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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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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성대군은 조선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문종 사후, 조카 단종을 보필하려 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사 삭녕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단종 복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1457년 32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사후,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숙종 때 관작이 복구되고 영조 때 정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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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유 (李瑜)
작위조선 세종의 왕자
승은정(承恩亭)
출생일1426년 5월 14일 (양력)
출생지조선 한성부 정궁
사망일1457년 11월 16일 (양력)
사망지조선 경상도 순흥부
시호정민(貞愍)
가족 관계
아버지세종
어머니소헌왕후 심씨
배우자완산부부인 전주 최씨
자녀2남

2. 생애

1433년(세종 15년) 금성대군에 봉해졌다. 1437년 최사강의 딸과 결혼하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된 의안군 이방석의 양자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 같은 해, 친형 광평대군도 이방석의 친형 무안군의 양자가 되었다.

1452년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함께 왕을 보좌할 것을 약속하고 단종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자 이에 대립, 1454년 윤6월 삭녕군으로 유배되었다.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다 1457년 1월 16일(음력), 명나라에서 영종(영종정통제)이 경태제에게서 황위를 되찾은 탈문지변이 일어나자, 같은 해 6월(음력)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당시 순흥군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은 부사와 단종 복위 계획을 모의했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고 같은 해 9월 사사(약살형)되었다. 다음 달, 단종 또한 사사되었다.

2. 1. 생애 초반

1426년(세종 8년) 음력 3월 28일 세종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다[1].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흥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그밖에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처음 이름과 자(字)에 대한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1437년(세종 19년) 2월 당시 참찬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이후 출궁하여 그의 사저에 의안대군의 사당을 세웠다.

1440년(세종 22) 6월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내의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迎秋門)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6월 21일 그의 병이 완벽하게 낫자, 그를 치료한 궁인들에게 세종대왕이 직접 상을 내렸다.

2. 2. 왕자 시절

1433년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봉해졌다. 1437년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결혼하고,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살해당한 의안군 이방석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제사를 계승하였다. 같은 해, 그의 친형인 광평대군도 이방석의 친형인 무안군(撫安君)의 양자가 되었다.

세종은 그를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경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다.[2] 그러나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고, 세종은 그를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3]

임금이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여 시병한 환관 최습(崔濕)에게 말 한 필과 밭 5결(結)을 주고, 김충(金忠)·김연(金衍)·전균(田畇)에게 각각 한 등급을 가하고 밭 5결을 주고 이해(李海)의 관직을 가하고, 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 한 필과 밭 5결을 주고, 배상문(裴尙文)에게 한 등급을 더하고 말 한 필과 밭 5결을 주고, 양홍수(楊弘遂)·전인귀(全仁貴)·전순의(全循義)·김지(金智)에게 각각 옷 한 벌을 주고, 박연생(朴延生)은 한 등급을 뛰었는데 연생은 대군(大君)의 유모의 남편이었다. 중례의 조카 노고헌(盧高憲)도 역시 한 등급을 더하였다.중국어

1444년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다. 1445년 세종의 명을 승정원에서 전달받아 임영대군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 감독을 맡아보았다. 1449년(세종 31) 10월 세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하였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1452년(문종 2년) 한때 문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환을 낫도록 축원케 하도록 사찰에 파견될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간에 취소되었다. 같은 해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전으로 호출되었다.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해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화의군, 계양군을 불러낸 뒤 이현로(李賢老)에게 심하게 매질을 하고 구타하였다. 그리고 '이현로는 반드시 장차 일을 일으킬 것이므로 내가 심히 염려한다. 너희들은 이를 알라'고 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2. 3. 수양대군과의 갈등과 유배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1455년(단종 2년) 1월, 영의정 수양대군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왕족들이 그의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4]

그리하여 그 해 2월 고신을 박탈당하고 유배령이 내려졌으나,[5] 무죄로 판결받고 고신을 되돌려받는다.[6]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파당을 만들고 무사들과 결탁해 모반을 하려 한다는 혐의로 삭녕군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경기도 광주군으로 배소가 옮겨졌다.

또한 그는 세종의 후궁이면서 단종의 세손 시절 그를 양육한 혜빈 양씨와 가깝게 지냈는데, 화의군 이영 등과도 연결되어 수양대군 사살을 도모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7] 세조 즉위 후인 1455년(세조 1년)에 단종이 금성대군의 집에 있었던 적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2. 4. 단종복위운동의 실패와 처형

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비밀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순흥부의 군사, 향리, 백성을 모으고 경상도 사족들에게 격문과 편지를 보내 동참을 호소했다. 의병을 일으켜 한성부로 진격,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이었다.[1]

그러나 순흥의 한 관노가 한성으로 도망쳐 세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조는 처음에는 금성대군을 죽이지 않으려 했으나, 1457년 음력 9월부터 신숙주, 정인지 등이 처형을 건의하고 사간원, 승정원 등에서도 연일 상소를 올리자 결국 음력 10월 21일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 이때 금성대군의 나이는 32세였다.[1]

1457년 11월 18일, 금성대군의 자손들은 단종 및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다른 왕자들(한남군, 영풍군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 유부록에서 삭제되었다.[1]

3. 사후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그가 한때 머물렀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도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에는 증손 흥양부정이 그의 부인 최씨의 묘소를 이장한 뒤, 그 옆에 그의 가묘를 만들고, 근처에 그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중종조에 와서 금성대군의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1519년(중종 14년) 그의 증손자 이의가 대궐 문앞에 짚자리를 깔고 3개월간 궐문 주변에서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때 중종에게 경전을 강의하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중종에게 "금성대군은 왕조의 가까운 친척이요. 사죄(赦罪)하지 않아서 그 자손들이 아직도 그 죄목에 묶여 있으니 불가하다고 사료되나이다. 너그럽게 용서하소서."라고 상주하여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노비에서 해방되었다. 이때 아들 작위를 박탈당한 화원군 이맹한은 1519년(중종 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咸種君)에 봉작되고 손자 이연장은 동평군(東平君)에 추증되었으며, 이인, 이의, 이례 3형제에게는 덕양부정, 홍양부정, 청리부정의 작위가 하사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영조 때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진천 청당사(靑塘祠), 순흥 도계서원(道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4. 평가

세종의 여러 아들 중 다른 대군들과 서자 군들은 세조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금성대군은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세종과 맏형 문종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이 사랑하던 손자이자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평가가 있다.[8]

5. 사적


  • 금성단 (錦城壇):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으며, 금성대군이 처형된 곳에 세워진 단이다.[1]
  • 청당사 (靑塘祠): 금성대군의 사당이며,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에 있다.[1]
  • 청주 금성대군 제단 (淸州 錦城大君 祭壇):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산 49번지 절동에 있으며, 완산부부인 최씨 묘소 우측에 있다.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1]
  • 이 외에 경북 영주시 순흥 등지에 여러 곳의 사적이 존재한다.[1]

6.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조부태종1367년 ~ 1422년조선 3대 국왕
조모원경왕후 민씨1365년 ~ 1420년
아버지세종1397년 ~ 1450년조선 4대 국왕
외조부심온1375년 ~ 1418년청천부원군
외조모삼한국대부인 안씨? ~ 1444년순흥 안씨 안천보의 딸
어머니소헌왕후 심씨1395년 ~ 1446년
큰누나정소공주1412년 ~ 1424년
큰형문종1414년 ~ 1452년조선 5대 국왕
조카단종1441년 ~ 1457년조선 6대 국왕
작은누나정의공주1415년 ~ 1477년
작은형세조1417년 ~ 1468년조선 7대 국왕
조카덕종1438년 ~ 1457년추존왕
조카예종1450년 ~ 1469년조선 8대 국왕
셋째형안평대군1418년 ~ 1453년
넷째형임영대군1419년 ~ 1469년처조카사위
다섯째형광평대군1425년 ~ 1444년
동생평원대군1427년 ~ 1445년
동생영응대군1434년 ~ 1467년
부인완산부부인 최씨전주 최씨 최사강의 딸
장남화원군 이맹한1455년 ~ 1529년훗날 아들 이연장과 함께 청주의 관노가 됨[9]
손자이연장훗날 아버지 이맹한과 함께 청주의 관노가 됨[10], 사후 동평군으로 추봉
증손자덕양부정 증 덕천군 이인1500년 음력 6월 19일 ~ 1575년 음력 3월 26일
증손자홍양부정 증 홍양정 이의1502년 ~ 1577년 음력 6월 26일
증손자청리부정 이례
소실이름 미상[11]
서장남이동충주의 관노가 됨[12]
손자이금질정
손자이철정
손자이은정
양자춘성군 도효공 당1454년 - 1485년 6월 1일세종의 서5남 밀성군의 아들, 영조대 금성대군 신원 후 본가의 계보로 돌아감.
이복 숙부, 동서함녕군함녕군의 부인이 완산부부인의 언니이므로, 숙질인 동시에 동서간이다.


7. 관련 작품

7. 1. 드라마

참조

[1] 실록 조선왕조실록 1453년(단종 1년) 6월 26일 1번째 기사
[2] 실록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6월 11일(신사) 2번째기사 "금성 대군이 창진으로 위독하게 되다"
[3] 실록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6월 21일(신묘) 5번째기사 "금성 대군의 쾌유에 공이 있는 자들을 상을 주다"
[4] 실록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2월 27일(계묘) 2번째기사 "화의군 이영 등을 유배하고 환관 엄자치 등을 파출시키다"
[5] 실록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2월 27일(계묘) 3번째기사 "금성 대군 이유 등의 고신을 거두고 엄자치 등 환관을 외방에 유배시키다"
[6] 실록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3월 7일(임자) 1번째기사 "좌사간 대부 신전이 금성 대군 이유·화의군 이영·무신 홍약·환관 엄자치 등의 죄명을 밝히도록 아뢰다"
[7] 실록 단종실록 13권, 1455년(단종 3년, 명 경태 6년) 3월 21일 병인 2번째기사, 금성 대군 이유가 몰래 양씨와 결탁하다
[8] 웹인용 금성대군 http://koreandb.nate[...] 2011-11-23
[9] 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32권, 13년(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2월 21일(경인) 5번째기사
[10] 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32권, 13년(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2월 21일(경인) 5번째기사
[11] 문서 군산시 대야면 보덕리 금성대군 배위 파평윤씨 묘
[12] 실록 중종실록 41권, 중종 15년 11월 13일 정묘 1번째기사 / 선왕조에서 죄를 받은 금성 대군과 한남군의 후손을 추록하고 서용하는 것에 관해 삼공과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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