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람 (불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람은 불교 사찰의 건축 양식을 의미하며,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각 지역에서 발전해 왔다.

인도에서는 불탑과 승방이 분리되어 발생했지만, 후에 승원이 불탑을 수용하면서 정사(비하라)를 중심으로 한 가람이 유행했다. 중국에서는 초기에는 부처를 공양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구성되었으나, 불사리 신앙의 영향으로 불탑과 불전이 분리되어 불전 중심의 가람으로 변화했다. 한국은 삼국 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가 일반적이었으며, 백제는 일본에 건축 기술을 전파하여 일본 가람에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일탑식 가람을 주로 사용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는 쌍탑 가람이 나타났다. 일본은 백제로부터 건축 기술을 전수받아 가람을 발전시켰으며,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양한 가람 배치가 나타났다. 현대에는 건축학 등에서 기독교의 대성당을 가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절 - 사찰
    사찰은 불교의 수행과 신앙 중심 공간으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지역, 시대, 종파에 따라 다채로운 건축 양식을 보이는 건축물 및 그 주변 환경을 의미한다.
  • 절 - 차이티야
    차이티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하여 초기에는 흙무더기 등을 뜻했으나 점차 신성한 구조물을 의미하게 되었고, 불교 건축에서는 암굴 사원 형태로 발전하여 예배 공간과 탑 안치 기능을 수행하며 독특한 양식을 형성했으며, 네팔과 캄보디아에서는 각각 탑과 유사한 사당 기념물, 신성한 장소의 경계 표지를 의미한다.
가람 (불교)
가람
어원
산스크리트어सँघाराम (Saṁghārāma) 상가라마
정의
설명승려들이 거주하며 불교를 수행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다른 뜻가람은 또한 승가람마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2. 인도의 가람

인도에서는 예배 대상인 불탑승려가 사는 승방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지만, 나중에 승원이 불탑을 포함하게 되었다. 후기 승원에서는 예배 대상(탑 또는 불상)을 모신 사당 외에 중앙 안뜰을 둘러싼 방을 갖는 방형 정사(비하라)가 유행했다. 정사에는 회당, 식당, 부엌, 저장실, 변소 등 수도승의 단체 생활에 필요한 시설과 개인 사생활 보호 및 명상에 적합한 시설이 갖춰졌다.

rājagṛhasa (라자그리하)에서는 석가 시대에 암바팔리가 기증했다는 망고 정원의 정사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이 발굴되었다. 여기에는 스투파(불탑)나 사당(차이티야당)은 물론 비구의 개별 거실도 보이지 않아 후세의 승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후기 대표적인 예는 현재 파하르푸르(pahārpur)의 옛 이름 somapurasa (소마푸라)의 승원 터이다. 이곳은 한 변이 약 300m인 정사각형 담장 안에 177개의 승방이 있고, 안뜰 중앙에는 사방에 계단이 있는 십자형 정사(기단은 109m × 96m)가 있었다. 기단에 박혀 있던 2,800점의 찰흙 부조는 불교 존상, 힌두교 신상, 인물, 동물 등을 나타내며, 파라 왕조 미술의 귀중한 자료이다.

3. 중국의 가람

중국에서 불교 사찰의 가람에 대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예는 삼국지 중 오지(吳志)에 후한 시대 말에 취융이 서주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부도사이다. 부도사는 금빛 불상을 모시고 상륜에 9층 동반을 드리운 이중 누각을 중심으로 2층 회랑을 둘러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누각은 후세의 불전과 탑 양쪽의 기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초기 가람은 부처를 공양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불사리 신앙이 활발해지면서 불사리를 모시는 불탑과 부처를 모시는 불전이 분리되어 부처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점차 불전을 중심으로 하는 가람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북조시대에는 귀족들이 주택을 희사하면서 그대로 사찰로 변한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서는 불전과 강당이 앞뒤로 배치되어 불탑을 배치하지 않는 형태의 가람이 많았다. 또한 중국에서는 위와 같은 중국적 사찰 건축뿐만 아니라 인도의 형태를 본뜬 석굴 사원도 만들어졌다. 운강, 둔황, 용문 등의 유구가 있다.

4. 한국의 가람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독특한 불교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백제의 건축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1.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했다. 3년 뒤 전진에서 온 순도가 초문사를 세웠고, 동진에서 온 아도이불란사를 건립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가람 배치는 일탑중심동서북금당식(一塔中心東西北金堂式), 즉 1탑 3금당 배치이다. 한국의 사찰은 초기에 대개 이러한 형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평양 동쪽의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가 좋은 예시이다. 청암리사지는 하나의 석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 3면에 전지(殿址)가 있는 배치 형태를 띈다. 이러한 형식은 백제 가람 중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일본에까지 영향을 준 흔적이 보인다.[3]

4. 2.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수용했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백제 최초의 사찰은 마라난타가 한산(漢山)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웅진 시기 성왕 5년(527) 대통사가 건립되었다. 사비시기에도 사찰 건립이 더욱 성행하여 현재 사비 근처에서 발굴된 30여개소의 사지에서 백제 가람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유구(遺構)로 백제 유지에 남아 있는 사지(寺址)로서는 부여 군수리 사지, 가탑리(佳塔里)·동남리의 사지 및 정림사지, 은산면 금공리(恩産面 琴公里)의 금강사지(金剛寺址), 적성면 현북리(積城面 懸北里)의 사지와 익산군의 미륵사지가 있다.[4]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사지는 대부분 평지가람이며, 1탑1금당식 배치를 가진다.

일본의 칠당가람 역시 백제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후대에 만들어진 사찰이나 백제의 고토(古土)이던 남원지방의 문복사지(文福寺址)의 배치가 그 근거로 제시된다.[4]

일본 등 외국에 적극적으로 건축 기술을 제공한 나라도 백제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 사람인 아비지(阿比知)에 의해 축조되었고,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본 건축도 백제의 도움을 받아 개화되었다. 고구려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흔적이 엿보인다. 백제는 특히 목조건축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은 하나도 없고, 단지 석조물 약간이 있어 그 발달한 건축 기법과 양식의 잔형(殘形)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백제인들이 조영(造營)한 일본에 있는 건축물을 통하여 백제 가람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는데 시텐노지(四天王寺)나 호류지(法隆寺)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호류지 5층 목탑은 백제 건축미의 일단을 대변하는 것이다.[4]

4. 3. 신라

신라는 주로 일탑식(一塔式) 가람을 두었다.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있고, 금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둘러 안쪽에 금당과 강당을 배치하는 구조이다.

황룡사의 가람배치


통일신라의 경우 쌍탑가람식(二-堂雙塔式) 가람이 나타났다. 이는 당나라 이후 교리(敎理)의 변화에 따라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시대에 유행한 평지가람제(平地伽藍制)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타난 산지가람제(山地伽藍制)가 한 원인이 되어 탑 형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평지가람제는 단탑형식, 산지가람제에는 쌍탑형식이 원칙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단탑가람식에는 대체로 5층 이상의 탑이, 쌍탑가람식에는 흔히 3층탑이 만들어졌다. 삼국시대에는 이 원칙이 잘 지켜져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5층 이상의 석탑이 그 구성적인 의미를 잃지 않았다. 쌍탑가람제가 유행한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탑은 구축성을 잃고 소형(小型)이 되며 조각적이거나 공예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신라 탑으로서의 특색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진다.[5]

5. 일본의 가람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6세기 전반에는 본격적인 사찰은 없고 궁궐이나 저택 안에 소규모 불당만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슌 천황 1년(588년)에 백제에서 사공과 로반 박사, 기와 박사 등이 와서 최초의 본격적인 가람인 호코지(아스카데라)를 착공했다고 전한다.[1] 아스카데라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구역 중앙에 불탑이 세워지고, 이를 중금당·동금당·서금당의 삼금당으로 둘러싼 가람 배치가 고구려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중국의 삼합원 배치에 기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1]

7세기 초에 발원한 오사카시텐노지나라호류지 옛 가람(와카쿠사 가람)의 가람 배치는 중축선(中軸線)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을 남에서 북으로 일직선으로 늘어놓는 것으로 회랑은 중문 좌우에서 나와 강당 사이를 연결해 탑과 금당을 둘러싸고 있다. 이를 시텐노지(가람배치)라 부르며 삼국시대 백제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이다.[1] 아스카 시대에 착공된 사찰은 도카이 지방에서 산요 지방에 걸쳐 40여 개가 있는데, 그 중 대다수는 나라, 오사카, 교토에 있어 일본의 본격적인 가람 중 최초의 것으로 여겨진다.[1]

7세기 후반-8세기의 주요 사찰의 가람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절 이름가람 배치특징비고
가와라데라 (아스카)1탑 2금당 (좌우 비대칭)중문을 들어가면 정면에 중금당, 왼쪽에 서금당, 오른쪽에 탑이 있다. 아스카데라 가람 배치의 동금당을 생략한 형태이다.
호류지 서원회랑 내 왼쪽에 탑, 오른쪽에 금당7세기 말~8세기 초 재건. 호린지도 유사한 배치 (호류지식 가람 배치). 탑과 금당 좌우 반대 위치는 호키지식 가람 배치이다.
야쿠시지2탑 1금당후지와라쿄헤이조쿄 이전 모두 동일. 동서 탑은 회랑 안쪽.
도다이지2탑 1금당동서 탑이 회랑 밖에 위치 (약사사와 차이점).
다이안지초기 1탑 (약사사식 서탑 생략 형태) → 헤이조쿄 이전 후 동서 양탑탑 위치는 남대문보다 더 남쪽, 가람 중심부에서 상당히 떨어짐.
국분사 (나라 시대)1탑 1금당 (기본)탑은 가람 중축선상에 위치하지 않고, 회랑 안쪽/바깥쪽 동쪽/서쪽에 치우침.


참조

[1] 서적 Ashokavadana
[2] 서적 伽藍が白かったとき 岩波書店 1957
[3] 간행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고구려의 미술/고구려의 건축
[4] 간행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백제의 미술/백제의 건축
[5] 간행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통일신라시대의 미술/통일신라의 건축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