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망
1. 개요
이태망은 1653년에 태어나 1728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이복남의 손자이자 이세구의 양자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주부, 도총부 도사 등을 역임했다. 경신환국 이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창원부사, 혜산첨사, 명천부사, 태안군수, 남원영장, 삭주부사, 정주목사, 백령첨사, 부산첨사, 영변대도호부사 등을 거쳐 경상좌병사, 전라병마절도사,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719년 충청병사 재직 시 호랑이 사냥 포수에게 상을 주고, 청주 상당성을 중수했다. 1720년에는 청주성 부지를 승려에게 매각하여 청주 구룡사 건립에 영향을 미쳤다. 경상우병사 재직 중 진주 촉석루를 중수했으나, 사대부 묘역의 나무를 베어오고 승려를 동원한 일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사후 충민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이름 | 이태망 |
|---|---|
| 한자 표기 | 李台望 |
| 다른 이름 | 태망(太望) |
| 자 | 현경(鉉卿) |
| 시호 | 충민(忠愍) |
| 출생일 | 1653년 9월 9일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
| 사망일 | 1728년 9월 7일 |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
| 사망 원인 | 병사 |
| 국적 | 조선 |
| 종교 | 유교(성리학) |
| 거주지 | 조선 |
| 생부 | 이흥우 |
|---|---|
| 생모 | 성주이씨 |
| 양부 | 이세구 |
| 양모 | 해주최씨 최혜당 |
| 양조부 | 이경여 |
| 양증조부 겸 종증조부 | 이복남 |
| 종증조부 | 이인남 |
| 양외조부 | 최산휘 |
| 배우자 | 양주조씨, 남원윤씨, 능성구씨 |
| 자녀 | 이봉지, 이봉채, 이봉래, 이봉좌, 이씨, 이씨, 이씨 |
| 학력 | 1676년(숙종 2년) 정시무과 급제 |
|---|
| 직업 | 무신, 군인, 정치인 |
|---|---|
| 복무 | 조선 육군, 조선 수군 |
| 복무 기간 | 1676년 - 1728년 |
| 최종 계급 | 경상우도병마절도사 |
| 부대 | 조선 육군, 조선 수군 |
| 지휘 | 오위도총부, 경상좌수영, 전라도병영, 충청도병영, 경상우병영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알 수 없음 |
| 서훈 내역 | 1680년(숙종 6) 보사원종공신 3등(保社原從功臣三等) |
|---|---|
| 기타 이력 | 1676년(숙종 2년) 무과(武科)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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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조선의 병마절도사 -
방유령
방유령은 1460년에 태어나 1529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복귀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훈구파이면서 사림파를 두둔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조선의 병마절도사 -
김종서 (1383년)
김종서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무신, 학자로, 육진을 개척하고 국경을 확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문신으로서도 활약했으나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
해군 군인 -
정기룡
정기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방력 강화에 힘쓴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773년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
해군 군인 -
원균
원균은 조선 중기 무장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여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나 이순신과의 갈등 속에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 후 전사(또는 생존)한 인물이다.
2. 생애
이태망은 1653년(효종 4) 9월 9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나 이광식의 6대손으로 학문과 병서를 익혔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보사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초기에는 훈련원 주부, 도총부 도사 등 중앙 관직을 역임했다. 이후 창원부사, 혜산첨사, 명천부사, 태안군수 등 지방관을 두루 거쳤으며, 1690년(숙종 16) 암행어사에게 탄핵받아 파면되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1694년(숙종 20) 이후 삭주부사, 정주목사, 백령 첨사, 장연부사, 부산첨사, 영변도호부사 등을 역임하며 주로 북방 지역에서 근무하였다. 1702년(숙종 28)에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을 보고했고, 1711년(숙종 37)에는 흉년에 백성을 구휼했다.
1709년(숙종 35) 호위위장을 거쳐 경연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했다. 1712년(숙종 3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으나, 1713년(숙종 39) 대간의 탄핵으로 면직되었다. 1714년(숙종 40) 어영청 관련 직책을 거쳐 1717년(숙종 43)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718년(숙종 44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부임 후, 1719년(숙종 45) 호랑이 사냥꾼에게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충청병사 재직 중 청주 상당성을 중수했다.
1720년(경종 즉위) 언양현감으로 부임했으나, 대동전 관련 문제로 승정원의 탄핵을 받았다. 회령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부임하지 못했다.
1723년(경종 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마절도사 재직 중 1724년 진주 촉석루를 중수하였다.
1725년(영조 1) 그는 무신이었으나 내직에 있을 때는 경연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하였다. 1728년(영조 5) 9월 7일 75세로 사망했다.
2.1. 생애 초기
이태망은 1653년(효종 4) 9월 9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병마절도사 이흥우와 성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조참의 이세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광식의 6대손으로, 5대조는 지중추부사 이전이며 고조부는 이준헌이다. 이준헌의 아들 이귀남이 그의 생가 증조부이고, 이귀남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순직한 충장공 이복남은 종증조부이자 양 증조부가 된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을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병서를 주로 읽었다. 1676년(숙종 2년) 무과에 급제하여 1677년(숙종 3년) 도정부장, 1678년(숙종 4) 부장에 임명되었고, 1680년(숙종 6) 훈련주부가 되었다.
2.1.1. 출생과 가계
李泰望중국어은 1653년(효종 4) 9월 9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병마절도사 이흥우(李興雨)와 성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조참의 이세구(李世龜)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생모는 성주이씨로 생원 이경립(李景立)의 딸이고, 친 계모는 전주이씨로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의 후손 호군 이희종(李希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통덕랑 이경후(李慶厚)이고, 할머니는 전주이씨로 무림군 선생(茂林君 善生)의 4대손 부호군 이춘경(李春敬)의 딸이며, 송산수 이조년(松山守 李兆年)의 손녀딸이었다.
양아버지는 이복남의 손자이자 이경여의 아들인 호조참의 이세구(李世龜)이고, 양어머니는 해주최씨 최혜당(海州崔氏 崔蕙棠)으로 증 연원도찰방에 추증된 최산휘(崔山輝)의 둘째 딸이다. 친정어머니는 나주나씨 나효녀(羅州羅氏 羅孝女)로 목사 증 참판 나정언(羅廷彦)의 딸이다.
이광식의 6대손으로, 5대조는 지중추부사 이전이며 고조부는 이준헌이다. 이준헌의 아들 이귀남이 그의 생가 증조부이고, 이귀남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순직한 충장공 이복남은 종증조부이자 양 증조부가 된다.
양아버지 이세구(李世龜)는 사후 증직으로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그가 수(守) 병마절도사직에 오르면서 종2품 직책의 부모에게 추은하는 전례에 따라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을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병서를 주로 독서하였다.
2.1.2. 학문 수련과 과거 급제
어려서 경전을 공부하다가 병서를 주로 독서하였다. 1676년(숙종 2년) 정시무과(武科)에 급제, 1677년(숙종 3년) 도정부장(都政部將), 1678년(숙종 4) 1월 3일 다시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1월 9일 별시위(別試射)에 참가, 박신규(朴信圭)가 작성한 별시위 참여 관원 명단에 관일중으로 보고되었다. 1680년(숙종 6) 1월 20일 훈련주부(訓鍊主簿)에 임명되었다.
2.2. 관료 생활
1676년(숙종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보사원종공신 3등(保社原從功臣三等)에 녹훈되었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司)와 경력, 훈련원 주부(訓鍊主簿) 등을 역임했다.
이후 창원부사, 혜산첨사, 명천부사, 태안군수 등 지방관을 두루 거쳤다. 1690년(숙종 16) 암행어사에게 탄핵받아 파면되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1694년(숙종 20) 이후 삭주부사, 정주목사, 백령 첨사, 장연부사, 부산첨사, 영변도호부사 등을 역임하며 주로 북방 지역에서 근무하였다. 1702년(숙종 28)에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을 보고했고, 1711년(숙종 37)에는 흉년에 백성을 구휼했다.
1709년(숙종 35) 호위위장을 거쳐 경연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했다. 1712년(숙종 3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으나, 1713년(숙종 39) 대간의 탄핵으로 면직되었다. 1714년(숙종 40) 어영청 관련 직책을 거쳐 1717년(숙종 43)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718년(숙종 44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부임 후, 1719년(숙종 45) 호랑이 사냥꾼에게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충청병사 재직 중 청주 상당성을 중수했다. 1720년(숙종 46) 처조카 조명국(趙鳴國)과의 상피 문제로 조명국이 면직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 언양현감으로 부임했으나, 대동전 관련 문제로 승정원의 탄핵을 받았다. 회령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부임하지 못했다.
2.2.1. 초기 관직 생활
1676년(숙종 2년) 정시무과(武科)에 급제, 1677년(숙종 3년) 도정부장(都政部將), 1678년(숙종 4) 1월 3일 다시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1월 9일 별시위(別試射)에 참가, 박신규(朴信圭)가 작성한 별시위 참여 관원 명단에서 과녁 명중에 그는 관일중으로 보고되었다. 1680년(숙종 6) 1월 20일 훈련주부(訓鍊主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경신환국 후 보사원종공신 3등(保社原從功臣三等)에 녹훈되었다.
1680년(숙종 6년) 9월 28일 도총부도사(都摠府都司), 1681년(숙종 7) 1월 27일 오위도총부 경력, 그해 7월 22일 일소 감군(一所監軍)으로 재직 중 병이 발병하여 이인환(李寅煥)의 상소로 감군에서 면직되었다. 1681년(숙종 7) 12월 1일부터 도총경력(都摠經歷)으로 신유 식년무과(辛酉式年武科) 시험관이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2.2.2. 지방관 생활
1682년(숙종 8) 창원부사로 임명되었다. 1685년(숙종 11) 혜산첨사로 발령받아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1688년(숙종 14) 명천부사를 거쳐 태안군수로 발령받았다. 1690년(숙종 16) 충청도암행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1692년 남원영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693년(숙종 19) 부호군으로 복귀했다. 그해 4월 27일 관고(官庫)의 물건을 분실했다는 하리(下吏)의 말만 믿고 군병을 소집했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충청수사 이광진(李光震) 등과 함께 탄핵당했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4월 28일 다시 사헌부가 탄핵하자 숙종이 허용하여 파면되었다.
1694년(숙종 20) 삭주부사, 1696년(숙종 22) 정주목사로 부임했다. 1700년(숙종 26) 백령 첨사, 1701년(숙종 27) 장연부사로 부임하였다.
1702년 5월 4일 오예포만호(吾义浦萬戶) 이기창(李枝昌) 등과 함께 서해로부터 녹사도, 육둔도까지 넘어와서 불법으로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보고하였고, 그해 10월 5척의 중국 배가 와서 불법조업을 하다가 1척이 풍랑을 만나 파손, 이들을 모두 구조했고 이들이 소지한 '봉천부 개평현(奉天府 盖平縣) 선호(船戶, 배 주인) 도한걸(陶漢傑), 선원 여문옥(黎文玉) 등 5명'이라는 것을 획득하였다. 1703년(숙종 29년) 부산첨사로 부임하였다가 영변도호부사로 이동하였다. 영변대도호부사 재직 중 치적으로 영변지 환적 유애(遺愛)편에 등재되었다. 1705년 3월 25일 다시 부산첨사가 되었다.
2.2.3. 북방 경계 근무
1702년 5월 4일 오예포만호(吾义浦萬戶) 이기창(李枝昌) 등과 함께 서해로부터 녹사도, 육둔도까지 넘어와서 불법으로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보고하였고, 그해 10월 5척의 중국 배가 와서 불법조업을 하다가 1척이 풍랑을 만나 파손, 이들을 모두 구조했고 이들이 소지한 '봉천부 개평현(奉天府 盖平縣) 선호(船戶, 배 주인) 도한걸(陶漢傑), 선원 여문옥(黎文玉) 등 5명'이라는 것을 획득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12월 21일 자성부사(慈城府使)로 부임하였고, 1711년(숙종 37년) 11월 2일 흉년기에 쌀 대신 기장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분진(分賑)하여 평안도관찰사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2.2.4. 중앙 관직 활동
1709년(숙종 35) 호위위장을 거쳐 그해 3월 10일 부호군이 되었다. 3월 18일에는 무신으로 경연관을 겸하여 서강에 참여하였다. 3월 25일 도총부내승이 되고, 6월 1일 서강에 무신 자격으로 경연관을 겸하여 참여하였다. 9월 3일에는 숙종이 선정전에 입시하여 진강했을 때 예기단궁에 대하여 강하였다.
2.2.5. 경상좌병사, 전라병마사 재직
1712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재직 시절, 사간원과 승정원에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713년 대간의 탄핵으로 경상좌수사에서 면직되고 호군으로 전임되었다. 1714년 어영청 전부 우사 후초관, 무겸선전관, 어영청 좌부천총을 거쳐 어영별장 대리가 되었다. 1714년 무과 과거시험의 1소 시험관으로 선발되었다. 1716년 사포서별제, 사역원 찰방을 거쳐 1717년(숙종 43)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717년 과거시험에 무과의 감시관으로 시험을 주관하였고, 정시 무과 초시의 1소 시관으로 선발되었다.
2.2.6. 충청병사 재직과 지방관 생활
1718년(숙종 44년) 3월 27일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4월 5일 언양현감으로 개차되었다가, 다시 충청병사로 개차되고 4월 12일에 충청도 임지로 부임하였다. 1719년(숙종 45) 5월 16일에는 충청도의 호랑이를 잡은 포수들에게 상을 줄 것을 청하는 계를 올려 포수들에게 상을 받게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12일 그가 올린 상소문에 틀린 글자가 발견되어 승정원으로부터 지적을 당했다. 충청병사 재직 중 우후 홍서일(洪敍一)과 함께 군영 영사(營舍)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팠으며, 청주 상당성을 중수하였다.
1719년 11월 20일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될 예정이었으나, 상당성 축성을 이유로 비변사의 건의로 유임되었다. 1720년 충청병사로 우후 홍서일(洪敍一)과 함께 청주성을 축성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청주성 부지 일부를 승려에게 매각하였다. 승려에게 매각한 부지는 청주 구룡사가 건립되었다.
1720년(숙종 46) 5월 13일 처조카 조명국(趙鳴國)이 회덕현감으로 부임하자, 조명국은 동성 숙모의 남편이 현임 충청병사라 하여 상피를 청하는 상소를 이조에 올려, 조명국은 면직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 8월 17일 부호군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언양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언양현감 부임 직전, 1720년(경종 즉위) 9월 5일 훈련도감 마병우별장(馬兵右別將)이 되었다. 부임 직후, 1720년 9월 27일 승정원으로부터 언양현에서 대동전을 받아 중간에 써버린 차재원(車載遠) 등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한 죄로 나문정죄할 것을 청하여 경종이 허락하였다. 곧 소환되고 그해 9월 29일 회령부사로 임명되면서 경종이 그를 가자시켰지만 이조에서 가자가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10월 7일 그의 집 노비가 그가 나이가 68세로 고령이라 지방관에 부임하기 어렵다며 개정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이 허용하였다. 같은 날 가자된 작첩도 환수 상소가 올라와 12일 가자된 직급도 환수되었다. 다시 언양현에 체재하였다.
2.3. 생애 후반
1723년(경종 3) 6월 금위영 좌부천총(左部千摠)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28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2월 10일 의금부의 김시경으로부터 근무태만을 이유로 탄핵당했고 나수를 청하였다. 12월 12일 암행어사를 통해 언양현감 재직시의 실책을 추고받았다. 병마절도사 재직 중 1724년 진주 촉석루를 중수하였다. 진주 촉석루가 황폐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우후 박황과 함께 기울어진 기둥과 썩은 기둥, 난간 등을 교체, 중수하였다.
1724년(경종 4) 2월 4일 촉석루 중수 과정에서 사대부 집 묘역의 나무를 베어 온 것과, 각 고을의 불교승려들을 데려다가 공역을 시킨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당했으나 경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같은 날 사간원정언 조상경(趙尙慶)으로부터 나이가 많고 포탐하며 일처리를 잘못한다는 이유로 파면 탄핵을 당했지만 경종이 듣지 않았다. 2월 5일 조상경은 다시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2월 15일 사간원헌납 심준(沈埈)이 그가 인근 군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며 탄핵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3월 25일 홍중우(洪重禹)로부터 그가 상부로 보낼 군병세소계본(軍兵歲抄啓本)에 직인을 찍지 않았다며 추고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1725년 5월 경상우병사에서 체직되어 상경하였다.
1725년(영조 1) 7월 5일 정동후(鄭東後)는 그가 감사, 병사가 부임, 이임 직후 임금에게 친히 반납하는 밀부(密符)를 편비를 시켜 대신 바치게 했다 하여 추고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영조가 윤허하였다. 그는 무신이었으나 내직에 있을 때는 경연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하였다. 1728년(영조 5) 9월 7일 75세로 사망했다.
3. 사후
충민(忠愍)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면천군 중흥면 복포리(현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북운리)에 쌍분으로 매장되었다가 1994년 3월 17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지곡리 산2번지 서산영덕고속도로변 핀득골마을 뒷산으로 이장했다. 묘 우측에는 1993년 8대손 병환이 세운 묘비가 있다. 묘지는 계비 능성구씨와 합장되었고, 본부인 남원윤씨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안장되었다.
다른 부인인 양주조씨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아들 이봉채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북운리에 정착했으며, 후손 일부는 예산군 대흥면 지곡리로 옮겨갔다. 통덕랑을 지낸 아들 이봉지는 이천군 효양산으로 갔다가 증손 이의석 대에 충청북도 제천군 천남리의 전주이씨와 통혼하면서 제천 봉양면, 충주 주덕 일대로 이주했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태망의 직계 후손들 중 일부는 기록이 빈약하다.
4. 가계
이태망의 가계는 조선 왕실과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 양 증조모는 익안대군의 후손이며, 양 외조모는 성종의 왕자 무산군의 후손이다.
* 친가 쪽으로는 생 증조모 고령 신씨가 혜숙옹주의 양자 혜숙옹주 이수란의 증손녀이다.
| 구분 | 내용 |
|---|---|
| 생가 증조부 | 이귀남(李貴男, ? ~ ?년 1월 13일) |
| 생가 증조모 | 고령신씨 신경연(申慶延, 1551년 ~ ?), 신타(申柁)의 딸 |
| 생가 조부 | 이경후(李慶厚, 1578년 ~ ?년 8월 28일) |
| 생가 조모 | 전주이씨, 무림군 이선생(茂林君 李善生) 4대손 호군 이춘발(李春發)의 딸 |
| 생부 | 이흥우(李興雨, 1622년 12월 29일 ~ 1694년 5월 7일) |
| 생모 | 성주이씨, 생원 이경립(李景立)의 딸 |
| 양 증조부 | 이복남(李福男, 1555년 6월 28일 ~ 1597년 8월 16일), 충장공 |
| 양 증조모 | 청주한씨(淸州韓氏, ? ~ ?), 한치형의 종증손 한곤의 딸 |
| 양 조부 | 이경여(李慶餘, 1591년? 1579년? ~ 1636년 7월 14일) |
| 양 조모 | 전주이씨(? ~ ?), 익안대군 방의의 증손 천읍군 이천(川邑君 李倩) 5대손 부사과 이정전(李廷王+全)의 딸 |
| 양부 | 이세구(李世龜, 1614.11.10 ~ 1697.2.8) |
| 양모 | 해주최씨 최혜당(海州崔氏 崔蕙棠, 1613.7.17 ~ 1665.2.29), 증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 최산휘(崔山輝)의 딸 |
| 부인 | 남원윤씨(南原尹氏, 1648년 6월 24일 ~ 1731년 7월 6일), 윤자의 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