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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대한제국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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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민선은 1857년 안산에서 태어나 1938년 사망한 대한제국의 관리이다. 그는 1895년 인천부 주사를 시작으로 인천감리서 주사, 외부 주사, 인천항 서기장 등을 역임했다. 1906년에는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도 기여했으며, 이후 양조장 운영,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도평의회 의원 후보 등으로 활동했다.

2. 생애

1857년 10월 20일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다.[1] 대한제국 시기 관료로 활동하며 1895년 인천부 주사[1][2], 1896년1897년 인천감리서 주사[5][11] 등을 역임했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10]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교육 사업에 힘써, 1906년 사재를 털어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에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으로서 학교 운영에 헌신했다.[18][20][26] 이는 당시 신학문 보급과 민족 교육에 기여한 활동으로 평가된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초지보통학교 운영에 전념하는 한편[26][27][28], 1910년 양조장을 운영하고[29], 1919년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취체역을 맡는[31][32] 등 경제 활동에도 관여했다. 또한 1914년 조선총독부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으며[30], 1920년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33]하고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 창립에 참여하는[36]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1938년 7월 24일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1857년 10월 20일 경기도 안산군 와리면 초지리(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서 태어났다.[1] 생부는 진사 이재성(李在星)이고 생모는 해주 오씨(海州 吳氏)로 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이다.[1] 생모 해주 오씨는 영의정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의 6대손녀였다.[1] 그는 아들이 없던 삼촌 이재응(李在應)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2]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李商雨)의 7대손이다.[1] 할아버지는 하양, 지평, 영천, 고양군수와 돈녕부 판관 등을 역임한 분서 이봉녕(李鳳寧)이고,[1] 증조부는 1811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대마도에 다녀온 태화 이현상(李顯相)이다.[1] 여섯째 삼촌은 1877년 문과에 급제한 이재명(李在明)이다.[1]

생부 이재성과 양아버지이자 숙부인 이재응 형제는 한성부 종로 세심대에서 안산군 와리면 초지리로 이주해왔다.[1] 이후 이민선 일가는 초지동의 원초지, 백중부락, 가나골, 갯머리부락 등지에 정착하였다.[1] 또한 안산시 초지동 갯머리부락에는 그의 숙부 이재긍(李在兢)의 손자 이원협(李源協), 원직(源直)도 와서 정착했다.[1] 그가 인천부 주사로 있을 때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로 부임했던 운초 이재정(李在正)은 그의 13촌 아저씨뻘이다.[1]

건양~광무 연간에 평리원 검사, 판사를 역임했고, 한일 합방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개업 변호사로 활동한 이휘선은 그의 사촌 동생이었다.[3]

양아버지 이재응은 첫 부인 연일 정씨(정원달(鄭源達)의 딸)와 두 번째 부인 동래 정씨(정광신(匡臣)의 딸)에게서 자녀가 없었고, 세 번째 부인 여흥 민씨(민상혁(閔常火+赫)의 딸)에게서는 딸만 두었기에 이민선을 양자로 들였다.[1]

5대조 이성석 대에 포천군 일동면 기산리에서 한성부 북부로 이주했고, 고조부 이한운이 1795년경 한성부 종로 세심대로 다시 이주했다.[1] 이후 생부 이재성, 양부 이재응 형제가 안산군 초지리로 이주하였다.[1] 1979년 무렵 안산에 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자손들은 초지동 원초지마을, 백중, 가나골, 갯머리마을 등에 거주하고 있었다.[1]

2. 2. 관직 생활

1895년 7월 30일, 인천부윤의 추천으로 정재덕, 최돈중과 함께 인천부 주사(主事) 후보로 외무부에 보고되어 승인을 받았다. 같은 날 정재덕과 함께 판임관 7등의 인천부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최돈중은 판임관 8등의 주사가 되었다.[1][2]

1896년 8월 20일, 새로 부임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 이재정의 건의로 인천감리서 주사 임명 승인을 받았다.[3][4] 8월 21일 판임관 6등의 인천감리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5], 8월 25일 스스로 사직(의원면관)하였다.[6] 같은 날(1896년 8월 25일) 혜릉 참봉에도 임명되었다.[9]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897년 1월 15일독립협회 보조금 납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1원을 기탁한 기록이 있다.[10]

1897년 9월 13일, 판임관 5등의 인천감리서 주사로 다시 임명되었다.[11] 1897년 9월, 인천감리사 이재정이 교체되어 서울로 올라가자 임시로 인천감리 사무를 대리(서리)하였다.[12] 그러나 그가 집안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부하 관원인 김창건(金昌鍵)이 문서를 위조하여 김홍규(金泓圭)에게 지계(地契)를 발급했고, 김홍규가 이 토지를 일본인에게 불법으로 매각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12]

1897년 10월 1일 인천감리서 주사직을 스스로 사직(의원면직)하였다.[13][14] 승정원일기 1897년 10월 4일자 기록에도 의원면관 기록이 있으나[15][16], 실제 처리가 지연되어 10월 6일 다시 사직 신청을 하여 최종적으로 윤허를 받았다. 이는 10월 7일독립신문의 10월 6일부 의원면관자 명단에서도 확인된다.[17]

이후 외부(外務) 주사 겸 인천항 서기장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0년에 발간된 족보에 해당 내용이 있으나, 정확히 언제 외부 주사를 역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 3. 초지보통학교 설립과 운영

1906년(광무 10) 안산군 군주사로 재직하던 시기부터 안산 초지보통학교 설립에 관여하였다.[18] 1906년 5월에는 이미 전직 주사 신분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교사를 지을 자재와 인부를 구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학교 설립 과정에서 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당시 안산군수 이석재(李奭宰)의 도움이 컸다. 이석재는 1907년 9월 19일10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정 경리원에 보고서를 올려 이민선을 안산군장용영, 훈련원 소유의 둔전(屯田)과 역참 소유의 역둔토(驛屯土) 마름으로 추천하고, 그 마름으로서 받는 삯(소작료)으로 학교 부지 대금을 변제할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학교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06년 4월 15일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개교하였다.[20] 개교 시점은 한때 1907년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1909년 4월 15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창립 3주년 기념식, 같은 해 6월 15일 자에 개교 3주년 기념식이 보도되었고, 1908년 8월 30일 1학기 시험 관련 보도에 3학년 학생이 언급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실제 개교는 1906년으로 확인된다.

학교에는 어학과(語學科, 국문학과에 해당)와 한문학과(漢文科)를 두었으며, 소학부와 고등부(고등학교-전문학교 과정에 해당) 과정을 설치했다. 어학과 교사로는 시흥군 공립보통학교 부교원(副敎員)이던 이교철(李敎哲)을 초빙하여 겸직하게 했고, 한문과 교사로는 박제혁(朴齊赫)을 초빙했다.[21] 설립 당시 학생 수는 40~50명 정도였다.[21] 학교에서는 어학, 한문 외에도 신학문, 산술, 역사,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민선은 학교 설립자이자 교감으로서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고, 교장으로는 군수 이석재를 추대했다. 이석재는 학교 운영을 위한 기본금 모금 계획을 세워 지원하기도 했다.[21] 이민선은 교사 초빙에도 힘써 조형옥(趙樓玉), 유철수(劉敵洙) 등을 교사로 영입했다.[19]

학교 운영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8년 8월 30일에는 1학기 시험을 치렀는데, 그 결과가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시험에서는 성적에 따라 1, 2등은 우등(優等), 시험 통과자는 급제(及第)로 칭했다.[22]

학년구분학생 명단
3학년장원 (3명)허춘만(許春萬), 이경이(李璟伊) 등
급제 (6명)김수안(金壽安) 등
2학년우등김남석(金男錫) 등
급제 (9명)민병남(閔丙南) 등
1학년우등 (2명)이홍근(李弘根), 조평식(趙平植) 등
급제 (13명)민희준(閔희俊) 등



시험 후 우수 학생들에게는 공책과 필묵 등을 상품으로 수여했으며, 같은 해 11월 30일에는 졸업식을 주관하여 거행했다. 초지보통학교의 이러한 활동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당시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1909년 5월 15일에는 개교 3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 행사에는 교감 이민선이 직접 학교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교사 조형옥, 유철수와 내빈 정규석 등이 축사와 격려사를 했으며, 학생 대표 김종필이 답사를 했다. 18명의 학생들은 체조와 창가를 선보였고, 600~800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언론의 취재도 이어졌다.[19][24][25]

이민선은 학교 설립 후 3년 동안 모든 경비를 혼자서 부담하며 학교 운영에 헌신했다.[26][27][28] 이후 군수 이석재가 안산군수를 그만둔 뒤에도 홀로 초지보통학교를 계속 운영해 나갔다.

한편, 이민선은 초지보통학교 운영 외에도 1908년 공립안산보통학교 기성회에 참여하여 이성의(李聖儀)와 함께 공동 재무서장(財務署長)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4월 30일 공립안산보통학교 보조인원 낙성연(補助人員 落成宴)에 참석하여 10원을 기탁하기도 했다.[23]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비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2. 4. 생애 후반

한일 합방 이후 그는 초지보통학교 운영에 전념하였다.[26][27][28] 초지보통학교의 폐교 시점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사립학교령 적용 및 인허가 취소를 단행할 때 폐교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융희 4) 1월 17일에는 탁주 제조소 면허를 얻어,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였다.[29] 그러나 192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주류 제조소 면허 인허가를 취소당했다.[29]

1914년 조선총독부 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로부터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臨時委員)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30] 1919년 6월 25일 부산에서 설립 계획 중이던 제약회사 설립에 참여하였으며[31], 이 회사는 후에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로 정해졌다.[32] 그는 조희정(趙熙正), 남정직(南延稷), 이원황(李源璜)과 함께 취체역에 선임되었고, 이중혁(李重赫)이 감사역으로 선출되었다.[31][32]

1920년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 선거에 시흥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그해 12월 17일 시흥군청 회의실에서 열린 예비후보자 선출 투표에서 10표를 얻어 3위로 낙선했다.[33][34] 당시 도평의회 의원 최종 후보자는 2명만 선발되었다.[34]

1928년 경성부 와룡동으로 이주하였다. 그해 광화문에 사는 류범규(劉範奎, 당시 27세)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류범규는 모 변호사 사무소 사무원과 공모하여 광화문우체국장의 소인이 찍힌 가짜 통장을 만들어, 통장에 300JPY이 예금되어 있으나 금요일에 인출할 수 있다고 속여 300JPY을 빌려 갔다.[35] 이민선은 후에 통장이 위조된 것임을 알고 종로경찰서에 고소하여 류범규는 문서 위조 혐의로 체포되었다.[35]

1931년 11월 15일 경성부 도염동 대성원에서 단군신전봉찬회 창립에 참여하여 이사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36]

1938년 7월 24일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생부 이재성(李在星)과 생모 해주 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숙부 이재응(李在應)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생모 해주오씨는 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이며, 영의정 오윤겸(楸灘 吳允謙)의 6대손녀이다.

숙종 대의 문신 이상우(李商雨)의 7대손으로, 할아버지 이봉녕(李鳳寧)은 군수와 돈녕부 판관을 지냈고, 증조부 이현상(李顯相)은 1811년 일본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대마도를 다녀왔다. 여섯째 삼촌은 1877년 문과에 급제한 이재명이다. 생부 이재성과 양부 이재응 형제는 한성부 종로 세심대에서 경기도 안산군 와리면 초지리(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인천부 주사로 재직할 당시 인천부윤 겸 감리였던 이재정은 그의 13촌 아저씨뻘이다. 사촌 동생 이휘선은 평리원 검사 및 판사를 지냈고, 한일 합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개업 변호사로 활동했다.

양아버지 이재응은 세 부인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이민선을 양자로 들였다. 양어머니 여흥 민씨에게서 태어난 딸들은 각각 성규영(成奎永), 서원순(徐鵷淳), 박영진(朴永鎭)에게 시집갔다.

이민선은 평산 신씨 신학조(申學朝)의 딸과 경주 배씨 배영선(裵永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원흥은 초명이 승옥(承鈺)이었으며, 이종응(李鍾應)의 차녀와 혼인하였다. 사위 이천응은 선조의 왕자 신성군의 후손으로, 여러 회사를 경영한 기업인이었다. 외손자 중 이재설대한민국 정부에서 농림부 차관을 지냈다.

'''이민선(李敏善)의 가계'''
항렬관계성명생몰년비고
7대조이상우(李商雨)1648년 ~ 1740년숙종대 문신
증조부이현상(李顯相)1770년 ~ 1822년1811년 조선통신사 제술관
할아버지이봉녕(李鳳寧)1793년 ~ 1871년군수, 돈녕부 판관 역임
아버지생부이재성(李在星)1823년 ~ 1867년진사
어머니생모해주 오씨(海州吳氏)1819년 ~ 1879년오언용(吳彦鏞)의 딸, 오윤겸의 6대손
아버지양부 (숙부)이재응(李在應)1812년 ~ 1878년이민선을 양자로 입양
어머니양모 (백모)연일 정씨(延日鄭氏)1811년 ~ 1839년정원달(鄭源達)의 딸, 정수기(鄭壽期)의 증손녀
어머니양모 (백모)동래 정씨(東萊鄭氏)1822년 ~ 1846년정광신(匡臣)의 딸
어머니양모 (백모)여흥 민씨(驪興閔氏)1827년 ~ 1900년민상혁(閔常赫)의 딸
숙부이재명(李在明)1830년 ~ 1891년1877년 문과 급제
숙부이재긍(李在兢)
13촌 아저씨이재정(李在正)1846년 ~ 1921년인천부윤, 인천감리
사촌 동생이휘선(李徽善)평리원 검사/판사, 변호사
본인이민선(李敏善)1857년 ~ 1930년
부인초배평산 신씨(平山申氏)1855년 ~ 1886년정삼품 신학조(申學朝)의 딸
아들장남이원흥(李源興)1880년 ~ 1950년초명 승옥(承鈺)
며느리전주 이씨(全州李氏)1879년 ~ 1903년이종응(李鍾應)의 딸
며느리진주 정씨(晉州鄭氏)주사 정재석(鄭載錫)의 딸
아들차남이원형(李源馨)당숙 이돈선(李敦善)에게 출계
부인계배경주 배씨(慶州裵氏)1865년 ~ 1938년배영선(裵永善)의 딸
아들삼남이원황(李源璜)1889년 ~ 1948년
며느리청주 한씨(淸州韓氏)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의 딸
아들사남이원용(李源用)1891년 ~ 1945년
아들오남이원경(李源璟)1896년 ~ ?자 경옥(景玉)
며느리영월 엄씨(寧越嚴氏)1896년 ~ ?엄도영(嚴道永)의 딸
아들육남이원종(李源琮)1905년 ~ 1956년
아들칠남이원영(李源瑛)1908년 ~ 1957년
며느리남양 홍씨(南陽洪氏)
며느리한양 조씨(漢陽趙氏)
이정원(李貞媛)기업인
사위이천응(李天應)1902년 ~ ?기업인, 신성군 후손
외손자이재학(李載學)
외손자이재설(李載卨)대한민국 농림부 차관 역임
외손자이재석(李載錫)국장 역임



사위 이천응. 선조의 왕자 신성군의 10대손으로, 기업인이며 이천자동차, 대광산업, 히카리자동차, 대광무역, 대륙상공 대표이사 사장, 강화양조의 중역 등을 역임했다.

4. 평가

이민선에 대한 평가는 대한제국 말기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한 긍정적 측면과 한일 합방 이후의 행적에 대한 비판적 측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으로는 안산시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초지보통학교를 사재를 들여 설립하고 운영하며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그는 학교 운영에 헌신하며 신학문 보급과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공립안산보통학교 건립 지원이나 국채보상운동 참여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한일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경기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활동이나 조선 귀족 및 지주가 참여한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취체역 참여 등은 친일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1920년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 선거 출마는 당시 식민 통치 체제 하의 제한적인 지방 자치 제도에 참여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종합적으로 이민선은 구한말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하지만, 일제 강점기 하에서의 일부 행적은 시대적 한계와 함께 비판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이민선은 1906년 4월 15일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개교하였다.[20] 이는 안산 지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중 하나로,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이민선이 청년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고 보도하며 그의 교육적 의지를 강조했다. 학교 설립 시점은 1907년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창립 및 개교 3주년 기념식 보도와 1908년 8월 30일자 신문에 1학기 시험 관련 기사에서 3학년이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1906년 개교가 확인되었다.

학교에는 어학과(국문학과)와 한문학과를 두었으며, 어학, 한문 외에도 신학문, 산술, 역사, 체조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이민선은 시흥군 공립보통학교 부교원 이교철을 어학과 교사로, 박제혁을 한문과 교사로 초빙하는 등[21] 우수한 교사진 확보에 힘썼다. 설립 초기 학생 수는 40~50명이었고[21],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다. 초기에는 안산군수 이석재(李奭宰)가 학교 운영 기본금 모금을 계획하며 지원하기도 했으나[21], 이후 이민선은 군수 이석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설립자이자 교감으로서 학교 운영 실무를 맡아 조형옥(趙樓玉), 유철수(劉敵洙) 등을 추가로 교사로 영입하며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1908년 8월 30일에는 1학기 시험을 실시하여 성적 우수자(우등)와 통과자(급제)를 나누어 발표하고 우수생에게 공책과 필묵 등을 상품으로 수여했으며, 이는 대한매일신보에 상세히 보도될 정도로[22] 당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30일에는 졸업식을 주관하였고, 1909년 5월에는 개교 3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 기념식에는 교사와 내빈의 연설, 학생 대표의 답사, 학생들의 체조 및 창가 공연 등이 있었으며, 약 800명의 관람객이 참여하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에서 취재할 정도로[24][25] 큰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민선은 학교 설립 후 3년 동안 제반 경비를 혼자서 부담하며[26][27][28]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 운영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그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을 보여주는 사례로, 당시 언론에서도 "열심교육"이라 칭하며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24][25]

교육 활동 외에도 이민선은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08년(융희 2)에는 공립안산보통학교 기성회에 참여하여 이성의(李聖儀)와 함께 공동 재무서장(財務署長)으로 활동하며 학교 건립을 지원했고, 4월 30일 낙성연에서는 10원을 기탁하기도 했다.[23]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비정기적으로 성금을 보내는 등[23] 국가적 현안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이민선은 개인의 재산을 들여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며 안산 지역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문 보급과 인재 양성에 힘쓰고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선각적인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4. 2. 부정적 평가

한일 합방 이후의 행적 중 일부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1910년 1월 17일 (탁주) 제조소 면허를 얻어 초지리에서 양조장을 운영했으나 192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면허가 취소되었고[29],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경기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臨時委員)으로 활동했으며[30], 1919년 6월 25일 부산에서 설립된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朝鮮農事改良株式會社)에 취체역으로 참여했다.[31][32] 이러한 활동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선총독부 산하 위원회 활동이나 조선 귀족 및 지주가 참여한 회사[32] 운영 등은 친일 행위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1920년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 선거에 시흥군 지역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것[33][34]은 당시 식민 통치 체제 하의 제한적인 지방 자치 제도에 참여하여 지역 유지로서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5. 기타


  • 그의 양어머니이자 숙모인 영일 정씨는 예조판서, 우참찬, 판돈녕부사를 지낸 정수기(鄭壽期)의 증손녀이다. 양어머니의 종조부로는 정우량, 정휘량이 있으며, 당숙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남편인 일성위 정치달이다.

  • 그의 양누이 중 한 명은 1909년 3월 10일에 사망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는 "安山郡瓦里面艸芝洞居 前主事李敏善氏妹弟 故徐大輔氏第貳子婦 陰正月別世"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에 사는 전 주사 이민선씨의 매제(사촌 여동생이자 양 여동생)인 고 서대보씨의 둘째 며느리가 음력 정월에 별세)라고 보도되었다.[38] 이에 따르면, 서원순의 부인 이씨는 그의 사촌 여동생이자 양 여동생이며, 서대보의 둘째 며느리였다.

  • 그의 숙부 이재긍은 효령대군 보의 14대손이다. 강성정 이견손(江城正 李堅孫)의 10대손인 생원 이용구(李龍九)의 딸과 혼인했다. 이재긍의 딸 중 한 명은 강성정의 11대손 이회선(李會善)에게 시집갔고, 다른 딸은 한산 이씨 이준규(李晙珪)에게 시집갔다.

  • 그의 손자 이정근(李定根)은 휘문중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3월 17일자 학교 합격자 명단 중 휘문중학교 합격자 명단에 그의 손자 이정근의 창씨명인 '羽溪定根'(우계 정근)이 기록되어 있다.[39]

참조

[1] 문서 내각에 인천부 주사 3명 임명 통보 1895-07-30
[2]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 관보 1895-08-02
[3] 문서 각사등록 1896-08-20
[4] 문서 仁川報牒 및 報告
[5]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 관보 1896-08-25
[6] 뉴스 관보 팔월 이십오일 독립신문 1896-08-27
[7] 문서 통첩 제45호 1897-09-13
[8] 문서 통첩 제45호 1897-09-13
[9] 뉴스 관보 팔월 이십오일 독립신문 1896-08-27
[10] 간행물 獨立協會補助金收入人名表 대조선독립협회회보 1897-01-15
[11] 간행물 敍任及辭令 조선 관보 1897-09-16
[12] 문서 인천항 토지 매매 관련 조사 1901-09-11
[13] 문서 통첩 제58호 1897-10-04
[14] 문서 통첩 58호 1897-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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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간행물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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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뉴스 普校試蹟 대한매일신보 1908-10-23
[23] 뉴스 公立安山郡普通學校補助人員落成宴時 황성신문 1908-04-30
[24] 뉴스 芝校禮式 대한매일신보 1909-05-16
[25] 뉴스 芝校禮式 황성신문 1909-04-27
[26] 간행물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5
[27] 서적 시흥시사 3:시흥의 근현대 시흥시사편찬위원회 2007
[28] 뉴스 잡보/학계 대한매일신보 1908-12-01
[29] 간행물 免許證無效 조선총독부 관보 1927-10-06
[30] 서적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14
[31] 서적 朝鮮事情 조선은행조사부 1995
[32] 서적 朝鮮事情 조선은행조사부 1995
[33] 뉴스 지방통신: 경기도 평의회원 每日申報 1920-12-17
[34] 문서 선거 결과
[35] 뉴스 郵便貯金通帳에 僞印찍어 金錢詐取 每日申報 1927-08-31
[36] 간행물 檀君神殿奉贊會創立總會 集會取締 狀況報告(通報) 京城 鍾路警察署長 1931-11-16
[37] 서적 朝鮮紳士大同譜 日韓印刷株式會社 1913
[38] 뉴스 안산군 와리면 초지동거 전주사 이민선씨 매제 대한매일신보 1909-03-10
[39] 뉴스 각 학교 합격자 발표 - 휘문중학교 매일신보 194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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