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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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에 위치한 고분으로, 단군을 숭배하는 북한에서 고조선 건국 시조 단군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 문헌에 관련 기록이 등장하며, 1993년 북한은 단군릉 발굴을 통해 유골의 연대를 측정하고 단군이 실존 인물임을 주장하며 9단 피라미드형 능묘로 개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학계는 유골 연대 측정 방법과 고고학적 근거 부족 등을 이유로 북한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단군릉의 성격을 고구려 시대의 고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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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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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종류 | 국보 |
국보 번호 | 174 |
위치 |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
시대 | 고조선 |
명칭 | |
한국어 | 단군릉 (檀君陵) |
로마자 표기 | Dangulleung |
일본어 | 단군릉 (だんくんりょう, タングンヌン) |
영어 | Mausoleum of Tangun |
상세 정보 | |
관련 인물 | 단군 |
북한 발표 | 단군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며, 능은 단군의 무덤임. |
논란 | 북한의 주장에 대한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음. |
2. 유래
고려사 지리지에서부터 단군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 여러 문헌에서 강동군에 위치한 특정 무덤을 단군릉으로 지목하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의 신빙성이나 단군릉의 실제 주인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과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단군세기》를 근거로 5세 단군 구을의 묘라고 주장하기도 하며,[25]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가 후대 문헌에 등장하는 점 등을 들어 민간 전승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조선 중기 문인 남효온은 단군묘를 참배하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26]
2. 1. 조선시대 문헌 기록
고려사 지리지에는 강동현 ‘박달곶촌’이라는 마을에 단군릉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동군에 큰 무덤 2기가 있는데, 서쪽에 있는 둘레 410척 되는 묘가 단군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실록》에는 숙종이 단군묘와 동명왕의 묘를 해마다 정비하도록 한 건의를 승인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에는 왕들이 평양감사에게 명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관례화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37권에도 단오와 추석에 단군을 시조로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한편,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단군세기》(檀君世紀)의 기록을 근거로 단군릉의 주인이 47명의 단군 중 5세 단군인 구을(丘乙)이라고 주장한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구을은 재위 16년에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무궁화를 많이 심었으며, 그해 7월 남쪽으로 순행하여 풍류강(대동강 줄기 비류강)을 거쳐 송양(평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25]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동현 조에는 단군릉에 대한 설명이 없다가, 《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 "...큰 무덤[大塚] 중...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는 410척으로, 속설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라며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책에서 동명왕이 평양에 도읍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구제궁(九梯宮), 기린굴(麒麟窟) 등을 민간에서 전해지는 동명왕의 고적이라고 설명하는 점을 볼 때, 단군묘를 비롯한 민간 전설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는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1454~1492)이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평양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묘 알현(謁檀君墓)〉이라는 시를 남겼다.
>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 (檀君生我靑丘衆)
>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 (敎我彛倫浿水邊)
>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 (採藥呵斯今萬世)
>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 (至今人記戊辰年)
여기서 무진년(戊辰年)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해인 기원전 2333년을 의미한다. 이 시는 단군에 대한 찬미와 더불어, 남효온이 관서지방의 고조선, 고구려, 고려 유적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남효온은 김종직과 김시습의 제자이기도 했다.[26]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은 단군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단군의 유해와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해야 했다.[2]
1993년 이전까지 북한 학계에서는 단군릉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북한 고대사학계의 주요 인물인 역사학자 전주농한국어은 1963년 평양의 석실 봉토분 조사 보고서에서, 세간에 알려진 평양의 단군릉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며 고구려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14] 이러한 입장은 1992년 김일성의 단군 관련 비공식 담화 이후 급변하여, 1993년 단군릉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단군릉 발굴 및 개건 결정에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14]
1993년 (주체 82년) 10월,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에 위치한, 조선 시대부터 단군릉이라 불려온 곳에서[8]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해당 무덤은 고구려 시대의 적석총고분으로 확인되었으나,[8] 북한 학계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해 이곳에서 총 86개의 뼈 조각(남성 42개, 여성 12개, 성별 불명 32개)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19] 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혹은 전자 스핀 공명법)을 이용한 남성 유골 연대 측정 결과, 5011년±267년 전의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단군의 유골로 단정했다.[3][8] 조선사회과학원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단군은 실재하는 고조선 건국의 시조"라고 공식 선언했다.[8]
이 발굴 결과를 토대로 북한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공식화했다.
-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다.
- 발견된 유골로 추정한 단군의 키는 170cm이다.
- 단군 실존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므로, 곰이 인간으로 변했다는 신화 내용은 허구이다.[27]
- 고조선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중국의 요 임금 즉위 50년에 맞춘 사대주의적 설정이며, 유골 연대 측정 결과에 따라 실제 건국 연대는 기원전 30세기로 보아야 한다.[19]
1993년 10월 20일, 김일성은 '단군릉 개건 방향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구체적인 개건 지침을 내렸다.[10]
- 단군릉은 민족 시조의 무덤이므로 동명왕릉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건설한다.
- 높이도 더 높게 하고, 흙무덤 대신 돌을 이용한 피라미드 형태로 쌓는다.
- 내부에는 관대 2개를 놓고, 단군 유골은 오른쪽에, 부인 유골은 왼쪽에 안치한다.
- 훼손된 벽화는 복원하지 않는다.
- 고조선 건축 양식에 따라 돌문을 세운다.
- 제당은 불필요하나, 남측 방문객(대종교인 등)의 제사를 위해 상돌은 마련한다.
- 묘향산, 구월산의 단군 관련 유적도 함께 정비한다.
김일성은 "단군릉을 훌륭하게 정비하면, 조선 민족이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선전하고 남조선 인민과 해외 동포를 교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개건의 정치적 목적을 명확히 했다.[10]
개건 공사는 발굴 이듬해인 1994년 10월 11일 완료되었다. 새로 조성된 능은 밑변 한 변 50m, 높이 22m의 9단 피라미드형 석조 구조물이며, 콘크리트로 보강되었다. 이는 고구려 장군총과 유사하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8] 능 주위에는 호랑이 석상과 단군의 네 아들 및 신하들을 형상화한 석인상이 배치되었다.[11]
북한은 단군 연대를 5000년 전으로 설정하며 평양 일대에 기존 세계 4대 문명에 버금가는 고대 문명, 즉 '''대동강 문화'''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9] 더 나아가 세계 4대 문명에 대동강 문명을 더한 세계 5대 문명설을 제기하고 있다.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박시형, 김석형 등 북한의 대표적 역사학자들은 "단군릉 발굴 학술 보고집"에 논문을 기고하며 이러한 주장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12] 김석형은 논문 서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영도로 단군 실존이 밝혀지고 고대사 체계화의 길이 열렸다고 기술했다.[12] 이에 대해 남한의 역사학자 이기백(서강대학교)은 북한의 경직된 체제 하에서 학자들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12]
북한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2002년)는 단군릉을 "1,994개나 되는 커다란 돌들을 잘 다듬어 22m나 되게 높이 올려 쌓은 것"으로 묘사하고, 단군을 "오랜 옛날 이 땅우에 처음으로 <조선>(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왕"이며 능 안에 "단군과 그 안해의 뼈가 보존되어있다"고 서술하고 있다.[11]
4. 개건
1993년 처음 발굴된 단군릉은 이듬해인 199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건되었다. 개건을 기념하는 비석이 한문과 한글로 세워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은 단군이 단순한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고고학자들에게 단군의 유해와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도록 지시했다.[2] 이에 따라 1993년 (주체 82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고구려 시대의 적석총고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이곳에서 출토된 남녀 유골 86구(남성 1명, 여성 1명으로 추정)를 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전자 스핀 공명법)으로 분석한 결과, 5011년±267년 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발표하며 이것이 단군의 유골이라고 주장했다.[3][8] 이는 단군기원보다도 더 오래된 연대이다. 발굴 조사를 담당한 조선사회과학원은 "단군은 실재하는 고조선 건국의 시조"라고 공식 선언했다.[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북한 학계 내부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북한 고대사학계의 권위자였던 역사학자 전주농한국어은 1963년 평양의 석실 봉토분 조사 보고서에서, 세간에 알려진 평양의 한왕묘, 단군릉, 동명왕릉 등은 민간의 억지에 불과하며, 특히 단군릉은 황당무계한 전설이고 실제로는 고구려 귀족의 묘가 분명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14] 이러한 견해는 1993년 발굴 이전까지 북한 학계를 지배했으나, 1992년 김일성의 단군 관련 비공식 담화 이후 급격히 바뀌어 발굴로 이어졌다. 이는 단군릉 발굴과 개건이 정치적 배경 하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14]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단군릉에서 발견된 유골 86개 중 단군의 것이 42개, 부인의 것이 12개라고 한다.[19] 또한,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보다 유골 연대가 훨씬 앞서는 것에 대해, 북한은 기존 건국 연대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설정된 것이며 실제 건국 연대는 기원전 30세기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9]
발굴 이듬해인 1994년 10월 11일, 단군릉은 대대적인 개건 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김일성은 1993년 10월 20일 관련 간부 협의회 연설에서 "단군릉을 훌륭하게 정비하여 조선 민족 5000년 역사를 선전하고 남조선 인민과 해외 동포 교육에 활용해야 한다"며, "동명왕릉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토봉분이 아닌 석재 피라미드식으로 쌓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10]
이에 따라 단군릉은 발굴 당시의 돌무지무덤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장군총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로 바뀌었다. 능은 한 변 50m, 높이 22m의 9단 피라미드 형태로 축조되었으며[8], 능 앞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비파형동검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형물과 단군의 아들 및 신하들을 묘사한 석상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화려한 장식 때문에, 북한 당국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능의 형태를 왜곡하고 과장했다는 비판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단군릉 개건 이후, 북한은 평양 일대에 세계 4대 문명에 필적하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며 이를 '''대동강 문화'''로 명명하고, 세계 4대 문명에 대동강 문화를 더한 세계 5대 문명이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9]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박시형과 김석형 등 원로 학자들도 단군릉 발굴 보고서에 참여했다.[12] 김석형은 논문 "주체사상을 지침으로 하는 단군조선 역사를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문제"의 서두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현명한 영도에 의해, 신화로만 전해지던 단군이 실존 인물임이 밝혀지고,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는 빛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12] 이에 대해 남한의 이기백(서강대학교) 교수는 "1960년대 이후, 이 두 사람은, 북한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원로가 되어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북한의 경직된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됩니다. 정치가가 학자를 매수한 것이 아닐까"라고 평하고 있다.[12]
북한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2002년)는, 단군과 단군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1]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평양에서 동북으로 약 100리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에는 대박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습니다. 1994개의 돌덩이로 정비되어 22m나 되는 높이로 쌓아올린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군릉입니다. 단군은 옛날 이 땅에 처음으로 "조선"(고조선)이라는 국가를 건국한 왕입니다. 단군릉은 바로 단군의 묘이며, 그 안에는 단군과 그의 아내의 뼈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단군릉 주변의 네 귀퉁이에는 단군릉을 보호하는 듯 돌로 조각한 용맹스러운 조선 범의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아주 위엄 있게 서 있는 사람 조각상은 단군의 네 아들과 측근들의 모습입니다…(조선력사, p7)
5. 논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초기에는 평양 인근 강동군의 단군릉을 전설로 여겼으나, 1990년대 들어 입장을 바꾸어 대대적인 발굴과 개축을 진행하며 논란이 시작되었다. 1963년 북한의 사학자 전주농(全疇農)은 단군릉을 "황당무계한 전설"로 치부했으나[14], 1992년 김일성 주석이 단군을 실존 인물로 강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14][2]
1993년 북한 조선사회과학원은 대박산 기슭에서 발굴한 유골을 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ESR)으로 분석하여 5011±267년 전의 것이며 단군의 유골이라고 주장했다.[3][28] 이를 토대로 고조선의 성립 연대를 기원전 30세기로 소급하고, 1994년 10월 11일에는 높이 22m, 9층의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단군릉을 새로 축조했다.[8]
그러나 대한민국 학계를 비롯한 외부에서는 북한의 주장을 여러 근거를 들어 인정하지 않는다. 주요 비판점으로는 기원전 30세기 문명 존재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부족,[19] 유골 연대 측정 방법(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의 신뢰성 문제,[12][13][14] 능에서 출토된 유물의 고구려 시대적 특징,[12][19][15] 유골의 진위 및 전승 과정의 불확실성,[13][14] 그리고 발굴 및 개축 과정에서의 정치적 개입 정황[2][12][15] 등이 제기된다. 북한은 외부의 독립적인 검증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 등 다른 사료를 근거로 고조선의 수도 위치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며 현재 단군릉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5]
이처럼 단군릉의 실체에 대해서는 북한의 주장과 외부 학계의 비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학계를 포함한 다수의 외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발표한 단군릉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5. 1. 조선시대의 인식
조선시대에도 단군릉에 대한 기록과 인식이 존재했다. 세종실록 37권에는 단오와 추석에 단군을 시조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25]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 강동현 조에는 단군릉에 대한 설명이 없다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군 조에 처음으로 "현의 서쪽 3리에 둘레 410척(약 124m)이 되는 큰 무덤(大塚)이 있는데, 민간에서 단군묘(檀君墓)라고 전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같은 책에서 동명왕이 평양에 도읍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구제궁(九梯宮), 기린굴(麒麟窟)을 민간에서 전하는 동명왕의 고적이라고 설명하는 점을 볼 때, 단군묘를 비롯한 민간 전설의 기록은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승정원일기에는 단군릉이 위치한 대박산을 태백산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숙종실록》에는 숙종이 평양감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단군묘와 동명왕릉을 매년 정비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에도 왕들이 평양감사에게 명하여 봄과 가을에 단군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관례화했음이 나타난다.
조선 중기의 문인 남효온(1454~1492)은 성종 20년(1489년)경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단군묘 알현(謁檀君墓)〉이라는 시를 남겼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이자 김종직과 김시습의 제자였던 남효온은 이 시에서 단군에 대한 존경심과 민족적 자부심을 표현했다.[26]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檀君生我靑丘衆)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敎我彛倫浿水邊)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採藥呵斯今萬世)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至今人記戊辰年)
여기서 무진년(戊辰年)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을 의미한다. 남효온은 관서지방의 고조선, 고구려, 고려 유적지를 탐방하며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 후기에도 단군릉을 믿는 입장(취신론)과 믿지 않는 입장(불신론)이 공존했다. 17세기 중엽의 학자 허목은 단군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확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단군세가(檀君世家)'를 저술하기도 했다. 한말에는 '대동역사', '동국사략', '신정동국역사' 등 일부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릉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기도 했다.[25][29]
5. 2. 단군릉에 대한 다양한 관점
고려사 지리지에는 강동현 ‘박달곶촌’에 단군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동군에 있는 둘레 410자 크기의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조선 시대 실록인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에도 왕명으로 단군묘와 동명왕릉을 관리하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실록 37권에도 단오와 추석에 단군을 시조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다.조선 시대 학자 남효온(1454~1492)은 1489년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평양에서 단군묘를 알현하고 시를 남겼다. 그는 시에서 단군이 나라를 세운 기원전 2333년(무진년)을 언급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드러냈다. 남효온은 생육신 중 한 명으로, 김종직과 김시습의 제자였다.[26] 이처럼 조선 시대에도 단군릉에 대한 믿음(취신론)과 불신론이 공존했으며, 취신론자들은 여러 개의 단군묘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17세기 학자 허목은 단군의 역사적 실존을 확신하며 '단군세가'를 저술했고, 한말 국사 교과서들 역시 단군릉을 역사적 사실로 기술했다. 신채호는 근대 역사학적 관점에서 단군릉을 해석하며, 단군이 원정 중 강동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릉을 조성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25][29]
한편,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단군세기 기록을 근거로 단군릉의 주인이 47명의 단군 중 5세 단군인 구을(丘乙)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구을 단군이 재위 16년에 장당경에 삼신단을 쌓고 평양 근처에서 병사하여 대박산에 묻혔다고 본다.[25] 또한, 이들은 규원사화 등 일부 재야사서를 근거로 고조선의 수도 '평양'이 현재의 평양직할시가 아닐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현재 위치의 단군릉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초기에는 단군릉을 '황당무계한 전설'로 치부했다. 북한의 저명한 사학자 전주농은 1963년 단군릉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일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1993년까지 북한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였다.[14] 그러나 1992년 김일성 주석이 단군을 실존 인물로 강조하는 비공식 담화를 발표한 이후[14], 북한의 입장은 급변했다. 김일성은 단군릉을 동명왕릉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개축하여 조선 민족의 5000년 역사를 선전하고 남한 및 해외 동포 교육에 활용하라고 지시했다.[10]
이에 따라 1993년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북한 조선사회과학원은 이곳에서 남녀 합장으로 추정되는 유골 86개를 발견했으며[19], 남성 유골을 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ESR)으로 분석한 결과 5011±267년 전의 것이라고 발표하며 이것이 단군의 유골이라고 주장했다.[3][8] 이를 근거로 북한은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0세기로 끌어올리고, 평양 일대에 세계 4대 문명에 필적하는 '대동강 문화'라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9] 발굴 이듬해인 1994년 10월 11일, 북한은 원래의 고구려식 적석총 자리에 밑변 50, 높이 22의 9층 피라미드 형태로 단군릉을 새로 축조하여 준공식을 열었다.[8]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도 단군릉이 단군과 그의 아내의 뼈가 보존된 무덤이며, 주변 석상들은 단군의 아들들과 신하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11]
그러나 대한민국 학계를 비롯한 외부에서는 북한의 단군릉 주장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주요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 고고학적 증거 부족: 기원전 30세기 한반도에 대규모 건축물을 조성할 만한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 고조선 관련 유물의 연대는 기원전 10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9]
- 연대 측정법의 신뢰성 문제: 유골 연대 측정에 사용된 전자 상자성 공명 연대 측정법(ESR)은 주로 수십만 년 전의 구석기 유물 측정에 사용되며, 5000년 정도의 비교적 젊은 시료에는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오히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측정 결과 조작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제기된다 (이기백, 이선복).[12][13][14]
- 유물의 시대 불일치: 단군릉에서 발견된 못과 금동관 조각은 5세기 고구려 양식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고구려 시대에 단군릉을 개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14], 고구려가 단군을 시조로 인식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이도학).[14] 오히려 발굴된 무덤 자체가 고구려 시대의 돌방무덤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노태돈).[15]
- 유골의 불확실성: 설령 발굴된 유골이 5000년 전의 것이 맞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군의 유골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5000년 동안 무덤의 위치가 정확히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선복).[13][14]
- 정치적 의도: 단군릉 발굴 및 개축이 김일성의 지시와 주체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학문적 객관성보다는 정치적, 민족주의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기백, 노태돈).[12][14][15] 중국 학계 역시 이를 비학술적인 민족주의 경향으로 비판했다.[24]
일본 학자들도 북한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다나카 토시아키는 단군을 신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고[20], 미야와키 아츠코와 오카다 히데히로는 유골의 신빙성과 북한의 기술력, 정치적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다.[21][22]
결론적으로, 단군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만, 북한이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단군릉은 고고학적 증거 부족, 연대 측정의 신뢰성 문제, 유물의 시대 불일치, 정치적 개입 정황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포함한 외부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6. 보도
단군릉 발굴 발표는 세계 각국에 보도되었으며 여러 논란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각종 방송 매체도 단군릉 발굴 및 복원 소식을 보도했고, 일부 역사 교과서에도 그 사실이 실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이진희에 따르면, 1993년 9월 28일 조선중앙통신은 평양시 강동읍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어 그가 실존 인물임이 증명되었다고 보도했다. 며칠 뒤인 10월 2일,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조선사회과학원(원장 김석형)이 작성한 '단군릉 발굴 보고'를 1면에 게재하며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조선) 민족의 단일성에 대한 확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고고학 발굴 성과가 노동신문 1면에 실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앞서 9월 27일에는 김일성 주석이 강성산 총리, 강희원 부총리, 김기남 당 비서 등과 함께 단군릉을 방문하여 '현지 지도'를 했으며, 이 자리에서 "단군이 실존했다는 고증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 민족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7]
7. 단군릉을 소개한 프로그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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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Tangun and His Mausoleum
http://www.uriminzok[...]
2021-01-19
[2]
웹사이트
The good things in North Korea
https://www.nknews.o[...]
2016-06-06
[3]
웹사이트
단군릉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檀君陵(朝鮮の歴史、2010年)
https://take8592gool[...]
[5]
뉴스
純潔血統的驕傲,強敵欺淩的歷史,矛盾揉雜成為朝鮮民族集體性格的「恨」意
https://www.thenewsl[...]
関鍵評論網
2016-08-21
[6]
뉴스
North Korea's box of bones: A mythical king and the dream of Korean unification
https://www.reuters.[...]
2018-10-2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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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遺事」王暦の高句麗と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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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6월 27일 대동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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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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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檀君陵の改築方向について 檀君陵改築関係部門の幹部協議会でおこなった演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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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북한역사교과서의 고대사서술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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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12]
뉴스
卷頭 특별 인터뷰 韓國史新論의 著者 李基白 선생이 말하는 韓國史의 大勢와 正統
http://monthly.chosu[...]
2001-11
[13]
서적
최근 단군릉의 문제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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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뉴스
북한역사교과서의 고대사서술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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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江大学校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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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와 상징을 구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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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부인 柳花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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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 河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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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河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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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 단군은 정말 실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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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무덤 있다 VS 없다..조선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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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네이버)
20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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