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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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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을 거쳐 1852년 프랑스 제2제정을 수립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망명 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쿠데타를 일으켜 제2제정을 수립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펼쳤다. 대외적으로는 크림 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 확장을 추진했지만, 멕시코 출병 실패와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로 몰락했다. 망명 생활 중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경제 발전과 파리 도시 재건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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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50대 초반의 나폴레옹 3세가 집무실에서 초상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나폴레옹 3세 초상화 (1865년경). 외제니 황후가 가장 좋아했던 초상화.
칭호프랑스 황제
본명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출생1808년 4월 20일
출생지파리, 프랑스 제1제국
사망1873년 1월 9일
사망지치즐허스트, 켄트 주, 잉글랜드
매장1888년
매장지세인트 마이클 수도원 (팜버러)
배우자외제니 데 몽티호 (1853년 결혼)
자녀나폴레옹 외젠, 황태자
왕가보나파르트 가문
아버지루이 보나파르트
어머니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종교프랑스의 가톨릭교
나폴레옹 3세 서명
나폴레옹 3세 서명
통치
프랑스 황제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이전 통치자본인 (프랑스 대통령으로서)
이후 통치자아돌프 티에르 (프랑스 대통령으로서)
내각 수반에밀 올리비에
샤를 쿠쟁몽토방
대통령
프랑스 대통령1848년 12월 20일 – 1852년 12월 2일
총리오딜롱 바로
알퐁스 앙리 도트풀
레옹 포셰
부통령앙리 조르주 불레 드 라 뫼르트
이전 대통령루이 외젠 카베냐크 (집행 권력 수반으로서)
이후 대통령본인 (프랑스 황제로서)
보나파르트 가문 수장
재임 기간1846년 7월 25일 – 1873년 1월 9일
이전 수장루이 보나파르트
이후 수장루이 나폴레옹, 황태자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제2제국
군종프랑스군
복무 기간1859년–1870년
계급프랑스군 총사령관 (1848–1870)
참전 전투이탈리아 통일 전쟁
마젠타 전투
솔페리노 전투
보불전쟁
자르브뤼켄 전투
스당 전투(항복)

2. 어린 시절과 망명 생활

4명의 나폴레옹. 우측 하단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다. 아버지는 1806년부터 1810년까지 네덜란드 왕을 지냈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주로 망명지에서 보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 몰락 후, 보나파르트 가문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어머니 오르탕스는 스위스에 정착하여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을 매입했다. 낭만적인 성격의 오르탕스는 어린 루이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1세의 천재성을 열렬히 찬양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1821~1823) 후, 가정교사에게서 교육받았다.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의 친척들을 방문하며 부르봉 왕정복고의 희생자들과 교류하고, 오스트리아와 교황 지배하의 이탈리아인들의 억압받는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역사에 큰 흥미를 가졌던 그는 국민의 자유라는 이념에 고무되었다. 1830년 로마 교황령 정부 전복 음모와 1831년 중부 이탈리아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형이 사망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2]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8년 4월 19일에서 20일 밤 파리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1806년부터 1810년까지 홀란드의 왕을 지냈다. 그는 프랑스 제1제국 선포 이후 태어난 최초의 보나파르트 왕자였다.[2]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후계자를 낳기 위해 루이와 오르탕스의 결혼을 제안했고, 나폴레옹 1세는 이에 동의했다. 루이와 오르탕스는 어려운 관계였고, 짧은 기간 동안만 함께 살았다. 그들의 첫 아들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는 1807년에 사망했고, 별거 상태였지만 둘째 아들 나폴레옹 루이가 있었음에도 셋째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다. 1807년 8월 12일부터 툴루즈에서 짧은 기간 동안 결혼 생활을 재개했고, 루이 나폴레옹은 예정보다 3주나 일찍 태어났다. 오르탕스에게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빅토르 위고를 포함한 루이 나폴레옹의 적들은 그가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적자라고 동의한다.

루이 나폴레옹은 1810년 11월 5일 퐁텐블로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 나폴레옹 황제가 그의 대부, 마리 루이즈 황후가 그의 대모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리에 없었다. 일곱 살 때,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삼촌을 방문했다. 나폴레옹은 그를 창가로 들어 올려 아래 카루젤 광장에서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게 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를 위해 떠나기 직전에 말메종 성에서 가족들과 함께 삼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보나파르트 왕조의 모든 구성원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후 망명을 강요받았다.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은 엑스레뱅에서 베른으로, 다시 바덴바덴으로 이사했고, 마지막으로 스위스 투르가우 주의 아레넨베르크에 있는 호숫가 저택으로 이주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유년기와 망명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스위스 아레넨베르크의 호숫가 저택

2. 2. 망명 생활과 교육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다. 아버지는 1806년부터 1810년까지 네덜란드 왕을 지냈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주로 망명지에서 보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 오르탕스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스위스에 정착하여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을 사들였다. 낭만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어린 루이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1세의 천재성을 열렬히 찬양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독일아우크스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1821~1823) 뒤,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루이는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면서 부르봉 왕정복고의 희생물이 된 다른 망명자들과 친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교황의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인들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는 역사에 가장 큰 흥미를 가졌고 국민의 자유라는 이념에 고무되었다. 1830년에 있었던 실패로 끝난 로마 교황령 정부 전복음모와 1831년에 있었던 중부 이탈리아 반란에도 가담했는데, 이 반란에서 형이 죽었다. 그는 어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개입한 덕택에 오스트리아군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15세가 되자 그의 어머니 오르탕스는 로마로 이사했고, 그곳에는 보나파르트 가문이 소유한 별장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고대 유적지를 탐험하며, 이후 그의 삶에서 자주 사용하게 될 유혹과 로맨틱한 관계의 기술을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아버지로, 그는 수년간 그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형 나폴레옹 루이와 재회했고, 함께 오스트리아의 북부 이탈리아 지배에 맞서 싸우는 비밀 혁명 단체인 카르보나리에 가담했다. 1831년 봄, 루이 나폴레옹이 23세가 되자 오스트리아와 교황 정부는 카르보나리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두 형제는 도망쳐야 했다. 도주 중에 나폴레옹 루이는 홍역에 걸렸다. 그는 1831년 3월 17일 형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2] 오르탕스는 루이 나폴레옹과 합류하여 함께 경찰과 오스트리아 군대를 피했고, 마침내 프랑스 국경에 도착했다.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은 변장을 하고 파리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는 샤를 10세의 구 체제가 막 무너지고, 7월 왕정의 유일한 군주인 루이 필리프 1세의 더 자유로운 체제로 대체되었다. 그들은 1831년 4월 23일 파리에 도착하여 방돔 광장의 호텔 뒤 홀란드에 "해밀턴"이라는 이름으로 거주했다. 오르탕스는 국왕에게 프랑스에 머물 수 있도록 요청하는 청원을 썼고,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에서 일반 병사로 자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새 국왕은 오르탕스와 비밀리에 만나는 데 동의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열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국왕은 마침내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이 짧고 은밀하게 머무는 조건으로 파리에 머물도록 동의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단지 이름을 바꾸기만 하면 프랑스 육군에 입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이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사망 10주년이 되는 5월 5일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의 호텔 체류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를 추모하는 대규모 시위가 그들의 호텔 앞 방돔 광장에서 열렸다. 같은 날, 오르탕스와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파리에 잠시 머무는 동안 루이 나폴레옹은 보나파르트주의 정서가 프랑스 국민과 군대 사이에서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잠시 영국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망명했다.

2. 3. 이탈리아 통일 운동 참여

루이 나폴레옹은 1830년 로마 교황령 정부 전복 음모와 1831년 중부 이탈리아 반란에 가담했으나, 이 반란들은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그의 형이 죽었고, 루이 나폴레옹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2]

그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 혁명 단체에 가입하여 오스트리아의 북부 이탈리아 지배에 맞서 싸웠다. 1831년 봄, 루이 나폴레옹이 23세가 되자 오스트리아와 교황 정부는 카르보나리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루이 나폴레옹과 그의 형은 도망쳤으나, 도주 중에 형 나폴레옹 루이는 홍역에 걸려 1831년 3월 17일 사망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어머니와 함께 경찰과 오스트리아 군대를 피해 프랑스 국경으로 피신했다.

3. 정치 활동과 제2공화국 대통령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붕괴되자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귀국하여, 헌법 제정 의회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2]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높은 인지도, 풍부한 자금력, 그리고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 양 왕당파의 소극적인 지지 등에 힘입어 7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시절의 루이 나폴레옹.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48년 선거프랑스의 대통령1대보나파르트당74.3%5,434,226표1위



그러나 제2공화국의 대통령 권력은 약했고, 공화파가 장악한 국민 의회에 의해 제정 복고는 제약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초기에는 양 왕당파와 가톨릭으로 구성된 우익 정당 질서당과의 연계를 통해 이를 타개하려 했다. 그 일환으로 로마 공화국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한 교황의 귀환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를 침공했다. 이에 반발한 좌익 세력이 봉기했지만 진압되었고, 이후 질서당은 국민 의회를 장악하며 루이 나폴레옹과의 대립각을 세웠다.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 의회로부터 정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군대와 경찰을 포섭하는 등 신중하게 준비하여 1851년 12월 쿠데타를 감행했다. 질서당 간부들을 체포하고 공화주의자들까지 체포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314][315][316][317]

1852년 1월에는 대통령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1852년 헌법을 제정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331][332] 같은 해 12월에는 국민 투표를 거쳐 황제 즉위를 선언하고 제2 제정을 수립하여, '나폴레옹 3세'로 불리게 되었다.

3. 1. 정치 활동 시작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루이 나폴레옹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로 군사훈련을 마치고, 경제와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공부했다. 그는 스스로 직접 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해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치에 대한 명상》(Rêveries politiques, 1832)이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황제가 있어야만 프랑스에 영광과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자신의 이념을 선전하는 한편 추종자들이 모이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이므로 프랑스군의 지지를 받으리라 믿고,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1836년 10월 30일 스트라스부르 수비대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필리프 국왕은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가 1837년 초 그의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다시 불러들였다. 1838년에는 프랑스의 압력으로 스위스에서도 쫓겨나 결국 영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1839년에 그는 《나폴레옹 이념》(Des idées napoléoniennes)을 출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나파르트 주의는 프랑스 제1제정 때 혜택을 입었던 사람들의 추억거리이거나, 따분한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낭만적인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소책자를 통해 보나파르트 주의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영감에 따르기도 했다. 그에게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합리적 고찰과 신념이 낳은 것이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의 주역은 신의 소명을 받아 진보를 실현하는 위대한 인물이며, 이 소명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나폴레옹 1세야말로 진정 위대한 인물이었다"라고 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과업을 완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1836년 쿠데타 실패 당시의 루이 나폴레옹의 에칭 초상화


루이 나폴레옹은 "나는 때때로, 내가 섭리의 지원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창조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손에 조국의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만약 내가 틀렸다면, 나는 쓸모없이 죽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옳다면, 섭리는 나에게 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할 것입니다."[68] 그는 파리에 있을 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보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백일천하 동안 1815년에 그랬던 것처럼 파리로 진격하면 프랑스가 일어나 그와 합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국왕 루이 필리프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83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쿠데타를 시작하는 루이 나폴레옹


그는 봉기를 스트라스부르에서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한 연대 대령이 그 대의에 동참했다. 1836년 10월 29일, 루이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의 제복을 입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고, 연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프레펙처를 점거하고 주지사를 체포했다. 불행히도 루이 나폴레옹에게, 주둔지를 지휘하는 장군이 탈출하여 충성스러운 연대를 불렀고, 이들이 반역자들을 포위했다. 반역자들은 항복했고 루이 나폴레옹은 스위스로 도망쳤다.[97]

1840년 8월 6일 불로뉴 근처에 56명을 거느리고 상륙했으나 그곳 수비대가 합세하지 않아 실패했다. 체포당해 재판에 회부되어 "성채 안에 영원히 가두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함(Ham)의 대학'(그가 갇혔던 성의 이름)에서도 앞으로 황제가 될 경우를 생각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 야당 세력들과 서신 왕래를 했고 이들이 내는 신문에 글을 싣기도 했다. 몇 개의 소책자도 썼는데 그 가운데 《빈곤의 퇴치》(''Extinction du paupérisme'', 1844년)는 좌파의 지지를 얻었다. 1846년 5월 25일 마침내 탈출에 성공해 영국으로 도망쳤고,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머물렀다.

루이 나폴레옹은 망명 생활 동안 널리 인기를 얻었으며, 1836년 쿠데타 실패 이후 그의 인기는 프랑스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그를 보나파르트 전설의 상속자로 만들었고, 그의 홍보를 증가시켰다.[2]

루이 필리프 국왕은 스위스 정부에 루이 나폴레옹을 프랑스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스위스는 그가 스위스 군인이자 시민임을 지적하며 그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국왕은 스위스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스위스 호스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발적으로 스위스를 떠났다. 다른 반역자들은 알자스에서 재판을 받았고,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먼저 런던으로 여행했고, 그 다음 브라질 제국으로, 그리고 뉴욕시로 갔다. 그는 뉴욕 사회의 엘리트들과 작가 워싱턴 어빙을 만났다. 그는 더 많은 미국을 보기 위해 여행하던 중, 어머니가 매우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는 1837년 8월 5일, 그의 어머니가 사망할 때 아레넨버그에 도착하여 함께했다. 그녀는 1838년 1월 11일, 그녀의 어머니 옆 프랑스 뢰이유에 묻혔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입국이 허용되지 않아 참석할 수 없었다.[107]

루이 나폴레옹은 1838년 10월 런던으로 돌아와 새로운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고, 17명의 하인과 몇몇 옛 친구, 공모자들과 함께 집을 얻었다. 그는 런던 사회의 환영을 받았고, 벤자민 디즈레일리, 마이클 패러데이를 포함한 당시의 정치 및 과학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또한 영국의 경제에 대한 상당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나중에 파리의 불로뉴 숲을 만들 때 모델로 사용한 런던 하이드 파크를 산책했다.[74] 그는 1838-39년 겨울을 워릭셔의 로열 리밍턴 스파에서 보냈다.[4]

런던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던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권력을 잡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40년 여름, 그는 무기와 군복을 구입하고 선언문을 인쇄했으며, 약 60명의 무장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를 모아 '에든버러-캐슬'이라는 배를 빌렸다. 그는 1840년 8월 6일, 해협을 건너 불로뉴 항구로 항해했다. 이 쿠데타 시도는 스트라스부르 반란보다 훨씬 더 큰 실패로 끝났다. 반란군은 세관원에게 저지당했고, 수비대 군인들은 합류를 거부했으며, 반란군은 해변에서 포위되어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언론 모두 루이 나폴레옹과 그의 음모를 조롱했다. 신문 '르 즈르날 데 데바'는 "이것은 코미디를 능가한다. 미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두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자신의 대의명분에 대한 웅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북부 솜 데파르트망의 함 요새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3. 2. 대통령 당선 (1848년)



1848년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파리시로 갔으나 임시정부에 의해 추방당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소규모 보나파르트 당을 조직하여 그를 제헌의회 의원 후보로 추대했고, 6월 4일 4개 주에서 당선되었으나 상황 안정을 위해 사양했다. 9월에 재출마하여 5개 주에서 당선된 후 파리에 도착하여 대통령 선거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는 질서당(Parti de l'ordre)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부르봉 왕가, 루이 필리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우파 정당이었는데, 적합한 후보가 없어 대중적 인기를 가진 루이를 지지하였다.

루이는 제헌의회 의원 선거처럼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다.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고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겠다고 공약했다. 모든 계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며,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지원'을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다. 1848년 12월 선거에서 543만 4,226표를 획득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48년 선거프랑스의 대통령1대보나파르트당74.3%5,434,226표1위


3. 3. 대통령 시절 (1848년 ~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이 된 후, 1849년 5월 입법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질서당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새 정부를 구성하여 원정군을 보내 교황청이 로마를 되찾도록 지원했다. 프랑스 내에서는 공화파의 활동을 억제했다. 그러나 국민의회에서 그를 지지하는 의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헌법상의 권한을 활용하여 행정부와 군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임명했다. 1850년에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1851년 경제 악화를 구실로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유도하며, '강력한 인물'로서 자신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2]

3. 4. 쿠데타와 제2제정 수립 (1851년 ~ 1852년)

1851년 12월 2일 이른 아침, 루이 나폴레옹과 내무 장관 드 모르니의 이름으로 의회 해산과 보통 선거 부활이 공포되었고, 동시에 경찰이 주요 의원들의 침소를 급습하여 잇달아 체포했다. 티에르, 상갈니에 장군, 카베냐크 장군 등이 체포되었다.[314] 파리 10구의 구청에서는 의원 200명 이상이 농성했으나, 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되었다.[315][316]

의원 중에는 파리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12월 2일에는 그러한 봉기는 발생하지 않았다.[317] 그러나 12월 3일에는 좌익 의원들이 일부 노동자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여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봉기를 시작했고, 그 진압 과정에서 보댕 의원이 총살되었다. 12월 4일에는 발포에 동요한 군대가 민중을 향해 발포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318] 루이 나폴레옹은 이 참극을 듣고 곤혹스러워하며 비밀 투표 부활을 알리는 전단지 부착을 철저히 지시했다.[319]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때의 학살은 1871년 제정 붕괴까지 나폴레옹 3세에게 피의 이미지를 안겨주었다.[320][321]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1년 12월 20일과 21일에 실시된 쿠데타 신임 투표에서는 743만 표의 찬성, 64만 표의 반대, 170만 표의 기권으로 압도적인 신임을 받았다.[322][323]

드 모르니는 1851년 말부터 1852년 초에 걸쳐 공화주의자를 탄압했다. 이 쿠데타는 12월 2일에 발동된 직후에는 의회 내 우익의 질서당을 겨냥한 것이었으나, 이후 표적은 좌익으로 전환되었다.[324] 결국 "최고의 제정 지지자"가 될 것은 우익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는 하더라도 억눌러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격렬한 좌익 탄압을 보고 질서당도 루이 나폴레옹에 대한 경계를 풀고 그의 쿠데타를 지지하게 되었다.[325] 우익과 좌익의 대립을 부추겨 반 쿠데타 세력을 분열시킨 것이다.[326]

이 쿠데타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2만 5000명이 체포되었고, 약 1만 명이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로 유배되었다.[327] 빅토르 위고벨기에로 망명했다.[328][329][330]

쿠데타에 성공한 루이 나폴레옹은 숙부 나폴레옹이 제정한 공화력 8년 헌법을 모델로 한 헌법 초안을 만들게 하고, 1851년 12월 21일과 22일에 국민투표에 부쳐 92%의 찬성표를 얻은 뒤, 1852년 1월 14일에 새 헌법으로 공포했다.[331][332] 이로 인해 대통령의 임기는 10년으로 연장되었다. 대통령에게는 행정권 전부와 입법권 일부가 부여되었다. 입법 기관은 법률 초안을 작성하는 국무원, 국무원에서 초안된 법안을 심의하는 입법원(법안 수정에는 국무원의 허가가 필요), 입법원을 통과한 법률이 헌법에 적합한지 확인하는 원로원 (위헌으로 판단할 경우 법률을 폐지할 수 있다. 또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이곳이 입법원의 역할을 수행한다)의 3개로 나뉘었다.[333][334][335][336][337][338]

국민의 보통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입법원뿐이며, 국무원과 원로원은 대통령이 임명한 자들로 구성되었다.[338][339][340][341][337] 즉, 법률의 초안 작성과 최종 확인을 대통령이 장악했다.[342]

이 3개 기관을 통과한 법률이라도 대통령에게 거부권이 있었고,[343] 대통령은 제약 없이 대통령령을 자유롭게 발할 수 있었다.[342] 대통령은 입법원 해산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입법원 측에는 행정을 제한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342][344] 사법고등법원은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음모"에 대해 재판 없이 형벌을 부과할 수 있었다.[345]

이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절대 군주와 다름없는 독재권을 얻었다.[342][346]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 직후 곧바로 제정 복고를 하는 것에 신중했으며, 우선 여론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드 페르시니는 "본인이 싫다고 해도 황위에 즉위시키겠다"고 공언했다.[347]

1852년 1월 23일,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령을 발령하여 오를레앙 가의 프랑스 국내 재산을 몰수했다.[348] 오를레앙파였던 드 모르니는 이 대통령령에 반발하여 내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드 모르니 때문에 자신의 새 체제가 피로 더럽혀졌다고 원망했기에 그의 사임을 인정했다. 후임에는 드 페르시니를 임명했다.[349] 몰수한 재산은 상호 부조 조합이나 노동자 주택 등 노동자 계급을 위해 사용되었다.[352]

1852년 2월 8일의 대통령령으로 7월 왕정 시대의 관선 후보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로 인해 지사는 입법원 선거에서 관선 후보에게 다양한 우대를, 비관선 후보에게는 다양한 방해를 가하게 되었다.[353][354][355] 비관선 후보의 당선은 매우 어려웠으며, 당선되어도 입법원 의원은 모두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기에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할 수 없었다.[356][357]

2월 17일에는 신문 규제 대통령령을 발령, 1848년 혁명으로 인정된 언론의 자유를 다시 제한했다. 신문 발행에는 정부의 사전 허가와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하게 되었다.[358][359] 각 신문은 매 호 정부 공보를 무상으로 게재해야 했고,[360] 정부로부터 부적절한 기사라고 3번 경고받은 신문은 발행이 중단되었다.[347][361][362] 집회와 결사 또한 엄격하게 제한 및 감시되었다.[363]

이러한 제도 하에서 1852년 3월에 치러진 입법원 선거는 보나파르트파가 의석의 3분의 1, 오를레앙파가 2분의 1을 확보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명확한 반대파는 입법원에서 사라졌다.[364] 비관선 후보는 8명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그중에서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한 자는 의원직을 사퇴했기 때문이다.[365][366]

4. 제2제정 황제 나폴레옹 3세 (1852년 ~ 1870년)

1851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1년 뒤인 1852년 12월 2일 프랑스 제2제정을 수립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 임기(4년 단임) 만료가 다가오자 연임을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823][824][825] 이에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카베냐크, 티에르 등 정적들을 체포하고 의회를 강제 해산했다.[826] 또한 1850년 5월 의회가 통과시킨 제한선거를 폐지하고 보통선거 실시 등을 약속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827]

왕당파와 공화파의 봉기는 민중의 냉담한 반응 속에 쉽게 진압되었으나,[827] 지방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32개 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26,884명이 체포되는 등[827]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1851년 12월 21일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보통선거)에서[826]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828] 1852년 1월 15일 공포된 새 헌법을 통해 루이 나폴레옹은 '''10년 임기의 대통령'''이 되었고,[829] 조각권, 입법발의와 공포권, 조약체결권, 선전포고권 등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830][831]

1852년 11월 20일, 국민투표를 통해 제정 실시 여부를 묻고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833][834] 1852년 12월 2일, 프랑스 제2제정 황제에 즉위하였다.

1848년 국민의회 의원으로서의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는 즉위 후, 외제니 드 몽티조와 결혼했다.

나폴레옹 3세의 통치 시기는 크게 "권위 제정"(1852년~1860년)과 "자유 제정"(1860년~1870년)으로 나뉜다.[393][394][395][396]

"권위 제정" 시기에는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입법원 토론 보도를 금지하는 등[362] 강력한 전제 체제를 유지했다.[397][398] 그러나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경제·사회 개혁을 추진했다.[402]

1860년대부터 나폴레옹 3세는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시작했다.[403] 입법원과 원로원에 황제 칙어에 대한 봉투권(droit d'adresse)을 인정하고,[405] 무임소 장관을 의회에 출석시켜 정부 법안을 옹호하게 하는 등 의회 권한을 강화했다.[408][409]

1864년에는 단결권과 파업권을 합법화하고, 1868년에는 출판·집회 사전 허가제를 폐지했다.[410] 입법원과 원로원 의사록을 신문에 공개하여 국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411]

1869년1870년에는 자유주의 개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보불전쟁 발발과 함께 제2제정이 몰락하면서 이러한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396][420]

4. 1. 국내 정책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여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는 '합당한 자유'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경찰 국가의 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공공사업, 철도 건설, 은행 사업 등을 통해 공업과 농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술 개발에도 힘을 쏟았고, 파리를 근대적으로 바꾸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한 빵값을 낮게 유지하고, 노동자를 위한 주택 건설을 지원했으며, 중재위원회도 설립했다. 그는 사회복지기관에 자주 기부금을 냈고, 시민들도 이를 본받기를 바랐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돌아와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이끄는 임시 정부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라마르틴은 그에게 파리를 떠나라고 요청했고, 그는 런던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1848년 4월 국민 의회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의 세 명이 당선되었다. 6월 선거에서는 네 곳에서 당선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1848년 프랑스 최초의 직접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74.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74.2%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그는 농민, 노동자, 소규모 사업가,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선거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과
후보득표수득표율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5,572,83474.2%
루이 외젠 카베냐크1,469,15619.6%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뤼 롤랭376,8345.0%
프랑수아 뱅상 라스파이37,1060.5%
알퐁스 드 라마르틴17,0000.2%



대통령이 된 후,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권력을 획득했다. 그는 새 헌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관선 후보 제도를 부활시켜 선거를 통제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외제니 드 몽티조와 결혼하여 황후로 맞이했다. 1856년에는 아들 나폴레옹 4세가 태어났다.

나폴레옹 3세는 생시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경제 발전에 힘썼다. 그는 관세를 낮추고, 도로와 철도를 정비했으며, 수에즈 운하 건설을 지원하고, 아시아 식민지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4. 2. 대외 정책

나폴레옹 3세는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대외 문제에서도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는 1815년 빈 회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유럽 체제를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문명 시대에는 군사적 성공은 일시적이며, 결국 승리하는 것은 여론"이라고 믿으며, "관대하고 고상한 사상의 선두에 서서" 민족성의 원칙에 따라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건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고자 했다. 그는 "다른 국가들이 이익을 얻으면 프랑스도 이익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16]

나폴레옹 3세의 외교 정책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 첫째, 나폴레옹 1세를 부정하는 빈 체제를 수정하는 것.
  • 둘째,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
  • 셋째, 프랑스 식민지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 제국을 격파하고, 프랑스가 유럽 국제 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빈 체제 개정에 성공했다. 민족주의 지원은 폴란드와 이탈리아 통일 운동 지원으로 나타났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와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영국의 지지도 잃었으며, 독일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결국 보불전쟁 패배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3세는 제국주의식민지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프랑스 식민지를 3배로 확장했다.[520] 프랑스의 식민지는 보불전쟁 패배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제3공화정 하에서 더욱 확장되어 대영제국에 이은 식민 제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4. 2. 1. 크림 전쟁 (1854년 ~ 1856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유럽 열강들 간의 충돌이었던 크림 전쟁(1854년 3월~1856년 3월)에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러시아 제국에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이 전쟁을 통해 영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는 전쟁 후에도 지속되었다. 러시아의 패배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승리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516]

4. 2. 2. 이탈리아 통일 전쟁 (1859년)

나폴레옹 3세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 협력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군 포병대의 활약과 계류기구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1]

1859년 6월 솔페리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군사적 천재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연방의 개입 가능성에 놀라 갑작스럽게 강화 조약을 맺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느슨한 연방 국가로 만들려고 했으나, 통일 이탈리아 건설을 주장하며 그에게 대항한 이탈리아의 카보우르 백작의 책략에 말려들어 니스사부아를 양도받고 이탈리아 문제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에 대한 행동은 영국의 불만을 샀다. 1860년 영국-프랑스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의 군함 건조, 식민지와 동양권 국가에 대한 정책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1]

4. 2. 3. 해외 식민지 확장

1864년 나폴레옹 3세가 퐁텐블로 궁에서 시암 대사의 인사를 받고있다.


나폴레옹 3세는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 확장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으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믿었으며, 프랑스가 문명 전파의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상도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년~1860년)에 참전하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San Jose María Díaz Sanjurjo) 신부가 살해되자(→Thomasian Martyrs)[835],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 주둔을 강요하기 위해 1858년 전쟁 개시를 승인했다.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했다.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Rigault de Genouilly) 제독 지휘하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하고(각각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 남부 베트남 요충지에서 베트남군을 격퇴했다. 1861년 프랑스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고, 뜨득 황제는 1862년 항복했다. 프랑스와 베트남은 불평등 조약인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냈다.(→베트남-프랑스 전쟁)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약 내용
남부 베트남의 비엔호아성, 자딘성[836], 딘뜨엉성(Định Tường) 3개 성[837]을 할양한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프랑스 전함의 메콩강 자유 항해를 허용한다.[838]
프랑스의 베트남 내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포교 자유를 인정한다.
3개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베트남-프랑스 관계)



결국 프랑스는 태국,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중국에서 프랑스는 대영제국과 함께 제2차 아편 전쟁에 참전했다. 1860년 프랑스 군대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무역 권리를 강요받았고, 장강 자유 항해권, 기독교 포교 자유를 인정해야 했으며, 영국과 함께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받았다. 이로써 프랑스는 베트남 지배권과 중국 남부 영향력을 강화했다.

1866년, 프랑스 해군은 조선의 로마 가톨릭 탄압인 병인박해로 희생된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조선에서 박해받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병인양요를 종교 자유 획득의 기회로 여기고 지리 안내 등으로 협력했다. 1997년 인천 가톨릭 대학은 세미나를 통해 병인양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역할을 반성한다는 전체 교수 명의의 사과 성명서를 발표했다.[839]

1867년 프랑스 군부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군대의 현대화에 기여했고, 보신 전쟁에서 막부군이 존왕파 군대에 대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막부군과 이후의 에조 공화국은 존왕파에게 패배했다.

1860년대 초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나폴레옹 3세는 유럽 내 친남부동맹 성향을 이끌었다. 목화 산업 붕괴와 멕시코 정책 변화 이후, 그는 잠시 남부동맹을 미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기도 했다. 1862년 이후,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가 남부동맹을 인정할 것처럼 행동하여 환심을 샀으나, 결국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상품 판매를 위한 새로운 통상 방식과 출구"를 만들고 "그리스도교와 문명의 진보"를 촉진하고자 했다. 그는 통상 이익 증대와 기지 마련을 위한 식민 정책을 추진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서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동에서는 알제리인에게 더 나은 대우를 보장하여 튀니지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아랍인들의 우호적 반응을 얻고자 했다. 수에즈 운하 건설도 지원했으며, 프랑스 보호 하에 레바논에 거주하던 로마 가톨릭 계통 마론파 교도들이 박해받자(1860년) 원정군을 파견해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했다.

4. 2. 4. 멕시코 출병 (1861년 ~ 1867년)

19세기 후반, 멕시코는 혁명과 내전으로 경제가 악화되자 1861년에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외채 상환 중지를 선언했다. 이에 프랑스는 스페인, 영국과 함께 그해 겨울 베라크루스 항구를 봉쇄하고 멕시코 정부를 압박하며 채무 상환 협상을 진행했다.[840] 스페인과 영국은 멕시코와 합의한 후 다음 해에 철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 제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품고 프랑스군을 내륙으로 진군시켜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1864년에는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옹립하여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으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841]

1865년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은 먼로주의에 따라 '북남미 대륙과 유럽 간 상호 불간섭' 원칙을 재확인하며 프랑스에 항의했고, 멕시코에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힘을 얻은 멕시코군의 저항은 더욱 강해졌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압박까지 심해지자 프랑스군은 1866년에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퇴위를 거부하다가 1867년에 멕시코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842] 멕시코 원정 실패로 프랑스군은 큰 전력 손실을 입었고,[843] 이는 보불전쟁(1870~71)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4. 2. 5. 프로이센과의 관계 악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호의적이었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덴마크와 싸워서 해결했을 때도 초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북독일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프로이센의 구상에 항상 동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에 대한 대가를 공개적으로 비스마르크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186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오스트리아군을 패배시켰을 때, 그는 프로이센 편에 서는 어떠한 군사적 개입도 거부했으며, 단순한 중재자 역할만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가 중립을 지킨 대가로 독일 영토를 떼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 대가로 벨기에를 얻으려던 나폴레옹 3세의 계획은 1867년 룩셈부르크를 얻으려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 요새에서 프로이센군이 철수한 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보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날 속이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황제는 속지 않는다"라며 불만을 드러냈고, 이후 비스마르크가 마인강을 넘어가 남부 독일까지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을 방해했다.[10]

4. 3. 개혁 시도 (1860년대)

1860년,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국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영국과의 통상 조약을 맺어 자유무역을 추진하며 경제를 활성화하고 국민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403] 그러나 경제 상황 악화로 불만이 커진 중간 계급과 노동자들은 그의 반(反)교황적인 이탈리아 정책에 분노한 가톨릭교도들과 함께 반대 세력을 형성했다. 1857년 선거에서 5명이었던 반대파 의원은 6년 후 32명으로 늘어났다.

나폴레옹 3세는 1856년부터 앓던 방광결석증이 재발하여 건강이 악화되자 측근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여 권력 다툼을 벌였다. 1863년에는 '부황제'라 불리던 외젠 루에르가 총리에 올랐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이부형제인 모르니 공작의 조언을 받아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고,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결사의 자유(1864년), 집회의 자유(1868년)를 승인하고 의회 의원의 권한을 확대하며 언론법을 자유화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여러 제한 조건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가 적었고 시기적으로도 늦었다는 평가를 받았다.[410] 그는 교육부 장관 빅토르 뒤뤼이가 교육 문제로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는 것을 용인하면서도,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 간의 분쟁 해결을 중재하여 프랑스 가톨릭교도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황제의 대외 정책 실패가 이어지면서 반대파의 세력이 커졌다. 1869년 선거에서 집권 정부는 443만 8,000표, 반대 세력은 335만 5,000표를 얻자, 나폴레옹 3세는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70년 1월, 그는 올리비에를 총리로 임명했다.

제2제정은 1850년대의 "권위 제정"과 1860년대의 "자유 제정"으로 구분된다.[393][394][395][396]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폴레옹 3세는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입법원과 원로원은 황제의 칙어에 대한 봉투권(droit d'adresse)을 인정받아 정부 정책에 대한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졌다.[405] 무임소 장관이 의회에 출석하여 정부 법안을 옹호하고, 예산 심의권이 강화되면서 의회의 권한이 확대되었다.[408][409]

1864년에는 단결권과 파업권이 합법화되었고, 1868년에는 출판과 집회의 사전 허가제가 폐지되었다.[410] 입법원과 원로원의 회의록이 신문에 공개되면서 국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411] 1869년 총선에서는 반정부파 의원이 60명, 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하는 "제3당" 의원이 40명 당선되었다.

1869년과 1870년에는 자유주의 개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입법원은 의사 규칙 제정권, 법안 제출권, 법안 수정권을 확보하고, 원로원은 상원과 같은 권한을 갖게 되었다.[414] 1870년 헌법은 의원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지만, 보불 전쟁 발발과 함께 제2제정이 몰락하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396][420]

4. 4.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년 ~ 1871년)

비스마르크와 대화 중인 나폴레옹 3세 (스당 전투 패배 후)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이사벨 2세 여왕이 축출되었다. 스페인 혁명 정부는 새 국왕을 찾았으나, 파벌 간 다툼으로 1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다. 1870년, 프로이센 빌헬름 1세의 친척 레오폴트 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제안했다.[844][845] 프랑스는 스페인과 프로이센 양국에 강력히 항의했다.[846] 16세기 카를 5세 시절처럼 프랑스가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싸여 협공받을 경우 국가 안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847][846] 레오폴트 공은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848][849][850]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프랑스와의 전쟁 기회로 판단,[846] 스페인에 특사를 보내 1870년 6월 21일 수락 발표를 하게 했다. 프랑스 외무대신 그라몽은 프랑스 대사를 빌헬름 1세에게 보내 항의했고, 빌헬름 1세는 철회 의사를 밝혔다.

엠스 전보 사건에서, 프랑스 정부는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를 엠스(Ems)에 보내 재발 방지와 철회 의사에 대한 서면 보장을 요구했다. 이는 외교적 결례였다. 빌헬름 1세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며 대사 접견을 거부했다.[846]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언론 발표를 위해 전보를 요약하며 거친 표현을 첨가했다.[846] 1870년 7월 14일, 조작된 내용이 신문에 실리자 프로이센 여론은 악화되었고, 프랑스인의 감정도 격앙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직접 지휘했지만, 프랑스는 연패했고,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포로가 되었다.[715]

5. 몰락과 망명, 죽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하고 세당 전투에서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스회 성에 유폐되었다.[723][724] 그는 프랑스 국민들이 자신을 다시 황제로 맞아줄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제3 공화국이 수립되고 나폴레옹 3세의 폐위가 공식 선언되었다.[725][734]

전쟁이 종결된 후, 나폴레옹 3세는 1871년 3월 19일 프로이센군으로부터 석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했다.[736] 그는 런던 교외의 치즐허스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복위를 꿈꿨지만,[737] 1873년 1월 9일 방광 결석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747][748]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는 세당에서 비겁하지 않았겠지?"였다고 전해진다.[749]

나폴레옹 3세의 유해는 치즐허스트의 가톨릭 교회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외제니 황후가 세운 세인트 마이클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753][754][757][758][759]

5. 1. 몰락

나폴레옹 3세는 측근들의 부추김 속에 1870년 7월 14일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고, 영국 중재안을 거절한 프랑스는 7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851] 7월 25일자 런던 타임즈에는 베네데티가 벨기에 병합을 거론한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이는 비스마르크가 흘린 것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보고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원함을 알게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프로이센과 서둘러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임을 주장하면서 맞대응을 하였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몸이 불편했던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에서 싸우다가 결국 1870년 9월 2일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851] 패전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공화주의자들은 9월 4일, 제정 폐지와 함께 새로운 공화정을 선포하였다.[851]

강베타 등 공화파들이 주도하여 임시 국민방위정부를 구성했고, 수도 사령관인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임명하였다.[852] 종전협상은 비스마르크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으며, 임시정부는 전투를 계속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투에 연패하며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는데,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포위된 파리는 극도로 비참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1월 28일 항복했다.[853]

5. 2. 망명과 죽음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뒤 영국으로 망명하여 살았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까지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광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후 1873년에 사망했다.[747][748] 그의 유언은 "우리는 세당에서 비겁하지 않았겠지?"였다고 한다.[749]

사후 명목상 프랑스 황제 지위는 아들 나폴레옹 4세가 물려받았으나,[752] 나폴레옹 4세는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영국-줄루 전쟁에 참전했다가 1879년 전사했다.[756]

6. 유산

나폴레옹 3세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모두 능통했지만, 당대 영국 사교계에서는 그의 지식 수준이 얕다는 비판이 많았다.[854]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러다이트 운동차티스트 운동 등 영국의 노동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전제군주라는 지위 때문에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사생활이 문란하여 보불 전쟁 패전 후 포로 수용소에서 다른 프랑스인 귀족의 부인 및 하녀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영국 망명 후 런던에서도 잉글랜드 여배우 헨리에타 하워드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키가 160cm로 프랑스 대통령 중 가장 작았으며,[854] 이로 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키가 작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신분이 가장 높은 손님에게는 알루미늄 식기를, 그보다 낮은 신분의 손님에게는 금 식기를 제공하도록 지시했다. 1820년대에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했지만, 광석에서 알루미늄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855]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이나 공화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804]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생시몽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에 소비 자본주의 사회가 실현되었고, 그의 도시 계획으로 현재 파리의 모습이 갖춰졌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805]

나폴레옹 3세는 백부 나폴레옹 1세의 숙적이었던 영국과 협력하여 크림 전쟁에서 연합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고, 애로우 전쟁에서도 영불 연합군을 결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당시 패권 국가였던 대영 제국과 협력하면서 멕시코 원정과 보불 전쟁에서 실패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나폴레옹 3세의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은 제3공화정 시기 프랑스 식민 제국 번영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어, 프랑스 식민지 역사에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806] 현재 프랑스에서는 자국의 식민지배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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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서적 ガル(1988) ガル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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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서적 鹿島(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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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 서적 アイク(1997) 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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