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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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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은 1940년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범죄자들을 사면하여 편성된 부대이다. 처음에는 밀렵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범죄자,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다양한 출신의 병력으로 확대되었다. 동부 전선에서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수행하며 민간인 학살, 강간, 약탈 등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어 볼라 학살을 자행했다. 1945년 2월 사단으로 증편되었지만, 종전 직전 소련군의 공세로 궤멸되었다. 사단의 잔혹한 행위는 친위대 내부에서도 비난받았으며, 사단장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전후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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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디를레방어 부대 휘장
사단 휘장
명칭 (독일어)36.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
별칭 (독일어)Die schwarzen Jäger (검은 사냥꾼)
약칭디를레방어 사단
군사 정보
창설1940년
해체1945년
국가나치 독일
소속무장친위대
병과보병
역할반덴베켐풍 (보안전; 문자 그대로 "산적 소탕")
규모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별명검은 사냥꾼
주요 지휘관오스카 디를레방어
전투 및 작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벨라루스에서의 대 게릴라 작전
바르샤바 봉기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이폴리사그 전투
할베 전투

2. 역사

1944년의 오스카 딜레방어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자 상습범인 오스카 딜레방어가 창설 초기부터 지휘했다.[10] 딜레방어는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로 알려졌으며, 가학적인 성적 취향과 야만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12] SS 내에서도 "가장 사악한 사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가학적인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13]

딜레방어는 1913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여 제13(뷔르템베르크 왕립) 군단에서 복무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소위(Leutnant)로 진급했으며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받았다. 전후에는 자유군단에 가담하여 1918-19년 독일 혁명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2년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6] 1923년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성적으로 연루된 미성년자의 비행에 기여"하고 정부 재산을 훔친 혐의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다(후에 재가입 허용).[17] 석방 후 성폭행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나치 강제 수용소인 벨츠하임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료이자 당시 ''Reichsführer-SS'' 하인리히 힘러와 긴밀히 협력하던 고위 나치 인사 고틀로프 베르거에게 연락했고, 베르거의 도움으로 스페인 내전 (1936-1939)에서 싸운 독일 부대인 콘도르 군단에 합류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7][14]

1939년 독일로 돌아온 딜레방어는 베르거의 주선으로 무장 친위대(Allgemeine SS)에 SS-운터슈투름퓌러(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 계급으로 합류했다. 1940년 중반, 폴란드 침공 이후 베르거는 딜레방어가 유죄 판결을 받은 밀렵꾼들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며 유격대 소탕 작전(Bandenbekämpfung|반덴베켐풍deu)을 수행하도록 조치했고, 이것이 이 부대의 시초가 되었다.[15][16][17] 부대의 구체적인 창설 과정과 활동 내역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2. 1. 창설과 초기 편성 (1940-1941)

1940년 3월 23일, 아돌프 히틀러는 "소위 '명예로운 밀렵꾼'에게는 집행유예를 주고, 전선에서의 행동에 따라 사면할 것"이라는 구상을 밝혔고,[18] 이에 따라 하인리히 힘러의 지시로 새로운 부대 편성이 시작되었다. 선발 기준은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출신 밀렵꾼을 우선하고, 올무 관련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사격 클럽에 등록된 자로 한정되었다.[18]

한편, 친위대 본부의 고틀로프 베르거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료이자 성범죄 등[17] 여러 범죄 전과가 있던 오스카어 딜레방어를 이 새로운 부대의 지휘관으로 추천했다.[17][14] 힘러는 1940년 6월 4일 이를 승인했고,[17] 딜레방어는 1940년 5월 말 오라니엔부르크로 파견되어 밀렵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80명의 훈련을 맡았다. 두 달간의 훈련 후 55명이 최종 선발되었고,[17] 1940년 6월 14일 이들을 중심으로 '''빌트딥 코만도 오라니엔부르크'''(Wilddiebkommando Oranienburg|빌트딥코만도 오라니엔부르크deu, 오라니엔부르크 밀렵꾼 부대)가 무장 친위대의 일부로 창설되었다.[17]

부대는 폴란드로 이동하여 징계 경력이 있는 무장 친위대 부사관 4명과 사병 12명 (다른 자료에서는 20명의 신병[17]), 그리고 8명의 지원자가 합류했다. 1940년 9월까지 부대 규모는 3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17] 점차 다른 범죄자들도 합류하면서 초기 밀렵꾼 중심의 성격은 희석되었다. 그러나 기존 밀렵꾼들은 부사관 계급으로 진급하여 새로 들어온 범죄자들의 훈련을 담당했다.[19] 이 시기 딜레방어도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 (SS-Obersturmführerdeu)로 진급했다.

딜레방어는 부임 후 부대명을 '''존더 코만도 닥터 딜레방어'''(Sonderkommando Dr. Dirlewanger|존더코만도 도크토어 디를레방어deu)로 변경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이 정예 SS 부대에 속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나치당과 SS 내부에서 제기되자,[20] 부대는 SS의 직접적인 일부가 아닌 'SS의 통제를 받는' 부대로 규정되었고, 약 두 달 후 '''SS 존더 코만도 닥터 딜레방어'''(SS-Sonderkommando Dr. Dirlewanger|SS-존더코만도 도크토어 디를레방어deu)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었다.[60]

폴란드에서 부대는 독소 국경을 따라 구축된 방어선 오토 라인(Otto Line) 건설 지원과 타르노브제크 (당시 Dzikow) 인근 유대인 노동 수용소 경비 임무 등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초기 활동 시점부터 이미 딜레방어와 부대원들의 현지 주민에 대한 폭행 및 약탈 행위가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그 결과, 부대는 징벌적 성격으로 독소전쟁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2. 2. 동부 전선 투입과 파르티잔 토벌 (1942-1944)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소련을 침공한 후, 점령지 후방에서의 파르티잔 활동이 문제가 되었다. 1942년에는 SS해골부대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부대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포로 및 부역자 중 지원자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1942년 3월, 부대는 벨라루스민스크 근교에 도착하여 파르티잔 소탕 작전을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부대는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지르는 한편, 일부 전과를 거두어 지휘관 딜레방어는 1942년 5월 24일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크리셰프(Klichev) 근처에서 육군과 합동으로 아들러 작전(Operation Adler)을 수행하여 파르티잔 1,0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이 전투는 격렬하여 딜레방어 자신도 부상을 입고 명예 부상 금장을 받았다. 부대 규모 확장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밀렵꾼 외에 일반 형무소의 범죄자들과 점령지에서 징집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부대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현대 벨라루스) 영토는 1941년 점령되어 ''국가판무관부 오스트란트''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부대는 지역 HSSPF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브스키의 지휘를 받았다. 부대는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가 지휘하는 소련 국적자 민병대인 카민스키 여단과 협력하여 반(反)파르티잔 활동을 벌였다. 딜레방어가 선호하는 작전 방식은 민간인을 헛간에 몰아넣고 불을 지른 뒤,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대에 의한 희생자는 약 3만 명에 달했으며,[23] 일부 추산에 따르면 약 200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약 12만 명이 사망했다.[33]

소련에서의 활동 기간 동안, 딜레방어 부대는 여성과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굶주린 개 떼에게 물어뜯게 했으며, 유대인 여성에게 스트리크닌을 주사하는 등 극악무도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24][25]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에 따르면, 소련 검사들은 동부 전선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딜레방어 부대에 대해 자주 심문했다. 하인리히 힘러조차 딜레방어의 잔혹성을 언급하며 "연대의 분위기는 많은 경우 중세적이다. 전쟁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테이블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26] 부사령관 쿠르트 바이세는 딜레방어의 "잔혹함, 무자비함, 노골적인 사디즘"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묘사되며, "그 부대에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고 평가받았다.[27]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특수 코만도 딜레반거는 처음 1만 5천 명의 치명적인 사상자를 냈을 때 92명만을 잃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의심할 여지 없이 아군 사격과 알코올 관련 사고로 사망했다. 그러한 비율은 희생자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일 때만 가능했다"고 지적했다.[23] 1942년 9월, 부대는 바라노비치 게토에서 유대인 8,350명을 학살한 후, "강도"로 분류된 389명과 "강도 용의자" 1,274명을 추가로 살해했다.[23] 역사학자 마틴 키친에 따르면, 이 부대는 "게릴라를 추적하면서 소련에서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러 SS 법원에서도 조사를 해야 했다".[34] 한 증인은 딜레방어 부대원들이 포로로 잡힌 파르티잔들을 산 채로 구워 배고픈 돼지 떼에게 던져주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51] 여성들은 강간당한 후 "성적 가축"처럼 취급되어 "보드카 두 병"에 거래되었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강간당하고 고문당해 살해되었다.[35]

1943년 2월, 부대 규모는 기존의 두 배인 70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중 절반가량은 민족독일인이었다. 1943년 3월, 부대는 ''Schutzmannschaft'' 대대 118과 함께 스마르야비치 구와 라고이스크 구에서 파르티잔 및 민간인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으며,[37] 3월 22일에는 악명 높은 하틴 학살에도 참여했다.[37] 1943년 8월 10일, SS-Führungshauptamt는 부대를 연대 규모로 확장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지연되었다.[36] 딜레방어는 노획한 소련 무기로 부대를 무장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943년 11월, 부대는 중앙 집단군 소속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전투 능력이 부족하여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그럼에도 딜레방어는 1943년 12월 5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받았다. 하지만 1943년 12월 30일 기준 부대 병력은 259명으로 급감했다.

부대 재건을 위해 사면된 범죄자들이 대거 투입되었고, 1944년 2월 말에는 완전한 전력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1944년 2월 19일, 히믈러는 강제 수용소에서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을 허가했고, 700명 이상이 지원하여 대부분 6월에 부대에 합류했다.[36] 또한, 소련 영토 출신의 반공주의자 300명도 부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러시아인들의 신뢰도가 낮다는 이유로 오스트투르펜(동방 부대 자원병)은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4년 5월, 마침내 존대대에서 연대로의 확장이 시작되어 제1, 2대대가 편성되었고, 제3대대는 8월에 편성되었다.[36] 또한 동방군단 소속이었던 투르키스탄, 볼가 타타르,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 우즈벡, 타지크 출신 병사 550명이 편입되면서 부대는 디를레방어 여단 (Dirlewanger Brigaded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4년 3월에는 슈츠폴리자이 대위(Hauptmann) 헤르베르트 마이어가 자원하여 제1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39] 6월 26일에는 슈츠폴리자이 대위 요제프 슈타인하우어가 이끄는 독일 질서경찰 포병 부대가 제2대대에 배속되었으며, 슈타인하우어는 제2대대 사령관이 되었다.[38]

반(反)파르티잔 작전은 194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이 중앙 집단군 섬멸을 목표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자, 디를레방어 여단은 후퇴에 휘말려 리다 시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캄프그루페 폰 고트베르크(Kampfgruppe von Gottberg)의 지휘 하에 여단은 소련군에 맞서 방어선을 유지하며 다른 독일 부대의 후퇴를 엄호했다.[40] 이 과정에서 여단은 여러 후위 부대 작전을 수행하며 심각한 사상자를 냈고, 1944년 7월 20일 캄프그루페 폰 고트베르크에서 분리되었다. 다음 날인 7월 21일, 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동프로이센의 에우크(Ełk, 당시 독일명 Lyck) 시 인근 아리스(Arys, 현 폴란드 오지쉬 Orzysz) 훈련 센터로 이동했다.[41] 1944년 7월 말, 딜레방어는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얻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서 고틀로프 베르거와 협상했으며, 그동안 부대 지휘는 임시로 하우프트슈름퓌러 쿠르트 바이스에게 맡겨졌다.[42]

2. 3. 바르샤바 봉기 진압 (1944)

이 부대의 범죄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폴란드로 돌아왔을 때도 계속되었다. 이들의 범죄에는 적십자 간호사 15명에 대한 집단 강간 및 살해,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 등이 포함되었다. 부대원들은 임시 군 병원에 들어가 부상자들을 총검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살해한 후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벌거벗고 피를 흘리는 간호사들은 밖으로 끌려가 발로 매달리고 배에 총을 맞았다. 조사 결과 이 부대는 강간 중 최소 한 명의 간호사의 가슴을 산 채로 잘라낸 것으로 드러났다.[30][31] 이 부대는 볼라 학살 동안 힘러의 명령에 따라 보복으로 4만 명 이상의 폴란드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32]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바르샤바 시내에서 제2대대 "캄프그루페 슈타이너" SS-특수연대 "딜레방어"의 병사들


1944년 8월 바르샤바에서 볼라 학살에서 살해된 폴란드 민간인들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 중 볼라 구역에서 SS 군대에 의해 살해된 폴란드 민간인을 묘사한 사진


아르미아 크라요바가 1944년 8월 1일 SS-슈름반퓌러 쿠르트 바이세(Kurt Weisse)의 지휘 하에 바르샤바 봉기를 시작했을 때, SS-특수연대 "딜레방어"는 하인츠 라인파르트 SS-그룹펜퓌러가 이끄는 캄프그루페(Kampfgruppe, 전투단) 부대의 일환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다시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의 민병대(당시 "SS 돌격여단 RONA"로 명명됨)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43]

1944년 8월 3일, 연대는 봉기 진압을 위한 대대 규모의 캄프그루페를 구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첫 번째 캄프그루페는 제1대대로 구성되었으며, SS-오버슈름퓌러 헤르베르트 마이어(Herbert Meyer)의 지휘 하에 '캄프그루페 마이어'로 명명되었다. 다음 날 아침, 356명의 병력으로 트럭을 타고 바르샤바로 출발하여 그날 밤 도착했다. 두 번째 캄프그루페는 연대의 제2대대로 구성되었으며, SS-슈름반퓌러 요제프 슈타이너(Josef Steiner)가 이끌었고 350명의 병력이 있었다. 이들은 1944년 8월 6일에 도착했으며, 두 캄프그루페 모두 라인파르트의 지휘를 받았다.[7]

1944년 8월 5일, 바이세의 지휘 하에 캄프그루페 마이어는 리츠만슈타트-슈트라세(Litzmannstadt-Strasse)를 따라 진격하며 볼라 지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포젠 경찰 그룹은 거리 북쪽으로 진격했다. 거리가 심하게 방어되어 공격은 지연되어 밤까지 계속되었다.[44]

1944년 8월 6일, 캄프그루페 슈타이너가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캄프그루페 마이어와 함께 즉시 브륄 궁전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결국 호와드나(Chłodna) 거리와 엘렉토랄나(Elektoralna) 거리를 통과하여 진격했다.[45] 1944년 8월 7일 저녁, 힘러로부터 연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딜레방어는 독일에서 돌아와 두 캄프그루페를 통합하여 '캄프그루페 딜레방어'를 형성했다. 8월 7일까지 딜레방어 부대는 작센 정원을 점령했고, 키에르베지 다리에서 다른 독일군과 연결되었다.[46] 다음 날, 그들은 궁전에 도착했고 극장 광장도 점령했다. 공격 중에 몇몇 병원이 불탔지만, 나중에 연대의 본부로 사용된 성 스타니슬라프 병원은 예외였다.[45]

1944년 8월 8일, 연대에서 경험 많은 구성원인 SS-운터슈름퓌러 막스 슈라이너(Max Schreiner)는 병력 일부를 이끌고 시장 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결정적인 행동은 퇴각하는 폴란드 반군을 격파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브륄 궁전을 즉시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딜레방어" 부대는 "무장 돌격여단 RONA"와 함께 바르샤바 봉기 동안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두 부대로 악명이 높다.[48] "딜레방어"는 여자와 아이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49] 한 목격자는 "취한 병사들이 칼로 제왕 절개를 연습했다"고 보고했다.[50]

학살 동안 "딜레방어"는 약탈로 악명이 높았으며,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 약탈에 대한 욕망은 . . . 너무 커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한 번의 타격으로 손가락을 잘랐고, 그들이 반지를 발견한 곳에서, 금니를 칼로 뽑았고, 탐욕으로 약탈하는 동안 서로를 죽였다.[51]

볼라 학살로 알려진 사건에서, "딜레방어" 부대원들은 폴란드 전투원과 민간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그러나 볼라 학살 자체에서 "딜레방어"의 역할은 초기 며칠 동안 제한적이었을 수 있으며, 딜레방어 자신은 8월 7일까지 도착하지 않았을 수 있다.[52] 40,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8월 2주도 안 되어 볼라에서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모든 병원 환자와 직원이 포함되었다.[53][54] 역사가 알렉스 J. 케이(Alex J. Kay)에 따르면, "딜레방어"는 8월 5일에 약 12,500명을 살해했다.[55] "딜레방어"는 "죄수들에게 휘발유를 뿌려 산 채로 불태우고, 아기들을 칼로 꿰어 창밖으로 내던졌으며, 여성을 발코니에서 거꾸로 매달았다".[56] 폴란드 간호사들은 반복적으로 강간당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수류탄이 질에 삽입되어 폭발했다.[57]

볼라에서 이 부대가 저지른 다른 알려지지 않은 많은 범죄들은 그 지역에서 독일군 공병으로 복무한 벨기에 국적의 마티아스 쉥크(Mathias Schenck)에 의해 나중에 밝혀졌다. 수백 명의 폴란드 어린이들이 살해된 사건과 관련하여, 쉥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우리는 문을 폭파시켰고,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홀과 계단에 서 있었습니다. 많은 아이들. 모두 작은 손을 들고. 우리는 딜레방어가 달려 들어올 때까지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쏘았고, 그 다음에는 그들의 시체를 밟고 작은 머리를 곤봉으로 부쉈습니다. 피와 뇌 물질이 계단을 흘러내렸습니다. 그곳에는 350명의 아이들이 살해되었다고 명시된 기념 현판이 있습니다. 저는 훨씬 더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500명.[58]

연대는 바르샤바에 865명의 사병과 16명의 장교만으로 도착했지만 곧 2,500명의 보충병을 받았다. 여기에는 단치히-마트츠카우(Danzig-Matzkau)의 SS 군사 기지에서 온 1,900명의 독일 죄수가 포함되었다. 폴란드 저항군과의 바르샤바 전투에서 이 부대는 극심한 사상자를 입었다.[59] 두 달 동안의 시가지 전투 과정에서 딜레방어 연대는 2,733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이는 부대의 초기 병력의 315%에 해당한다.[60] 연대의 일부 행동은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프스키(전쟁 후 그들을 "돼지 떼"라고 묘사함)와 구역 사령관인 소장 귄터 로어(Günther Rohr)에 의해 비판받았지만, 딜레방어는 1944년 8월 12일 SS-오버퓌러로 진급했으며 1944년 9월 30일 라인파르트에 의해 철십자 기사 십자훈장을 추천받았다.[61] 그는 실제로 1944년 10월 16일 크라쿠프에서 한스 프랑크에 의해 훈장을 수여받았다.[1] 1944년 8월 6일 치열한 전투에서 딜레방어의 병사들은 민간인을 방패로 사용했다.

: 딜레방어의 병사들은 광장으로 퍼져나가 갑옷 지원을 받아 여러 반군 진지를 뿌리 뽑았다. 그런 다음 특수 부대는 폴란드 여성과 아이들을 방패로 사용하여 더 나아가려 했지만, 폴란드군은 어쨌든 발포하여 독일군을 물러나게 했다.[62]

1944년 10월 3일까지 남은 폴란드 반군은 항복했고 연대의 잔존 병력은 다음 달 동안 비스툴라 강을 따라 방어선을 지켰다. 이 기간 동안 연대는 여단으로 편성되어 "SS-특수여단 딜레방어"(SS-Sonderbrigade Dirlewanger)로 명명되었다. 10월 초, 이 부대를 무장 친위대 전투 여단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고, 1944년 12월에는 "제2 SS 돌격여단 딜레방어"(2. SS-Sturmbrigade Dirlewanger)로 개명되었으며, 곧 4,000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60]

언론인이자 역사 작가인 나이젤 코손(Nigel Cawthorne)은 "딜레방어"가 카민스키 여단보다 더 심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그것을 즐겼다고 지적했다.

: 지휘관인 SS-''오버퓌러'' 오스카 딜레방어의 격려를 받아, 딜레방어 부대는 포로를 잡지 말라고 말했고, 딜레방어 부대는 약탈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집단 강간하고, 산 아기들과 '총검 잡기' 놀이를 하고, 팔을 잘라 고문을 가하고,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질러 거리를 불태웠다. 병사들의 행동은 너무 심해서 힘러조차 경고했다. 그는 딜레방어 부대가 자체 지도자나 인근 독일 부대를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SS 헌병대 대대를 대기시켰다.[63]

2. 4. 슬로바키아 민중 봉기 진압 (1944)

1944년 8월 말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가 일어나자, 디를레방어 여단은 봉기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여단은 10월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지자,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 정치범들이 소련으로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부대에 자원하기도 했다.[64] 한편, 4 SS 경찰 기갑척탄병 사단의 전 지휘관이었던 ''SS-여단지도자'' 프리츠 슈메데스는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디를레방어 여단으로 좌천되었다. 슈메데스는 자신의 풍부한 전투 경험을 살려 디를레방어의 작전 수행에 비공식적으로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2. 5. 종전과 최후 (1945)

1945년 2월, 디를레방어 여단을 사단 규모로 확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실제 편제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소련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북쪽의 오데르-나이세선 방어선으로 급파되었다. 1945년 2월 14일, 부대는 공식적으로 제36무장척탄병사단으로 개칭되었다.[60] 명목상 사단이었으나 실제 병력은 약 4,000명 규모로 여단 수준에 가까웠으며, 척탄병 연대, 공병 여단, 대전차병기 대대 등 정규군 부대가 배속되었다.

개칭 바로 다음 날인 2월 15일, 지휘관 디를레방어는 조머펠트 마을 탈환을 위한 반격전 중 12번째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프리츠 슈메데스가 사단 지휘권을 인수했으며, 디를레방어는 다시는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사단은 계속 북동쪽으로 밀려났다. 탈영병이 급증했으며, 4월 25일 슈메데스가 사단을 재편성하려 했을 때는 이미 부대가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1945년 4월 28일, 제73무장척탄병연대를 지휘하던 SS-슈름반퓌러 에발트 엘러스는 할베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팔을 잃었다. SS-토텐코프베르반데 소속으로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는 엘러스는, 일부 기록에 따르면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도 전해진다.[65]

1945년 5월 1일, 소련군은 할베 포위전에서 사단의 남은 병력을 거의 전멸시켰다. 극소수의 생존자만이 엘베강 서쪽의 미국 육군 방어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SS-오버슈름반퓌러 쿠르트 바이스는 약 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할베 포위망을 탈출하여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1946년 3월 5일 탈출한 뒤 행방불명되었다.[66] 슈메데스와 그의 참모진(바이스 제외)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슈메데스는 별다른 전쟁 범죄 혐의 없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곧 석방되었다.[67]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단 병력은 약 700명에 불과했다.

한편, 부대의 창설자이자 악명 높은 지휘관이었던 디를레방어는 1945년 6월 독일 남부 알트하우젠에서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8일 수감 중, 과거 그에게 학대받았던 폴란드 출신 연합군 병사(경비병)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68][69]

3. 편제

부대는 1940년 6월 14일, 오라니엔부르크에서 디를레방어가 직접 선발한 55명의 밀렵꾼 출신 범죄자들로 창설되었다. 초기 명칭은 Wilddiebkommando Oranienburg|빌트디프코만도 오라니엔부르크de("오라니엔부르크 밀렵꾼 부대")였으며, 무장친위대의 일부로 편성되었다.[17] 이후 폴란드로 이동하여 징계 경력이 있는 SS 부사관과 사병, 지원자들이 합류하면서 1940년 9월에는 병력이 3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17] 밀렵꾼 외에 다른 범죄자들이 유입되면서 부대 명칭은 Sonderkommando Dirlewanger|존더코만도 디를레방어de("디를레방어 특수부대")로 변경되었다.[20]

부대 규모가 커지면서 강제 수용소 관리 부대인 SS해골부대의 지휘 하에 들어가며 SS-Sonderbataillon Dirlewanger|SS-존더바탈리온 디를레방어de로 재지정되었다.[60] 1942년 1월에는 전투력 보강을 위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출신 포로 및 부역자 중 지원자를 모집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1943년 2월에는 병력이 700명으로 두 배 증가했으며, 이 중 절반 가량은 민족독일인이었다.[17]

1944년 5월, 동방군단 소속 투르크계, 볼가 타타르족, 아제르바이잔인, 키르기스족, 우즈벡족, 타지크족 병사 550명이 편입되면서 부대는 Dirlewanger Brigade|디를레방어 여단de으로 확충되었다.[21] 이후 1944년 말 다시 무장친위대 소속 부대가 되었으며, 1944년 10월에는 SS 돌격여단 디를레방어로 편성되었다.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에는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으로 최종 승격되었다.

부대 규모는 창설 이후 지속적으로 변동했으며, 주요 시기별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날짜병력 수부대 명칭
1940년 7월 1일84명밀렵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0년 9월 1일300명밀렵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3년 2월 4일700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3년 12월 30일256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2월 19일1200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4월 17일2000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6월 30일971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8월 15일648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10월 16일4000명SS 특별 기습대 "디를레방어"
1944년 12월 29일6000명SS 돌격 여단 "디를레방어"


3. 1. SS 돌격여단 디를레방어 (1944년 10월 기준)

3. 2.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1945년 3월 기준)

4. 구성원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은 오스카 딜레방어의 지휘 아래 폴란드 침공 이후 유격대 소탕(Bandenbekämpfung) 임무를 위해 창설되었다.[15][16][17] 초기에는 밀렵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 특히 아돌프 히틀러가 사면 대상으로 지목한 '명예로운 밀렵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18] 부대 규모가 확장되면서 구성원의 성격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렵꾼 외에도 살인, 강간, 방화 등 중범죄자,[17] 정신질환자,[23] 동성애자,[19] 군사 재판 유죄 판결자, 외국인 지원병(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민족독일인, 동방군단 출신 등[21]), 심지어 종전 무렵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정치범까지 합류하면서[17] 부대는 극도로 이질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집단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구성원의 특성으로 인해 부대는 단순한 징벌 부대를 넘어, 지휘관 딜레방어의 가학적인 성향과 맞물려 극도의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17] 역사학자 마틴 윈드로는 이들을 "끔찍한 잡배", "칼잡이, 배신자, 가학적인 바보, 다른 부대에서 쫓겨난 불량배"로 묘사했으며,[22] 일부 나치 관계자들의 미화 시도[23]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잔혹성은 널리 알려졌다.

4. 1. 초기 구성원

오스카 딜레방어는 1940년 5월 말 오라니엔부르크로 파견되어, 밀렵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형 집행이 유예된 80명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냥 기술과 수렵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법을 기꺼이 어기는 용기와 주도성을 겸비할 것으로 기대되었다.[18] 아돌프 히틀러는 이들 중 특정 조건(바이에른 및 오스트리아 출신, 올무 미사용, 사격 클럽 등록 등)을 만족하는 "명예로운 밀렵꾼"에게 전선 복무를 통한 사면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18] 두 달간의 훈련 후 55명이 선발되었고,[17] 1940년 6월 14일 이들을 중심으로 Wilddiebkommando Oranienburg|오라니엔부르크 밀렵꾼 부대deu가 무장 친위대의 일원으로 창설되었다.[17] 하인리히 힘러는 딜레방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부대는 폴란드로 이동하여 징계 경력이 있는 무장 친위대 부사관 4명과 사병 및 지원자 약 20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1940년 9월까지 부대 규모는 3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점차 정신질환자[23]나 동성애자를 포함한 다른 범죄자들도 부대에 합류하면서 밀렵꾼 부대로서의 초기 성격은 희석되었으나, 초기 밀렵꾼 출신 대원들은 부사관 계급으로 진급하여 새로 합류한 범죄자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기간병 역할을 수행했다.[19] 한편,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독일 국방군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에도 정예 SS 부대원이 되는 것에 대한 나치당과 SS 내부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부대는 SS의 직접적인 일부가 아니라 SS의 통제를 받는다는 명목 하에 Sonderkommando Dirlewanger|디를레방어 특공대deu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

4. 2. 구성원 변화

1940년 6월 14일 오라니엔부르크 감옥에서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직접 선발한 80명의 밀렵꾼 중 훈련을 통과한 55명으로 루블린 지역에서 처음 창설되었다.[17] 아돌프 히틀러는 "명예로운 밀렵꾼"에게 집행유예를 주고 전선에서의 행동에 따라 사면할 것을 결정했으며, 가능한 경우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올무 설치와 관련되지 않았으며, 사격 클럽에 등록된 밀렵꾼을 선발하도록 지시했다.[18] 초기 명칭은 오라니엔부르크 밀렵꾼 부대(Wilddiebkommando Oranienburg|deu)였다.

이후 폴란드로 이동하여 징계 경력이 있는 SS 부사관 4명과 사병 12명, 지원자 8명이 편입되었다. 1940년 9월에는 부대 인원이 300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17] 부대 명칭은 디를레방어 특공대(Sonderkommando Dirlewanger|deu)로 변경되었다.[20] 다른 범죄자들이 합류하면서 밀렵꾼 중심의 성격은 희미해졌으나, 초기 밀렵꾼 다수는 부사관으로 진급하여 부대 훈련을 담당했다.[19]

부대 규모가 확대되면서 초기 목표였던 밀렵꾼 외에 일반 형사범, 정신 이상자,[23] 동성애자[19] 등 다양한 범죄자들이 징집되거나 강제로 보내졌다. 이 부대는 살인, 강간, 방화, 절도와 같은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군사 범죄자를 주로 다루던 다른 징벌 부대와 차이가 있었다.[17] 부대의 병력이 증가함에 따라 SS해골부대의 지휘 하에 들어가 ''SS-Sonderbataillon Dirlewanger''로 재지정되었다.[60]

1942년 1월부터는 부대 전투력 보강을 위해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지원병 및 부역자 모집이 허가되었다.[60] 1943년 2월에는 부대 규모가 700명으로 두 배 증가했으며, 이 중 절반 가량은 민족독일인(Volksdeutsche)이었다.[17] 1944년 5월에는 동방군단 소속이었던 투르크족, 볼가 타타르족, 아제르바이잔인, 키르기스족, 우즈벡족, 타지크족 출신 병사 550명이 편입되어 디를레방어 여단(Dirlewanger Brigade|deu)으로 확충되었다.[21]

전쟁 말기에는 친위대 보안 첩보부(SD) 소속 대원, 군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무장친위대 및 국방군 장병, 심지어 강제 수용소정치범까지 부대에 보내지면서[17] 그 구성은 더욱 복잡해졌고, 범죄자 집단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5. 논란과 비판



제36SS무장척탄병사단은 부대원의 출신 배경과 오스카 딜레방어의 지휘 방식으로 인해 극심한 기강 해이와 무질서를 보였으며, 이는 수많은 범죄 행위로 이어졌다. 부대의 잔혹성은 나치 독일 내부에서조차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어, 일부 친위대 고위 관리는 이들을 "친위대의 수치"라고 비난했다.[34] 친위대 법무 본부는 지휘관 오스카 딜레방어를 포함한 부대 관계자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려 했으나, 고틀로프 베르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1]

이 부대는 특히 점령지에서의 파르티잔 토벌 작전 과정에서 극도의 잔인함을 드러냈다. 1943년 8월 벨라루스 페리크 호수 인근 작전에서는 보고된 '게릴라' 사살 수에 비해 노획된 무기가 현저히 적어, 다수의 비전투원 학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1] 또한 1944년 8월 폴란드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 진압 당시에는 본래 임무를 방기하고 러시아 해방군 소속 카민스키 여단과 함께 볼라 학살을 비롯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약탈,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1] 이 사건의 심각성으로 인해 부대 해체까지 검토될 정도였다.

이러한 끔찍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사단장 오스카 딜레방어는 1944년 9월 30일, 육군과 친위대 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61][1] 이는 부대의 잔학 행위를 사실상 용인하고 더욱 부추긴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1]

5. 1. 전쟁 범죄 및 잔학 행위

제36SS무장척탄병사단은 창설 초기부터 대원들의 출신 배경 문제와 오스카 딜레방어 지휘관의 성향으로 인해 각종 전쟁 범죄와 잔학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부대의 활동 지역에서는 약탈, 강간, 학살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점령지 민간인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이나 다른 친위대 부대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 및 동부 전선'''

소련 침공 이후 점령지에서 활동하는 동안, 딜레방어 부대는 극도의 잔혹성을 보였다. 여성과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우거나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었으며, 유대인 여성에게 스트리크닌과 같은 독극물을 주사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24][25]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에 따르면, 소련 검사들은 동부 전선에서의 전쟁 범죄와 관련하여 딜레방어 부대의 행위에 대해 자주 심문했다. 하인리히 힘러조차 딜레방어의 잔혹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연대의 분위기는 많은 경우 중세적이다. 전쟁 승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테이블에서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6] 부사령관 쿠르트 바이세(Kurt Weisse)는 딜레방어의 "잔혹함, 무자비함, 노골적인 사디즘"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사이코패스의 전형"으로 평가받았다.[27]

부대는 벨라루스 지역에서 파르티잔 토벌 작전(반덴베캠프궁)을 수행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브스키의 지휘 아래,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가 이끄는 카민스키 여단과 협력하기도 했다. 딜레방어가 선호한 방식은 민간인을 헛간에 몰아넣고 불을 지른 뒤,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약 3만 명,[23] 혹은 최대 12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약 200개의 마을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33]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특수 코만도 딜레방어는 처음 1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낼 때 단 92명의 손실만 입었는데, 이는 희생자가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기에 가능한 비율"이라고 지적했다.[23]

구체적인 학살 사례로는 1942년 9월 바라노비치 게토에서 유대인 8,350명을 살해하고, 추가로 "강도" 389명과 "강도 용의자" 1,274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다.[23] 또한, 포로로 잡힌 파르티잔을 산 채로 구워 굶주린 돼지 떼에게 던져주었다는 증언도 있다.[51] 여성들은 반복적으로 강간당하고 "성적 가축"처럼 취급되어 보드카 두 병에 거래되기도 했으며, 어린이들조차 강간과 고문의 대상이 되었다.[35] 1943년 3월에는 제118보안경찰대대와 함께 하틴 학살에 가담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했다.[37] 같은 해 8월, 페리크 호수 주변에서 벌인 게릴라 토벌 작전에서는 약 15,000명의 '게릴라'를 살해했다고 보고했지만, 노획한 소총은 1,100정에 불과해 희생자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음을 시사한다.

'''폴란드'''

1940년 8월, 부대는 독일 점령 폴란드의 총독부 영토인 루블린 지역에서 경비 임무를 맡았다.[17] 역사가 매튜 쿠퍼에 따르면, "딜레방어 부대가 작전을 펼치는 곳마다 부패와 강간이 일상이었으며, 무차별적인 학살, 구타, 약탈이 만연했다".[28] 이들의 잔학 행위는 나치 총독부 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최고 SS 및 경찰 지도자(HSSPF)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뤼거는 부대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거나 체포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29]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을 위해 폴란드로 돌아온 부대는 다시 한번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볼라 학살 당시, 딜레방어 부대는 카민스키 여단과 함께 가장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부대로 악명이 높았다.[48] 이들은 볼라 지구에서 약 4만 명 이상의 폴란드 민간인을 학살했는데,[32] 여기에는 여성과 어린이는 물론 병원의 환자와 의료진까지 포함되었다.[53][54] 특히 8월 5일 하루에만 약 12,500명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55]

부대원들은 민간인들을 산 채로 불태우거나 매장했으며,[49][56] 아기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창밖으로 던지고,[56] 여성들을 발코니에 거꾸로 매다는 등의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56] 또한 극심한 약탈을 자행하여, 금반지를 빼앗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금니를 뽑았으며, 약탈품을 두고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51] 봉기 진압 과정에서는 민간인 여성을 방패로 삼아 진격하기도 했다.[62]

특히 병원 습격은 끔찍했는데, 부상자들을 총검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살해한 뒤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적십자 간호사 15명을 포함한 많은 간호사가 집단 강간 후 살해당했으며,[30][31] 일부는 발가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끌려 나와 발로 매달린 채 배에 총을 맞았다. 조사 결과, 최소 한 명의 간호사는 강간 중에 산 채로 가슴이 잘려나간 것으로 밝혀졌다.[30][31] 심지어 여성의 질에 수류탄을 삽입해 폭파시키는 만행도 저질러졌다.[57] 당시 독일군 공병으로 복무했던 벨기에인 마티아스 쉥크는 학교 건물에서 수백 명의 폴란드 어린이들이 딜레방어 부대원들에게 총살당하고 곤봉으로 머리가 으깨지는 참상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우리가 문을 폭파시키자, 학교라고 생각되는 곳의 홀과 계단에 아이들이 서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모두 작은 손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딜레방어가 달려 들어와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쏘았고, 시체를 밟고 작은 머리를 곤봉으로 부쉈다. 피와 뇌수가 계단을 흘러내렸다. 그곳에는 350명의 아이들이 살해되었다는 기념판이 있지만, 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500명."이라고 진술했다.[58]

'''친위대 내부의 평가 및 조사 시도'''

딜레방어 부대의 잔학 행위는 친위대 내부에서조차 큰 문제로 인식되었다. 일부 고위 관리들은 이 부대를 "친위대의 수치"라고 비난했으며,[34] 친위대 법무 본부는 딜레방어를 포함한 부대 관계자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고틀로프 베르거의 개입으로 이 조사는 무산되었다. 힘러조차 부대의 극단적인 행동을 우려하여, 이들이 아군 부대나 지휘관을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SS 헌병대를 대기시키기도 했다.[63]

이러한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딜레방어는 1944년 8월 SS-오버퓌러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9월 30일에는 하인츠 라인파르트의 추천으로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61] 이는 육군과 친위대 본부의 반대를 무릅쓴 결정이었으며, 이러한 포상은 부대의 잔학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된다.[1]

5. 2. 기강 해이와 내부 문제



부대의 지휘관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자 상습범인 오스카 딜레방어[10]였다. 그는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로 여겨졌으며, 가학적인 성적 페티시와 야만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로 알려졌다.[12] SS 내부에서조차 "가장 사악한 사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가학적인 지휘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13]

딜레방어는 1913년 독일 제국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받았고, 전후에는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1918-19년 독일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22년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16] 1923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4년에는 미성년자 관련 성범죄 및 정부 재산 절도 혐의로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나치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후에 재입당 허용).[17] 석방 후 성폭행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나치 강제 수용소인 벨츠하임에 수감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료이자 하인리히 힘러와 가까웠던 고틀로프 베르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베르거의 도움으로 스페인 내전콘도르 군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17][14]

1939년 독일로 돌아온 딜레방어는 베르거의 도움으로 무장 친위대에 친위대 하급대장 계급으로 합류했다. 1940년 중반, 베르거는 딜레방어가 유죄 판결을 받은 밀렵꾼들로 부대를 구성하여 폴란드 침공 이후 유격대 소탕 임무를 수행하도록 주선했다.[15][16][17]

제36SS무장척탄병사단은 대원들의 출신 배경 탓에 각종 범죄 행위가 끊이지 않았고, 부대 내 기강이 문란하여 매우 무질서한 상태였다. 소련에서의 작전 중 딜레방어 부대는 여성과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굶주린 개들에게 물어뜯게 하거나, 유대인 여성에게 스트리크닌을 주사하는 등 극도의 잔혹성을 보였다.[24][25]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에 따르면 소련 검사들은 동부 전선 전쟁 범죄 피고인들에게 딜레방어 여단에 대해 자주 질문했다. 하인리히 힘러조차 딜레방어 부대의 잔혹성을 언급하며 "연대의 분위기는... 많은 경우 중세적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테이블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정도였다.[26]

부사령관 쿠르트 바이세는 딜레방어 부대 내에서 지휘관인 딜레방어 다음으로 "잔혹함, 무자비함, 그리고 노골적인 사디즘"을 보여준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그 부대에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고 평가받았다.[27]

부대의 지나친 잔학함 때문에 친위대 고위 관리조차 "친위대의 수치"라고 비난했으며, 친위대 법무 본부는 딜레방어를 포함한 부대 관계자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려 했으나, 고틀로프 베르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부대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943년 8월 페리크 호수 주변 게릴라 토벌 작전에서 약 15,000명의 '게릴라'를 살해했으나, 노획한 소총은 1,100정에 불과했다. 이는 살해된 이들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음을 시사한다.
  •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 진압 당시, 부대는 본 임무를 방기하고 러시아인 반공주의자들로 구성된 카민스키 여단과 함께 학살, 약탈, 부녀자 강간 등 심각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부대 해체까지 검토되었다.


이러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딜레방어는 게릴라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 9월 30일, 육군과 친위대 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이 훈장 수여는 부대의 잔학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된다.

6. 의의

사단의 상징인 엇갈린 수류탄 문양은 네오 나치 단체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70] 볼프스브리게 44(Wolfsbrigade 44)와 우크라이나의 일부 군대 등이 그 예이다.[71]

또한, 스웨덴에는 "디를레반거"라는 이름의 네오 나치 록 밴드가 존재했다. 이 밴드는 1990년대에 악명을 떨쳤으며, 당시 스웨덴 네오 나치 집단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72][73][74] 이러한 사례들은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과 관련된 상징이나 이름이 극단주의 단체에 의해 오용되는 현실을 보여주며, 나치즘의 잔재와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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