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최용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용신은 일제강점기 농촌 계몽 운동가로, 소설 《상록수》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190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개화된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하며, 1935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소설 《상록수》, 영화 상록수로 제작되었으며, 안산시에는 최용신 기념관과 용신로가 조성되어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 이승훈 (1864년)
    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이윤영 (1890년)
    3·1 운동 참여, 신사참배 저항 등의 활동을 한 일제강점기 목사이자 교육자이며 해방 후 조선민주당 창당, 제헌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신흥대학 학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현순
    현순은 하와이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및 내무부 차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외교 활동과 임시정부 재정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 일제강점기의 교사 - 윤봉길
    윤봉길은 1908년 출생하여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요인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교사 - 남광우
    남광우는 중세 한국어 어휘 및 한자음 연구와 고어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한자어 병행 교육을 강조한 대한민국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다.
최용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최용신 선생 초상화
최용신 선생 초상화
본명최용신
출생일1909년 8월 12일
출생지대한제국 함경남도 덕원군 두남리 (오늘날의 원산시)
사망일1935년 1월 23일
사망지일제강점기 조선 수원군 반월면 천곡 (현 안산시)
사망 원인장 충접증
매장지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3동 879-4 (샘골서길 64)
국적대한제국
직업교사
활동 기간1931-1935
종교감리교
웹사이트최용신기념관
관련 활동독립운동
농촌계몽운동
영향을 줌심훈
가족 관계
부모최창희(부)
형제 자매최시풍(큰오빠)
최시향(둘째오빠)
최용순(언니)
최용경(여동생)
친척최만희(막내삼촌)
최직순(고모)
학력

2. 생애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오늘날의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경주 최씨 문중 출신으로, 조부는 사재를 털어 사립학교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버지 최창희민족주의자이자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애국애족 정신이 깊은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환경은 최용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8세에 두남학교에 입학하여 애국지사 이신애를 만났고, 2년 후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원산루씨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는 당대 이름난 개신교 여학교 중 하나였으며, 1928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여고생 시절부터 사회활동을 하며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에(1928.04.01. 조선일보)”라는 제목으로 학교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기고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29년 협성여자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했다. 신학교 재학 중 황에스더 선생을 만나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굳혔다. 황에스더는 YWCA와 협력하여 학생들에게 농촌활동 기회를 제공했다. 최용신은 황해도 수안 용현리에서 첫 농촌 실습을 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교훈 삼아 경상북도 포항 옥마동에서 두 번째 실습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34년 농촌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낀 최용신은 일본 유학을 결심,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조선인 학생 모임, 양로원 방문 등에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했고, 교지에 '사해동포적 사랑'을 담은 '나의 소감'을 기고했다. 일본에서 약혼자 김학준과 재회하여 청혼을 받았으나, 학업과 농촌사업 목표를 위해 결혼을 미루자고 제안했다.[1]

일본 유학 3개월 만에 과로로 각기병 등 여러 병이 생겨 천곡(샘골)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천곡(샘골)로 돌아왔다. YWCA의 재정난으로 천곡(샘골)에 대한 후원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최용신은 ‘여론’이라는 잡지에 ‘농민의 하소연’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도움을 호소했다.[5]

1935년 1월 18일, 몸이 채 낫지도 않은 채 수업을 강행하던 최용신은 장중첩증으로 쓰러져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했다. 두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화농성복막염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1월 23일 사망했다.[6]

최용신의 묘


최용신은 죽는 순간까지 천곡(샘골)과 학생들을 생각하며, 천곡(샘골) 강습소를 계속 운영해 줄 것과 자신의 유해를 강습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6] 천곡(샘골) 마을 사람들은 최용신의 유언을 따라 천곡(샘골)교회와 천곡(샘골)학원 연합의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6]

최용신의 유언[6]


2. 1. 인물 배경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오늘날의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는 개신교가 일찍 자리를 잡아 한민족을 존중하는 이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였다.

최용신의 집안은 경주 최씨 문중으로, 조부는 사재를 들여 사립학교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버지 최창희민족주의자로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조부와 아버지의 애국애족 정신은 최용신에게 이어졌다. 큰아버지는 경제력이 있어 최용신을 학교에 보냈고, 막내삼촌 최만희연세대학교를 나와 군정청 상무부 무역국장을 지냈다. 고모 최직순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최용신과 함께 YWCA 활동가로 활동했다.

최용신은 8살에 두남학교에 입학하여 애국지사 이신애를 만났다. 2년 후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원산루씨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는 당대 이름난 개신교 여학교 중 하나였으며, 최용신은 1928년에 21명의 졸업생 중 한 명으로 수석 졸업했다. 여고생 시절부터 사회활동을 하며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에(1928.04.01. 조선일보)”라는 제목으로 학교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기고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29년 협성여자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본과에 진학했다. 신학교 재학 중 황에스더 선생을 만나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굳혔다. 황에스더는 YWCA와 협력하여 학생들에게 농촌활동 기회를 제공했다. 최용신은 황해도 수안 용현리에서 첫 농촌 실습을 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교훈 삼아 경상북도 포항 옥마동에서 두 번째 실습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농촌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낀 최용신은 1934년 일본 유학을 결심,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조선인 학생 모임, 양로원 방문 등에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했고, 교지에 '사해동포적 사랑'을 담은 '나의 소감'을 기고했다. 일본에서 약혼자 김학준과 재회하여 청혼을 받았으나, 학업과 농촌사업 목표를 위해 결혼을 미루자고 제안했다.[1]

2. 1. 1. 최용신의 집안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오늘날의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두남리는 원산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명사십리의 푸른 솔과 흰 모래, 해당화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원산과 가까운 항구도시였으며, 원산보다도 비교적 일찍 개화된 도시였다. 개신교황해도 소래교회를 시작으로 북한 지역에서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에서도 개신교가 일찍 자리를 잡았고, 한민족을 존중하는 이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였다.

최용신의 집안은 정치적 격변에 휩싸여 귀양 오기 전까지 경주 최씨 문중으로 경주에서 지냈다. 조부는 사재를 들여 사립학교를 세웠으며, 나라를 지키는 일은 오로지 교육뿐이라 생각하여 가난해서 학교를 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아버지 최창희민족주의자로, 1920년 미의원한국방문단에 한국 독립 의지를 전하다가 연행되었으며,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조부와 아버지의 애국애족 정신은 최용신에게 이어졌다.

큰아버지는 경제력이 있어 개신교의 영향으로 여성의 공부에 너그러웠기에 최용신을 학교에 보냈다. 막내삼촌 최만희연세대학교를 나와 군정청 상무부 무역국장을 지냈다.

고모 최직순은 최용신보다 2살 위였으며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 후 이화여고 교사를 거쳐 미국 유학을 갔다. 최용신과 같이 YWCA 활동가였으며, 말년에는 샘골에서 6개월 동안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최용신의 농촌 활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1]

2. 1. 2. 두남학교와 루씨학교 시절

최용신은 8살이 되던 해인 1918년 봄에 두남학교에 입학한다. 두남학교에서 애국지사 이신애를 만난다. 이신애는 원산지역 항일조직을 만들고 주민을 위한 부흥회도 열었다. 경성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 순경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그곳에서도 일제에 투쟁하다 고문을 당한다.

2년 후 최용신은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가고,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지금의 원산루씨고등여학교)로 진학하여 공부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는 이화학당, 배화학당, 숭의여고, 호수돈여고와 함께 당대 이름난 개신교 여학교 5곳 중 한 곳이었으며, 최용신이 졸업한 1928년의 졸업생은 단 21명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용신은 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20년 동안 성서를 가르친 전희균 목사는 최용신이 루씨여학교 재학 중 성서 시험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만점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최용신은 여자고등보통학교, 즉 여고생 시절부터 사회활동(두호구락부와 교회를 통한 토론회)을 하며 농촌 문제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최용신이 졸업하면서 신문에 기고한 “교문에서 농촌에(1928.04.01. 조선일보)”를 보면 학교에서 배우고 느낀 것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다.

2. 1. 3. 협성여자신학교 시절과 농촌 계몽 활동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용신은 전희균 목사의 권유로 1929년 협성여자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본과에 진학했다. 신학교 재학 중에 최용신은 황에스더 선생을 만나 농촌계몽운동에 더욱 확고한 뜻을 기울이게 되었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운동가로 협성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YWCA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학생들에게 농촌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지금에 빗댄다면 여성 신학생이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자의 권유로 농촌빈곤층을 돕는 활동을 결심한 것이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최용신은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황에스더와 학우 김노득과 함께 농촌으로 실습 활동을 갔다. 용현리는 주민들 대부분이 문해자들과 극빈계층에 속한 마을이었다. 지역민들은 농촌운동을 하려는 두 청년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최용신은 실패하였다. 하지만 김노득은 이에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피나는 인내와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실습을 마칠 수 있었다. 용현리 농촌 실습은 최용신에게 관념적으로 생각만 했던 농촌운동을 실제적으로 실습하고, 농촌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최용신은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 학업에 더 열중하며, 이듬해 경상북도 포항 옥마동으로 두 번째 실습을 나갔다. 두 번째 실습지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최용신은 황해도에서 농촌운동을 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실습을 끝냈다.

2. 1. 4. 일본 유학과 귀국

농촌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낀 최용신은 1934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에는 여동생 최용경과 약혼자 김학준이 이미 유학 중이었다.[1] 전재풍 목사의 아내 김복희에게 학원을 맡기고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로 유학을 갔다.[1]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농민운동의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서였다.[1] 4년 만에 학생이 된 최용신은 조선인 학생 모임, 양로원 방문 등에 참여하며 열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했다.[1] 고베여자신학교 교지에 '세계를 형제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사해동포적 사랑을 담은 '나의 소감'을 기고했다.[1]

일본에서 재회한 약혼자 김학준은 최용신에게 청혼했지만, 최용신은 자신도 연구차 유학 왔고 김학준도 학업 중이므로 졸업 후 귀국하여 농촌사업 목표를 이룰 때까지 결혼을 미루자고 제안했다.[1]

2. 2. 죽음

최용신은 1935년 1월 18일 장중첩증으로 쓰러져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했다. 두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화농성복막염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1935년 1월 23일 사망했다.[6]

최용신은 죽는 순간까지 천곡(샘골)과 학생들을 생각하며, 천곡(샘골) 강습소를 계속 운영해 줄 것과 자신의 유해를 강습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6] 최용신의 집안과 약혼자였던 김학준은 원산으로 유해를 옮겨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천곡(샘골) 마을 사람들은 최용신의 유언을 따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천곡(샘골)교회와 천곡(샘골)학원 연합의 사회장으로 장례가 결정되었다.[6]

최용신의 유언[6]


2. 2. 1. 샘골 강습소 운영과 재정난

최용신은 일본 유학 3개월 만에 과로로 각기병 등 여러 병이 생겨 더 이상 공부할 수 없게 되었다. 요양을 위해 고향 원산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천곡(샘골)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다시 천곡(샘골)로 오게 된다. 최용신이 일본 유학을 간 동안 천곡(샘골)은 뒤숭숭하여 자리를 잡지 못했다. 후임 교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교사가 계속 바뀌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결국 최용신은 천곡(샘골)로 돌아오게 되고, 다시 안정을 찾는다. 《여인열전》9부 의인의 시대:최용신(이덕일 지음,김영사)483장에 따르면, 마을 농민 중 한 명은 농촌운동가 류달영 선생에게 건강이 나쁜 최용신 선생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는데도 마을이 안정되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천곡(샘골)로 돌아온 최용신에게 정성을 다하며 병간호를 했고, 덕분에 건강은 차츰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YWCA가 재정난으로 더 이상 [http://sg21.org/ 천곡(샘골)교회]를 돕지 못한다는 소식과 함께 1934년 10월에는 보조금을 완전히 끊는다고 최후통첩을 해 왔다. 최용신은 사회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여론’이라는 잡지에 ‘농민의 하소연’이라는 글을 기고한다.[5]

“농민의 하소연”은 최용신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YWCA가 재정난으로 천곡(샘골)학원에 대한 후원을 중단한다고 통보했을 때, 사회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론” 잡지에 실은 호소문이다. 하지만 이 기고문은 유고가 된다.

2. 2. 2. 사망과 장례

몸이 채 낫지도 않은 채 수업을 강행하던 최용신은 결국 1935년 1월 18일에 장중첩증으로 쓰러지고 수원도립의원에 입원한다.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화농성복막염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결국 최용신은 1935년 1월 23일, 사망한다.[6]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천곡(샘골)을 생각하였다. 사경을 오가는 와중에도 어린 학생들의 진로를 걱정하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학원을 운영해 달라 하고 자신을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최용신의 집안에서는 원산으로 유해를 옮겨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김학준은 비록 혼인은 하지 않았으나 10년간 약혼한 사이로 자신의 집안사람이나 다름없다고 하며 자신들의 선산에 묻을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천곡(샘골) 마을 사람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최용신의 유언대로 천곡학원 근처를 묫자리로 삼고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최용신의 집안과 김학준의 집안은 샘골 마을 사람들의 완강한 주장을 이길 수 없었고, 천곡(샘골)교회와 천곡(샘골)학원의 연합의 사회장으로 결정되었다.[6]

최용신은 죽는 순간까지 천곡(샘골)과 학생들을 생각했다. 천곡(샘골) 형제들의 안위와 학생들의 진로를 걱정했다. 그리고 최용신이 죽던 1935년 4월은 김학준과 사업을 시작하기로 약속한 약혼한지 10년 째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혼란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위독을 전보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끝까지 천곡(샘골) 강습소를 걱정하며 강습소 근방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6]

최용신의 유언[6]


3. 사상

최용신은 여성의 사회 참여와 농촌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졸업 소감문 "교문에서 농촌에"에서 사회 발전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의 협력도 필요하며, 남녀가 함께 사회를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일본 유학 시절 쓴 글에서는 계급, 민족, 빈부 차별 없이 세상을 사랑해야 하며, 진정한 사랑을 통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국제 관계에서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4]

YWCA의 재정 지원 중단으로 천곡(샘골)학원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농민의 하소연"이라는 호소문을 통해 농촌 어린이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과 농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도시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했다.[5]

3. 1. 기독교 신앙과 봉사 정신

이 기도문은 류달영이 최용신 소전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여동생 최용경에게 받은 것이다. 최용신의 농촌계몽활동은 ‘남을 위해 죽겠다’라는 신앙의 힘이 바탕이 되었다.[3] 고베 여자신학교 교지 靑空|세이쿠|푸른 하늘일본어에 실린 글에서 최용신은 편협하게 차별하지 말고 세계를 형제같이 사랑하자고 하며, 사해동포적인 사랑을 표한다.[4]

최용신은 죽는 순간까지 천곡(샘골)과 학생들을 생각했다. 천곡(샘골) 형제들의 안위와 학생들의 진로를 걱정했다. 최용신이 죽던 1935년 4월은 김학준과 사업을 시작하기로 약속한 약혼한 지 10년 째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혼란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위독을 전보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끝까지 천곡(샘골) 강습소를 걱정하며 강습소 근방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여인열전》(김영사)에 따르면,[6] 샘골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의 뒷편 언덕 아래 묘비에는 최용신 선생의 가르침이 적혀 있다.

3. 2. 농촌 계몽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

최용신은 여성의 사회 참여와 농촌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졸업 소감문 "교문에서 농촌에"에서 최용신은 사회가 남성들의 노력만으로는 발전이 부족했고, 여성들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책임을 강조하며, 남녀가 함께 사회를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2]

최용신은 일본 유학 시절 쓴 글에서 계급, 민족, 빈부 차별 없이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국제 관계에서 행복과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4]

귀국 후 YWCA의 재정 지원 중단으로 천곡(샘골)학원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최용신은 "농민의 하소연"이라는 호소문을 통해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글에서 최용신은 농촌 어린이들이 배움에 굶주리고 있다며 농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시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했다.[5]

4. 기념과 평가

1995년 최용신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1] 2001년에는 문화관광부가 지정하는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고, 2005년 1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1]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최용신을 모델로 한 장편소설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현상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농촌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는 젊은이들의 헌신과 노력을 그려냈다.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받으며, 계몽운동가의 저항 의식을 형상화하여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

4. 1. 기념 사업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부터 최용신의 공로를 기념하여 사회 발전에 창의성을 발휘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로자에게 '용신봉사상'을 제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안산시가 최용신의 애국계몽정신을 기리기 위한 '최용신 봉사상'을 제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1995년 최용신 순국 60주년을 맞아 "최용신사업추진위원회"의 김우경은 홍석필, 김명옥과 함께 국가보훈처에 최용신을 독립운동가로 추서하는 신청을 냈다. 당시 청원서를 제출했던 김명옥씨에 의하면, 청원서를 접수한 직원은 "소설의 여주인공을 왜 독립유공자로 추서 신청을 하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후 최용신에 대한 당대의 신문 기사가 사료로 채택되어 1995년 최용신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1]

2001년에는 문화관광부가 지정하는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유훈비가 건립되었고, 2005년 1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1]

2004년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최용신 기념관 건립을 위해 건물과 땅을 팔아 약 1.5억을 기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11월 안산 상록구 천곡(샘골)강습소가 있던 자리에 최용신 기념관이 개관했다. 안산시청으로 통하는 광덕로와 만나는 사리사거리에서 기념관 근처를 거쳐 수인산업도로와 연결된 북고개삼거리까지의 도로는 최용신의 업적을 기념하여 용신로로 명명되었다.[1]

최용신기념관

4. 2.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

1935년 1월 27일조선중앙일보는 '수원군하의 선각자' 등의 제목으로 최용신의 별세를 보도했다. 그해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신가정' 5월호에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영원불멸의 명주, 고 최용신 양이 밟아 온 업적의 길, 천곡(샘골)학원을 찾아서'라는 기사가 실렸다.

1935년 8월,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현상 공모전에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작으로 발표되었다. 1936년 신문에 연재된 <상록수>는 소설 상록수로 발행되었다.

1939년 무교회주의자들이 창간한 신앙 동인지인 <성서조선>의 주필(편집 총 책임자) 김교신은 최용신의 생애를 전기로 남기기로 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시 후원금 문제로 최용신과 만난 적이 있는 류달영에게 집필을 부탁해 그해 가을 ‘눈 속에서 잎 피는 나무’라는 제목의 <최용신 소전>이 출판되었다.

《상록수》는 심훈이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지은 장편소설로,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상록수》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극악한 식민 통치로 인해 매우 피폐해졌다. 이것이 심각한 국내 문제로 대두되자 관에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언론기관에서도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는데,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운동들에서 취재되고, 또 이 운동들을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이다.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농촌사업과 민족주의를 고무한 공로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식민지 현실을 의식한 이 작품은 계몽운동가의 저항 의식을 형상화함으로써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7]

4. 3. 현대적 의의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부터 최용신의 공로를 기념하여 사회 발전에 창의성을 발휘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로자에게 '용신봉사상'을 수여해 오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안산시가 최용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최용신의 애국계몽정신을 기리기 위한 ‘최용신 봉사상’을 제정해 시상해 오고 있다.

1995년 최용신 순국 60주년을 맞아 “최용신사업추진위원회”의 김우경은 홍석필, 김명옥과 함께 국가보훈처에 최용신을 독립운동가로 추서해 줄 것을 신청했다. 당시 청원서를 제출했던 김명옥 씨에 따르면, 청원서를 접수한 직원은 “소설의 여주인공을 왜 독립유공자로 추서 신청을 하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후 최용신에 대한 당대의 신문 기사가 사료로 채택되어 1995년 최용신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001년에는 문화관광부가 지정하는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유훈비가 건립되었고, 2005년 1월에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5. 최용신을 소재로 한 작품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지은 장편소설로,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같은 해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7] 1961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가 제작되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상록수가 제작되었다.

5. 1. 소설 《상록수》 (1935년) - 심훈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1935년 8월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현상 공모전에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출품, 당선되었다. 이후 1936년 신문에 연재되었고 소설 상록수로 발행되었다.[7]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수탈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졌고, 이는 심각한 국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정부는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언론기관에서도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에서 취재하고, 또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이다.[7]

상록수》는 이광수의 《》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농촌사업과 민족주의를 고취한 공로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받는다. 식민지 현실을 의식한 이 작품은 계몽운동가의 저항 의식을 형상화하여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7]

5. 2. 영화 《상록수》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검열 심화로 영화 제작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6월에 요절하고 만다. 이후 1961년 9월 신상옥 감독 연출, 최은희 주연의 영화 상록수가 개봉을 한다. 영화 <상록수>의 흥행은 황폐해진 나라를 되살리자는 새마을 운동 정신으로 이어졌다. 1978년 임권택 감독 연출, 한혜숙 주연의 영화 상록수도 개봉했다.

1935년에 소설 《상록수》가 발표된 후 1961년, 《상록수》는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신필림 제작, 김강윤 각본의 영화 《상록수》에는 최은희, 신영균, 허장강, 도금봉, 신성일이 출연하였다. 50,000명의 관람객을 모은 《상록수》는 1962년 '제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다시 한번 영화화된 《상록수》에는 한혜숙, 김희라, 이일웅, 김형자 등이 출연하였다. 하지만 관객 수 861명을 기록하며 큰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6. 축제와 교육 행사

안산시에서는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상록수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6. 1. 상록수문화제

2013년부터 개최된 문화제로, 1932년에 최용신 선생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한 추석놀이를 이어받아 지금의 안산시가 함께 만드는 축제다. 축제의 주최는 안산시와 상록수 마을, 최용신기념관, 국가보훈처 등이다.[1]

상록수 문화제에서 진행하는 행사는 매년 조금씩 다른 프로그램을 선보이지만 공통적으로 나라사랑체험박람회, 기념식 및 음악회, 공연, 사생대회 등을 한다. 상록수 나라사랑체험박람회는 교육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한 최용신 선생과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진 위대한 분들을 체험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박람회이다. 참여 기관으로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안성3.1운동 기념관, 안중근 기념관, 심훈 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 등이 참여하여 체험 부스를 운영한다. 각 기관에서 서대문 형무소 체험, 태극기 만세가방 만들기 체험, 하얼빈 저격 장면 재현하기, 심훈 시화부채 그리기 체험 등을 한다.[1]

연도주요 행사 내용
제2회 (2014.9.27)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용신 선생의 상록수 정신을 계승하고, 주민들의 문화 욕구 충족 및 지역 상권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추진했다. 상록수 나라사랑체험박람회, 사생대회, 부대행사,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및 재능발표회, 기념식 및 음악회를 진행했다.[1]
제3회 (2015.9.19)순국 80주년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 위주로 기획됐다. 사생 대회, 공연, 전국 독립 관련 기념관 나라사랑체험박람회, 기념식 및 음악회 등을 진행했다.[1]
제4회 (2016.9.10)문화제 개최 전에 안산시민들이 상록수문화제 오픈 테이블을 통한 결과를 축제로 기획했다. ‘샘골 마을 놀이터’, ‘샘골 마을 공연장’, ′샘골 마을 전시장’등의 프로그램과 최용신 기념관과 샘골 교회, 성호기념관등이 참여한 최용신 교육체험박람회, 기념식 및 음악회를 진행했다.[1]


참조

[1] 서적 최용신과 샘골마을2 영음사 2016
[2] 서적 최용신과 샘골마을 한국감리교사학회 2010
[3] 서적 최용신의 생애 성천문화재단 1998
[4] 서적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안산시 2010
[5] 서적 최용신의 생애 성천문화재단사 1998
[6] 서적 여인열전,9부 의인의 시대_최용신 김영사 p.484,자료사진
[7] 소설 상록수 http://ansan.grandcu[...] 2017-07-3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