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탈회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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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탈회위크는 터키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1958년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의 발굴을 통해 아나톨리아 지역이 신석기 시대에 고도의 문화 중심지였음이 밝혀졌고, 18개의 연속적인 건물 층이 드러났다. 멜라트의 발굴 조작 의혹으로 한동안 발굴이 중단되었다가 1993년 이안 호더에 의해 재개되었으며, 2018년 발굴이 종료되었다. 차탈회위크는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현재 새로운 발굴은 알리 우무트 튀르칸이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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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탈회위크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위치 | 튀르키예 콘야 주 퀴취크쾨이 |
| 지역 | 아나톨리아 |
| 유형 | 정착지 |
| 시대 | 신석기 시대 ~ 금석병용시대 |
| 건설 시기 | 기원전 약 7100년 |
| 폐쇄 시기 | 기원전 약 5700년 |
| 지정 종류 | 세계 문화 유산 (WHS) |
| 공식 명칭 | 차탈회위크의 신석기 유적 |
| 지정 날짜 | 2012년 |
| 지정 번호 | 1405 |
| 지정 기준 | iii, iv |
| 지정 유형 | 문화 |
| 지정 자유 정보 이름 | 지역 |
| 지정 자유 정보 값 | 남유럽 및 서아시아 |
| 크기 | |
| 명칭 | |
| 로마자 표기 | Çatalhöyük |
| IPA | /ʧɑtɑl højyk/ "" |
| 한국어 음역 | 차탈회위크 |
| 의미 | 포크 언덕 |
| 추가 정보 | |
| 근처 도시 | 거리 |
2. 고고학
1958년 제임스 멜라트가 차탈회위크를 발견하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발굴하여 아나톨리아 지역이 신석기 시대 문화 중심지였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멜라트는 도라크 사건으로 터키 입국이 금지되었고, 19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이안 호더가 발굴을 재개할 때까지 유적은 방치되었다. 호더는 멜라트의 제자였지만, 과정고고학 이후 이론을 적용하는 등 새로운 연구 방식을 도입했다. 차탈회위크는 거대한 촌락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2018년, 멜라트가 발굴물과 비문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의 연구 전반에 의혹이 제기되었고, 차탈회위크 연구는 큰 정체를 겪고 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는 야생 동물을 그린 것이며, 모신상은 뚱뚱한 여성을 본뜬 상이다.[49][50] 현재는 아나톨루 대학교의 알리 우무트 튀르칸이 새로운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
2. 1. 발굴 역사

이 유적지는 1958년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4]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멜라트가 이끈 팀은 4계절 동안 추가 발굴을 진행했다.[5][6][7] 이 발굴로 아나톨리아 지역이 신석기 시대에 고도의 문화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8] 발굴 결과, 정착지 및 역사적 시기의 다양한 단계를 보여주는 18개의 연속적인 건물 층이 드러났다. 건물 최하층은 기원전 7100년경, 서쪽 언덕 최상층은 기원전 5600년경으로 추정된다.[9]
멜라트는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청동기 시대 유물의 그림을 발표한 도라크 사건에 연루되어 터키 입국이 금지되었다.[10] 이 스캔들 이후 유적지는 방치되었다가, 19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이안 호더가 발굴을 재개했다.[11][12][13][14][15] 호더가 이끈 발굴은 2018년에 종료되었다. 멜라트의 제자였던 호더는 이 유적지를 당시 논란이 많았던 그의 과정고고학 이후 이론에 대한 최초의 "실제" 테스트 장소로 선택했다.[16] 이 유적지는 프로젝트의 실험적이고 성찰적인 방법론적 틀에 따라 디지털 방법론과의 참여에 항상 강력한 연구 중점을 두어왔다.[17] 미켈에 따르면, 호더의 차탈회위크 연구 프로젝트(ÇRP)는 적응 가능하고 민주화된 기록, 컴퓨터 기술 통합, 표본 추출 전략 및 지역 사회 참여 측면에서 진보적인 방법론을 위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18]
아나톨루 대학교의 알리 우무트 튀르칸이 새로운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 1958년에 차탈회위크가 발견된 후,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제임스 멜라트가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멜라트는 200개 가까운 건물을 조사하여 차탈회위크에 최소 13개 층과 더 아래 층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최하층까지는 7m를 더 파내려가야 한다고 추정되었다. 이후 터키 정부에 의해 조사가 금지되어, 유적은 1993년 9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이안 호더에 의해 조사될 때까지 방치되었다.[43] 호더의 조사는, 다른 연구에 앞선 콜린 렌프류의 연구 수법을 도입한 야심찬 것이었다.[44] 고고학적 과학 수법에 더해 차탈회위크의 벽화가 표현하는 심볼리즘에 대해 심리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해석을 하도록 했다.
2018년, 이 유적 발굴의 최고 권위자였던 제임스 멜라트 사후에 그가 발굴물과 비문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45]
최신 연구에 따르면, 세계 최고(最古)의 지도는 다른 벽화와 마찬가지로 야생 동물을 그린 것이며,[46][47][48] 차탈회위크의 유물 중 가장 상징적인 모신상은 뚱뚱한 여성을 본뜬 상이다.[49][50]
이후, 멜라트와 관련된 연구 발표 전반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차탈회위크 연구는 큰 정체를 겪고 있다.
2. 2. 연구 방법론
이 유적지는 1958년 제임스 멜라트(James Mellaart)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추가 발굴이 진행되었다.[4][5][6][7] 이 발굴로 아나톨리아 지역이 신석기 시대 문화 중심지였음이 밝혀졌고, 기원전 7100년에서 기원전 5600년 사이의 18개 건물 층이 드러났다.[8][9]
멜라트는 도라크 사건에 연루되어 터키 입국이 금지되었고,[10] 19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이안 호더(Ian Hodder)가 발굴을 재개할 때까지 유적지는 방치되었다.[11][12][13][14][15] 멜라트의 제자였던 호더는 이 유적지를 과정고고학 이후(post-processual archaeology) 이론의 첫 시험 장소로 선택했다.[16] 차탈회위크 연구 프로젝트(ÇRP)는 적응 가능하고 민주화된 기록, 컴퓨터 기술 통합, 표본 추출 전략, 지역 사회 참여 등 진보적인 방법론을 사용했다.[18]
아나톨루 대학교의 알리 우무트 튀르칸(Ali Umut Türkcan)이 새로운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 멜라트는 200개 가까운 건물을 조사하여 차탈회위크가 최소 13개 층 이상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했다. 호더는 콜린 렌프류(Colin Renfrew)의 연구 방법을 도입하고, 심리학자와 예술가들에게 벽화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을 의뢰했다.
2018년, 제임스 멜라트가 발굴물과 비문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45] 최신 연구에 따르면, 세계 최고(最古)의 지도는 야생 동물을 그린 것이며,[46][47][48] 모신상은 뚱뚱한 여성을 본뜬 상이다.[49][50] 멜라트의 연구 발표 전체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차탈회위크 연구는 큰 정체를 겪고 있다.
3. 문화
차탈회위크에서는 정착지 내외부에서 다양한 문화적 특징들이 나타났다.
주거 문화:차탈회위크는 공공 건물 없이 주거용 건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부 큰 방에는 화려한 벽화가 있었다. 초기에는 5,000명에서 8,000명 사이의 인구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은 빽빽하게 붙어 있는 흙벽돌 집에서 살았고, 집 사이에는 길이나 거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집은 천장의 구멍과 집 측면의 문을 통해 접근했으며, 지붕은 사실상 거리 역할을 했다.
매장 문화: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죽은 자를 마을 내부에 매장했다. 유해는 바닥 아래, 특히 화덕 아래나 주요 방의 기단, 침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은 매장 전에 꽉 구부려진 굴장 형태로, 바구니나 갈대 매트에 싸여 매장되었다.[51] 일부 무덤에서는 뼈의 분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신이 한동안 노출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무덤이 훼손되어 머리가 제거된 경우도 있었으며, 이 머리는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 및 종교:정착지 곳곳에서 선명한 벽화와 상이 발견된다. 차탈회위크의 앉아있는 여성으로 알려진 독특한 점토 상이 대표적이다. 무덤, 벽화, 상은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풍부한 종교적 상징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주요 이미지에는 발기된 음경을 가진 남성, 사냥 장면, 멸종된 오록스와 수사슴의 붉은 이미지, 머리 없는 인물에게 돌진하는 독수리가 포함된다. 부조 조각상도 발견되었으며, 서로 마주보는 암사자 등이 있다.
특히 소의 머리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이는 남성 신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산 산의 쌍둥이 봉우리를 배경으로 한 마을 그림은 지도 제작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자 최초의 풍경화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24][25] 제임스 멜라트의 날조 사건 이후, 비만 남성상 등도 발견되어 현재는 모신이 아닌 비만형 여성상으로 해석된다.[50][49]
3. 1. 건축
차탈회위크는 공공 건물 없이 주거용 건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일부 큰 방에는 화려한 벽화가 있었지만, 다른 방들의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8]초기에는 평균 인구가 5,000명에서 7,000명 사이로 추정되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6700년에서 6500년 사이 초기 동쪽 언덕 시대에는 차탈회위크에 평균 600명에서 800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9]
유적지는 많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형태였다. 가구들은 이웃에게 도움, 거래, 자녀 결혼 등을 기대했다.[20] 주민들은 덩굴 구조로 빽빽하게 들어선 흙벽돌 집에서 살았다. 집 사이에는 길이나 거리가 없었고, 벌집과 같은 미로처럼 뭉쳐 있었다. 대부분의 집은 천장의 구멍과 집 측면의 문을 통해 접근했고, 문은 사다리와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지붕은 사실상 거리 역할을 했다. 천장 개구부는 유일한 환기구 역할도 하여, 집 안의 화덕과 오븐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집들은 사각 목재 사다리나 가파른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석고 내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보통 방의 남쪽 벽에 있었고, 요리용 화덕과 오븐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방에는 다양한 가사 활동에 사용되었을 융기된 플랫폼이 있었다. 전형적인 집에는 요리와 공예 같은 일상 활동을 위한 두 개의 방이 있었다.[20] 모든 내부 벽과 플랫폼은 매끄러운 마감으로 석고를 발랐다.[8] 부속 방은 창고로 사용되었고, 주요 방에서 낮은 개구부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모든 방은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건물 안에서 쓰레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고, 폐허 밖에서 쓰레기 매립지를 발견했는데, 하수 및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나무, 갈대, 동물 배설물을 태운 상당한 양의 재가 있었다.[21]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많은 일상 활동이 지붕 위에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이는 광장을 형성했을 것이다. 후기에는 이러한 지붕 위에 대규모 공동 오븐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들은 부분적인 철거와 잔해 기반 위에서의 재건을 통해 갱신되었고, 이것이 언덕이 점차적으로 쌓인 방식이었다. 최대 18개의 정착지 층이 발굴되었다.[22]
차탈회위크의 집들은 옥상이 통로 역할을 했고, 지붕 구멍은 환기구 역할도 했다. 각 집은 내부에 회반죽을 칠하고, 정사각형 기둥을 사용한 사다리와 가파른 계단을 설치했다. 출입구는 대부분 난로나 화덕이 설치된 방의 남쪽 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각 집의 주요 방은 요리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요 방에는 벽을 따라 앉거나, 일을 하거나, 잠을 자기 위한 기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단은 벽 안쪽에 설치되어, 회반죽이 칠해져 표면이 매끄러웠다. 건물의 벽과 바닥은 흰색의 고운 점토(회반죽)로 여러 겹 칠해져 있었으며, 120겹에 달하는 건물도 발견되었다.
보조 방은 식량, 재산 저장, 보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요 방으로부터 천장이 낮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방은 매우 깨끗했는데, 고고학자들은 건물 안에서 쓰레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차탈회위크 주거 외부에는 상당량의 나무 재와 하수구, 요리와 관련된 쓰레기 산이 발견되었다. 쓰레기 산은 매립되어 '광장'으로 사용되었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상적인 활동이 지붕 위나 그러한 쓰레기 및 건물 잔해로 매립된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후대에는 거대한 공동 난로가 지붕 위에 설치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옥은 부분적으로 철거되었고, 거친 돌과 재 위에 재건축되었다. 부서진 집의 잔해는 마운드 형태가 되어 그 위도 '광장'으로 사용되었다.
3. 2. 예술
차탈회위크에서는 공공 건물 없이 주거용 건물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방들의 정확한 용도는 불분명하다.[8]
정착지 내부와 외부 벽에는 벽화와 상이 발견된다. 차탈회위크의 앉아있는 여성이라는 독특한 점토 상이 발견되었으며,[23] 무덤, 벽화, 상은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풍부한 종교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물이 집중된 방은 사당이나 공공 회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8] 주요 이미지에는 발기된 음경을 가진 남성, 사냥 장면, 멸종된 오록스와 수사슴의 붉은 이미지, 머리 없는 인물에게 돌진하는 독수리가 있다.[8] 부조 조각도 발견되었으며, 서로 마주보는 암사자 등이 있다.
특히 소의 머리가 벽에 걸려 있었다. 하산 산의 쌍둥이 봉우리를 배경으로 한 마을 그림은[24] 지도 제작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자[25] 최초의 풍경화로 여겨지기도 한다.[8] 그러나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화산 대신 표범 가죽 그림이나 장식적인 기하학적 디자인일 가능성을 제시한다.[26]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죽은 자를 마을 내부에 매장했다. 유해는 바닥 아래 묘혈에 매장되었으며, 특히 난로 아래, 주요 방의 기단이나 침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유해는 몸을 작게 구부린 굴장 형태로, 바구니나 갈대 돗자리에 싸여 매장되었다.[51] 일부 무덤에서는 관절이 빠진 뼈가 발견되었는데, 매장 전 장기간 외부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머리가 제거된 골격도 발견되었는데,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옻칠과 황토색 물감으로 채색된 두개골은 인간의 머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관습은 시리아와 예리코의 신석기 유적에서도 나타난다.
부장품으로는 직물, 나무 용기, 바구니, 음식이 일반적이었다. 남성의 무덤에서는 칼, 곤봉, 점토 도장,[52] 구리 팔찌, 뼈 버클 등이, 여성의 무덤에서는 화장용 돌 팔레트, 장식품, 흑요석 거울 등이 발견되었다. 보름달고둥을 눈에 박아 넣은 두개골도 발견되었다. 인골 분석 결과, 주민들은 말라리아로 인한 빈혈, 관절염, 골절 등을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생생한 벽화는 거주 구역 곳곳에서 발견된다. 벽화는 가는 붓으로 그려졌으며, 적토, 남동광, 진사, 공작석, 방연광, 망간 등 아나톨리아에서 구할 수 있는 광물로 만들어졌다. 벽화에는 빨강, 적갈색, 검정, 노랑, 남색, 파랑, 회색 등이 사용되었다. 그려진 주제는 사람, 동물, 기하학 무늬, 손 등 다양했다. 사냥 장면으로 추정되는 벽화에는 붉은 황소와 춤추는 사람들, 멧돼지, 사슴, 곰, 늑대, 사자 등이 묘사되었다. 이는 사냥 장면이 아니라 의식이나 축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냥하는 남성들이 페니스를 발기시킨 장면, 붉은 들소 그림, 머리 없는 인간에게 독수리나 매 등 맹금류가 날아드는 장면도 그려진다. 이 맹금류는 인간의 발을 가지고 있어, 새의 모습으로 변장한 사제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황소의 머리, 특히 뿔은 남성 신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표범 벽화나 유방 모형은 지모신이나 출산의 여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53]
제임스 멜라트는 하산 산을 배경으로 한 취락 그림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로 해석했지만, 이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밝혀졌다.[46][47]
유적 상층에서 발견된 토우는 풍부한 종교적 상징성을 보여준다. 여성 조각상은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대리석,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알라바스터, 점토 등으로 제작되었다. 남신상도 있었지만, IV층 이후로는 여성상이 압도적으로 많다.
정교한 여신상은 제임스 멜라트가 "사당"이라 생각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곡물 창고에서 발견된 여신상은 곡물 수확을 보장하거나 수호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안 호더는 멜라트가 발견한 것과 유사한 여신상을 발견했는데, 이 여신상은 팔이 가늘고 뼈가 드러난 독특한 형태였다.
제임스 멜라트의 날조 사건 이후, 비만 남성상 등도 발견되어 현재는 모신이 아닌 비만형 여성상으로 해석된다.[50][49]
4. 종교
차탈회위크에서는 여성 조각상이 많이 발견되었다. 최초 발굴자 멜라아트는 이 조각상들이 여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발굴자인 이안 호더는 모계 사회나 어머니 여신 숭배의 증거는 거의 없다고 반박한다.
멜라아트는 대리석,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설화석고, 점토 등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여성 조각상들이 여신을 나타내며, 남신상보다 훨씬 많고 레벨 VI 이후에는 남신상이 묘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27] 그는 두 마리의 암사자가 옆에 있는 왕좌에 앉아있는 여신상이 곡물 창고에서 발견된 것을 근거로, 이 여신이 수확을 보장하거나 식량 공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추측했다.[28]
그러나 호더는 멜라아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2004년과 2005년에 발견된 조각상들은 멜라아트가 제시한 어머니 여신 스타일과는 다르다고 지적한다.[30] 그는 차탈회위크에서 모계 사회나 부계 사회의 징후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호더는 ''터키 데일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권력의 균형이 있었다"고 말했다.[32] 그는 ''후리예트 데일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남녀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고 언급했다.[33]
2009년 9월, 약 2000개의 조각상이 발견된 후 호더는 "차탈회위크가 어머니 여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현대 과학 연구가 약화시키고 있는 많은 신화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34] 린 메스켈 교수는 새로운 발굴에서 발견된 2,000개의 조각상 중 대부분은 동물을 묘사하고 있으며, 여성 조각상은 5% 미만이라고 설명했다.[34]
에스토니아 민속학자 우쿠 마싱은 1976년에 차탈회위크가 사냥과 채집 종교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어머니 여신 조각상은 여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제안했다.[35] 그의 이론은 논문 "차탈회위크 사람들의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언급"에서 발전했다.[36]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죽은 자를 마을 내부에 매장했으며, 유해는 바닥 아래 묘혈에 굴장 형태로 매장되었다.[51] 일부 무덤에서는 관절이 빠진 뼈가 발견되었고, 두개골이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두개골 중에는 옻칠과 황토색 물감으로 채색된 것도 있어, 시리아나 예리코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2018년 제임스 멜라트의 날조 사건 이후, 비만 남성상 등의 도형상도 발견되어 현재는 모신이 아니라 비만형 여성상으로 해석된다.[50][49]
4. 1. 종교적 상징
차탈회위크에서는 내부 및 외부 벽에서 선명한 벽화와 상이 발견된다. 특히 차탈회위크의 앉아있는 여성으로 알려진 여성의 독특한 점토 상이 유적지의 상층에서 발견되었다.[23] 식별 가능한 사원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덤, 벽화, 상은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상징이 풍부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항목이 집중된 방은 사당 또는 공공 회의 공간이었을 수 있다. 주요 이미지에는 발기된 음경을 가진 남성, 사냥 장면, 멸종된 오록스(야생 소)와 수사슴의 붉은 이미지, 그리고 머리 없는 인물에게 돌진하는 독수리가 포함된다.[8] 부조 조각이 벽에 새겨져 있으며, 서로 마주보는 암사자 등이 있다.


특히 소의 머리가 벽에 걸려 있었다. 하산 산의 쌍둥이 봉우리가 배경으로 그려진 마을 그림은[24] 자주 지도 제작사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로 인용되며[25] 최초의 풍경화로 여겨진다.[8] 그러나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스테파니 미스는 화산 대신 표범 가죽의 그림일 가능성이 더 크고, 지도 대신 장식적인 기하학적 디자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26]
차탈회위크의 특징은 여성 조각상이다. 최초 발굴자인 멜라아르트(Mellaart)는 이러한 정교하게 제작된 조각상들이 대리석, 파란색 및 갈색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설화석고, 점토로 조각되고 빚어져 여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남신 또한 존재했지만, "여신 조각상은 남신 조각상보다 훨씬 많으며, 레벨 VI 이후에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27] 지금까지 18개의 층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멜라아르트가 신전이라고 믿었던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암사자가 옆에 있는 왕좌에 앉아있는 위엄있는 여신은 곡물 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멜라아르트는 이것이 수확을 보장하거나 식량 공급을 보호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28]
멜라아르트는 4계절 동안 약 200채의 건물을 발굴했지만, 현재 발굴자인 이안 호더(Ian Hodder)는 한 건물을 발굴하는 데 한 계절 전체를 보냈다.[29] 호더와 그의 팀은 2004년과 2005년에 멜라아르트가 제시한 패턴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사한 조각상 하나를 발견했지만, 압도적인 다수는 멜라아르트가 제시한 어머니 여신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았다. 호더는 어머니 여신 문화 대신, 이 유적지에서 모계 사회 또는 부계 사회에 대한 징후는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30]
''터키 데일리 뉴스''의 한 기사에서, 호더는 차탈회위크가 모계 사회였다는 것을 부인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의 균형이 있었다. 또 다른 예는 발견된 두개골이다. 차탈회위크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죽은 후 시신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여성과 남성의 두개골 수는 거의 동일하다."[32] ''후리예트 데일리 뉴스''의 또 다른 기사에서 호더는 "우리는 남녀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33]
2009년 9월, 약 2000개의 조각상이 발견된 것에 대한 보고서에서 호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되었다.
린 메스켈 교수는 최초 발굴에서 200개의 조각상만 발견되었지만, 새로운 발굴에서는 2,000개의 조각상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동물을 묘사했고, 5% 미만의 조각상만이 여성을 묘사했다고 설명했다.[34]
에스토니아 민속학자 우쿠 마싱은 1976년에 이미 차탈회위크가 사냥과 채집 종교였을 가능성이 높고 어머니 여신 조각상은 여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제안했다. 그는 아마도 농업 의례를 위한 상징을 개발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35] 그의 이론은 논문 "차탈회위크 사람들의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언급"에서 발전했다.[36]
차탈회위크의 주민들은 죽은 자를 마을 내부에서 매장했다. 유해는 바닥 아래에 묘혈을 만들어서 매장되었다. 특히 난로 아래, 주요 방의 기단이나 "침대" 아래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다. 유해는 기단 아래 60cm 정도 깊이에 몸을 작게 구부리고(굴장), 왼쪽을 아래로, 머리를 방 중앙으로 향하게 하여 바구니나 갈대류의 돗자리 같은 것에 싸여 매장되었다.[51]일부 무덤에서는 관절이 빠진 뼈가 발견되었다. 아마 유해는 매장되기 전에 장기간 외기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덤이 훼손되면 한 구의 골격에서 머리가 제거된 경우도 보인다. 두개골이 취락의 전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유해의 두개골은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개골 중에는 옻칠과 황토색 물감으로 채색되어 인간의 머리를 "복원"하려는 것도 있다. 이러한 관습은 시리아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나 신석기 시대의 예리코 등 차탈회위크 인근의 유적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생생한 벽화는 거주 구역 곳곳, 방 안쪽과 벽 바깥쪽에서 발견된다. 벽화는 가는 붓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칠해서 그렸다고 생각된다. 페인트의 원료는 적토, 남동광, 진사, 공작석, 방연광, 망간 등 아나톨리아에서 구할 수 있는 광물로 만들어졌다. 바탕은 흰색이나 크림색이며, 벽화에는 주로 빨강과 적갈색이 사용되었지만, 검정, 노랑, 남색, 파랑, 회색이 사용된 예도 있다. 많은 벽화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들어갈 크기였지만, 예외적으로 큰 벽화도 그려졌다. 사람이나 동물을 그린 것, 기하학 무늬, 새빨갛게 칠해진 것, 사람의 손을 나란히 그린 것 등 그려진 주제는 다양했다. 층이 다른 두 개의 의식이 행해졌다고 추측되는 방에서, 사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북쪽 벽에 2m나 되는 거대한 붉은 황소를 그리고, 그 주위에 몇몇 사람이 표범 가죽의 샅바를 하고 춤추는 모습을 그렸다. 그려진 인물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몸을 붉게 칠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벽화보다 오래된 V층에서는, 벽 네 면을 사용하여 멧돼지, 사슴, 곰, 늑대, 오나거라고 불리는 야생 노새, 사자 및 기타 동물을 그린 벽화가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은 사냥 장면이 아니라 미케네 문화에서 보이는 의식이나 현재의 투우와 같은 동물을 사용한 축제와 같은 상징적인 것을 그렸다고 추측하고 있다. 제III층에서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개와 같은 동물을 사용하여 남성 사냥꾼이 수사슴을 화살로 쏘는 그림이 발견되었다. VI층에서는, 갈대와 멍석으로 만든 납골당에 직물을 깔고 움푹 들어간 두개골이 놓여 있는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죽은 자에 관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그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자주 보이는 것은 사냥을 하는 남성들이 페니스를 발기시킨 장면이다. 또한 현재는 멸종된 들소류를 붉게 그린 경우도 있다. 또한, 머리 없는 인간에게 독수리나 매 등의 맹금류가 날아드는 장면도 그려진다. 이 벽화의 맹금류는, 인간의 발을 가지고 있는데, 의식 때 새의 모습으로 변장한 사제들 사이에 머리 없는 시체가 놓여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체 처리 방법으로 흰머리독수리 등에게 시체의 살점을 쪼아 먹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벽에는 동물의 머리, 특히 황소의 머리가 많은데, 황소의 두개골이나 뿔을 심으로 하여 흙으로 복원하는 것처럼 굳힌 것이 보이는 한편, 황소나 수사슴의 머리가 부착된 예도 있다. 동물의 머리상은, 3개, 5개, 7개와 같은 단위로 낮은 기단이나 벽에 부착되거나, 새로운 시기의 뿔이 달린 헌물을 놓는 데 사용한 대와 비슷한 흙 기둥에 부착되기도 했다. 이러한 동물 머리상에서, 특히 황소의 뿔은 남성 신격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한편, 제VII층에서 발견된[53] 표범의 벽화나 유방 모형에는, 토우와 함께 지모신이나 출산의 여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배경에 차탈회위크에서 140km 떨어진 하산 산 또는 하산 다으 화산의 두 봉우리를 배경으로 취락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고 해왔지만, 나중에 제임스 멜라트의 자의적인 해석이었다고 밝혀졌다.[46][47] 유적 상층에서 여성의 토우가 발견되었다. 신전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유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묘, 벽화, 토우는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풍부한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것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방은 "사당"[54] 또는 공공 회의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탈회위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성 조각상 (토우 또는 석우)이다. 처음에 발굴 조사를 한 멜라트는 정성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은 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대리석, 푸른빛을 띤 석회암, 갈색을 띤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알라바스터를 조각하거나 점토로 빚어 만들어졌다. 남신도 있었지만, IV층 이후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여신상은 남신상에 비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신상은 멜라트가 "사당"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사자 (또는 고양이과 동물)가 옆에 있는 여신상 한 개가 곡물 창고에서 발견되었을 때, 멜라트는 곡물의 수확을 보장하거나 곡물의 공급을 수호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멜라트가 4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200곳 가까운 건물을 조사한 반면, 이안 호더는 단 하나의 건물에 전체 조사 기간을 소비했다. 호더는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멜라트가 발견해 온 엄청난 양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풍만한 비만형 여신상과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 2005년에 발견된 것은 충격적이었고, 호더는 차탈회위크에 관한 공식 사이트에서 차탈회위크에 관한 사회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고 전제하고, "여신상의 풍만한 가슴에는 양팔이 놓여 있고, 복부가 중앙부를 이루며 크게 튀어나와 있다. 여신상 중 하나를 회전시켜 방향을 바꾸면 팔이 매우 가늘고 매우 호리호리하며 말라비틀어진 인물의 뼈나 골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비뼈와 척추뼈가 드러나 있다. 견갑골과 골반도 드러나 있다. 이 여신상은 차탈회위크의 사회와 표현력의 성격에 대한 시각을 일변시키는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2018년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한 날조 사건이 발각된 이후, 그에 의해 숨겨져 있던 비만 남성상 등의 도형상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모신이 아니라 비만형 여성상으로 해석된다.[50][49]
4. 2. 모계 사회 논쟁
차탈회위크의 특징은 여성 조각상이다. 최초 발굴자인 제임스 멜라아트는 이 정교한 조각상들이 대리석, 파란색 및 갈색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설화석고,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여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남신도 존재했지만, "여신 조각상은 남신 조각상보다 훨씬 많으며, 레벨 VI 이후에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27] 지금까지 18개의 층이 확인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멜라아트가 신전이라고 믿었던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암사자가 옆에 있는 왕좌에 앉아있는 위엄있는 여신상은 곡물 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멜라아트는 이것이 수확을 보장하거나 식량 공급을 보호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8]멜라아트는 4계절 동안 약 200채의 건물을 발굴했지만, 현재 발굴자인 이안 호더는 한 건물을 발굴하는 데 한 계절 전체를 보냈다.[29] 호더와 그의 팀은 2004년과 2005년에 멜라아트가 제시한 패턴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사한 조각상 하나를 발견했지만, 대부분은 멜라아트가 제시한 어머니 여신 스타일을 따르지 않았다. 호더는 어머니 여신 문화 대신, 이 유적지에서 모계 사회 또는 부계 사회에 대한 징후는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30]
''터키 데일리 뉴스''의 한 기사에서, 호더는 차탈회위크가 모계 사회였다는 것을 부인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의 균형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발견된 두개골입니다. 차탈회위크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죽은 후 시신과 머리가 분리되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여성과 남성의 두개골 수는 거의 동일합니다."[32] ''후리예트 데일리 뉴스''의 또 다른 기사에서 호더는 "우리는 남녀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33]
2009년 9월, 약 2000개의 조각상이 발견된 것에 대한 보고서에서 호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되었다.
린 메스켈 교수는 최초 발굴에서 200개의 조각상만 발견되었지만, 새로운 발굴에서는 2,000개의 조각상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동물을 묘사했고, 5% 미만의 조각상만이 여성을 묘사했다고 설명했다.[34]
에스토니아 민속학자 우쿠 마싱은 1976년에 이미 차탈회위크가 사냥과 채집 종교였을 가능성이 높고 어머니 여신 조각상은 여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제안했다. 그는 아마도 농업 의례를 위한 상징을 개발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35] 그의 이론은 논문 "차탈회위크 사람들의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언급"에서 발전했다.[36]
유적 상층에서 여성의 토우가 발견되었다. 신전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유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묘, 벽화, 토우는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풍부한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것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방은 "사당"[54] 또는 공공 회의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탈회위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성 조각상 (토우 또는 석우)이다. 처음에 발굴 조사를 한 멜라트는 정성을 들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은 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대리석, 푸른빛을 띤 석회암, 갈색을 띤 석회암, 편암, 방해석, 현무암, 알라바스터를 조각하거나 점토로 빚어 만들어졌다. 남신도 있었지만, IV층 이후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여신상은 남신상에 비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신상은 멜라트가 "사당"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사자 (또는 고양이과 동물)가 옆에 있는 여신상 한 개가 곡물 창고에서 발견되었을 때, 멜라트는 곡물의 수확을 보장하거나 곡물의 공급을 수호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멜라트가 4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200곳 가까운 건물을 조사한 반면, 이안 호더는 단 하나의 건물에 전체 조사 기간을 소비했다. 호더는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멜라트가 발견해 온 엄청난 양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풍만한 비만형 여신상과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 2005년에 발견된 것은 충격적이었고, 호더는 차탈회위크에 관한 공식 사이트에서 차탈회위크에 관한 사회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신상의 풍만한 가슴에는 양팔이 놓여 있고, 복부가 중앙부를 이루며 크게 튀어나와 있다. 여신상 중 하나를 회전시켜 방향을 바꾸면 팔이 매우 가늘고 매우 호리호리하며 말라비틀어진 인물의 뼈나 골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비뼈와 척추뼈가 드러나 있다. 견갑골과 골반도 드러나 있다. 이 여신상은 차탈회위크의 사회와 표현력의 성격에 대한 시각을 일변시키는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8년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한 날조 사건이 발각된 이후, 그에 의해 숨겨져 있던 비만 남성상 등의 도형상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모신이 아니라 비만형 여성상으로 해석된다.[50][49]
5. 사회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사회적 계층 분화가 거의 없이 비교적 평등한 사회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나 사제가 사용했을 법한 특징을 가진 가옥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최근 조사에서는 젠더에 기반한 약간의 사회적 구별만이 있었을 뿐이다. 남성과 여성은 음식을 평등하게 나누었고, 사회적 계층도 평등했다.[37][38]
유적지 상층부에서는 농업과 가축 사육의 흔적이 발견된다. 밀, 보리, 완두콩 등이 재배되었고, 아몬드, 피스타치오 등도 채집되었다. 양과 소의 가축화도 이루어졌지만, 사냥은 여전히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도자기 제작과 흑요석 석기 제작이 주요 산업이었으며, 흑요석 석기는 지중해산 조개나 시리아산 부싯돌 등과 교역하는 데 사용되었다.[40]
5. 1. 평등 사회
차탈회위크에서는 군주나 사제 계급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평등주의 사회였을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성별에 따른 사회 계층화 차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남녀 모두 동등한 영양을 섭취하고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석기 시대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37][38] 아이들은 가정에서 어른들이 조각상, 구슬 등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수행하고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20]차탈회위크의 공간 배치는 사람들 간의 가까운 친족 관계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의 반대편에 살았던 두 그룹"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또한,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적 분리는 두 개의 상호 결혼 친족 집단을 표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매우 초기에 정착지가 이렇게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39]
유적지 상층부에서는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농업 기술과 동물 가축화 기술을 익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된 저장고에서 여성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곡물을 보호하는 신의 형상으로 추정된다. 완두도 재배되었으며, 주변 언덕의 나무에서 아몬드, 피스타치오, 과일이 수확되었다. 양이 가축화되었으며, 소 가축화의 시작을 시사하는 증거도 있다. 그러나 사냥은 여전히 공동체의 주요 식량 공급원이었다. 도자기와 흑요석 도구는 주요 산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흑요석 도구는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조개껍데기 및 시리아의 부싯돌과 같은 물품과 거래되었을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반자본주의 작가인 머레이 북친은 차탈회위크에 계층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아나코-공산주의의 초기 사례라고 주장했다.[40]
반면, 2014년 논문에서는 차탈회위크의 모습이 좀 더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요리 도구와 일부 석기 도구는 평등하게 분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깨지지 않은 맷돌과 저장 장치는 더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사유 재산은 존재했지만 공유 도구도 존재했다. 차탈회위크는 세대 간의 부의 이전이 증가하면서 덜 평등해지고 있었다는 점도 시사되었다.[41]
5. 2. 친족 관계
차탈회위크는 군주나 사제 계급과 같이 뚜렷한 특징을 가진 집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평등주의 사회였다는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도 성별에 따른 사회 계층화의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남녀 모두 동등한 영양을 섭취하고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반적으로 구석기 시대 문화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37][38] 아이들은 가정에서 관찰하며, 어른들이 조각상, 구슬 및 기타 물건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수행하고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20]차탈회위크의 공간 배치는 사람들 간의 가까운 친족 관계 때문일 수 있다. 배치에서 사람들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의 반대편에 살았던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또한,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적 분리는 두 개의 상호 결혼 친족 집단을 표시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초기에 정착지가 이렇게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39]
6. 경제
차탈회위크는 군주나 사제 계급에 속하는 집이 발견되지 않아 평등주의 사회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도 성별에 따른 사회 계층화의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남녀 모두 동등한 영양을 섭취하고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37][38] 아이들은 가정에서 어른들이 조각상, 구슬 및 기타 물건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수행하고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20]
차탈회위크의 공간 배치는 사람들 간의 가까운 친족 관계 때문일 수 있다. 배치에서 사람들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의 반대편에 살았던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또한,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적 분리는 두 개의 상호 결혼 친족 집단을 표시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초기에 정착지가 이렇게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39]
도자기와 흑요석 도구는 주요 산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흑요석 도구는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조개껍데기 및 시리아의 부싯돌과 같은 물품과 거래되었을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반자본주의 작가인 머레이 북친은 계층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없다는 점에 주목하며 차탈회위크를 아나코-공산주의의 초기 사례라고 주장했다.[40]
반대로, 2014년 논문에서는 차탈회위크의 모습이 더 복잡하며, 요리 도구와 일부 석기 도구는 평등하게 분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깨지지 않은 맷돌과 저장 장치는 더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유 재산은 존재했지만 공유 도구도 존재했다. 차탈회위크는 세대 간의 부의 이전이 증가하면서 덜 평등해지고 있다는 점도 시사되었다.[41]
6. 1. 농업과 가축 사육
유적지 상층부에서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농업 기술과 동물 가축화 기술을 익혔음이 분명해진다. 밀과 보리와 같은 곡식을 보관하는 데 사용된 저장고에서 여성 조각상이 발견되었으며, 이 조각상은 곡식을 보호하는 신의 형상으로 추정된다.[40] 완두도 재배되었으며, 주변 언덕의 나무에서 아몬드, 피스타치오, 과일이 수확되었다. 양이 가축화되었으며, 소 가축화의 시작을 시사하는 증거도 있다. 그러나 사냥은 여전히 공동체의 주요 식량 공급원 역할을 했다.[40]6. 2. 수렵과 채집
차탈회위크에서는 군주나 사제 계급과 같이 뚜렷한 특징을 가진 집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평등주의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최근 연구에서도 성별에 따른 사회 계층화 차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남녀 모두 동등한 영양을 섭취하고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석기 시대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37][38]유적지 상층부에서는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농업 기술과 동물 가축화 기술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된 저장고에서 여성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곡물을 보호하는 신의 형상으로 추정된다. 완두도 재배되었으며, 주변 언덕의 나무에서 아몬드, 피스타치오, 과일을 수확했다. 양을 가축화했으며, 소 가축화를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그러나 사냥은 여전히 공동체의 주요 식량 공급원이었다. 도자기와 흑요석 도구는 주요 산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흑요석 도구는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조개껍데기 및 시리아의 부싯돌과 같은 물품과 거래되었을 것이다.[40]
6. 3. 교역
차탈회위크 유적지 상층부에서는 농업 기술과 동물 가축화 기술이 발달했음이 확인된다. 밀, 보리와 같은 곡물을 보관하던 저장고에서 여성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곡물을 보호하는 신의 형상으로 추정된다.[40] 완두도 재배되었으며, 주변 언덕의 나무에서 아몬드, 피스타치오, 과일을 수확했다. 양을 가축화했으며, 소 가축화의 초기 증거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냥은 여전히 주요 식량 공급원이었다. 도자기와 흑요석 도구 제작은 주요 산업이었으며, 흑요석 도구는 지중해 조개껍데기, 시리아 부싯돌 등과 교역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40]7. 세계유산 등재
차탈회위크는 201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튀르키예에 위치한 이 유적지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독특한 문화적 전통과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인정받았다.
7. 1. 등재 기준
차탈회위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로, 다음 기준을 충족한다.8. 박물관
2023년 코냐 시에서 건설한 최첨단 박물관이 부지에 문을 열었다. 2024년 10월 현재 서점과 카페가 부지에 추가되었다. 방문객은 터키 방문객을 제외하고 1인당 5EUR를 입장료로 지불해야 한다. 터키어와 영어로 제공되는 여러 방문객용 정보 데스크가 있다. 90세기 전에 거주자들이 사용했던 전형적인 주거지를 지하에서 재현한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발굴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전체 정보가 8개의 방에서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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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ddess and the Bull
Free Press
[30]
웹사이트
Çatalhöyük: Ancient History of the Anatolia
http://www.catalhoyu[...]
[31]
웹사이트
New finds and new interpretations at Çatalhöyük
http://www.catalhoyu[...]
Catalhoyuk Research Project, Institute of Archaeology
[32]
뉴스
A Journey to 9000 years ago
http://www.turkishda[...]
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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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atalhöyük excavations reveal gender equality in ancient settle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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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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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techniques undermine 'mother goddess' role in the community" ''Irish Times'' September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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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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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arded Tellistes
Ilmam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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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Oriental Studies 3. Acta et Commentationes Universitatis Tartuensis 392 / Tartu Riikliku Ülikooli Toimetised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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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37]
서적
A Global History from Prehistory to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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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ntice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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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Nature of Paleolithic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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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Family: A Worl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40]
서적
The Rise of Urbanisation and Decline of Citize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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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Domestication and inequality? Households, corporate groups and food processing tools at Neolithic Çatalhöyük.
2014
[42]
문서
古代ではイコニウム (Iconium)と呼ばれた。
[43]
문서
ルイス・ビンフォード
http://www.25nk.com/[...]
[44]
문서
ケンブリッジ大学のカリスマ的な考古学者で、西アジアやギリシャの遺跡の調査成果から、「初期国家単位」 (Early State Module)の概念や黒曜石をはじめとする交易の研究から「離心減少モデル」とそれをいくつかのパターンに分けてグラフ化したフォールオフ・モデルを提唱したこと、インド・ヨーロッパ語族は、アナトリアが「原郷」であって、その言語のひろがりは、[[農業]]の普及と移住の結果であるという説を唱えたことなどで知られる。
[45]
웹사이트
Famed Archaeologist 'Discovered' His Own Fakes at 9,000-Year-Old Settlement
https://www.livescie[...]
2018-03-12
[46]
웹사이트
Çatalhöyük ‘Map’ Mural May Depict Volcanic Eruption 8,900 Years Ago {{!}} Sci.News
https://www.sci.news[...]
201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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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Identifying the Volcanic Eruption Depicted in a Neolithic Painting at Çatalhöyük, Central Anatolia, Turkey
https://journals.plo[...]
2014-01-08
[48]
웹사이트
チャタル・ホユック、「世界最古の地図」と呼ばれた壁画の解釈問題が再燃
https://55096962.see[...]
2018-03-23
[49]
웹사이트
Was there a belief in the Mother Goddess at Çatalhöyük?
https://www.catalhoy[...]
2017-01-13
[50]
웹사이트
チャタル・ホユックの女性坐像、かつては「女神」と解釈されていたが今は「年配女性」になっている
https://55096962.see[...]
2024-09-18
[51]
문서
たとえば、VIA層のある「祠堂」では、北西部の基壇の下から男性の遺体、別の基壇からは女性と子どもの遺体が発見された。
[52]
문서
この印章のかたちには、渦巻き、三角形、格子状など深い刻線で刻まれた幾何学文が彫られている。この印章が押印されたものが出土しないため、腐りやすいものや朽ちてなくなるようなもの、たとえば、織物、皮革製品などに用いられたのではと推察されている。
[53]
문서
後述する「祠堂」のひとつから発見された。
[54]
문서
英語では、shrineと表現され、チャタル・ヒュユク遺跡の場合、日本語では、「祠堂」という訳語を与えることが定着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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