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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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레리우스는 로마 황제로서, 초기 생애는 다키아 리펜시스에서 보냈으며, 군 경력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메소포타미아를 로마 제국의 영토로 확장했다. 305년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된 후에는 사두정치 개편을 시도했으나, 권력 다툼과 내전으로 인해 실패했다. 기독교 박해를 주도했으나, 말년에는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켰다. 311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테살로니키의 개선문과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 궁전 등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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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레리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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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
| 출생일 | 258년경 |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령 다키아, 펠릭스 로물리아나 |
| 사망일 | 311년 5월 초 (53세 추정) |
| 사망지 | 로마 제국, 다키아 리펜시스, 세르디카 |
| 매장지 | 펠릭스 로물리아나 |
| 배우자 | 갈레리아 발레리아 |
| 자녀 | 칸디디아누스 발레리아 막시밀라 |
| 아버지 | 디오클레티아누스 (양아버지) |
| 어머니 | 로물라 (추정)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통치 정보 | |
| 로마 황제 | (동방) |
| 즉위 | 305년 5월 1일 – 311년 5월 초 |
| 칭호 | '아우구스투스' |
| 이전 통치자 |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
| 후임 통치자 | 막시미누스 2세와 리키니우스 (둘 다 동방) |
| 공동 통치자 | 콘스탄티우스 1세 (305–306) 세베루스 2세 (306–307) 콘스탄티누스 1세 (306–311) 막센티우스 (306–311) 막시미아누스 (306–310) 리키니우스 (308–311) '알렉산더' (308–311) 막시미누스 2세 (310–311) |
| 부제 재위 | 293년 3월 1일 –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 |
| 칭호 | '카이사르'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갈레리우스는 다키아의 수도인 세르디카(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트라키아 출신의 목부(양치기)였고, 어머니는 롬라라는 여성이었다. 그도 아버지처럼 목부가 되어, 아르멘타리우스(라틴어로 가축의 무리 ''armentum'')라는 별명을 사용했다. 그의 원래 코그노멘은 "막시미누스"였지만, 카이사르가 된 후 "막시미아누스"로 바꿨다.[3]
이후 군인이 되어 아우렐리아누스나 프로부스 황제 밑에서 복무했다.
2. 1. 출생과 가문
갈레리우스는 나중에 다키아 메디테라네아로 명명된 세르디카 근처[8] 다키아 리펜시스에서 태어났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그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궁전, 펠릭스 로물리아나(감지그라드)를 그의 출생 및 장례 장소로 간주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로물라는 트라키아인으로, 카르피의 공격 때문에 로마 다키아 (오늘날의 루마니아)를 떠났다.[9][10] 그는 원래 아버지의 직업인 목동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아르멘타리우스'(armentum|lit=herdla)라는 별명을 얻었다.[3]
그는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 밑에서 뛰어난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293년에 사두정치가 수립되었을 때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함께 카이사르로 지명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 (나중에 갈레리아 발레리아로 알려짐)와 결혼했으며, 동시에 일리리아 지방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2. 2. 군 복무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 황제 밑에서 뛰어난 군인으로 복무한 갈레리우스는 293년 사두정치 수립과 함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더불어 ''카이사르''로 지명되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후에 갈레리아 발레리아로 알려짐)와 결혼하고, 일리리아 지방을 관리하게 되었다.[3] 몇 년간 다뉴브강에서 사르마티아인 및 고트족과 싸운 후 동부 제국 경계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임명 직후 갈레리우스는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시리스와 콥토스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1]3. 페르시아 전쟁 (294년 ~ 299년)
294년, 샤푸르 1세의 아들 나르세스가 사산 왕조의 권력을 잡으면서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르세스는 이전의 로마와의 평화 조약을 무시하고 295년 또는 296년에 서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잃었던 땅을 되찾았다. 이후 로마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카르해와 칼리니쿰 사이 지역에서 동부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갈레리우스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1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 황제의 자색 옷을 입은 채 황제의 수레 앞에서 1마일을 걷게 하는 모욕을 주었다.[12] 이는 카르해에서의 패배가 지휘관의 실패 때문이며, 갈레리우스의 실패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1]
그러나 298년 봄,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지역에서 모은 새로운 병력으로 군대를 보강하고 반격에 나섰다. 험준한 아르메니아 지형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군을 기습 공격하여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사탈라 전투에서는 나르세스의 진영, 보물, 후궁, 아내까지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14]
갈레리우스는 여세를 몰아 미디아와 아디아베네로 진격하여 계속 승리하였고, 니시비스를 확보했다. 일부 역사가는 그가 티그리스강을 따라 크테시폰까지 점령했다고 주장한다.[15]
결국 나르세스는 갈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포로가 된 가족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갈레리우스는 이를 거절했다. 299년 봄,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니시비스 평화 조약을 통해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티그리스강을 두 제국 사이의 경계로 삼았다.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이베리아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고, 니시비스는 로마와 페르시아 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는 티그리스 강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5개 사트라피(총독령)를 통제하게 되었다.
| 사트라피(총독령) |
|---|
| 잉길레네 |
| 소파네네(소페네) |
| 아르자네네(아그즈니크) |
| 코르두에네 |
| 자브디케네(현대 하카리 근처, 터키) |
이러한 영토 확보를 통해 로마는 크테시폰 북쪽에 전진 기지를 확보하고 페르시아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16]
3. 1. 발단
294년, 샤푸르 1세의 아들 나르세스가 사산 왕조의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전임자들의 흔적을 지우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295년 또는 296년에 서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287년 평화 조약에서 티리다테스에게 넘겨졌던 땅을 되찾았다. 이후 로마 메소포타미아로 남하하여 카르해와 칼리니쿰 사이 지역에서 동부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갈레리우스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1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책임을 물어 황제의 자색 옷을 입은 채 황제의 수레 앞에서 1마일을 걷게 했다.[12] 이는 카르해에서의 패배가 지휘관의 실패 때문이며, 갈레리우스의 실패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1]298년 봄,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지역에서 모은 새로운 병력으로 군대를 보강했다.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진격하지 않았고,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를 통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했다. 험준한 아르메니아 지형은 로마 보병에게 유리했고, 현지 지원은 갈레리우스에게 기습의 이점을 제공했다. 그는 두 차례의 전투에서 나르세스를 격파했고, 사탈라 전투에서 나르세스의 진영, 보물, 후궁, 아내를 빼앗았다.[14] 갈레리우스는 미디아와 아디아베네로 진격하여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니시비스를 확보했다. 티그리스강을 따라 크테시폰을 점령했다는 주장도 있다.[15]
나르세스는 갈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가족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갈레리우스는 거절했다. 299년 봄,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니시비스 평화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따라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영토를 넘겨주고 티그리스강을 두 제국 사이의 경계로 삼았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지배로 반환되었고, 코카서스 이베리아는 로마에 충성을 바치게 되었으며, 니시비스는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무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로마는 티그리스 강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5개 사트라피를 통제하게 되었다.[16]
3. 2. 초기 전투와 패배
296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즈음 갈레리우스는 도나우강 지역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12] 그의 첫 번째 원정은 카르해 전투에서 나르세 1세에게 크게 패배하여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잃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13] 이 패배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황제의 자색 옷을 입은 채 자신의 황제 수레 앞에서 1마일을 걷도록 하는 모욕을 주었다.[14] 이는 카르해에서의 패배가 지휘관의 잘못 때문이며, 이러한 잘못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3. 3. 반격과 승리
296년,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갈레리우스는 도나우강 지역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15] 첫 번째 원정은 카르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며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13] 그러나 297년,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를 통해 진격하여 나르세 1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르세의 후궁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16] 유리한 전황을 이어간 갈레리우스는 수도 크테시폰까지 점령했다.[15] 298년 나르세가 항복하면서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티그리스강 동쪽 일부 지역까지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이 동쪽으로 가장 넓게 확장된 시기였다.[15]3. 4. 니시비스 평화 조약 (299년)
296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즈음, 갈레리우스는 도나우강 지역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12] 그의 첫 번째 원정은 카르해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하며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13] 그러나 297년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를 통해 군대를 진격시켜 나르세 1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르세의 후궁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14] 유리한 전황을 바탕으로 갈레리우스는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다.[15] 298년 나르세가 항복하면서 메소포타미아는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티그리스강 동쪽 일부 지역까지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이 동쪽으로 판도를 가장 넓힌 시기였다.[16]니시비스 평화 조약의 조건은 가혹했다.[1]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영토를 넘겨주고 티그리스강을 두 제국 사이의 경계로 삼았다. 조약의 추가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아르메니아는 지아타 요새를 경계로 로마의 지배로 반환된다.
- 코카서스 이베리아는 로마가 임명한 사람의 통치하에 로마에 충성을 바친다.
-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니시비스는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무역의 유일한 통로가 된다.
- 로마는 티그리스 강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5개 사트라피(총독령)를 통제한다.
해당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사트라피(총독령) |
|---|
| 잉길레네 |
| 소파네네(소페네) |
| 아르자네네(아그즈니크) |
| 코르두에네 |
| 자브디케네(현대 하카리 근처, 터키) |
이 지역에는 안티-토로스 산맥을 통과하는 티그리스 강의 통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로 가는 가장 빠른 남쪽 경로인 비틀리스 고개, 그리고 투르 압딘 고원에 대한 접근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영토를 통해 로마는 크테시폰 북쪽에 전진 기지를 확보하고, 이 지역을 통과하는 페르시아 군대의 미래 진격을 늦출 수 있었다.[16] 평화 조약의 조건에 따라 티리다테스는 자신의 왕좌와 그의 조상 땅에 대한 모든 권리를 되찾았으며, 로마는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1]
4. 정제(Augustus) 즉위와 통치 (305년 ~ 311년)
296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갈레리우스는 도나우강 지역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첫 번째 원정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잃었다. 그러나 297년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를 통해 군대를 진격시켜 나르세 1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르세의 후궁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유리한 전황을 이용하여 수도 크테시폰도 점령했다. 298년 나르세가 항복하여 메소포타미아는 로마의 지배 하에 다시 들어갔고, 티그리스강 동쪽 일부 지역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 판도를 가장 넓혔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퇴위하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함께 정제가 되었고,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부제로 임명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죽으면 로마 제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기를 바랐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를 동쪽 궁정에 초대하여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4. 1. 사두정치의 개편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면서, 그들의 자리를 채울 두 명의 새로운 카이사르가 필요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주었다.[18] 막시미누스 다자는 갈레리우스의 조카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휘권을 받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갈레리우스의 군대 동료로 메디올라눔을 근거지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통치하도록 파견되었다. 세베루스는 공식적으로 서방 황제에게 보고했지만, 갈레리우스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여 그의 권력은 제국의 4분의 3 이상을 장악하게 되었다.콘스탄티우스가 306년 에보라쿰에서 사망하자, 군단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편지를 받고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승진이 정식 절차를 따르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효한 것으로 간주했다. 갈레리우스는 처음에는 놀라움, 실망감, 분노를 느꼈다.[19][20] 하지만 침착하게 고려한 결과 내전을 일으키는 것을 꺼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의 군단들의 헌신을 받았고, 니코메디아에서의 만남에서 갈레리우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1] 갈레리우스는 타협적인 결정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가 알프스 너머의 지역을 통치하도록 허용했지만, 그에게는 ''카이사르'' 칭호와 사두정치 내에서 네 번째 지위만을 부여했다. 세베루스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센티우스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의 딸 발레리아 막시밀라의 남편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1]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가 모든 형태의 과세에서 면제되도록 하는 전통을 무시했고, 막센티우스는 현지인들의 분노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했다. 세베루스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로 급히 진격하여 찬탈자를 기습하려 했지만, 막시미아누스가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은퇴에서 복귀했다. 군대는 입장을 바꾸었고, 세베루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는 리키니우스에게 다뉴브강을 지키게 하고, 일리리쿰과 동방에서 모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나르니까지 진군하여 로마에서 약 96.56km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지만, 막시미아누스의 능숙한 대비로 인해 그 과정에서 어떤 영토도 점령할 수 없었다.
갈레리우스는 로마에 평화 제안을 보냈지만, 막센티우스는 제안을 거절했고, 그동안 침공군의 충성심을 훼손하기 위해 일리리아 군단에 뇌물을 보냈다.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해야 했고, 노련한 병사들이 자신을 버리는 것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분노한 갈레리우스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군단이 시골을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막센티우스는 전면전을 피했다.
308년, 너무 많은 황제들이 존재하게 되자 갈레리우스는 은퇴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및 현재 활동 중인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카르눈툼에서 제국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리키니우스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고,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카이사르''가 되기로 합의했다.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남고, 막시미누스는 그의 ''카이사르''로 남았다. 막시미아누스는 은퇴하고,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선언되었다.
갈레리우스의 계획은 곧 실패했다. 리키니우스의 승진에 질투심을 느낀 막시미누스 또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주장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아를에서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했다.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라는 또 다른 찬탈자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 제국의 권력을 주장하는 사람이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고 다른 황제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시도를 중단했다. 그는 말년에는 휴식을 취하고, 펠소호(현재의 발라톤 호)에서 대규모 벌목 및 배수 사업과 같은 공공 사업에 매달렸다.
4. 2. 권력 갈등과 내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면서, 그들의 자리를 채울 두 명의 새로운 ''카이사르''가 필요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막시미누스 다자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각각 이집트와 시리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통치자로 임명했다. 세베루스는 서방 황제에게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갈레리우스에게 헌신하여 그의 권력을 제국의 4분의 3 이상으로 확장시켰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에서 사망하자, 그의 군단은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 갈레리우스는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와 사두정치 내 네 번째 지위를 부여하고, 세베루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다.[1]
얼마 후 막센티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1]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세베루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직접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나르니까지 진군했다가 막센티우스의 대비와 병사들의 이탈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카르눈툼에서 제국 회의를 소집하여 리키니우스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콘스탄티누스를 그의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막센티우스를 찬탈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막시미누스의 ''아우구스투스'' 칭호 요구와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의 아프리카 반란으로 인해 실패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 채 다른 황제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말년에는 공공 사업에 매달렸다.
5. 기독교 박해와 관용령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대부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평온하게 살았다. 303년 2월 24일 칙령으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갈레리우스가 옛 방식과 옛 신을 맹렬히 옹호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갈레리우스의 작품으로 돌렸다. 비밀리에 모여 반란을 꾀할 것을 우려하여 그리스도교 집회소를 파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치 초반에는 반기독교적이지 않았으며, 역사가들은 갈레리우스가 황궁을 비밀리에 불태우고 이를 기독교 사보타주 혐의로 뒤집어씌워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박해하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303년에 시작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마지막 박해 칙령은 갈레리우스의 주장에 따라 발표되었으며, 이 탄압 정책은 311년 4월 세르디카에서 관용 칙령이 발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22][23][24] 이 칙령은 갈레리우스가 마지막으로 겪은 질병 기간 동안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 참조). 갈레리우스의 마지막 요청은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25]
초기 박해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갈레리우스는 나중에 기독교를 근절하려는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용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안전, 공화국의 안전,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손상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락탄티우스는 모든 박해자들이 맞이한 비참한 최후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연대기인 ''De Mortibus Persecutorum''에서 칙령의 내용을 제공한다.[26] 이는 기독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의 종말을 알렸으며, 2년 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되었다.
6. 죽음과 유산

갈레리우스는 311년 4월 말 또는 5월 초에 유세비우스[30]와 락탄티우스[31]가 묘사한 끔찍한 질병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아마도 일종의 결장암, 괴저 또는 푸르니에 괴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레리우스는 오늘날 세르비아의 자예차르에 있는 자신의 출생지에 세운 궁전의 일부였던 감지그라드-로물리아나에 있는 자신의 묘소에 묻혔다. 현장에서는 부식된 철 링 메일(''로리카 하마타'')로 구성된 여러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이 메일 갑옷은 황제의 장례식과 신격화 의식 중에 황제의 밀랍 인형이 불태워질 때 착용했을 수도 있다.[32] 이 유적 전체는 2007년 6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요크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자 즉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고, 막시미아누스와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에서 공동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갈레리우스의 계획은 무너졌다.
307년 이탈리아 침공에 실패한 후, 갈레리우스는 친구인 리키니우스를 정제의 자리로 승격시켰다. 자신의 야망도 꺾였기 때문에,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건설한 도시 펠릭스 로물리아나(현재 세르비아의 감지그라드 근처)로 은퇴하여 여생을 "기쁨을 맛보고 약간의 공익적인 일을 하는" 데 헌신했다.
311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에우세비우스의 저서 《교회사》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끔찍한 질병으로, 아마도 대장암과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의 생식기 중간 부위가 부어 곪아 깊은 구멍이 뚫렸다. 그것은 몸 속 깊숙이까지 닿아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그 구멍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구더기가 생겨났고, 구역질이 나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과식 때문에 비만했던 그의 몸은 병에 걸린 후 더욱 축 늘어진 거대한 지방 덩어리가 되었고, 곧 살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여 측근들이 구토할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 되었다. 실제로 의사 중 몇몇은 참을 수 없는 악취 때문에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이제 그의 온 몸은 붓고,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른 간호인들도 더 이상 간호할 수 없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7. 평가와 논란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기독교인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조언자였던 갈레리우스는 황제가 되자 자신의 다키아 출신임을 강조하며 로마에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제국의 이름을 로마 제국이 아닌 다키아 제국으로 칭할 것을 제안하여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을 경악하게 했다.[33] 락탄티우스는 또한 갈레리우스가 최고 권력을 얻자마자 반(反)로마적인 태도를 보이며, 마치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대하듯 가혹하게 로마 시민들을 대했다고 주장한다.[33] 이는 승리한 트라야누스가 2세기 전 갈레리우스의 조상인 정복된 다키아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취급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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