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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토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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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라나다 토후국은 1232년 무함마드 1세가 세운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다. 레콩키스타로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려는 기독교 세력의 압박 속에서,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나스르 왕조는 문학과 건축,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15세기 말 스페인 가톨릭 군주의 통일로 인한 그라나다 전쟁에서 패배하며 1492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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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토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나스르 왕조 왕국의 영토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나스르 왕조 왕국의 영토
기본 정보
공식 명칭그라나다 토후국
일반 명칭그라나다
시대중세 후기
지위카스티야 왕국의 공납국 (간헐적)
종주국카스티야 왕국
수도그라나다
공용어공식 언어: 고전 아랍어
토착어: 안달루시아 아랍어, 베르베르어
종교다수 종교: 수니 이슬람
소수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유대교
표어왈라 갈리바 일라 알라 ()
정치
정부 형태세습 군주제
술탄무함마드 1세 (1232–1273)
무함마드 12세 (1487–1492)
역사
성립1232년
멸망카스티야의 정복 (1492년)
이전알모하드 칼리파국
이후그라나다 왕국 (카스티야 왕국)
현재 국가
국기 및 문장
나스르 왕조 왕국의 왕실 깃발
왕실 깃발
나스르 그라나다의 문장 (현대적 표현)
문장

2. 역사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정복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이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 10세기 코르도바 칼리파국 아래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고 발전된 지역 중 하나였으나, 북부 기독교 왕국과의 갈등, 내전 심화로 11세기 초 알-안달루스는 타이파 국가로 분열되었다.[4] 이는 이베리아 무슬림 정권의 쇠퇴를 의미했으며, 레콩키스타와 북아프리카 왕조에 의한 알-안달루스의 반복적인 정복을 촉진했다. 11세기 말 알모라비 왕조를 시작으로 12세기 중반 알모하드 왕조가 뒤를 이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북부 기독교 왕국 연합에 의해 알모하드 왕조가 패배한 후 알모하드 정권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1228년 알모하드 칼리프 이드리스 알-마문은 마그레브(북아프리카)를 계속 지배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알-안달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발생한 권력 공백으로 지역 지도자들이 자신만의 작은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세 번째 ''타이파'' 왕국 시대가 열렸다. 이 지도자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처음에 무르시아의 이븐 후드(ابن هود|이븐 후드ar, 재위 1228년~1238년)였는데, 그는 마지막 알모하드 총독에게 반란을 일으켜 알-안달루스에 남은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31년 이븐 후드는 레온 왕국에게 패배하여 바다호스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이는 그의 권위와 알-안달루스의 신뢰할 수 있는 방어자로서의 명성을 훼손시켰다.

2. 1. 배경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정복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이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 최대 지리적 확장 시기에는 무슬림의 지배가 반도의 대부분과 현재 프랑스 남부 일부까지 미쳤다.[4] 10세기 코르도바 칼리파국 아래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고 발전된 지역 중 하나였다. 북부 기독교 왕국과의 갈등이 반복되었으며, 내전이 심화되면서 11세기 초 알-안달루스가 더 작은 타이파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는 이베리아 무슬림 정권의 힘이 급격히 쇠퇴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수 세기에 걸친 기독교의 레콩키스타와 현재 모로코에 기반을 둔 북아프리카 왕조에 의한 알-안달루스의 반복적인 정복을 촉진했다. 11세기 말 알모라비 왕조를 시작으로 12세기 중반 알모하드 왕조가 뒤를 이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북부 기독교 왕국 연합에 의해 알모하드 왕조가 패배한 후 알모하드 정권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1228년 알모하드 칼리프 이드리스 알-마문은 마그레브(북아프리카)를 계속 지배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알-안달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발생한 권력 공백으로 지역 지도자들이 자신만의 작은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세 번째 ''타이파'' 왕국 시대가 열렸다. 이 지도자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처음에 무르시아의 이븐 후드(ابن هود|이븐 후드ar, 재위 1228년~1238년)였는데, 그는 마지막 알모하드 총독에게 반란을 일으켜 알-안달루스에 남은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31년 이븐 후드는 레온 왕국에게 패배하여 바다호스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이는 그의 권위와 알-안달루스의 신뢰할 수 있는 방어자로서의 명성을 훼손시켰다.

2. 2. 나스르 왕조의 성립

711년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정복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이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 10세기 코르도바 칼리파국 아래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고 발전된 지역 중 하나였으나, 북부 기독교 왕국과의 갈등, 내전 심화로 11세기 초 알-안달루스는 타이파 국가로 분열되었다.[4] 이는 이베리아 무슬림 정권의 쇠퇴를 의미했으며, 레콩키스타와 북아프리카 왕조에 의한 알-안달루스의 반복적인 정복을 촉진했다. 11세기 말 알모라비 왕조를 시작으로 12세기 중반 알모하드 왕조가 뒤를 이었다.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알모하드 왕조가 패배한 후 알모하드 정권은 불안정해졌고, 1228년 알모하드 칼리프 이드리스 알-마문은 알-안달루스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권력 공백으로 지역 지도자들이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면서 세 번째 ''타이파'' 왕국 시대가 열렸다. 이 지도자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무르시아의 이븐 후드였으나, 1231년 레온 왕국에게 패배하여 바다호스와 주변 지역 통제권을 잃었다.

이븐 후드의 군 지휘관 중 한 명은 아르호나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나스르(이븐 알-아흐마르)였다. 그는 군대 내 지위로 인해 질투를 받았고, 이븐 후드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비난을 받아 아르호나로 도망갔다. 이븐 알-아흐마르는 경건함과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232년 7월 16일 아르호나 주민들은 이븐 알-아흐마르를 에미르로 선포했다.

이븐 알-아흐마르는 아버지 쪽으로는 나스르 가문, 어머니 쪽으로는 바누 아쉬킬라 가문과 친족 관계였다. 이 두 가문은 알모하드 왕조를 섬겼던 병사들과 함께 그의 군대 초기 핵심을 형성했다. 코르도바의 바누 'l-마울과 하엔의 바누 시나니드와 같은 가문들도 합류하여 나스르 궁정에 머물렀다.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은 페르디난드 3세와 하이메 1세의 지휘하에 알-안달루스에서 주요 정복을 이루었다. 이븐 알-아흐마르의 새로운 지위는 많은 무슬림 도시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나스르 왕국은 정복이 아닌, 이븐 알-아흐마르의 권위에 동의하는 공동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하엔, 과딕스, 바에사는 1232년에, 알메리아는 1238년에, 말라가는 1238년 또는 1239년에 그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이븐 알-아흐마르는 더 큰 도시들에서 인정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코르도바는 1232년에 몇 달 동안, 세비야는 1234년에 한 달 동안만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1234년에 아르호나와 하엔에 대한 권위를 인정한 대가로 이븐 후드의 권위를 잠시 인정해야 했다.

1236년경 카스티야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이븐 알-아흐마르는 페르디난드 3세와 동맹을 맺었다. 페르디난드가 1236년에 코르도바를 정복했을 때 이븐 알-아흐마르는 그의 동맹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의 요새이자 거주지였다. 여기서 보이는 알카사바 요새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며, 아마도 이븐 알-아흐마르의 초기 거주지였을 것이다.


그라나다에서 지역 바누 할리드 가문은 나스르 가문을 지지하는 선전 활동을 벌였다. 반란군은 1238년 4월 17일 도시 요새를 성공적으로 습격했다. 이븐 알-아흐마르는 그 후 공식적으로 새로운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븐 알-아흐마르는 그 도시에 도착하여 그라나다를 수도로 결정했다. 지리적으로 방어가 용이하고, 카스티야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바다로의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통치자 거주지를 알바이신 언덕의 지리 왕조의 구 요새에서 남쪽 사비카 언덕의 알람브라 궁전으로 옮겼다.

이븐 알-아흐마르가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드 3세는 1244년 아르호나를 점령했다. 1245년 여름 하엔을 포위했고, 이븐 알-아흐마르는 1246년 3월 페르디난드와 협상하여 하엔을 항복하고 페르디난드의 봉신이 되었다. 카스티야는 그라나다 토후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20년 휴전에 동의했다. 1248년 이븐 알-아흐마르는 카스티야를 지원하여 페르디난드가 세비야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도왔다.

세비야 함락과 카스티야와의 휴전은 15세기까지 이 지역 정치 지도를 확립했다. 이 평화는 나스르 토후국이 영토를 통합하고 통치 기관을 구축할 수 있게 했다. 그라나다의 봉신 관계는 기독교 자료에서 강조되었지만, 이븐 알-아흐마르는 전술적 상황에 따라 다른 상전을 섬겼다. 1234년 이븐 후드 외에도 아바스 칼리프의 바그다드(1244년 이전), 알모하드 칼리프 압드 알-와히드 2세(1244년 이전), 하프스 왕조 튀니스(1242년과 1264년)에 충성을 맹세했다. 아랍 자료에는 카스티야 봉신 언급이 없다. 장기적으로 하엔 조약은 나스르 왕조와 카스티야 관계의 기초를 형성했지만, 평화는 종종 전쟁으로 방해되었고, 봉신 관계는 종종 갱신되었다.[1]

2. 3. 갈등과 통합

레콩키스타가 한창 진행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은 페르디난드 3세와 하이메 1세의 지휘 아래 알-안달루스 전역에서 주요 정복을 이루었다. 이븐 알-아흐마르(무함마드 1세)는 보호를 바라는 많은 무슬림 도시들의 지지를 받았고, 나스르 왕조는 정복이 아닌, 그의 권위에 동의하는 공동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2] 1232년 하엔, 과딕스, 바에사, 1238년 알메리아, 1238년 또는 1239년에 말라가가 그의 권위를 받아들였다.[2][3]

이븐 알-아흐마르는 코르도바(1232년), 세비야(1234년) 등 더 큰 도시들에서 인정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1234년에는 이븐 후드의 권위를 잠시 인정해야 했다.[4] 1236년경 카스티야의 공세가 강화되자, 이븐 알-아흐마르는 페르디난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코르도바 정복에 협력했다.[6][2]

1238년, 그라나다에서 나스르 가문을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나 이븐 알-아흐마르가 새 통치자로 선포되었다.[3] 그는 그라나다를 수도로 정하고, 알바이신 언덕의 구 요새에서 알람브라 궁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3]

이븐 알-아흐마르가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페르디난드 3세는 1244년 아르호나를 점령하고, 1245년 하엔을 포위했다. 1246년, 이븐 알-아흐마르는 하엔을 항복하고 페르디난드의 봉신이 되는 하엔 조약을 체결했다. 카스티야는 그라나다 토후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20년의 휴전에 동의했다.[2][3] 1248년, 이븐 알-아흐마르는 세비야 포위전에서 카스티야를 지원했다.[9]

세비야 함락과 카스티야와의 휴전은 15세기까지 이 지역의 정치 지형을 확립했고, 나스르 토후국은 영토 통합과 통치 기관 구축의 기회를 얻었다.[2] 이븐 알-아흐마르는 아바스 칼리프(1244년 이전), 알모하드 칼리프 압드 알-와히드 2세(1244년 이전), 하프스 왕조(1242년, 1264년) 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4] 하엔 조약은 나스르 왕조와 카스티야 관계의 기초가 되었지만, 평화는 종종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봉신 관계는 갱신되었다.[10][3]

에미리트 인구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에 정복된 영토에서 온 무슬림 난민들로 증가하여, 작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균일하게 무슬림과 아랍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되었다.[2][4] 이븐 알-아흐마르가 설립한 알람브라 궁전은 후계자들에 의해 확장되었다.[1][11]

2. 3. 1. 바누 아쉬킬룰라와의 갈등과 마린 왕조의 개입

에미리트의 정치사는 이웃 국가들과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내부 갈등으로 인해 불안정했다. 나스르 왕조는 때때로 카스티야 왕과 귀족들에게 피난처나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고, 심지어 다른 무슬림 국가에 대항하기도 했다. 반대로 카스티야는 나스르 왕조의 경쟁자들에 맞서 일부 나스르 왕조 에미르들에게 피난처와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나스르 왕조는 북아프리카의 마린 왕조의 지원을 활용하여 카스티야를 견제하려 했지만, 살라도 강 전투 (1340년)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마린 왕조의 개입은 종식되었다.[5][1]

이븐 알-아마르의 통치는 1266년까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무데하르 반란이 카스티야에서 발생하며 위기를 맞았다. 이 반란은 카스티야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무슬림들이 일으킨 것으로, 이븐 알-아마르는 이를 지원했다. 초기에 반란군은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우트레라, 레브리하,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 메디나-시도니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카스티야 군대에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달루시아의 무데하르 주민들은 대부분 추방되었고, 그들의 마을은 기독교인들로 채워졌다.[5][1]

1266년에는 바누 아쉬킬룰라가 반란을 일으키며 이븐 알-아마르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바누 아쉬킬룰라는 말라가를 점령하고 알폰소 10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라나다와 카스티야는 분쟁에 휩싸였고, 이븐 알-아마르는 1272년에 새로운 카스티야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1273년 이븐 알-아마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2세(재위 1273년~1302년)가 즉위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2세 시대의 궁전인 그라나다의 Cuarto Real de Santo Domingo


무함마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나스르 왕조, 카스티야 왕국, 마린 왕조는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했다. 무함마드 2세는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출신의 제나타 베르베르족을 모집했는데, 이들은 이후 군대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가지'' 또는 믿음의 전사들로 불렸다.

무함마드 2세는 바누 아쉬킬룰라를 견제하기 위해 마린 왕조의 술탄 아부 유수프(재위 1258년~1286년)로부터 지원을 구했고, 이베리아 반도에 기지를 제공했다. 아부 유수프는 1275년에 알헤시라스와 타리파를 점령하고, 기독교 영토를 공격했다. 1278년, 바누 아쉬킬룰라는 말라가를 아부 유수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2세는 마린 왕조를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고, 알폰소 10세와 동맹을 맺고 틀렘센의 야그무라산을 부추겨 마린 왕조를 공격하게 했다. 1279년, 무함마드 2세는 말라가의 마린 총독을 설득하여 도시를 넘겨받았다. 1281년, 마린 왕조, 카스티야 왕국, 바누 아쉬킬룰라는 연합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했지만, 무함마드 2세의 군대는 이를 격퇴했다. 1288년, 무함마드 2세는 바누 아쉬킬룰라를 과딕스에서 몰아냈고, 그들은 모로코로 도망쳤다.

아부 야쿠브가 이끄는 마린 왕조는 여전히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점령하고 있었다. 1292년, 카스티야의 왕 산초 4세는 그라나다, 틀렘센,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마린 왕조를 몰아내려 했다. 그는 1292년 10월 타리파를 점령했지만, 무함마드 2세에게 도시를 돌려주지 않았다. 1294년 마린 왕조가 타리파 탈환에 실패하자, 아부 야쿠브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알헤시라스와 론다를 나스르 왕조에게 양도했다.

2. 3. 2. 세우타 공격

무함마드 3세)]는

2. 3. 3. 이스마일 1세와 무함마드 4세 시대의 도전

1360년의 그라나다와 주변 국가


이스마일 1세(재위: 1314년 ~ 1325년)는 1314년 2월, 그의 사촌인 나스르가 카스티야에 도움을 요청하여 인기가 없어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술탄이 되었다. 나스르는 과딕스로 물러났지만,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어린 알폰소 11세가 통치하던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다. 국경 분쟁은 1319년까지 이어졌고, 카스티야는 그라나다를 포위하는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가 전투에서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스마일 1세는 바에자와 마르토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되찾았다.

코마레스 궁전은 원래 이스마일 1세가 건설했다.


1325년 7월, 이스마일 1세는 사촌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어린 아들 무함마드 4세(재위: 1325년 ~ 1333년)가 계승했다. 이 시기, 그라나다 토후국은 우스만 이븐 아비 알-울라와 그의 가족이 이끄는 '가지'의 음모로 인해 심각한 내부 혼란을 겪었다. 1327-28년, 그들은 재상 이븐 마루크를 암살하고 어린 아미르를 장악했다. 한편, 성장한 알폰소 11세는 십자군을 자처하며 북유럽 지원병들의 도움을 받아 그라나다에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고, 1330년 테바 포위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무함마드 4세는 카스티야의 승리에 대응하여 마린 왕조와 동맹을 맺고, 1327년과 1328년에 론다와 알헤시라스를 기지로 사용하도록 양도했다. 1332년, 그는 페스를 방문하여 마린 왕조 술탄 아부 알-하산(재위: 1331년 ~ 1348년)에게 카스티야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아부 알-하산은 지원을 약속하고 1333년 알헤시라스에 군대를 보냈고, 지브롤터를 포위하여 6월에 점령했다. 8월까지 카스티야의 반격은 실패했고, 지브롤터는 1462년까지 무슬림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나 1333년 8월 25일, 무함마드 4세는 마린 왕조와의 긴밀한 관계 정책에 반대하는 우스만 이븐 아비 알-울라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2. 4. 전성기

유수프 1세는 무함마드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그의 치세는 나스르 왕국의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형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바누 알-울라를 왕국에서 추방하고, 또 다른 마린 왕족인 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를 '가지'의 책임자로 임명했다.[1]

알폰소 11세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고, 카스티야와 마린 왕국 및 나스르 왕조 간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1340년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해상에서는 하프스 함대의 지원을 받은 마린 해군이 카탈루냐 함선의 지원을 받은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했지만, 육상에서는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연합군이 유럽 각지에서 온 지원병과 함께 타리파 인근 살라도 강에서 마린 및 나스르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기독교의 승리로 카스티야는 1342년에 프리에고와 알칼라 라 레알과 같은 변경의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고, 1344년에는 알헤시라스를 점령했다. 이 포위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대포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경우에는 무슬림 수비대가 사용했다.[1] 리오 살라도 전투와 알헤시라스의 점령은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북아프리카의 군사적 개입을 종식시켰다. 이는 14세기 후반에 내부 혼란을 겪었던 마린 왕국의 약세 때문이기도 했다.[1]

알폰소 11세는 1349년에 지브롤터 포위전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지브롤터는 마린 왕조의 지배하에 남았고, 카스티야는 내부 분쟁으로 그라나다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유수프 1세는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신뢰를 잃지 않았고 심각한 내부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았다.[1]

유수프 1세는 1354년 그라나다의 주요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중 "미치광이"로 묘사된 시민에 의해 갑작스럽게 살해되었다.[8]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무함마드 5세가 즉위했다. 무함마드 5세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국정은 '하지브' 리드완, 이븐 알-하티브 재상, 그리고 '가지'의 사령관 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들은 카스티야와 평화 정책을 유지하며, 공물을 지불하고, 1359년 아라곤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요청 시 카스티야의 적에 맞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무함마드 5세의 통치는 1359년 8월 그의 이복 형제인 이스마일 2세(1359년~1360년 재위)를 왕위에 앉힌 궁정 쿠데타로 중단되었다.[8] 무함마드 5세는 과딕스로 피신했으나,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카스티야 왕으로부터 지원을 얻지 못하고 페스의 마린 왕조 통치자 모로코의 이브라힘 이븐 알리의 궁정으로 피신했다.[8] 이스마일 2세는 1360년 6월 사촌 아부 압드 알라 무함마드(무함마드 6세, 1360년~1362년 재위)에 의해 암살되었다.[8]

페스에 있는 동안 무함마드 5세는 이븐 알-하티브와 이븐 할둔의 지지를 받았다.[8] 결국, 무함마드 5세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로부터 지원을 받아 1362년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왔다.[8] 페드로와 무함마드 5세의 군대는 그라나다로 진군하여 말라가를 점령했다. 무함마드 6세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에게 항복했으나 처형되었고, 무함마드 5세가 1362년에 왕위를 되찾았다.

무함마드 5세는 카스티야와의 평화 정책을 유지했다. 카스티야 내전 동안 무함마드 5세는 페드로를 지원했으나,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가 1366년에 세비야를 점령하자 새로운 평화를 협상했다. 페드로가 1369년에 암살되자, 무함마드 5세는 알헤시라스 포위전 (1369년)에서 알헤시라스를 재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했다.[9]

사자의 안뜰, 1362년 이후 무함마드 5세가 건설함


국내적으로, 무함마드 5세는 1370년에 '가지'의 수장인 의 직위를 없애고 제나타 군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의 두 번째 통치 기간 동안 토후국은 비교적 내부 갈등이 없었다. 이 시기는 나스르 문화의 정점을 기록했고, 재상 이븐 알-하티브(1375년 사망)와 이븐 잠라크(1392년 사망)는 주요 문학 인물이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무함마드 5세는 사자의 궁전을 건설했고, 1365년부터 1367년 사이에는 그라나다 마리스탄을 건설했다.[10] 그의 통치는 세비야의 알카사르에 궁전을 지은 세비야의 페드로 궁정과의 문화 교류의 절정이었다.

2. 4. 1. 유수프 1세와 리오 살라도 전투

유수프 1세는 무함마드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그의 치세는 나스르 왕국의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형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바누 알-울라(우스만 이븐 아비 알-울라의 가족)를 왕국에서 추방하고, 또 다른 마린 왕족인 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를 '가지'(Ghazi)의 책임자로 임명했다.[1]

알폰소 11세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고, 카스티야와 마린 왕국 및 나스르 왕조 간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1340년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해상에서 하프스 함대의 지원을 받은 마린 해군은 카탈루냐 함선의 지원을 받은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육상에서는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연합군이 유럽 각지에서 온 지원병과 함께 타리파 인근 살라도 강에서 마린 및 나스르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기독교의 승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고, 카스티야는 1342년에 프리에고와 알칼라 라 레알과 같은 변경의 중요한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또한 카스티야는 어려운 포위 끝에 1344년에 알헤시라스를 점령했다. 이 포위전은 또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대포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경우에는 무슬림 수비대가 사용했다.[1] 장기적으로 리오 살라도 전투와 알헤시라스의 점령은 11세기부터 알-안달루스 주변의 분쟁의 반복적인 특징이었던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북아프리카의 군사적 개입을 종식시켰다. 이는 또한 14세기 후반에 내부 혼란을 겪었던 마린 왕국의 약세 때문이기도 했다.[1]

알폰소 11세는 성공에 힘입어 1349년에 새로운 지브롤터 포위전을 시작했지만, 이듬해 그는 이 지역을 휩쓸고 있던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포위전은 종식되었고, 지브롤터는 마린 왕조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그 후 수년 동안 카스티야는 내부 분쟁에 너무 몰두하여 그라나다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했고 변경에서는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유수프 1세는 백성들의 신뢰를 잃지 않았고 심각한 내부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2. 4. 2. 무함마드 5세의 통치

유수프 1세는 1354년 그라나다의 주요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중 "미치광이"로 묘사된 시민에 의해 갑작스럽게 살해되었다.[8]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무함마드 5세가 즉위했다. 무함마드 5세가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국정은 '하지브' 리드완, 이븐 알-하티브 재상, 그리고 '가지'의 사령관 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들은 함께 카스티야와 평화 정책을 유지하며, 공물을 지불하고, 1359년 아라곤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요청 시 카스티야의 적에 맞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무함마드 5세의 통치는 1359년 8월 그의 이복 형제인 이스마일 2세(1359년~1360년 재위)를 왕위에 앉힌 궁정 쿠데타로 중단되었다.[8] 무함마드 5세는 과딕스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지역 수비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알메리아나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카스티야 왕으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 이동하여 페스의 마린 왕조 통치자 모로코의 이브라힘 이븐 알리의 궁정에 피신했다.[8] 이스마일 2세는 1360년 6월 그의 전 동조자 중 한 명인 사촌 아부 압드 알라 무함마드에 의해 곧 암살되었고, 그는 무함마드 6세(1360년~1362년 재위)로 왕위에 올랐다.[8]

페스에 있는 동안 무함마드 5세는 그에게 충성을 유지한 이븐 알-하티브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또한 그들의 대의를 지지한 이븐 할둔을 만났다.[8] 결국, 무함마드 5세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확보했다. 페드로, 우스만 이븐 야흐야 이븐 라후(야흐야 이븐 우마르 이븐 라후의 아들), 그리고 알리 이븐 쿠마샤라는 또 다른 인물의 지원을 받아, 1362년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왔다.[8] 페드로와 무함마드 5세의 군대는 그라나다로 진군하여 다양한 도시와 중요한 도시 말라가를 점령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무함마드 6세는 동맹국들의 조언에 따라,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에게 항복하고 자비를 구했다. 페드로는 대신 그를 처형했고, 동맹국 무함마드 5세가 1362년에 왕위를 되찾도록 했다.

권력을 되찾은 후, 무함마드 5세는 카스티야와의 평화 정책을 계속 유지하며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의 통치 하에서, 나스르 외교는 이 시대 이베리아 반도의 복잡한 정치 속에서도 예외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진행 중인 카스티야 내전은 카스티야가 그라나다를 위협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무함마드 5세는 처음에 그의 전 동맹국이었던 페드로를 그의 라이벌인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그는 페드로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는 엔리케의 아라곤 동맹국들이 바다에서 그라나다 선박을 공격하도록 자극했다. 무함마드 5세는 이러한 기독교 공격을 이용하여 텔렘센의 자얀 왕조 술탄 아부 하무 2세로부터 물자와 자금을 요청했다. 엔리케가 1366년에 세비야를 점령하여 페드로가 북쪽으로 도망가도록 강요했을 때, 무함마드 5세는 그와 새로운 평화를 협상함으로써 적응했다. 페드로가 1367년에 세비야로 돌아왔을 때, 무함마드 5세는 다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페드로가 1369년에 암살되어 카스티야가 더욱 혼란에 빠졌을 때, 무함마드 5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그 해에 알헤시라스 포위전 (1369년)에서 알헤시라스를 재점령했다. 그는 도시를 파괴했고, 그 이후부터 그 이전 영토는 지브롤터에 부속되었다.[9]

국내적으로, 무함마드 5세는 1370년에 '가지'의 수장인 의 직위를 없애고, 처음으로 나스르 가문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제나타 군대를 배치했다. 그의 두 번째 통치 기간 동안 토후국은 비교적 내부 갈등이 없었다. 이 시기는 또한 나스르 문화의 정점을 기록했다. 재상 이븐 알-하티브(1375년 사망)는 문학의 주요 인물이었고, 그의 후임자인 이븐 잠라크(1392년 사망)도 그러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무함마드 5세는 사자의 궁전을 포함한 주요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도시의 일반 대중을 위해, 그는 1365년부터 1367년 사이에 병원(''마리스탄'')인 그라나다 마리스탄의 건설을 후원했다.[10] 그의 통치는 또한 그라나다의 예술과 건축 양식으로 세비야의 알카사르에 궁전을 지은 세비야의 페드로 궁정과의 문화 교류의 절정이었다.

2. 5. 쇠퇴와 멸망

나스르 왕조는 15세기 말 멸망할 때까지 왕위 계승 분쟁, 경쟁, 암살에 휘말렸다. 내부 갈등은 종종 바누 사랏 가문(스페인 자료에서는 아벤세라헤스로 알려짐)과 에미리트의 안정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경쟁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외부적으로는 카스티야가 자체적인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덕분에 몇몇 기간 동안 에미리트는 평화를 유지했다.[8]

1405년에서 1410년 사이에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1428년까지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1430년대와 1440년대에도 외부 전쟁과 내부 분쟁이 계속되었다.[9] 엔리케 4세 통치 초기에 카스티야는 그라나다에 대한 더 야심 찬 십자군 군사 정책을 재개했다. 에미리트의 입장은 바누 사랏과의 격렬한 내부 대립으로 더욱 악화되었다.[10]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1462년 카스티야에 의한 지브롤터의 최종 점령에 기여했다.[11][10]

15세기 나스르 칼리프 시대의 ''히네타''식 칼

2. 5. 1. 정치적 불안정

이븐 알-아흐마르는 1264년까지 비교적 평화롭게 통치했으나, 1264년부터 1266년까지 카스티야에서 무데하르 반란이 일어났다.[1] ''무데하르''는 이 시기 기독교 왕국의 지배를 받던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264년의 반란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지만, 북부의 옛 카스티야 영토에 살면서 카스티야 사회에 비교적 잘 통합된 무슬림들은 참여하지 않았다.[2][1] 반면, 과달키비르 계곡과 카스티야 안달루시아의 무슬림 주민들이 반란에 참여했다. 무르시아와 니에블라와 같은 일부 지역은 카스티야의 지배 아래 자치를 허용받았지만, 다른 지역은 강제 이주를 당하고 더 가혹한 조건에서 살았다.[2][1] 이븐 알-아흐마르가 반란을 부추겼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1]

이 반란은 13세기 카스티야의 정복 이전으로 돌아가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대한 기독교 지배를 깨려는 마지막 시도로 보인다.[3][4] 당시 이븐 알-아흐마르는 하프스 왕조(현재 튀니지에 위치) 및 마린 왕조(현재 모로코에 위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0세는 다른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린 왕조가 반란 지원 병력을 파견하여 타리파에 상륙하기도 했다.[4] 헤레스, 우트레라, 레브리하, 아르코스, 메디나 시도니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다.[2][5] 알폰소 10세는 또한 일부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란과도 싸워야 했다.[6][5] 그러나 그의 군대는 점차 통제력을 되찾았다. 결국, 그라나다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국은 광범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6] 1265년까지 카스티야인들은 그라나다의 베가(계곡)를 침공했고, 이븐 알-아흐마르는 평화를 재협상해야 했다.[5] 반란이 끝났을 때, 안달루시아에 살아남은 무데하르 주민들은 대부분 추방되었고, 그들의 마을은 카스티야의 다른 지역에서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정착되었다.[5][7]

1391년 무함마드 5세가 사망하면서 나스르 왕조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15세기 말 멸망할 때까지 왕조는 왕위 계승 분쟁, 경쟁, 암살에 휘말렸다. 내부 갈등은 종종 바누 사랏 가문(스페인 자료에서는 아벤세라헤스로 알려짐)과 에미리트의 안정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경쟁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외부적으로는 카스티야가 자체적인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덕분에 몇몇 기간 동안 에미리트는 평화를 유지했다.[8]

1405년에서 1410년 사이에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1428년까지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1430년대와 1440년대에도 외부 전쟁과 내부 분쟁이 계속되었다.[9] 엔리케 4세 통치 초기에 카스티야는 그라나다에 대한 더 야심 찬 십자군 군사 정책을 재개했다. 에미리트의 입장은 바누 사랏과의 격렬한 내부 대립으로 더욱 악화되었다.[10]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1462년 카스티야에 의한 지브롤터의 최종 점령에 기여했다.[11][10]

2. 5. 2. 그라나다 전쟁

무데하르 반란 이후, 15세기 중반까지 카스티야는 여러 내전과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1468년 이사벨라는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했고, 1479년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통일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치자가 되었다.[10] 이는 그라나다가 자체 생존을 위해 두 왕국을 서로 대립시킬 수 없게 되면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가톨릭 군주로 알려진 새로운 왕실 부부는 에미레이트를 정복하려는 의지로 단결했다.[10]

그라나다에 대한 전쟁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불안정한 카스티야 귀족들을 공동의 적에 대항하게 하고, 신민들에게 왕위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줄 기회를 제공했다. 1481년 12월 카스티야 변경 도시 사라를 그라나다가 성공적으로 점령한 것은 카스티야에 대항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점이었다.[10]

그라나다 전쟁은 1482년에 시작되었으며, 기독교군은 2월에 알하마 데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알하마는 그라나다 에미레이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그라나다와 에미레이트의 두 번째 도시인 말라가를 잇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기독교의 승리였다.[10] 이것은 10년 동안의 지루한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기독교군은 카스티야 귀족, 도시, 그리고 ''산타 에르만다드''가 제공한 군대와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또한 다른 기독교 국가들이 군대와 재정을 전쟁에 투입하도록 장려했다.

한편, 그라나다에서는 나스르 왕가의 왕위 계승 투쟁으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여 스페인의 진격에 대한 집중적인 저항을 약화시켰다. 1482년 7월, 기독교인들에게 보아브딜로 알려진 무하마드 12세는 그의 아버지 아불 하산에 대한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던 아불 하산은 말라가로 도망쳐야 했고, 에미레이트는 그와 그의 아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10] 보아브딜은 그 후 1483년 카스티야군에 포로로 잡혔고, 그라나다에서 그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주요 양보를 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는 과딕스에 정착하는 데 동의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라나다의 통제권을 다시 잡았다. 아불 하산은 1485년에 사망했고, 곧 동생인 알-자갈, 무하마드 이븐 사드(무하마드 13세)에게 양위했다.[10]



이후 스페인 군사 작전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고 느리지만 꾸준한 진전을 이루었고, 나스르 왕조 내부에서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보아브딜은 1487년 이번에는 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로 돌아왔고, 알-자갈을 도망가게 했다. 통제권을 잡은 후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에게 그라나다를 항복하겠다는 첫 제안을 했고, 때로는 스페인군과 협력하기도 했다.[10] 한편, 알-자갈은 그라나다 외부에서 스페인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계속 이끌었고, 가톨릭 군주로 하여금 그를 먼저 처리하도록 강요했다.[10] 1487년 5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말라가 포위전은 전쟁에서 가장 어렵고 오래 지속된 전투 중 하나였다.[10] 요새화된 도시는 알-자갈의 지휘관 중 한 명이 이끄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보아브딜은 계속 물러서거나 가톨릭 군주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도시는 저항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자비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다른 이슬람 도시들이 그 이후 더 빨리 항복하도록 장려했다.[10] 알-자갈은 알메리아에서 잠시 버텼지만, 1489년 11월 스페인이 바에사를 점령한 후 성공적인 저항에 대한 희망은 끝났다.[10] 그는 알메리아와 과딕스의 항복을 협상했고, 알푸하라스 지역으로 은퇴하는 데 동의했지만, 곧 안달루스를 완전히 떠났다.[11] 1489~90년, 그는 모든 토지를 팔고 북아프리카의 오란 (현재의 알제리)으로 이주했다.[11]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오르티스의 19세기 그림, ''그라나다의 항복''


1490년까지 이슬람 통치하에 남아있는 것은 그라나다뿐이었다. 보아브딜과 나머지 나스르 엘리트들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와 협상했지만, 그 해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491년까지 그 도시 자체는 포위되었다. 1491년 11월 25일, 항복 조건을 명시한 그라나다 조약이 서명되었다. 1492년 1월 2일, 보아브딜은 그라나다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에게 항복했다.

3. 사회



13세기 우마이야 코르도바 시대의 알-안달루스는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섞여 사는 다원적인 사회였으나,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와 달리 훨씬 더 동질적인 무슬림 사회였다.[14] 아랍어가 주된 언어였으며, 로망스어는 더 이상 널리 쓰이지 않았다.[14][15]

그라나다 왕국은 인구 밀도가 높았는데, 이는 북쪽 기독교 왕국에 의해 정복된 영토에서 온 무슬림 난민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 인구는 이베리아인(물라디)과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 등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정착한 인구가 아랍 문화에 동화되어 공통된 "안달루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13세기 말, 북아프리카에서 바누 마린(마리니드) 부족 출신의 자나타 가문 등 새로운 집단이 도착했는데, 이들은 기존 안달루시 인구와 달리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라나다 토후국 내에서 유일하게 상당한 규모를 가진 비무슬림 인구는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18]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는 그라나다에 있었지만, 그들이 도시의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인들은 종교를 가질 권리와 공동체의 어느 정도 법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보호 지위(''딤미'')를 부여받았다.

알 안달루스 사회와는 달리, 13세기 형성된 그라나다 토후국은 훨씬 더 동질적인 무슬림 사회였다. 알 안달루스의 토착 기독교인인 무사라브들은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통치 하에서 동화, 박해, 추방의 압력으로 인해 나스르 시대 이전에 거의 사라졌다.[18]

나스르 토후국 내의 기독교인들은 매우 적었고, 주로 방문객, 상인, 정치적 망명자, 전쟁 포로 등으로 이루어져 일시적이었다.[18] 상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특히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 무역 도시에서 왔다. 기독교인 포로들도 또 다른 주요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조건은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3. 1. 무슬림

13세기 우마이야 코르도바 시대의 알-안달루스는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섞여 사는 다원적인 사회였으나,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와 달리 훨씬 더 동질적인 무슬림 사회였다.[14] 아랍어가 주된 언어였으며, 로망스어는 더 이상 널리 쓰이지 않았다.[14],[15]

그라나다 왕국은 인구 밀도가 높았는데, 이는 북쪽 기독교 왕국에 의해 정복된 영토에서 온 무슬림 난민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민 유입은 15세기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정확한 인구 추정은 어렵지만, 토후국 전체 인구는 약 30만 명, 그라나다 자체 인구는 약 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14년 비엔 협의회에 참석한 아라곤 사절들은 토후국 인구가 20만 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추정치의 근거는 알려져 있지 않다.[18]

알-안달루스의 무슬림 인구는 이베리아인(물라디)과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 등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정착한 인구가 아랍 문화에 동화되어 공통된 "안달루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한편,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 기독교 통치하에 계속 살았던 무슬림들(무데하르)은 그라나다의 아랍 문화와 강한 문화적 연결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나스르 왕조 치하의 무슬림들과 문화적으로 구별되었다.[15]

13세기 말, 북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집단이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기존 안달루시 인구의 베르베르 하부 구조와 달리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누 마린(마리니드) 부족 출신의 자나타 가문으로, 나스르 군대에 복무하기 위해 모집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275년에서 1350년 사이에 이주했으며, 나스르 왕조는 이들의 군사적 역할을 고려하여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론다, 말라가와 같은 전략적인 도시에 의도적으로 정착시켰다., 이 외에도 오늘날 그라나다 고메레스 지역(알함브라 언덕 남쪽 경사면)의 이름이 유래된 구마라 등 일부 비 자나타 베르베르 집단도 확인되었다.

3. 2. 유대인

그라나다 토후국 내에서 유일하게 상당한 규모를 가진 비무슬림 인구는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18] 이들은 수 세대 동안 이곳에 거주해 온 오래된 가문뿐만 아니라 기독교 북부에서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일부는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이 진격하면서 정치적 변화를 두려워하여 도망쳤고, 다른 일부는 특히 1391년 유대인 학살(포그롬) 이후 기독교 통치하의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19]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는 그라나다에 있었지만, 그들이 도시의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과딕스, 말라가 등 그라나다 토후국 전역에도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이 있었다.[19] 그라나다 토후국 내 유대인 인구는 약 3,000명으로 추산된다. 1492년, 그라나다에서는 110가구의 유대인이 확인되었다.[19] 유대인들은 상인, 통역사, 번역가, 의사 등 전문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19]

유대인들은 종교를 가질 권리와 공동체의 어느 정도 법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보호 지위(''딤미'')를 부여받았다. 유대인 공동체에는 세금을 징수하고 나스르 왕조 통치자에게 공동체를 대표하는 Nagīd|나기드ar라고 알려진 지도자가 있었다.[19]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외부 표식(shārāt|샤라트ar)을 공공장소에서 착용해야 했다. 이븐 알-하티브는 이 규칙이 이스마일 1세(1314-1325)의 통치 기간에 도입되었다고 보고한다. 알-마카리(1632년 사망)는 이전 자료를 인용하여, 13세기에 유대인들이 노란색 모자와 일종의 띠를 착용해야 했다고 보고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규정과 제약이 추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관되게 시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9] 무하마드 5세는 유대인들을 특히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1367년 그가 하엔을 습격했을 때 300가구가 그와 함께 그라나다로 돌아왔고, 그의 통치 말기에는 1391년 기독교 북부에서의 박해 이후 다른 많은 유대인들이 도착했다.[19]

3. 3. 기독교인

13세기 형성된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전의 알 안달루스 사회와는 달리, 훨씬 더 동질적인 무슬림 사회였다. 알 안달루스의 토착 기독교인인 무사라브들은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통치 하에서 동화, 박해, 추방의 압력으로 인해 나스르 시대 이전에 거의 사라졌다.[18] 많은 이들이 북쪽의 기독교 왕국으로 도망치거나 북아프리카로 추방되었다.[18]

따라서 나스르 토후국 내의 기독교인들은 매우 적었고, 주로 방문객, 상인, 정치적 망명자, 전쟁 포로 등으로 이루어져 일시적이었다.[18] 그들은 유대인과 이전의 무사라브 기독교인들이 누렸던 ''짐미''(dhimmi)의 보호 지위를 갖지 못했지만, 대신 특별하고 종종 임시적인 협약을 통해 안전 통행권(aman|아만ar)을 부여받았다.[18]

상인들은 가장 중요한 집단이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특히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 무역 도시에서 왔다. 그들은 말라가, 그라나다, 알메리아와 같이 해안과 왕국의 내부 모두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 도시에 거주했다.[18]

기독교인 포로들도 또 다른 주요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조건은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사로잡힌 귀족과 왕족은 존경을 받으며 편안한 집에서 생활했고, 반면 포로가 된 평민들은 알함브라의 지하 감옥을 포함한 대도시의 감옥에 갇혔다.[18] 이들 중 일부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풀려났고, 종종 나스르 군대나 술탄의 개인 경호대에 합류했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나스르 궁정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유수프 1세와 무함마드 5세의 어머니는 모두 사로잡힌 기독교 여성이었다.[18]

4. 경제

무함마드 5세가 주조한 금화


토후국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두었다. 시골 지역의 농촌 인구는 주로 전통적인 ''알케리아''(소규모 농업 공동체)로 조직되었으며,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주로 자급자족을 위해 경작하는 자유 농민들이 거주했다.[1] 나스르 왕가 구성원 또는 지배 계급의 다른 구성원이 소유할 수 있는 더 큰 농업 영지는 일반적으로 도시 중심지 외곽에서 발견되었다.[1] 경작은 집약적이고 다양했으며 일반적으로 정교한 관개 전략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다시 알-안달루스에서 이미 확립된 전통을 반영하여 집단적 또는 지역 사회 수준에서 잘 조직된 관리를 필요로 했다.[1] 건조 농업 또한 알려져 있었으며, 축산업이 흔하게 이루어졌던 토후국의 국경 지역에서 더 흔했다.[1] 일부 해안 지역에서는 근처 항구 도시와 상인들의 존재로 인해 상업적 수출을 위해 다른 방식으로 농업이 특화되었다.[1]

13세기 말 지브롤터 해협이 상업 선박에 더 개방되면서 이베리아 반도 주변의 해상 운송이 더 저렴해지고 빨라져 지중해 (특히 이탈리아카탈루냐프로방스)와 북유럽 간의 무역 네트워크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그라나다는 해협 근처에 위치하여 이점을 얻었다.[1]

부분적으로 카스티야에 대한 막대한 조세 지급으로 인해 그라나다의 경제는 고가 상품의 무역을 전문으로 했다.[1] 유럽 상업 네트워크 내에서 통합된 왕국의 항구는 제노바와 강력한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카탈루냐와도, 그리고 덜하지만 베네치아, 피렌체, 포르투갈과도 무역 관계를 맺었다.[19]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토후국의 우수한 농업 기술과 유리한 기후는 과거 동지중해에서만 접근할 수 있었던 설탕, 비단, 건조 과일과 같은 상품을 유럽 전역으로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1] 고급 세라믹과 같은 제조업 상품도 또 다른 중요한 수출품이었다.[1] 그라나다와 그 항구는 유럽 상인들이 북아프리카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1]

이탈리아 및 기타 유럽 상인들은 이러한 기회를 재빨리 이용하여 토후국과 관계를 맺었다.[1] 그라나다의 경제는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로 운송된 금 무역에 대한 통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 제노바 은행가들이 크게 자금을 지원했다.[20] 그러나 포르투갈이 15세기에 해상으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 직접 무역로를 개설한 후 그라나다는 지역 상업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5. 문화



무함마드 5세 시대의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븐 할둔, 이븐 알-하티브 등이 나스르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중요한 이슬람 지적 및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21] 나스르 술탄과 궁정 구성원들은 문학, 예술, 과학을 적극 후원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직접 작가나 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21] 1350년 이븐 바투타는 그라나다를 방문하여 "안달루시아의 수도이자 도시의 신부"라고 묘사했다.[21]

무함마드 5세는 1365년부터 1367년까지 그라나다 마리스탄(Maristan of Granada) 건설을 후원하여 도시민들에게 마리스탄(병원)을 제공했다.[10] 또한 그의 통치 시기에는 그라나다의 예술과 건축 양식이 세비야의 알카사르에 궁전을 지은 세비야의 페드로 궁정과 문화 교류의 정점을 이루었다.

5. 1. 문학

그라나다 엘리트 계층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문학 형태는 시였으며, 이는 선집으로 수집되었고 심지어 알함브라 궁전의 건축 장식으로도 사용되었다.[22] 그 외 중요한 형태로는 군주론과 같은 저작, 역사 연대기(akhbār|아크바르ar 또는 tā'rīkh|타리크ar), 수피즘에 관한 저작, 여행 연대기(riḥla|리흘라ar), 그리고 이야기나 일화를 서술하는 운문 산문(maqāmāt|마카마트ar) 등이 있었다. 이러한 장르 중 상당수는 서로 중복되었는데, 예를 들어 역사학은 운문 산문으로 쓰이거나 시를 포함할 수 있었다.

아부 알-타이예브 알-룬디(1285–6년 사망)는 일부 동시대인들이 알-안달루스의 마지막 위대한 작가로 여겼으며, 무함마드 1세와 무함마드 2세 치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시와 산문 모두를 썼으며, 술탄이나 그의 가족을 위한 교육 논문을 포함했다. 14세기에 활동한 나스르 왕조 궁정의 박식가이자 시인이었던 이븐 알-카티브는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저서를 저술했으며, 그의 시는 알함브라 궁전의 벽에 새겨져 있다.[22] 그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이븐 잠라크 또한 토후국 역사상 주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시 역시 사자 정원을 포함한 알함브라의 여러 곳에서 새겨진 채 발견된다.

5. 2. 건축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의 건축 양식은 나무, 회반죽, 그리고 ''질리'' 타일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표면을 장식하였고, 많은 건물에서 정교한 ''무카르나스'' 조각을 활용했다. 나스르 왕조의 가장 유명한 건축 유산은 알람브라인데, 이는 요새로 보호되고 서부 이슬람 건축의 가장 유명하고 잘 보존된 궁전 중 일부인 코마레스 궁전과 사자 궁전을 포함하는 언덕 꼭대기 궁전 지구이다. 궁전 단지는 그 기간 동안 개발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여는 일반적으로 14세기 유수프 1세와 무하마드 5세의 통치 기간에 이루어졌다.[23]

알람브라 궁전의 벽에 새겨진 그라나다 토후국 문장 세부 사항.


헤네랄리페로 알려진 여름 궁전과 정원도 근처에 조성되었다. 이것은 알모라비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왕실 전원 저택의 전통을 반영했으며, 알모아드 시대의 마라케시의 아그달 정원과 세비야의 부하이아 정원과 같이 그들의 후계자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다른 주목할 만한 건물과 구조물로는 마드라사 알-유수피야(현재 팔라시오 데 라 마드라사로 알려짐), 푼두크 알-자디다(현재 코랄 델 카르본으로 알려짐), 그라나다 성벽의 일부, 알카사르 헤닐, 그리고 그라나다의 쿠아르토 레알 데 산토 도밍고가 있으며, 이전 토후국의 영토 전역에 걸쳐 다양한 요새와 작은 기념물도 있다.[23]

5. 3. 음악

가르나티 음악(الطرب الغرناطيar)은 안달루스 음악의 한 종류로, 그라나다에서 기원하여 북아프리카로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24]

5. 4. 과학

이 지역의 인구 이동으로 인해, 그라나다는 다양한 과학 분야의 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수학, 천문학, 농학, 식물학 등이 일부 학자들이 연구한 과목이었지만, 그라나다에서 가장 두드러진 과학 분야는 의학이었다.[25]

무르시아 출신의 학자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리쿠티 알-무르시는 1260년대 알폰소 10세에게 무르시아가 정복된 후 무함마드 2세의 초청으로 그라나다로 왔다. 그는 도시 외곽의 시골에 정착하여 주로 의학을 가르치고, 부차적으로 다른 학문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모스크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는 별개로 운영되었다.[25] 이 학교는 나스르 왕조 시대까지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다른 지식인들을 에미레이트로 유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

1349년, 유수프 1세는 그라나다 최초의 마드라사를 설립했다. 마드라사는 이미 북아프리카와 다른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던 교육 기관이었다.[25] 그의 이름을 딴 유수피야 마드라사는 이슬람법과 아랍어 문법 같은 전통적인 학문을 가르쳤지만, 알-리쿠티의 학교처럼 의학도 가르쳤다. 이 마드라사는 상당한 명성을 얻어 알-안달루스와 북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을 유치했다.[25]

유수피야 마드라사의 기도실 유적. 마드라사는 유수프 1세가 그라나다에 건설했다.

6. 군사

무함마드 1세가 1264-1266년 무데하르 반란 당시 군대를 이끄는 모습, 동시대의 ''산타 마리아의 칸티가스''에 삽화로 묘사됨.


북쪽의 기독교 왕국과 남쪽의 이슬람 마린 왕조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그라나다 토후국의 사람들은 "공성전 정신"을 갖게 되었다.[25] 그 결과, 국가는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다. 국경 지역에는 기갑 정예 전사들이 이끄는 전선 전사(''타그리'')들이 지키는 성들이 흩어져 있었고, 이들은 기독교 기사들과 유사했다. 토후국 군대의 핵심은 기동성이 뛰어난 경 기병과 경보병으로 구성되었다.[25]

그라나다 군대는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혼합되어 있었다. 군사적 의무가 있는 가문들이 등록되어 징집되는 ''준드'' 시스템을 통해 많은 병력이 현지에서 모집되었다. 그라나다의 통치자들은 북아프리카 전사들이 그 나라로 이주하여 ''가지''로 복무하도록 장려했다. 이 이민자들은 대부분 제나타 (또는 자나타) 베르베르족이었으며, 신앙의 의용군으로 조직되어 그라나다 군대 내에서 사실상 자치적이고 매우 강력한 부대가 되었다.[25] 제나타는 경 기병으로 복무했는데, 이로 인해 이 유형의 경 기병을 나타내는 스페인어 용어인 ''히네테'' ( '제나타'에서 파생)가 생겨났다.[26] 그들은 그라나다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여 중요한 전투와 기독교 영토 내의 정기적인 습격 모두에서 복무했다. , 투창, 유연성으로 유명한 작고 둥근 방패로 무장하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전술을 사용하여 현장에서 기동성이 뛰어났다.[27] 이들은 때때로 그라나다의 나스르 토후들이 동맹국을 돕기 위해 보낸 카스티야 군대에서 보조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마린 가문의 망명자들이 모집하고 이끌었으며 그라나다 왕국에 정착했다. 마린 지휘관은 ''샤이크 알-구자트''( '''가지''의 우두머리)로 알려졌지만, 무함마드 5세는 1374년에 정치적 간섭으로 인해 이 직책을 폐지했으며, 그 후 그들은 나스르 또는 안달루시 장군이 지휘했다.

무함마드 5세는 의용군의 지위를 낮추고 군대를 개혁하여 그라나다 군대의 안달루시아 구성 요소를 강화했다. 정규 그라나다 군대의 가장 작은 부분은 토후들이 고용했거나 그들에게 귀순한 기독교인과 전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종종 스페인 기사였으며 맘루크라고 불렸고, 일부 토후에 의해 정예 보디가드로 조직되었다. 그라나다인들은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외국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25]

조직과 관련하여 그라나다 군대는 형식적으로 토후가 지휘했으며 여러 부대로 나뉘었다. 국경 지역은 ''라이스''가 지휘했을 것이고, 각 중요한 국경 수비대는 ''샤이크 카사''가 이끌었다. 군대는 주요 사단으로 나뉘었고, 각 사단은 5,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군사 ''아미르''가 그 아래에서 복무하는 ''왈리''가 이끌었으며, 1,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카이드'', 200명의 병사를 이끄는 ''나키브'', 8명을 이끄는 ''나지르''가 있었다. 신앙의 의용군은 처음에 ''샤이크 알-구자트''가 지휘했다. 그라나다 시에는 ''사히브 알-슈르타''가 지휘하는 헌병과 유사한 ''슈르타''가 존재했다.[25] 그라나다 군대에는 사기 진작, 무장, 의료진, 일부 시인 및 웅변가 등을 돌보는 안내원(''달릴''), 종교 인물들이 동반했다.

7. 역대 술탄 목록

다음은 나스르 왕조의 통치자 목록이며, 재위 기간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두 명 이상의 나스르 왕조 계승자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일부 연도가 겹치는 경우가 있다.[5]

재위 기간통치자비고
1232–1273무함마드 1세이븐 알-아마르(Ibn al-Ahmar)라고도 알려짐.[5]
1273–1302무함마드 2세[5]
1302–1309무함마드 3세[5]
1309–1314나스르[5]
1314–1325이스마일 1세[5]
1325–1333무함마드 4세[5]
1333–1354유수프 1세[5]
1354–1359무함마드 5세1차 재위.[5]
1359–1360이스마일 2세[5]
1360–1362무함마드 6세[5]
1362–1391무함마드 5세2차 재위.[5]
1391–1392유수프 2세[5]
1392–1408무함마드 7세[5]
1408–1417유수프 3세[5]
1417–1419무함마드 8세1차 재위.[5]
1419–1427무함마드 9세1차 재위.[5]
1427–1429무함마드 8세2차 재위.[5]
1429–1432무함마드 9세2차 재위.[5]
1432유수프 4세[5]
1432–1445무함마드 9세3차 재위.[5]
1445무함마드 10세1차 재위.[5]
1445–1446유수프 5세1차 재위.[5]
1446–1447무함마드 10세2차 재위.[5]
1447–1448이스마일 3세[28]
1447–1453무함마드 9세4차 재위.[5]
1451–1455무함마드 11세[5]
1454–1464사드[5]
1462–1463이스마일 4세[29]
1462유수프 5세2차 재위.[11][5]
1464–1482아불 하산1차 재위.[5]
1482–1483무함마드 12세1차 재위.[5]
1483–1485아불 하산2차 재위.[5]
1485–1489무함마드 13세알-자갈(al-Zaghal)이라고도 알려짐.[5][11]
1486–1492무함마드 12세2차 재위.[1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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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A History of Medieval Spain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3] 서적 Encyclopaedia of Islam, Three Brill
[4] 서적 Walls, Ramparts, and Lines of Demarcation: Selected Studies from Antiquity to Modern Times LIT Verlag Münster
[5] 서적 The New Islamic Dynasties: A Chronological and Genealogical Manual Edinburgh University Press
[6] 서적 War in the Iberian Peninsula, 700–1600 Routledge 2018-04-30
[7] 웹사이트 The Partal https://www.alhambra[...] 2020-11-28
[8] 서적 Ibn Khaldûn's Philosophy of History: A Study in the Philosophic Foundation of the Science of Cul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9]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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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간행물 Example and legitimacy issues in early Ottoman history The House of Ijtihad
[17] 서적 الفتح العثماني للأقطار العربية 1516–1574 http://archive.org/d[...]
[18] 서적 A History of Medieval Spain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20-12-06
[19] 학술지 La integración del reino nazarí de Granada en el espacio comercial europeo (siglos XIII–XV) https://recyt.fecyt.[...]
[20] 서적 The Long Twentieth Century: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 https://archive.org/[...] Verso
[21] 웹사이트 On to al-Andalus and Morocco: 1349–1350 {{!}} ORIAS https://orias.berkel[...] 201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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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Ismail III;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s://dbe.rah.es/b[...] 2021-09-06
[29] 웹사이트 Ismail IV;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s://dbe.rah.es/b[...]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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