를 이미 장악하고 다른 주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레케센스 사망 후 자금 지원이 끊긴 스페인 군대는 플랑드르 등지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이는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특히 1576년 11월 초, 스페인 군대가 안트베르펜을 약탈하는 사건(안트베르펜 약탈)이 발생하자, 저지대의 통합 의회(스타텐헤네랄)는 헨트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스페인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룩셈부르크에서 안트베르펜 약탈 소식을 들은 욘은 자신이 총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헨트 평화 조약의 조건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지대 주들은 약탈을 자행한 스페인 군대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군대가 철수하면 메리 1세 구출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욘은 군대를 육로 대신 해로로 귀환시키면 스코틀랜드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통합 의회에 함대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욘의 야심을 경계하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이 계획에 반대했고,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였던 저지대 신교도 세력 역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스페인 군대는 약탈품을 싣고 육로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교도들은 홀란트와 제일란트에서의 공개적인 개신교 의례 허용과 다른 주에서의 제한적 용인을 요구했다. 펠리페 2세와 욘 모두 이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를 강제할 군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욘은 마침내 저지대 총독으로 인정받고 1577년 5월 1일 브뤼셀에 입성했다.[10]

브뤼셀 입성 후, 욘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반란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럼 1세의 환심을 사려 했으나, 개신교 광신도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남을 포기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욘은 1577년 7월, 나바라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만난다는 핑계로 나무르로 이동하여 일부 병력을 이끌고 나무르 성을 기습 점령했다.[11] 이는 저지대 통합 의회와의 합의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행위였다. 욘은 자신의 비서 에스코베도를 스페인 왕궁으로 보내 펠리페 2세에게 이단자들과의 평화 협상은 불가능하며 군대를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통합 의회는 욘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4. 2. 반란 진압과 갈등
1577년 5월 브뤼셀에 입성한 욘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반란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럼 1세와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암살 위협 소문으로 인해 포기하였다. 같은 해 7월 24일, 욘은 나바라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만난다는 명분을 내세워 나무르로 이동하여 기습적으로 나무르 성을 점령했다. 이는 저지대 통합 의회(스타텐헤네랄)와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행위였다.[10] 그는 자신의 비서 후안 데 에스코베도를 스페인 왕궁으로 보내 펠리페 2세에게 개신교 이단자들과의 평화 협상이 불가능함을 알리고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통합 의회는 욘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당시 스페인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기에, 펠리페 2세는 욘이 군사적 충돌 없이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왕의 비서실장 안토니오 페레스는 개인적인 이유로 욘과 에스코베도를 모함했다. 그는 욘의 군사 요청과 메리 1세 해방 계획이 에스코베도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펠리페 2세에게 주장했다. 펠리페 2세는 결국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578년 3월 페레스를 시켜 에스코베도를 암살하도록 지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1578년 1월, 욘은 파르네세와 함께 젬블루 전투에서 통합 의회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11] 이 패배로 반란 지도자 오라녜 공 빌럼 1세는 브뤼셀을 떠나야 했고, 여러 주들이 참여했던 브뤼셀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어 반란 세력의 통일 전선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1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충실한 비서였던 에스코베도의 암살 소식을 들은 욘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을 저지대로 보낸 펠리페 2세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으며,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려던 야망 또한 좌절되었다고 느꼈다.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방향을 잃은 욘은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에서 가톨릭 신자인 힐레혼트 판 페인을 만나 아들 요한네스를 얻었다. 이후 브뤼셀 점령을 위한 군사 작전을 재개했으나 1578년 8월 레이메남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패배하며 실패했다.[11] 그는 펠리페 2세의 허락 없이 힐레혼트와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9월,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나무르에 주둔하던 중 당시 '야영지 열병'이라 불리던 티푸스에 걸려 1578년 10월 1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펠리페 2세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욘의 병사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기며 장례를 치렀다.
5. 죽음
리흐메남 전투에서 패배한 지 두 달 후, 돈 후안은 열병에 걸렸다. 1578년 8월, 플랑드르 남부의 나뮈르 요새 인근에서 군사 활동 중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당시 페스트가 유행하고 있었기에 그는 야영지의 비둘기장에 격리되었다. 연일 설사, 구토, 고열에 시달렸으며 결국 시력까지 잃었다.
결국 1578년 10월 1일 오후 1시, 돈 후안은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병세로 보아 사인은 발진티푸스로 추정된다. 한편, 그의 주치의였던 디오니시오는 돈 후안이 오랫동안 치질을 앓았으며, 당시 의사들의 잘못된 치료가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이 스페인의 적들에게 해상에서 탈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해는 육로를 통해 네 개의 안장 가방에 나뉘어 담겨 프랑스를 경유하여 마드리드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수습되었다.[12] 이듬해인 1579년 5월 25일,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된 후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는 사생아 출신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주어진 영예였다.[12]
6. 사후 평가 및 유산
오스트리아의 욘은 레판토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당대 최고의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극적인 삶은 후대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여러 연극, 오페라, 소설 등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사후 명성은 여러 기념물로도 이어졌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72년 메시나 시의회 주도로 오스트리아의 욘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조각상은 1908년의 파괴적인 메시나 지진에도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해진다. 또한 그의 서거 400주년인 1978년에는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메시나 조각상의 복제품이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스페인으로 운반되어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욘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G. K. 체스터턴은 1911년에 발표한 시 ''레판토''에서 욘을 "유럽의 마지막 기사"라고 칭하며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했다.[20]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1599년 희곡 ''헛소동''에서는 '돈 존'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등장인물 목록에서 아라곤 왕자 돈 페드로의 사생아 형제인 악당으로 묘사된다.[19]
- 카시미르 델라빈의 1835년 희곡 ''돈 후안 도트리쉬''는 욘의 삶에 영감을 받아 쓰였으며, 이는 다시 아이작 네이선의 1847년 오페라 ''오스트리아의 돈 존''과 필리포 마르케티의 1879년 오페라 ''오스트리아의 돈 조반니''의 소재가 되었다.
- 마조리 보웬의 역사 소설 ''스페인의 기사''(1913)는 욘과 그의 이복형 펠리페 2세의 관계를 다룬다.[21]
- 프랭크 H. 스피어먼의 역사 로맨스 소설 ''스페인 연인''(1930)은 욘을 중심 인물로 삼는다.
- 루이 드 볼은 1956년 소설 ''마지막 십자군: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에 관한 소설''에서 욘을 역사상 가장 승리하고 영감을 주는 영웅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22]
- 베네수엘라 작가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의 1990년 역사 소설 ''시간 속의 방문''은 욘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아 시절에서 레판토 해전의 영웅이자 카를 5세 황제의 아들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 소설은 1991년 로물로 갈레고스 상을 수상했다.[23]
7. 가족 관계
욘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 출신의 가수 바르바라 블롬베르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1] 아버지 카를 5세는 1554년 유언 부칙에서 "독일에서 과부가 된 이후, 나는 '헤로니모'라는 이름의 미혼 여성에게서 사생아를 얻었다"고 기록했으며,[2] 1558년 임종 직전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욘을 자신의 아들로 공식 인정하고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3]
이복형인 펠리페 2세는 1559년 아버지가 남긴 유언에 따라 욘을 만났고, 그들이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임을 밝히며 그를 이복동생으로 인정했다. 펠리페 2세는 욘에게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라는 이름을 주었다.[4] 펠리페 2세는 욘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했지만, 왕족에게만 사용되는 "전하"(His Highness) 대신 그란데 귀족에게 사용되는 "각하"(His Excellency)라는 칭호로 불리도록 했다.[3][5] 욘은 왕궁에 거주하지는 않았으나,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가 욘에게 남긴 수입을 통해 그가 국왕의 형제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3][5]
욘은 비슷한 또래였던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 조카인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그리고 이복누나인 포르투갈의 왕태자비 후아나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오스트리아의 욘과 관계를 맺었거나 자녀를 둔 여성들은 다음과 같다:[5]
관계 | 자녀 | 비고 |
---|---|---|
마리아 데 멘도사 (María de Mendoza, 1545년 ~ 1570년 4월 22일)[14] | 마리아 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María Ana de Austria, 1569년 11월 ~ 1629년 11월 27일) | 포르투갈 공주 후아나의 시녀. 딸 마리아 아나는 1611년부터 라스 후에르가스 왕립 수도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3][5] |
디아나 팔랑골라 (Diana Falangola, 1556년 출생)[15] | 후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Juana de Austria, 1573년 9월 11일 ~ 1630년 2월 7일) | 파냐노 영주 스키피오네 팔랑골라의 딸. 딸 후아나는 1603년 피에트라페르지아의 2대 공작 프란체스코 브란치포르테와 결혼하여 다섯 딸(마르게리타, 플라비아, 카테리나, 엘리사베타, 안나)을 두었다.[3][5][16] |
제노비아 사토시아 (Zenobia Sarotosia, ca. 1540년 출생)[18] | 아들 (1574년 출생 및 사망) | 아들은 출산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펠리페 2세가 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다.[3][5] |
톨레도의 안 (Ana de Toledo) | 자녀 없음 | [3][5] |
일부 기록에 따르면, 욘은 대학 시절 여러 여성과 관계하여 두 딸을 더 두었으며(한 명은 수녀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 브뤼셀에서 만난 힐레혼트 판 페인(Hillehond van Veen)과 비밀리에 결혼하여 아들 요한네스(Johannes)를 두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펠리페 2세의 경고와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비밀에 부쳐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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