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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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산업 혁명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를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초기에는 영국의 산업화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1834년 독일 관세 동맹 설립과 프로이센 개혁을 통해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철도 건설은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어 자본 투자를 촉진하고, 철강, 기계 공학 등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빈곤 문제가 심화되었으며, 노동 운동과 이민이 증가하는 등 사회적 변화도 일어났다. 산업화는 지역별로 불균등하게 진행되었으며, 작센, 라인란트 등 일부 지역이 산업을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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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산업혁명 | |
---|---|
지도 | |
독일의 산업화 | |
시기 | 19세기 |
주요 특징 | 급속한 경제 성장 사회 구조의 변화 정치적 긴장 고조 |
배경 | |
정치적 분열 | 독일 연방의 여러 국가로 분열 |
경제적 후진성 | 농업 중심 경제, 산업 기반 미약 |
계몽주의 사상 확산 | 경제 자유주의, 산업 발전의 필요성 인식 |
주요 요인 | |
정치적 통합 노력 | 독일 관세 동맹 결성 (1834년) |
철도 건설 | 국내 시장 통합, 산업 발전 촉진 |
기술 혁신 | 영국으로부터의 기술 도입, 자체 기술 개발 |
자본 축적 | 은행 설립, 투자 활성화 |
정부의 지원 정책 | 산업 육성 정책 추진 |
주요 단계 | |
초기 단계 (1815년~1840년대) | 섬유 산업 중심 발전 라인란트 지역 중심 |
급속한 성장 단계 (1850년대~1870년대) | 중공업, 철강 산업 발전 철도 건설 가속화 |
제2차 산업 혁명 단계 (1880년대 이후) | 전기, 화학 산업 발전 대기업 등장 |
사회적 영향 | |
인구 증가 및 도시화 | 농촌 인구 감소, 도시 인구 증가 |
노동 계급 형성 | 노동 운동, 사회주의 운동 발전 |
사회 문제 발생 | 빈부 격차 심화, 주거 문제, 환경 오염 |
정치적 영향 | |
국가주의 강화 | 독일 제국 통일 (1871년) |
제국주의 팽창 | 식민지 확보 경쟁 참여 |
사회 갈등 심화 | 노동 운동 탄압, 사회 불안정 |
경제적 영향 | |
경제 규모 확대 | 유럽 강국으로 부상 |
산업 구조 변화 | 농업 비중 감소, 제조업 비중 증가 |
국제 경쟁 심화 | 영국, 미국 등과의 경쟁 격화 |
기타 | |
참고 자료 | 독일어 위키백과: 독일의 산업화 |
2. 배경
독일의 산업 혁명은 산업화의 발상지인 영국에 비해 훨씬 불리한 여건 속에서 시작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지속된 정치적 분열은 단일 시장 형성을 가로막았고, 수많은 관세와 통화가 존재하여 경제 통합을 저해했다. 또한, 사회 기반 시설이 미비했고 해외 무역 및 식민지 개척 경험도 부족했다. 농업 부문 역시 봉건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엘베강 동부 지역을 제외하면 자급자족 농업 중심의 소규모 농장이 많아 생산성이 낮았다. 중상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길드와 조합 등 전통적인 경제 규제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3]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근대 초기부터 산업화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역사가 베르너 콘체는 이 준비 단계를 대략 1770년에서 1850년 사이로 보았다. 특히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꾸준한 인구 증가는 국내 수요를 늘리고 잠재적인 노동력을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다.[4]
2. 1. 영국, 프랑스의 산업 혁명과 독일
영국 산업혁명은 독일에 선진 공업 기술 수용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프랑스 혁명과 함께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영국 산업혁명의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조직과 운영 정비가 우선 필요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명목상 존재했을 뿐, 300개가 넘는 독립 제후국들의 집합체였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를 거쳐 38개의 독립 영방 국가로 구성된 독일 연방이 탄생했다.독일 산업 혁명 초기 상황은 산업화 발상지인 영국보다 훨씬 열악했다. 단일 시장 부재, 수많은 관세와 통화, 1806년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분열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기반 시설 역시 영국보다 훨씬 낙후되었고, 해외 무역과 식민지 확장 경험도 부족했다. 독일의 훨씬 큰 농업 부문에서도 영국과의 격차는 뚜렷했다. 19세기 초 독일 농업은 영국과 같은 "농업 혁명"을 아직 겪지 못했다. 여전히 강력한 봉건주의 요소가 남아 있었고, 엘베강 동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구식 방법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자급자족 농업 농장이 많아 시장과의 연계성이 낮았다.[3] 18세기 중상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수공업 부문의 길드와 조합은 여전히 경제 활동을 규제하는 오래된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근대 초기부터 산업화를 위한 준비 단계의 발전이 있었다. 베르너 콘체는 이 준비 단계를 대략 1770년에서 1850년 사이로 보았다. 이 시기에는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인구 증가가 수요를 늘리고 잠재 노동력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4] 1800년경 길드 수공업이 위기에 처했지만, 상업 분야 발전이 정체된 것만은 아니었다. 약 10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분업(Division of labour)을 통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대제(putting-out system, 원시 산업)는 이미 중세 시대 말기와 근세 시대에 일부 지역에서 등장했다. 예를 들어, 동부 베스트팔렌 등지의 토지가 부족한 농민들은 린넨의 가내 수공업(Cottage Industry) 생산에 특화했고, 상인들은 이를 구매하여 국내 시장에 유통시켰다. 1800년경에는 이 분야에 최대 100만 명이 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발전과 철강 및 금속 거래 등 다른 분야의 성장은 이미 여러 지역에 상업 집중 중심지를 형성했다. 예를 들어, 프로이센 서부의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방에서는 베르기셰스 란트, 마르크 백작령, 자우어란트로 이어지는 지거란트 지역이 있었다. 아헨, 에쉬바일러, 슈톨베르크 (라인란트), 뒤렌 사이 아이펠 지역의 철 가공도 유사한 맥락이었다. 특히 황동, 아연, 납 생산이 이 지역에 집중되었다. 상부 슐레지엔에서는 국가나 대지주(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 호엔로에 공 등)가 광업과 가공업을 운영했다. 작센 왕국은 농촌 및 도시 수공업, 가내 수공업, 매뉴팩처, 광업, 그리고 곧 등장할 최초의 공장까지 매우 분화된 무역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작센의 넓은 지역, 특히 나중에 '작센의 맨체스터'라 불린 켐니츠 지역은 북부 라인란트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성장률이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5]
매뉴팩처와 선대제를 통해 여러 지역에 축적된 상업 자본은 나중에 최초의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상업 지형이 항상 산업 발전으로 직접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헤센 일부 지역이나 하부 슐레지엔처럼 산업화와의 연계에 실패하여 농촌 무역 지역이 쇠퇴하는 경우도 있었다.[6]
산업 확장을 위한 기반은 늦어도 19세기 초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 산업 혁명의 직접적인 선행 단계로서 초기 산업화는 대략 181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폴레옹 전쟁 종식과 대륙 봉쇄 해제로 무역 장벽이 일부 허물어졌지만, 동시에 독일 경제는 영국 산업과의 직접적인 경쟁에 노출되어 적응 압력이 커졌다. 또한 제국 대표자회의 주요 결의 이후 영토 변화로 수많은 소규모 영토가 사라지고 여러 중규모 국가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통일된 경제 구역은 형성되지 못했다. 상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제도적 요인은 1834년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의 창설이었다. 이는 조약 지역 내 상품의 면세 교환을 가능하게 하여 지역 시장을 더 큰 단위로 통합하는 핵심 전제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관세 동맹이 산업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정도는 제한적이었으며, 결정적인 성장 동력은 아니었다.[7] 국가, 사회, 경제 분야의 수많은 다른 개혁들도 중요했다. 특히 잘 알려진 프로이센 개혁은 다른 주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었으며, 농민 해방과 상공업 규제 개혁 등을 포함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실행은 주에 따라 세기 중반까지 지연되기도 했다.[8]
18세기 말부터 독일에서는 가내 수공업 외에도 최초의 현대적 공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784년 라팅겐에 최초의 기계식 방적기를 갖춘 크롬포드 방직 공장이 가동되었고, 1년 후 헤트슈테트 광산에 최초의 증기 기관이 도입되었다. 1796년에는 글라이비츠의 왕립 프로이센 제철소에서 최초의 연속 생산 코크스 용광로가 건설되었다.[9] 1798년에는 C. F. 베른하르트의 방적 공장이 켐니츠-하르타우에 설립되어 이 지역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이후 베른하르트 모델을 따른 방적 공장들이 켐니츠 주변에 다수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도들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초기 공장 대부분은 비교적 단순했고 아직 증기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실 생산을 위한 방적기 도입이 먼저 이루어졌고, 1830년대부터 섬유 생산 부문에 직기가 추가되었다. 전반적으로 초기 산업화는 단순 소비재 생산과 농산물 가공(리넨 및 양모 제조업, 증류소, 양조장, 제유소, 담배 공장 등)에 기반을 두었다. 바덴에는 비교적 일찍 몇몇 대형 방적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예를 들어 28,000개의 방추를 갖춘 성 블라지엔 방적 공장이나 에틀링거 방적 주식회사(Ettlinger Spinnerei AG)가 있었다. 19세기 초 섬유 산업의 새로운 분야는 면 가공이었으며, 작센이 선두를 달렸고 프로이센과 바덴이 뒤를 이었다. 프로이센의 중심지는 뒤셀도르프 지역이었고, 특히 1800년경 소규모 철강 및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산업 혁명 문턱에 있던 베르기셰스 란트 지역이었다. 라인트와 글라드바흐에만 1836년에 16개의 방적 공장이 있었다. 섬유 산업 전체는 최초로 산업화된 부문 중 하나였지만, 영국과 달리 독일 산업 혁명의 선도적인 부문은 아니었다. 성장 규모가 영국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1815년 이후 시작된 초기 산업 호황 단계는 1840년대 중반 농업 위기와 1848-1849년 독일 혁명의 영향으로 발전이 심각하게 저해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시기는 3월 이전 시대(Vormärz)의 빈곤주의(Pauperism) 정점이자 빌헬름 아벨이 말한 "구식" 농업 위기의 마지막 시기였다.[10]
2. 2. 행정 제도 개혁
18세기 영토를 확장하던 프로이센은 절대왕정 중심의 궁정국가가 가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패배는 국민국가로의 전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추진된 것이 바로 슈타인-하르덴베르크 개혁이다.이 개혁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행정 제도의 근대화였다. 중앙 정부에는 각 부처를 담당하는 성(省) 제도를 도입하고, 체계적인 관료 제도를 통해 중앙 정부와 지방 행정을 효율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이는 국가 운영의 중심이 왕실에서 행정 관료 조직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변화였다.
또한, 행정이 국민과 국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반영되었다. 특히 재정 분야에서는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을 명확히 분리하였으며, 통일된 조세 제도를 마련하여 국가 재정의 안정적인 수입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은 프로이센이 근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고 이후 산업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2. 3. 농노제 폐지
독일의 여러 영방 국가에서는 조세 특권뿐만 아니라 영지 내 농민에 대한 인격적 지배권까지 행사하던 귀족 지주와 농민 간의 관계를 조정하여,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농지개혁은 유상 방식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근대적 국민을 육성하고자 했다. 또한 신분과 특권에 기반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2. 4. 관세 개혁과 관세 동맹
나폴레옹 전쟁 종식과 대륙 봉쇄 해제 이후, 독일 경제는 한편으로는 무역 장벽이 일부 허물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영국 산업과의 직접적인 경쟁에 노출되었다. 이는 독일 경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높였다. 또한, ''제국 대표자회의 결의'' 이후 많은 소규모 영토가 사라지고 여러 중규모 국가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통일된 경제 구역은 형성되지 못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제도적 기반 마련의 필요성이 커졌고, 독일 각지의 산업계 요구에 따라 1834년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이 발족하였다. 프로이센이 1818년 제정한 관세법을 기반으로 한 이 동맹에는 오스트리아, 하노버(Hannover), 한자(Hansa) 자유도시 등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독일 연방 국가들은 대부분 참여하여 공동의 관세 제도를 채택했다. 참여한 영방들은 각자의 정치적 주권을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공통의 관세율을 적용했고, 동맹 내부의 상품 이동은 사실상 국내 거래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관세 수입은 각 영방의 인구 비율에 따라 분배되었다.
관세 동맹은 독일 국민 경제 형성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동맹 지역 내에서 상품의 자유로운 교환이 가능해지면서 이전까지 지역적으로 제한되었던 시장이 더 큰 단위로 통합될 수 있는 핵심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맹에 참가하는 영방의 수도 점차 증가했으며, 이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계기로 다음 해에 성립된 독일 제국의 경제적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관세 동맹이 산업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정도는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결정적인 성장 동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7] 관세 동맹 외에도 국가, 사회, 경제 분야에서 이루어진 여러 개혁들이 독일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프로이센 개혁과 같이 다른 주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된 개혁들은 농민 해방과 무역 관련 규제 완화 등을 포함하며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다만 이러한 개혁의 실제 적용은 주에 따라 차이가 있어 19세기 중반까지 지연되기도 했다.[8]
3. 발달 과정
독일 산업화의 핵심 성장 동력은 철도 건설이었다. 철도로 인해 발생한 수요는 채광, 금속 생산, 기계공학의 세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핵심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3. 1. 자본의 투자
초기 산업 기업의 자금 조달은 종종 자본금이나 가문의 자금에 의존했다.[18] 그러나 산업혁명을 관철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고정자본의 투하였으며, 특히 교통산업에 대한 투자가 중요했다. 독일 산업혁명 발현에 있어 교통산업 투자, 특히 1840년대 철도 건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철도 투자로부터 시작된 파급 효과는 1840년대 독일 역사상 최초의 순환성 호경기를 이끌었으나, 이러한 고정자본 투자의 파동은 1847년 경제공황으로 잠시 중단되었다.1853년에 이르러 독일 역사상 두 번째 불변고정자본의 대량 투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소모된 생산수단을 단순히 갱신하는 것을 넘어 확대재생산을 강력히 유도하는 자본 투자였다. 이 시기에도 철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5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철도 노선 연장 거리는 2배 증가했고, 화물 운송량은 거의 7배나 증가했다.
자본 집중은 은행 설립을 촉진했다.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은행을 비롯하여 디스콘토-게젤샤프트(Diskonton Gesellschaft), 다름슈타트 은행(Bank für Handel und Industrie), 베를린 상업은행(Berliner Handels-Gesellschaft) 및 기타 은행들이 1850년대에 등장했다.
장기적으로 기업 설립과 확장은 은행의 자본 공급에 의존했다. 초기 수십 년 동안은 주로 사설 은행가들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수익성이 높은 철도 건설 자금 조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들은 해당 주식의 발행 대리인이었고, 은행의 수장들은 종종 철도 회사의 관리 위원회나 감사 위원회에 참여했다. 라인 철도 회사의 사례는 사설 은행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초기에는 루돌프 캄파우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아헨의 다비트 한제만을 중심으로 한 쾰른 은행가 집단(A. 샤아프하우젠, 아브라함 오펜하임 등)이 합류했고, 나중에는 오펜하임이 주요 주주가 되었다. 철도 사업은 광업 및 중공업 투자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도 수행했다.[18]

그러나 철도 자금 조달은 위험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1840년대 초부터 서독 사설 은행가들 사이에서 주식회사 은행 설립 계획이 등장했지만, 프로이센 국가 관료주의로 인해 실패했다. 샤프하우젠 은행의 심각한 위기에 대응하여, 1848년 최초의 주식회사 은행으로 A. 샤아프하우젠 뱅크베라인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1853년에는 구스타프 메비센 등이 지분을 가진 Bank für Handel und Industrie|다름슈타트 은행de, 일명 다름슈타트 은행이 설립되었고, 1856년에는 다비트 한제만의 디스콘토-게젤샤프트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으며, 같은 해 베를린 상업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주식 회사들은 자본 요구 사항이 높은 산업 및 기타 벤처 사업 자금 조달에 집중했다.[18]
그 결과, 독일에서는 영국과 달리 은행 시스템의 분업화가 나타났다. 지폐 발행은 프로이센 은행과 같은 (준)국가 기관의 손에 남았고, 사설 은행과 주식회사 은행은 산업 주식회사 설립 및 주식 발행에 집중하며, 이는 독일 특유의 포괄적 은행 시스템 발전의 초기 단계가 되었다.[18]
3. 2. 생산의 상승
압연기를 도입한 공장과 기관차 및 기타 기계 제조소의 생산 증가는 선철 생산을 급속히 촉진시켰다. 이 시기 철강 소비량은 1834년 12만 1,039톤에서 1847년 41만 4,094톤으로 거의 3배 증가했다. 초기에는 수입품에 의존했지만 점차 자국 생산 비중이 높아졌다. 1842년 독일에 있던 245대의 기관차 중 독일제는 38대에 불과했으나, 1851년에는 1,084대 중 679대가 독일제였으며, 철로에 대한 수요도 점점 자국 제품으로 충당되었다. 철도에 대한 고정 자본 투자가 관련 금속공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은 독일 경제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1851년부터 1857년까지 철 소비량은 2.5배, 선철 생산 성장 속도는 약 2.5배 증가했다. 석탄 생산 역시 2.5배 증대했으며, 면사 생산은 1850년과 1857년 사이에 100% 이상 증가했다.
독일 산업화의 핵심 성장 동력은 철도 건설이었다. 철도 건설로 인해 발생한 수요는 채광, 금속 생산, 기계공학이라는 세 가지 밀접하게 연관된 핵심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철 생산량의 약 절반이 철도 건설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철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1850년대 이후 국내 철 생산량이 확대되면서 철도 건설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철도 네트워크 확장 과정에서 운송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이는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총 투자액의 약 25%가 철도에 투입되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제조업이나 다른 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보다 높은 수치였다.
철도 건설은 1840년대에 첫 번째 정점을 맞이했다. 1840년 약 580km였던 철도 노선은 1850년에는 7000km를 넘었고, 1870년에는 거의 25000km에 달했다. 1840년에는 42,000명 이상이 철도 건설과 운영에 고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석탄 채굴업 종사자보다 많은 숫자였다. 이 숫자는 계속 증가하여 1846년에는 거의 180,000명에 달했다. 이 중 약 26,000명은 운영 인력으로 영구 고용되었고, 나머지는 노선 건설에 투입되었다.[13]

기계공학 분야 역시 크게 발전했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최초의 증기 기관이 제작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807년 프란츠 디넨달과 요한 디넨달 형제가 에센에서 제작한 증기 기관은 주로 루르 지역 광산의 배수 작업에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하르코르트는 1817년 베터 (루르)에 기계 공장을 설립했다. 1836년 아헨 지역에는 총 1,000명의 직원을 둔 9개의 기계 공학 회사가 있었다.
1835년 철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레일과 기관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증기 기관 및 기관차 제조업체 수가 증가했다. 특히 보르지히 회사는 1841년 첫 기관차를 생산한 이후 1858년에는 1,000번째 기관차를 생산하며 1,100명의 직원을 둔 세계 세 번째 규모의 기관차 공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발전은 석탄 및 철강 산업 제품에 대한 수요를 더욱 증가시켰다.
금속 가공 분야에서 기계 공학은 가장 현대적이고 성장이 집중된 부문으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기업 외에도 가족 소유 형태의 중소기업이 많았으며, 주요 중심지로는 켐니츠, 츠비카우, 베를린, 드레스덴, 하노버, 라이프치히, 만하임, 쾰른 등이 있었다. 요한 폰 짐머만은 1848년 켐니츠에 독일 최초의 공작 기계 공장을 설립했다. 독일 기계 공학은 다양한 직업 학교 설립의 혜택을 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기술 대학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는 경험적 방식을 통해 신제품이 개발된 반면, 독일에서는 공학적 계산 방식이 점차 도입되고 있었다. 1860년대에는 증기 기관이 주요 생산품이었으나, 1871년에는 생산의 초점이 섬유 기계, 증기 기관, 농업 기계로 분산되었다.
증기 기관의 보급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1832년 프로이센 전체에 210대에 불과했던 증기 기관은 1846년 관세 동맹 영토에서 1,518개, 1861년에는 8,695개로 증가했으며, 1873년 프로이센에서만 25,000개 공장에서 증기 기관을 사용했다.
3. 3. 생산 기술의 진보
18세기 말부터 독일에서는 길드 수공업이 위기에 처했지만, 상업 분야에서는 이미 매뉴팩처(제조 공장)와 선대제(원시 산업)를 중심으로 기술적, 조직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약 10만 명의 노동자가 일했던 매뉴팩처에서는 분업을 통해 일종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고, 중세 말기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선대제가 발달했다. 특히 토지가 부족했던 동부 베스트팔렌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원료를 공급하고 생산된 린넨을 수거하여 유통시키는 방식이 성행했으며, 1800년경에는 이 분야에 최대 100만 명이 종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초기 산업 활동은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상부 슐레지엔, 작센 왕국 등지에 상업 중심지를 형성하고 무역 자본을 축적하는 기반이 되었으나, 모든 지역이 성공적으로 산업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6]나폴레옹 전쟁 이후 대륙 봉쇄가 해제되면서 독일 경제는 영국의 발달된 산업과 직접 경쟁하게 되었고, 이는 기술 혁신과 생산 방식 변화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또한 독일 관세 동맹(1834)의 결성은 상품 유통의 장벽을 낮추어 시장 통합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비록 관세 동맹 자체가 산업 발전의 결정적인 원동력은 아니었지만[7], 프로이센 개혁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사회·경제 개혁과 함께 산업화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8]
18세기 말부터 독일 곳곳에서는 현대적 공장의 초기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784년 라팅겐에 세워진 크롬포드 방적 공장은 기계식 방적기를 도입했고, 1785년에는 헤트슈테트 광산에서 최초의 증기 기관이 가동되었다. 1796년 글라이비츠의 왕립 프로이센 제철소에서는 코크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용광로가 건설되었으며[9], 1798년 켐니츠에는 베른하르트 방적 공장이 세워져 이후 이 지역 방직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도들은 대부분 제한적인 영향력에 그쳤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는 주로 섬유 산업과 같은 소비재 생산 및 농산물 가공 분야에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실 생산을 위한 방적기가 먼저 도입되었고, 1830년대부터는 직기 사용도 확산되었다. 특히 면 가공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여 작센, 프로이센(뒤셀도르프 지역, 베르기셰스 란트), 바덴 등지에서 발전했다.
184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이 확산되면서 기술적 진보가 더욱 뚜렷해졌다. 증기기관의 도입은 광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으며, 특히 루어(Ruhr)지역에서 대규모 석탄 산업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39년 시작된 개삭 공사를 통해 1841년 에센 부근에서 최초의 현대식 갱도가 운영을 시작한 것은 루르 탄광업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증기기관은 또한 광산 노동자 계층, 즉 광산 프로레타리아트의 증대를 가져왔다. 기계제조업 역시 금속 가공 기계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1850년대 이후 산업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생산 기술은 더욱 급속히 발전했다. 중공업 분야에서는 선철 제조에 코크스 고로(高爐)가 도입되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섬유 공업에서는 역직기의 수가 꾸준히 증가했으며, 1857년 공황 이후에는 기술적으로 낙후된 소규모 공장들이 정리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공장들이 늘어났다. 1860년대 호황기에는 노후된 방적 기계를 대신하여 증기력으로 작동하는 자동 방추가 도입되는 등 생산 설비의 근대화 투자가 확대되었다.
철도 건설은 독일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다. 철도 건설 자체는 물론, 레일, 기관차, 연료(석탄) 등에 대한 막대한 수요를 창출하며 광업, 제철업, 기계 공학 등 연관 산업의 동반 성장을 이끌었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 철 생산량의 절반 가량이 철도 건설에 사용될 정도였다. 철도망 확장은 운송 비용을 절감시켜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계 공학은 금속 가공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핵심 부문이었다. 보르지히와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다수의 중소기업들이 켐니츠, 츠비카우, 베를린, 하노버, 만하임, 쾰른 등지에 자리 잡았다. 1848년 요한 폰 짐머만이 켐니츠에 독일 최초의 공작 기계 공장을 설립하는 등 기술 혁신이 이어졌다. 특히 영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경험적 방식뿐만 아니라 공학적 계산에 기반한 기계 설계가 일찍부터 도입되었으며, 이는 직업 학교 및 기술 대학 설립과 함께 독일 기계 공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는 증기 기관이 주요 생산품이었으나 점차 섬유 기계, 농업 기계 등으로 생산 품목이 다양화되었다. 증기 기관의 수는 1846년 관세 동맹 지역 내 1,518개에서 1861년 8,695개로 급증했다.

광업 기술 역시 크게 발전했다. 증기 엔진을 이용한 배수 기술은 더 깊은 곳까지 채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특히 석회질 점토(marl) 층을 뚫고 채굴하는 심층 채굴 기술의 개발은 석탄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프란츠 하니엘과 같은 기업가들이 1830년대부터 루르 지역에서 심층 광산 개발을 선도했다. 1851년 이후 프로이센 정부가 광업에 대한 통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하고 1861년 광산법 개혁을 단행하면서 민간 자본의 투자가 활발해졌다. 이는 주식회사 형태의 대규모 광산 기업 설립을 촉진했는데, 윌리엄 토마스 멀바니가 설립한 히베르니아 AG(1854)와 하르페너 광업 AG(1856)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술적, 제도적 변화에 힘입어 루르 지역을 중심으로 독일의 석탄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15]
4. 지역별 산업화
독일의 산업 혁명 과정에서 산업 발달은 지역별로 매우 불균등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철도 네트워크 연결 상태, 원자재의 가용성, 노동력 확보의 용이성, 그리고 자본의 집중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산업화 시대가 진행되면서 일부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는 성공적으로 산업 발전에 적응했지만, 모든 지역이 산업화의 혜택을 고르게 누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라인란트나 작센, 루르 지역 등은 풍부한 자원과 교통의 이점을 바탕으로 주요 공업 지대로 성장한 반면, 슐레지엔이나 자우어란트, 지게란트 일부 지역처럼 지리적 여건이나 기존 산업 구조의 한계로 인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지역도 있었다.
산업 혁명 시대 말기에는 독일 내 지역을 산업화 정도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12] 첫째는 작센 왕국(특히 켐니츠 주변),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등과 같이 명확하게 산업화가 진행된 지역이다. 둘째는 뷔르템베르크, 바덴, 슐레지엔, 베스트팔렌 등 일부 산업 부문이나 특정 하위 지역에서 산업화가 두드러졌으나 지역 전체가 완전히 산업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곳이다. 셋째는 하노버나 튀링겐 일부 지역처럼 몇몇 도시에서 초기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전반적인 산업 발달은 미미했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동프로이센, 메클렌부르크 등과 같이 산업 발달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며 수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유지한 지역이다.
4. 1. 산업화 선도 지역

독일의 산업 발달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불균등한 발전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는데, 철도 네트워크 연결 여부, 원자재의 유무, 노동력 확보의 용이성, 자본의 가용성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업화 시대 동안 일부 오래된 상업 중심지들은 새로운 산업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예를 들어, 빌레펠트에서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리넨 생산이 대규모 섬유 공장으로 대체되었다. 부퍼탈(바르멘, 엘버펠트 포함)과 작센 지역 역시 기존의 상업적 전통 위에서 산업화를 이루었다. 특히 켐니츠는 작센 산업화의 핵심 도시로 부상하며 독일 최고의 산업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이곳에서는 공작기계, 섬유 기계, 섬유 산업,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증기 기관, 기관차 제작 및 화학 산업이 발달했다. 수도인 베를린에서는 기성복 산업, 기계 공학, 그리고 은행 및 보험 회사와 같은 금융업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라인란트 지역은 편리한 교통망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루르 지역은 일부는 라인 프로빈츠에, 일부는 베스트팔렌에 속해 있었으며, 풍부한 석탄과 철광석 덕분에 석탄 및 철강 산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루르 지역의 광업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채굴 지역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산업 지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기계 공학과 같이 원자재 산지와 반드시 가까울 필요가 없는 산업들은 다양한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예를 들어 기관차 공장은 종종 수도나 주요 도시에 건설되었다.
'''1846년 독일 기계 공구 공장 분포:[11]'''
반면, 모든 지역이 산업 발달의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한때 번성했던 슐레지엔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교통 여건 때문에 산업화 경쟁에서 뒤처졌다. 전통적인 철 생산지였던 자우어란트와 지게란트 지역의 일부는 인근 루르 지역의 급성장한 철강 산업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루르 지역의 발전에는 1847년 완공된 쾰른-민덴 간선 철도와 1862년 남쪽에 건설된 베르기쉬-마르키쉬 철도 회사의 노선이 큰 기여를 했다.
산업 혁명 시대 말기에는 독일 지역을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12]
# 산업화 지역: 작센 왕국(특히 켐니츠 주변),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라인 팔라티네이트, 헤센 대공국 등 명확하게 산업화가 진행된 지역.
# 부분적 산업화 지역: 뷔르템베르크, 바덴, 슐레지엔, 베스트팔렌, 프로이센 작센 주, 헤센-나사우 등 일부 부문이나 하위 지역에서 산업화가 두드러졌으나 지역 전체가 산업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곳.
# 초기 산업 시작 지역: 하노버 왕국(또는 하노버 주), 튀링겐 숲과 남부 튀링겐의 튀링겐-작센 공국 지역, 인접한 오버 및 미텔프랑켄 등 일부 도시에서 초기 산업이 시작되었지만 전반적인 산업 발달은 미미했던 곳.
# 농업 중심 지역: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포젠 주, 메클렌부르크 등 주로 농업에 의존하며 수공업 중심의 상업이 이루어진 지역.
광업, 특히 석탄 채굴은 산업화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19세기까지 광물 채굴은 군주의 광산 특권(Bergregal)에 따라 관리되었다. 자르 지역에서는 프로이센 국가가 대부분의 석탄 광산을 직접 소유했다. 프로이센 서부 영토에서는 1766년부터 국가의 감독이 강화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루르 강의 운항 능력이 개선되면서 석탄 수출이 용이해졌다. 1815년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방이 설립된 후, 도르트문트에 상위 광산 당국(Oberbergamt)이 설치되어 광산 운영, 작업 조건, 임금 등을 규제했다. 이는 노동자 보호 측면도 있었지만 기업가의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제약하기도 했다. 1790년에서 1815년 사이 석탄 생산량은 17.7만ton에서 51.3만ton로 증가했지만, 1815년 기준 광부 수가 3,4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적 비중은 아직 크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마티아스 슈티네스와 같은 인물은 1818년부터 석탄 운송 사업을 시작하여 라인란트와 네덜란드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벌어들인 수익으로 광산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사망 당시에는 루르 지역의 중요한 광산 기업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증기 기관을 이용한 배수 기술이 도입되면서 더 깊은 곳까지 채굴이 가능해졌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석회질 점토층(marl)을 뚫고 내려가는 심층 채굴 기술의 개발이었다. 구테호프눙스휘테의 공동 소유주였던 프란츠 하니엘은 1830년대 초 에센 근처에서 이러한 심층 광산을 처음으로 개발한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심층 광산의 수는 빠르게 증가하여 1845년에는 48개의 광산에서 95개의 증기 기관이 가동되었다. 1840년까지 도르트문트 광산 관할 구역의 석탄 생산량은 120만ton로 증가했고, 고용된 광부 수도 거의 9,000명에 달했다. 아헨 탄전 등 다른 지역에서도 석탄 생산이 증가했다.
1840년대부터 철도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철강 제품 수요가 급증했고, 이는 석탄 광업에 큰 호재로 작용했다. 또한 1851년부터 시작된 광업에 대한 국가 통제 완화와 1861년 프로이센 광산법 개혁은 민간 부문의 광업 투자를 촉진하여 루르와 슐레지엔 지역에서 광업 호황을 이끌었다. 이러한 법적 변화는 주식회사 형태의 현대적인 광산 기업 설립을 용이하게 했다. 아일랜드인 윌리엄 토마스 멀바니는 1854년 히베르니아 AG를 설립했고, 1856년에는 여러 주주들이 참여하여 하르페너 광업 AG가 설립되었다. 이 두 회사는 이후 수십 년간 루르 지역의 주요 광산 기업으로 성장했다. 1850년대 루르 지역에는 수많은 탄광이 새로 생겨났고, 1860년에는 그 수가 277개에 달했다. 이후 소규모 탄광들이 합병을 통해 대형화되면서 탄광 수는 줄었지만 생산 능력은 더욱 증가했다. 산업 혁명 말기에는 프리드리히 그릴로가 1873년에 설립한 겔젠키르헨 광업 AG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15]
중공업 분야에서도 초기 산업화 시기에 시작하여 훗날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이 많았다. 자르 지역에서는 카를 페르디난트 폰 슈툼-할베르크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버하우젠 근처 슈테르크라데에서는 1810년 여러 회사가 합쳐져 구테호프눙스휘테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1830년경 직원 수가 340명에 불과했지만, 1840년대 초에는 약 2,000명을 고용할 정도로 성장했다. 에센에서는 프리드리히 크루프가 1811년 주강 생산을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고, 아들 알프레트가 회사를 물려받은 후 1840년대 철도 건설 붐으로 인한 수요 증가 덕분에 비로소 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19세기 초 수십 년간 중요한 기술 혁신 중 하나는 목탄 대신 코크스(경석탄)를 사용하는 퍼들링 공법의 도입이었다. 이 공법은 1824년 노이비트의 제련소에서 처음 도입된 후 빠르게 확산되어 철 생산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이후 압연 공장, 선재 공장, 기계 공학 부서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철강 생산 시설들이 등장했다. 철도 건설은 레일을 비롯한 철강 제품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기술 혁신은 금속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코크스를 이용한 선철 생산 비중은 1850년 25%에서 1853년 63%로 급증했다. 1860년대에는 액체 선철로부터 철강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베세머 공법이 도입되었다. 1850년경 독일 연방 지역 전체에서 선철 생산량은 약 21.4만ton(노동자 13,500명)이었으나, 이후 10년간 150%, 그 다음 10년간 160%, 그리고 1870년부터 1873년까지는 350%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노동자 수는 100% 증가에 그쳤는데, 이는 생산 기술의 발전과 노동자 숙련도 향상 덕분이었다. 철강 생산량 역시 크게 늘어 1850년 약 20만ton(노동자 약 20,000명)에서 1873년에는 160만ton(노동자 79,000명)으로 증가했다.[16]
초기에는 소규모였던 중공업 회사들은 이 시기를 거치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크루프의 경우 1835년 67명이었던 직원이 1871년에는 9,000명, 1873년에는 거의 13,000명으로 늘어났다. 크루프나 일부 슐레지엔의 가문 기업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주식회사가 기업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또한, 광산, 제철, 제강, 압연, 기계 제작 등을 수직적으로 통합하거나 동종 기업을 수평적으로 결합하는 기업 형태가 등장했다. 구테호프눙스휘테, 보후머 페라인, 회쉬, 티센, 회르더 페라인,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가문 기업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성장했다. 특히 1872년 설립된 도르트문더 유니온과 1873년 설립된 겔젠키르헨 광업 AG는 처음부터 여러 기업을 합병하여 탄생한 대규모 기업이었으며, 이 두 프로젝트는 프리드리히 그릴로가 주도하고 아돌프 폰 한제만이 이끄는 디스콘토-게젤샤프트 은행이 자금을 지원했다.[17]
4. 2. 산업화 후발 지역
독일의 산업 발달은 지역별로 고르지 않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철도 네트워크 연결 상태, 원자재 확보의 용이성, 노동력 및 자본의 가용성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산업화 시대 동안 일부 오래된 상업 중심지는 성공적으로 산업 발전에 적응했다. 예를 들어, 빌레펠트에서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리넨 생산이 대규모 섬유 공장으로 대체되었다. 부퍼탈과 작센 지역 역시 기존의 상업적 전통을 바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특히 켐니츠는 작센 산업화의 핵심 도시로 부상하며 독일 최고의 산업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이곳에서는 공작기계, 섬유 기계, 섬유 산업,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증기 기관, 기관차 제작 및 화학 산업이 발달했다. 베를린은 기성복 산업, 기계 공학, 은행 및 보험 회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라인란트는 편리한 교통망을 활용하여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라인 프로빈츠와 베스트팔렌에 걸쳐 있는 루르 지역은 풍부한 석탄과 철광석 매장량 덕분에 석탄 및 철강 산업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전부터 광업이 이루어졌지만, 채굴 지역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산업 지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기계 공학과 같이 원자재 산지와 공장의 근접성이 덜 중요한 산업들은 다양한 지역에 자리 잡았는데, 예를 들어 기관차 공장은 주로 수도나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1846년 독일 기계 공구 공장 분포:[11]'''
반면, 모든 지역이 산업 발달의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과거 번성했던 슐레지엔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교통 여건 때문에 산업화 과정에서 뒤처졌다. 전통적인 철 생산지였던 자우어란트와 지게란트 지역의 일부는 인근 루르 지역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847년 쾰른-민덴 간선 철도 건설과 1862년 베르기쉬-마르키쉬 철도 회사의 노선 건설은 루르 지역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 혁명기 말에는 독일 내 지역을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12]
# 산업화된 지역: 작센 왕국(특히 켐니츠 주변), 라인란트, 알자스-로렌, 라인 팔라티네이트, 헤센 대공국 등 명확하게 산업화가 진행된 지역.
# 부분적 산업화 지역: 특정 산업 부문이나 하위 지역에서 산업화가 두드러졌으나, 전체적으로 산업화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지역. 뷔르템베르크, 바덴, 슐레지엔, 베스트팔렌, 프로이센 작센 주, 헤센-나사우 등이 해당된다.
# 초기 산업 시작 지역: 일부 도시에서 초기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그 외 지역의 산업 발달은 미미했던 곳. 하노버 왕국 (또는 하노버 주), 튀링겐 숲과 남부 튀링겐의 튀링겐-작센 공국 지역, 인접한 오버 및 미텔프랑켄 등이 포함된다.
# 농업 중심 지역: 산업 발달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며, 상업 활동도 대부분 수공업 형태에 머물렀던 지역.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포젠 주, 메클렌부르크 등이 대표적이다.
5. 사회 변화
1848년과 1849년의 혁명은 초기 산업화와 본격적인 산업 혁명 사이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1840년대의 위기감에서 벗어나 1850년대의 낙관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1인당 사회 생산량은 산업화 이전 시대에 비해 10배나 증가했다.
1850년대 산업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경탄(경질탄) 사용량의 급증이었다. 이는 여러 성장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철강 생산량의 급증, 기관차를 포함한 기계 제작의 증가, 철도 운송 서비스의 확대는 에너지 수요를 크게 늘렸다. 연료와 산업 제품에 대한 수요 증가는 다시 철도망 확장을 촉진했고, 이는 새로운 기관차와 철도 레일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1850년대와 1860년대의 산업 혁명은 주로 철도 건설과 중공업 투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경제 발전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등에서 수입된 기계 제품과 독일 내 공장의 등장은 기존의 전통적인 경제 방식에 큰 위협이 되었다. 목탄을 이용한 철 제품 생산이나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되던 섬유 제품이 대표적이다. 특히 값싼 면직물이 보급되면서 린넨 무역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갔고, 이는 독일 섬유 산업의 핵심 분야를 위협했다.
한동안 전통적인 생산 방식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일부는 특정 제품에 특화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가내 직조공에게 지급하는 수수료를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기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웠고, 오래된 직종이 공장 산업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일자리를 잃고 탈산업화와 농업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수공업 부문 역시 인구 증가와 산업 경쟁 심화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베를린 재단사 혁명 (1830)과 같은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시기 전체 경제 성장률은 특별히 높지 않았다. 연평균 국민 순생산 증가율은 1850년에서 1857년 사이 2.36%였고, 1863년에서 1871년 사이에는 약 3.31%로 증가했다.[19] 하지만 산업 부문만 보면 훨씬 큰 성장을 보였다. 초기에는 섬유 산업과 같은 소비재 생산이 주를 이루었으나, 1840년대 이후 철도와 중공업이 핵심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산업 발전은 실질 임금 변동보다는 자체적인 이윤 기대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 부문(2차 부문)이 전체 경제를 주도할 만큼 강력해지지는 못했다. 1870년경 산업 혁명이 끝날 때까지도 농업(1차 부문)의 발전이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거시 경제적 경기 순환은 독일 제국 초기에 이르러서야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 경제 변동은 산업적 요인과 전통적인 농업 호황 및 불황이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
전통적인 농업 위기는 주로 흉작과 같은 자연재해와 관련이 있었다. 풍년은 식량 가격을 낮췄지만, 농민 소득 감소로 이어져 산업 제품 수요에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흉작은 식량 가격 급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농업 위기는 1805/06년, 1816/17년(여름 없는 해), 1829/30년에 발생했으며,[21] 1846/47년(감자 혁명)에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22]
산업형 경기 순환은 1840년대 중반 독일에서 처음 관찰되기 시작했다. 1841년부터 1845년까지 철도 투자 붐이 일었으나 곧 붕괴되었다. 이 하락세는 1847년 농업 위기와 겹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식량 가격 급등과 기아 위기에 실업과 소득 감소가 더해져 사회 하층민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 경제 침체는 1849년 말 또는 1850년 초까지 이어졌다.[23]
1850년대 초의 흉작은 철도 운송 덕분에 지역적 영향에 그쳤는데, 이는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 시기에는 모든 상업 부문, 특히 철도에 대한 투자가 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 성장은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이어진 1857년 공황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이 위기는 주로 함부르크에서 발생한 무역, 투기, 은행 위기였으며, 미국, 영국, 스칸디나비아와의 무역 금융이 붕괴되면서 촉발되었다. 미국의 한 은행 파산이 연쇄적인 금융기관 붕괴로 이어진 것이 시발점이었다. 산업 부문에서도 과잉 생산 능력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 위기는 1873년의 설립자 위기보다는 기간이 짧고 충격도 덜했다.
1860년대 전반기는 1850년대에 비해 경제 성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한 미국 남부의 면화 공급 부족이 독일 섬유 산업에 타격을 준 것과 같은 외부 요인이 컸다. 또한 1857-1859년 위기를 겪은 기업들이 투자를 꺼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 중반 이후 다시 상당한 경제 상승세가 나타나 "설립자 붐"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성장은 중공업뿐만 아니라 섬유 산업과 농업도 함께 이끌었다. 1870/71년 전쟁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성장은 1873년 설립자 위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기 중반의 경제 변동은 여전히 농업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산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24]
국가/지역 | 1830 | 1840 | 1850 | 1860 | 1870 | 1880 | 1890 | 1900 | 1910 | 1913 | 1925 | 1938 |
---|---|---|---|---|---|---|---|---|---|---|---|---|
오스트리아-헝가리 | 250 | 266 | 283 | 288 | 305 | 315 | 361 | 414 | 469 | 498 | – | – |
벨기에 | 295 | 345 | 411 | 490 | 571 | 589 | 630 | 721 | 854 | 894 | 985 | 1015 |
프랑스 | 264 | 302 | 333 | 365 | 437 | 464 | 515 | 604 | 680 | 689 | 893 | 936 |
독일 | 245 | 267 | 308 | 354 | 426 | 443 | 537 | 639 | 705 | 743 | 712 | 1126 |
이탈리아 | 265 | 270 | 277 | 301 | 312 | 311 | 311 | 335 | 366 | 441 | 480 | 551 |
네덜란드 | 347 | 382 | 427 | 452 | 506 | 542 | 586 | 614 | 705 | 754 | 909 | 920 |
러시아/소련 | 170 | 170 | 175 | 178 | 250 | 224 | 182 | 248 | 287 | 326 | 232 | 458 |
스페인 | 263 | 288 | 313 | 346 | 329 | 323 | 321 | 351 | 370 | 367 | 426 | 337 |
스웨덴 | 194 | 198 | 211 | 225 | 246 | 303 | 356 | 454 | 593 | 680 | 765 | 1097 |
스위스 | 276 | 315 | 391 | 480 | 549 | 676 | 705 | 785 | 895 | 964 | 1020 | 1204 |
영국 | 346 | 394 | 458 | 558 | 628 | 680 | 785 | 881 | 904 | 965 | 970 | 1181 |
5. 1. 부르주아지의 성장
산업 혁명 시기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의 상업과 무역 방식이 현대 산업과 공존했듯이,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구시대적 사회 집단과 새로운 사회 문제들이 뒤섞였다.
19세기는 부르주아 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 초기에는 농촌 사회가 우세했고, 후기에는 산업 노동자 계층이 수적으로 부르주아를 앞지르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 가치관, 규범은 19세기 사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군주와 귀족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민족주의 운동과 부르주아 운동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부르주아는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으며,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근대 초기의 전통을 잇는 구도시 부르주아로, 주로 장인, 여관 주인, 상인 등이 해당되었다. 이들은 점차 소상인이나 개별 장인과 같은 소부르주아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19세기까지 정식 시민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5%에서 30% 정도였다. 라인 연방 국가, 프로이센, 그리고 이후 다른 독일 국가들에서 시민 평등 개념이 점진적으로 도입되면서, 이들은 과거에 누렸던 배타적인 시민 신분을 잃게 되었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구도시 시민 집단은 19세기 초까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이들에게는 가문의 전통, 사회적 지위, 익숙한 사업 방식, 그리고 계급에 맞는 소비 패턴이 중요했다. 반면, 이들은 빠르고 위험해 보이는 산업 발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적으로는 19세기 중반까지 이 집단이 부르주아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둘째는 18세기부터 등장한 새로운 시민 집단으로, 주로 교양 부르주아(Bildungsbürgertum)와 경제 부르주아(Wirtschaftsbürgertum)를 포함했다. 교양 부르주아의 핵심은 독일 연방 내 국가들의 공무원, 법조계 인사, 그리고 19세기에 확장된 김나지움과 대학교의 고위직 종사자들이었다. 공무원 외에도 의사, 변호사, 공증인, 건축가와 같은 자유 전문직 종사자들의 수는 1830년대와 4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신분이나 특권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학식에 기반하여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는 점이다.
교양 부르주아는 자체적으로 충원되는 경향이 강했지만, 19세기 전반기에는 사회적 상승을 원하는 이들에게 비교적 열려 있었다. 약 15~20%는 소부르주아 배경 출신으로, 학문과 대학 교육을 통해 성공적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출신 배경의 차이는 교육과 유사한 사회적 환경을 통해 점차 희미해졌다.
관료 및 법조계 엘리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교양 부르주아는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부르주아 하위 집단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다른 부르주아 집단은 물론, 노동 계급과 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규범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남편은 공적인 활동을 하고 아내는 가정과 자녀 양육을 책임지는 부르주아적 가족 모델은 20세기까지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교양 부르주아는 신인문주의적 교육 이상을 중시했으며, 이를 통해 특권적인 귀족 계급이나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과 스스로를 구별했다.
셋째는 산업 발달과 함께 새롭게 부상한 경제 부르주아이다. 독일의 경제 부르주아는 주로 기업가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까지 이 집단은 수백 개의 기업가 가문으로 구성되었으나, 1873년경에는 수천 가구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경제 부르주아는 수적으로 가장 작은 부르주아 하위 집단이었다. 이들은 산업가 외에도 은행가, 자본가, 그리고 점차 늘어나는 고임금 관리직 등을 포함했다.
경제 부르주아의 사회적 기원은 다양했다. 아우구스트 보르시히처럼 장인 출신으로 사회적 상승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지만, 크루프와 같이 오랫동안 명망 높고 부유했던 상인 가문 출신도 상당수였다. 산업가의 약 54%는 기업가 가문 출신이었고, 26%는 농부, 자영업 장인 또는 소상인 가문 출신이었으며, 나머지 20%는 교양 부르주아, 장교 가문, 대지주 출신으로 추정된다. 노동 계급이나 농촌 하층 계급 출신의 산업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자수성가형 인물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1851년에는 기업가의 1.4%만이 대학 교육을 받았지만, 1870년에는 전체 기업가의 37%가 대학교를 다녔다. 1850년대부터 경제 부르주아는 호화로운 저택을 짓거나 토지를 매입하는 등 생활 방식을 통해 다른 부르주아 집단과 차별화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귀족의 생활 방식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대규모 토지 소유와 같은 막대한 부를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26]
5. 2. 빈곤 문제와 노동 운동의 등장

산업 혁명 시기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도 큰 변화를 겪었다. 경제 분야에서 구시대적 형태의 상업과 무역이 현대 산업과 나란히 존재하게 된 것처럼, 구시대적 삶의 방식과 새로운 삶의 방식, 사회 집단과 사회 문제 또한 혼합되었다.
새로운 산업의 성장은 일부 지역에서 인상적이었지만, 오랫동안 이러한 추진력만으로는 증가하는 인구를 적절하게 고용하고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된 직업의 붕괴와 수공업 부문의 위기는 사회적 어려움을 악화시켰다. 특히 과도한 인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던 제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린넨 무역의 쇠퇴는 독일 섬유 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위협했고, 많은 직종이 기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 오래된 직종이 공장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면 일자리를 잃고 탈산업화와 재농업화 과정을 겪기도 했다.
농촌 사회에서는 18세기 이후 경작지가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소규모 농업 계층의 농가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농촌 수공업이나 가내 수공업과 같은 상업적 생계 수단이 이에 기여했지만, 수공업의 위기와 가내 수공업의 쇠퇴로 이들 중 상당수가 빈곤에 빠졌다. 이러한 발전은 3월 혁명 이전 시기(Vormärz)의 빈곤 문제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중장기적으로 공장 노동자의 상당 부분이 이 집단에서 나왔지만, 과도기 동안 산업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빈곤화를 의미했다.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하락하다가 결국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27]
수공업 부문 역시 위기를 겪었다. 세기 전반기 인구 증가로 수공업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재단이나 제화와 같은 일부 직종은 과잉 인력 상태가 되었다. 직공들은 장인이 될 기회를 잃었고, 자영업 수공업자들의 수입조차 매우 낮았다. 특히 산업과 경쟁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은 큰 압박을 받았으며, 이는 베를린 재단사 혁명 (1830)과 같은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수공업자들은 산업 자본주의적 조건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는데, 예를 들어 건설업은 도시 성장의 혜택을 보았고, 다른 수공업들은 생산보다는 수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1840년대 중반부터 하위 사회 계층의 구성과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가 사회 담론에서 중요해지면서 1860년대에는 '빈곤주의(Pauperism)' 개념을 대체하게 되었다. 동시대 정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수동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직인과 조수, 그리고 공장 및 산업 임금 노동자를 포괄하는 다양한 집단이었다. 1849년 프로이센에서 이들 "노동 계급"은 전체 고용 인구의 약 82%, 부양 가족을 포함하면 전체 인구의 67%를 차지했다.
이 중 현대적인 공장 노동자는 처음에는 소수였다. 1849년 프로이센에는 약 27만 명의 공장 노동자(제조업 포함)와 5만 4천 명의 광부가 있었으며, 총 32만 6천 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1861년까지 54만 1천 명으로 증가했다. 1870년대 초 산업 혁명 말기에는 프로이센에서 산업 노동자가 88만 5천 명, 광부가 39만 6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1871년 새로운 독일 제국 통계청은 노동력의 32%가 광업, 산업, 야금 및 건설 부문에 속한다고 계산했다. 산업 및 농업 외 수동 노동자와 하인의 비율도 15.5%로 여전히 높았다. 산업-광업 고용 측면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작센이 노동력의 49%로 선두를 달렸다.

노동 계급 내에서도 소득 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대규모 공장에서는 숙련, 반숙련, 비숙련 노동자로 구성된 뚜렷한 공장 계층 구조가 만들어졌다. 숙련 노동자의 핵심은 주로 위기에 처한 숙련 직업의 직인과 장인 출신이었다. 인쇄공이나 활자공과 같은 전문 직업군은 상당한 교육을 받았고 초기에 스스로를 조직했으며, 숙련 노동력의 선봉으로 여겨졌다. 슈테판 본(Stephen Born)과 전 독일 노동자 형제단(General German Workers' Brotherhood)의 많은 추종자들이 이들 중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는 대부분 도시 하층 계급이나 주변 농촌 지역에서 유입되었다. 1850년대 이후 성장하는 산업은 더 많은 내부 이주민을 끌어들였다.
여성 노동은 섬유 산업과 같은 일부 산업에서 널리 퍼져 있었지만, 여성은 광업이나 중공업에서는 거의 고용되지 않았다. 초기 수십 년 동안 아동 노동 역시 섬유 산업에 존재했지만, 그 규모는 영국의 산업화 초기에 비해 훨씬 적었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남았다. 그러나 아동과 여성 노동은 농업과 재택 산업에서는 여전히 널리 퍼진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매우 이질적이었던 노동자 집단은 주로 도시로의 이주를 통해 점차 공통된 정체성을 가진 노동력으로 통합되었다. 농촌 하층 계급 출신들은 도시에서 더 안정적이고 나은 임금을 기대하며 이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질적인 "노동 계급"의 여러 계층은 좁은 노동자 구역에서 함께 생활하며 끈끈한 사회적 환경을 형성하며 점차 융합되었다.
"노동 계급" 내에서는 사고방식에 깊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의 도시와 농촌 하층 계급은 자신들의 고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산업에서의 새로운 소득 기회는 변화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상황을 부당하다고 인식하고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부상하는 노동 운동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29] 종속 노동자 집단 사이에서 확산되는 사회적 고충은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고, 사회 개혁가들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했다.[30][31]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데이(Thomas Nipperdey)는 독일 산업화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전반적으로, 독일의 산업화는 그 효과가 긍정적이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와 시골, 그리고 결국 세계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를 만들었다. 그것은 정체된 경제에서 인구 증가, 불완전 고용 및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의존과 궁극적으로 기아를 폐지했다. 그것은 생산의 엄청난 개선과 생활 수준의 단기적 및 장기적 개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 측면에서, 그것은 소득의 상대적 수준을 바꾸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815년에서 1873년 사이에 부의 통계적 분포는 기업가와 노동자에 대해 각각 77%에서 23% 수준이었다. 한편, 중단된 성장과 도시화, "소외", 새로운 하위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적 비참함, 새로운 불의와 새로운 지배자, 그리고 궁극적으로 계급 투쟁과 같은 새로운 위기의 형태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Nipperdey, 1996, p. 178)
5. 3. 이민의 증가

산업화 초기, 새로운 공장들은 주로 지역 하층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의 이주는 처음 수십 년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신 많은 사람들은 해외 이주를 사회적 어려움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생각했다. 19세기 초반 수십 년 동안 이러한 해외 이주의 규모는 아직 크지 않았다. 1820년부터 1830년 사이에는 매년 3,000명에서 5,000명 정도가 독일을 떠났다.
하지만 1830년대부터 이주자 수는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만연했던 빈곤 문제와 1846년에서 1847년 사이의 농업 위기가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주민 수는 1847년에 8만 명에 달하며 첫 번째 정점을 기록했다.
이주 과정 자체도 점차 조직화되었다. 처음에는 이주를 돕는 협회들이 생겨났고, 이후에는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대리인들이 등장했다. 이들 대리인 중 일부는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고객을 속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일부 지역, 특히 독일 남서부와 바덴에서는 정부가 사회적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
1850년대 초반에도 이민자 수는 계속 증가하여 1854년에는 한 해에만 23만 9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독일을 떠났다. 여기에는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총 약 110만 명이 이주했으며, 이 중 4분의 1은 독일 남서부 지역 출신이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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