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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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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공산주의는 1970년대 중반 등장한 용어로,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면서 나타난 현상을 지칭한다. 이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소련의 비민주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 속에서,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맞는 혁명 방식과 다당제, 사유재산의 부분적 허용 등을 포함하는 노선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 등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적 영향을 받았다.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과의 거리를 두며, 기독교 세력과의 연대, 사회민주주의적 노선으로의 전환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쇠퇴했지만, 일부 정당에서는 이념으로 남아있다. 유럽공산주의는 소련과의 관계, 명확한 전략 부재, 수정주의적 성향 등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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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공산주의
유럽공산주의
개요
정의서유럽의 정치 이념
주요 특징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해석을 수용
민주주의적 가치 존중
소련 모델 거부
역사
등장 배경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소련의 영향력 감소
서유럽 공산당의 변화 필요성
발전 과정1970년대 주요 공산당들의 노선 변화
이탈리아 공산당, 스페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
소련과의 관계 재정립
쇠퇴1980년대 후반 동유럽 혁명과 소련 붕괴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력 약화
주요 이념
민주주의다원주의적 정치 체제 수용
의회 민주주의 제도 존중
시민적 자유와 권리 강조
사회주의자본주의의 문제점 비판
사회 복지 확대 및 불평등 해소 추구
노동자의 권익 보호 강조
국제주의국가 간 협력 및 연대 추구
평화 및 군축 운동 지지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 반대
반 스탈린주의소련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거부
개인숭배 및 전체주의 비판
민주사회주의적 가치 강조
관련 인물
주요 이론가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이탈리아)
산티아고 카리요 (스페인)
조르주 마르셰 (프랑스)
파르미로 톨리아티 (이탈리아)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
영향
서유럽 정치공산당의 노선 변화에 영향
좌파 정당들의 연대 및 협력에 기여
사회민주주의와의 접점 모색
기타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제시
마르크스주의의 다양성 확대
민주적 사회주의 사상 발전
비판
노선 변화마르크스주의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비판
수정주의적 경향이라는 비판
사회민주주의와 차별성이 없다는 비판
현실주의서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안이한 대응이라는 비판
공산주의 운동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비판
대안 제시 능력 부족에 대한 비판

2. 용어

프랑스 공산당의 집회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라는 용어는 1975년 7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용어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1970년대 중반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나 아리고 레비 등 여러 인물이 용어의 창시자로 거론되었으며, 장-프랑수아 레벨은 "정치학자들의 가장 좋아하는 오락 중 하나는 유로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저자를 찾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1977년 4월, 독일의 잡지 《Deutschland Archiv》는 유고슬라비아의 언론인이자 베오그라드의 뉴스 잡지 《NIN》의 전 편집장인 프라네 바르비에리가 1975년 여름에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결론 내렸다.[3]

서유럽 외부에서는 때때로 '''신공산주의'''(Neocommunism)로 불리기도 한다.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각국의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려는 서유럽 공산당들의 경향을 지칭한다.[4]

이러한 독자 노선 추구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국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웠던 공산당들은 냉전 시기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사건과 소련 내부의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이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하면서, 서유럽 공산당들은 소련식 모델과 거리를 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자신들이 소련과 같은 억압적인 세력이 아님을 증명하고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노선 모색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또한,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복지 체계를 갖춘 선진 자본주의 사회였기에,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각국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보다 유연하고 점진적인 사회 변화 전략이 요구되었다. 이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산업 구조의 변화로 노동자 계급 외에도 농민, 자영업자, 지식인, 여성, 청년 등 다양한 사회 계층이 부상하면서,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용적인 이념과 정책 개발이 중요해졌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기독교 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제안한 '역사적 타협'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럽공산주의 노선이다. 이는 미국식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소련식 전체주의 역시 비판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3. 역사



유럽공산주의라는 용어는 1975년 7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아리고 레비, 유고슬라비아 언론인 프라네 바르비에리 등 여러 인물이 거론된다.[3] 서유럽 외부에서는 '''신공산주의'''로 불리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국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끈 공산당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대체로 소련의 노선을 따랐다. 그러나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소련식 공산주의의 비민주성 및 독재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서유럽 공산당들은 소련과 차별화되는 독자 노선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복지 수준이 높은 서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현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과, 노동자 계급 외 다양한 사회 계층(농민, 여성, 청년, 지식인 등)으로 지지 기반을 넓혀야 할 필요성도 유럽공산주의 등장의 배경이 되었다.

유럽공산주의는 소련 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각국의 실정에 맞게 의회민주주의에 기반한 합법적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소련, 중국 등과 같은 일당제가 아닌 다당제 하에서의 공산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및 서민 계층의 지지를 고려하여 일정 수준의 사유재산 제도와 사기업 활동을 허용하고자 했다. 사회관에 있어서도 유물사관이나 무신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안토니오 그람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일부 인정하는 유연성을 보였고,[35] 프랑스 5월 혁명 이후 등장한 신좌익 세력의 요구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이러한 노선 변화는 구체적인 정치 활동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기독교 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역사적 타협'을 추진했고, NATO 탈퇴 노선을 철회하기도 했다. 프랑스 공산당프랑스 사회당과 '공동 정부 강령'을 체결하고 1974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공동 후보로 지지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프랑코 독재 종식 후 민주화 과정에서 몬클로아 협정 체결 등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유럽공산주의는 1970년대 후반 일부 국가에서 공산당 지지율 상승을 이끌기도 했다.[36]

한편, 일본 공산당은 일부 유사한 노선을 보이기도 했으나,[32] 서유럽 공산당들의 NATO 용인 등을 비판하며 유럽공산주의와는 거리를 두었고, 민주집중제 유지 등 독자적인 특징을 보였다.[33][31]

1991년 소련 붕괴는 공산주의 이념 전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고, 유럽공산주의 역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많은 유럽공산주의 정당들이 분열하거나 노선을 변경했지만, 프랑스 공산당, 일본 공산당 등 일부 정당에서는 여전히 그 이념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 1. 이론적 배경



유럽공산주의의 주요 이론적 기반은 페리 앤더슨에 따르면 안토니오 그람시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저술이었다.[5] 이 저술에서 그람시는 좌파 내부의 파벌주의를 비판하고, 공산당이 사회 개혁에 대한 문화적 헤게모니적 지지를 얻기 위해 다양한 사회 세력과의 동맹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럽공산주의가 기존의 노동자 계급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 여성, 청년, 지식인 등 다양한 사회 계층 및 새로운 사회 운동(여성 운동, 동성애 해방 운동 등)을 포용하고, 기독교 민주당과 같은 중도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모색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기독교 민주당과의 연립 정권 수립을 위해 제안한 '역사적 타협' 노선은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반영한다.

초기 유럽공산주의는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6][7][8] 이러한 이론적 배경 속에서 유럽공산당들은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충실성을 표명하였고, 폭력 혁명 대신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합법적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서유럽 대부분 국가가 일정 수준의 복지를 갖춘 선진 자본주의 국가였기에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던 현실적 필요와도 맞닿아 있었다. 또한 소련일당제가 아닌 다당제 체제 하에서의 공산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등으로 드러난 소련식 공산주의의 비민주성과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의 일환이기도 했다.

사회관에 있어서도 유물사관변증법적 유물론, 무신론을 기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그람시 사상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로마 가톨릭교회 세력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유럽공산주의는 프랑스 5월 혁명의 영향으로 성장한 신좌파 운동과는 구별된다. 유럽공산주의는 신좌파 운동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지만, 신좌파가 역사적 유물론, 계급 투쟁, 공산당과 같은 전통적인 틀 자체를 대체로 폐기한 것과는 달리,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 요소를 유지하면서 서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현실에 맞게 수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유럽공산주의는 '신좌파'라는 용어를 프랑스 nouvelle gauche|누벨 고슈프랑스어에서 차용하기도 했다.

3. 2. 프라하의 봄과 그 유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대하는 헬싱키 시위


1968년 프라하의 봄과 특히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공산주의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의 비민주적인 정치와 독재에 대한 전 세계적인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서유럽의 공산당들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루마니아의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강경한 연설을 통해 소련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포르투갈 공산당, 남아프리카 공산당, 미국 공산당 등 일부 공산당은 소련의 입장을 지지했다.[9]

그러나 서유럽의 주요 공산당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스페인 공산당(PCE)은 소련의 침공을 강력히 비난했다.[9] 핀란드 공산당(SKP)[10], 스웨덴 좌익 공산당(VPK),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PCF) 지도부는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타협을 촉구하면서도 소련의 군사 개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11] 특히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스 공산당(KKE)의 경우, 프라하의 봄 사태와 소련의 침공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인해 큰 분열을 겪었다.[9] 두브체크를 지지하고 소련의 노선에 반대한 세력은 당을 떠나 KKE 내부를 결성했다. 또한 KKE의 합법적인 분파였던 연합 민주 좌파(EDA)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온건하고 민주적인 노선을 채택했으며, 이는 유럽공산주의의 특징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2][13]

이처럼 1968년의 사건들은 많은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이는 이후 유럽공산주의가 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유럽공산주의의 등장을 단순히 1968년 사건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진 유럽 공산당들과 소련 간의 복잡한 관계 재편 과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2]

3. 3. 서유럽 공산당들의 발전



유럽공산주의라는 용어는 1975년 7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각국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했던 유럽의 공산당들은 전후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소련의 노선을 따르며 독자적인 공산주의 이념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소련의 비민주적 정치 및 독재가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하면서, 서유럽 공산당들은 자신들이 소련식 억압 체제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련과 거리를 두는 새로운 공산주의 노선을 모색해야 했다. 또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이 일정 수준의 복지를 갖춘 선진 자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각국의 실정에 맞는 공산주의 이념이 필요했다. 20세기 후반 들어 계급 투쟁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회 계층이 등장하자, 농민, 여성, 청년, 지식인 등 비노동자 계층으로 지지 기반을 넓히고 기독교 민주당과 같은 중도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기독교 민주당과의 연립 정권 수립을 위한 '역사적 타협'을 주장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뿐 아니라 소련식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도 비판하는 새로운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것이 유럽공산주의로 구체화되었다.

유럽공산주의의 주요 내용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폭력 혁명 대신 의회민주주의에 기반한 합법적 방식으로 공산주의로 이행하며, 소련, 중국 등과 같은 일당제가 아닌 다당제 하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중산층 및 서민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정 수준의 사유재산 제도와 사기업을 허용하는 것 등이다. 사회관에 있어서는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 무신론을 기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그람시 사상의 영향을 받고 어느 정도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35] 또한 프랑스 5월 혁명의 영향으로 성장한 신좌익 세력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프라하의 봄과 특히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공산주의 진영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연설을 통해 소련의 침공을 비판하고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를 지지했다. 반면 포르투갈 공산당, 남아프리카 공산당, 미국 공산당 등은 소련의 입장을 지지했지만,[9]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스페인 공산당(PCE)은 침공을 강력히 비난했다.[9] 핀란드 공산당(SKP)[10], 스웨덴 좌익 공산당(VPK), 프랑스 공산당(PCF) 지도부는 소련의 개입에 반감을 표하면서도 타협을 모색했는데,[11] 특히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스 공산당(KKE)은 프라하의 봄 사태와 관련한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었고,[9] 두브체크를 지지하는 파벌은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KKE 내부파를 결성했다. KKE의 합법적 분파였던 연합 민주 좌파(EDA)는 점차 온건하고 민주적인 노선을 채택하여 유럽공산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12][13]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공산당(1991년까지)의 주요 인물이자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이탈리아 대통령


프랑스 공산당(PCF)을 포함한 일부 대중 정당과 다수의 소규모 정당들은 유럽공산주의에 반대하며 소련 붕괴 시점까지 소련 공산당과의 연대를 유지했지만, PCF 역시 1970년대 중후반에는 일시적으로 유럽공산주의 노선을 따르기도 했다. 반면, 대중적 지지 기반이 강했던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스페인 공산당(PCE)은 유럽공산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핀란드 공산당(SKP)은 1965년 지도부 교체를 통해 스탈린주의자 아이모 아알토넨에서 수정주의 성향의 아르네 사리넨으로 지도자가 바뀌었다. 핀란드 인민민주동맹 역시 개혁주의자 엘레 알레니우스가 지도부를 맡게 되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이 두 정당은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했고, 이로 인해 당내 개혁파(유럽공산주의 다수파)와 친소련 강경파(타이스토주의 소수파, 지도자 타이스토 시니살로)로 분열되었다. 1984년 강경파 조직들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이들은 핀란드 공산당(통일)(SKPy)을 창당했다. 1990년 이들 정당은 새로운 좌파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스페인 공산당(PCE)과 그 카탈루냐 지부인 카탈루냐 통일사회당은 스페인 내전 시기 인민전선 정책을 통해 자유주의적 현실 정치 노선을 추구한 경험이 있었다. PCE 지도자 산티아고 카리요는 유럽공산주의를 정의한 저서 Eurocomunismo y estado|유로코무니스모 이 에스타도es(''유로공산주의와 국가'')를 저술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종식 후 스페인의 민주주의 헌법 제정 과정(대표적으로 몬클로아 협정)에 참여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이미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모스크바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1975년 PCI와 PCE는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사회주의로의 행진"을 추구한다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197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대회에서 PCI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5,000명의 대표 앞에서 이탈리아의 특수성에 맞는 "다원적 체계"(sistema pluralisticoit) 하의 사회주의 건설 의지를 밝혔다.[21] 그는 기독교민주당과의 역사적 타협을 추진했으나, 1978년 알도 모로 납치 살해 사건으로 인해 이 구상은 큰 타격을 입었다.[22] 1975년 당 대회에서 베를링구에르는 '역사적 타협' 방안을 공식 제안하며, 이를 '민주주의적, 반파시즘 혁명의 제2단계'로 규정하고 여당인 기독교 민주당과의 제휴를 통한 정권 획득을 시도했다. 이는 PCI가 기존에 내세웠던 NATO 탈퇴 방침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1976년 총선거에서 34%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연립정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1991년 2월, PCI는 당명을 '좌익 민주당'으로 변경하고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그룹은 공산주의 재건당을 결성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1968년 12월 '선진 민주주의' 이념을 발표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한' 정치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프랑스 사회당과 '공동 정부 강령'을 체결하고,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단일 후보로 지지하여 당선에 근접했다. 그러나 1977년, 국유화 범위 확대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공동 강령 개정 협상이 결렬되었다. 1985년 당 대회에서는 기존 정책을 수정하여 '사회 변혁 자체를 직접 목표로 하는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이 외에도 아이슬란드의 인민동맹,[15][14] 산마리노 공산당,[15] 오스트리아 공산당, 벨기에 공산당, 영국 공산당,[15] 아일랜드 사회당(1971년),[16] 네덜란드 공산당 등이 다양한 정도로 유럽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했다.[25]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덴마크 공산당에서 분리된 덴마크 사회인민당 역시 유럽공산주의적 성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17][18] 벨기에 공산당은 1970년대에 유럽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었지만, 소련 모델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고 이 문제로 카리요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서유럽 강대국 블록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19] 당시 소련 모델을 거부했던 벨기에의 주요 급진 좌파 세력은 AMADA (네덜란드어: Alle Macht Aan De Arbeiders, 벨기에 노동자당의 전신)였지만, 이들은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마오쩌둥 사상적 관점에서 이를 비판했고, 유럽공산주의 역시 비난했다.[20]

일본 공산당(JCP)의 경우, 1955년 6월 전국협의회(六全協) 이후 채택된 자유와 민주주의 선언 등에서 나타난 노선이 유럽공산주의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유로-닛포-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JCP는 서유럽 공산당들(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이 NATO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을 비판하며 유럽공산주의와는 선을 긋는다고 주장해왔고, 강령에 비동맹 국가 수뇌 회의 가입을 명기하는 등 독자 노선을 강조한다.[32] 또한, 서유럽의 유럽공산주의 정당들이 당내 다양한 사상의 공존을 인정한 것과 달리, JCP는 냉전 이후에도 민주집중제를 유지하며 당내 파벌이나 다양한 의견의 공존을 당규로 금지하고 있다.[33] JCP 내에서 당내 다양한 흐름이나 분파의 존재를 주장한 학자 등은 비판받거나 제명, 탈당 조치되었다.[31][32][33]

유럽공산주의는 1970년대 초반 유럽 공산당들의 위기 극복에 기여하여 1970년대 후반 일부 국가에서 공산당 지지율 상승을 이끌었다.[36] 그러나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 이념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유럽공산주의 역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일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 등 일부 정당들의 이념적 기반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3. 4. 추가 발전



유럽공산주의는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PCI), 스페인 공산당(PCE)과 같이 대중적 지지 기반이 강했던 공산당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이미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을 지지하지 않는 등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는 독자 노선을 모색해왔다. 1975년 이탈리아 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은 "평화와 자유" 속에서 이루어질 "사회주의로의 행진"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197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Enrico Berlinguer)는 이탈리아의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 의지를 강조하며 '다원적 체제'(sistema pluralisticoit)를 언급했다.[21] 그는 기독교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하는 '역사적 타협(compromesso storico)' 노선을 추진했으나, 1978년 알도 모로 납치 및 살해 사건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22]

스페인 공산당의 지도자 산티아고 카리요(Santiago Carrillo)는 유로공산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책 Eurocomunismo y estadoes (''유로공산주의와 국가'')를 저술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이후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헌법 제정에 참여했다. 스페인 공산당과 그 카탈루냐 지부인 카탈루냐 통일사회당은 이미 스페인 내전 시기부터 인민전선 전략을 통해 자유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한 경험이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1970년대 중후반 잠시 유로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기도 했다. 1972년 프랑스 사회당과 '공동 정부 강령'을 체결하고 1974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단일 후보로 지지했으나, 1977년 국유화 범위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공동 강령은 파기되었다. 이후 프랑스 공산당은 다시 소련과의 연대 노선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핀란드에서는 핀란드 공산당(SKP) 내에서 노선 갈등이 심화되었다. 1965년 스탈린주의자 아이모 아알토넨(Aimo Aaltonen) 대신 수정주의 성향의 아르네 사리넨(Aarne Saarinen)이 지도부가 되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하면서 당은 사실상 개혁주의적 다수파(유로공산주의)와 친소련 강경파(타이스토주의, Taistoism)로 분열되었다. 양측의 갈등 끝에 1984년 다수파는 강경파 조직들을 축출했고, 강경파는 핀란드 공산당 (통일)(SKPy)을 창당하며 분당했다.

이 외에도 그리스 공산당 (국내파)(KKE Esoterikou), 아이슬란드의 인민동맹,[15][14] 산마리노 공산당,[15] 오스트리아 공산당, 벨기에 공산당, 영국 공산당,[15] 아일랜드 사회당,[16] 네덜란드 공산당[25] 등 여러 서유럽 공산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로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덴마크 사회인민당 역시 유로공산주의 정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17][18] 벨기에 공산당은 유로공산주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소련 모델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아 카리요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9]

유로공산주의는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이 각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맞춰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페미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회 운동의 영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침체 시대'라고 부른 소련 체제의 경직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소련의 영향력 감소, 그리고 각국 노동 운동의 발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77년 이탈리아의 베를링구에르, 스페인의 카리요, 프랑스의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가 마드리드에서 회동하여 유로공산주의의 기본 노선을 제시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유로공산주의의 영향은 서유럽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이스라엘 공산당(Maki), 호주 공산당, 멕시코 공산당 및 그 후신인 멕시코 통일사회당,[24]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운동[25] 등이 유로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정당들이다.[23]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유로공산주의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포기, 다당제 용인 등 일부 유사한 주장을 폈지만, 스스로를 유로공산주의와 구별한다. 특히 서유럽 공산당들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용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비동맹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32] 또한 당내 다양한 사상과 분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서유럽 유로공산주의 정당들과 달리, 일본 공산당은 민주집중제와 파벌 금지 원칙을 유지하며 당내 이견을 엄격히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왔다.[33][31]

3. 4. 1. 소련 해체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다양한 정파 이론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감을 증가시켰고, 이는 유럽공산주의 세력 역시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 등 일부 정당들은 여전히 유럽공산주의를 그들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은 유럽의 거의 모든 좌파 정당들을 수세적인 입장으로 만들었으며, 신자유주의 개혁이 시대적 요구로 부상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럽공산주의 정당들이 분열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좌파 민주당(Democrats of the Left)이나 스페인의 카탈루냐 녹색당 이니셔티브(Initiative for Catalonia Greens)와 같은 우파 성향의 분파는 사회민주주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이탈리아의 공산당 재건당(Communist Refoundation Party)이나 스페인 공산당(PCE), 카탈루냐 통합 사회주의당(Living Unified Socialist Party of Catalonia)과 같은 좌파 성향의 분파는 기존의 공산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공산당(KKE) 내부의 후계자들이었던 갱신 공산 생태 좌파(Renewing Communist Ecological Left, AKOA)와 그리스 좌파(Greek Left, EAR)가 에게해 민주 좌파당(EDA)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마놀리스 글레조스(Manolis Glezos)를 포함한 다른 좌파 단체 및 정치인들과 함께 시나스피스모스를 결성하기도 했다.

2017년, 스페인 공산당은 명목상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복귀하였다.[26]

4. 특징



유럽공산주의는 기존의 소련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을 가진다. 가장 큰 특징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폭력 혁명이 아닌 의회민주주의에 기반한 합법적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본 점이다. 이는 소련, 몽골, 중국, 베트남일당제 국가와 달리 다당제 체제 하에서의 공산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것으로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완전한 생산수단의 국유화 대신, 중산층 및 서민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 제도와 사기업 운영을 허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유물사관변증법적 유물론, 무신론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보다 그람시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문화적 헤게모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정 수준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35] 또한 프랑스 5월 혁명 이후 부상한 신좌익 세력의 다양한 사회적 요구(여성, 청년, 소수자 문제 등)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노동자 중심 계급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 계층으로 지지 기반을 넓히려 시도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냉전 시기 소련의 전체주의적 경향과 거리를 두고 서유럽의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활동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선 모색의 결과였다.

5. 비판

유로공산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비판가들은 유로공산주의자들이 소련과의 관계를 충분히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당폴란드의 솔리달노시치 운동 진압 이후인 1981년에 이르러서야 소련과의 결별을 공식화했다. 이는 소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존 당원과 지지자들의 이탈을 우려했거나, 강대국인 소련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는 현실정치적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

둘째, 유로공산주의 정당들이 뚜렷하고 구별되는 전략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비판도 있다.[27] 이들은 자신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와도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 두 흐름 중 하나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로공산주의는 명확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으며, 독자적인 사상 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트로츠키주의적 관점에서는 어니스트 만델이 ''스타린주의에서 유로공산주의까지: '일국 사회주의'의 쓴 열매''에서 유로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유로공산주의가 1924년 소련세계혁명 목표를 포기하고 자국 발전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 시각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당의 유로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국제주의를 포기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간주된다.

반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알바니아엔베르 호자가 ''유로공산주의는 반공산주의이다''[28]라는 저작을 통해 유로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유로공산주의가 니키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호자는 흐루쇼프가 부르주아지와의 투쟁 대신 화해를 추구한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소련이 팔미로 톨리아티의 다중 중심주의 이론을 명확히 거부하지 않아 여러 공산당들이 온건 노선을 채택하고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한편, 미국의 헨리 키신저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난 서유럽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집권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티토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지 않지만, 그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친다"고 언급하며, 서유럽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할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축된 국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29] 이는 냉전 시대 미국의 패권적 시각을 반영하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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