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사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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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사자공은 1129년 또는 1131년에 태어나 바이에른과 작센 공작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작센과 바이에른 공작위를 상속받았으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갈등으로 몰락하여 추방당했다. 이후 복귀하여 브라운슈바이크 주변 영지를 회복했으나, 1195년에 사망했다. 그는 뮌헨, 뤼베크 등 도시를 건설하고, 브라운슈바이크에 청동 사자상을 세우는 등 도시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문화적 유산으로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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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사자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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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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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작센 공작 |
통치 기간 | 1142년 – 1180년 |
이전 | 알브레히트 데어 베어 |
계승 | 베른하르트 3세 |
작위1 | 바이에른 공작 |
통치 기간1 | 1156년 – 1180년 |
이전1 | 하인리히 11세 |
계승1 | 오토 1세 |
배우자 | 클레멘티아 폰 체링겐 (1147년 결혼, 1162년 이혼) 마틸다 폰 잉글란트 (1168년 결혼, 1189년 사망) |
자녀 | 게르트루트, 덴마크 여왕 마틸다 폰 작센 하인리히 5세 오토 4세, 신성 로마 황제 윌리엄 오브 윈체스터 |
가문 | 벨프 가문 |
아버지 | 하인리히 10세, 바이에른 공작 |
어머니 | 게르트루트 폰 주플린겐부르크 |
출생일 | 약 1129년 |
출생지 | 라벤스부르크, 슈바벤 공국 |
사망일 | 1195년 8월 6일 |
사망지 | 브라운슈바이크, 작센 공국 |
매장지 |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
독일어 이름 | |
독일어 | Heinrich der Löwe |
2. 가문 배경
하인리히 사자공은 1129년 또는 1131년 라벤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력한 벨프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이었다. 하인리히 오만공은 과거 작센 공작을 배출한 빌룽 가문의 모계 상속자이기도 했다. 어머니 게르트루트는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와 황후 리첸차의 유일한 딸이자 상속녀였다. 이를 통해 하인리히는 부계와 모계를 통해 작센과 바이에른의 공작위 계승권뿐만 아니라, 노르트하임 가문과 브루노넨 가문의 광대한 영지까지 상속받을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138년 독일 국왕 선거에서 아버지 하인리히 오만공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 3세에게 패배하면서 가문의 운명은 급변했다. 콘라트 3세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하인리히 오만공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138년과 1139년에 걸쳐 그의 바이에른과 작센 공작령을 몰수했다. 작센은 아스카니아 가문의 알브레히트 곰 백작에게, 바이에른은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4세에게 넘어갔다. 아버지 하인리히 오만공은 1139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고, 어린 하인리히 사자공은 가문의 몰락 속에서 상속권을 되찾고 영지를 회복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129년 또는 1131년 라벤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에른 및 작센 공작인 하인리히 오만공으로, 과거 작센 공작을 배출한 빌룽 가문의 후손이었다. 어머니는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와 황후 리첸차의 유일한 딸인 게르트루트였다. 어머니 게르트루트는 노르트하임과 브라운슈바이크 등 작센 지역 영토 및 브루노넨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하인리히가 어렸던 1139년, 아버지 하인리히 오만공은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138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는 경쟁자였던 하인리히 오만공의 공작령을 1138년과 1139년에 걸쳐 몰수했다. 작센 공작령은 알브레히트 곰 백작에게, 바이에른 공작령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4세에게 넘어갔다.
2. 2. 초기 상속 문제
하인리히는 1129년 또는 1131년 라벤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인 하인리히 10세 (별칭 오만공)였으며, 그는 과거 작센 공작을 배출한 빌룽 가문의 상속자이기도 했다. 어머니 게르트루트는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와 황후 리첸차의 유일한 딸이었다. 리첸차는 노르트하임의 작센 영토와 브루노넨 가문의 재산(브라운슈바이크 백작령) 상속자였다.하인리히가 아직 어렸던 1139년, 아버지 하인리히 10세는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1138년 독일왕 선거에서 콘라트 3세와 경쟁했던 아버지 하인리히 10세가 패배한 후 벌어진 일이었다. 콘라트 3세는 1138년과 1139년에 걸쳐 하인리히 10세의 공작령을 몰수했다. 작센 공작령은 알브레히트 1세 (별칭 곰백작)에게, 바이에른 공작령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4세에게 넘어갔다. 이로 인해 어린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영지를 되찾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통치
하인리히 사자공은 아버지 하인리히 10세가 사망한 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여 1142년 콘라트 3세로부터 작센 공작령을 돌려받았고, 이후 1156년에는 새로운 황제이자 사촌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로부터 바이에른 공작령까지 획득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뮌헨, 뤼베크 등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썼으며, 특히 자신의 거점인 브라운슈바이크에는 1166년 청동 사자상을 세우고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권위를 과시했다.
1147년에는 체링겐의 클레멘티아와 결혼하여 슈바벤의 영지를 확보했으나, 1162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압력으로 이혼하고 그 대가로 작센의 요새들을 받았다. 1168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이자 리처드 1세의 여동생인 마틸다와 재혼하여 잉글랜드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초기에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1세를 충실히 지원하며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점차 자신의 세력 확장에 집중하면서 황제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3. 1. 작센과 바이에른 공작 즉위

아버지 하인리히 10세는 1138년 제위 경쟁에서 콘라트 3세에게 패배하여 추방되었고, 작센 공작위는 알브레히트 1세에게, 바이에른 공작위는 레오폴트 4세에게 넘어갔다. 아버지는 1139년에 사망했지만, 하인리히 사자공은 자신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1142년, 하인리히는 콘라트 3세로부터 작센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박탈당한 바이에른 공작 지위 반환을 콘라트 3세에게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2차 십자군 참가를 거부하는 대신 1147년 벤트 십자군에 참여했다.
1149년 이후에는 엘베강 동쪽의 주교구 재건과 그 주교의 서임권을 요구했고, 콘라트 3세의 뒤를 이은 새로운 황제이자 그의 사촌인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인정해주었다.
1156년, 하인리히는 마침내 프리드리히 1세의 결정에 따라 바이에른 공작령 역시 하인리히 2세로부터 돌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 변경백령(Ostmark)은 제외되었고,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하인리히는 작센과 바이에른이라는 두 강력한 공작령을 다스리게 되었다.
3. 2. 도시 건설과 발전
하인리히 사자공은 도시 개발에도 힘써, 1157년(또는 1158년)에 뮌헨을, 1159년에 뤼베크를 세웠다. 또한 아우구스부르크, 힐데스하임, 슈타데, 카셀, 귀스트로, 뤼네부르크, 잘츠베델, 슈베린, 브라운슈바이크 등 북독일과 바이에른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설립하고 발전시켰다.특히 그의 수도(거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발전에 힘썼다. 1166년에는 당크바르데로데성 안뜰에 자신의 문장 동물이기도 한 청동 사자상을 세웠는데, 이는 알프스산맥 이북 지역에서 고대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단독 청동상이었다. 이후 그는 이 사자상 가까이에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을 건립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3. 3.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
하인리히는 초기에는 사촌인 프리드리히 1세 황제를 충실히 지원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가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롬바르디아의 도시들과 교황들과의 반복된 전쟁에서 세력을 강화하는 것을 도왔으며, 자신의 작센 기사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주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1세의 첫 이탈리아 침공 당시, 하인리히는 크레마 공방전과 밀라노 공방전에 참여하여 승리에 기여했다.1172년, 하인리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6월~7월)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을 만났다.[2] 같은 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부활절을 보낸 뒤 12월경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3]
그러나 1174년,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롬바르디아 침공을 계획했을 때,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 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오랫동안 원했던 작센 지역의 제국 자유 도시 고슬라르를 자신에게 넘겨주지 않는 한,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19] 이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4. 몰락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도시들에 대한 원정에서 실패한 후, 그는 원정에 협조하지 않은 하인리히에게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시 하인리히는 작센과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독일 북부와 동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는데, 이는 다른 독일 제후들의 시기와 견제를 불러일으켰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러한 제후들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1180년, 주교들과 제후들로 구성된 법정을 열어 하인리히를 불복종 혐의로 궐석재판에 회부했다. 법정은 제국법이 전통적인 게르만 부족법보다 우위에 있음을 내세워 하인리히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그에게 추방령(제국 아흐트형)을 선고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군을 동원해 작센을 침공했고, 동맹들의 외면 속에 고립된 하인리히는 결국 1181년 에어푸르트의 제국의회에서 황제에게 굴복해야 했다.
이후 하인리히는 여러 차례 추방과 복귀를 반복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으나, 결국 브라운슈바이크 주변의 축소된 영지만을 유지한 채 말년을 보내게 된다. 그의 몰락은 벨프 가문의 세력 약화와 신성 로마 제국 내 황제권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4. 1. 영지 몰수와 추방

프리드리히 1세의 롬바르디아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하인리히가 자신을 돕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작센, 바이에른, 독일 북부와 동부 일부 지역에 걸쳐 강력하고 넓은 영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하인리히에 대한 다른 독일 제후들의 적대감을 이용했다.
1180년, 프리드리히 1세는 주교들과 제후들로 구성된 법정을 통해 하인리히를 불복종 혐의로 궐석재판에 부쳤다. 이 법정은 전통적인 게르만법보다 제국법이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며 하인리히가 소유한 영지를 몰수하고 추방령(제국 아흐트형)을 내렸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하인리히를 굴복시키기 위해 제국군을 이끌고 작센을 침공했다. 하인리히의 동맹들이 그를 저버리자, 그는 결국 1181년 11월 에어푸르트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출석하여 항복해야만 했다.
하인리히는 1182년에 3년간 독일에서 추방당했고, 이 기간 동안 노르망디에서 장인인 헨리 2세와 함께 지냈다. 1184년 성령 강림절에는 아마도 장인 헨리 2세의 중재자 자격으로 마인츠에서 열린 마인츠 궁중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185년에 독일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1188년에 다시 추방당했다. 그의 아내 마틸다는 1189년에 사망했다.
4. 2. 복귀와 말년

1188년에 다시 추방되었고, 그의 아내 마틸다는 1189년에 사망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하인리히는 작센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동원하여, 과거 자신을 배신했던 부유한 도시 바르도비크(Bardowick)를 정복하고 교회 건물을 제외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며 복수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다시 하인리히 사자공을 제압했다.
1194년,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낀 하인리히는 하인리히 6세 황제와 화해했다. 그는 과거에 비해 크게 축소된 영지인 브라운슈바이크와 그 주변 영토를 돌려받았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평화롭게 지내며 예술과 건축을 후원하는 데 힘썼다. 1195년 8월 6일, 하인리히 사자공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에 안장된 아내 마틸다의 곁에 묻혔다.
5. 자녀
하인리히 사자공은 두 번의 결혼과 연인 관계를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인 체링겐의 클레멘티아와의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1162년에 이혼했다. 1168년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딸인 잉글랜드 왕녀 마틸다와 재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고, 일부 기록에는 이 외에 세 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연인 이다 폰 블리스카스텔과의 사이에서도 딸 한 명을 두었다.
5. 1. 체링겐의 클레멘티아와의 사이에서
하인리히의 첫 번째 아내는 체링겐의 콘라트 1세 공작과 나뮈르의 클레멘스의 딸인 체링겐의 클레멘티아였으며, 1162년에 이혼했다. 둘 사이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게르트루트 (1155년–1197년): 처음에는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4세 공작과 결혼했고, 사별 후 덴마크의 크누드 6세 국왕과 재혼했다.
- 리첸차 (1157년경–1167년)
- 하인리히: 요절
5. 2. 잉글랜드 왕녀 마틸다와의 사이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은 1168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공작 부인의 딸인 마틸다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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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리첸차)[18] | 1172년 – 1208년/1209년 | 처음에는 페르슈의 조프루아 3세 백작과 결혼했고,[21] 이후 쿠시의 앙게랑 3세 영주와 재혼했다. |
라인 궁정백 하인리히 5세 | 1173년/1174년경 – 1227년 | 라인 궁정백. 딸 아그네스는 바이에른 공작오토 2세와 결혼했다. |
로타르 | 1174년/1175년 – 1190년 | |
오토 4세 | 1175년/1176년 – 1218년 | 신성 로마 황제 및 슈바벤 공작. |
빌헬름 | 1184년 – 1213년 | 뤼네부르크 공작.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 그의 후손은 하노버 가문의 영국 국왕 조지 1세로 이어진다. |
일부 사료에는 하인리히와 마틸다 사이에 세 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엘레아노르 (1178년 출생): 어린 나이에 사망.
- 잉기보르 (1180년 출생): 어린 나이에 사망.
- 아들 (1182년 출생 및 사망)
5. 3. 이다 폰 블리스카스텔과의 사이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의 연인이었던 이다 폰 블리스카스텔(Ida von Blieskastel)과의 사이에서는 딸 마틸데(1150년경 ~ 1219년경)를 두었다. 마틸데는 메클렌부르크의 하인리히 보르빈 1세 후작과 결혼했다.6. 유산
사자공 하인리히는 사후에도 독일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다.[22][5] 그의 대표적인 문화 유산으로는 1170년경 제작되어 현재까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사자공 하인리히의 복음집이 있으며, 이는 니더작센주 볼펜뷔텔의 헤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강력한 이미지는 후대에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전쟁 기금 마련을 위해 그의 형상을 본뜬 '아이제르너 하인리히'(Eiserner Heinrich|아이제르너 하인리히ger, 불굴의 하인리히) 조형물이 세워졌다. 또한, 나치 독일 시대에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어, 하인리히가 생존권 정책의 선구자인 것처럼 묘사되었고,[23][6]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과 그의 무덤은 '국가 헌정 장소'로 지정되기도 했다.[24][7]
6. 1. 문화적 유산
하인리히 사자공은 독일의 세속 영주 중 최초로 브라운슈바이크의 궁정을 권세 과시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문서(Schriftstück|슈리프트슈튁de)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1144년 또는 그 이전에 브라운슈바이크 궁정에 관방(Kanzlei|칸츨라이de)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의 문화적 유산은 건축과 예술 후원에서 두드러진다. 1166년, 그는 자신의 문장에 그려진 동물을 형상화한 브라운슈바이크 사자상을 제작하여 당크바르데로데 성(Burg Dankwarderode|부르크 당크바르데로데de) 정원에 세웠다. 이 청동상은 알프스 산맥 이북 지역 최초의 청동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이 조각상 옆에는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이 건축되었다.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하인리히와 그의 아내 마틸다 오브 잉글랜드는 호화로운 장식 사본인 사자공 하인리히의 복음집(Evangeliar Heinrichs des Löwen|에방겔리아어 하인리히스 데스 뢰벤de) 제작을 후원했다. 이 복음집은 1170년경 제작되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니더작센주 볼펜뷔텔의 헤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복음집 삽화에는 하인리히 부부가 신에게 직접 왕관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들의 왕족 혈통과 신성한 권위를 강조한다. 또한 프랑스의 무훈시 걸작인 롤랑의 노래를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했는데, 번역본의 에필로그에서는 하인리히 사자공을 다윗, 카롤루스 대제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
6. 2. 정치적 유산
사자공 하인리히는 오늘날까지도 대중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5] 그는 독일의 세속 영주 중 최초로 브라운슈바이크의 궁정을 권세 과시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문서(독: Schriftstück)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144년 또는 그 이전에 궁정에 관방(독: Kanzlei)을 두었다.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유산을 남겼는데, 1170년경 호화로운 장식 사본인 사자공 하인리히의 복음집 제작을 의뢰했다. 이 복음집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니더작센주 볼펜뷔텔의 헤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프랑스의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를 독일어로 번역하게 하여 독일 문학 발전에도 기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브라운슈바이크에서는 독일의 전쟁 지원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사자공 하인리히를 묘사한 못 박힌 조형물인 '아이제르너 하인리히'(Eiserner Heinrich|아이제르너 하인리히de)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후 나치 독일 시대에는 선전 목적으로 이용되어, 하인리히가 나치의 ''생존권'' 정책의 선구자라고 선전되었으며,[6]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과 그의 무덤이 '국가 헌정 장소'로 지정되기도 했다.[7]
6. 3. 대중 문화
사자공 하인리히는 오늘날까지도 대중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22][5]하인리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민담의 주제가 되었으며, 흔히 '하인리히 사가'(Heinrichssageger)라 불린다.[25][8] 시간이 흘러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작곡가 아고스티노 스테파니의 오페라 '엔리코 레오네'(Enrico Leoneita)의 소재가 되었다.[26][9] '하인리히 사가'는 하인리히의 성지로 향하는 순례에 대한 가공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 중 인기 있는 부분은 브라운슈바이크의 사자에 관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하인리히는 순례 중에 사자와 용(드래곤)의 싸움을 목격하고 사자 편에 서서 함께 싸워 용을 물리쳤다. 충성스러운 사자는 이후 하인리히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를 따랐다. 하인리히가 죽자, 사자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그의 무덤에서 슬퍼하다 죽었다고 한다. 이에 브라운슈바이크 사람들은 사자를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27][10][28][11][29][12] 하인리히 사자 전설은 체코의 기사 브룬츠비크 이야기에도 영감을 주었으며, 이 이야기는 프라하 카를교의 기둥에 묘사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독일의 전쟁 물자 지원 기금 마련을 위해, 사자공 하인리히를 묘사한 못 박힌 조형물인 '아이제르너 하인리히'(Eiserner Heinrich|아이제르너 하인리히ger, 불굴의 하인리히)가 브라운슈바이크에 세워졌다.
이후 나치 정권은 선전을 통해 하인리히를 나치의 '레벤스라움'(생활권) 정책의 선구자로 미화했으며,[23][6]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과 하인리히의 무덤을 '국가 헌정 장소'(Nationalweihestätteger)로 지정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24][7]
로렌스 노폭의 1996년 소설 ''교황의 코뿔소''는 하인리히의 군대가 보물을 숨겼다고 전해지는 우제돔 수도원을 약탈하려다 폭풍으로 수도원이 무너져 실패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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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백과사전
Henry III, duke of Bavaria and Saxony
https://www.britanni[...]
2023-03-22
[2]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The Impact of the Crusades on the Near East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5
[3]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the Crusades
Routledge
2013
[4]
서적
Aristocratic Life in Medieval France
Johns Hopkins University
2002
[5]
뉴스
Barbarossas Staatsfeind Nummer e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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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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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der Lö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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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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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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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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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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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Leone (Heinrich der Lö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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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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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Die Sage von Heinrich dem Löwen. Ihr Ursprung, Ihre Entwicklung und Ihre Überlieferung by Karl Hoppe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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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Herrscher als Löwe: Ursprung und Gebrauch eines politischen Symbols im Früh- und Hochmittelalter
Böhlau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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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eidoskop der Mächtigen: Randglossen zu überlieferten Mythen und Episoden der Geschich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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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eidoskop der Mächtigen: Randglossen zu überlieferten Mythen und Episoden der Geschich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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