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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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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강산선은 1919년 설립된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가 건설하여 1924년 철원역과 김화역 구간을 시작으로 1931년 내금강역까지 전 구간이 개통된 철도 노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관광 및 자원 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철원-내금강 간 116.6km를 운행했다. 1942년 경성전기에 합병되었고, 1944년 창도-내금강 구간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 관할 하에 운영되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노선이 분단되어 폐선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구간에는 철교 등 유적이 남아 있으며,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 논의가 있었으나, 남북 관계 경색으로 인해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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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 - [철도 노선]에 관한 문서
개요
노선 명칭금강산 전기 철도
다른 명칭금강산선
노선 종류중간 철도
여객/화물
광역 철도
노선 상태폐선
위치강원도 (대한민국)
강원도 (북한)
기점철원역
종점내금강역
역 수28
개통 시기1924년 – 1931년 (단계별 개통)
폐지 시기1950년
소유주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 (1924년−1942년)
경성 전기 주식회사 (1942년–194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1945년−1950년)
운영자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 (1924년−1942년)
경성 전기 주식회사 (1942년–194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1945년−1950년)
차량기지철원역
노선 길이116.6km
선로 수단선
궤간표준궤
전철화 방식직류 1.5 kV 가공 전차선
회사 정보
회사 명칭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
금강산 전기 철도 로고
로고
종류주식회사
산업 분야철도 산업
전력 유틸리티
후신경성 전기 주식회사
설립1919년 12월 16일
설립자구메 다미노스케
해체1942년 1월 1일
본사 위치강원도 철원군 외촌리 655번지 (본사)
도쿄도 주오구 니시긴자 7초메 4반치 (지점)
경성 성동구 왕십리동 (지점)
노선 정보 (역 목록)
역 목록철원역
사요
동철원
동송
양지
이길
정연
유곡
금곡
김화
광삼
하소
행정
백양
금성
경파
탄감
남창도
창도
기성 (1944년 폐지)
현리 (1944년 폐지)
도파 (1944년 폐지)
화계 (1944년 폐지)
오량 (1944년 폐지)
단발령 (1944년 폐지)
말휘리 (1944년 폐지)
병무 (1944년 폐지)
내금강역 (1944년 폐지)
지도
금강산 전기 철도 내금강역
금강산 전기 철도 내금강역

2. 역사

단발령과 말휘리 구간의 스위치백


내금강역


금강산 전기철도 금강산선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사유 철도 노선으로, 1924년 철원-김화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31년 내금강까지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주로 금강산 관광객 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당시 한반도에서는 드물게 전기 철도로 운영되었으며, 창도 지역의 황철광을 운송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 노선은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가 운영하였으며, 회사는 철도 사업 외에도 수력 발전을 통한 전력 판매 사업을 병행했다. 당시 한반도 유일의 표준궤 전기 철도였기 때문에, 다른 노선의 전철화를 위해 도입된 데로형 전기 기관차의 시운전이 금강산선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1942년 전시 전력 통제 정책에 따라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경성전기에 흡수 합병되었다. 이후 1944년에는 전쟁 물자 공출을 이유로 창도-내금강 구간이 불요불급선으로 지정되어 선로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다만, 철원-창도 구간은 황철광 수송을 위해 해방 시까지 유지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금강산선 전 구간이 38선 이북 지역에 포함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북한은 한동안 열차를 운행했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철도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이 확정되면서 노선은 사실상 폐선되었다.[28][29]

2. 1. 일제강점기



금강산선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사유 철도 노선으로, 금강산 관광 개발과 수력 발전 사업을 목적으로 1919년 일본인 사업가 久米民之助|구메 타미노스케일본어를 중심으로 설립된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가 건설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드물게 전기 철도로 계획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철도와의 연계를 고려하여 표준궤를 채택하였다.

1924년 8월 1일 철원역김화역 사이의 28.8km 구간이 처음 개통되었고,[30] 초기에는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발전 설비 도입 차질로 증기기관차를 임대하여 운행하다가 같은 해 11월 26일부터 전기 운전을 시작하였다.[31] 이후 단계적으로 노선이 연장되어 1931년 7월 1일 내금강역까지 총 116.6km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37]

금강산선의 주된 역할은 금강산 관광객 수송이었으나, 창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황철광을 흥남의 일질콘체른 공장으로 운송하는 화물 수송 기능도 수행하였다. 또한, 철도 운영과 함께 수력 발전을 통한 전력 판매 사업도 병행하였다. 당시 한반도 유일의 표준궤 전기 철도였기 때문에, 1940년대 다른 노선의 전철화를 위해 도입된 데로형 전기 기관차의 시운전이 금강산선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1942년 1월 1일, 일제의 전시 전력 통제 정책에 따라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경성전기에 강제 합병되었다. 이후 1944년 10월 1일에는 전쟁 물자 공출을 명분으로 창도-내금강 간 49km 구간이 불요불급선으로 지정되어 선로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다만, 철원-창도 구간은 황철광 수송을 위해 해방 시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내금강역에서 동해북부선 외금강역까지 노선을 연장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28]

2. 1. 1. 설립 배경 (1918~1924)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의 로고


금강산 지역은 예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 관광 명소였으나,[1] 험준한 지형과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접근성이 매우 낮았다.[6]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8년 4월, 일본인 사업가이자 기술자인 구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가 금강산 일대를 시찰했다. 그는 도쿄 황궁의 니주바시 설계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철도, 남만주철도, 타이완 총독부 철도 및 일본 내 다수의 철도 건설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4] 금강산의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구메는 이곳이 관광지 개발뿐만 아니라 농업 및 광업 발전 잠재력도 크다고 판단하고 철도 건설을 구상했다.[4] 구체적인 조사를 위해 1918년 7월, 철도 기술자 오가와 토고(小川東吾)를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게 했다.[4]

조사 결과, 금강산 서쪽 지역이 동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경원선철원역을 기점으로 하는 노선 건설이 결정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기 철도로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험준한 산악 지형을 고려한 측면도 있었지만, 금강산 지역의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한 수력 발전소 건설, 특히 양수발전 방식의 도입 가능성이 가장 큰 동기였다. 이를 통해 철도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나아가 전력 사업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다.[4]

그러나 금강산 지역 하천의 수리권은 이미 조선수력전기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었기에, 구메는 이 권리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통신국 전기과장이었던 오카모토 가쓰지로(岡本勝次郎)에게 상세한 사업 계획을 제출하여 설득했고, 마침내 수리권 이전을 승인받았다. 오카모토는 훗날 금강산 전기철도의 전무이사가 되어 1931년부터 1938년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4]

사업 추진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구메는 여러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미쓰이 재벌 계열의 다이닛폰 맥주(오늘날 삿포로 맥주아사히 맥주의 전신) 사장을 지낸 마고시 쿄헤이(馬越恭平)가 발기인이자 훗날 제2대 사장이 되었고,[4] 일본 주오 본선사사고 터널 설계 경험[7] 및 일본 정부 철도, 중국 동청 철도, 남만주철도 등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철도 전문가이자 일본 토목 학회 회장을 역임한 후루카와 사카지로(古川阪次郎)도 참여하여 제3대 사장을 맡게 되었다.[4]

인적 구성이 완료되자, 1919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에 철도 건설 허가 및 보조금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어 6월 25일에는 발전소 건설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8월 11일, 이 모든 신청이 승인되면서 금강산 전기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4]

1919년 8월 22일,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발기인 총회가 개최되어 총 10만 주의 주식이 발행되었고, 이 중 2만 주는 일반 투자자에게 배정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과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 덕분에 주식 모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4] 마침내 1919년 12월 16일, 창립 주주총회가 열려 구메 타미노스케가 초대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회사는 12월 22일 공식적으로 등록되었다.[4]

1920년 9월에는 수력 발전소의 핵심 시설인 도수로 터널 공사가 시작되었고, 1921년 6월에는 댐 건설이, 같은 해 9월에는 철도 본체 공사가 착공되었다. 당초 철도 궤간은 일본 표준인 1067mm 협궤로 계획되었으나, 조선총독부 철도와의 연계 운행 편의성을 고려한 후루카와 사카지로의 제안에 따라 1921년 표준궤(1,435mm)로 변경되었다.[4]

1923년에는 철도 1단계 구간(철원-김화)과 수력 발전소 건설이 완료되어 같은 해 11월 개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9월 1일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시바우라 제작소(芝浦製作所)에 발주했던 철원 변전소용 회전변류기가 소실되는 예상치 못한 재난을 겪었다.[4] 이로 인해 전기 운전이 불가능해지자, 임시방편으로 남만주 철도로부터 증기기관차와 객차를 대여하여 1924년 8월 1일, 철원역김화역 사이의 28.8km 구간을 우선 개통했다.[30][4] 이후 복구 작업이 진행되어 같은 해 10월 노선 전철화가 완료되었고, 11월 26일부터는 마침내 전기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31][27]

한편,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전력 사업을 기반으로 설립된 만큼, 1924년 3월 기준으로 한국 전체 39개 전기 사업체 중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4]

2. 1. 2. 건설과 운영 (1924~1942)



금강산 전기철도의 3등 객차


평양 철도성 혁명사적관에 보존된 2등/3등 객차


금강산 전기철도는 금강산 관광객 수송과 지역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건설된 사유 철도 노선이다. 일본인 사업가 久米民之助|구메 타미노스케일본어1918년 금강산 답사 후, 화천강 물을 동해 쪽으로 유도하여 수력발전을 하고 그 전력으로 철원에서 금강산까지 전기철도를 놓는 계획을 세웠다. 1919년 12월, 구메를 중심으로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본사는 강원도 철원군 외촌리 655번지에 두었다.

1920년 수력 발전소 공사를 시작했고, 1921년 9월에는 철도 공사에 착수했다. 당초 협궤(1,067mm)로 계획되었으나, 이사였던 古川阪次郎|후루카와 사키지로일본어의 제안으로 1921년 표준궤(1,435mm)로 변경되었다. 이는 당시 한반도 유일의 표준궤 전기 철도 노선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1923년 철도 1기 공사와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으나, 같은 해 9월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芝浦製作所|시바우라 제작소일본어(현: 도시바)에 주문한 철원 변전소용 회전변류기가 소실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전기 운전이 지연되어, 1924년 8월 1일 철원역 ~ 김화역 간 28.8km 구간 개통 시에는 만철에서 증기기관차와 객차를 빌려 운행을 시작했다.[30] 전기 운전은 같은 해 11월 26일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31]

철원-김화 구간 개통 이후 노선은 단계적으로 연장되었다.

'''금강산선 구간별 개통 일지'''
개통일자구간거리
1924년 8월 1일철원김화28.8km
1925년 12월 20일김화 – 금성16.6km[32]
1926년 9월 15일금성 – 탄감(당암)8.6km[33]
1927년 9월 1일탄감(당암) – 창도(장도)8.2km[34]
1929년 4월 15일창도(장도) – 현리15.1km[35]
1929년 9월 25일현리 – 화계16.6km[36]
1930년 5월 15일화계말휘리(금강구)13.3km
1931년 7월 1일말휘리(금강구) – 내금강8.6km[37]



건설 과정에서 최대 난관이었던 단발령 터널 공사는 1928년 6월 15일에 시작되어 1929년 9월 15일에 완료되었다.[4] 마침내 1931년 7월 1일, 말휘리역 ~ 내금강역 구간 개통으로 철원-내금강 간 총 116.6km의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37] 그러나 창립자인 久米民之助|구메 타미노스케일본어는 전 구간 개통을 보지 못하고 같은 해 5월 24일에 사망했다.[4] 그의 뒤를 이어 馬越恭平|마고시 쿄헤이일본어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31년 8월 2일부터는 2등 여객 영업을 시작했으며,[37] 1936년 5월 1일에는 남창도역이 영업을 개시했다.[38]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 금강산 전기철도가 발행한 노선 지도


금강산 전기철도는 주로 관광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창도 지역의 황화철광을 흥남의 일질콘체른 공장으로 운송하는 화물 수송도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전기 기관차 없이 전동 객차가 화물 열차를 견인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회사는 철도 사업 외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판매하는 전기 사업도 겸영했는데, 철도 수입보다 전력 판매 수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교통망 확충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설 철도 회사 설립을 장려하며 보조금 제도를 운영했고, 금강산 전기철도 역시 이 보조금을 받았다. 당초 10년 지급 예정이었던 보조금은 15년, 25년으로 연장되어 일제 강점기 내내 지급되었으며, 초기 운영 수익이 저조했던 회사에게는 중요한 자금원이었다.[4]

회사는 설립 초기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불황과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다. 투자자들의 재정난으로 약 7,000주의 주식이 회사 임원들에게 되돌아왔고, 久米民之助|구메 타미노스케일본어 사장은 개인 부동산을 매각하는 등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4] 1931년 상반기 총수입 중 정부 보조금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고, 이익금 대부분은 부채 상환에 사용되었다. 한때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의한 국유화(매수)도 검토되었다.[4]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경기가 회복되면서 관광객이 급증하고 화물 운송량도 늘어나면서 경영 상태가 호전되었다. 1936년에는 약 15만 4천 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며,[16] 노선 주변의 채석장과 창도 인근의 황동석 광산 개발도 실적 개선에 기여했다. 1939년에는 철도 수입만으로도 지출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4] 관광 시즌인 5월부터 10월까지는 증편 운행 및 조선총독부 철도와의 직통 야행열차 운행, 할인 승차권 발매 등으로 금강산 관광 활성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잦은 홍수 피해는 운영의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1925년, 1929년, 1930년, 1933년, 1936년 등 여러 차례 홍수로 발전 및 송전 시설, 철도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36년에는 주 발전소 누수로 전력 생산에 차질이 생겼으나, 1937년 보수 공사 완료 후 정상화되었다.[4]

1930년대 후반, 회사는 말휘리에서 외금강까지 노선을 연장하여 동해북부선과 연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일 전쟁 발발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상황 악화로 실현되지 못했다.[4][9]

1930년대 말부터 만철이 경원선, 중앙선, 경인선 전철화를 추진하면서 미쓰비시도시바전기 기관차를 발주했다.[10][11][12] 1943년 첫 DeRoI형 기관차가 도입되었으나, 만철의 전철화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당시 한반도 유일의 표준궤 전철 노선이었던 금강산선에서 시운전을 실시하기도 했다.[10] 다만 금강산선은 직류 1,500 V, 시험 기관차는 3,000V 규격이었다.[12]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전시 체제 강화 속 전력 통제라는 명분 아래 한반도 내 전력 회사 통합이 추진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1942년 1월 1일 경성전기에 흡수 합병되었고, 노선명은 '경성전기 금강산 전철선'으로 변경되었다.[4] 이는 중부 지역 전력 회사 통합의 마지막 단계였는데, 경성전기 측은 금강산 전기철도가 철도 사업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합병에 소극적이었으나 전시 상황으로 인해 결국 합병이 이루어졌다.[4]

2. 1. 3. 전시 체제와 노선 단축 (1942~1945)

전시 체제 강화 속에서 전력 통제 정책에 따라 한반도 내 전력 회사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 1일,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경성전기(당시 경성시전 경영)에 합병되어 '경성전기 금강산 전철선'이 되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전시 물자 수송이 중요해지면서, 관광 노선의 중요도는 낮아졌다. 결국 1944년 10월 1일, 금강산 관광객 수송이 주 목적이었던 창도 - 내금강 구간(49km)이 불요불급선으로 지정되어 폐지되었다. 다만, 창도 지역에 황철광 광산이 있어 화물 수송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철원 - 창도 구간은 계속 운영되었다. 창도에서 운반된 황철광은 주로 흥남의 일질 콘체른 공장으로 보내졌다.

2. 2. 해방 이후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고, 금강산선 전 구간은 38선 이북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선은 소련 군정과 이후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북한은 금강산선을 계속 운영하였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철도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군사 분계선이 확정되면서 노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결국 운행이 중단되어 폐선되었다. 현재는 남북 양측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으며, 남북 관계의 변화에 따라 복원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2. 2. 1. 북한 지역 편입과 폐선 (1945~1950)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금강산선의 모든 구간은 38도선 북쪽에 위치하게 되어 소련 군정과 이후 들어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할 하에 놓였다. 북한은 금강산선을 계속 운영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에 전시체제 하에서 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창도-내금강 구간 49km가 불요불급선으로 지정되어 이미 폐지된 상태였다. 이후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상황은 급변하였다. 전쟁 과정에서 금강산선의 철도 시설 대부분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전쟁 이후 군사 분계선이 현재의 위치로 확정되면서 노선 자체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결국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최종적으로 폐선되었다.

2. 2. 2. 대한민국 구간 현황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에 의해 노선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 대한민국 측 구간의 잔해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926년에 건설된 한탄강 철교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철교 위에는 과거 전기를 공급하던 전차선 지지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는 도보로 철교에 접근할 수 있다.[16]

한편, 북측 구간은 임남댐 건설로 일부 구간이 물에 잠겼지만, 교각 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으며, 노선이 있던 자리의 일부는 항공 사진이나 위성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17]

2. 2. 3. 복원 논의

금강산선은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남북 협력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의선, 동해북부선, 경원선 연결 사업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려 있어 실제 추진은 뒤로 미뤄질 전망이다. 또한 금강산댐 건설로 인해 일부 구간이 물에 잠겨 있어,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우회 노선 건설이 필요한 상황이다.

다만, 남측 구간인 철원~군사분계선 사이의 32.5km 구간에 대해서는 이미 1999년에 복원을 위한 실시설계가 완료된 상태이다.[40]

그러나 2016년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복원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41]

3. 노선 정보


  • '''노선 거리''': 116.6km
  • '''운영 기관''':
  •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 (1924년 ~ 1942년)
  • 경성전기 주식회사 (1942년 ~ 1945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통성 운수국 (1945년 ~ 1950년)
  • '''궤간''': 1435mm (표준궤)
  • '''통행 방식''': 좌측 통행
  • '''역 수''': 28개
  • '''복선 구간''': 없음 (전 구간 단선)
  • '''전철화 구간''': 전 구간 직류 1500V (가공 전차선 방식, 팬터그래프 사용)[18]
  • '''보안 장치''': 없음
  • '''운행 속도''': 35km/h ~ 40km/h
  • '''특이 구간''': 탄발령과 말휘리 사이에 상당한 스위치백 구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로 변경되었다.[1]
  • '''당시 운임''': 7원 56전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에 해당)
  • '''연간 관광객''': 1936년 기준 약 15만 4천여 명


4. 역 목록

거리
(km)누적
거리
(km)접속 노선소재지 (1945년 당시)소재지 (현재)비고철원鐵原0.00.0경원선강원도철원군철원읍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철원읍1950년 폐지사요四要1.61.61950년 폐지동철원東鐵原1.63.21950년 폐지동송東松2.86.0동송면동송읍1950년 폐지양지陽地4.310.3어운면1950년 폐지이길二吉3.914.21950년 폐지정연亭淵3.317.5평강군남면갈말읍1950년 폐지유곡楡谷4.021.5김화군근북면근북면1950년 폐지금곡金谷3.024.51950년 폐지김화金化4.328.8김화읍김화읍1950년 폐지광삼光三4.233.0근동면근동면1950년 폐지하소下所3.336.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김화군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행정杏亭3.840.1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백양白楊5.745.8원남면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금성金城5.251.0금성면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경파慶坡3.054.0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탄감炭甘5.659.6원북면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남창도南昌道6.065.6창도면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창도昌道2.067.61945년 이후 북한 관할, 1950년 폐지기성岐城7.77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창도군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현리縣里7.482.7통구면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도파桃坡7.390.0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화계花溪4.794.7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오량五兩4.699.3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단발령斷髮嶺5.5104.8회양군내금강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말휘리末輝里3.2108.0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
(옛 금강구역)병무竝武4.4112.4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내금강內金剛4.2116.61944년 폐지, 1945년 이후 북한 관할



금강산선은 총 길이 116.6km의 노선으로, 전 구간이 궤간 1435mm의 표준궤로 건설되었다. 또한 1,500V 직류(DC) 가공 전차선 방식으로 전철화되어 팬터그래프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아 운행했다.[18]

5. 운영

1930년대 후반 금강산 전기철도는 활발히 운영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로 운영 방식에 큰 변화를 맞았다.

1931년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 전력 회사 통합 논의가 있었으나, 금강산 전기철도의 정부 보조금 문제 등으로 경성전기주식회사와의 합병은 지연되었다.[4] 그러나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전력 사업 통폐합이 강행되어, 금강산 전기철도는 1942년 1월 1일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흡수되었고, 노선명도 '경성전기주식회사 금강산 전기선'으로 변경되었다.[4]

한편, 1930년대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경원선 등의 전철화를 위해 도입한 DeRoI형 전기 기관차의 시험 운행이 1943년 금강산 전기선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10][11][12][13] 이는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전철화된 표준궤 노선이었기 때문이다.[10]

1944년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자, 관광객 수송 위주였던 장도-내금강 구간(49km)은 불요불급 노선으로 지정되어 1944년 10월 1일 폐쇄되고 자재는 다른 노선으로 전용되었다.[14][4] 철원-장도 구간은 황철광 수송을 위해 유지되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모든 운행이 중단되었다.[4]

광복 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면서 금강산선 전 구간은 소련 군정 하에 들어갔고, 1946년 8월 10일 국유화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소속이 되었다.[15] 북한 철도성은 철원-장도 구간의 운행을 재개하여 '금강산선'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9월까지 운영했다.[18]

그러나 한국 전쟁 발발로 노선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953년 휴전으로 군사 분계선이 노선을 가로지르면서(광삼역하소역 사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4] 이로 인해 금강산선의 운행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이후 복구되지 못하고 폐선되었다.[4]

5. 1. 운행

1940년 10월 (쇼와 15년) 금강산 전기철도 시간표


1936년 금강산 전기철도의 선철 침대차


창도역의 유개화차


한탄강교를 지나는 화물열차


금강산 전기철도는 처음부터 금강산 관광객 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구간이 증기 기관차 견인으로 처음 개통되었을 때, 김화에서 내금강까지 연결 버스가 운행되었다. 이후 철도 노선이 금성역, 탄감역, 장도역, 효리역, 화계, 말휘리(후에 금강구로 변경)까지 단계적으로 연장됨에 따라 버스 운행 구간도 점차 단축되었고, 1931년 7월 1일 철도가 내금강까지 완전히 개통되면서 버스 운행은 폐지되었다.[4]

전 구간 개통 이후 열차 운행은 관광 성수기(5월~10월)와 비수기(11월~4월)에 따라 시간표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4] 비수기에는 철원-내금강 간 전동차가 하루 3회 왕복 운행되었고, 성수기에는 1회 증편되어 4회 왕복 운행되었다. 이 외에도 철원-김화, 철원-장도 간 구간 열차도 하루 1~3회 왕복 운행되었다.[4] 1940년 시간표에 따르면, 철원-내금강 전 구간(116.6km) 운행에는 평균 4시간 30분이 소요되었으며, 평균 속도는 시속 25km 정도였다.[39] 당시 철원-내금강 간 운임은 7원 56전으로, 쌀 한 가마니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6]

여객 열차는 기본적으로 3등석으로 운행되었으나, 전 구간 개통 한 달 후인 1931년 8월 2일부터는 2등석 객차가 포함된 열차도 운행되었다.[4] 열차는 보통 2등석 및 3등석 객실과 수하물칸을 갖춘 4량 편성의 전기 동차로 구성되었다.[19]

특히 관광 성수기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과의 연계 운행이 활발했다. 1930년부터 1941년 7월까지 경성(현 서울)에서 내금강까지 직통하는 야간 침대차가 운행되었는데,[4] 이 침대차는 철원역에서 금강산 전기철도의 전기 동차에 연결되거나 분리되었다.[1][19] 내금강역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직영 관광 버스가 운행되었고, 다양한 할인 티켓도 판매되었다.[4]

여객 수송 외에 화물 수송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관광 비수기인 11월부터 4월까지는 화물 수송이 주 수입원이었다.[4] 주요 화물은 장도 인근 광산에서 채굴된 황철석으로, 이는 함경남도 흥남에 위치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 공장으로 운송되었다.[4] 금강산 전기철도는 별도의 전기 기관차를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물 열차의 견인은 여객용 전기 동차가 담당했다.[4]

광복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금강산선 전 구간은 소련 군정 하에 들어갔고, 1946년 8월 10일 북한 철도성에 의해 국유화되었다.[15] 철도성은 철원-장도 구간에서 열차 운행을 재개하여 '금강산선'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9월까지 여객 및 화물 운송을 계속했다.[18][39]

그러나 한국 전쟁 발발로 노선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953년 휴전으로 군사 분계선이 설정되면서 노선은 광삼역하소역 사이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4] 이로 인해 금강산선의 운행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4] 북한 측 경원선 구간은 전쟁 후 복구되어 강원선으로 운행 중이지만, 금강산선은 재건되지 않았다.[3][4]

5. 2. 차량



금강산선은 주로 자체 동력을 가진 전동차로 운행되었다. 당시 한반도의 다른 철도 노선과 달리 전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전기 기관차는 보유하지 않았으나, 선철(鮮鐵)의 DeRoI급 기관차(도시바 제작) 도입을 위한 시험 운행이 금강산선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10] 화물 열차의 견인 역시 전동차가 담당했다.

운행된 전동차는 모두 능형 팬터그래프를 통해 직류 1,500 V 전기를 공급받는 저항제어 방식이었다. 도입 당시 사양인 공기통 1개로는 제동력 확보가 어려워 2개의 공기통을 추가로 장착했다. 차량 제작은 만철의 대련 공장, 선철의 경성 공장, 다나카 차량(킨키 차량의 전신), 일본 차량, 가와사키 등 여러 회사에서 맡았다. 총 14량의 다양한 전동차 외에도 동력 없는 객차 1량과 화물차 28량을 보유하고 있었다.[18]

열차 편성은 일반적으로 비수기에는 3량(DeRoHaNi 1량, DeHa 2량)으로 운행되었고, 관광객이 많은 성수기에는 4량이 추가되었다. 특정 관광 시즌에는 경성에서 내금강역까지 운행하는 야간 열차에 선철 소속 침대차가 추가되어 총 5량으로 운행되기도 했다.[19]

주요 전기 객차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형식설명제작사제작 연도비고
DeHa 100급3등 객차[21]
DeHaNi 100급3등 객차 + 수하물 칸[22]일본 차량1931년
DeRoHaNi 100급2등/3등 객차 + 수하물 칸일본 차량1931년총 5량 제작.[18] 사구 급행 전기철도의 参宮急行電鉄2200系電車|산구 급행 전철 2200계 전차일본어 및 신케이한 철도의 P-6形|P-6형일본어과 유사. 102호는 현재 평양 철도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23]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의 철도성 혁명사적관(통칭 평양 철도 박물관)에는 금강산 전기철도에서 운행했던 DeRoHaNi 100급 102호 전동차 1량이 보존되어 전시 중이다.[24][25] 또한 일본 요코하마시의 하라 철도 모형 박물관에는 하라 신타로(原信太郎)가 제작한 금강산 전기철도 동차의 철도 모형이 소장되어 있다.[26]

6. 특징

금강산선은 표준궤인 1,435mm 궤간을 사용했으며, 직류 1,500V로 전철화된 노선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드문 고압 직류 방식이었다. 노선 건설 당시 협궤인 1,067mm도 검토되었으나, 후루카와 사키지로(古川阪次郎)의 제언에 따라 표준궤로 변경되었다. 또한, 지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단발령~말휘리 구간에는 스위치백 방식을 도입하여 운행했으며, 현재 이 구간은 도로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된 건설 목적은 금강산 관광객 수송이었으나, 철도 운영 외에도 수력발전을 통한 전력 사업을 겸영하여 철도 수익보다 전력 판매 수익이 더 컸다. 또한, 창도 지역의 황철광을 흥남 공업지대로 운송하는 화물 수송 역할도 담당했다.

한국 전쟁 이후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DMZ)에 의해 노선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대한민국 측 구간은 대부분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내에 위치하여 접근이 어렵지만, 1926년에 건설된 한탄강 철교를 비롯한 일부 교량과 노반 시설이 남아있다. 특히 한탄강 철교는 전차선 지지대가 남아있는 등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16]

북한 측 구간은 임남댐 건설로 인해 남창도~화계 사이의 일부 구간이 수몰되었으나, 여전히 교각 등의 흔적과 일부 노반을 위성 사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7] 현재 평양의 철도성 혁명사적관에는 금강산 전기철도에서 운행했던 전차 1량(일본차량제작 데로하니 100형 102호)이 김일성이 탑승했던 차량이라는 명목으로 전시되어 있다.[24][25] 일본 요코하마시의 하라 철도 모형 박물관에도 금강산 전기철도 22호 전차의 철도 모형이 소장되어 있다.[26]

7.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京元線 金剛山電気鉄道 http://www5f.biglobe[...]
[2] 웹사이트 京元線 鉄原 http://www5f.biglobe[...]
[3] 서적 将軍様の鉄道 (Shōgun-sama no Tetsudō) Shinchōsha 2007-01
[4] 웹사이트 金剛山電気鉄道について http://www.norihuto.[...]
[5] 웹사이트 金剛山電気鉄道 デハニ100型 http://mizoinudou.bl[...]
[6] 웹사이트 金剛山電気鉄道 - まほろ市発何でもありのブログ https://blogs.yahoo.[...]
[7] 간행물 日本之精華 愛媛県之部
[8] 뉴스 南昌道驛營業開始(남창도역영업개시) http://newslibrary.n[...] 1936-05-04
[9] 뉴스 內金剛(내금강)에서外金剛(외금강)에 探勝(탐승)의電車(전차)를敷設(부설) http://newslibrary.n[...] 1940-02-26
[10] 서적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Korea Rolling Stock Technical Corp. 1999
[11] 웹사이트 デロイを探せ!(その4)発注数量と実生産数 http://ameblo.jp/gon[...] 2011-11-08
[12] 웹사이트 松田新市三菱電機技師の戦中戦後の電気車設計 http://ktymtskz.my.c[...]
[13] 웹사이트 デロイを探せ!(その51)ソ連向けデロイの輸出許可申請書(その2) http://ameblo.jp/gon[...] 2014-03-18
[14] 웹사이트 韓国の廃線について http://www.geocities[...]
[15] 서적 将軍様の鉄道 (Shōgun-sama no Tetsudō) Shinchōsha 2007-01
[16] 웹사이트 鉄原安保観光 http://www.2427junct[...]
[17] 웹사이트 内金剛周辺の金剛山電気鉄道の跡 http://www.norihuto.[...]
[18] 웹사이트 鉄道省革命事績館 http://www.2427junct[...]
[19] 웹사이트 金剛山電気鉄道デロハニ100型2,3等、手荷物合造電動制御車 http://www.geocities[...]
[20] 문서 기차시간표 북한 교통성 운수국 렬차부 편 1950-04-01
[21] Youtube 金剛山電気鉄道デハ100型3等電動制御車 http://www.geocities[...]
[22] 웹사이트 過去の参加イベント・頒布会での参加記念品や会場限定品のリストです。 http://mayworks.web.[...]
[23] 웹사이트 平壌の鉄道事績館に保存されている 金剛山電気鉄道の電車 http://www.norihuto.[...]
[24] 웹사이트 北朝鮮の平壌に眠る日本製の電車 国交がないのに保存されているワケ https://trafficnews.[...] 乗りものニュース 2021-03-25
[25] 문서 将軍様の鉄道 北朝鮮鉄道事情 신조사 2007
[26] 웹사이트 <画像3 / 20>原鉄道模型博物館に潜入!世界最大級の鉄道ジオラマはコレだ! https://trafficnews.[...] KADOKAWA 2013-01-29
[27] 뉴스 私設鉄道電車運転開始 朝鮮総督府官報大正第3691号 1924-12-02
[28] 뉴스 내금강에서외금강에 탐승의전차를부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0-02-26
[29] Youtube 평양 철도 사적관에 저장되어있는 금강산 전기 철도의 전철(平壌の鉄道事績館に保存されている金剛山電気鉄道の電車) http://www.norihuto.[...]
[30]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4-08-02
[31]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전차운전개시 1924-12-02
[32]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5-12-29
[33]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6-09-18
[34]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7-09-05
[35] 뉴스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9-04-25
[36] 간행물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29-10-03
[37] 간행물 조선총독부관보 휘보 사설철도운수영업개시 1931-07-07
[38] 뉴스 남창도역영업개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6-05-04
[39] 서적 기차시간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통성 운수국 렬차부 편 1950-04-01
[40] 뉴스 통일대비 철도망 https://n.news.naver[...] 연합뉴스 1999-09-13
[41] 뉴스 강원 철도망 전국 연결 눈앞… 경원선·금강산선 복원 주목 https://www.kado.net[...] 강원도민일보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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