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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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성(1891년)은 대한민국의 승려로, 한용운의 제자이자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다. 1891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하여 한용운에게서 법명을 받았다. 춘성은 화엄경에 능통하여 '화엄법사'로 불렸으며, 금강산 유점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경학에 전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다. 그는 무소유와 수행을 강조하며, 파격적인 언행으로 위선을 비판하고 대중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 1977년 망월사에서 입적했으며, 그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춘성은 무소유, 수행 제일주의, 파격과 풍자, 사회 참여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승려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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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189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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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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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춘성 |
원어 이름 | 무애도인(無碍道人) |
이름 | 춘성 |
본명 | 이창림 |
출생일 | 1891년 3월 30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
입적일 | 1977년 8월 22일 |
입적지 | 대한민국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망월사 |
입적 원인 | 병사(노환) |
다비지 | 서울 화계사 문도장(門徒葬) |
국적 | 대한민국 |
민족 | 한민족 |
학력 | 1915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 수료 |
종파 | 조계종 |
소속 | 신흥사 석왕사 망월사 주지 |
출가 | 1903년 백담사, 은사: 한용운 |
수행 | 1911년 유점사, 구족계: 동선 스님 |
직업 | 승려, 독립운동가, 작가 |
부모 | 아버지 이인오, 어머니 밀양 박씨 |
기타 정보 | |
본명 (한자) | 李昌林 |
로마자 표기 (본명) | I Changrim |
법명 (한자) | 春城 |
로마자 표기 (법명) | Chunseong |
호 (한자) | 無碍道人 |
로마자 표기 (호) | Muaedoin |
2. 생애
2. 1. 생애 초기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설악산 근처에서 아버지 이인오와 어머니 밀양 박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창림, 본관은 평창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설악산 백담사 입구 주차장 근처인 인제면 용대2리 907번지라고 한다. 어머니 밀양 박씨는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했다.9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불상을 보고 출가할 뜻을 밝혔으나,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았다. 1903년 13세 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하여 출가하게 된다. 한용운을 찾아가 승려가 되겠다고 하자 한용운은 처음에는 나이가 어리다며 받아주지 않았으나, 여러 번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때 한용운에게서 춘성(春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2]
1903년 봄 삭발하고 출가하였는데, 출가도량은 인제 백담사이고, 은사는 만해 한용운이었다. 출가후 춘성(春城)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호 역시 춘성이다. 어린 시절 춘성은 인제에 있는 유명한 불교 사찰인 백담사로 갔다. 그는 제자가 되기를 청했지만, 주지 한용운은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15세의 나이에 그는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다.[2]
춘성은 화엄경과 금강경을 공부해야 했다. 그는 그것들을 매우 잘 공부해서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화엄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엄이란 '원인으로서의 수행의 꽃이 결과로서 부처님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화엄법문의 대가가 바로 그였다.[12]
191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경학(經學)에 전념했다. 1915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경학(講學)과 강연으로 이름을 날려 이후 강백(講白) 또는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명성을 날렸다.
1917년 12월에는 다시 백담사로 가서 한용운의 시중을 들었다. 한용운은 상좌 춘성에게 먹을 갈게 하여 묵향을 맡거나 취미 선사의 시를 읊조리며 무료함을 달랬다.[13]1918년에는 스승 한용운이 창간한 잡지 유심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용운은 유심을 창간할 때 그에게 상의하였다 한다.
1918년 한용운은 그에게 다시 경성으로 가자는 제의를 한다. 그러나 춘성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한용운은 그에게 "다시 한양으로 갈까?"하고 제의 한 후,[14]"우리 잡지나 한번 해보자."라고 하였다.
"못 봤습니다만 돈은 어디에서 얻어옵니까?"라고 하니 한용운은 "오세암 관세음보살님이 다 도와주실 거네."하고 답하였다.[14] 한용운은 새로 짓는 잡지의 이름을 그와 상의하였다. 한용운이 춘성 수좌, 잡지 이름을 하나 지어보게 하자 춘성은 '스님께서 미리 점지해 둔 이름은 어떤 것입니까?'하였고 한용운은 유심(惟心)이 어떤가 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라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빌린 것 아닙니까 하자 한용은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어감이 어떠냐고 되물었다.
이에 한용운은 "모르는 소리다. 소년이 뭔가. 잡지란 중생들의 무지를 깨뜨려주고 지혜를 주는 목탁같아야 하는데, 소년은 아이들끼리 돌려보는 책 이름이야."라고 하였다. 한용운의 진지한 설명에 춘성은 머지않아 잡지가 하나 탄생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1918년 장마가 끝나자 만해는 곧 오세암을 떠났다. 춘성에게 온다 간다 말 없이 도망치듯 사라졌다.[15] 한용운은 그해 11월 종로통 계동에서 잡지 유심을 발행하였다. 춘성은 바로 유심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2. 1. 1. 출생과 소년기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설악산 근처에서 아버지 이인오와 어머니 밀양 박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창림, 본관은 평창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설악산 백담사 입구 주차장 근처인 인제면 용대2리 907번지라고 한다. 어머니 밀양 박씨는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했다.9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불상을 보고 출가할 뜻을 밝혔으나,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았다. 1903년 13세 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하여 출가하게 된다. 한용운을 찾아가 승려가 되겠다고 하자 한용운은 처음에는 나이가 어리다며 받아주지 않았으나, 여러 번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때 한용운에게서 춘성(春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2]
2. 1. 2. 출가와 수행
1903년 봄 삭발하고 출가하였는데, 출가도량은 인제 백담사이고, 은사는 만해 한용운이었다. 출가후 춘성(春城)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호 역시 춘성이다. 어린 시절 춘성은 인제에 있는 유명한 불교 사찰인 백담사로 갔다. 그는 제자가 되기를 청했지만, 주지 한용운은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15세의 나이에 그는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다.[2]춘성은 화엄경과 금강경을 공부해야 했다. 그는 그것들을 매우 잘 공부해서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화엄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엄이란 '원인으로서의 수행의 꽃이 결과로서 부처님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화엄법문의 대가가 바로 그였다.[12]
191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경학(經學)에 전념했다. 1915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경학(講學)과 강연으로 이름을 날려 이후 강백(講白) 또는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명성을 날렸다.
1917년 12월에는 다시 백담사로 가서 한용운의 시중을 들었다. 한용운은 상좌 춘성에게 먹을 갈게 하여 묵향을 맡거나 취미 선사의 시를 읊조리며 무료함을 달랬다.[13]1918년에는 스승 한용운이 창간한 잡지 유심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용운은 유심을 창간할 때 그에게 상의하였다 한다.
1918년 한용운은 그에게 다시 경성으로 가자는 제의를 한다. 그러나 춘성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한용운은 그에게 "다시 한양으로 갈까?"하고 제의 한 후,[14]"우리 잡지나 한번 해보자."라고 하였다.
"못 봤습니다만 돈은 어디에서 얻어옵니까?"라고 하니 한용운은 "오세암 관세음보살님이 다 도와주실 거네."하고 답하였다.[14] 한용운은 새로 짓는 잡지의 이름을 그와 상의하였다. 한용운이 춘성 수좌, 잡지 이름을 하나 지어보게 하자 춘성은 '스님께서 미리 점지해 둔 이름은 어떤 것입니까?'하였고 한용운은 유심(惟心)이 어떤가 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라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빌린 것 아닙니까 하자 한용은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어감이 어떠냐고 되물었다.
이에 한용운은 "모르는 소리다. 소년이 뭔가. 잡지란 중생들의 무지를 깨뜨려주고 지혜를 주는 목탁같아야 하는데, 소년은 아이들끼리 돌려보는 책 이름이야."라고 하였다. 한용운의 진지한 설명에 춘성은 머지않아 잡지가 하나 탄생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1918년 장마가 끝나자 만해는 곧 오세암을 떠났다. 춘성에게 온다 간다 말 없이 도망치듯 사라졌다.[15] 한용운은 그해 11월 종로통 계동에서 잡지 유심을 발행하였다. 춘성은 바로 유심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2. 2. 일제강점기 활동
2. 2. 1. 한용운의 독립운동 지원
1919년 3.1 운동 당시, 춘성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스승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하였다.[17][19][20] 춘성은 한용운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음식과 물품을 보냈다.[3] 그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은사가 차가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어찌 제자인 내가 온기 있는 방에 몸을 누이고 잠을 잘 수 있겠소."라며 방에 불을 땐 적이 없었다.[19]한용운의 면회 중 춘성은 '조선독립의 서'를 몰래 받아 범어사의 한 스님에게 전달해 우편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20]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는 1919년 11월 4일 임시정부 기관지인《독립신문》에 게재됐다.[20] 동시에 옥중에 있는 한용운의 밀서를 받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20]
1922년 3월 어느날, 춘성은 스승을 살려내려 법당 소속의 토지문서와 등기부를 모두 팔아서 만해의 보석금을 내서 석방하게끔 했다. 그러나 한용운에게 도리어 "내가 뭔데 네가 감히 부처님의 재산을 함부로 사취해서 처분하느냐? 너는 이제부터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꾸중을 들었다.
2. 2. 2. 항일 정신과 수행
춘성은 일제의 창씨개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수행에 정진했다. 1920년 신흥사 주지를 맡았으며, 재임시 불전답(佛田畓)을 많이 확보하였다.[22] 1925년 석왕사 주지를 맡았으며 경성부 삼청동의 불자들의 힘으로 칠보사를 창건하였으며 칠보사 주지로 있으면서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도봉산 원통사의 중창에도 참여하였다.백용성의 대각교당의《화엄경》법사로 나서면서 어린이 대상 대각일요법회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1928년 6월 월간 불교에도 춘성의 이름이 거명됐으며, 그는 월간 불교지의 필진으로도 참여하여 활동했다.[22]
1930년 덕숭산 수덕사를 찾아가 만공 월면(滿空月面)의 문하에서 법사로 전법수행하였다. 만공이 '별전일구(別傳一句)가 재기처(在基處)요'하며 묻자, 춘성은 우렁찬 목소리로 일갈(一喝)하며 되받았으나 만공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춘성은 삼배를 올리고 물러나와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겨울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불도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참선수행을 거듭하였고, 1937년부터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간 수행하다 마지막 동안거 결제일에 "이제 잠은 항복받았다."고 하여 해탈하였다.
2. 3. 해방 이후 활동
1940년대에 그는 창씨개명에 협조하여 일본 식민 당국에 따라 이름을 바꾸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2]1944년 그는 만공(송월면)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덕숭산 수덕사로 갔다.[2] 만공은 한국 간화선의 최고봉이었다. 그는 만공 밑에서 수행했다. 1946년 그는 망월사의 주지로 돌아왔다. 춘성은 위선, 엄격주의, 가식적인 박애주의, 형식주의로 비난을 받았다. 1949년 7월 그는 김구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그는 피신하여 망월사로 돌아왔다.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승려들에게 돌아갔다.
전쟁 동안 그는 간화선 전통과 망월사를 지켜냈다. 1950년대 그는 망월사, 신흥사, 보문사의 주지가 되었다.
2. 3. 1. 수행과 교화
1960년 이후 망월사에서 거처하며 개인 재산을 일절 소유하지 않았다. 60년대 도봉산 망월사에서 6년간 춘성을 모셨던 서광사 주지 수명 스님은 "근래에 우리가 말하는 큰스님들은 대부분 대접을 받고, 독방에 보약을 쌓아 놓고서 사셨지만 춘성 스님은 평생을 독방에 가지 않은 채 대중들과 똑같이 큰방에 살며 수행했다"고 회고했다.[30]1962년부터 망월사 재건 불사를 시작했다. 춘성이 말년을 보낸 망월사에는 무위당, 낙가보전, 천중선원, 영산전 네 동의 건물이 중심을 이룬다. 춘성이 살던 1960년대에는 무의당 자리에만 작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25] 작은 암자였던 망월사가 건물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망월사의 지세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으로,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그런데 법당 확장 과정에서 토끼의 팔에 해당되는 부분을 포크레인으로 파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25]
대개 이러한 명당을 인위적으로 훼손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법당 스님들이 반대했지만, 춘성은 강행하여 건물을 지었다.[25] 몇 년 후 춘성의 제자이자[25] 법당 주지를 맡고 있던 스님이 교통사고로 두 팔을 못 쓰게 되었다.[32] 사람들은 '춘성 스님은 도인이니까 지세를 허물어도 상관없지만 도력이 부족한 주지가 대신 대가를 치렀다'고 수군거렸다.[32]
춘성은 생전에 이불이나 요 없이 잠을 잤다. 한국어로 이불은 "이불"(labels=no/이불한국어)이다.[2] "이불"이라는 단어가 '부처님을 떠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춘성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을 거부했다 (이불, 離佛, 부처님을 떠나다).[2]
춘성은 물건 소유를 경계했다.[2] 신자들이 옷을 주어도 만나는 거지와 부랑자들에게 나눠주었다.[2] 이 때문에 밤에 절로 돌아갈 때까지 몸을 숨겨야 할 정도였다. 또한 신자들에게 받은 모든 돈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2. 3. 2. 대중과의 소통
춘성은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수행자로서 음담패설을 즐겨했지만, 그럴수록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운수객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더 몰려들었다.[11] 그는 음담패설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법문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12]1964년, 춘성은 퍼스트레이디 육영수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그에 의해 청와대로 초청되었다. 방문 중 춘성은 "육 여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3]
1973년에는 안전 운전과 금주를 위한 대중 캠페인에 참여했다.
2. 4. 은퇴와 최후
1973년에는 안전운행, 무사고 등 교통사고 예방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해 5월부터는 하안거에 들어갔는데 성철의 장좌불와를 보고 춘성 역시 장좌불와를 했다 한다. 73년 여름 춘성은 성철이 장좌불와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하고자 침을 묻혀 뚧은 문구멍을 통하여 밤새 지켜보았다 한다. 춘성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34]'철 수좌가 철불같군[34]'
객승인 성철이 밤새 까딱을 않고 천근 만근의 철덩어리처럼 앉아있는 것이었다. 다만 밤중에 소변을 보러 한 번 나온 일 말고는 시종일관 같은 좌선의 자세였다. 춘성은 '그래, 이 늙은 중도 한바탕 장좌불와나 해보자꾸나'하고 장좌불와를 시작하였다.[34] 성격이 괄괄하고 직선적인 춘성은 다음날부터 즉시 장좌불와에 들어갔다. 늙은 나이였지만 춘성은 대중들에게 젊은 철 수좌가 내 법사야 하며 백병전을 벌이듯 장좌불와 고행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35]
그해 7월 19일부터는 법회 기원제가 열리기 전까지 전국 운수업체와 전국교도소의 교통법규 위반자를 찾아다니며 법회를 개최하였다.[36] 9월 8일부터 49일간 충청남도 공주군 마곡사에서 조계종 주최 고통안전운행기원대제봉행 대법회에 참여하였다.[37]
그는 망월사의 조실로 여생을 보냈다. 망월사를 찾은 선승들이 보는 것은 파계요, 듣는 것은 욕뿐이었다.[21] 그들은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세끼 공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속을 망론하고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21] 그는 고령에도 참선정진했다 한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체력이 약해져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좌선을 생략하는 수가 많은데, 춘성당은 80이 넘어서도 대중들과 똑같이 좌선정진하였다.[38]
그는 평소 녹차와 막걸리를 즐겨 마셨는데, 춘성은 막걸리와 맥주, 소주 등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다만 불자와 보살들이 대접할 때 곡차, 맥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 청와대 초청 법회 ====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춘성은 독실한 불자였던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다.[3] 1963년부터 양지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던[19] 육영수 여사의 생일에 특별히 청와대에 초청받은 춘성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30분이 지나고 춘성은 "오늘은 육 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28]라는 파격적인 법문을 설파하고는 자리를 떠났다.[28] 영부인의 생일에 벌어진 이 일에 귀부인들과 대중들은 당황했지만, 박정희는 오히려 웃으며 그를 격찬했다.[28] 이는 권위주의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 춘성의 강직함과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 입적 ====
1977년 봄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허공에 골체(骨體)를 보았느냐? 만월청산(滿月靑山)에 무촌수(無寸樹)하니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니라, 팔십칠년사가 칠전팔도기로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이여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니라.'라는 마지막 법어를 강론하였다. 춘성은 '내가 입적한 후에라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했다.[35]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15분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당시 춘성의 향년이 세수 87세, 법납 74세였다.
1977년 8월 24일 서울 화계사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종정 서옹이 영결법어를 선언하고 영결식이 진행되었다.
{{인용문2|
春城老師行履處(춘성노사행리처) / 춘성 노스님 노니신 곳
三世佛祖不得窺(삼세불조부득규) / 삼세의 불조도 엿볼 수 없도다.
七顚八倒此世中(칠전팔도차세중) / 이 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치고
遷化向什處去(천화향십마처거) / 어디로 가시는고
漢城街頭現全身(한성가두현전신) /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투시도다.}}
그는 생전에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뒤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 유언하였는데, 그의 장례식 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서울 화계사에서 문도장(門徒葬)으로 엄수되었으며, 유언에 따라 꽃상여 대신 거적 몇 개로 시신을 덮었으며, 다비 후 황해 바다에 뿌렸다.[35] 그의 장례식 때는 특별히 그가 즐겨 부르던 18번곡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를 승려들이 불러주었다.
그가 열반했을 때 몽땅 말라죽었다던 망월사 천중선원 뒤쪽의 소나무는 뒤에 다시 소생했다[39] 한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황해에 뿌려졌다.
1977년, 그는 의정부의 망월사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장례식에서 그는 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신은 짚으로 엮은 짚자리로 덮였다. 그의 장례식은 짧았으며, 짧은 장례 행진이 있었고, 그 동안 승려들은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의 유해는 성남시에 위치한 봉국사에 안치되어 있다.
춘성의 사망 후 오랫동안, 그의 논란이 많은 언행과 유교의 사회적 영향으로 인해 그의 이름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였다. 그 금기는 1990년대에 완화되었지만, 2002년에는 김용옥이 그의 일화를 EBS 프로그램에 사용했다.[6][7] 2004년에는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의 언행에 대한 보도가 늘어났다.[6]
2. 4. 1. 청와대 초청 법회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춘성은 독실한 불자였던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다.[3] 1963년부터 양지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던[19] 육영수 여사의 생일에 특별히 청와대에 초청받은 춘성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30분이 지나고 춘성은 "오늘은 육 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28]라는 파격적인 법문을 설파하고는 자리를 떠났다.[28] 영부인의 생일에 벌어진 이 일에 귀부인들과 대중들은 당황했지만, 박정희는 오히려 웃으며 그를 격찬했다.[28] 이는 권위주의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 춘성의 강직함과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이다.2. 4. 2. 입적
1977년 봄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허공에 골체(骨體)를 보았느냐? 만월청산(滿月靑山)에 무촌수(無寸樹)하니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니라, 팔십칠년사가 칠전팔도기로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이여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니라.'라는 마지막 법어를 강론하였다. 춘성은 '내가 입적한 후에라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했다.[35]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15분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당시 춘성의 향년이 세수 87세, 법납 74세였다.1977년 8월 24일 서울 화계사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종정 서옹이 영결법어를 선언하고 영결식이 진행되었다.
{{인용문2|
春城老師行履處(춘성노사행리처) / 춘성 노스님 노니신 곳
三世佛祖不得窺(삼세불조부득규) / 삼세의 불조도 엿볼 수 없도다.
七顚八倒此世中(칠전팔도차세중) / 이 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치고
遷化向什處去(천화향십마처거) / 어디로 가시는고
漢城街頭現全身(한성가두현전신) /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투시도다.}}
그는 생전에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뒤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 유언하였는데, 그의 장례식 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서울 화계사에서 문도장(門徒葬)으로 엄수되었으며, 유언에 따라 꽃상여 대신 거적 몇 개로 시신을 덮었으며, 다비 후 황해 바다에 뿌렸다.[35] 그의 장례식 때는 특별히 그가 즐겨 부르던 18번곡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를 승려들이 불러주었다.
그가 열반했을 때 몽땅 말라죽었다던 망월사 천중선원 뒤쪽의 소나무는 뒤에 다시 소생했다[39] 한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황해에 뿌려졌다.
3. 사상과 신념
3. 1. 무소유와 청빈
춘성은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등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했다. 그는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옷을 벗어 줘버리고 맨몸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으며[20], 신자들이 해준 양복도 걸인들에게 벗어주고 속옷 바람으로 밤에 절로 돌아오곤 했다.[43]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을 붙어있지 않았다.[21] 당시만 해도 헐벗은 걸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23]춘성은 평생 잠자리에 들 때 이불을 덮지 않았다. 이불이 부처와 불심에서 떠날 수 있다는 이불(離佛)을 뜻하기 때문이었다.[2] 망월사에서 수행할 때, 춘성은 젊은 수행자들이 가져온 고급 비단 이불을 빼앗아 불태우기도 했다. 그는 "수행하러 온 자가 편안하게 따뜻한 잠을 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고급 비단 이불을 그 자리에서 소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상좌나 보살들에게는 방석은 덮도록 허용했다.[2] 그는 평생 이불이나 담요를 가까이하지 않았음에도 배탈이나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한다.
춘성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도 없었다.[21]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21] 신도들이 준 용돈도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꺼내 주었다. 돈을 줄 때도 세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38] 제운은 '솔선수범보다도 사람들을 감복하게 한 것은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24]'라고 평가했다. 춘성은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주변에 직접 화전 밭을 일구기도 했다. 그대신 그는 한 알의 쌀밥을 남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3. 2. 수행 제일주의
춘성은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본분은 무소유에 있음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했다.[11] 참선하는 수좌가 두꺼운 옷을 입거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11] 신자들이 주는 옷이나 돈을 모두 거지와 부랑자들에게 나눠주었다.[2]그는 한겨울에 찬방에서 눕지도 먹지도 않은 채 14일간 정진하기도 했다. 이때 몸이 굳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놓아준 금침을 맞고 기사회생했다고 한다.[21][23] 춘성은 "수마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라 여겨, 추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했다. 겨울에는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뒤 냉수를 채워, 졸음이 올 때마다 옷을 벗고 항아리에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했다.[24] 이를 본 조선총독부 형사들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24]
춘성은 평생 잠자리에 들 때 이불을 덮지 않았다. 이불이 이불(移佛) 또는 이불(離佛)이라 하여 부처와 불심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9] 처음에는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나중에는 그에게 이불 덮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부처와 이별하는 물건'이라 불렀다.[19]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 때, 고급 비단 이불을 가져온 수행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이불을 빼앗아 불태웠다.[19] 그러나 다른 상좌나 보살들에게는 방석은 덮도록 허용했다. 춘성은 평생 이불이나 담요를 가까이하지 않았음에도 배탈이나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한다.[19]
춘성은 잠자는 시간을 아껴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9]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은 춘성이 베개를 갖고 자는 이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고 회고했다.
춘성은 호화로운 옷을 입고 절에 오는 이들에게 "옷 자랑하고 싶으면 번화가에나 갈 것이지 절에는 뭐하러 왔어?"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는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음으로서 언행일치를 보여주었다.
3. 3. 파격과 풍자
춘성은 욕설과 음담패설을 섞은 파격적인 법문으로,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고 대중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21] 그의 언행은 기독교 광신도를 조롱하거나,[44][45][30] 처녀에게 깨달음을 주는 등[21] 다양한 일화를 통해 나타난다.해방 이후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시대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절에 오면, 춘성은 그 즉시 외투를 벗게 하거나, "씨부랄 년!"이라는 욕설을 쏟아내기도 했다.[21] 또한 값비싼 털옷과 명품 핸드백 등 사치품을 소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해당 물품을 압수하여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했고, 항의했다가도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1960년대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 춘성은 "시집 장가가는 데는 자지와 보지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인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남겼다. 이 발언은 큰 화제가 되었고, 그가 방문했던 사찰에는 많은 행자와 보살들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춘성은 서울 불광동 또는 녹번리에 있는 어느 절에 갔다가 의정부시로 들어오는 버스 또는 1호선 전철에서 기독교 선교를 하는 교인을 만났다. 춘성은 '예수를 믿으라'는 선교사의 말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침에 내 자지 밖에 없는데!"[44] 또는 "무엇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에이끼 이놈아!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남자의 고추밖에 없어[45]"라고 응수하여,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을 웃게 만들었다.[45]
서울역 또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는 함께 탄 목사가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자,[30] 춘성은 '똥통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느냐'고 물었다. 목사가 화를 내며 '부처님도 똥통 속에 있느냐'고 묻자, 춘성은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똥통 속에도 부처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30]
춘성은 똥 속에도 부처가 있고, 오줌 속에도 부처님이 계신다고 말하며, 부처님은 어디든 함께하신다고 하였다.
한번은 춘성이 서울 선학원에 있을때, 설봉이 찾아와 봉암사의 성철과 관련된 일화를 이야기 하며 춘성에게 질문을 던진적이 있었다. 이때 춘성은 '나는 이 씨브랄놈이라고 하겠다.[31] '라고 답하였다.[35]
한국 전쟁 직후, 춘성은 땔감을 구하고 낡은 절을 수리하기 위해 나무를 베었다가 산림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2]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던 중, 형사가 "주소가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어머니의 자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형사는 춘성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법적 주소지가 어디입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춘성은 "아버지의 성기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경찰은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를 돌려보냈다.[4]
한 노부인이 자신의 손녀에게 춘성이 교훈을 가르치도록 그를 만나게 했다. 손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그를 만나러 나타났다. 그녀를 보자 춘성은 "어떻게 나의 큰 것이 너의 작은 것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춘성이 실제로 의미한 것은 "어떻게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 너의 작은 마음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였다. 이 말을 들은 손녀는 성적인 결론으로 섣불리 판단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3. 4. 사회 참여
4. 평가
춘성은 한용운의 제자이자,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평가받는다.[19][43] 그의 파격적인 언행은 단순한 욕설이 아닌,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자 사회적 통념과 위선을 비판하는 풍자와 해학으로 해석된다.[42][43] 그는 철저한 무소유와 수행 정신, 사회 참여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모범적인 승려로 존경받는다. 특히, 춘성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불교계의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론가 조용헌은 춘성을 '천하의 무애도인이자 걸승[46]' 또는 '천하의 걸림없는 무애도인[47]'이라고 평하였다. 조용헌은 '한평생을 걸릴 것 없이 통쾌하게 살다 간 사람이 춘성 스님이다. 두려움없는 무외의 삶을 살다간 사람이 춘성당이다. 내 자신 별 볼일 없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춘성당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다.[46]'고 하였다. 또한, 춘성을 검객에 비유하며 '검객 춘성이 사용하였던 보검은 다름아닌 육두문자였다. 쌍욕을 살활자재로 휘두르면서 무 자르듯이 어떤 놈의 통념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심약한 사람에게 배짱을 심어주면서 거리낄 것 없이 통쾌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다.[48]'라고 평가했다.
부천대학교 김광현 교수는 춘성을 “한용운의 상좌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경’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하였던 화엄법사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였던 고집스러운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 회상에서 지독스럽게 참선 수행을 하였던 간화선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하였던 어른으로, 서울 시내의 저잣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원색의 언어로 전하였던 스님으로, 수많은 보살들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끌었던 큰스님”이라고 평하였다.[19]
상좌였던 대선은 춘성이 수행에 철저하였다고 회고한다. "춘성 스님은 수행에 철저하신 분이셨어. 대체로 나이가 들면 체력이 약해져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좌선을 생략하는 수가 많은데, 춘성당은 80이 넘어서도 대중들과 똑같이 좌선정진하셨지. 그점이 참 배울만 해[38]"라고 평하였다. 목정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그 분은 신체도 걸출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의 공부 어디에 걸림이 없었어. 만약에 춘성 스님이 신라시대의 사람이라면 원효야”라고 평가했다.[19]
춘성은 평생을 두타행과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하였던 욕쟁이 스님이었다. 그러나 그의 비범한 욕설에는 재치가 있고 역설이 있어 그 누구 하나 유쾌하게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42] 육두문자와 욕설을 통해 위선의 세계를 부숴버리고 그를 통해 도의 편린을 드러낸 기승[43]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평생을 옷 한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 간 무소유의 실천가이자,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다며 종교의 참 뜻을 깨우친 선승[43]이며, 끝없는 정진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의 경계를 통과한 대자유인이었다.[43]
5. 기타
춘성은 키가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으며, 점술, 풍수, 주역, 달마(達磨) 상법 등에도 두루 능통했다.[49] 2002년 10월 철학자 겸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EBS의 불교철학강의 '도올, 인도를 만나다'에서 춘성의 일화를 소개하며 육두문자를 언급하여 논란이 되었다.[9] 하지만 이 사건은 곧 종식되었고,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에서 육두문자가 공중파 방송과 라디오 방송에서 허용되는 계기가 되었다.[9][41]
6. 어록
만월청산무촌수 현애철수장부아 팔십칠년사 칠전팔도기 횡설여견설 홍로일점설(滿月靑山無寸樹 懸崖撤手丈夫兒 八十七年事 七顚八倒起 橫說與竪說 紅爐一點雪)은 춘성이 남긴 열반송이다.[42] 춘성은 "만월 청산에 나무 한그루 없으니 절벽에서 손을 놓으니 대장부로다 팔십칠년의 인생사가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 횡설수설 하고 다녔으니 붉게 달아오른 화로의 한 조각 눈이었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어느날 춘성이 절벽에서 나뭇가지를 놓을 수 있는 자야 말로 대장부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의 일화를 소개하며 법문을 설파할 때, 어느 수행자가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인가를 묻자, 춘성은 "야 이 새끼야,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라고 답했다.[44]
한 노보살이 시집 갈 때가 됐는데도 소견머리가 좁은 손녀딸을 춘성에게 보냈는데,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 처녀에게 춘성은 “네 작은 그것에 어찌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고 했다.[21] 노처녀는 스님은 엉터리라며 뛰쳐나갔지만, 노보살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며 혀를 찼다고 한다.[21] 춘성이 실제로 의미한 것은 "어떻게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 너의 작은 마음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였다.
1970년초 춘성이 서울 불광동 또는 녹번리에 있는 어느 절에 갔다가 의정부시내로 들어오는 버스 또는 1호선 전철을 탔을 때, 기독교를 선교한다고 확성기를 들고 떠들어대는 교인이 있었다. 춘성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침에 내 자지 밖에 없는데!"[44] 또는 "무엇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에이끼 이놈아!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남자의 고추밖에 없어[45]"라고 응대하여, 기독교인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한국 전쟁 직후, 땔감을 구하고 낡은 절을 수리하기 위해 나무를 베었다가 산림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주소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어머니의 자궁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등, 엉뚱한 답변을 하여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풀려났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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