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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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랑고바르드족은 1세기경부터 존재한 게르만 민족으로, 랑고바르드라는 이름은 긴 수염에서 유래했다. 북부 독일에서 기원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 568년 알보인 왕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랑고바르드족은 초기에는 게르만 다신교를 믿었으나,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독자적인 베네벤토 전례를 발전시켰다. 랑고바르드어는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며, 금속 세공, 보석 세공 등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였다. 774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정복당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은 멸망했지만, 이탈리아의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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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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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랑고바르드족은 본래 '늑대'라는 뜻의 '윈닐리(Winnili)'라고 불렸다. 이 이름은 원시 게르만어 어근 "*wulfaz"에서 유래했다.[6] 1세기에 반달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랑고바르드(Lombards)'로 이름을 바꿨다. '랑고바르드'라는 이름은 '긴 수염'을 뜻하는 원시 게르만어 단어 *''langaz''와 *''bardaz''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랑고바르드족 남성들이 길게 수염을 길렀던 관습을 반영한다.
랑고바르드족은 게르만족의 일파로, 전설에 따르면 덴마크를 포함한 북부 독일 지역에서 기원했다.[4] 이들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8세기에 바오로 디아코누스가 쓴 ''롬바르드족의 기원''과 ''롬바르드족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7세기 문헌 『랑고바르드족의 기원(Origo gentis Langobardorum)』과 8세기 파울루스 디아코누스가 쓴 『랑고바르드족의 역사』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은 전쟁의 신 그워단(Gwōdan)으로부터 '랑고바르드'(긴 수염)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100] 윈니리족과 반달족이 싸울 때, 반달족은 그워단에게 승리를 빌었고, 그워단은 해 뜰 때 처음 본 쪽에 승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윈니리족 족장의 어머니 감바라는 그워단의 아내 프레아(Frea)에게 승리를 빌었고, 프레아는 윈니리족 여성들에게 머리를 풀어 수염처럼 보이게 하고 그워단의 침대 동쪽에 서 있으라고 조언했다. 그워단이 일어나 동쪽 창문으로 윈니리족 여성들을 보고 "저 긴 수염(롱기발비)들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프레아는 "당신이 이름을 준 자에게 승리를 주십시오"라고 말했고, 그워단은 윈니리족에게 승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101]
랑고바르드족의 '긴 수염'이라는 뜻은 부족의 상징이 되었으며, 남성들은 수염을 길게 길렀다.[102][103]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주민과 동화된 후에도,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랑고바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의 롬바르디아로 불리며 그들의 이름을 남겼다.
3. 역사
''롬바르드족의 기원''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은 '빈닐리'라는 작은 부족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구 과잉으로 인해 일부가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했다.[8] 이들은 갬바라와 그녀의 아들 이보르와 아이오의 지휘 아래 발트해 해안[11] 또는 엘베강 유역[12]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반달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빈닐리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수염처럼 묶어 남자처럼 보이게 한 덕분에 고단(오딘)의 가호를 받아 승리했고, '긴 수염'이라는 뜻의 랑고바르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15]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9년에서 16년 사이 로마 역사가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그는 랑고바르드족을 야만성에서 게르만족을 능가하는 종족이라고 평가했다.[28] 스트라보와 타키투스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은 기원 초 엘베강 하구 근처에 거주했으며,[29] 농경 생활을 했다.[35] 타키투스는 랑고바르드족을 수가 적지만 용맹한 부족으로 묘사했다.[36]
5세기 말, 랑고바르드족은 도나우강 중류 지역으로 이동하여 헤룰리족, 게피드족 등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00] 오도아케르가 루기족을 격파한 후 공백지가 된 노리쿰 속주 북쪽으로 이동했다.[111] 타토 왕과 와코 왕 치하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을 정복했다.[112]
540년경 아우도인이 왕위에 올랐고,[113] 54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동맹을 맺고 판노니아로 이주했다.[113] 게피드족과의 군사 충돌에서 승리한 후,[116] 고트 전쟁에 참여하여 토틸라를 전사시키는 등 활약했으나, 여러 만행으로 인해 나르세스에게 추방당했다.[117][103]
568년 5월, 알보인의 지휘 아래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121][122][123] 이들은 게피드족, 불가르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20,000명의 작센족 전사도 합류했다.[69][70][121]
569년 북부 이탈리아의 포룸 율리이를 시작으로, 밀라노 등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켰다.[69] 파비아는 3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572년에 함락되어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토스카나를 정복하고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을 세웠다.[69]
랑고바르드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572년 알보인과 574년 클레프의 암살 이후 10년간 왕위가 비었고, 각지의 지배자들은 독립적인 영지를 확보했다.[125] 아우타리가 왕으로 선출되고 파비아를 수도로 하는 왕국 형태를 갖추었지만, 남부와 북부의 공국들은 여전히 독립적인 성향을 보였다.[125] 랑고바르드 왕국은 고도로 분권화된 왕국으로 평가받으며,[126] 2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및 중부 대부분을 지배했다.
773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1세에게 정복된 후, 카를 1세는 프랑크 왕과 랑고바르드 왕을 겸임하게 되었다.[127]
3. 1. 초기 역사
랑고바르드족은 자신들의 전설에 따르면, 현대의 덴마크를 포함한 북부 독일/덴마크 지역에서 기원했다.[4] 랑고바르드족의 게르만족 기원은 유전학적,[79] 인류학적,[4] 고고학적, 그리고 초기 문학적 증거로 뒷받침된다.[4]
랑고바르드족의 기원, 역사, 관습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8세기에 쓰여진 바오로 디아코누스의 ''Historia Langobardorum''(롬바르드족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바오로의 롬바르드족 기원에 대한 주요 자료는 7세기의 ''Origo Gentis Langobardorum''(롬바르드족의 기원)이다.
''Origo Gentis Langobardorum''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은 북부 독일/덴마크 지역[4]에 살았던 '빈닐리'[3]라는 작은 부족에서 기원했다. 빈닐리는 세 그룹으로 나뉘었고, 그중 한 그룹은 다른 땅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이 이주의 이유는 아마도 인구 과잉이었을 것이다.[8] 이들은 갬바라와 그녀의 아들 이보르와 아이오에 의해 이끌려[9][10] 발트해 해안[11] 또는 엘베강의 바르덴가우인 '스코린가'에 도착했다.[12] 스코린가는 반달족과 그들의 추장인 암브리와 아시 형제가 통치했는데, 이들은 빈닐리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전쟁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빈닐리는 젊고 용감했고, "무기를 통해 자유를 지키는 것이 조공을 바쳐 더럽히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며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13] 반달족은 전쟁을 준비했고, 고단[4]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해가 뜰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14] 빈닐리는 수가 적었고,[13] 갬바라는 프레아[4]의 도움을 구했는데, 그녀는 모든 빈닐리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수염처럼 얼굴 앞으로 묶고 남편과 함께 행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해가 뜰 때 프레아는 남편의 침대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를 깨웠다. 그래서 고단은 빈닐리를 먼저 발견하고 "이 긴 수염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었고, 프레아는 "주님, 당신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셨으니, 이제 승리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15] 그 순간부터 빈닐리는 '긴 수염'이라는 뜻의 ''랑고바르디''(라틴어), ''롱고바르디''(이탈리아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이론에 따르면 "랑고바르드"라는 이름은 오딘의 이름인 ''랑바르드''에서 유래했다.[18]
랑고바르드족과 고트족의 이주 전통 사이의 유사점은 기원전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부족의 주요 이동이 발생했음을 시사하며, 이는 토이토니와 킴브리가 북부 독일의 고향을 떠나 중앙 독일을 거쳐 로마 이탈리아를 침략한 시기와 일치한다.[27]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서기 9년에서 16년 사이에 로마 궁정 역사가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기병대 사령관 자격으로 로마 원정에 동행했다.[29] 파테르쿨루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랑고바르디의 힘이 꺾였고, 그 종족은 야만성에서 게르만족을 능가했다"고 말했다.[28]
스트라보 (서기 20년)와 타키투스 (서기 117년)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랑고바르드족은 기원 초 직후 엘베강 하구 근처에서 차우치족 옆에 거주했다.[29] 스트라보는 랑고바르드족이 엘베강 양쪽에 거주했다고 주장했다.[29]
독일 고고학자 빌리 베게비츠는 하 엘베 지역의 여러 철기 시대 매장지를 "랑고바르드족"으로 정의했다.[32] 매장지는 화장장이었고 일반적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로 추정되므로 정착지의 분열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33] 하 엘베 지역은 야스토르프 문화 지역에 속하며 엘베 게르만족이 되었으며, 라인강, 베저강, 북해 사이의 지역과는 달랐다.[34]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은 농경 민족이었다.[35]
타키투스는 또한 랑고바르드족을 엘베강의 셈노네스족과 강의 숲이 바다까지 뻗어 있는 네르투스 숭배 종족 사이에 위치한 원격하고 공격적인 수에비족 부족으로 간주했다. 서기 1세기 말에 그는 자신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랑고바르드족에 대해 "그들의 적은 수가 특징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가장 강력한 부족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전쟁의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안전하다"는 뜻이었다.[36]
타키투스는 또한 랑고바르드족이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동맹국이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마르보드 마르코만니족 왕의 신하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서기 17년 아르미니우스와 마르보드 간의 전쟁이 발발한 후 랑고바르드족과 셈노네스족은 아르미니우스의 동맹으로 돌아섰다.[37]
47년에 체루스키족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고,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의 조카인 새로운 지도자를 그들의 땅에서 추방했다. 랑고바르드족은 38년 전에 독립 투쟁의 선두에 섰던 부족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나타났으며, 추방된 지도자를 주권자로 복귀시켰다.[38]
3. 2. 민족 대이동 시대
5세기 말, 랑고바르드족은 도나우강 중류 지역으로 이동하여 헤룰리족, 게피드족 등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00] 이들은 오도아케르가 488년 루기족을 격파한 후 공백지가 된 노리쿰 속주 북쪽으로 이동했다.[111] 랑고바르드족은 헤룰리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타토 왕 지휘 아래 동쪽의 펠트(Feld) 평원으로 이동하여 독립 세력이 되었다.[111] 이후 와코 왕 치하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112]
540년경 와코가 사망하고 왈타리가 왕위를 이었으나 단명하였고, 아우도인이 왕위에 올랐다.[113] 54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과 동맹을 맺고 판노니아로의 이주를 허가했다.[113] 랑고바르드족은 시르미움에 거점을 둔 게피드족과 대립했는데, 551년 군사 충돌에서 게피드족을 격파했다.[116] 이후 랑고바르드족은 동로마 제국의 동맹군으로서 고트 전쟁에 참여하여 552년 토틸라를 전사시키는 등 활약했으나, 점령한 도시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고 교회에 피난한 부녀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만행을 저질러 나르세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했다.[117][103]
3. 3. 이탈리아 침입과 랑고바르드 왕국
568년 5월, 알보인의 지휘 아래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진입했다.[121][122][123] 이들은 게피드족, 불가르족, 사르마티아인, 판노니아인, 수아비안, 노리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20,000명의 작센족 전사와 그 가족들도 합류했다.[69][70][121] 랑고바르드족과 그 연합 부족의 총 수는 약 30만 명이었고, 무장 병력은 4만에서 5만 명으로 추정된다.[123]
이탈리아 북동부의 *포룸 율리이*(치비달레 델 프루리)가 569년에 가장 먼저 함락되었고, 알보인은 이곳에 그의 조카 기술프를 수장으로 하는 첫 번째 롬바르드 공국을 세웠다.[69] 곧이어 비첸차, 베로나, 브레시아가 함락되었고, 569년 여름에는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로마 도시인 밀라노가 정복되었다.[69] 파비아는 3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572년에 함락되어 랑고바르드 왕국의 첫 번째 수도가 되었다.
이후 랑고바르드족은 토스카나를 정복하고 스폴레토와 베네벤토라는 두 개의 공국을 세웠다.[69] 이 공국들은 곧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었고, 북부 왕국보다 오래 존속하여 12세기까지 이어졌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건국 초기부터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572년, 알보인은 동로마 제국과 공모한 족내 유력자에게 암살되었고,[125] 그의 뒤를 이은 클레프 역시 574년에 암살되었다.[125] 이후 10년간 왕위가 비어있는 동안, 각지의 랑고바르드계 지배자들은 독립적인 영지를 확보했다.[125] 동로마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이들은 아우타리를 왕으로 선출하고 파비아를 수도로 하는 왕국의 형태를 갖추었다.[125] 그러나 남부의 베네벤토 공국과 스폴레토 공국, 북부의 프리울리 공작과 트렌토 공작은 여전히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다.[125]
랑고바르드 왕국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국가의 모자이크였다"라고 평가될 정도로 고도로 분권화된 왕국이었다.[126]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및 중부 대부분을 지배하며 2세기 동안 존속했다. 773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1세에게 정복된 후, 카를 1세는 프랑크 왕과 랑고바르드 왕을 겸임하게 되었다.[127]
3. 4. 프랑크 왕국에 의한 정복과 그 이후
773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1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프랑크인과 랑고바르드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27] 781년 카를 1세는 아들 피핀을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임명했다.[127] 이탈리아 왕국은 랑고바르드 왕국과 스폴레토 공국으로 구성되었고, 베네벤토 공국은 독립을 유지했다.[127]
4. 사회와 문화
랑고바르드족 사회는 귀족, 자유민, 비자유민, 노예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였다.[83]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귀족들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게르만족 이동 시기에 왕권은 단일 군사 지휘 필요성에 의해 발전했다.[84] 랑고바르드 사회는 프랑크 갈리아와 스페인의 서고트족과 유사하게 계층화되었다.[83]
랑고바르드 귀족은 다른 지역보다 가난하고 도시화되었으며, 토지 소유도 적었다. 8세기까지 귀족들은 사법 업무 관련 수입에 대해 왕에게 크게 의존했다. 많은 롬바르드 귀족들은 중요한 군사 및 입법 기능을 가졌음에도 ''iudices''(판사)로 언급되었다.[83] 롬바르드 왕국의 자유민은 프랑크 영토보다 훨씬 많았으며,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자작농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exercitales''와 ''viri devoti''로 불렸으며 군대 징집병을 형성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부족했다.[83]
신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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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 다른 지역보다 가난하고 도시화, 토지 소유 적음. 사법 업무 관련 수입에 대해 왕에게 의존. |
자유민 |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자작농 등. 군대 징집병, 정치적 영향력 부족. |
비자유민 | 농노. |
노예 | 최하층 신분. |
랑고바르드 이탈리아의 도시화는 città ad isoleit(섬으로서의 도시)로 특징지어졌다. 파비아, 루카, 시에나, 아레초, 밀라노 등 주요 도시는 고대 로마 도시 성벽 내부에 작은 도시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5, 6세기 전쟁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지역이 폐허로 남아 고대 기념물은 목초지가 되었다. 온전하게 남아 있던 도시 부분은 작았고, 대성당이나 주요 교회, 몇 개의 공공 건물 및 귀족 타운하우스를 포함했다. 중요한 건물은 거의 돌로 지어지지 않았고,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다.[83]
랑고바르드족은 초기에는 바니르 숭배 등 게르만족 고유 다신교 신앙을 가졌다.[86][87]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랑고바르드족이 네르투스를 숭배했다고 기록했는데, 네르투스는 종종 노르드 신화의 프레이야와 동일시된다.[88] 이후 다른 게르만 민족과 접촉하여 에시르 숭배를 받아들였다.[86][87]
판노니아 체류 동안 기독교를 처음 접했지만 형식적이었다.[90] 와초 치세에는 비잔틴 제국과 동맹, 정통 가톨릭을 믿었으나, 알보인은 동고트족과 동맹, 아리우스파로 개종 후 이탈리아를 침략했다.[90] 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족은 점차 기독교화되었고, 가톨릭 개종 압력이 커졌다. 테오델린다 왕비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가톨릭 신앙을 장려했다.[91] 603년, 왕위 계승자 아달로알드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92]
그러나 랑고바르드족 내 종교 갈등은 지속되었다. 가톨릭 지지 세력은 로마와 통합, 비잔틴 제국과 현상 유지를 추구한 반면, 아리우스파, 이교도, 분열주의자들은 왕국 북동부 지역 중심 민족 고유 호전적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93] 7세기에도 베네벤토 귀족들은 이교도 의식을 행했다.[94]
쿠니페르트 통치 말기, 랑고바르드족은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되었다.[95] 리우트프란트는 가톨릭 신앙 바탕 이탈리아 반도 통일, 이탈로-로마인과 게르만족 통합, 하나의 가톨릭 국가 건설을 시도했다.[95]
베네벤토 공국은 7, 8세기 독자적 기독교 전례를 발전시켰다. 베네벤토 전례는 로마 전례보다 암브로시아 전례와 더 관련 깊다.[96] 베네벤토 전례는 베네벤토 성가라는 독특한 성가를 사용, 암브로시아 성가와 유사했다.[96] 베네벤토 성가 주요 중심지는 몬테카시노였으며, 이곳은 베네벤토 문자 사용 시작점이기도 했다.[97][98]
Lombardic language|랑고바르드어gem는 현재 사어이다. (단, 킴브리어와 모케니어가 랑고바르드어 생존 방언이 아니라면.)[128]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이 언어는 7세기부터 쇠퇴, 각지에 흩어져 1000년경까지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랑고바르드어는 극히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으며, 주요 정보원은 라틴어 문서에 사용된 랑고바르드어 단어이다. 랑고바르드어 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형태나 문법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다. 계통 분류는 음운학 성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고지 독일어에서 보이는 제2차 자음 추이가 랑고바르드어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는 증거가 존재하므로, 통상 Elbe Germanic peoples|엘베 게르만어de 또는 상부 독일어 방언으로 분류된다.[129][130] 현재 스위스 남부-이탈리아 북부 사용 롬바르드어는 이탈리아어파 로망스어군 언어, 계통이 크게 다르다.
랑고바르드어 기록은 룬 문자 명문에 보존되어 있다. 주요 기록은 Elder Futhark|고대 푸사르크gem로 쓰인 짧은 명문, "Schretzheim|슈레츠하임de 청동 용기(600년경)" 속, 오스트알고이 군(슈바벤) 푸르첸 발견 은제 벨트 버클 등이다. 헝가리 서부 베니제 발견 A, B 부호 한 쌍 은제 피블라도 랑고바르드어 룬 문자 명문이 발견되었다.[130] 피블라 명문은 '''A''' "''godahid unja''" '''B''' "''katsiboda segun''" 음역, '''A''' "Godahi(l)d는 기쁨을", '''B''' "나 Arsiboda는 축복을" 해석된다.[130] Godahi(l)d, Arsiboda는 여성 명사이다.[130] 이 문장은 랑고바르드어가 고지 독일어와 가까운 관계임을 보여준다. B 머리글자 ''k''는 ik(고지 독일어 ich) 약자로 보인다.[130] A ''unja''(wunja)는 고대 고지 독일어 ''wonnia''(Wonne, 더없는 기쁨), B ''segun''은 고대 고지 독일어 ''segan''(Segen, 신 축복) 해당한다.[130] 이 용어들은 랑고바르드인 기독교 개종 관련 주목받고 있다.[130] 2005년, 에밀리아 덴체바는 Pernik sword|페르니크 검bg 명문이 랑고바르드어라고 주장했다.[131]
몇몇 라틴어 문서는 랑고바르드어 단어를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인명이며, 소수 지명, 전문 용어, 법률 용어 등이 산견될 뿐이다.[130]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저술 『랑고바르드족 역사(''Historia Langobardorum'')』, 『랑고바르드 법전(''Leges Langobardorum'')』 등이 특히 중요 정보원이다.[130]
랑고바르드어는 작센어와 동계, 그 단어는 종종 영어 단어와 유사하다. ''landa''는 ''land''(토지), ''guardia''는 ''wardan''(''warden'' 감독관), ''guerra''는 ''werra''(''war'' 전쟁), ''ricco''는 ''rikki''(''rich'' 부), ''guadare''는 ''wadjan''(''to wade'' 건너다)에 각각 대응한다.
이탈리아어에는 다수 랑고바르드어 단어 잔존, 랑고바르드어 차용어를 고트어, 프랑크어 등 다른 게르만어파 언어 차용어와 구별은 항상 어렵다. ''Codice diplomatico longobardo'' 법적 문서집은 수많은 랑고바르드어 어휘 언급, 이 중 현재 이탈리아어 여러 방언 사용 몇몇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랑고바르드어 | 이탈리아어 | 영어 | 기타 |
---|---|---|---|
barba | barba | 수염 | |
marchio | marchio | 표 | |
maniscalco | maniscalco | 대장장이 | |
aia | aia | 안뜰 | |
braida | braida | 교외 목초지 | |
borgo | borgo | 마을 | |
fara | fara | 지명 | |
picco | picco | 지명 | |
sala | sala | 지명 | |
staffa | staffa | 등자 | |
stalla | stalla | 마구간 | |
sculdascio | sculdascio | ||
faida | faida | 앙갚음, 분쟁 | |
manigoldo | manigoldo | 악당 | |
sgherro | sgherro | 하수인 | |
fanone | fanone | 고래 수염 | |
stamberga | stamberga | 오두막 | |
anca | anca | 엉덩이 | |
guancia | guancia | 뺨 | |
nocca | nocca | 손가락 관절 | |
schiena | schiena | 등 | |
gazza | gazza | 까치 | |
martora | martora | 담비 | |
gualdo | gualdo | 지명 | |
pozza | pozza | 웅덩이 | |
bussare | bussare | 노크하다 | |
piluccare | piluccare | 쪼다 | |
russare | russare | 코를 골다 |
이탈리아어 방언 속 잔존 랑고바르드어 차용어는 약 280여 개 추정된다.[130]
슬로베니아어 방언에도 랑고바르드어 유래 차용어, 랑고바르드인-슬로베니아인 교섭사 귀중 사료이다.[130]
랑고바르드족은 유목 생활 시 휴대 쉬운 무기, 장신구 제작. 예술품은 게르만 양식 출발, 판노니아-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초기 기독교 양식 영향받아 변화했다. 이탈리아 정착 후 기독교 개종, 건축(특히 교회), 장식 미술(예: 프레스코) 분야 발전했다.[1]
현존 랑고바르드 건축물은 대부분 유실, 재건축되어 원래 모습 거의 유지 못한다. 20세기 들어 랑고바르드 건축 연구 활발.[2]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 산타 마리아 인 발레 경당은 초기 랑고바르드 건축 예시 중 하나이다. 파비아 (산 피에트로 인 시엘 도로, 산트'에우세비오 지하 묘지, 산 조반니 돔나룸), 몬차 (대성당)에도 일부 랑고바르드 건축물 남아있다. 베르가모 근처 파라 제라 다다 ''바실리카 아우타리아나'', 브레시아 산 살바토레 성당도 랑고바르드 양식 보인다.[2]
가장 잘 보존된 랑고바르드 건축물은 남부 이탈리아 베네벤토 산타 소피아 성당. 760년 아레키스 2세 건립, 랑고바르드 프레스코화, 랑고바르드 양식 기둥 주두 남아있다.[2] 랑고바르드 건축은 테오델린다, 리우트프란트, 데시데리우스 등 가톨릭 군주들 정치적 목적 수도원 건립 장려하며 발전했다. 보비오 수도원도 이 시기 건립되었다.[2]
일부 후기 랑고바르드 건축물은 로마네스크 건축 관련 양식 보여 "초기 로마네스크"로 불린다. 프리 로마네스크 예술과 건축에서 로마네스크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보여준다.[2]
4. 1. 사회 구조
랑고바르드족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크게 귀족, 자유민, 비자유민, 노예로 나뉘었다.[83]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귀족들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특히,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에 왕권은 단일 군사 지휘의 필요성에 의해 발전했다.[84]랑고바르드 사회는 다른 게르만족 계승 국가인 프랑크 갈리아와 스페인의 서고트족과 유사하게 계층화되었다. 귀족 계급 아래에 자유민 계급, 자유롭지 않은 비노예 계급(농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예가 있었다.[83] 랑고바르드 귀족 계급은 다른 지역보다 가난하고 도시화되었으며, 토지 소유도 적었다. 8세기까지 귀족들은 사법 업무와 관련된 수입에 대해 왕에게 크게 의존했다. 많은 롬바르드 귀족들은 중요한 군사 및 입법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iudices''(판사)로 언급되었다.[83]
롬바르드 왕국의 자유민은 프랑크 영토보다 훨씬 많았다.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자작농 등이 롬바르드 왕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자유민은 ''exercitales''와 ''viri devoti''로 불렸으며, 군대의 징집병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왕과 함께 왕국의 정치와 입법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영향력이 부족했다.[83]
신분 | 설명 |
---|---|
귀족 | 다른 지역보다 가난하고 도시화되었으며, 토지 소유가 적음. 사법 업무와 관련된 수입에 대해 왕에게 의존. |
자유민 |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자작농 등. 군대의 징집병을 형성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부족. |
비자유민 | 농노. |
노예 | 최하층 신분. |
롬바르드 이탈리아의 도시화는 città ad isoleit(섬으로서의 도시)로 특징지어졌다. 파비아, 루카, 시에나, 아레초, 밀라노와 같은 주요 도시는 고대 로마 도시 성벽 내부에 작은 도시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5세기와 6세기의 전쟁으로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지역이 폐허로 남아 고대 기념물은 목초지가 되었다. 온전하게 남아 있던 도시의 부분은 작았고, 대성당이나 주요 교회, 몇 개의 공공 건물 및 귀족의 타운하우스를 포함했다. 중요한 건물은 거의 돌로 지어지지 않았고,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다.[83]
4. 2. 종교
랑고바르드족은 초기에는 바니르를 숭배하는 등 게르만족 고유의 다신교 신앙을 가졌다.[86][87]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랑고바르드족이 여신 네르투스를 숭배했다고 기록했는데, 네르투스는 종종 노르드 신화의 여신 프레이야와 동일시된다.[88] 이후 다른 게르만 민족과의 접촉을 통해 에시르 숭배를 받아들였다.[86][87]랑고바르드족은 판노니아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를 처음 접했지만,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90] 와초 치세에는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고 정통 가톨릭을 믿었으나, 알보인은 동고트족과의 동맹을 통해 아리우스파로 개종하고 이탈리아를 침략했다.[90] 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족은 점차 기독교화되었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이 커졌다. 가톨릭 신자였던 테오델린다 왕비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가톨릭 신앙을 장려했다.[91] 603년, 왕위 계승자 아달로알드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92]
그러나 랑고바르드족 내부에서는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가톨릭을 지지하는 세력은 로마와의 통합과 비잔틴 제국과의 현상 유지를 추구한 반면, 아리우스파, 이교도, 분열주의자들은 왕국의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 고유의 호전적인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93] 7세기에도 베네벤토의 귀족들은 여전히 이교도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94]
쿠니페르트 통치 말기에 이르러 랑고바르드족은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되었다.[95] 리우트프란트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탈로-로마인과 게르만족을 통합하여 하나의 가톨릭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95]
이탈리아 남부의 베네벤토 공국은 7, 8세기에 독자적인 기독교 전례를 발전시켰다. 베네벤토 전례는 로마 전례보다는 암브로시아 전례와 더 관련이 깊다.[96] 베네벤토 전례는 베네벤토 성가라는 독특한 성가를 사용했는데, 이는 암브로시아 성가와 유사했다.[96] 베네벤토 성가의 주요 중심지는 몬테카시노였으며, 이곳은 베네벤토 문자 사용의 시작점이기도 했다.[97][98]
4. 3. 언어
Lombardic language|랑고바르드어gem는 현재 사어이다. (단, 킴브리어와 모케니어가 랑고바르드어의 생존 방언이 아니라면.)[128]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이 언어는 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1000년경까지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랑고바르드어는 극히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으며, 주요 정보원은 라틴어 문서에 사용된 랑고바르드어 단어이다. 랑고바르드어로 쓰인 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언어의 형태나 문법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다. 랑고바르드어의 계통 분류는 음운학의 성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고지 독일어에서 보이는 제2차 자음 추이가 랑고바르드어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는 증거가 존재하므로, 통상적으로 Elbe Germanic peoples|엘베 게르만어de 또는 상부 독일어의 방언으로 분류된다.[129][130] 한편, 현재 스위스 남부에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사용되는 롬바르드어는 이탈리아어파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며, 계통이 크게 다르다.
랑고바르드어의 몇 안 되는 기록은 룬 문자의 명문에 보존되어 있다. 주요 기록은 Elder Futhark|고대 푸사르크gem로 쓰인 짧은 명문에 포함된 것으로, "Schretzheim|슈레츠하임de의 청동 용기(600년경)" 속에 있는 것과, 오스트알고이 군(슈바벤)의 푸르첸에서 발견된 은제 벨트 버클 등이 있다. 또한, 헝가리 서부의 베니제에서 발견된 A, B로 부호가 붙은 한 쌍의 은제 피블라에서도 랑고바르드어의 룬 문자 명문이 발견되었다.[130] 이 피블라의 명문은 '''A''' "''godahid unja''" '''B''' "''katsiboda segun''"으로 음역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A''' "Godahi(l)d는 기쁨을", '''B''' "나 Arsiboda는 축복을"으로 해석된다.[130] Godahi(l)d, Arsiboda는 여성 명사이다.[130] 이 문장은 랑고바르드어가 고지 독일어와 가까운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B 머리글자 ''k''는 아마도 ik(고지 독일어 ich에 해당)의 약자로 보인다.[130] A의 ''unja''(wunja)는 고대 고지 독일어의 ''wonnia''(Wonne, 더없는 기쁨), B의 ''segun''은 고대 고지 독일어의 ''segan''(Segen, 신의 축복)에 해당한다.[130] 이 용어들은 랑고바르드인의 기독교 개종과 관련되어 주목받고 있다.[130] 2005년, 에밀리아 덴체바(Emilia Denčeva)는 Pernik sword|페르니크 검bg의 명문이 랑고바르드어라고 주장했다.[131]
몇몇 라틴어 문서는 랑고바르드어 단어를 기록하고 있지만, 라틴어 문중에 등장하는 랑고바르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인명이며, 그 외 소수의 지명, 전문 용어, 법률 용어 등이 산견될 뿐이다.[130] 파울루스 디아코누스가 남긴 『랑고바르드족의 역사(''Historia Langobardorum'')』나, 『랑고바르드 법전(''Leges Langobardorum'')』 등이 특히 중요한 정보원이다.[130]
랑고바르드어는 작센어와 동계이므로, 그 단어는 종종 영어 단어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landa''는 ''land''(토지), ''guardia''는 ''wardan''(''warden'' 감독관), ''guerra''는 ''werra''(''war'' 전쟁), ''ricco''는 ''rikki''(''rich'' 부), 그리고 ''guadare''는 ''wadjan''(''to wade'' 건너다)에 각각 대응한다.
이탈리아어에는 다수의 랑고바르드어 단어가 잔존하고 있지만, 랑고바르드어로부터의 차용어를 고트어나 프랑크어와 같은 다른 게르만어파의 언어로부터의 차용어와 구별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작업이다. ''Codice diplomatico longobardo''라는 법적 문서집은 수많은 랑고바르드어 어휘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현재도 이탈리아어의 여러 방언에서 사용되는 몇몇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랑고바르드어 | 이탈리아어 | 영어 | 기타 |
---|---|---|---|
barba | barba | 수염 | |
marchio | marchio | 표 | |
maniscalco | maniscalco | 대장장이 | |
aia | aia | 안뜰 | |
braida | braida | 교외의 목초지 | |
borgo | borgo | 마을 | |
fara | fara | 지명 | |
picco | picco | 지명 | |
sala | sala | 지명 | |
staffa | staffa | 등자 | |
stalla | stalla | 마구간 | |
sculdascio | sculdascio | ||
faida | faida | 앙갚음, 분쟁 | |
manigoldo | manigoldo | 악당 | |
sgherro | sgherro | 하수인 | |
fanone | fanone | 고래 수염 | |
stamberga | stamberga | 오두막 | |
anca | anca | 엉덩이 | |
guancia | guancia | 뺨 | |
nocca | nocca | 손가락 관절 | |
schiena | schiena | 등 | |
gazza | gazza | 까치 | |
martora | martora | 담비 | |
gualdo | gualdo | 지명 | |
pozza | pozza | 웅덩이 | |
bussare | bussare | 노크하다 | |
piluccare | piluccare | 쪼다 | |
russare | russare | 코를 골다 |
이러한 이탈리아어 방언 속에 잔존하는 랑고바르드어 차용어는 약 280여 개로 추정된다.[130]
그 외, 슬로베니아어의 방언에도 랑고바르드어에서 유래한 차용어가 남아 있으며, 랑고바르드인과 슬로베니아인의 교섭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130]
4. 4. 예술과 건축
랑고바르드족은 유목 생활을 할 때 주로 휴대하기 쉬운 무기나 장신구를 제작했다. 이러한 예술품은 게르만 양식에서 출발하여 판노니아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및 초기 기독교 양식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특히 이탈리아 정착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건축(특히 교회)과 장식 미술(예: 프레스코) 분야가 발전했다.[1]현존하는 랑고바르드 건축물은 대부분 유실되거나 재건축되어 원래 모습을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랑고바르드 건축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2]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의 산타 마리아 인 발레 경당은 초기 랑고바르드 건축의 예시 중 하나이다. 파비아 (산 피에트로 인 시엘 도로, 산트'에우세비오 지하 묘지, 산 조반니 돔나룸)와 몬차 (대성당)에도 일부 랑고바르드 건축물이 남아있다. 베르가모 근처 파라 제라 다다의 ''바실리카 아우타리아나''와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성당도 랑고바르드 양식을 보인다.[2]
랑고바르드 건축물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은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베네벤토의 산타 소피아 성당이다. 760년 아레키스 2세가 건립한 이 성당에는 랑고바르드 프레스코화와 랑고바르드 양식의 기둥 주두가 남아있다.[2] 랑고바르드 건축은 테오델린다, 리우트프란트, 데시데리우스 등 가톨릭 군주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도원 건립을 장려하면서 발전했다. 보비오 수도원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2]
일부 후기 랑고바르드 건축물은 로마네스크 건축과 관련된 양식을 보여 "초기 로마네스크"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건물들은 프리 로마네스크 예술과 건축에서 로마네스크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여준다.[2]
5. 랑고바르드 왕 목록
다음은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왕국을 건설하기 이전과 랑고바르드 왕국의 역대 왕들의 목록이다. 초기 왕들의 경우,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랑고바르드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이 확인되지 않은 왕들도 있다.[132]
- 이볼 - 전설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를 떠날 당시의 족장 중 한 명이다.
- 아기오(아이오) - 전설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를 떠날 당시의 족장 중 한 명이다.
- 아게르문트 -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아기오의 아들이자 초대 왕이다. 33년 동안 재위했다고 전해지며,[132] 울가레스족(훈족으로 추정)의 급습으로 살해되었다.[133]
- 라미시오 - 전설에 따르면 창녀에게서 태어난 일곱 쌍둥이 중 한 명으로, 연못에 버려졌으나 아게르문트 왕에게 거두어져 길러졌다. 아게르문트 사후 왕위를 계승했으며,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는 아마존의 가장 강한 여자와 일대일로 싸워 이겼다고 한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아마존 관련 이야기가 "진실에 근거하지 않음은 확실하다"라고 평가했다.[134]
- 레투 - 40년 동안 통치했다고 전해진다.[135]
- 힐데호크 - 레투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다.[136]
- 고데호크 - 힐데호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135]
- 클라포 - 고데호크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다.[137]
- Tato|타토영어 - 클라포의 아들. 헤룰족의 왕 로두르푸스를 격파하여 랑고바르드족 부흥의 기반을 다졌으나, 와코에게 살해되었다.[138]
- Wacho|와코영어 -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타토의 형제 즈키로의 아들이다. 《랑고바르드족의 기원》에서는 우니키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타토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주변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도나우강 중류 유역의 유력한 왕으로 부상했다.[139][140]
- Walthari|발타리영어 - 와코의 아들. 재위 기간은 539년-546년으로 추정된다. 7년 동안 재위했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41]
- Audoin|아우도인영어 - 재위 546년-560년. 가우스가의 왕.[113] 프로코피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와코가 죽을 때 어린 발타리의 후견을 부탁받았다. 이후 발타리가 죽자 스스로 왕이 되어 랑고바르드족을 판노니아로 이주시켰다.[113][142]
- 알보인 - 재위 560년-572년. 아우도인의 아들로,[117]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게피드족을 격파했다. 이후 랑고바르드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이탈리아식 이름인 알보이노로도 알려져 있다.[125]

- 알보인 (568년–572년)
- 클레프 (572년–574년)
- ''10년간 공위 시대''
- 아우타리 (584년–590년)
- 아길루프 (591년–616년경)
- 아달오알트 (616년경-626년경)
- 아리오알트 (626년경–636년)
- 로타리 (636년–652년)
- 로드오알트 (652년–653년)
- 아리페르트 1세 (653년–661년)
- 페르크타리트와 고데페르트 (661년–662년)
- 그리모알트 (662년–671년)
- 페르크타리트 (671년–688년), 추방되었다가 복위
- 아라히스 (688년–689년), 반란
- 쿠닌크페르트 (688년–700년)
- 리우트페르트 (700년–701년)
- 라긴페르트 (701년)
- 아리페르트 2세 (701년–712년)
- 안스프란트 (712년)
- 리우트페란트 (712년–744년), 복위
- 힐데페란트 (744년)
- 라트키스 (744년–749년)
- 아이스툴프 (749년–756년)
- 데시데리우스 (756년–774년)
- 샤를마뉴에게 정복됨
- 피피노 카를로만 (781년-810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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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Lombard
https://www.collinsd[...]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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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altisländische Odinsname Langbarðr: 'Langbart' und die Langob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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