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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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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인은 "흐르바티"라는 고유 명칭에서 파생된 민족으로,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및 세계 각지에 거주한다.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발칸 반도로 이주했으며, 925년에는 크로아티아 왕국을 건국했다. 크로아티아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영향을 받았으며, 1102년부터는 헝가리와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겪었으며, 19세기에는 일리리아 운동을 통해 민족 부흥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속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1991년 독립 전쟁을 거쳐 독립했으며, 현재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로마 가톨릭을 주로 믿는다. 크로아티아는 다양한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걸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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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트인
개요
"돌라스크 흐르바타"("크로아트인의 도착"), 오톤 이베코비치의 그림, 아드리아 해로의 크로아트인 이주를 나타냄
인구약 700만~800만 명
거주 지역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요 거주 국가크로아티아: 3,550,000명 (202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544,780명 (2013년)
미국: 414,714명 (2012년) - 1,200,000명 (추정)
독일: 500,000명 (2021년)
칠레: 400,000명
아르헨티나: 250,000명
오스트리아: 220,000명
오스트레일리아: 164,362명 (2021년) - 250,000명 (추정)
캐나다: 130,280명 (2021년) - 250,000명 (추정)
뉴질랜드: 100,000명
스위스: 80,000명 (2021년)
브라질: 70,000명
이탈리아: 60,000명
슬로베니아: 50,000명 (추정)
파라과이: 41,502명 (2023년)
프랑스: 40,000명 (추정)
세르비아: 39,107명 (2022년)
스웨덴: 35,000명 (추정)
기타 유럽: 약 5,200,000명
북아메리카: 약 600,000–2,500,000명
남아메리카: 약 500,000–800,000명
기타: 약 300,000–350,000명
언어크로아티아어
카이카비아 방언(Kajkavian)
슈토카비아 방언(Shtokavian)
차카비아 방언(Chakavian)
종교주로 로마 가톨릭
관련 민족남슬라브족
문화
하위 그룹부녜브치인
쇼크치인
부르겐란트 크로아트인
야녜브치인
몰리세 크로아트인
크라쇼바니인
문화적 요소문학
음악
미술
영화
요리
의상
스포츠
역사와 민족
역사역사
기원기원
통치자통치자
언어
언어크로아티아어
방언차카비아 방언
슈토카비아 방언
카이카비아 방언
부르겐란트
몰리세
기타
관련 민족남슬라브족

2. 명칭

"크로아티아인"이라는 민족명은 고유명 "흐르바티"의 변형으로, 중세 라틴어 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다시 북서 슬라브어 *Xərwatezlw에서 액체 전위를 거쳐 공통 슬라브 시대의 ''*Xorvat''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제안된 원시 슬라브어 ''*Xъrvátъ''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3세기의 스키토-사르마티아어 형태인 타나이스 태블릿에 Χοροάθος|Khoroáthosgrc (다른 형태로는 및 '''')로 기록되어 있다.[45] 이 민족명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원시 오세트어/알라니아어 *''xurvæt-'' 또는 *''xurvāt-''에서 "지키는 자" ("수호자, 보호자")의 의미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46]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민족명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8-9세기의 석비문과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예: 브라니미르 비문의 ''Dux Croatorum''과 트르피미르 공작 헌장의 ''Dux Chroatorum'').[47] 크로아티아어로 된 가장 초기의 기록은 바슈카 석비 (약 1100년)에 글라골 문자로 "zvъnъmirъ kralъ xrъvatъskъ" ("즈보니미르, 크로아티아의 왕")라고 적혀 있다.[48]

3. 역사

크로아트인은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발칸반도 북서부로 이주했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166]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달마티아 지방의 방어를 위해 이주시킨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160] 언어학 및 사료 분석을 통해 슬라브족 기원설 외에도 이란계 민족설, 고트족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167] 이란계 사르마티아인훈족에 밀려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고트족이나 슬라브인을 흡수했지만, 결국 슬라브화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64]

크로아트인은 동로마 제국프랑크 왕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8세기부터 9세기 말 사이에 아드리아 해 연안의 달마티아와 내륙의 슬라보니아 (판노니아)에 두 개의 크로아티아인 국가가 형성되었다.[170] 달마티아의 트르피미르 1세는 "크로아티아인의 공작"으로 불렸으며, 그의 후손들은 트르피미로비치 왕조를 이루었다. 브라니미르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71]

925년경 달마티아 공작 토미슬라브가 크로아티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이 성립되었다.[172] 이 시기는 "민족 왕조" 시기로 불리며, 크로아티아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가톨릭을 수용했다.[160]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왕 (재위: 1075년 - 1089년) 사후, 헝가리 왕국의 아르파드 왕가가 크로아티아 내분에 개입, 1102년 헝가리 왕 칼만이 크로아티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헝가리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6세기 전반,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많은 크로아트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스탄불 궁정이나 군대에서 고위직을 얻기도 했다.[173]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는 이들은 정복을 피한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하이두크라 불리는 의병으로 활동했다.[173] 헝가리 지배 하에서는 봉건제가 시행되어 농민 봉기가 빈번했고,[173]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통해 라틴 문화와 로마 가톨릭 문화가 크로아티아에 영향을 미치고 라틴 문자가 보급되었다.[160]

1664년 바슈바르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만 제국에 많은 크로아티아 영토를 할양하자, 총독 페타르 즈린스키는 반란을 계획했지만 1671년에 처형되었다.[174]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크로아티아인의 거주지는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분단되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프랑스는 사바 강 이남의 크로아티아를 획득하여 일리리아 주를 설치했다. 일리리아 주는 크로아티아를 넘어선 남슬라브인 통합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175] 일리리아 주에서는 토착 언어 교육이 장려되었고, 초등 교육에 크로아티아어가 사용되었다. 1812년에는 시메 스타르체비치에 의해 최초의 크로아티아어 문법서인 『새 일리리아어』가 간행되었다.[176]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 의해 분단된 크로아티아인들은 서로 싸워야 했다.[177]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걸쳐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리리아 운동은 남슬라브 민족 통합을 주장하는 문화·정치적 운동으로,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의 일환이었다.[178] 1835년 류데비트 가이는 크로아티아어 신문과 잡지를 간행하여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179] 후기 일리리아 운동은 대크로아티아주의로 변질되어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180] 크로아티아 내에서도 독립성이 강한 지방에서는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181] 그러나 일리리아 운동은 크로아티아에서 근대 시민 사회 제도와 조직 창설을 촉진하고, "크로아티아인"으로서의 국민 의식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181]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요시프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를 통합하는 왕국을 수립했다. 1848년 3월 25일 자그레브 민족 회의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근간이 되는 "민족의 요구"가 채택되고, 옐라치치가 크로아티아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옐라치치와 즈린스키는 서로 다른 세력에 저항했지만, 현재 크로아티아 국가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크로아티아 민족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182] 1870년대부터 가톨릭과 동방 정교의 신앙 차이를 넘어 남슬라브인 통일 국가 건설을 원하는 유고슬라비아주의가 대두되었다.[183] 19세기 이후 북미, 남미, 오스트레일리아에 크로아티아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184] 19세기부터 크로아티아인 공동체는 대부분 오스트리아 제국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 속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건설된 유고슬라비아 국가에서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반발했다.[183]

크로아티아는 독일과 관계를 강화하여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형성했지만, 나치스의 괴뢰 국가였기 때문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독립이 취소되고 유고슬라비아에 복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60년대 크로아티아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으로 이주가 활발했다.[184]

유고슬라비아 붕괴 후 1991년 크로아티아는 독립했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국경 부근 세르비아인 공동체 문제로 1995년까지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어 크로아티아인의 인구 비율이 높아졌다.

19세기 일리리아 운동에서 나타난 대크로아티아주의는 크로아티아인의 민족 감정의 일부로 남아, 크로아티아 거주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 대세르비아주의와의 충돌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18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을 중앙 집권제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185] 크로아티아인의 독립 정신과 애국심은 때때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 세르비아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185]

가톨릭 신앙을 수용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인은 동방 정교를 신봉하고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세르비아인과 대비되지만, 크로아티아어 표기에는 오랫동안 라틴 문자와 함께 글라골 문자, 키릴 문자가 병용되었다.[160]

3. 1. 슬라브족의 도래

초기 슬라브족, 특히 스클라베니와 안테는 6세기와 7세기에 백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동유럽에 침략하여 정착했다. 크로아트인이 발칸반도로 이주하기 전, 현재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식민 도시를 건설한 그리스인, 일리리아인켈트계 여러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162]。그들은 로마에 정복되어 도태되었지만, 후대 크로아트인의 민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도 존재한다[163]2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안에서 돈강 하류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민족 호로아토이는 크로아트인이 일찍이 자칭으로 사용했던 "후르베트"와 관련지어지기도 한다[164]10세기 전반에 『제국 통치론』(De Administrando Imperio)을 저술한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165], 서우크라이나에서 동슬로바키아에 걸친 지역에 "백후르베트"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64]

크로아트인은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발칸반도 북서부로 이주했지만, 원주지나 집단의 분류에 대한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166]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달마티아 지방의 방비를 위해 발칸반도 북서부로 이주시킨 민족이라고도 한다[160]

언어학, 사료의 기술을 기반으로 크로아트인의 기원을 슬라브족에 연결시키는 설 외에, 이란계 민족설, 고트족설이 거론되고 있다[167]。원래는 코카서스 지방에 거주하던 이란계 사르마티아인훈족에 의해 압박받아 유럽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고트족이나 슬라브인을 흡수했지만, 반대로 슬라브화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164]。이란계 민족 설에서는 크로아트인은 사르마티아인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쿠르드족과의 관계를 찾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168]

발칸반도 특유의 자드루가라고 불리는 가부장제에 의한 대가족 공동체는 크로아트인 사회에도 존재했다[160]

3. 2. 중세 초기

7세기와 8세기에 걸친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여 불분명한 점이 많다.[169]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슬라브족과 크로아티아인의 이주와 정착은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이루어졌다.[49][50][51][52][53] 크로아티아인은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의 영향 아래 놓였으며, 8세기부터 9세기 말에 걸쳐 아드리아 해 연안의 달마티아와 내륙의 슬라보니아 (판노니아)에 두 개의 크로아티아인 국가가 형성되었다.[170]

오톤 이베코비치의 크로아트인의 아드리아 해 도착


검은색으로 표시된 프라하-펜코프카 문화의 슬라브 도자기 범위, 크로아티아인의 모든 알려진 민족명은 이 지역 내에 있음. 크로아티아인의 추정 이주 경로는 V.V. 세도프(1979)에 따라 화살표로 표시됨.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동유럽의 대/화이트 크로아티아에서 화이트 크로아티아인이 7세기 초에 도착했다는 설을 제시했는데, 이는 주로 비잔틴 제국 문서인 ''제국 통치론''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학자들은 ''제국 통치론''이 10세기의 정치 상황을 반영한 비잔틴 제국의 선전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54]

크로아트 공국 주변에는 구두스칸, 파가니아, 자클룸,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다른 독립적인 정체와 민족-정치 집단이 존재했다.[56] 크로아티아인은 북부 달마티아에서 지배적인 지역 강국이 되었고, 남쪽에서는 나렌테인들이 크로아트 왕의 통제 하에 크로아티아인과 합쳐졌다.[67]

달마티아를 기반으로 한 트르피미르 1세는 "크로아티아인의 공작"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자손이 군림한 왕조는 트르피미로비치 왕조라고 불렸다. 트르피미르의 후계자 중 브라니미르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인물로 여겨진다.[171]

925년 토미슬라브가 크로아티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이 성립되었다.[172]

3. 2. 1. 판노니아 공국

925년에 왕국을 세웠다.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던 하(下) 판노니아는 800년경 카롤링거 제국의 변경이 되었다. 796년 보이노미르 (판노니아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슬라브 공작)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족은 803년 아바르족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전 아바르족으로부터 이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은 후 프랑크족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감소하여 류데비트 포사브스키 공은 81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69] 프랑크 변방 백작들은 820년, 821년, 822년에 군대를 보냈지만 매번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69] 프랑크족은 보르나 구두스칸의 도움을 받아 결국 류데비트를 격파했고, 프랑크 왕국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세르비아인으로 병력을 철수시키고 그들을 정복했다.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비아는 아마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공작 (훗날 동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황제)이 직접 통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통제는 순탄치 않았다. 왕립 프랑크 연대기는 프랑크족과의 국경 분쟁으로 인해 827년부터 사바 강과 드라바 강을 따라 여러 불가르족의 습격을 언급한다. 845년 평화 조약으로 프랑크족은 슬라보니아의 지배자로 확정되었고, 스레렘은 불가리아의 종속국으로 남았다. 이후 대 모라비아의 세력 확장은 이 지역에 대한 프랑크족의 지배를 위협했다. 프랑크족은 영향력을 막기 위해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892년 현지 슬라브 지도자 브라슬라프를 하(下) 판노니아의 좀 더 독립적인 공작으로 임명했다.

896년 그의 지배는 부다페스트에서 남부 크로아티아 공국에 이르렀으며, 전(前) 로마 판노니아 속주의 거의 전체를 포함했다. 그는 아마도 900년경에 전(前) 동맹국인 마자르족과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69] 사비아의 이후 역사는 다시 불분명해졌고, 역사가들은 10세기 대부분 동안 누가 사비아를 지배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초의 대관을 받은 왕인 토미슬라브 지배자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비아와 인접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 자료에서 처음으로 10세기의 비잔틴 저서 《제국 통치론》에 "판노니아 크로아티아"가 언급된다.[69]

3. 2. 2.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828년부터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인은 로타르 1세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에 복속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크로아티아 공작 미슬라브 (835–845)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고, 839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피에트로 트라도니코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곧 파가니아 지역의 독립적인 슬라브 해적들과 싸웠지만 그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불가리아 왕 보리스 1세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인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 그의 국가를 아드리아 해로 확장하려 했다.

크로아티아 공작 트르피미르 1세 (845–864)가 미슬라브의 뒤를 이었다. 854년에 트르피미르 군대와 불가르족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으나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선물 교환과 평화의 확립이었다. 트르피미르 1세는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로 향하는 내륙 지역 대부분에 대한 권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부하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군을 제도화했다(이는 프랑크족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기록은 852년 3월 4일, 트르피미르의 법령에 기록되어 있다. 트르피미르는 845년부터 1091년까지 크로아티아에서 중단 없이 통치한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창시자로 기억된다.

사라센과 비잔틴 제국에 의한 여러 해상 위협에 직면하여 크로아티아 공작 도마고이 (864–876)는 다시 크로아티아 해군을 건설하여 황제 루트비히 2세와 비잔틴의 연합군이 871년에 바리를 정복하는 것을 도왔다. 도마고이 통치 기간 동안 해적 행위가 흔했고, 그는 베네치아인들에게 동부 아드리아 해안 근처를 항해하는 것에 대한 조공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도마고이가 죽은 후, 베네치아 연대기에는 그를 "슬라브족 최악의 공작"이라고 칭했고, 교황 요한 8세는 서신에서 도마고이를 "유명한 공작"이라고 언급했다.

도마고이의 아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876년878년 사이에 형제들과 함께 잠시 통치했다. 그들은 반란을 계속하여 876년에 서부 이스트리아 도시들을 공격했지만, 이후 베네치아 해군에게 패배했다. 그들의 지상군은 프랑크족의 종주국이었던 판노니아 공작 코첼 (861–874)을 격파하여 프랑크족의 봉신 지위를 벗어났다. 도마고이와 그의 아들의 전쟁으로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랑크족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즈데슬라브878년에 비잔틴의 도움을 받아 도마고이 아들들을 폐위시켰다. 그는 비잔틴 황제 바실 1세의 최고 통치를 인정했다. 879년 5월 초, 즈데슬라브는 교황이 비잔틴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도마고이의 친척인 브라니미르가 주도한 크닌 근처의 봉기에서 살해되었다.

브라니미르 (879–892)의 행위는 성좌로부터 승인을 받아 크로아티아인들을 비잔티움의 영향력에서 더 멀리, 로마에 더 가깝게 만들었다. 879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엄숙한 신성한 예배 동안 요한 8세는 브라니미르에게 그와 크로아티아 국민에게 축복을 내렸고, 그는 브라니미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알렸으며, 브라니미르는 크로아티아의 공작 (''Dux Chroatorum'')으로 인정받았다.[70][7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는 신성 로마 제국과 비잔틴의 지배에서 주권을 유지했으며, 완전히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다.

브라니미르가 죽은 후 즈데슬라브의 형제인 공작 문치미르 (892–910)가 달마티아를 장악하여 로마와 비잔티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divino munere Croatorum dux" (신의 도움으로, 크로아티아의 공작)로 통치했다. 달마티아에서는 공작 토미슬라브 (910–928)가 문치미르의 뒤를 이었다. 토미슬라브는 아르파드 왕조의 마자르 기병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을 사바강 너머로 몰아내고, (서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인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72][73][74]

3. 3. 크로아티아 왕국 (925–1102)

925년에 왕국이 세워졌다. 토미슬라프 (910년–928년)는 925년에 크로아티아의 왕이 되었다. 토미슬라프가 왕으로 즉위했다는 주요 증거는 925년에 작성된 서한 형태로, 16세기에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으며, 교황 요한 10세가 토미슬라프를 '크로아토룸 왕'이라고 칭한 것이다. ''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토미슬라프의 군대와 해군은 약 10만 명의 보병 부대, 6만 명의 기병, 80척의 대형 군함 (''sagina'')과 100척의 소형 군함 (''콘두라'')으로 구성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75] ''De Administrando Imperio''의 원본 필사본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중세 크로아티아의 인구는 44만 명에서 88만 명 사이였고, 프랑크족과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을 고려했을 때 크로아티아 군대는 2만 명에서 10만 명의 보병과 60개의 알라기온으로 조직된 3천 명에서 2만 4천 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76]

오톤 이베코비치가 그린 토미슬라프 왕의 대관식.


크로아티아 왕국은 비잔틴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시메온 1세가 통치하는 불가리아 제국과 갈등을 겪었다. 923년, 교황 요한 10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합의에 따라 비잔틴 제국의 달마티아 해안 도시의 주권이 토미슬라프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927년 5월 27일, 보스니아 고지대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군대는 토미슬라프 왕의 지휘 아래 알로보투르 군사 지휘관이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시메온의 서쪽 확장을 막았다.[77][78][79] 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이 정복당하고 일부가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도망치면서 격화되었다. 두브노 들판의 중심 마을은 20세기에 그의 이름을 기려 토미슬라브그라드 ("토미슬라프의 마을")로 명명되었다.

토미슬라프의 뒤를 이어 트르피미르 2세 (928–935)와 크레시미르 1세 (935–945)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이 기간은 전반적으로 불분명하다. 미로슬라프(945–949)는 내부 권력 투쟁 중 반 프리비나에 의해 살해되어 일부 섬과 해안 도시를 잃었다. 크레시미르 2세(949–969)는 달마티아 도시들과 특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아들 스테판 드르지슬라프(969–997)는 비잔틴 제국과 더 나은 관계를 맺고 달마티아 도시들에 대한 공식적인 권한을 받았다. 그의 세 아들, 스베토슬라프(997–1000), 크레시미르 3세(1000–1030), 고이스라프(1000–1020)는 왕위를 놓고 격렬한 경쟁을 벌여 국가를 약화시키고 통제력을 더욱 상실했다. 크레시미르 3세와 그의 형제 고이스라프는 1000년부터 1020년까지 공동 통치했고, 베네치아의 통치하에 있던 잃어버린 달마티아 도시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크레시미르의 아들 스테판 1세(1030–1058)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는 해안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확장하려는 야망을 이어갔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040년과 1050년 사이에 크닌 교구가 설립되었고, 주교는 "크로아티아 주교"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받았다 (라틴어: ''episcopus Chroatensis'').[80][81]

크레시미르 4세(1058–1074)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달마티아 도시들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받았다.[82] 크레시미르 4세 치하의 크로아티아는 12개 카운티로 구성되었고 토미슬라프 시대보다 약간 더 컸으며, 가장 가까운 남부 달마티아 공작령인 파가니아를 포함했다.[83] 그는 처음부터 그의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했지만, 1059년과 1060년에 교황 니콜라 2세의 명령에 따라 로마 전례에 따라 크로아티아 교회를 더욱 개혁했다. 이는 1054년의 대분열 이후 교황청에 특히 중요했다.

바슈카 석판은 글라골 문자의 가장 오래된 증거이며, 즈보니미르 왕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스베토슬라비치 분파 출신이자 슬라보니아의 반 (1064–1075)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076년 10월 8일[84][85] 성 베드로와 모세의 바실리카(오늘날에는 ''홀로우 교회''로 알려짐)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의 대표에 의해 솔린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86][87]

그는 이스트리아의 공작들과 갈등을 겪었고, 역사 기록 ''카린티아 연대기''와 ''헝가리 연대기''는 그가 1079/83년에 헝가리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 중 카린티아를 침공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와는 달리, 그는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합류한 노르만족의 동맹이기도 했다. 그는 1063년 헝가리 왕 벨라 1세의 딸이자 미래 헝가리 왕 라슬로 1세의 누이인 헝가리의 헬레나와 결혼했다. 즈보니미르 왕은 1089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망했고, 그를 계승할 직계 상속자가 없었으며,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마지막 인물인 스테판 2세 ( 1089–1091)가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동안 통치했다.[88]

그의 죽음 이후 곧 내전과 불안이 발생했고, 북부 귀족들은 헝가리의 라슬로 1세를 크로아티아 왕으로 결정했다. 1093년, 남부 귀족들은 새로운 통치자인 페타르 스나치치 왕( 1093–1097)을 선출했고, 그는 크닌의 수도를 중심으로 왕국을 통일했다. 그의 군대는 헝가리의 공격을 격퇴했고, 크로아티아의 통치를 사바 강까지 회복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에서 군대를 재결집하여 고즈드 산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헝가리의 칼만 1세 왕이 이끄는 헝가리 주력 군대와 만났다. 1097년, 고즈드 산 전투에서 마지막 토착 왕 페테르가 사망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때문에, 이 산은 이번에 페트로바 고라 ("페테르 산")로 개명되었지만, 잘못된 산으로 확인되었다). 1102년, 칼만은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다시 쳐들어와 크로아티아 봉건 영주들과 협상하여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관을 통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달마티아 왕관은 크로아티아 왕관과 분리되어 유지되었다).[89]

3. 4.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 (1102–1918)

11세기와 12세기에 크로아티아인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아래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며, 때로는 토착 왕들이 다스렸지만, 비잔틴, 베네치아, 헝가리의 대리인들이 더 자주 통치했다.[90]

헝가리와의 연합에서 크로아티아는 사보르(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의회)와 반(총독)을 통해 별도의 크로아티아 국가 제도를 유지했다.[91] 또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토지와 작위를 유지했다.[91] 콜로만은 사보르 제도를 유지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의 토지세를 면제했다. 콜로만의 후계자들은 비오그라드나모루에서 별도로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했다.[92] 헝가리 왕은 또한 봉건 제도를 도입했다. 대규모의 봉토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개인에게 수여되어 국가 방어 시스템을 만들었으나, 귀족들이 더 많은 경제적, 군사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왕국은 강력한 귀족 가문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슈비치 가문은 가장 오래된 크로아티아 귀족 가문 중 하나였으며 즈르마냐와 크르카 강 사이의 지역을 다스렸다. 크르크 섬 출신의 프랑코판 가문은 북부 아드리아해를 지배하고 비노돌 법전 (1288) 채택을 담당했다. 두 가문 모두 크로아티아의 많은 반을 배출했다. 다른 강력한 가문으로는 달마티아 자고라 출신의 넬리피치 가문 (14~15세기), 파가니아를 지배하고 베네치아와의 해적 행위와 전쟁으로 유명했던 카치치 (12~13세기), 쿠르야코비치 가문, 구 크로아티아 귀족 구시치 가문의 분파 (14~16세기), 서부 쿠파에서 동부 르바스와 보스나 강까지 지배하고 슬라보니아의 반이었던 바보니치 가문 (13~14세기), 슬라보니아 요새 도시를 지배하고 15세기에 권력을 잡은 일로치 가문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도 크로아티아에서 상당한 재산과 자산을 획득했다.

13세기 후반, 아르파드 왕조와 앙주 왕가의 투쟁 기간 동안 브리비르의 파울 1세 슈비치 아래서 슈비치 가문은 막강해졌고, 그는 가장 오랫동안 크로아티아 반(1274–1312)이었으며,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스스로를 "모든 보스니아의 영주" (1299–1312)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의 형제 믈라덴 1세 슈비치를 보스니아 반(1299–1304)으로 임명했고, 앙주 출신의 카롤 1세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을 도왔다. 131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믈라덴 2세 슈비치는 보스니아 반(1304–1322)이자 크로아티아 반(1312–1322)이었다. 앙주 왕가의 왕들은 권력과 통치를 통합하여 왕국을 강화하려 했지만 상위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카롤 1세는 귀족 특권을 무너뜨리려 했고, 그의 아들 루이 대왕 (1342–1382)은 하위 귀족과 도시에 의존하여 그 의도를 완수했다. 두 왕 모두 의회 없이 통치했고, 내부 귀족 투쟁은 그들의 의도에만 도움이 되었다. 믈라덴은 1322년 블리스카 전투에서 여러 크로아티아 귀족과 달마티아 해안 도시의 연합과 왕의 지원을 받아 패배했고, 그 대가로 슈비치의 오스트로비차 성을 즈린 성으로 교환했다(이 분파는 즈린스키 가문이 되었다) 1347년. 바보니치와 넬리피치 가문도 왕의 공세에 굴복했지만, 권력 집중화 과정이 증가하면서 루이는 1358년 자다르 조약을 통해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루이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계승 문제는 열려 있었고, 왕국은 다시 내부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루이 왕의 딸 마리 외에 나폴리의 카를 3세는 왕위에 대한 주장을 가진 가장 가까운 왕의 남성 친척이었다. 1386년 2월, 대관식 2개월 후, 그는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 그의 지지자들, 반 팔리스나의 요한, 호르바트 요한 및 스테판 라코비치는 반란을 계획했고, 엘리자베스와 마리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팔리스나의 요한의 명령으로 엘리자베스는 질식사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자르족은 마리의 남편 지기스문트를 즉위시켰다.

헝가리와 동군 연합을 이룬 크로아티아와 1500년경 이 지역의 오스만 제국의 확장.


지기스문트 왕의 군대는 니코폴리스 전투 (1396)에서 패배했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국경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투 후 왕에 대한 소식이 없자, 당시 통치 크로아티아 반 스테판 라코비치와 귀족들은 카를 3세의 아들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를 새로운 왕으로 초대했다. 이로 인해 1397년 크리제브치 유혈 사보르가 발생했고, 라디슬라우스는 왕관에 대한 관심을 잃고 1403년 달마티아를 베네치아에 팔았으며, 슬라보니아의 이름이 동쪽으로, 크로아티아의 이름이 북쪽으로 퍼졌다. 왕조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침략으로 지역 귀족들만이 방어하는 크로아티아 영토에 대한 첫 번째 단기 공격이 시작되었다.

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크로아티아는 다시 한번 발칸 반도의 두 주요 세력 사이의 국경 지역이 되었다. 크로아티아 군대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회 사제 존 카피스트라노, 헝가리 총사령관 존 후냐디, 헝가리 왕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지휘 아래 많은 전투에서 싸웠으며, 후냐디의 장기 원정 (1443–1444), 바르나 전투 (1444), 두 번째 코소보 전투 (1448)에 참여했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에 기여했다. 베오그라드 공방전 (1456)과 자이체 공방전 (1463)에서. 당시 그들은 1493년 크르바바 평원 전투(리카, 크로아티아)에서 큰 패배를 겪었고 점차 오스만 제국에 점점 더 많은 영토를 잃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9년에 크로아티아를 "기독교의 최전선(Antemurale Christianitatis)"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오스만 투르크와의 투쟁에 중요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반 페타르 베리슬라비치가 1513년 우나 강에서 두비차에서 승리했고, 의 선장과 클리스의 왕자 페타르 크루지치가 거의 25년 동안 클리스 요새를 방어했으며, 1532년에 비엔나로 가는 길에 엄청난 규모의 터키 군대를 저지한 니콜라 유르시치 선장, 또는 1542년에 페스트를 점령으로부터 구하고 1566년 시게트바르 전투에서 싸운 반 니콜라 4세 즈린스키가 있었다. 오스만 정복 기간 동안 수만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터키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모하치 전투 (1526)와 루이 2세 왕의 죽음은 헝가리-크로아티아 연합을 끝냈다. 1526년 헝가리 의회는 야노시 서폴러이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 두 명의 왕을 별도로 선출했지만, 크로아티아 사보르 체틴 의회의 선택은 페르디난트 1세의 편을 들었고, 1527년 1월 1일에 그를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하여 합스부르크 통치하에 두 지역을 통합했다.[93] 그 대가로 그들은 크로아티아 왕국의 역사적 권리, 자유, 법률 및 방어를 약속받았다.

크로아티아 사보르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선출한 1527년 1월 1일의 체틴 문서.


그러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충분히 준비되고 조직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은 16세기에 대부분의 슬라보니아, 서부 보스니아 및 리카를 포함하도록 더 확장되었다. 오스만의 정복을 막고 비엔나 수도에 대한 가능한 공격을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접해 있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광대한 지역(심지어 헝가리와 루마니아)은 비엔나 군사 본부에서 직접 통치되는 군사 국경으로 조직되었다.[94] 침략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인들의 이주가 발생했고, 버려진 지역에는 이후 세르비아인, 블라흐인, 독일인 등이 정착했다. 봉건 제도의 부정적인 영향은 1573년에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농민들이 봉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592년 비하치 요새가 함락된 후 크로아티아의 작은 지역만 회복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한때 위대한 크로아티아 왕국의 유물"로 언급되었다.[95]

크로아티아인들은 1593년 시사크 전투에서 오스만군의 진격을 막았고, 크르바바 평원에서의 패배 100년 후, 짧은 긴 터키 전쟁은 1606년 지트바토록 조약으로 끝났고, 그 후 크로아티아 계급은 군사 국경에서 크로아티아 반의 통치를 회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잃어버린 영토의 작은 지역만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크로아티아 왕국 (현재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큰 부분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17세기 전반, 크로아티아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 편에서 30년 전쟁에 참전했으며, 대부분 황제 총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지휘 아래 경기병으로 활동했다. 크로아티아의 반(총독)인 유라이 V 즈린스키 역시 전쟁에 참전했지만, 언쟁 후 발렌슈타인에게 독살당하여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 근처 군영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미래의 반이자 크로아티아의 대장군인 니콜라 즈린스키는 전쟁 말기에 참전했다.

빅토르 마다라쉬의 작품 ''비너-노이슈타트 감옥의 페테르 즈리니와 페렌츠 프란게판''


1664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투르크군에 승리했지만,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막는 바스바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성공을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귀족들 사이에 불안을 야기했고, 그들은 황제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니콜라 즈린스키는 마그나트 음모를 시작하는 데 참여했지만, 곧 사망했고, 반란은 그의 동생인 크로아티아 반 페타르 즈린스키, 프란 크르스토 프랑코판과 페렌츠 베셀레니에 의해 계속되었다. 페타르 즈린스키는 음모자들과 함께 루이 14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심지어 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과 비밀 외교 협상을 벌여 크로아티아를 합스부르크 주권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

제국 스파이들은 이 음모를 밝혀냈고, 1671년 4월 30일, 즈린스키와 프랑코판을 포함하여 이에 연루된 네 명의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 귀족들을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처형했다. 가장 강력한 두 크로아티아 귀족 가문의 대규모 영지는 몰수되었고, 그들의 가족은 이주했으며, 곧 멸족되었다. 1670년과 1848년 혁명 사이에는 크로아티아 국적의 반이 단 두 명밖에 없었다. 1670년부터 19세기의 크로아티아 문화 부흥까지의 기간은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암흑기였다. 한편, 투르크군과의 승리로 합스부르크는 중앙 집권화와 독일화에 더욱 집착했으며, 해방된 슬라보니아의 새로운 영토는 국내 요소를 희생하면서 외국 가문에게 봉건적 재산으로 주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 사보르는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귀족들은 사보르에 참석하는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헝가리의 사보르에만 참석했다.

드라구틴 바인가르트너의 작품, 1848년 크로아티아 ''사보르''(의회)


18세기, 크로아티아는 황제 카를 6세의 1713년 국사 조칙을 지지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48)에서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원한 왕실 영토 중 하나였다. 그 후, 여제는 봉건 및 세금 제도, 군사 변경 지역의 행정 통제를 변경하고, 1745년 슬라보니아를 크로아티아와 행정적으로 통합하고, 1767년 반을 수장으로 하는 크로아티아 왕립 평의회를 조직함으로써 크로아티아 문제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1779년에 이를 무시하고 결국 해산시켰으며,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통치 평의회에서 크로아티아 반이 차지하는 단 하나의 자리로 격하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중앙 집권화와 절대주의에 맞서기 위해 크로아티아인들은 헝가리의 통합 정부에 권리를 넘겨 비엔나의 의도에 함께 저항했다. 그러나 헝가리와의 연결은 곧 크로아티아인의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헝가리인들이 민족주의의 봄에 크로아티아인을 마자르화하고 크로아티아를 통일 헝가리의 일부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심 때문에 크로아티아인과 헝가리인 사이의 투쟁이 나타났고,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반스카 흐르바츠카, 달마티아, 군사 변경 지역으로 분열된 채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모두에 맞서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다.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그들의 동부 아드리아해 소유는 대부분 프랑스의 권한 아래로 넘어갔고,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에 권리를 넘겨주었다. 8년 후 그들은 일리리아 주로서 프랑스에 반환되었지만, 1815년 오스트리아 왕관에 되돌려졌다. 이제 같은 제국의 일부였지만,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는 치슬라이타니아의 일부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는 군주의 헝가리 부분에 속했다.

1830년 일리리아 운동으로 민족 부흥이 시작되었다.


19세기에는 크로아티아의 낭만적 민족주의가 비폭력적이지만 명백한 독일화와 마자르화에 맞서 등장했다. 크로아티아의 민족 부흥은 1830년대 일리리아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끌어들였고, 크로아티아어와 문화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일리리아 운동의 선두주자는 크로아티아어를 개혁하고 표준화한 류데비트 가이였다. 크로아티아의 공식 언어는 1847년까지 라틴어였으나, 그 해에 크로아티아어가 되었다. 이 운동은 남 슬라브적이고 범슬라브적인 개념에 의존했으며, 당시 그 민족적, 정치적, 사회적 아이디어가 진전되었다.

1840년대까지 이 운동은 문화적 목표에서 헝가리의 정치적 요구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843년 1월 11일 메테르니히 재상에서 발원한 왕실 칙령에 의해, 공공 장소에서 일리리아 이름과 문장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것은 운동의 진전을 방해했지만 이미 시작된 사회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48년 3월 25일, "''자흐티예바냐 나로다''"(Zahtijevanja naroda, 국민의 요구)라는 정치적 청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크로아티아의 민족 독립, 달마티아와 군사 변경 지역의 병합, 재정, 언어, 교육, 언론과 출판의 자유, 종교, 농노제의 무효화 등 30개의 민족적, 사회적, 자유주의적 원칙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 혁명에서, 크로아티아 반 요시프 옐라치치1848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헝가리로 군사 원정을 이끌어 오스트리아인들과 협력했으며, 파코즈 전투까지 성공적이었다.

크로아티아는 제국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 군주국으로 변모했을 때 반 레빈 라우흐 치하에서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에서 농노제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사회에 대규모 변화를 가져왔다. 주요 토지 소유자들의 권력은 감소했고, 경작지는 점점 세분화되어 기아의 위험에 이를 정도였다.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이 시기에 신세계 국가로 이민을 시작했고, 이러한 추세는 다음 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대규모 크로아티아 디아스포라를 만들었다.

1804년부터 1918년까지 395명의 크로아티아인이 장군 또는 제독의 지위를 받았으며,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96]

계급인원비고
준장173
소장142
중장55
장군2
참모 장군3
소장17
부제독1
제독2


3. 5. 근현대사 (1918–현재)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 (SHS 국가와 세르비아 왕국의 통일로 만들어짐)에 통합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새로운 왕국의 구성 민족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국가는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이웃 남슬라브족인 유고슬라비아인과 새로운 국가로 통합되었다.

1939년,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 바노비나가 창설되면서 높은 수준의 자치를 받게 되었고, 이는 왕국 내 거의 모든 크로아티아 민족 영토를 통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추축국은 현재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해당하는 영토에 우스타샤 운동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만들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이 되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두 공화국의 '구성 민족' 중 하나가 되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 자치주에 있는 크로아티아인들은 이 지역을 구성하는 6개의 주요 민족 집단 중 하나이다.[97]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후 10년 후, 사회 민주화와 함께 나타난 민족적 긴장에 따라,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했고, 이어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20만 명 이상의 크로아티아인들이 군사 작전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약 55만 명의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이주했다.

전후 정부의 해외 크로아티아계 이민 완화 정책은 많은 크로아티아 후손들이 크로아티아로 돌아오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유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크로아티아 난민의 도착으로 증가했다. 1995년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난민들은 이전의 집으로 돌아갔고, 일부(대부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 크로아티아 난민과 코소보 출신 야네프치)는 이전에 세르비아인이 소유했던 주택으로 이주했다.

4. 문화

크로아티아인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을 믿으며,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한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정착한 지역은 지형과 지리가 다양하며, 역사적, 문화적 영향도 다양하다. 달마티아이스트라 해안 지역은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리카와 서부 헤르체고비나와 같은 중앙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 현장이었으며 강한 서사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북부 평원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흔적이 남아있다.

크로아티아 민속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달마티아의 클라파 앙상블, 슬라보니아의 탐부리차 오케스트라 등이다. 민속 예술은 특별 행사와 축제에서 공연되며, 오스만 투르크와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통 기사 경기인 신지의 알카가 유명하다. 구슬레로 불리는 서사시 노래와 다양한 종류의 콜로 원무도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볼 수 있다.

알카는 전통적인 기사 경기이다.


슈베르트 교향곡 8번 B단조(1922) 1악장 13-20마디의 이스트라 음계


크로아티아 건축은 인접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영향은 북부와 중부 지역의 공공 공간과 건물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 해안을 따라 발견되는 건축물은 베네치아의 영향을 보여준다.[141] 바로크 건축 양식의 대규모 도시 계획이 이루어진 바라주딘카를로바츠는 넓은 광장, 잘 가꾸어진 공원, 보행자 전용 구역 등이 특징이다.[142] 아르누보의 영향은 현대 건축에 반영되었다.[143] 해안을 따라 건축은 지중해 양식이며 주요 도시 지역에서 베네치아와 르네상스의 강력한 영향을 보여준다. 조르조 다 세베니코 및 니콜로 피오렌티노의 작품인 성 야고보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9세기 교회는 크로아티아 건축의 가장 오래된 보존된 예시이며, 그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은 성 도나투스 교회이다.[144][145]

닌의 그르구르 조각상, 이반 메슈트로비치, 배경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타워


중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크로아티아 예술가들의 오랜 역사가 있다. 라도반이 제작한 트로기르 대성당의 석조 정문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네스크 조각의 기념물로 여겨진다. 르네상스는 백 년 크로아티아-오스만 전쟁에 휘말린 크로아티아의 나머지 지역과 달리 아드리아 해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바로크로코코 시대에 예술이 번성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요시프 유라이 스트로스마이어 주교와 같은 여러 예술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크로아티아 장인들이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146] 블라호 부코바츠와 이반 메슈트로비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시대의 크로아티아 예술가이다.[144]

바슈카 석판은 1100년 크르크 섬에서 발견된 글라골 문자가 새겨진 돌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산문으로 여겨진다.[147] 크로아티아 문학의 발전은 르네상스 시대와 마르코 마룰리치에 의해 시작되었다. 마룰리치 외에도 르네상스 극작가 마린 드리지치, 바로크 시인 이반 군둘리치,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 시인 이반 마주라니치, 소설가, 극작가 겸 시인 아우구스트 셰노아, 시인 겸 작가 안툰 구스타프 마토시, 시인 안툰 브란코 시미치, 표현주의사실주의 작가 미로슬라브 크를레자, 시인 틴 우예비치, 소설가이자 단편 작가 이보 안드리치가 크로아티아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된다.[148][149]

크로아티아인의 전통 문화와 산업은 북부 평원 지대(슬라보니아),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 산악 지대, 달마티아 연안 지역의 세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185]。슬라보니아에서는 농경과 목축업, 산악 지역에서는 계절에 따른 이동 목축, 달마티아에서는 올리브 등 과일 재배와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다[160]。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달마티아인은 쾌활하고 대범하며, 슬라보니아인과 산악 지대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굳건한 성격이라고 한다[185]。평원 지역은 아마, 린넨, 면, 산악 지역은 동물의 털이나 모피, 달마티아에서는 레이스나 선명한 색상의 천과 같은 장식성이 높은 의복을 착용했다[160]

4. 1.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부분 로마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트인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은 다음과 같다.[136]

  • 베차라츠 동부 크로아티아의 노래와 연주
  •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성 블레이즈 축제
  • 북부 크로아티아의 생강빵 공예[137]
  • 클라파 달마티아, 남부 크로아티아의 다성 합창
  • 크로아티아의 레이스 제작
  • 메지무르스카 포페브카, 메지무르예의 민요
  • 니예모 콜로, 달마티아 내륙 지방의 무언 원무
  • 자 크리젠 (십자가 따르기) 행렬
  • 고르야니의 랴리에/크랄리체 (여왕) 봄 행렬[138]
  • 어린이용 흐르바츠코 자고르예의 나무 장난감 전통 제작
  • 이스트라 음계의 두 부분 노래와 연주
  • 즈본차리, 카스타브 지역의 연례 카니발 방울 울림 행렬[139][140]

5. 거주 국가

크로아티아인은 대부분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며, 일부는 러시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지에도 거주한다.

크로아티아에서는 390만 명이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기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90.4%를 차지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55만 3천 명이 거주하며, 주로 서헤르체고비나, 중앙 보스니아 및 보스니아 포사비나에 거주한다. 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3개의 민족 중 하나이다. 세르비아에는 약 7만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소수 민족으로 거주하며, 대부분 보이보디나에 거주한다.[150][151] 슬로베니아에는 주로 슬로베니아 연안, 프레크무리예, 로어 카르니올라 지역의 메틀리카에 3만 5천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한다. 몬테네그로에는 주로 코토르 만에 6,800명의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한다. 코소보에는 야네브치라고 불리는 지역 공동체가 있으며, 이들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국가적 정체성을 나타낸다.

크로아티아인 주요 거주 국가 및 지역
국가지역인구비고
크로아티아3,900,000명전체 인구의 90.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헤르체고비나, 중앙 보스니아, 보스니아 포사비나553,000명3개의 구성 민족 중 하나
세르비아보이보디나70,000명[150][151] 대부분 쇼치와 분예브치
슬로베니아슬로베니아 연안, 프레크무리예, 로어 카르니올라 (메틀리카)35,000명크로아티아인
몬테네그로코토르 만6,800명크로아티아인
코소보야네브치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뉴질랜드, 북마케도니아 등에도 크로아티아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기타 국가 크로아티아인 공동체
국가인구비고
오스트리아약 45,000명부르겐란트에 약 3만 명,[152] 에 약 1만 5천 명
체코850~2,000명모라바 지역, 예비쇼프카, 도브레 폴레, 노비 프셰로프
헝가리25,730명[153]
이탈리아23,880명몰리세 지역에 2,801명
루마니아6,786명카라시-세베린 주, 루파크, 카라쇼바
슬로바키아약 850명브라티슬라바 주변, 호르바츠키 그로브, 추노보, 데빈스카 노바 베스, 루소프체, 야로프체
불가리아얀예브치 분파
뉴질랜드타라라족, 테 타이 토케라우
코소보270명 (2011년 기준)얀예브치 (레트니차니)
북마케도니아2,686명스코페, 비톨라, 오흐리드 호 주변


6. 디아스포라

호주 캔버라에 있는 크로아티아 대사관


현재 전 세계에 400만~450만 명의 크로아티아인 디아스포라가 존재한다. 크로아티아 디아스포라는 주로 경제적 또는 정치적(강압 또는 추방) 이유로 발생했다.

  •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했을 때 가톨릭 신자로서 억압받았기 때문에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독일, 헝가리 등 다른 유럽 국가들로 이주했다.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캐나다,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규모 이주를 했으며, 브라질,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에도 소규모 공동체가 있었다.
  • 뉴질랜드 노스랜드 지역으로 이주하여 카우리 검 농장에서 일했다.[13]
  • 유고슬라비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정치적인 이유로 더 큰 이주 물결이 일어났다.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자들과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 다시 도망쳤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이주 노동자로서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로 이주했다. 일부 이민자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떠났다. 이러한 이주는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가 낮은 실업률을 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이민자들이 가족에게 송금한 돈은 막대한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1-1995) 기간과 그 이후에 크로아티아 이주의 마지막 대규모 물결이 발생했다.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및 유럽 전역에 이미 정착한 이민자 공동체가 그 결과로 성장했다.


디아스포라의 인구는 불완전한 통계 기록과 귀화로 인해 대략적인 수치이다. 해외에서는 미국이 가장 큰 크로아티아 이민자 그룹을 보유하고 있으며(20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414,714명), 대부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일리노이 및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알래스카에도 상당한 규모의 커뮤니티가 있다. 그 다음으로 호주(20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33,268명, 시드니, 멜버른퍼스에 집중), 캐나다(20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33,965명, 주로 온타리오 남부, 브리티시컬럼비아 및 앨버타)가 있다.

크로아티아 조상이 최소한 일부라도 있는 미국인과 캐나다인의 총 수는 200만 명에 이르며, 이들 중 다수는 해당 국가의 인구 조사에서 자신을 그렇게 식별하지 않는다.[33][34][35][36][37][154][39][155]

크로아티아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남아메리카로 이주했으며, 주로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로 이주했다. 이들의 수는 15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156][157] 칠레 (가브리엘 보리치)와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의 대통령 모두 크로아티아계 후손이다.[158][159]

브라질, 에콰도르, 페루, 남아프리카 공화국, 멕시코, 대한민국에도 소규모 크로아티아계 후손 그룹이 있다. 크로아티아 디아스포라의 가장 중요한 조직은 크로아티아 형제 연맹, 크로아티아 헤리티지 재단 및 크로아티아 세계 의회이다.

7. 상징

현재 크로아티아 국기로, 현재의 문장도 포함하고 있다.


현재 문장은 차례대로 자그레브, 두브로브니크, 달마티아, 이스트라, 슬라보니아의 상징을 보여준다.


크로아티아 국기는 가운데에 크로아티아 문장이 있는 적-백-청 삼색기로 구성되어 있다. 적-백-청 삼색은 19세기에 유행했던 범슬라브주의의 색상으로 선택되었다.

세르비아의 크로아티아 민족 협의회 국기


크로아티아 문장은 '문장'을 의미하는 전통적인 빨간색과 흰색 사각형 또는 grbhr로 구성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크로아티아인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크로아티아 부족의 역사적 영토인 붉은 크로아티아와 하얀 크로아티아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측하지만, 이에 대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증거는 없다. 현재 디자인은 크로아티아가 기원한 역사적 지역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왕관 방패를 추가했다. 빨간색과 흰색 체커보드는 최소 10세기부터 크로아티아 왕의 상징이었으며, 3×3에서 8×8까지 다양한 숫자를 가졌지만, 현재 문장과 같이 5×5가 가장 일반적이다. 문장이 공식적인 상징임을 확인하는 가장 오래된 출처는 1512년부터 1518년까지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보이다. 1525년에는 기원 메달에 사용되었다. 크로아티아에서 šahovnicahr(크로아티아어로 체스판)의 가장 오래된 알려진 예는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왕(1058–1074)이 스플리트 대주교에게 기증한 세례반에 있는 네 마리의 매의 날개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국가와 달리 크로아티아 디자인은 크로아티아 국기보다 문장의 상징성을 더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방패의 기하학적 디자인이 많은 그래픽 컨텍스트(예: 크로아티아 항공의 휘장 또는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 디자인)에 적합하기 때문이며, 슬로베니아세르비아와 같은 인접 국가가 크로아티아와 동일한 범슬라브 색상을 국기에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 인터레이스(pleterhr 또는 troplethr)는 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지어진 수도원에서 유래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상징이기도 하다. 인터레이스는 다양한 문장에서 볼 수 있으며, 현대의 크로아티아 군 계급 및 크로아티아 경찰 계급 휘장에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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