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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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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코타 메구미는 1964년 일본에서 태어나 1977년 13세의 나이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이다. 납치 후 북한에서 한국인 김영남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며, 북한은 1994년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유골의 DNA 검사 결과가 일치하지 않아 사망 주장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요코타 메구미가 생존해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으며, 납치 사건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만화, 연극, 노래 등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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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7년, 일본에서 납치된 후 북한에서 촬영된 요코타 메구미 사진
이름요코타 메구미
일본어 이름横田 めぐみ
출생일1964년 10월 5일
출생지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실종일1977년 11월 15일
실종 당시 나이13세
실종 장소일본 니가타현
국적일본
직업학생
조선어 이름류명숙
아버지요코타 시게루
어머니요코타 사키에
형제요코타 타쿠야 (남동생)
요코타 테츠야 (남동생)
자녀김은경 (김혜경, 장녀)
납치 및 실종
실종 상태실종됨
실종 기간46년
기타
사망 추정 시기1994년 (약물 과다 투여 설)
참고정부 인정 납치 피해자
참고영화 "메구미에게의 맹세" 무료 상영
참고애니메이션 "메구미"
참고마이니치 신문 기사
참고동아일보 기사
참고조선일보 기사

2. 생애 및 납치

요코타 메구미(横田 めぐみjpn)는 1977년 11월 15일, 만 13세의 나이로 니가타현의 해안 마을에서 하교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된 일본인 소녀이다.[2] 당시 니가타 시립 요리 중학교 1학년이었던 메구미는 일본 내 북한 공작 활동을 목격하여 입막음을 위해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2] 공작원들은 메구미를 배에 강제로 태워 북한으로 데려갔고, 그곳의 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한 뒤, 일본 침투를 위해 훈련받는 북한 스파이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겼다.[2] 그녀가 머물던 시설에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납치된 다른 한국인 고등학생들도 있었으며, 이 중에는 훗날 메구미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남(金英男)도 포함되어 있었다.[2]

수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메구미의 납치 정황은 1997년 1월, 하시모토 아쓰시(橋本敦) 의원의 비서 효모토 다쓰키치(兵本達吉)가 메구미의 부모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3][4][5][6] 2002년 일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은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했지만, 메구미가 1994년 3월 13일에 정신 질환으로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실시한 DNA 검사 결과, 해당 유골은 메구미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만, 이후 검사 과정에서 시료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7] 메구미의 가족들은 북한의 자살 주장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메구미를 직접 납치한 인물은 공작원 신광수(辛光洙)로 여겨진다.[7]

북한에서 메구미는 1986년, 마찬가지로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김영남과 결혼하여 1987년 딸 김혜경(金惠敬, 이후 본명이 김은경(金恩敬)으로 밝혀짐)을 낳았다. 2006년 6월, 재혼한 김영남은 한국 가족과의 상봉 자리에서 메구미가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94년에 자살했다고 재차 주장하며 2004년 송환된 유골이 진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메구미의 아버지는 김영남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8] 2012년 6월,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 대표 최성룡은 북한 정부 문건을 근거로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문건을 공개하지 않아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9]

일본에서는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2011년에는 평양 주민 명부에 메구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김은공(金恩功)'이라는 여성이 등재되어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10][11] 이후 이 인물이 메구미의 딸 김은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2] 김은경은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관리 하에 있으며, 북한이 향후 일본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3]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4년 3월, 메구미의 부모는 몽골에서 손녀 김은경과 그녀의 어린 딸(메구미의 증손녀)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15]

2. 1. 생애

요코타 메구미는 1964년 10월 5일, 일본은행 직원인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横田滋)와 어머니 요코타 사키에(横田早紀江)의 장녀로 나고야시의 세이레이 병원(聖霊病院)에서 태어났다.[25][26] 아버지의 직장 발령으로 도쿄도 시나가와구히로시마시 등지를 거쳐 생활했으며,[29][30] 히로시마 시절에는 주변의 자연물을 이용해 놀이를 만들던 아이였다.[25]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노래 부르기, 그림 그리기(베르사유의 장미 풍), 서예, 클래식 발레 등을 즐겼다.[32][37][38] 만화를 읽는 것뿐 아니라 직접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그릴 정도로 만화에 심취해 있었다.[39] 독서도 좋아하여 니가타현의 초등학교에서는 전학 후 졸업까지 약 8개월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수가 학년에서 가장 많았으며,[39][4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등의 전집을 읽었고 추리 소설도 즐겨 읽었다.[39] 여러 차례 이사 경험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으며, 초등학교 합창단 활동 중 로베르트 슈만 작곡의 합창곡 "방랑의 민족"에서 독창자로 뽑히기도 했다.[32]

1976년 7월 23일, 가족과 함께 니가타시로 이사했다.[31] 당시 거주지는 해안 방풍림과 이어진 조용한 주택가였으나, 메구미는 어머니에게 "꽤 외로운 곳"이라며 밤에는 파도 소리만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32] 1977년 4월, 니가타 시립 요리 중학교(新潟市立寄居中学校)에 입학하여 배드민턴부에 소속되었다.[26][34] 친구들 사이에서는 '요코'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성적도 우수했다.[41] 메구미의 절친한 친구는 그녀의 생일에 나비 모양 액세서리를 선물했고, 메구미가 사라진 날 처음으로 크게 울었다고 전해진다.[41]

1977년 11월 15일, 당시 13세였던 메구미는 배드민턴부 활동을 마치고 하교하던 중 실종되었다. 저녁 6시 30분경 동료 2명과 함께 교문을 나선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45] 같은 날 니가타현 경찰에 수색 요청이 접수되었고,[26] 니가타 중앙 경찰서는 최대 220명,[45] 다음 날에는 기동대 760명을 투입하는 등 당시 니가타현 경찰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을 벌였으나 유류품조차 발견하지 못했다.[45] 수색 중 경찰견이 통학로 중간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춰 섰다는 점이 특이사항으로 남았다.[45] 실종 다음 날인 11월 16일, 학교에서는 조회를 늦추고 학생들에게 메구미의 실종 사실을 알렸다.[86] 실종 전날인 11월 14일에는 아버지 시게루의 생일에 빗을 선물하며 "이제부터 옷차림에 신경 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37]

이 사건은 훗날 북한 공작원 신광수(辛光洙) 등에 의한 납치로 밝혀졌다.[33] 북한 공작 활동을 목격했기 때문에 입막음을 위해 납치되었다는 추정이 있다. 북한 공작원들은 메구미를 배에 태워 북한으로 강제 연행했고, 그곳의 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했다. 이후 스파이 양성 기관에 배치되어 일본 침투 훈련을 받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설에는 1977년 8월 한국에서 납치된 10대 고등학생 2명과 이듬해 8월 추가로 납치된 10대 한국 학생 3명도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훗날 메구미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남(金英男)도 포함되어 있었다.[2] 신광수는 이후 소가 히토미에게 자신이 메구미를 일본에서 납치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36] 신광수는 1989년 일본사회당도이 다카코 위원장, 간 나오토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 133명이 서명하여 한국 정부에 제출한 재일 한국인 정치범 석방 탄원서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다른 북한 공작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된 바 있다.[35]

수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메구미의 소식은 1997년 1월, 하시모토 아쓰시(橋本敦) 의원의 비서 효모토 다쓰키치(兵本達吉)가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납치 가능성을 알리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3][4][5][6] 2002년, 북한은 마침내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를 공식 인정했지만, 메구미가 1994년 3월 13일에 이미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DNA 감식 결과 해당 유골은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만, 이후 화장된 유골 분석 경험이 부족한 연구자가 검사 과정에서 시료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7] 메구미의 가족들은 북한의 자살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 메구미는 1986년, 마찬가지로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김영남과 결혼하여 1987년 딸 김혜경(金惠敬, 후에 본명이 김은경(金恩敬)으로 밝혀짐)을 낳았다. 2006년 6월, 재혼한 김영남은 한국의 가족들과 상봉하는 자리에서 메구미가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94년에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2004년에 송환된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았으며, 메구미의 아버지 시게루는 김영남이 평양에서의 인터뷰 당시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태였고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고 평가했다.[8] 2012년 6월,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 대표 최성룡은 북한 정부 문서를 입수했다며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문서를 공개하지 않아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9]

일본에서는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2011년 11월, 한국의 주간조선은 2005년 평양 주민 명부에 메구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김은공(金恩功)'이라는 여성이 등재되어 있으며 배우자 이름이 '김영남(金英男)'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보도했다.[10] 일본 정부는 해당 명부를 검토했으나 신원 확인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11] 이후 이 여성이 메구미의 딸 김은경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2012년에는 북한 당국이 김은경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12] 같은 해 8월 최성룡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은경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관리하에 있으며, 북한이 향후 일본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3] 2010년 북한은 메구미의 부모에게 일본 이외의 제3국에서 손녀 김은경을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와 요코타 부부는 이를 북한의 외교적 술책으로 의심하여 경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4]

2014년 3월, 요코타 부부는 몽골에서 손녀 김은경과 그녀의 어린 딸(메구미의 증손녀, 아버지는 불명)을 처음으로 만났다.[15]

2. 2. 납치

요코타 메구미는 1977년 11월 15일, 당시 13세의 나이로 니가타현 니가타시의 자택으로 하교하던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었다.[42] 당시 메구미는 니가타 시립 요리 중학교 1학년으로, 배드민턴부 활동을 마치고 친구 2명과 함께 오후 6시 30분경 교문을 나섰다.[45][26] 바로 그 해,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은 공작원들에게 외국인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33] 니가타현 경찰은 실종 당일 수색 요청을 받고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으나[26][45], 실종 지점 부근에서 경찰견의 추적이 끊기는 등[45] 단서를 찾지 못했다. 납치 이유는 일본 내 북한 공작원들의 활동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를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공작원들은 메구미를 배에 강제로 태워 북한으로 납치했다. 납치 과정에서 메구미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울부짖었고, 이 때문에 약 40시간 동안 배의 창고에 감금되었다.[37][43][44] 북한 공작원이었던 안명진은 납치 실행범 중 한 명인 정순권으로부터 "메구미가 '엄마, 엄마'하고 울부짖었고, 북한에 도착했을 때는 벽 등을 할퀴어 손톱이 빠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45][37][43][44][63] 정순권은 안명진에게 자신이 메구미를 납치했으며, 어린 소녀를 납치한 것에 대해 책임자에게 추궁당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46][47]

북한에 도착한 메구미는 한국어를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배우면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는 탈북자의 증언도 있다.[48] 이 탈북자의 증언은 메구미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로, 메구미 납치와 관련된 최초의 정보였다 (그 이전까지는 단순 실종 사건으로 여겨졌다).[48] 이후 그녀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2] 그녀가 머물던 시설에는 1977년과 1978년에 한국에서 납치된 다른 한국인 고등학생들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훗날 메구미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남도 포함되어 있었다.[2]

메구미의 납치 사실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97년 1월 하시모토 아쓰시 의원의 비서였던 효모토 다쓰키치가 메구미의 부모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났다.[3][4][5][6]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북한은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메구미가 1994년 3월 13일에 정신 질환으로 인해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그녀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실시한 DNA 검사 결과, 해당 유골은 메구미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만, 이후 검사 과정에서 시료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7] 메구미의 가족 역시 북한의 자살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메구미를 직접 납치한 인물은 공작원 신광수로 지목되고 있다.[7] 신광수는 소가 히토미에게 자신이 메구미를 납치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36] 참고로, 1989년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체포된 재일 한국인 정치범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요청서가 일본 국회의원 133명의 서명과 함께 한국 정부에 제출되었는데, 이 요청서의 대상자 명단에는 신광수를 비롯한 북한 공작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명한 의원 중에는 일본사회당도이 다카코, 사회민주연합간 나오토 등도 있어 논란이 되었다.[35]

북한에서 메구미는 1986년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과 결혼하여 1987년에 딸 김혜경(이후 본명이 김은경으로 밝혀짐)을 낳았다. 2006년 6월, 김영남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의 상봉 자리에서 메구미가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94년에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재차 주장했다. 그는 또한 2004년에 송환된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구미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김영남이 북한 당국의 통제 하에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의 발언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다.[8] 2012년 6월,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장인 최성룡은 북한 정부 문건을 입수했다며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문건을 공개하지 않아 그의 주장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9]

일본에서는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2011년 11월, 한국의 주간조선은 2005년 평양 주민 명부에 메구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김은경'이라는 여성이 등재되어 있으며, 배우자 이름이 '김용남'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보도했다.[10] 일본 정부는 해당 명부를 검토했으나 신원 확인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11] 이후 이 김은경이 메구미의 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12] 2012년 8월, 최성룡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은경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관리 하에 있으며, 북한이 향후 일본과의 협상에서 그녀를 '카드'로 활용할 계획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2010년 북한이 메구미의 부모에게 제3국에서 손녀 김은경을 만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와 메구미의 부모는 이를 북한의 협상 전략으로 의심하여 경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14] 결국 2014년 3월, 메구미의 부모는 몽골에서 손녀 김은경과 그녀의 어린 딸(증손녀)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15]

3. 북한에서의 생활

1977년 11월 15일, 니가타현에서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던 13세의 요코타 메구미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었다.[33][42] 북한 공작 활동을 목격했기 때문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배에 강제로 태워져 북한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격렬히 저항했다고 전해진다.[37][43][44][45] 탈북 공작원 안명진은 납치 실행범 중 한 명인 정순권으로부터 이러한 증언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43][44][63]

북한 도착 후, 메구미는 한국어를 배우고 이후 북한 공작원들에게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2] 초기에는 "한국어를 배우면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48] 북한 생활 중 소가 히토미, 다구치 야에코 등 다른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교류하기도 했다.[49][50][54]

1986년에는 한국인 납치 피해자 김영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딸 김혜경(후에 김은경으로 밝혀짐)을 낳았다.[59] 이후 1994년경까지 다른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과 같은 구역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50][68]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는 김정일의 자녀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정보도 있다.[69]

2002년, 북한은 요코타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를 공식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1994년 3월 13일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DNA 검사 결과 해당 유골이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으며,[7] 가족들 역시 북한의 자살 주장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2006년 메구미의 남편 김영남은 한국 방문 중 그녀가 정신 질환으로 1994년에 사망했다고 재차 주장했으나,[8] 이는 북한 당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여겨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8] 2012년에는 2004년 12월 14일 사망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근거 문건이 공개되지 않아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현재 일본을 중심으로 요코타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2011년에는 평양 주민 명부에 메구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김은경'이라는 여성이 등재된 사실이 알려졌고,[10] 이 여성이 메구미의 딸임이 확인되었다.[12] 북한 당국이 딸 김은경을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관리 하에 두고 있으며, 향후 대일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13] 2014년 3월,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는 몽골에서 손녀 김은경과 그녀의 딸(메구미의 증손녀)을 처음으로 만났다.[15]

3. 1. 소가 히토미와의 동거

소가 히토미의 증언에 따르면, 1978년 8월부터 1980년 6월경까지 약 1년 반 동안 평양 시내에서 요코타 메구미와 함께 살았으며,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49] 메구미는 소가 히토미와 함께 있을 때 항상 웃으며 귀여운 보조개를 보였다고 한다.[49] 낮에는 서로 조선 이름을 사용했지만, 밤에는 작은 목소리로 일본어를 쓰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49][50] 당시 두 사람의 교육 담당자 중 한 명은 신광수였다.[51] 1년 먼저 북한으로 끌려온 메구미는 소가 히토미에게 조선어 기초를 가르쳤다.[51] 둘은 함께 조선어를 공부하고,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치기도 했다.[52] 당시 15세였던 메구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주 울었다고 한다.[51] 두 사람 모두 일본을 그리워했고,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으며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49] 소가 히토미와는 강한 우정으로 맺어졌고, 나중에 자신의 딸에게 소가 히토미의 조선 이름인 "혜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51] 소가 히토미가 찰스 젠킨스와 결혼하게 되자, 메구미는 이별 선물로 배드민턴 가방을 주었다고 한다.[51] 그 후, 1983년 또는 1984년경, 요코타 메구미는 소가 히토미에게 은밀하게 소식을 전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당시 평양 중심부에 살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53]

3. 2. 다구치 야에코와의 동거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김현희의 증언에 따르면, 1984년경 평양직할시 남동쪽 약 20km 지점의 중화군 충룡리에 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납치 피해자인 요코타 메구미, 다구치 야에코, 그리고 김현희의 동료 공작원이었던 김숙희 세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50][54]. 당시 김숙희는 김현희에게 충룡리의 초대소는 "전기 사정이 나쁘고 추워서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있었다"고 말했으며, 메구미는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50][54][55]. 김현희는 2009년 대한민국 잡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도 "요코타 메구미가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요코타와 숙희가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55]. 또한 김현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당시 메구미에 대해 "조용하고, 우울한 기색이며, 자주 병에 걸려 입원하고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했다[55].

지무라 후키에의 증언에 따르면, 1985년 1월경까지 김숙희, 다구치 야에코, 요코타 메구미가 함께 살았으나, 이후 김숙희가 떠나고 다구치 야에코와 요코타 메구미 두 사람이 충룡리 1지구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85년 말 같은 충룡리 내 2지구로 이사했으며, 1986년 봄경 다구치 야에코가 요통으로 915병원에 입원하면서 요코타 메구미는 혼자 남게 되었다. 이 시기 근처에 살던 김영남이 메구미를 찾아와 일본어를 배웠다고 한다[54].

한편, 미국 탈주병 출신 찰스 젠킨스는 1985년부터 1986년 사이에 외화 전용 상점인 "낙원백화점"에서 아이를 데리고 쇼핑하던 중 우연히 메구미를 만났다고 증언했다. 당시 메구미는 젠킨스의 두 딸 미화를 달래주었으며, 일본어를 모르는 젠킨스에게 조선어로 "아내(소가 히토미)와 저는 절친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53].

3. 3. 결혼과 충룡리에서의 생활

북한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요코타 메구미는 1986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같은 해 한국인 납치 피해자로 추정되는 김영남과 결혼했다. 당시 북한은 김영남을 '김철준'이라는 북한 사람으로 설명했었다.[59] 다음 해인 1987년에는 딸 김혜경(이후 김은경으로 밝혀짐)을 낳았다.[59]

탈북자 안명진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가토 쿠미코 등 다른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과 함께 있는 요코타 메구미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60][61][62] 당시 그녀는 다른 일본인 피해자들과 함께 대남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62] 안명진은 1988년 10월 9일 처음 그녀를 보았으며, 사복 차림에 "특히 예쁜 여성"이었고 웃을 때 깊게 패이는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했다.[63][65] 요코타 메구미에게 보조개가 있다는 사실은 안명진이 사전에 알기 어려운 정보였기에, 그의 증언 신빙성을 높이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66] 안명진은 그녀의 키가 약 160cm 정도였고, 항상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고 덧붙였다.[64] 그는 1988년 12월 31일, 1989년 1월 30일 등 공식 행사에서도 그녀를 보았다고 증언했다.[67]

이후 1994년 무렵까지는 지무라 야스시·하마모토 후키에 부부, 하시이케 카오루·오쿠토 유키코 부부 등 다른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이 살던 평양의 충룡리 구역에서 함께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50][68] 일본으로 귀환한 납치 피해자들은 요코타 메구미가 몸이 약해 서로 돌봐주기도 했으며,[50] 납치될 때 가져온 배드민턴 라켓 커버를 소중히 간직하고 딸에게 예쁜 옷을 입혀 산책하는 모습 등을 기억했다.[50] 또한 그녀는 언어 능력이 뛰어나 조선어를 아름다운 발음으로 구사했다고 전해진다.[50]

한편, 2006년 6월, 재혼한 김영남은 한국 방문 중 요코타 메구미가 1994년 정신 질환으로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4년 일본에 전달된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8] 그러나 그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요코타 메구미의 아버지는 김영남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고 비판했다.[8]

한국 정보기관은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 요코타 메구미가 김정일의 자녀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이 정보는 김정일 서기실 간부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져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69]

4. 납치 사건의 발각

1997년 1월 21일,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국회의원 비서 병본 다츠키치에 의해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 납치되었으며 평양에서 살아있다는 정보가 일본으로 전해졌다.[26][37][70] 같은 해 2월 3일, 산케이 신문이 "북한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하면서[71] 일본 내 언론들이 이를 일제히 다루기 시작했다.[72] 메구미의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는 고심 끝에 딸의 실명 공개를 결정했다.[73]

이에 대해 북한은 1997년 2월 10일 평양방송을 통해 "달을 보고 짖는 미친 개의 소리"라며 일본의 보도를 강하게 비난하고,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71] 요코타 시게루 등 납치 피해자 가족들은 3월 25일 가족회를 결성했고, 시게루가 대표를 맡았다.[74] 참고로, 이날은 메구미를 아꼈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홋카이도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75]

요코타 시게루와 요코타 사키에 부부는 4월부터 거리에서 구출 활동을 시작했다.[76] 4월 28일에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일본에서 중학생을 납치할 어떤 필요성이나 이해관계도 없다"고 단언하며, "일본이 우리와 대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상응하는 대항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71] 일본에서는 경찰청의 이타테 경비국장이 같은 해 5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코타 메구미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북한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했다.[71] 요코타 부부는 여러 기관과 정치인에게 메구미의 구출을 호소하며 진정 활동을 전개했고,[72] 여론의 반응은 커져 8월에는 50만 필 이상의 서명을 모아 총리 관저에 전달했다.[72]

2002년 9월 17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고 일조 평양 선언을 발표했다.[77] 동시에 열린 제1차 일조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그동안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해 온 납치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다.[77][78] 김정일은 "70~80년대에 특수 부서가 망동주의,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공작원의 일본어 교육과,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한국에 침입하기 위해 일본인을 납치했지만, 이러한 잘못된 지시를 내린 간부를 처벌했다… 공작선은 군부가 훈련 하에 있었다. 나는 몰랐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하며 책임을 일부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78] (1977년 북한 공작원들에게 "마구잡이"로 외국인을 유괴하라고 지시한 것은 김정일 자신이었으며,[79] 1980년 신광수의 두 번째 일본 침투 공작에 앞서, 신에게 직접 "일본인을 납치하여 북으로 연행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변신한 후, 대한국 공작 활동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도 김정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80]) 김정일은 장봉림과 김성철을 책임자로 지목하며 처벌했다고 설명했다.[78]

북한은 또한 요코타 메구미를 포함한 13명의 납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중 5명만이 생존해 있고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26][37][81][82][83] 북한 측 설명에 따르면 메구미는 "김철준"이라는 남성과 결혼하여 딸 김혜경을 출산한 후 자살했으며, 당시 주영 공사였던 메이모토 카즈요시가 김혜경을 만났다.[84] 일본 정부는 이이쿠라 공관에서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과 우에다케 시게오 외무부대신을 통해 메구미의 부모에게 "사망" 사실을 통보했으나, 북한이 제시한 사망 시각 등 구체적인 정보는 전달하지 않았고 "사망 정보"에 대한 확인 작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81][82]

2002년 10월 25일 후지테레비가 일본 내에 방영한 김혜경(당시 15세)의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어머니 메구미에 대해서는 자신이 5살 때 "사망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99] (DNA 감정 결과, 김혜경과 요코타 메구미 사이의 모녀 관계에는 모순이 없음(99.999% 확률)이 확인되었다.[84][85]) 또한, 김혜경이 "어머니의 유품"으로 보여준 배드민턴 라켓은 메구미가 중학생 시절 사용하던 것이라는 팀 동료들의 증언이 있었다.[86]

2004년 11월, 북한은 메구미의 남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메구미의 "유골"과 사진, 자필 메모 등을 일본 측에 제출했다.[87] 모든 감정 결과가 나온 것은 2004년 12월 24일이었다.[87] 경찰청 과학수사연구소는 "유골이 고온으로 소각되어 DNA를 검출할 수 없었다"고 발표한 반면, 테이쿄 대학 법의학 연구실은 "요코타 메구미 이외의 사람의 DNA를 여러 개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일본 정부는 테이쿄 대학의 결과를 받아들여, "'유골' 일부에서 요코타 메구미의 것이 아닌 DNA가 검출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26][37][83] 또한 제출된 사진 중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건물이 찍힌 것이 있었고, 그림자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합성으로 의심되는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87] 이 결과에 대해 요코타 시게루는 "국가 간 협상에서 가짜 유골을 전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87]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판명된 다음 날, 납치 의원 연맹 회장 히라누마 다케오는 "식량 지원 중단은 물론, 국교 정상화 교섭도 시작해서는 안 된다. 핵과 인권 문제를 생각하면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88])

그러나 유골 감정 직후, 감정을 담당했던 테이쿄 대학 의학부 관계자는 영국의 과학 저널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유골은 무엇이든 흡수하는 단단한 스펀지와 같다. 만약 유골에 그것을 다룬 누군가의 땀이나 기름이 스며들었다면, 아무리 잘 처리해도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한 감정은 단정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감정 결과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5. 사망설과 생존설

1997년 일본의 국회의원 비서를 통해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 납치되어 생존해 있다는 정보가 알려진 이후,[3][4][5][6][26][37][70] 그녀의 생사 여부는 일본인 납치 문제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2002년 일조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77][78][26][37][81][82][83] 북한은 메구미가 정신질환으로 1994년 4월(당초 1993년 3월 주장[88][89][90])에 자살했다고 설명했으나,[88][91] 이 주장은 여러 의문점을 낳았다.

북한이 2004년 전달한 소위 '유골'은[87] 일본 정부의 DNA 감정 결과 메구미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26][37][83][7] 북한 발표의 신뢰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비록 감정 과정에서의 시료 오염 가능성[18]이나 북한 내부의 관리 부실 가능성[16][17] 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메구미의 가족들은 자살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메구미의 남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김철준'이라고 했다가[88] 2006년 대한민국 출신 납북자 김영남으로 말을 바꾸는 등[92][93] 설명의 일관성이 부족했다. 김영남의 증언[8] 역시 북한 당국의 입장을 되풀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8] 2012년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2004년 사망설을 주장했으나 근거 문건 미공개로 논란이 있었다.[9]

이러한 북한 측 주장의 모순과 번복, 유골 논란 등으로 인해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존설'이 힘을 얻고 있다. 다른 납북 귀환자들의 증언,[88][91] 2011년 평양 주민 명부 기록 보도[10] 등 생존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황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딸 김은경의 존재 확인[12]2014년 조부모와의 만남[15]은 생존설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은경이 북한 체제 내에서 특별 관리 대상이며[13] 향후 대일 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반면, 일본 내 일부 정치인들은 사망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 소속 이시이 카즈 의원의 2014년 발언[94][95] 등이 대표적이나, 이는 피해자 가족과 여론의 반발을 샀다.

5. 1. 북한의 주장 (사망설)

2002년 9월 17일 일조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요코타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26][37][81][82][83] 북한 측은 메구미가 "김철준"이라는 남성과 결혼해 딸 김혜경(훗날 김은경으로 밝혀짐)을 낳았으며, 1994년 3월 13일에 정신질환으로 자살했다고 주장했다.[3][4][5][6]

2004년 11월, 북한은 메구미의 남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소위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87] 그러나 일본 정부는 DNA 감정 결과, 해당 유골에서 메구미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발표하며 유골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26][37][83][7] 이에 대해 감정을 담당했던 테이쿄 대학 측 관계자는 과학 저널 '네이처'를 통해 시료 오염 가능성을 언급하며 자신의 감정이 단정적이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북한 당국이 메구미의 유골을 찾는 과정에서 정확한 기록 부재와 관리 소홀(49호 병원 뒤편 산에 장례 없이 매장)로 인해 다른 유골을 잘못 전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김정일이 고의로 가짜 유골을 보낸 것은 아니며, 일본 측의 격렬한 반발에 당황했다고 주장했다.[16][17]

북한의 설명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사망 시점은 당초 1993년 3월 평양시 49호 예방원(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입원 중 자살했다고 했다가,[88][89][90] 다른 납북자의 증언으로 1993년 이후 생존 정황이 나오자 1994년 4월 13일로 정정되었다.[88][91] 남편 역시 처음에는 "김철준"이라고 밝혔으나,[88] 2006년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출신 납북자 김영남일 가능성을 제기하자 뒤늦게 김영남이 남편이라고 인정했다.[92][93] 2006년 6월, 김영남은 대한민국의 가족과 상봉한 자리에서 메구미가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4년 4월 13일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자살 시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8] 그는 또한 2004년 전달된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하며, 일본 측의 DNA 감정 결과 발표를 "유치한 주장"이자 "인권 유린"이라고 비난했다.[91] 그러나 메구미의 아버지는 김영남의 발언이 북한 당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고 비판했다.[8]

2002년 10월 공개된 딸 김혜경(당시 15세)의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어머니 메구미가 자신이 5살 때 사망했다고 말했다.[99]

2012년 6월,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 대표 최성룡은 요코타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북한 문건을 입수했다고 주장했으나, 문건을 공개하지 않아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9]

일본 내에서도 사망설을 주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민주당 소속 정치인 이시이 카즈(石井一)가 있다. 그는 2014년 8월, "일본 정부가 아직도 요코타 메구미 씨 등을 돌려달라고 소란을 피우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결착이 난 이야기"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94][95] 이시이 의원은 과거 가네마루 신 방북단 파견 당시 다른 납북 피해자 이시오카 토오루 관련 정보를 묵살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96] 파친코 체인스토어 협회 정치 분야 어드바이저인 나가타 유키오(生方幸夫)도 유사한 발언을 했으나 이후 철회했다.[91][97][98]

5. 2. 생존설

2002년 북한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요코타 메구미는 1994년 3월 13일에 자살했다고 주장했다.[7] 북한은 메구미의 것이라며 유골을 일본 측에 전달했지만, 일본은 DNA 검사 결과 해당 유골이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7] 이후 화장된 시료 분석 경험이 부족한 연구자가 검사 과정에서 실수로 시료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메구미의 가족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 없다고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북한은 당초 메구미가 1993년 1월 신경쇠약으로 입원했고 같은 해 3월 평양의 한 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입원 중 자살했다고 설명했다.[88][89][90] 유골에 대해서는 병원 뒷산에 잠시 매장했다가 남편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주장했다.[89] 그러나 2002년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다른 납치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메구미가 1993년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북한은 사망 시점을 1994년 4월 13일로 수정했다.[88][91]

메구미의 남편에 대한 북한의 설명 역시 일관성이 없었다. 처음에는 "김철준"이라는 조선인과 결혼했다고 밝혔고,[88] "김철준" 명의로 2002년 9월 메구미의 부모에게 "1993년 갑자기 병으로 메구미를 잃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91] 그러나 2006년 4월 11일, 일본 정부가 DNA 감정 결과를 토대로 메구미의 남편이 1978년 대한민국에서 납치된 김영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자,[92][93] 북한은 같은 해 6월 8일 뒤늦게 김영남이 남편이었다고 인정했다.[92][93] 김영남은 2006년 6월 한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과 상봉한 자리에서 메구미가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94년 4월 13일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증언했다.[8] 그는 또한 2004년 일본이 돌려받은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했다.[8] 하지만 그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메구미의 아버지는 김영남이 평양에서의 인터뷰 당시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고 지적했다.[8]

2012년 6월,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최성룡은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북한 정부 문서를 입수했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문서를 공개하지 않아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9]

이러한 북한 측 주장의 모순과 번복 때문에 일본에서는 메구미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2011년 11월, 한국의 주간조선2005년 평양 주민 명부에 메구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김은경'이라는 여성이 등재되어 있으며, 배우자 이름이 '김용남'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보도했다.[10] 일본 정부 당국은 해당 명부를 검토했지만, 등재된 여성의 신원을 특정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11] 이후 이 '김은경'은 메구미의 딸임이 확인되었다.[12] 2012년 8월, 최성룡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은경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감시 하에 있으며, 북한 정부가 향후 일본과의 협상에서 김은경을 '카드'로 활용할 계획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보도에 따르면, 2010년 북한은 메구미의 부모에게 일본 이외의 제3국에서 손녀 김은경을 만날 수 있도록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와 메구미의 부모는 이를 북한의 외교적 술책으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14] 결국 2014년 3월, 메구미의 부모는 몽골에서 손녀 김은경과 그녀의 어린 딸(아버지는 밝혀지지 않음)을 처음으로 만났다.[15]

한편, 메구미의 유골 감정을 담당했던 데이쿄 대학 의학부 소속 의사가 영국의 과학 저널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유골은 다공성 물질이라 다룬 사람의 DNA에 오염되기 쉽고, 한번 오염되면 제거하기 어렵다"며 자신의 감정이 단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밝혀 유골 논란은 더욱 복잡해졌다.[87]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일부 일본 정치인들은 메구미 사망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 소속의 이시이 카즈(石井一)는 2014년 8월 29일, 고베시에서 열린 자신의 욱일대수장 수상 기념 파티에서 "일본 정부는 아직도 요코타 메구미 씨 등을 돌려달라고 소란을 피우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 "나는 북한에 정통하다. 그런데도 아직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94] 그는 다음 날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피해자 가족을 생각하면 비통한 일이지만, (북한이 주장한 사망 사실을) 뒤집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국제 사회에서는 결착이 난 이야기"라며 기존 주장을 고수하고 발언 철회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95] 이시이 카즈는 과거 1990년 가네마루 신 방북단 파견을 앞두고, 납북 피해자 아리모토 게이코(有本恵子)의 아버지 아리모토 아키히로(有本明弘)가 이시오카 토루(石岡亨)가 북한에서 보낸 편지 사본을 전달하며 도움을 호소했을 때 이를 묵살했던 전력이 있다.[96] 파친코 체인스토어 협회 정치 분야 고문으로 이시이와 가까운 우부카타 유키오(生方幸夫) 역시 유사한 발언을 했으나 이후 철회했다.[91][97][98]

6. DNA 논란

2004년(헤이세이 16년) 11월, 북한은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유골"과 사진, 자필 메모 등을 일본에 제출했다.[87] 일본 정부는 2004년 12월 24일 감정 결과를 발표했는데, 경찰청 과학수사연구소는 "유골이 고온으로 소각되었기 때문에 DNA를 검출할 수 없었다"고 한 반면, 데이쿄 대학 법의학 연구실은 "요코타 메구미 이외의 사람의 DNA를 여러 개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일본 정부는 데이쿄 대학의 결과를 받아들여, "'유골' 일부에서 요코타 메구미의 것이 아닌 DNA가 검출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26][37][83] 제출된 사진 중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건물이 찍힌 것이 있었고, 그림자의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합성 의혹이 제기된 사진도 있었다.[87] "유골" 감정 결과에 대해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는 "국가 간 협상에서 가짜 유골을 전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87]

그러나 이 DNA 검사 결과는 곧바로 논란에 휩싸였다. 유골 감정을 담당했던 데이쿄 대학 의학부의 요시이 토미오(吉井朋央) 교수는 영국의 과학 학술지 네이처와의 인터뷰(2005년 2월 3일자)에서 자신의 분석이 결정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법의학과에서 강사급의 비교적 낮은 직위에 있었으며, 해당 부서에는 교수나 조교수조차 없었다. 또한 화장된 유골 분석 경험이 없음을 인정하며, 유골 샘플이 "어떤 것이든 흡수하는 뻣뻣한 스펀지"처럼 다루는 사람에 의해 쉽게 오염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분석한 5개의 작은 샘플(가장 큰 것이 1.5g)은 이미 실험에 사용되어 독립적인 검증이 불가능해졌다.

일본 정부의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이 ''네이처'' 기사가 부적절하며 정부 의뢰 분석을 잘못 해석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네이처''는 2005년 3월 17일 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18]

:일본은 북한의 모든 진술을 의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DNA 검사에 대한 일본의 해석은 과학의 정치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경계를 넘어섰다. ''네이처''는 검사를 수행한 과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유골이 단순히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DNA 검사가 결론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제안은 북한을 명백하게 사기꾼으로 보이게 하려는 일본 정부에는 불편한 것이다. ...

: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뼈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북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일본이 의존하고 있는 DNA 검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과학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과학은 실험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불확실성이 면밀히 조사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운영된다. 검사를 더 큰 팀이 수행했어야 한다는 다른 일본 과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왜 일본은 혼자 일하는 한 명의 과학자에게,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 명의 과학자에게 그 일을 맡겼을까?

:

:일본의 정책은 외교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 일본의 정치적, 외교적 실패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자신의 일을 한 과학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실험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일본 간의 마찰은 DNA 검사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DNA 검사 결과의 해석은 양국의 정부가 결정할 수 없다. 북한과의 관계는 즐겁지 않지만 과학과 정치의 분리를 위한 규칙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편,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부대사 출신 탈북자 태영호는 자신의 저서 『3층 비서실 패스코드』에서 유골 반환 논란이 김정일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북한 외무성 내부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외무성 일본 담당 부서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요코타 메구미가 오지에 위치한 중증 정신질환자 특수 병원인 '49호 병원'에서 정신 질환으로 사망했으며, 당시 병원에는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사망자들이 장례식 없이 병원 뒤편 산에 매장되던 시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병원 당국은 직원의 기억에 의존해 메구미의 유골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 일본으로 보냈으나, DNA 검사 결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16] 태영호는 김정일이 국교 정상화와 경제 지원을 원했기에 의도적으로 가짜 유골을 보낸 것은 아니며, 일본 언론과 고이즈미 정부의 격렬한 반발에 진심으로 놀랐다고 보았다. 일본이 납치 문제의 추가 진전을 조건으로 국교 정상화 제안을 철회하자, 김정일은 강석주 당시 외무성 부상에게 "역시 일본놈들은 믿을 수 없어. 미국 놈들이 더 낫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7]

결론적으로, 북한이 제출한 유골에 대한 DNA 검사 결과는 요코타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발표가 있었지만, 검사 과정의 신뢰성, 특히 샘플 오염 가능성과 분석을 담당한 과학자의 자격 및 발언, 그리고 일본 정부의 과학적 결과 해석에 대한 정치적 개입 논란 등으로 인해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7. 관련 인물


  • 리은혜
  • 소가 히토미
  • 김영남: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알려진 인물. 1978년 8월 대한민국에서 납북된 고등학생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2] 1986년 요코타 메구미와 결혼하여 1987년 딸 김혜경(실제 이름 김은경)을 낳았다. 2006년 6월, 북한 당국의 허가 하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상봉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남은 요코타 메구미가 1994년 정신 질환으로 자살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2004년 일본에 송환된 유골이 진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을 그대로 따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메구미의 아버지는 김영남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고 지적하며 발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8]
  • 김혜경 (김은경): 요코타 메구미와 김영남 사이의 딸. 1987년 출생했으며, 실제 이름은 김은경으로 밝혀졌다. 2014년 3월, 몽골에서 외조부모인 요코타 시게루와 요코타 사키에를 처음 만났다. 이 만남에는 김은경의 어린 딸도 동행했으나,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5]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 대표 최성룡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은경이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의 관리 하에 있으며, 북한이 향후 일본과의 협상에서 김은경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3]
  • 신광수: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실행범으로 지목되는 북한 공작원이다.[7]
  • 효모토 다쓰키치: 일본의 하시모토 아쓰시 의원 비서. 1997년 1월,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메구미의 납치 관련 정보를 처음으로 알린 인물이다.[3][4][5][6]
  • 최성룡: 납북자 가족 지원 단체 대표. 2012년 6월, 요코타 메구미가 2004년 12월 14일 '우울증'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긴 북한 문서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당 문서를 공개하지 않아 그의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또한 2012년 8월,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김은경이 김여정의 감시 하에 있다는 정보를 공개하기도 했다.[13]

8. 미디어

요코타 메구미와 다른 납치 사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로는 '''납치! 일본-북한 납치 사건'''(2005), '''납치: 요코타 메구미 이야기'''(2006), '''메구미'''(2007),[19] 그리고 '''메구미'''(2008)가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영화로도 제작되었다.


  • 2003년 TV 도쿄에서 방영된 드라마 북한 납치·메구미, 엄마가 꼭 구해줄 거야에서는 배우 와카하라 메구미가 요코타 메구미를 연기했다.
  • 2006년 10월에는 니혼 TV에서 특집 드라마 '''재회~요코타 메구미 씨의 소망~'''(再会~横田めぐみさんの願い|사이카이~요코타 메구미상노 네가이~일본어)가 방영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후쿠다 마유코가 어린 시절의 메구미를, 카타세 나나가 성인이 된 메구미를 연기했다.[24]
  • 2020년에는 영화 '''메구미에게 바치는 맹세'''가 개봉되었으며, 카사 나츠키가 메구미 역을 맡았다.


요코타의 부모는 만화 '''메구미'''의 감수를 맡았다. 이 만화는 그녀가 납치되기 전 일본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 다른 만화 '''닥칸'''은 귀환 피해자 하스이케 가오루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만화 '메구미'를 웹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2008년에 공개했으며,[20] 성우 타카야마 미나미가 메구미 목소리를 연기했다.[26]

2010년 신주쿠 극장에서는 메구미의 삶을 각색한 연극 '''메구미에게 바치는 서약'''(めぐみへの誓い|메구미에노 치카이일본어)이 공연되었다. 주요 줄거리는 북한에 의해 납치되기 전과 납치 당시의 요코타 메구미를 중심으로 하며, 메구미가 부모와 재회하는 허구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음악 분야에서도 요코타 메구미를 기리는 작품이 있다.

  • 2007년 초, 미국의 포크 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폴 스투키(Paul Stookey)는 메구미를 위해 "메구미를 위한 노래(Song for Megumi)"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고 일본 순회 공연을 가졌다.
  • 2010년, 영국의 록 가수 피터 프램프턴은 다큐멘터리 "납치: 요코타 메구미 이야기"를 본 후 메구미 요코타에 관한 두 곡의 노래 "Asleep at the Wheel"과 "Suite Liberte"를 녹음하여 앨범 "Thank You, Mr. Churchill"에 수록했다.


다음은 요코타 메구미를 연기한 배우 및 성우 목록이다.

배우/성우작품명연도매체비고
와카하라 메구미북한 납치·메구미, 엄마가 꼭 구해줄 거야2003텔레비전 드라마 (TV 도쿄)
후쿠다 마유코재회~요코타 메구미 씨의 소망~2006텔레비전 드라마 (니혼 TV)13~15세 시절 연기
카타세 나나재회~요코타 메구미 씨의 소망~2006텔레비전 드라마 (니혼 TV)성인 시절 연기
타카야마 미나미메구미2008웹 애니메이션성우[26]
카사 나츠키메구미에게 바치는 맹세2020영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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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화리뷰 Movie Review - Abduction: The Megumi Yokota Story http://www.efilmcrit[...] 2006-04-23
[5] 뉴스 Families of missing Japanese angry at US - North Korea deal https://www.telegrap[...] 200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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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뉴스 Clues Found in North Korean Kidnappings http://english.donga[...] The Dong-a Ilbo English donga 2006-01-07
[8] 뉴스 Kim Young Nam barred from speaking freely: Yokota's father http://www.thefreeli[...] 2006-07-06
[9] 뉴스 Yokota died in 2004, not 1994 as Pyongyang claims: South activist http://www.japantime[...] 200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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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뉴스 Yokota daughter 'watched' in North http://www.japantime[...] 2012-05-31
[13] 뉴스 Yokota daughter entrusted to Kim Jong Un's sister? http://www.japantime[...] 2012-05-31
[14] 뉴스 Pyongyang offered to let Yokota's daughter go in '10, but not to Japan http://www.japantime[...] 2013-05-30
[15] 뉴스 Yokota's parents, child meet http://www.japantime[...]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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