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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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휘선은 1865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법관, 변호사, 시조 시인, 서예가이다. 1895년 법부 서기로 시작하여 고등재판소 서기, 검사, 판사 등을 역임하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관련 재판과 동학 농민 운동 관련 재판에 참여했다. 1905년 김해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44년 사망했으며, 그의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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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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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휘선 |
원래 이름 | 이휘선 |
국가 | 대한제국 |
출생일 | 1865년 7월 4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중서 정선방 김만년계 승문동 91통 4호 |
사망일 | 1944년 9월 18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구 수은동 김만년계 부락 (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 |
본관 | 우계(羽溪)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별명 | 자(字)는 경오(景五), 호(號)는 학해(學海), 다른 이름은 이징선(李徵善) |
종교 | 유교(성리학) |
학력 | |
정당 | 무소속 |
가족 관계 | |
부모 | 이재명, 동래정씨 |
배우자 | 이정우(연안이씨) |
친척 | 조부 이봉녕, 사촌 형 이민선, 13촌 아저씨 이재정, 매부 이규재, 사위 박인화 |
경력 | |
주요 경력 | 법부 서기 법부 주사 고등재판소 검사 법부 검사 평리원 검사 한성부재판소 판사 평리원 판사 변호사 |
2. 약력
2. 1. 출생과 가계
이휘선은 1865년(고종 2) 7월 4일 한성부 중서 정선방(中署 貞善坊) 김만년계(金萬年契) 승문동(承文洞) 91통 4호(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에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한 이재명(李在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선조 때의 한의사 이희헌(李希憲)을 조상으로 하는 양반 가문이었다. 임진왜란 직후 허준이 선조의 명으로 의서를 편찬할 때 이희헌은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참여했다.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장사랑 정수홍의 딸이며 조선 중종 때의 정승 정광필의 후손이었다. 외증조부는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을 지낸 연뢰 정극순(鄭克淳)이다. 친정어머니는 해평 윤씨로 윤호동(尹灝東)의 딸이다.
이름은 휘선(徽善)이며, 당대에는 리휘션으로도 불렸다. 자(字)는 경오(景五), 호(號)는 학해(學海)이다.[1][2] 황성신문 1906년 8월 6일자 기사[3], 매일신보 1922년 12월 23일자[4] 등에는 이징선(李徵善)으로도 나타난다.
형제자매로는 연안 이씨 이규재에게 출가한 누이 1명이 족보에 전한다. 이규재는 참봉을 역임했으며, 월사 이정귀의 후손이다.
2. 2. 초기 활동
1869년부터 가학을 수학하고 사부학당에 입학하여 유생이 되었다.[5] 1882년 2월 8일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5] 1882년에는 두 번 진사 급제 자격을 받았다.[5] 1883년 2월 8일 고종이 관학 유생을 대상으로 한 응제시 중 부(賦)에서 초삼하(草三下)의 성적을 받았다.[5] 고종의 특명으로 다시 진사 방목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김형규의 청우일록에 의하면 1883년 2월 9일자 일기에 그는 진사로 선발되었다고 한다.[6] 그는 곧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과거 제도는 곧 폐지되었다. 1884년 8월 12일 고종이 중희당에서 시행한 과차(科次)에 응시[7], 8월 13일 입격하였다.[8]2. 3. 법관 활동
2. 3. 1. 법부 서기, 고등재판소 서기 임용
1895년(고종 32년) 법부 서기시보(書記試補)에 임용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 법부주사 서 판임관 8등(法部主事 敍 判任官八等)에 임용되었다.[12] 5월 고등재판소 서기에 임명되었다.1895년(고종 32년) 고등재판소 서기로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당시 법원서기로 박선(朴銑)과 친위대 부위 윤석우(尹錫禹) 재판 및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등에 대한 궐석재판 선고 공판에 참여하였다.[13] 그해 12월 30일 이주회 등의 궐석재판에 고등재판소 서기(書記)로 재판을 기록하였다.[14] 이후 을미사변 관련자들의 선고 공판에 검사시보로서 참여하였다.
2. 3. 2. 검사시보, 검사 임용 초기
1896년 9월 19일 고등재판소 검사시보(高等裁判所檢事試補)에 임명되었으며[17], 같은 날 고등재판소 검사시보 주임관 6등(高等裁判所檢事試補 奏任官 六等)에 임명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기간 중 불법으로 남의 무덤을 판 당진군 거주 김성원(金性元)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 이후 그해 11월 28일까지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 참여하였다.1896년 9월 22일 고등재판소 검사시보를 의원면직하였다.[18] 독립신문에도 보도되었으나 곧 복직했다. 10월 10일 이준용을 추대하려는 의혹을 받은 한성부 중부 큰 사동 사는 전 경무관 이세진의 공판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19]
그해 11월에는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부당하게 처리한 삭녕 군수 이정석(李貞錫)의 재판에 참여, 그달 14일 최종 선고까지 검사시보로 참여하였다.[20]
1896년(건양 원년) 12월 16일 법부 검사(法部檢事)로 승진[21], 법부 검사 주임관 6등(法部檢事 奏任官六等)에 임명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동년 12월 17일 법부 검사에서 고등재판소 검사(高等裁判所檢事)로 발령되었다.[22] 12월 19일 고등재판소 검사를 의원면관하였으나[23], 곧 다시 재임명됐다. 이후 1897년(건양 2년) 3월 10일까지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의 재판에 입회하였다. 6월 5일 제주도에 유배된 죄수 2명이 섬을 탈출한 일로, 체포된 유배지의 군수 대정 군수(大靜郡守) 채귀석(蔡龜錫)을 심문하였다.[24]
1897년 1월 30일 아관파천한 고종에게 환궁을 촉구하던 인사들의 재판 및 궐석재판에 검사로 입회하였다.[25]
3월 11일, 1895년 12월 27일 나타난 도적의 위협을 피해 김화군 피신했다가 이듬해 1월 10일 도적 퇴거 후 돌아온 충청북도 충주군 전 군수 한기욱의 직역 회피 재판에 검사로 입회했다.[26] 같은 날 한성 북서 삼청동에 사는 전 군수 피고 유진만이 1895년 낭천 군수 재직 중 도적이 들어와 돈과 쌀을 탈취해갈 때 본가로 피신한 것과, 이듬해 2월 춘천의 도적과 서신을 주고받은 일로 회부된 직역 천리 재판에 검사로 입회하였다.[27]
1897년 5월 1일 근무 중 살해된 천안 군수 김병숙의 일을 법부 검사국 신재영(申載永)에게 보고하였다.[28] 6월 22일 선희궁 이건 공사에 별감동에 임명됐다.[29] 7월 16일 고종의 명으로 연행된 경무청 순검 30명의 재판에 고등재판소 검사로 입회하였다.[30] 7월 23일 법부 대신 한규설에게 금구군 전 군수 조병식 사건과 관련 금광을 폐광한 것과, 금광에서 생산되는 금의 양이 한 냥 서 푼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31]
그 뒤 다시 법부 검사가 되었으며, 1897년(건양 2년) 9월 29일 치사 봉조하(致仕奉朝賀) 김재현(金在顯), 정1품 이호준(李鎬俊) 외 조정 전 관원이 고종에게 황제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다.[32] 1897년 10월 18일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 개수에 별단(別單)으로 참여한 공로로 시상, 6품으로 승진하였다.[33]
2. 3. 3. 판사, 검사 재직
이휘선은 법부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평리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실 관련 재판에도 참여하였다.2. 4. 김해군수 재임
1905년 2월 20일 외직인 경상남도 김해군수 주임관 1등으로 임명되었다.[101][102] 13명의 지방관과 동시에 인사 발령되었다.[103] 같은 해 3월 6일 참정대신 심상훈의 건의로 여비를 지급받고 경남 김해로 다시 부임했다.[104] 6월 2일 경기도 각지에 도적이 출몰하여 참정대신 심상훈의 건의로 경기도집포관에 임명되었다.[105] 얼마 뒤 다시 김해군수로 복직하여 도로 귀임했으며, 궐위 중인 경상남도 집포관을 겸직했다. 8월 9일 경상남도 각 지방관 인사고과에서 "嫺法律鍊吏治하야 禁賭技恒民産홈"을 이유로 상(上) 등급을 받았다.[106]1905년 10월 3일 일본인 마산포철도반장 서전만치(西田萬治)가 마산포~삼랑진 간에 군용철도 정차장 증수용지(增收用地)라며 김해군 관하 저진리(自進里)에서 신영리(新永里) 일대의 1만 6천령(零) 13평(坪)을 별지로 도면을 제시하자, 승인은 하되 바로 외부에 보고하였다.[107] 1906년 2월까지 창원 마산포에서 밀양 삼랑진까지 군용 철도신설부지에 해당되는 지역을 조사, 전답 총 2498두(斗) 8승락(升落), 민가는 37호, 무덤 15기의 동지역 단가, 가옥 이전비용, 무덤 이장비용을 지불하였다.[108] 1906년 2월 경상남도 지방관 인사고과에서 그는 朿吏則嚴戢盜也勤을 이유로 상(上) 등급을 받았다.[109][110]
1906년 5월 마산포철도 반장이 정거장과 선로용지 구역 내에 경작자가 있어 현재 보리 외에 경작을 일절 금하였으나, 농민의 사정이 어려움을 들어 사정을 봐줄 것을 청하여 그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111]
1906년 5월 15일 승종이품(陞從二品)되었다.[112] 같은 날 준원전 수리공사에 감동으로 참여한 공로로 종이품 가선대부로 승진, 중추원의관 칙임관 2등이 되었다.[113] 1905년 6월 2일 참정대신 심상훈이 경기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청을 올려, 바로 김해군수로 겸 경상남도 집포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1906년 김해에 신식 학교인 사립 가흥학교(私立駕興學校)가 개교하자, 그해 6월 25일 그는 해당지역 군수로써 학교 운영비로 50원을 기부하였다.[114]
2. 5. 퇴관
1906년 6월 29일 정부의 관보값 16량 5전 납부 요구에 관찰사 조민희에게 60전 5리를 편리상 가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가 정부에서 조민희에게 훈령을 내려 조사를 받게 됐다.[115] 이 일로 7월 26일 김해군 주민 지역 주민대표가 상경,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116]1906년 8월 2일 지방관 근무성적 평정에서 폄하(貶下)를 받아 면직되고[117],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보도에 의하면 본년도 춘하 인사등급 포폄으로 면관된 관원들과 함께 상경, 평리원에 가서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118][119][121] 평리원에 의하면 그는 재임시 소송 때 수뢰를 받은 일과 은결(隱結, 미등록 토지)를 감봉하여 보고했다는 것이 이유였다.[121] 8월 7일 격식 외로 돈을 거두어들임(格外民斂)을 이유로 1906년 8월 전최(殿最)에서 폄하(貶下)를 받아 면관된 것에 불복, 관찰사 조민희를 평리원에 기소했으나 상대편이 유세가(有勢家)라서 해 소장(該訴狀)이 유증되었다 한다.[122]
1906년 8월 21일 광주농상공은행의 창립 총회에 참가[123], 35전의 기탁금을 납부했다.[124] 동년 9월 29일 징계에서 사면받았다.[125]
2. 6. 개인 변호사 사무실 개업
1906년(광무 10년) 9월 경성부 중부 니동 102통 3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126]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노량진에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순국 지사 6인의 사당 건립에 50량을 기탁하였다.[126] 1907년(융희 원년) 10월 29일 종이품(從二品)이던 그는 대한제국 법부에 변호사 인가 승인을 청원하였다.[127] 1909년(융희 3)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本人이 諸般訴訟을 迅速處理함. 事務所 中部泥洞一百二統三戶前判事前檢事 李徽善"이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128][129] 같은 해 8월에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138] 1908년 2월 18일~2월 22일 사이에는 방승헌(方承憲)의 상에 문상하고 조의금 2환(圜)을 조의하였다.[139] 변호사 개업 이후의 소송 자료 중 1905년 5월 15일부터 1909년 12월 14일 기간 중 채권, 채무소송, 민사소송, 토지소송 등의 변호인, 대리인으로 재판에 참석한 판결문 몇 장이 후대에 전한다.[126] 1910년(융희 4) 10월 2일 한일 합방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경성부 중부 니동 102통 3호에 사무실을 열고 개인변호사로 활동했다.[140]2. 7.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 그는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였지만 이를 받지 않았다.[141] 1910년 11월 15일부터 서울시내 운니동에 변호사사무소를 열고 개업 변호사로 활동하였다.[141] 경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3년에는 경상남도 진주로 가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7월 16일에는 진주 사람 김용황이 동(洞)의 동유재산은 공유재산이라며 해당 지역 면장을 상대로 고소하였는데, 이때 그는 진주시내 개업 변호사로서 원고 김용황의 대리인으로 위임, 토지소유권확인 작업을 추진했다.[142]1914년 7월 22일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를 개업,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 등록 신청을 하였다.[144] 곧 본인 신청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변호사업 소속을 변경하였다.[144] 변호사사무소 개업 장소는 기록이 사라져 알 수 없다.
개업 변호사 활동 외에도 그는 시조 시인, 서예가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3년 4월 3일 난정계(蘭亭契)의 회원으로 가입, 난정기념회(蘭亭紀念會)에 도 참여관 최연덕(崔廷悳), 진주군수 한규복(韓圭復), 재판소 판사 노흥현(盧興鉉), 한동리(韓東履), 경남일보사 사주 장지연(張志淵), 매일신보 경남지국장 박정표(朴在均) 등과 각기 작품을 출품하였다.[143] 1922년 12월 23일 매일신보에 시 해인도중(海印途中)을 발표하였다.[145] 1922년 12월 25일 매일신보에 매하산인(梅下山人)의 시에 화답하여 숙해인사(宿海印寺)라는 시를 발표하였다.[146]
2. 8. 생애 후반
1926년에는 경남 거창지역의 도서관 설립 운동에 동참, 그해 6월 23일 거창군 청년회관에서 열린 거창군도서관설립기성회의 창립회원이자 기성회 평의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147] 도서관이 개관하자 이후 거창군립도서관 기성회 평의원으로 후원하였다. 1920년 이후의 행적은 상세하지 않다.1941년 이후에는 창씨개명하여 羽溪徽善, 하타니 키센일본어 혹은 羽溪徽善, 하타니 키요이일본어로 활동하였다.[148] 정확한 창씨개명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41년 이후에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44년 9월 18일 사망하였다. 사망원인은 미상이다. 9월 26일 부산지방검사국에서는 9월 18일 그의 사망으로 인하여 그를 부산지방검사국 변호사 명부에서 삭제한다고 관보에 공고하였다.[148]
3. 사후
그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신원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83-2번지 철곡(鐵谷)부락에 있으며, 이광식, 충장공 이복남, 송곡 이서우 일가 묘소의 오른쪽 기슭 우록 술좌지원(右麓戌座之原)에 부인 연안이씨 이정우와 합장되었다.[149][150] 묘소 인근에는 서울시립추모공원 및 이광식 묘역이 있다.
4. 기타
1906년 당시 그의 집 호적 및 당시 한성부 중서 정선방(후일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선동) 지역 주민의 호적대장 일부가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 6.25 전쟁의 화를 피해 보존, 2000년대까지 전해졌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 중인 '광무 6년(1900년) 한성부 중서 정선방 호적대장'에는 1900년(광무 6) 4월 한성부 판윤 박의병 명의로 발행된 그의 호적도 있다.
4. 1. 동학농민군 관련 재판 참여
이휘선은 1896년부터 1904년까지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들의 재판에 검사 또는 판사로 참여하였다. 1896년 9월 19일 고등재판소 검사시보 주임관 6등에 임명되었으며, 동학 농민 운동 기간 중 불법으로 남의 무덤을 판 당진군 거주 김성원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 10월 24일에는 동학군을 잡아서 교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총살한 전 전주부관찰사 조민희의 태형 집행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 11월 27일 고등재판소 검사시보로 상부에 보고 없이 형을 집행한 전 강계부관찰사 조승현의 태형 선고에 입회하였다.1896년 12월 16일 법부 검사, 12월 17일 법부 검사에서 고등재판소 검사로 임명된 이후에도 1897년 3월 10일까지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의 재판에 입회하였다.
1900년 4월 한성부 재판소 판사가 된 뒤 평리원 판사, 평리원 검사 등으로 전직하고, 여러번 평리원 검사에 임명되었다가 판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1904년 11월 28일까지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들 재판에 검사로 동학 농민군 관련 재판에 참여하거나 배석판사의 한 사람으로 동학 농민군 관련 재판 판결에 참여하였다.
4. 2. 황실 관련 재판에 참여
1895년(고종 32년) 고등재판소 서기로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당시 법원서기로 박선(朴銑)과 친위대 부위 윤석우(尹錫禹) 재판 및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궐석재판 선고 공판에 참여하였다.[151] 1899년 6월 8일 명성황후의 명복을 비는 치성을 드린다며 속리산에 갔다가 검문에 체포된 조동옥(趙東玉) 등 47명의 선고 공판에 배심판사로 참여했다. 1900년 5월 7일, 1894년의 이준용 역모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 및 1898년 황제양위 미수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안경수(安駉壽), 권형진(權瀅鎭) 등에게 교수형 판결을 내리는 데는 판사로 참여했다.[152]5. 가족 관계
증조부는 이현상(李顯相, 1770년 ~ 1822년)이다. 아버지는 이재명(李在明, 1830년 11월 20일 ~ 1891년 5월 14일)이고, 어머니는 동래정씨(1829년 12월 5일 ~ 1901년 10월 12일)로, 장사랑 정기홍(鄭基弘) 또는 정수홍(鄭壽弘)의 딸이자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의 7대손이다.
누이는 우계이씨이고, 매부는 이규재(李奎宰)로 연안이씨(延安李氏) 참봉(叅奉)을 지냈다. 이규재의 부친은 감역 이두익(李斗翼), 조부는 동돈녕 이항우(李恒愚), 증조부는 참판 이기수(李耆秀)이다. 누이 우계이씨에게는 이인승(李麟承)과 이운승(李運承)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부인은 이정우(李貞愚, 연안이씨(延安李氏), 1862년 12월 2일 ~ ?)로, 문과(文科) 이철수(李轍秀)의 딸이다. 이정우의 조부는 중추부사 이돈원(李敦源)이며, 월사 이정귀의 후손이다.
장인어른은 이철수(李轍秀)이고, 장모는 경주이씨로 이철기(李喆基)의 딸이다. 처조부는 이돈원(李敦源)이다.
외조부는 정기홍(鄭基弘) 또는 정수홍(鄭壽弘)이다. 외고조부는 정극순(鄭克淳, 호는 연뢰(淵雷), 1700년 - 1753년)이다.
아들 이원철(李源喆, 1883년 2월 28일 ~ 1952년 4월 18일)의 처는 오자영(吳慈泳, 해주오씨, 1882년 3월 14일 ~ ?)이다. 오자영은 감찰 오응선(吳應善)의 딸로, 조부는 정묵(定黙), 증조부는 증참판 익수(翼秀), 외조부는 동돈녕 김정묵(金貞黙)이며, 추탄 오윤겸의 10대손이다. 이원철과 오자영 사이에서는 이경근(李敬根, 1904년 4월 24일 ~ 1950년 5월 24일)과 이장근(李莊根, 1916년 7월 9일 ~ ?) 형제가 태어났다.
둘째 아들 이원혁(李源赫, 1889년 10월 15일 ~ 1914년 2월 25일)의 초명은 원혁(源爀)이다. 처는 신인성(愼仁晟, 거창신씨, 1887년 7월 29일 ~ 1976년 11월 22일)으로 신종익(愼宗翊)의 딸이다. 신인성의 조부는 병덕, 증조부는 생원 봉구이며 좌상 익창부원군(左相益昌府院君) 신수근의 후손이다. 이원혁과 신인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정근(李正根, 1925년 ~ 2002년)은 한국전력 차장을 역임하였다. 이정근은 숙부 이원혁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셋째 아들 이원각(李源珏, 1895년 10월 6일 ~ ?)의 초명은 원희(源囍)이다. 처는 청풍김씨(1894년 11월 5일 ~ ?)로, 김규찬(金奎燦)의 딸이며, 청흥군 김득성(金得聲)의 후손이다.
딸은 우계이씨이고, 사위는 박인화(朴仁和)이다. 박인화는 효릉참봉과 능령을 역임했으며, 밀양인으로 종2품 박준설(朴準卨)의 아들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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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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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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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승정원일기
중희당에서 과차할 때 행 도승지 박정양 등이 입시하였다
1884-08-12
[8]
승정원일기
중희당에서 입격한 유생을 소견할 때 동부승지 김문현 등이 입시하였다
1884-08-13
[9]
승정원일기
1888-05-12
[10]
승정원일기
추도기의 강에서 수석을 한 유학 황치호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
1887-08-23
[11]
승정원일기
진사 김병식 등에게 별시 문과 전시에 직부하게 할 것 등을 청하는 예조의 계
1888-05-12
[12]
승정원일기
칙령으로 내각 총리대신 1등에 김홍집을 임용하였다
1895-04-01
[13]
관보
1895-11-14
[14]
외교문서
10월 8일 事變(王妃弑害事件)의 犯人處分 件
1895-12-30
[15]
신문기사
논셜
독립신문
1896-07-21
[16]
신문기사
논셜
독립신문
1896-07-23
[17]
승정원일기
한성부재판소 판사에 홍종억을 임용하였다
1896-08-13
[18]
신문기사
관보
독립신문
1896-09-24
[19]
신문기사
고등 재판쇼 션고셔 (연쇽)
독립신문
1896-10-17
[20]
문서
法部來文 제2책
1896-11-14
[21]
승정원일기
법부 검사에 이휘선을 임e용하였다
1896-11-12
[22]
승정원일기
고등재판소 검사에 이휘선을 임명하였다
1896-11-13
[23]
신문기사
관보
독립신문
1896-12-22
[24]
승정원일기
대정 군수 채귀석을 잡아다 조사한 결과에 대해 보고하는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한규설의 계
1897-05-06
[25]
신문기사
란당 괴슈 리창열과 김락영은 도쥬
독립신문
1897-02-11
[26]
신문기사
관보
독립신문
1897-03-20
[27]
신문기사
관보 삼월 십팔일 판결 션고셔 한셩 북셔 삼쳥동,관보 삼월 십팔일 판결선고서
독립신문
1897-03-20
[28]
보고서
김동희 사건과 관련된 충청북도 보고서 이송
1897-05-01
[29]
신문기사
관보 륙월 이십이일
독립신문
1897-06-24
[30]
신문기사
관보 칠월 십구일 (젼호연쇽)
독립신문
1897-07-27
[31]
신문기사
잡보
독립신문
1897-08-05
[32]
승정원일기
타당한 여론에 따라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치사 봉조하 김재현 등의 상소
1897-09-04
[33]
승정원일기
선희궁을 옮겨 지을 때의 전관인 궁내부 대신 이재순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897-09-13
[34]
신문기사
관보 십일월 삼일
독립신문
1897-11-06
[35]
신문기사
법부 검사 리휘션씨는
독립신문
1897-11-09
[36]
신문기사
관보 이월 이일
독립신문
1898-02-03
[37]
신문기사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898-11-19
[38]
신문기사
관보 호외 十一월 十七일
독립신문
1898-11-19
[39]
신문기사
학도 쳥원
독립신문
1898-11-21
[40]
신문기사
법관 샹환
독립신문
1899-04-27
[41]
신문기사
관보 사월 이십 구일
독립신문
1899-05-01
[42]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05-01
[43]
신문기사
관보대기 사월이십구일
제국신문
1899-05-01
[44]
승정원일기
법부 법률기초위원장에 법부 협판 이근호를 임명하였다
1899-05-22
[45]
신문기사
관보 五월 二十五일
독립신문
1899-05-26
[46]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05-26
[47]
승정원일기
법부 사리국장에 민영선을 임용하였다.
1899-06-05
[48]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06-10
[49]
신문기사
관보 六월 九일
독립신문
1899-06-12
[50]
승정원일기
궁내부 참서관 진영렴 등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1899-07-25
[51]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07-29
[52]
신문기사
판검샹환
독립신문
1899-07-27
[53]
신문기사
관보 七월 二十八일
독립신문
1899-07-29
[54]
승정원일기
법부 법률기초위원에서 평리원 판사 이휘선을 해임하였다
1899-08-09
[55]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08-12
[56]
신문기사
관보 八월 十一일
독립신문
1899-08-12
[57]
고종실록
수릉과 홍릉에 친제 때 종헌관 이하와 황태자가 홍릉에서 [[작헌례]]를 거행할 때 배종한 관리들에게 시상하다
1899-10-21
[58]
승정원일기
홍릉 제조 이승응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899-10-21
[59]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899-12-02
[60]
승정원일기
장종대왕을 경모전에 이봉할 때의 각 차비관의 별단에 대해, 신주출납 대축인 탁지부 재무관 김병흡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899-11-25
[61]
신문기사
司法
황성신문
1900-05-31
[62]
승정원일기
한성부재판소 검사시보에 6품 유학근을 임용하였다
1900-07-26
[63]
신문기사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00-08-02
[6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8-09-27
[65]
고종실록
민영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901-03-15
[66]
승정원일기
형법교정관에 민영적 등을 임명하였다
1900-12-17
[67]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901-03-21
[68]
신문기사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901-03-21
[69]
승정원일기
평리원 검사에 평리원 판사 이휘선을 제수하라는 조령
1901-03-15
[70]
간행물
通牒 第五十五號 법부대신이 받은 이휘선의 평리원검사 임명 조칙 및 서임안과 受勅일자 등 통보
法部主事 金昌炯
1901-03-16
[71]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1월 26일(계사, 양력 3월 16일)자 15번째기사, 겸임 특별법원검사에 평리원 검사 이휘선 등을 임용하였다
1901-01-26
[72]
뉴스
司法
황성신문
1901-04-01
[73]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3월 1일(정묘, 양력 4월 19일)자 14번째기사, 특별법원판사에서 중추원 의관 윤필 등을 해임하였다
1901-03-01
[74]
고종실록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5월 31일 양력 5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이재곤이 창릉의 화재에 대하여 아뢰다
1901-05-31
[75]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4월 14일(기유, 양력 5월 31일)자 8번째기사, 창릉 화재를 밝히지 못한 검사 이휘선에게 2개월 감봉하는 형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법부대신서리 법부협판 이재곤의 계
1901-04-14
[76]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6월 3일(정유, 양력 7월 18일)자 4번째기사, 중추원 의관에 평리원 검사 이휘선을 제수하라는 조령
1901-06-03
[77]
뉴스
轉任議官
황성신문
1901-07-20
[78]
고종실록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7월 18일 양력 1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조병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901-07-18
[79]
뉴스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901-07-23
[80]
광고
廣告
황성신문
1902-12-05
[81]
뉴스
永平一東面下巨伊長牙里居
황성신문
1902-12-06
[82]
뉴스
永平一東面下巨伊長牙里居童蒙李錦童母性本悖戾
황성신문
1902-12-08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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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1902-12-05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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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1902-12-06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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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신문
1902-12-08
[86]
광고
廣告
황성신문
1902-12-05
[87]
뉴스
永平一東面下巨伊長牙里居
황성신문
1902-12-06
[88]
뉴스
永平一東面下巨伊長牙里居童蒙李錦童母性本悖戾
황성신문
1902-12-08
[89]
고종실록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10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이휘선을 평리원 검사에 임명하다
1904-10-06
[90]
뉴스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04-10-11
[91]
관보
관보
대한매일신보
1904-10-14
[92]
뉴스
검사파송
대한매일신보
1904-10-13
[93]
뉴스
檢事派送
황성신문
1904-10-13
[94]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41년 갑진(1904) 9월 6일(신사, 양력 10월 14일)자 9번째기사, 형법교정관에서 전 법부 협판 조민희 등을 해임하였다
1904-09-06
[95]
뉴스
서임급사령
대한매일신보
1904-10-15
[96]
뉴스
醫官自現
제국신문
1904-11-16
[97]
뉴스
一進告發
황성신문
1905-01-12
[98]
뉴스
宮廷錄事
황성신문
1905-02-20
[99]
뉴스
法官遞任
황성신문
1905-02-20
[100]
뉴스
검사소체
대한매일신보
1905-02-21
[101]
뉴스
敍任及辭令
황성신문
1905-02-24
[102]
뉴스
셔임급사령
대한매일신보
1905-02-25
[103]
뉴스
郡守擇差
황성신문
1905-02-22
[104]
문서
照會 새로 임명된 戢捕官의 인장과 여비 처리문제는 내부에서 처리해 줄 것
1905-06-03
[105]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을사(1905) 4월 30일(임신, 양력 6월 2일)자 11번째기사, 광주 부윤 윤창근 등을 경기 집포관에 차하할 것을 청하는 참정대신 심상훈의 계
1905-04-30
[106]
뉴스
官廳事項
황성신문
1905-08-09
[107]
뉴스
金海報告
황성신문
1905-10-03
[108]
뉴스
三費請撥
대한매일신보
1906-02-01
[109]
뉴스
慶尙南道管下郡守治蹟
황성신문
1906-02-24
[110]
뉴스
慶尙南道管下郡守治蹟
대한매일신보
1906-03-01
[111]
뉴스
徒困者民
황성신문
1906-05-03
[112]
뉴스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06-05-19
[113]
역사기록
종2품 민영선 등에게 가자하도록 하다
1906-05-14
[114]
뉴스
金海郡 私立駕興學校補助 諸氏如左
황성신문
1906-06-25
[115]
뉴스
加捧嚴査
대한매일신보
1906-06-29
[116]
뉴스
金海郡守李徽善氏가 莅任以後에 愛民如傷하고
황성신문
1906-07-26
[117]
역사기록
석성 군수 오근선 등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1906-06-13
[118]
뉴스
敍任及辭令
대한매일신보
1906-08-08
[119]
뉴스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06-08-08
[120]
뉴스
官廳事項
황성신문
1906-08-08
[121]
뉴스
拘拿停寢
황성신문
1906-08-06
[122]
뉴스
訴狀無効
대한매일신보
1906-08-07
[123]
뉴스
光州農商工銀行總會時
황성신문
1906-08-21
[124]
뉴스
文明錄
황성신문
1906-08-21
[125]
역사기록
전 송화 군수 장기흡 등에 대해 징계를 사면하였다
1906-08-12
[126]
뉴스
殉忠院에 義연金 人員과 金額을
대한매일신보
1906-10-14
[127]
뉴스
辯護請願
황성신문
1907-10-29
[128]
뉴스
辯護士
대한매일신보
1909-04-08
[129]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08
[130]
뉴스
辯護士
대한매일신보
1909-04-09
[131]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09
[132]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10
[133]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11
[134]
뉴스
辯護士
대한매일신보
1909-04-13
[135]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13
[136]
뉴스
辯護士
대한매일신보
1909-04-14
[137]
뉴스
辯護士
대한매일신보
1909-04-15
[138]
서적
허헌
동아일보
1995
[139]
광고
廣告
황성신문
1908-02-27
[140]
뉴스
辯護士
황성신문
1909-04-10
[141]
간행물
辯護士名簿登錄
한국 통감부 공보
1910-04-02
[142]
뉴스
慶南통신: 金溶橫 又訴周旋
매일신보
1913-07-16
[143]
뉴스
蘭亭契의 기념회
매일신보사
1913-04-13
[144]
간행물
"<彙報>司法·警察·監獄, 辯護士名簿登錄換"
조선총독부 관보
1914-07-31
[145]
뉴스
文苑
매일신보
1922-12-23
[146]
뉴스
文苑
매일신보
1922-12-25
[147]
뉴스
居昌에서 圖書舘 期成會
조선일보
1929-06-27
[148]
간행물
司法·警察及監獄
조선총독부 관보
1944-09-26
[149]
간행물
學事
대한제국 관보
1905-07-12
[150]
간행물
彙報
대한제국 관보
1909-05-19
[151]
간행물
관보
1895-11-14
[152]
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통감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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