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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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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박람회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박람회이다. 일본은 산업화를 과시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박람회를 기획했으며, 이를 위해 경복궁의 일부 전각을 철거하고 전시관을 건설했다. 박람회에는 다양한 산업, 기술, 문화 관련 전시물이 전시되었으며, 일본 각 지역과 조선 각 도의 특산품, 그리고 로봇 학천칙과 같은 주요 전시품도 선보였다. 140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개최되었지만, 경복궁 훼손과 식민 지배 미화 등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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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박람회
개요
전시회 입구와 일본 총독부 건물
전시회 입구. 일본 총독부 건물이 보임
명칭조선 박람회
다른 이름조센 하쿠란카이 (일본어: 朝鮮博覧会)
Joseon Bangnamhoe (로마자 표기)
개최 연도1929년
개최 기간1929년 9월 12일 ~ 1929년 10월 31일
개최 장소경복궁
주최조선 총독부
방문객 수986,179명
배경
목적식민 통치 홍보
특징
전시물조선 각지의 물산, 일본의 공업 제품 등 전시
영향
평가일제강점기 식민 통치를 미화하고 선전하는 데 활용되었다는 비판이 있음

2. 역사적 배경

한일 병합 이후 시정 20주년 기념 행사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아래에서 개최되었다. 행사 장소인 경복궁조선 시대에 국왕이 거주하던 부분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현재는 궁궐의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조선박람회는 약 140만 명이 관람하여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2] 세부적으로는 개인 입장객 수는 약 70만 명, 단체 관람객 약 40만 명, 무료 초대객 약 22만 명, 어린이 약 12만 명, 군인 약 5천 명이었다. 조선총독부 측은 조선 물산의 진흥과 대외 선전을 목표로 하였으며, 박람회의 성황으로 인해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박람회 회기 중에는 박람회장 내 행사뿐만 아니라, 경성부 내 각지에서 대회와 집회가 열렸다. 경성역(현: 서울역) 앞에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환영문"이 세워졌다.

1969년 일본인 나카가와 도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본 전체가 이 행사에 참여했고, 이를 위해 도쿄의 박람회 건설업자(ランカイ屋; rankaiya)들이 잇따라 경성으로 향했다... 장식 회사, 목수, 화가, 기계 기술자, 삽화가 등, 모든 현과 모든 회사의 사람들이 경성에 숙소를 잡았고, 시내 어디를 가든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부지 내 각 전시관은 기존 박람회 형식과 거의 같았다... 경성에는 숙소가 거의 없었기에, 우리는 가끔 개인 주택을 임대했다. 우리는 낮에는 집주인에게 현장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밤에는 그의 친척 집에서 묵었다.|일본 전체가 이 행사에 참여했고, 이를 위해 도쿄의 박람회 건설업자들이 잇따라 경성으로 향했다... 장식 회사, 목수, 화가, 기계 기술자, 삽화가 등, 모든 현과 모든 회사의 사람들이 경성에 숙소를 잡았고, 시내 어디를 가든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부지 내 각 전시관은 기존 박람회 형식과 거의 같았다... 경성에는 숙소가 거의 없었기에, 우리는 가끔 개인 주택을 임대했다. 우리는 낮에는 집주인에게 현장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밤에는 그의 친척 집에서 묵었다.일본어 [2]

2. 1. 일제강점기 초기 박람회 개최 배경

1910년, 한국은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2] 일본은 산업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자국민과 전 세계에 자국의 발전을 과시하기 위해 국내에서 여러 박람회를 개최했다.

일본은 옛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관리를 넘겨받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1915년, 그들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고, 이를 기회로 궁궐 내 다수의 역사적 건물들을 철거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 건물은 1929년 조선박람회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었다.

조선박람회 몇 년 전, 쇼와 천황(히로히토)이 즉위했다. 1928년, 새로운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서 11개의 박람회가 열렸다. 예를 들어, 그 해에 교토 대례 기념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학자 이시카와 아츠코는 해당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광고와 자료들이 조선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자료들과 유사하다고 묘사했다. 더욱이, 조선박람회는 교토 박람회에서 두드러지게 광고되었으며, 참석자들에게 한국 지도와 여행 일정을 제시했다. 조선박람회는 이러한 맥락에서 발전했으며,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노동자, 건설업자, 장인들이 박람회를 준비하거나 방문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로 한국을 방문했다. 식민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시를 더욱 변화시키려 했다. 경복궁 주변에서 토공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도로를 건설했다. 궁궐 북쪽에 고급 주거 지역을 개발했다.

2. 2. 조선박람회 개최 결정

1910년, 한국은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2] 이후 일본은 산업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자국민과 전 세계에 자국의 발전을 과시하기 위해 국내에서 여러 박람회를 개최했다.

일본은 옛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관리를 넘겨받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1915년, 그들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고, 이를 기회로 궁궐 내 다수의 역사적 건물들을 철거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 건물은 1929년 조선박람회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었다.

조선박람회 몇 년 전, 쇼와 천황(히로히토)이 즉위했다. 1928년, 새로운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서 11개의 박람회가 열렸다. 예를 들어, 그 해에 교토 대례 기념 박람회(大礼記念京都大博覧会)가 개최되었다. 학자 이시카와 아츠코는 해당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광고와 자료들이 조선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자료들과 유사하다고 묘사했다. 더욱이, 조선박람회는 교토 박람회에서 두드러지게 광고되었으며, 참석자들에게 한국 지도와 여행 일정을 제시했다. 조선박람회는 이러한 맥락에서 발전했으며,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한일 병합 이후 시정 20주년 기념 행사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아래에서 개최가 결정되었다.

다음은 조선 박람회 개최 결정까지의 주요 사건들이다.

날짜사건
1921년 (다이쇼 10년) 9월 15일산업조사회에서 적당한 시기에 박람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짐.


3. 박람회 준비 과정

1921년 9월 15일, 산업조사회에서 적절한 시기에 박람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쇼와 천황 즉위 후 1928년 일본에서 11개의 박람회가 열렸고, 교토 대례 기념 박람회의 광고와 자료들은 조선박람회와 유사했다. 조선박람회는 교토 박람회에서 광고되었고, 한국 지도와 여행 일정이 제시되었다. 조선박람회는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도도 있었다.

노동자, 건설업자, 장인들이 박람회를 준비하거나 방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식민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시를 더욱 변화시키려 했다. 경복궁 주변에서 토공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도로를 건설했다. 궁궐 북쪽에 고급 주거 지역을 개발했다.

3. 1. 경복궁 부지 선정과 훼손

전시회장은 경복궁 일대를 부지로 삼았는데, 이곳은 이미 전각들을 철거하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던 곳이었다.

1929년 7월, 조선총독부는 박람회장으로 쓰일 경복궁 우측 진입로를 하루 1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 수요를 감당토록 하겠다는 이유로 남동쪽 동십자각에서 동쪽 광화문(1927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로 동쪽으로 이전)에 이르는 궁장을 철거했다.[9]

이후 동십자각은 박람회의 첫 출입구로서 외벽을 덧대어 크게 변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박람회가 끝나면 원래대로 복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동십자각 양옆으로 도로가 뚫려 섬처럼 남은 형태가 되었다.[10]

3. 2. 전시관 건설과 인력 동원

조선박람회의 전시관은 총독부가 직접 설치한 '직영관', 일제강점기 조선의 각 지자체와 기업체, 일본의 각 지역별 전시관, 일본 육해군이 참여한 '특설관', 기타 유흥시설로 나뉘었다.[7][8]

쇼와 천황 즉위 후 1928년 일본에서 11개의 박람회가 열렸고, 교토 대례 기념 박람회의 광고와 자료들은 조선박람회와 유사했다. 조선박람회는 교토 박람회에서 광고되었고, 한국 지도와 여행 일정이 제시되었다. 조선박람회는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도도 있었다.

노동자, 건설업자, 장인들이 박람회를 준비하거나 방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1969년 일본인 나카가와 도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식민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시를 더욱 변화시키려 했다. 경복궁 주변에서 토공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도로를 건설했다. 궁궐 북쪽에 고급 주거 지역을 개발했다.

4. 박람회 구성

박람회는 내국관(일본 상품 전시), 철도성 전시관, 전기 기계 전시관, 쌀 전시관, 그리고 각 조선의 도 전시관 등 다양한 전시관으로 구성되었다. 상품들은 창문과 선반에 눈에 띄게 전시되었고, 미쓰코시와 다카시마야와 같은 경성의 주요 백화점들이 부스를 설치했다. 일부 전시품은 일본과 한국의 예술과 공예품을 모두 선보였다. '어린이의 나라'라는 박람회 구역에는 인도 코끼리 그림으로 장식된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가 있었다.[3]

아시아 최초로 제작된 로봇인 일본의 학천속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신문 부스에 전시되었다.[3]

4. 1. 전시관 구성

조선박람회의 전시관은 총독부가 직접 운영하는 '직영관',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 각 지역의 지자체, 기업, 단체 등이 참여한 '특설관' 등으로 구성되었다.[7][8]

구분주요 전시 내용
직영관
내지조선 박람회 최대 진열관 (1,452평). 특설관이 없는 각 부현별 코너를 만들어 물산 전시.
특설관



대표적인 전시물로는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의 ‘보험가입자 가정의 행복한 모습’ 모형, 마이니치 신문 전시관의 동양 최초 로봇 학천칙(學天則|가쿠텐소쿠일본어), 놀이기구 '유희비행기탑' 등이 있었다.[7]

4. 2. 주요 전시품

조선박람회의 전시관은 총독부가 직접 설치한 '직영관', 일제강점기 조선의 각 지자체와 기업체를 비롯하여 일본의 각 지역별 전시관, 일본 육해군이 참여한 '특설관', 기타 유흥시설로 나뉘었다.[7][8]

대표적인 전시물로는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가 준비한 ‘보험가입자 가정의 행복한 모습’ 모형, 마이니치 신문 전시관의 동양 최초의 로봇인 학천칙(學天則|가쿠텐소쿠일본어), 놀이기구 '유희비행기탑' 등이 있었다.[7]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로봇 "학천칙"이 전시되어 각광을 받았다.[7]

조선건축협회는 현대식 주택을 보여주는 3개의 모형 주택을 전시했다.[3]

조선박람회 주요 전시관 및 전시품
구분전시관명주요 전시품
직영관산업 북관 (775평)공업 제품, 고대 생물 유적
산업 남관 (1,070평)을 제외한 농산물, 수산물, 원예, 축산, 양잠업, 임업
사회 경제관 (225평)청소년 보호 시설, 공설 시장, 직업 소개, 빈민 구제 등 사회 사업, 금융 조합, 산업 조합 등 각종 경제 단체 출품
쌀의 관 (230평)조선 쌀
각 도 심세관 (520평)조선 각 도의 주요 산물 (실물, 모형, 사진)
교육 미술 공예관 (525평)각 시대 조선 미술 공예품, 제전 및 선전 입선 작품, 고분, 명승, 천연 기념물, 기상 관측, 고고학 관련 전시
교통 토목관 (550평)교통, 토목, 통신의 시정 20년간 진보 소개
사법 경무 위생관 (323평)대한 제국 및 일본 시대 재판 모습 (인형 파노라마)
기계 전기관 (500평)기계, 전기
참고관 (630평)신문, 상선, 통운, 농림성, 남양청 등, 해외 (독일, 프랑스 등) 출품, 학천칙
접대관 (75평)귀빈 접대
일본 지역별 전시관내지관 (1,452평)각 부현별 물산
오사카관다이코쿠 "복 일으키기", 오사카 성, 축항, 난바 다리 등 공업 발전 소개
나고야특산품
규슈규슈 각 현, 오키나와현 특산품
도쿄특산품
교토니시진직, 교토 염색, 도자기, 자수, 병풍, 부채
홋카이도삿포로 시계탑 이미지
가라후토관바다표범섬 파노라마, 국경 제정 의정서, 가라후토 역사, 오토마리 항, 도요하라 시가지, 바다코끼리모피, 여우 모피 등
특설관해군군함 모형, 관함식·군항·요항 시설도 모형
육군전쟁·병기 추이, 대포·방공 병기 등 지상전·항공전 파노라마, 전차 (관외)
만몽관관동청, 남만주 철도 (만철), 농업, 광업, 축산, 다롄 염전, 발해 그물 어업, 만몽 생활 모형
타이완관열대식물원, 타이완 5대 산업 회전 전시
수산고래 골격표본
철도성도쿄 급행 전차, 철도 관계 기계, 도표, 모형, 디오라마, 활동 사진


5. 박람회 이후

조선박람회는 1929년 10월 5일에 폐회되었다. 박람회는 총 14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5. 1. 관람객과 성과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아래에서 한일 병합 이후 시정 20주년 기념 행사가 개최되었다.[1] 개인 입장객은 약 70만 명, 단체 관람객은 약 40만 명, 무료 초대객은 약 22만 명, 어린이는 약 12만 명, 군인은 약 5천 명으로 모두 합쳐 약 140만 명이 박람회를 관람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2] 조선총독부는 조선 물산의 진흥과 대외 선전을 목표로 하였으며, 박람회의 성황으로 인해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2]

6. 비판과 논란

조선박람회는 일제강점기에 개최되어 식민 지배 정당화 및 미화, 경복궁 훼손 문제 등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경복궁 부지 사용과 관련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이미 전각들이 철거된 상태였으며,[9] 1929년 박람회 때는 동십자각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궁장이 철거되고 동십자각 외벽이 변형되는 등 추가적인 훼손이 발생했다.[9][10] 조선총독부는 박람회 후 원상 복귀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동십자각은 현재까지 섬처럼 남은 형태가 되었다.[10]

6. 1. 식민 지배 정당화 및 미화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산업화를 추진하며 국내에서 여러 박람회를 개최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은 옛 조선 왕궁인 경복궁을 재건하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고, 다수의 역사적 건물을 철거했다.[2] 1929년 조선박람회에 맞춰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시작했다.

1928년 쇼와 천황 즉위를 기념하여 일본에서 11개의 박람회가 열렸고, 교토 대례 기념 박람회가 그중 하나였다. 조선박람회는 이러한 맥락에서 발전했으며,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한일 병합 20주년 기념 행사로 조선박람회를 개최했다. 조선 시대 국왕이 거주하던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행사 장소로 사용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물산의 진흥과 대외 선전을 목표로 하였으며, 총 140만 명이 관람하여 박람회는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6. 2. 경복궁 훼손 문제

경복궁은 조선박람회 부지로 사용되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이미 전각들이 철거된 상태였다.[9]

1929년 7월, 조선총독부는 박람회장으로 사용될 경복궁 우측 진입로를 하루 1만 명의 관람객 수요를 감당하도록 확장하기 위해 남동쪽 동십자각에서 동쪽 광화문(1927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로 동쪽으로 이전)에 이르는 궁장을 철거했다.[9]

동십자각은 박람회의 첫 출입구로 사용되면서 외벽이 덧대어져 크게 변형되었다. 총독부는 박람회가 끝나면 원상 복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동십자각 양옆으로 도로가 뚫려 섬처럼 남은 형태가 되었다.[10]

참조

[1] 서적 朝鮮博覧会記念写真帖 https://dl.ndl.go.jp[...] Governor-General of Korea 2021-01-01
[2] 간행물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3-08
[3] 학술 The Research on the Process and Floor Plan of Model Houses for The Chosun Exhibition in 1929
[4] 서적 朝鮮博覧会記念写真帖 https://dl.ndl.go.jp[...] 朝鮮総督府
[5] 서적 朝鮮博覧会記念写真帖 https://dl.ndl.go.jp[...] 朝鮮総督府
[6] 뉴스 朝鮮博覽會開幕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29-09-13
[7] 뉴스 100만명 몰린 조선박람회, 경복궁은 짓밟히고… https://www.hani.co.[...] 한겨레 2017-09-04
[8] 뉴스 89년전 경복궁서 열린 조선박람회 풍경은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8-09-19
[9] 뉴스 景福宮의 東墻毀撤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29-05-10
[10] 뉴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경복궁 돌담길 가로수마다 사연이 숨었다"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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