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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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옥균은 1851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난 조선의 개화 운동가이다. 그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후손으로, 6세에 정계 거물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박규수, 오경석 등에게 개화 사상을 접하며 신문물을 수용하고 일본을 왕래하며 개화를 추진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갑오개혁 이후 복권되었으며, 1910년 순종 때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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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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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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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옥균 |
한자 | 金玉均 |
로마자 표기 | Gim Okgyun |
다른 이름 | 고균(古筠) 고우(古愚) 백온(伯溫) |
출생일 | 1851년 2월 23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공주시 |
사망일 | 1894년 3월 28일 |
사망지 | 청나라 상하이 |
국적 | 한국 |
직업 | 정치인 |
주요 활동 | 급진개화파 |
묘지 | 진정사 / 아오야마 영원 |
시호 | 충달(忠達) |
가족 관계 | |
양부 | 김병기 |
양모 | 전주 이씨 부인 |
양계모 | 풍양 조씨 부인 |
생부 | 김병태 |
생모 | 은진 송씨 부인 |
배우자 | 기계 유씨 부인 |
자녀 | 슬하 1남 2녀 |
아들 | 김영진 |
친척 | 김형규 (8촌 삼종형) 김좌진 (9촌 삼종질) 김종진 (9촌 삼종질)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
경력 | 급진개화파 |
종교 | |
종교 | 유교(성리학) |
2. 생애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네 살 때 천안으로 이사했고, 아버지의 서당에서 교육받았다. 여섯 살에 친척 김병기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성장했다. 1872년 22세에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개화파 청년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881년 고종의 명으로 일본을 방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으로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하며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근대화를 경험했다.
1882년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수신사 박영효 일행에 합류하여 다시 일본을 방문, 차관을 얻어 귀국 후 한성순보 창간에 기여했다. 김옥균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메이지 유신을 본뜬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며, 오가사와라섬과 홋카이도에서 유배 및 연금 생활을 했다. 이 시기 일본인 여성들과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1894년, 리훙장과의 담판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부관참시되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사면·복권되었다.
2. 1. 생애 초기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김병태와 은진 송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네 살 때 천안으로 이사했고, 아버지가 연 서당에서 교육받았다. 여섯 살 때 아들을 잃은 친척 김병기에게 입양되었다.[25]서울에서 4년간 머무르다 1861년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지역 수령으로 임명되자 이사했다. 열다섯 살에 양아버지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함께 상경, 가야금, 노래, 춤, 시, 서예, 회화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명성이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1872년 22세에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양아버지 김병기는 아들이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2. 1. 1. 출생과 가계
1851년 2월 23일 조선 충청도 공주군[22]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 김병태와 부인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3]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24]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의 양자가 됐다.[25]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아버지를 통해 순원왕후의 6대조인 김상관의 형제인 김상용과 친척 관계였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고, 네 살 때 천안으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서당을 열었고, 김옥균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2. 1. 2. 수학과 개화 사상
어려서부터 문장, 시, 글씨, 그림, 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에는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에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되어 강릉부사로 발령받자, 김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24]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1870년 홍문관 제학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되었다. 경복궁 동편 북촌 스승댁 사랑방에 드나들던 한의원이자 개화 사상가이며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는 유대치도 만나 배웠다. 스승 박규수의 집엔 신기한 물건과 사람이 많았다. 수도승으로 부산 왜인촌을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도 만났고, 역관 수석으로 스승과 함께 청나라행 사신단에 있었던 오경석도 만났다. 일본에서 들여온 지구본, 만화경, 망원경 등의 신기한 물건도 있었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구 지리와 정세, 문물을 소개한 서적들도 탐독했다.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였던 박영효, 여흥 민씨의 총아 민영익, 유길준, 박정양, 서재필 등 동문수학하던 영재들과 함께 동대문 밖 봉은사에 자주 몰려나가 이동인이 계속 사나르던 최신 일본 서적들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토론했다. 1872년(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했다.[23] 1등이기도 했지만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문과에 급제해도 바로 임관되기 쉽지 않은데, 양아버지의 배경과 우의정에 오른 스승 박규수의 인도로 바로 권지[26]에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2. 1. 3. 관료 생활
1876년 2월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체결 후, 김옥균 등 개화파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할 정치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를 결의했다. 신분 문제 때문에 처음엔 갈등이 있었으나, 김옥균은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위해서는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설득해 뜻을 모았다.[24]그들은 조선 말기 미몽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국을 수렁에서 건지려면 새 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근대화된 조국에의 신념을 모토로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충의계를 조직했다.[24]
단체 정강을 만들고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조직하되, 옛 칠서의 변, 홍길동 사건 들처럼 신분질서 문란죄로 찍혀 탄압됐던 단체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비밀 계의 형태로 조직을 짰다. 김옥균,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이 주축이 돼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윤웅렬 등이 자문하는 식이었다.
2. 2. 신문물 수용과 일본 왕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김옥균은 일본이 서구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본의 서구화 과정을 배우기 위해 일본 방문을 추진했다.[2] 1881년 11월, 김옥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계획이 있는지 알아보는 임무를 띠고 일본 방문 허가를 받았다. 도쿄에 도착한 후, 여러 영향력 있는 일본 정치인들을 만났고, 1882년 2월부터 8월까지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으로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군사력이 청나라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청나라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생존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현재의 집권 세력을 제거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일본 체류 중, 김옥균은 일본 정치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노우에는 김옥균이 고종에게서 개혁에 대한 허가를 받으면 3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 대사와의 갈등, 일본의 조선 정책 변화로 인해 이노우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옥균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1884년 3월 귀국했다.[3]
1882년 제물포 조약의 수신사 박영효 등을 수행하여 다시 일본을 방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개로 이노우에 가오루를 통해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자금을 차관 받았다.[3] 조선 최초의 외국 유학생 파견과 한성순보 창간에 협력했다.[4]
2. 2. 1. 신문물 견학 건의
1876년(고종 16년) 김옥균은 조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하여,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일개 승려에 지나지 않던 이동인을 정식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게 했다.[1] 이동인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몇 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1880년 6월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과 만나는 등 조선 조정 내부에 개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1] 김옥균 자신도 일본을 방문하고자 1880년 말 이동인이 귀국한 후 고종을 여러 번 설득했다.[1] 결국 신사유람단을 꾸려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동행하려던 이동인이 출발 직전 왕궁에 들렀다가 행방불명되었다.[1] 척화파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1]일본 해군과의 갈등과 김옥균이 반대했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김옥균은 조선 정부가 야만적인 국가로 여겼던 일본이 서구화를 통해 훨씬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 그는 일본이 어떻게 서구화되었는지 배우기 위해 일본 방문을 추진했다.[2]
2. 2. 2. 일본 방문과 신문물 시찰
1876년(고종 16년), 김옥균은 조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하여 일본어에 능통했던 승려 이동인을 정식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게 했다. 이동인은 귀국하지 않고 몇 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1880년 6월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과 만나는 등 조선 조정 내부에 개화의 필요성을 알렸다. 김옥균 자신도 일본을 방문하고자 고종을 여러 번 설득하여, 1881년 신사유람단을 꾸려 일본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동행하려던 이동인이 출발 직전 행방불명되었고, 척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일본 해군과의 갈등과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김옥균은 일본이 서구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일본의 서구화 과정을 배우기 위해 일본 방문을 추진했다. 1881년 11월, 김옥균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계획이 있는지 알아보는 임무를 띠고 일본 방문 허가를 받았다. 도쿄에 도착한 후, 그는 여러 영향력 있는 일본 정치인들을 만났고, 1882년 2월부터 8월까지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으로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군사력이 청나라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중국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해야 하며, 이를 위해 현재의 집권 세력을 제거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체류 중, 김옥균은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 정치가 이노우에 가오루는 김옥균이 고종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허가를 받으면 3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 대사와의 갈등과 일본의 한국 정책 변화로 인해 이노우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옥균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1884년 3월 귀국했다.[3] 그는 1882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에 유학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을 받으며 게이오기주쿠와 고아회(興亞會)에 기식했다. 당시 일본의 일부 사상인 아시아주의를 김옥균이 독자적으로 동아시아에 특화된 “삼화주의”로 발전시켜 주창했다.
2. 2. 3. 신분제 폐지와 사회개혁론
김옥균은 신분제도와 문벌을 철폐하고,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하며, 공개 채용 시험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분리하고,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실질적인 세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산업 장려책으로는 근대 공업을 건설하고, 광업을 개발하며,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업 진흥책으로는 회사 제도를 입법하고, 화폐를 개혁하며, 관세 자주권을 확보하고 세금 영수증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 밖에도 철도 부설과 기선 해운 도입, 전신 회사 설립, 인구 조사, 농업과 양잠, 목축 등 상업적 농업 진흥, 임업 개발, 어업 개발과 포경업 도입 등 상공업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촉구했다.
또한 서양식 학제를 도입하여 전국적으로 신식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을 양성하고 지방관의 경찰권과 법관 권한을 분리하는 한편, 경찰 제도, 형사 행정 및 사법권 개혁을 요구했다. 도로 개선 및 정비, 위생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영세 중립화까지 주장했다.
일본 해군과의 갈등과 김옥균이 반대했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김옥균은 한국 정부가 야만적인 국가로 여겼던 일본이 서구화되어 훨씬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이 어떻게 서구화되었는지 배우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자 했다. 1881년 11월, 김옥균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계획이 있는지 알아보는 임무를 띠고 일본 방문 허가를 받았다. 도쿄에 도착한 후, 그는 여러 영향력 있는 일본 정치인들을 만났고, 1882년 2월부터 8월까지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을 받았다.
김옥균은 일본의 군사력이 청나라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중국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생존을 보장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빌려 근대화해야 하며, 현재의 집권 세력을 제거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의 정치가 이노우에 가오루는 김옥균이 한국 고종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허가를 받으면 300만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 대사와의 갈등과 일본의 한국 정책 변화로 인해 이노우에는 약속을 어겼다. 김옥균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1884년 3월 귀국했다.
2. 3. 개화파 활동과 갑신정변
김옥균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1872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박규수, 오경석 등의 영향을 받아 개화 사상을 갖게 되었고, 이동인의 일본 유학을 지원하기도 했다.[3] 1882년에는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유학,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을 받으며 게이오기주쿠 등에서 공부했다. 이때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삼화주의'를 주창했다.[3]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수신사 박영효 일행에 합류하여 다시 일본을 방문, 이노우에 가오루를 통해 차관을 얻었다.[3] 귀국 후에는 최초의 외국 유학생 파견과 한성순보 창간에 기여했다.[4]김옥균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1883년 차관 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으나 실패하고 1884년 귀국했다.[3] 청불전쟁 발발을 기회로 삼아, 1884년 12월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다.
이후 이노우에 각고로[5] 등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망명 중에는 '''이와타 아키사쿠'''(岩田秋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6]
2. 3. 1. 개화파 활동
김옥균은 한국이 서구 유럽의 이상, 지식, 기술을 받아들여 19세기 급속히 근대화되는 세계에서 생존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서구에 대한 개방적인 정책을 주장했다. 관료 생활 중 김옥균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동립당’(Independence Party)을 결성했다. 이후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23] 오히려 역심을 품는 것으로 곡해되었다.1884년 보수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후원하는 청나라가 안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날 민씨 척신 세력으로부터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의 암살 소식과 민영휘의 부상 소식을 접했다. 수구파의 일원인 전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사건의 실상을 알게 된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개입시켰고, 곧 만주에 주둔중인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였다. 명성황후는 계속 거처가 너무 협소하다면서 고종에게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닦달하였다. 넓은 창덕궁과 달리 경우궁은 좁아서 경비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었다. 왕후의 불만에 고종은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은 계동궁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왕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청나라와 내통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 김옥균 등이 외부 수습에 바쁜 틈을 타 명성황후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라서 다시 환궁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항의했지만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에는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미 왕후의 강력한 요구로 번복이 어렵게 되자, 박영효 등은 일본군의 무라카미 중대 병력과 함께 국왕 부처를 호위하여 창덕궁으로 인솔하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 대궐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선인문 밖에까지 당도한 청나라 지원군이 방해하여 양측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박영효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타협안을 하기로 결정, 궐문을 닫지 않고 궐 밖은 청군이 경비를 서고 궐 안은 일본군이 지키는 것으로 청군 측과 합의했다.
10월 21일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일본군은 형편상 오랫동안 조선의 궐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다케조에의 태도돌변에 당황한 김옥균은 바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 다케조에와 담판을 벌여서, 개화 정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3일간 동안 철병을 미루고, 개혁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철병을 강행한다.
21일 오전 청나라 제독 우주유(吳助維)는 도성이 평안하다는 편지가 고종에게 전달되고 바로 위안스카이가 600여명의 병사를 대동하여 국왕과의 접견을 요청했는데, 김옥균 등은 위안스카이의 접견은 허락하나 청군이 대궐로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그날 오후 위안스카이는 전 우의정 심순택에게 청군 출동을 요청하게 하여 청군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한 다음, 마침내 5백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우주유의 지휘 아래 선인문 쪽으로, 8백명으로 편성한 다른 부대는 위안스카이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돈화문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진격하여 궁궐 외곽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창덕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인원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전 병력과 수구파가 장악했던 좌우영 소속 조선 군졸들에다가,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엄청난 수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궐을 수비하던 병력은 일본군 200명과 개화파 자체 동원 병력 800명 정도로 그 수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었으며, 더구나 개화파의 병력은 변변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양한 인맥을 통해 그들은 봉원사에서 한 불교 승려를 만났는데, 그 승려는 그들에게 특이한 서양 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런던의 거리와 포르투갈 군인 등 서구 유럽의 여러 사진을 보여주는 영사기였다. 그는 또한 외국 장면이 담긴 일본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활동가들은 승려에게 더 많은 서구 유럽 유물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승려는 두 달 동안 일본을 오가며 더 많은 서구 유럽 제품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외국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정책 때문에 이것들은 숨겨져야 했다.
2. 3. 2. 갑신정변
1883년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차관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협상은 실패로 끝나고 1884년 4월에 귀국하였다.[3] 청나라가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청불 전쟁을 시작한 것을 호기로 보고, 12월에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협력도 얻어 민씨 정권 타도의 쿠데타(갑신정변)를 일으킨다.개화파 활동가들은 김옥균의 사저에 계속 모여 동아시아와 국제 정치에 관한 당시 상황을 논의했다. 김옥균은 비밀리에 연회 후 일본 공사관을 방문했다. 시마무라와의 논의에서 김옥균은 개화파에 대한 일본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노우에 가오루와의 사건에 대해 불평했다. 그는 청불전쟁이 또 다른 운동을 촉진할 좋은 기회이며, 일본 정부는 반드시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화파 활동가들과 일본 지지자들의 회의에서 김옥균은 혁명 계획을 개괄했다. 그것은 특정 정치 인물의 암살과 "우정총국"(우정총국|郵政總局한국어) 설립 환영회 당일 대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포함했다. 일본 공사관은 이 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강력히 약속했다. 젊은 서재필과 서광범도 구체제를 타도하려는 김옥균의 노력을 지지했다.
1884년 12월 4일 밤, 우체국 개국 환영회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활동가들이 폭발물과 총격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동안 암살자들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날 밤 개화파는 정부에서 우세한 당이 되었다. 이 사건은 갑신정변으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 군사와 조선인 가담자들과 개화파, 일본군이 교전하는 사이 왕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관왕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신정부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다가다 도중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과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가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邊洙), 이규완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홍영식 등은 개화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데다가 위안스카이와 친분도 있고 척신 중에도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국왕을 따라가면 신변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으나 그들은 북묘에 도착한 직후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공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김옥균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숨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 9명과 함께 인천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과 10월 20일 오후에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의 호위 아래 제물포에 정박중인 지토세마루(千歲丸, 천세환)에 승선했다.
사건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여 불과 3일 만에 정권이 끝났다.
2. 3. 3. 정변 실패와 은신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개화파 활동가들이 폭발물과 총격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동안, 암살자들이 요인 암살을 시도했다. 그날 밤 개화파는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갑신정변으로 알려져 있다.2. 4. 일본 망명 생활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공사의 도움으로 창덕궁 북문을 통해 탈출, 인천을 거쳐 일본 선박 지토세마루 호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피신했다.[32] 이 과정에서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를 이끌고 왔으나,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가 국제법을 내세워 이들을 보호했다.
조선 조정은 김옥균 등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정치범 인도 불가 원칙을 내세워 거절했다.[32] 이들의 존재는 청나라, 일본, 조선 사이의 민감한 문제였으며, 청일전쟁 이전까지 일본 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회고에 따르면, 나가사키에서 김옥균 일행은 쓰지 선장으로부터 일본식 이름을 받았다.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이와타 미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21]
김옥균은 망명 생활 중 1886년부터 2년간 오가사와라섬에 유배되었고, 1888년부터 1890년까지는 홋카이도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35] 이 시기 김옥균은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김옥균의 정신적,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스기타니 오타마(小玉)는 김옥균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김옥균 사후에도 그를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5]
2. 4. 1. 피신과 일본 망명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서광범, 변수 등 9명을 급히 피신시켰다. 이들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변복 후,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했다. 10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쫓아오자 일본인으로 꾸미고는 제물포항의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 호(千歲丸)로 숨었다.[32]이튿날 묄렌도르프는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하고 다케조에 공사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는 국제법 상 선박은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32]
10월 24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항을 떠나 10월 27일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로 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지냈다. 조선 정부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개화파의 존재는 동양 3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 정부에서 부담이 됐다. 이런 이유로 후일 김옥균은 절도에 유배를 가는 등 개화파는 일본 내에서도 찬밥 신세였다.
개화당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교류가 깊었던 전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는 후일 회고록에서 지토세마루 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郞)가 나가사키 항에서 헤어질 때 일본식 이름을 각각 지어줬다고 회고했다.[21] 곧 그들에게 들이닥칠 자객을 염려해 이같이 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외에도 이와타 미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었다.[21]
망명 직후 그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의 히가시히라노초(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를 맺어 다음 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33]
10월 27일 김옥균은 이노우에 가오루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불우한 처지의 망명객으로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이노우에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경위와 일본 측의 관여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나섰으나 일본측에서는 조선에 송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은 1885년 4월 청나라와 톈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주둔중인 군사를 공동으로 철수하기로 한 후 조선 문제에서 당분간 손을 떼었다. 불우한 정치망명객인 김옥균 일행을 일본은 부담스러워했고, 김옥균은 울분과 울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은신하며 자신의 개혁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연명하였다.
일본 망명 중에도 그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21세기 한국의 언론인인 김충식은 자객 밀파의 원인을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고 보았다.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34]"는 것이다. 그는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공원’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이다.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요코하마 총영사관이 야마테초에 한국식 건물로 들어서 있다.[34]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김옥균은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중 한명인 도야마 미쓰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야마테초에서 옥균은 겐요샤(玄洋社)라는 우익 집단의 장사들과 접촉했다. 겐요샤는 도야마 미쓰루가 만든 조직이다.[34] 조선에는 그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노우에 각고로[5] 등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 망명 중에는 '''이와타 아키사쿠'''라는 이름을 사용했다.[6]
2. 4. 2. 연금 생활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김옥균을 포함한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서광범, 변수 등 9명을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게 한 뒤,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시켰다. 이는 인천주재 주조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이었다.[32] 10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쫓아오자 일행은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제물포항의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 호(千歲丸)에 숨었다.[32]다음날,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한 묄렌도르프가 다케조에 공사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32] 배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독약병으로 자살을 각오했고, 다케조에 공사는 일행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다.[32] 그러나 선내 일본인 승객들과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가 이를 질타하며 반대했다.
다케조에가 망설이자 쓰지 선장은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국제법 상 선박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32] 이로써 개화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32]
한편,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천안 감영에 투옥돼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 감영에서 옥사당했다.[32]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은 음독 자살했고, 아내 유씨는 7세된 딸과 옥천군의 관노가 됐다.[32]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 살려고 음행(淫行)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32]
10월 24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항을 떠나 4일간 배의 밀실에 숨어 있었고, 10월 27일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로 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지냈다.[32] 이후 셋집을 얻어 합숙하며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지속적으로 그들을 죽이려 했고 청나라도 일본에 송환을 요구했다.[32] 조선 조정은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32] 개화파의 존재는 동양 3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이전에는 일본 정부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개화당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교류가 깊었던 전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는 후일 회고록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郞)가 나가사키 항에서 박영효 일행과 헤어질 때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고 회고했다.[21]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어줬다.[21]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외에도 이와타 미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1886년 7월부터 2년간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배되었고,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되었다.[35]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했다.[35]
삿포로에 살던 김옥균은 지병인 류머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종종 하코다테의 온천여관에 들렀는데, 거기서 스기타니를 만나 애인관계로 발전한다.[35] 스기타니 다마의 원래 이름은 ‘오타마(小玉)’이며, 하코다테 도서관이 소장 중인 사진에는 ‘봉래정예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35] 게이샤였던 오타마는 곧 김옥균의 재정적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35]
그녀의 이름은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졌다.[35] 이 책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이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35] 재일 사학자 금병동(琴秉洞)은 ‘김옥균과 일본’(2001년판)에서 “스기타니는 24~25세 정도의 미인이었으며, 두 사람 관계는 당시 하코다테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면서 “1890년 김옥균이 홋카이도 연금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올 때 함께 상경해 도쿄에서 살림집을 꾸리고 살았다”고 소개했다.[35]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김옥균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부음을 전해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후인 1916년 미야자키 도텐과 재회했을 당시에는 이미 한 실업가의 부인이 돼 있었다고 한다.[35]
이때 김옥균에게는 또다른 일본인 연인이 있었는데 역시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쓰노 나카(松野なか)였다. 나카에게서는 딸 1명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さだ)였다. 그 뒤 1884년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로 망명을 기획한다.
2. 4. 3. 조선 자객 침투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서광범, 변수 등 9명을 창덕궁 북문으로 피신시켜,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시켰다. 이는 인천주재 주조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이었다.[32] 10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쫓아오자 일행은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제물포항의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 호(千歲丸)에 숨었다.[32]다음날,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한 묄렌도르프는 다케조에 공사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32] 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독약병으로 자살을 각오했다. 다케조에 공사는 일행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는 "인간의 도리"와 "공사의 체면"을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다.[32] 쓰지 선장은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국제법 상 선박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32]
10월 24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항을 떠나 10월 27일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로 갔다.[32] 조선 정부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32]
개화당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전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는 회고록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郞)가 나가사키 항에서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21]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또는 이와타 미와(岩田三和),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는 이름을 받았다.[21]
2. 4. 4. 박영효와의 결별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서광범, 변수 등 9명을 창덕궁 북문으로 피신시켜,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했다. 10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오자 일행은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 호(千歲丸)로 숨었다.[32]묄렌도르프는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하고 다케조에 공사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는 국제법상 선박은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32]
10월 24일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항을 떠나 10월 27일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로 갔다. 조선 정부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개화파의 존재는 동양 3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에는 일본 정부에 부담이 되었다.[32]
이노우에 가오루는 회고록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郞)가 나가사키 항에서 헤어질 때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21] 자객을 염려해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었다.[21]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 외에도 이와타 미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망명 직후 김옥균은 야마토 히가시 히라노초의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생활하며, 신타로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를 맺어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40]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여자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40]
2. 5. 청나라 망명과 암살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암살 위협을 받았다. 이홍장이 상하이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하자, 김옥균은 이를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나기 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의 일기를 가까운 일본인 친구 고야마에게 맡겼다. 1893년 홍종우(洪鍾宇)는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김옥균의 항해 소식을 듣고, 같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홍종우는 상하이로 가는 도중 권총으로 김옥균을 살해했다.홍종우는 귀국 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에 인도되어 훼손되었다. 시신의 일부는 반역죄에 대한 전통적인 굴욕과 처벌로 한국의 여러 마을에서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1]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유해 처리에 대해 청나라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에서 김옥균을 추모하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그의 묘비를 세웠다. 김옥균 암살 사건은 일본이 청일전쟁의 발발 원인 중 하나로 제시했다.
2. 5. 1.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의 거사 탄로
김옥균의 주색(酒色) 방종은 홋카이도 유배 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40]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40]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일본어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40]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 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41]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41]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 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과 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2. 5. 2. 암살 위협과 청나라 망명
1885년 말 김옥균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 모여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42] 이들의 조선 정벌 주장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했다.이 일은 일본의 대륙 침략 세력의 선봉대가 기도한 음모로 김옥균은 전혀 알 리가 없었지만,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42]
이 이야기가 일본은 물론 청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져, 청나라의 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단단히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은근히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42] 그러나 조선 정부가 그에게 자객을 보내 제거하려는데 그를 내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반대로 일본 추방은 모면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암살 위협 속에 살았다. 그러나 이홍장의 초청으로 상하이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받자,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 5. 3. 망명 만류와 암살자의 잠입
박영효는 김옥균의 방탕한 생활을 싫어하며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했다.[40]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40]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했지만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했다.[41] 조선에서는 박영효의 문벌이 높아 김옥균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두 사람 사이가 멀어졌다.[41]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제외하고 서광범, 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간 이유도 이들의 기질 차이 때문이라고 보았다.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했으며,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오가사와라, 홋카이도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도쿄로 돌아왔다.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으로 자객을 보냈다. 첫 번째 자객인 장은규는 김옥균의 민첩한 대응으로 암살에 실패하고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다. 두 번째 자객인 지운영은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 언론에 알려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나라 리훙장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일본 신문에 게재하였다.
청나라의 항의로 김옥균의 발언이 외교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1886년 7월 그를 오가사와라섬에 강제 연금했다.[40] 1888년 홋카이도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 석방되었다.[40] 오가사와라섬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 엔지로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하이에서 죽을 때까지 동행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암살 위협 속에 살았다. 이홍장의 초청으로 상하이(Shanghai)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받자,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893년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홍종우(洪鍾宇)는 김옥균의 항해 소식을 알게 되었고, 같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상하이로 가는 도중, 그는 권총으로 김옥균을 살해했다. 홍종우는 한국으로 돌아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에 인계되었고, 시체는 훼손되었다. 시신의 일부는 반역죄에 대한 전통적인 처벌로 한국의 여러 마을에서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1]
2. 5. 4. 암살 과정
1894년 2월 리훙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3월 초 오사카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과 홍종우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존경해 왔기 때문에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1]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옥균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이일직은 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1]

그해 2월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묵고 있던 도쿄 인근의 휴양지 하코네로 찾아갔을 때 후쿠자와는 중국행을 상의하는 김옥균에게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김옥균은 '호랑이 굴' 운운하며 만류를 뿌리쳤다. 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고 오사카 역까지 동행한 도야마가 중국행을 걱정하여 그에게 상하이행의 이유를 묻자 김옥균은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호언했다.[34]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34]
김옥균은 그동안 위험하다며 중국행을 만류하는 일본인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호랑이 굴' 비유로 답하고 있었다.[33] 3월 10일 오사카에 도착한 김옥균은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중국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 도쿄에서 즐겨 치던 당구도 치고 골동품점에 들려 중국에 가지고 갈 선물도 샀다.[33] 3월 10일 오사카 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쓰루와는 14일과 16일 두 차례 다시 만났다.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의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 말기 고관인 홍종우[8]에게 회전식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김옥균의 시체는 청나라 정부에 의해 군함 함정호(咸靖號)로 조선으로 운반되어 사후 사형 선고를 받고 능지처참(凌遲刑)을 당한 후 사지가 팔 토막으로 잘리고, 몸통은 강에 버려졌으며, 머리는 경기도(京畿道) 죽산, 한쪽 손과 한쪽 발은 경상도(慶尙道), 다른 손발은 함경도(咸鏡道)에 내걸렸다.[9]
2. 6. 최후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개화파 성향의 인물로, 뛰어난 프랑스 요리 솜씨로 김옥균의 환심을 샀다.[43]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신뢰했고, 홍종우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했다. 1894년 3월 28일, 홍종우는 상하이의 뚱허양행(東和洋行) 호텔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하여 암살했다.[43] 김옥균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4시경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4세였다.홍종우는 청국 측 경찰서에서 자신이 김옥균을 제거한 이유를 변론하면서, 첫째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공무 수행이며, 둘째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3]
윤치호는 상하이 체류 중 김옥균에게 홍종우가 스파이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김옥균은 이를 믿지 않았다.[24][45] 김옥균 암살 소식을 접한 윤치호는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김옥균의 암살은 청일 전쟁의 기화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 암살을 예측했지만,[2] 암살을 막지는 않았다.
김옥균 사후, 그의 유해는 일본으로 옮겨져 도쿄 아오야마 묘지(青山霊園)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박영효가 쓴 글과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2. 7. 부관참시와 복권
1894년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후,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되었다.[24][44][45] 이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목을 베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토막 내어져 팔도에 효수되었다.김옥균 암살 이후, 일본 언론은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 암살을 예측했지만,[2] 막지는 않았다. 김옥균의 죽음은 동북아 정세의 외교 문제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이를 청일전쟁을 향한 국민감정을 조장하는 데 이용했다.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외국에 보도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 등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자유주의자들은 분노하였다. 일본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열고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규탄했다.
1895년 11월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김옥균은 사면·복권되었다.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순종 때인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45] 시호는 충달이다.
2. 7. 1. 공개 부관참시
1894년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후,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되었다.[24][44][45] 이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목을 베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토막 내어져 팔도에 효수되었다.2. 7. 2. 일본의 규탄
1894년 김옥균이 암살당하자, 일본 언론은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사신보는 4월 28일자에 김옥균의 시신이 양화진에서 참혹하게 훼손된 소식을 전하며, 이를 고종과 민영익의 복수극으로 묘사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 암살을 예측했지만,[2] 막지는 않았다.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 문제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이를 청일전쟁을 향한 국민감정을 조장하는 데 이용했다.
2. 7. 3. 복권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외국인 기자들과 프랑스인, 일본인, 미국인 등에 의해 외국으로 보도되었다. 이같은 조선 정부의 조처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48] 후쿠자와 유키치 등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는 증폭되었다. 이들은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와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하는가 하는 주장을 펼쳤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조선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하였다.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러나 김옥균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섰다.[48]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가졌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1894년 4월 21일 간다니시키 정(神田錦町)의 금휘관(錦輝館)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48],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4월 23일에는 일본 정계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 이사쿠사 혼간지에서 '대외경파간친회'라는 모임을 열었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한다.[48]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 묘와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비문은 유길준이 쓴 것이다.[49] 훗날 역사가 겸 작가 신봉승은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은 조선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오가사와라섬 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 아픔이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1895년 11월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순종 때인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45] 시호는 충달이다.
3. 사후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는 김옥균이 생존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더라면 한일 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한일 병합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51] 김옥균의 묘소는 한일 합방 이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로 이전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개화하려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선각자로 추모하였다. 1920년 초부터 김옥균을 추모하는 여러 추도 모임이 개최되었고, 1935년에는 김옥균을 기리는 단체를 조직하자는 일본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그와 친한 친구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고균회를 결성하고 기관지로 '고균'을 발행했다. 고균회의 초대 이사장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였다. 김옥균이 일본인 여인에게서 얻은 딸 사다는 이 고균회의 회합과 고균회가 주관하는 각종 모임에 참석, 종종 비와를 읊고 연주하였다. 사다는 도요바시 출신 언론인이자 인쇄업자인 스즈키 이치고로(鈴木市五郎)와 결혼했는데, 일부 김옥균 추종자들과 관람객들이 그녀에게 사례금과 봉투를 준 것이 스즈키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51]
1926년 10월 10일에는 경성박문서관에서 민태원에 의해 《오호 고균거사 - 김옥균실기》가 출간되었으나 곧 판매금지조치 되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이 서적은 해방 이후에 공식 판매되었고, 1947년에는 민태원에 의해 《갑신정변과 김옥균》이 출간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야 김옥균이 역적이라는 시각이 사라지고 혁명가라는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51]
1920년대 말 야담운동가 김진구는 “김옥균 전집 간행회”를 조직하고, 잡지에 김옥균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을 한국근대사의 ‘劃時期的一大革命’(획시기적일대혁명)으로 묘사하고, ‘민중본위’라 하면서 민의 열렬한 희망, ‘排淸獨立’(배청독립), ‘開化進取’(개화진취)를 갑신정변의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학생》지에 김옥균의 최후를 장렬하게 극화한 희곡 ‘대무대의 붕괴’를 연재한 후 조선시대극연구회를 만들어 순회 공연하였다. 시대극을 민인 계몽의 수단으로, 위인을 대중역사 교육의 소재로 삼아 김옥균 등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물들을 영웅화해, 김옥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대신 혁명가로 부각시켰다.[51] 1989년 2월 22일 공주군청의 주도로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현 공주시 정안면) 소재 생가 터를 정비하고, 복원된 생가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김옥균의 처자(妻子)에 대해서는 처형되었다[12]는 소문과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고, 행방은 묘연했다. 일본은 정탐꾼을 파견하여 수색을 시작했다. 1894년 12월, 당시 동학 농민 운동(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하던 일본군이 충청도 옥천 근처에서 김옥균의 처(妻)와 여자(女子)를 우연히 발견하여 보호했다. 그 때 두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후에 경성으로 호송되어 박영효·서광범이 맡게 되었는데, 처자(妻子)는 김옥균이 암살된 사실도 몰랐다.[13]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2월 23일과 26일의 논설, 「조선독립당의 처형(전·후)」에서 이씨 조선이 잔혹한 방법인 능지형으로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 등 개화파를 삼족을 멸하는 처형을 하고 시체를 내걸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의 체제를 맹렬히 비난하며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명한 탈아론도 이 사건 약 3주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히라야마 요는 「탈아론」의 내용이 「조선독립당의 처형(후편)」의 요약이 되어 있다고 하여 탈아론에 대한 영향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15]
일본 체류 중에는 도야마 미쓰루의 소개로 혼인보 슈에이와 바둑을 통해 깊은 교류가 있었고, 혼인보 슈에이는 홋카이도·오가사와라 제도에도 위문을 방문했다. 또 죽기 직전에 친구에게 준 바둑판(부목의 판)은 1976년에 일본기원에 기증되었지만, 사후 100년이 지난 1995년에 한국기원에 증정되었다.
암살된 날, 친했던 도야마 미쓰루의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16]
암살자 홍종우는 체포 후 조선 정부의 협상으로 석방되었다. 귀국 후 고종으로부터 격찬을 받고 수구파 일원으로 요직에 취임하여 개화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압력을 강화함에 따라 1903년에 실각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913년에 빈곤 속에서 죽었다.
김옥균의 묘가 있는 아오야마 외인묘지에는 월 590엔의 관리비가 부과되지만, 5년 이상 체납했기 때문에 2004년에 도쿄도로부터 철거 통고가 나왔다. 통고에 놀란 주한 한국대사관은 체납된 관리비를 대납하여 이전의 위기를 면했다.[17]
4. 사상과 신념
박규수, 오경석 등에게서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옥균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자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하고 비판했지만, 족벌 체제로 변질된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로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했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면 조선 스스로 개항하여 외국의 선진 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은 처음에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히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준비하게 된다.
5. 평가와 비판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 등 일부 단체에서는 그를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재평가하기도 한다.[52][53][54]
김옥균에 대한 비판으로는 갑신정변 당시 일본에 의존하여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있다. 또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고 정변 주체 세력이 약했으며, 조선 내 청나라 등 수구파 세력의 영향력을 간과했다는 점도 지적된다.[14]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이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 등 개화파를 잔혹하게 처형한 것을 강하게 비난하며, 김옥균 등의 죽음을 애도했다.[14] 히라야마 요(平山洋)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脱亞論)이 「조선독립당의 처형(후편)」의 요약이라고 분석하며 탈아론에 대한 영향이 있다고 평가했다.[15]
김옥균 암살 후, 암살자 홍종우는 조선 정부의 비호 아래 석방되어 요직에 등용되었으나, 을미의병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실각하여 유배 생활 끝에 사망했다.[16]
도쿄도 아오야마 외인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는 관리비 체납으로 철거될 뻔했으나, 주한 대한민국 대사관이 체납된 관리비를 대납하여 위기를 넘겼다.[17]
5. 1. 긍정적 평가
김옥균은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25] 갑신정변 실패 이후에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 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 제도와 문벌 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52][53][54]5. 2. 부정적 평가
갑신정변 당시 일본에 의지하여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비판받고 있다. 또한 사전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고 정변 주체 세력이 허약했던 점, 조선 내 청나라 등 수구파 후견 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역시 비판받는다.[14]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이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 등 개화파를 잔혹하게 처형하고 시체를 내건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한성부에 출현하였도다. 나는 이 나라를 보고 야만이라고 평하느니 차라리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고 말하고 싶은 자이다."라고 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4]
히라야마 요(平山洋)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脱亞論)이 「조선독립당의 처형(후편)」의 요약이라고 분석하며 탈아론에 대한 영향이 있다고 평가했다.[15]
김옥균 암살 후, 암살자 홍종우는 체포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협상으로 석방되었다. 귀국 후 고종에게 격찬을 받고 수구파 일원으로 요직에 취임하여 개화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을미의병 이후 일본의 압력 강화로 1903년에 실각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913년에 빈곤 속에서 사망했다.[16]
도쿄도 아오야마 외인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는 월 590엔의 관리비가 부과되지만, 5년 이상 체납으로 2004년 철거 통고를 받았다. 주한 대한민국 대사관이 체납된 관리비를 대납하여 이전 위기를 모면했다.[17]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김교근(金喬根) | 광주 목사, 증직 이조참판 동지돈녕부사 |
아버지 | 김병기(金炳基) | 형조참의, 좌찬성 |
어머니 | 풍양 조씨 | 조영하, 조성하의 당고모, 신정왕후의 사촌 |
어머니 | 전주 이씨 | |
생부 | 김병태(金炳台) | |
생모 | 은진 송씨 | |
누이 | 김균이(? ~ 1944년) | |
매제 | 송병의 | |
동생 | 김각균(金珏均) | |
부인 | 기계 유씨 | 유영환의 손녀 |
딸 | (이름 미상) | |
아들 | 김영진(金英鎭, 1876년 5월 26일 ~ 1947년 1월 16일)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평안도 관찰사 |
손자 | 김성한(金聲漢, 1918년 ~ ?) | |
첩 | 송씨 | |
부인 | 스기타니 오타마(小玉) | |
부인 | 마쓰노 나카(松野なか) | |
딸 | 사다 | |
사위 | 스즈키 이치고로(鈴木市五郎) | |
외손녀 | 히데코(1910년 - 1937년 6월 6일) | |
내연녀 | (이름 미상) | |
아들 | (이름 미상) | |
첩 | (이름 미상) | |
서자 | 김학진(金學鎭) |
7. 저술
8. 대중 매체
연도 | 작품명 | 방송사 | 배역 | 비고 |
---|---|---|---|---|
1981년 | TV문학관 '횃불' | KBS | 김흥기 | |
1982년 | 풍운 | KBS | 신동훈 | |
1982년 | 한미수교 100주년 드라마 서재필 | MBC | 오지명 | |
1990년 |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 MBC | 김동현 | |
1994년 | 맞수 | MBC | 한진희 | |
1994년 | 새야 새야 파랑새야 | MBC | 임병기 | |
1995년 | 찬란한 여명 | KBS | 정보석 | |
2001년 | 명성황후 | KBS | 이병욱 | |
2010년 | 제중원 | SBS | 유태웅 | |
2014년 | 조선 총잡이 | KBS | 윤희석 | |
2013년, 2015년, 2016년 | 잃어버린 얼굴 1895 | 뮤지컬 | 김도빈 | |
2016년, 2021년, 2023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강필석 | |
2016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이동하 | |
2016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임병근 | |
2021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최재웅 | |
2021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송원근 | |
2021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노윤 | |
2023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고훈정 | |
2023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조형균 | |
2023년 | 곤 투모로우 | 뮤지컬 | 최재웅 |
- 안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왕도의 개에서 김옥균이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AMERICANS IN EASTERN ASIA, A Critical Study of 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with reference to China, Japan and Korea in the 19th Century
https://archive.org/[...]
The Macmillan Company
2023-09-19
[2]
뉴스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 사건
http://www.ohmynews.[...]
2005-11-24
[3]
논문
金玉均の政治亡命と日本
https://hdl.handle.n[...]
1976-03-20
[4]
웹사이트 #추정
없음
[5]
간행물 #추정
京城小事変並ニ栗野書記官同地ヘ出張
1885-12-27/1886-01-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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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7]
간행물 #추정
없음
1886-1888
[8]
뉴스
今日の歴史(2月22日)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09-02-22
[9]
웹사이트 #추정
없음
[10]
웹사이트 #추정
없음
[11]
웹사이트
宮崎滔天 三十三年の夢
http://1000ya.isis.n[...]
2006-12-30
[12]
서적
福澤諭吉全集
s:朝鮮独立党の処刑
岩波書店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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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04-16/189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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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福沢諭吉の真実
[16]
서적
快傑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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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誠堂
1926
[17]
뉴스
改葬免じた東京の金玉均墓地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WEB日本語版
2005-05-23
[18]
웹사이트 #추정
없음
[19]
뉴스
제9장 조선왕조의 울릉도·독도 재개발 정책
http://monthly.chosu[...]
월간 조선
2011-06
[20]
뉴스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5-18
[21]
서적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22]
웹사이트 #추정
없음
[23]
뉴스
공주시, `김옥균 선생 유품 찾습니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6-01-24
[24]
서적
인물로 보는 조선사
[25]
서적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도서출판 기파랑
2008-03-24
[26]
웹사이트 #추정
없음
[27]
웹사이트 #추정
없음
[28]
서적
역사비평 제17호: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29]
서적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인물
백산출판사
1999
[30]
서적
조선왕조 500년/24. 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2010
[31]
서적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너머북스
[32]
웹사이트 #추정
없음
1942-07
[33]
서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2009
[34]
뉴스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3)
http://shindonga.don[...]
신동아
[35]
뉴스
조선 망명객 설움 달래준 日 게이샤의 순정야화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11-29
[36]
서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2009
[37]
서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2009
[38]
서적
조선명인전 3
도서출판 일빛
2005
[39]
서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2009
[40]
웹사이트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5)
http://shindonga.don[...]
[41]
서적
개화기의 인물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42]
서적
조선명인전 3
도서출판 일빛
2005
[43]
뉴스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 사건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11-24
[44]
서적
인물로 보는 조선사
[45]
서적
친일정치100년사
동풍
1995
[46]
뉴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https://news.naver.c[...]
쿠키뉴스
2005-11-25
[47]
간행물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48]
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1996
[49]
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1996
[50]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blog.daum.net[...]
2011-08-21
[51]
저널
일제 강점기 김진구(金振九)의 활동과 내선일체론
2012-07-05
[52]
웹사이트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https://archive.toda[...]
[53]
웹사이트
토론이 있는 인터넷신문 - 데일리안
http://www.dailian.c[...]
[54]
웹사이트
donga.com[뉴스]-[사설]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
http://www.donga.com[...]
[55]
웹사이트
한국사상가 평전 : 김옥균
https://kiss.kstudy.[...]
[56]
웹사이트
김옥균선생유허(金玉均先生遺墟)
https://www.grandc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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