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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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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2세는 1367년 잉글랜드의 아키텐 공국에서 태어났으며, 1377년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399년 폐위될 때까지 통치했다. 그는 흑사병 이후 농민 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을 진압했고, 프랑스와의 평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다. 하지만, 측근을 중용하고 귀족들을 탄압하는 전제 정치를 강화하면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폐위되어 14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 여러 작품에서 다뤄지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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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기본 정보
리처드가 왕좌에 앉아 지구본과 홀을 들고 있는 모습이 담긴 초상화
웨스트민스터 사원 초상화, 1390년대 중반
이름리처드 2세
영어 이름Richard II
재위1377년 6월 21일 – 1399년 9월 29일
대관식1377년 7월 16일
이전 군주에드워드 3세
다음 군주헨리 4세
출생일1367년 1월 6일
출생지보르도, 프랑스
사망일1400년 2월 14일경 (향년 33세)
사망지폰테프랙트 성, 요크셔, 잉글랜드
매장지킹스 랭글리 수도원, 하트퍼드셔 (1400–1413)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1413년 이후)
배우자안네 (1382–1394)
이사벨 (1396년)
왕가플랜태저넷
아버지에드워드 흑태자
어머니조앤 오브 켄트
리처드 2세의 서명
작위
잉글랜드 국왕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아일랜드 영주
재위 기간1377년 6월 21일 – 1399년 9월 30일
아키텐 공작아키텐 공작
재위 기간1377년 – 1390년
이전 공작에드워드 3세
다음 공작존 2세
웨일스 공웨일스 공
콘월 공작콘월 공작
재위 기간1376년 6월 8일 – 1377년 6월 22일
대관식1376년 11월 20일
이전 공작우드스톡의 에드워드
다음 공작몬머스의 헨리
기타
보르도의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of Bordeaux)
왕조플랜태저넷
종교천주교
참전백년전쟁
캐롤라인 전쟁
와트 타일러의 난

2. 생애

윌턴 이중 초상화. 리처드 2세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수호 성인인 에드먼드 순교자, 에드워드 참회왕,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함께 있다. 그림 속 천사들은 흰사슴 문장을 달고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당대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매우 아름다운 왕"으로 묘사되지만, "창백하고 둥글며 여성적인 얼굴"을 가졌다고도 전해진다.[112] 그는 키가 크고(1871년 유해 조사 결과 약 1.83m로 밝혀짐[113]) 운동 능력이 뛰어났으며, 지적이고 독서를 즐겼으나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경향이 있었다.[114] 종교적으로는 정통 신앙을 따랐고, 특히 에드워드 참회왕을 깊이 숭배하여 1395년경 자신의 문장에 참회왕의 문장을 결합하기도 했다.[3]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달리 전쟁터를 누비는 군주는 아니었지만, 토너먼트와 사냥을 즐겼다.[117]

리처드 2세의 통치 말기, 특히 1397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독특한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왕의 위엄을 강조하여 공식 석상에서 신하들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으며,[76] 이는 프랑스나 보헤미아 등 대륙의 궁정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7] 그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하고,[80] 체셔 지역을 중심으로 흰사슴 휘장을 사용하는 대규모 사병 집단을 육성했다.[81] 이러한 기반 위에서 그는 전쟁보다는 예술과 문화를 중시하는 궁정을 만들고자 했다.[82]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시각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 제작에 힘썼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실물 크기의 초상화(약 1390년)와 윌턴 이중 초상화(1394~1399년)는 그의 왕실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84] 특히 윌턴 이중 초상화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국제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영국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85] 건축 분야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홀의 대대적인 재건축을 후원하여 웅장한 해머빔 지붕 구조를 완성시켰다.[87][88] 또한 그의 궁정은 제프리 초서나 존 가워와 같은 문학가들이 활동하며 영어가 문학 언어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3][90][91] 리처드 2세는 점성술과 같은 오컬트에도 관심을 보여 관련 서적 제작을 의뢰하고 궁정 내 토론을 후원하기도 했다.[95]

16세기 익명의 화가가 그린 리처드 2세의 초상화.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


리처드 2세에 대한 평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잔인하고 무책임한 왕으로 묘사했으며,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튜더 왕조 시대의 역사관과 맞물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118][120] 튜더 왕조 역사가들은 리처드 2세의 실정이 장미 전쟁으로 이어지는 내란의 시작점이라고 보았으나,[121]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122][123]

그의 정신 상태 역시 역사적 논쟁거리였다. 19세기 역사가 윌리엄 스터브스는 그가 말년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고 주장했고,[124] 앤서니 스틸은 정신분열증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125] 그러나 V. H. 갈브레이스 등 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정신의학적 진단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126][3] 최근 연구에서는 정신 질환보다는 나르시시즘적 성격 경향이나 말년의 현실 인식 능력 저하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127]

리처드 2세의 통치 방식과 실패 원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가 튜더 왕조의 절대 군주제를 예견하는 정책을 추구했다는 시각도 있지만,[128] 전통적인 군주제의 틀 안에서 행동했으나 그 방식이 너무 극단적이고 갑작스러웠다는 평가도 있다.[3][129] 평화 정책을 통해 재정 부담을 줄이려 했으나 호화로운 궁정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80] 특정 지역(체셔)에 대한 편중된 의존은 다른 지역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는 분석이다.[130] 역사가 사이먼 워커는 "그가 추구한 것 자체가 당시 기준으로 부당하거나 달성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추구 방식이 그를 실패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129]

2. 1. 유년 시절과 즉위

아버지 에드워드 3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에드워드 웨일스 공. 14세기 그림.


리처드는 '보르도의 리처드(Richard of Bordeaux)'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가 1367년 1월 6일 잉글랜드 왕국아키텐 공국에 속한 보르도의 대주교궁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3] 그의 아버지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에드워드 웨일스 공이었고, 어머니는 켄트의 조앤이었다. 아버지 에드워드 공은 백년 전쟁 초기, 특히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으나, 1370년 스페인에서 얻은 이질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371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2] 당시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의 탄생에는 카스티야, 나바라, 포르투갈의 세 국왕이 참석했다고 한다.[3] 그의 탄생일이 주현절과 겹친다는 사실은 훗날 윌턴 이중초상화와 같은 종교 예술 작품에서 그가 동방 박사 중 한 명으로 묘사되는 모티브가 되었다.[4]

리처드의 형인 앙굴렘의 에드워드는 1370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5] 아버지 흑태자 에드워드 역시 오랜 투병 끝에 1376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잉글랜드 하원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의 동생이자 리처드의 삼촌인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릴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리처드는 아버지 사후 신속하게 웨일스 공작 작위와 아버지의 다른 작위들을 물려받으며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7]

1377년 열 살의 리처드 2세 대관식 장면. 장 드 와브랭의 ''르퀴 드 크로니크'' 삽화. 영국 도서관 소장.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가 50년간의 통치 끝에 1377년 6월 21일 사망하자, 리처드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대관식은 같은 해 7월 1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8] 왕이 어렸기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지만, 강력한 왕족이었던 곤트의 존에 대한 귀족들의 견제 심리는 여전했다. 결국 국왕의 삼촌들(곤트의 존, 요크 공작 에드먼드,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이 직접 섭정을 맡는 대신, 여러 귀족들로 구성된 '지속적인 의회(continual councils)'가 리처드 2세를 보좌하는 집단 지도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협의체 구성에서 곤트의 존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트의 존과 그의 동생 토마스 우드스톡(당시 버킹엄 백작)은 여전히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국왕의 개인적인 고문이자 측근인 사이먼 드 버리 경이나 로버트 드 베어와 같은 인물들이 점차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3]

2. 2. 와트 타일러의 난 (1381년)

리처드 2세가 배경에서 농민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왓 타일러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이 그림은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약 1475년) 중 Gruuthuse manuscript에서 가져온 것이다.


1381년에 부과된 인두세는 농민반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나, 갈등의 더 깊은 뿌리는 흑사병과 그 이후 계속된 페스트 발생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 속에서 농민과 지주 사이에 쌓인 긴장감에 있었다.[3]

반란은 1381년 5월 말, 켄트주에식스주에서 시작되었다. 6월 12일, 농민들은 왓 타일러, 존 볼, 잭 스트로 등을 지도자로 삼아 블랙히스에 집결했다. 이 과정에서 곤트의 존 소유의 사보이 궁전이 불탔다. 당시 대법관이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더버리와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는 반란군에게 살해당했으며,[12] 반란군은 농노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13] 런던탑에 고문들과 함께 피신해 있던 리처드 2세는 왕실에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협상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였다.[14] 당시 14세였던 리처드 2세가 이 결정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그가 협상을 지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3]

왕은 6월 13일 템스강을 통해 반란군과 만나려 했으나, 그리니치 강가에 모인 엄청난 인파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고 런던탑으로 돌아가야 했다.[15] 다음 날인 6월 14일, 왕은 말을 타고 마일 엔드에서 반란군과 직접 대면하여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다.[16] 그러나 왕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약탈과 살인은 계속되었다.[17] 6월 15일, 리처드 2세는 스미스필드에서 왓 타일러를 다시 만나 요구 사항을 재차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타일러는 왕의 진정성을 의심했고, 이어진 언쟁 중에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타일러를 말에서 끌어내려 살해했다.[18]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반란군이 동요하자, 리처드 2세는 침착하게 나서 "나는 너희의 지휘관이다. 나를 따라와라!"라고 외치며 혼란에 빠진 군중을 현장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사이 월워스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포위했지만, 왕은 관용을 베풀어 반란군이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20]

그러나 리처드 2세는 곧 자신이 약속했던 자유와 사면 조치를 철회했다. 다른 지역에서 소요가 계속되자, 왕은 직접 에식스주로 가서 반란을 진압했다. 6월 28일 빌러리케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마지막 남은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써 농민반란은 사실상 종결되었다.[13] 이후 존 볼과 같은 반란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2세는 반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에게 백성들의 불복종과 왕권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깊이 깨닫게 했고, 이후 그의 통치에서 나타나는 절대주의적 태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2. 3. 친정과 귀족과의 갈등

1382년 1월 20일, 리처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보헤미아의 앤과 결혼했다.[22] 이 결혼은 서방 분열로 분열된 유럽 상황에서 백년 전쟁 중인 프랑스에 대항할 동맹을 확보하려는 외교적 목적을 가졌으나,[3] 잉글랜드 내에서는 큰 지지를 받지 못했고 실질적인 군사적 성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23] 앤 왕비는 1394년 흑사병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24]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리베르 레갈리스(Liber Regalis)]''에 묘사된 앤과 리처드의 대관식
리처드 2세는 1383년 친정을 시작하며 자신의 측근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마이클 드 라 폴과 로버트 드 비어였다. 신흥 상인 가문 출신인 드 라 폴은[26] 1383년 재상으로 임명되고 1385년 서퍽 백작(Earl of Suffolk)에 서임되면서 기존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27] 옥스퍼드 백작(Earl of Oxford)이었던 드 비어 역시 왕의 총애를 받아 1386년 아일랜드 공작(Duke of Ireland)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받으며 정치적 불만을 키웠다.[28][29] 연대기 작가 토마스 월싱엄은 리처드 2세와 드 비어의 관계가 동성애적 성격을 띠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0] 리처드 2세는 또한 후계자가 없었기에 자신의 사촌인 로저 모티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1385년 숙부들에게 각각 요크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외교 정책에서도 어려움이 따랐다.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궁정 세력은 협상을 선호했지만, 존 오브 곤트나 글로스터 공작 같은 유력 귀족들은 대규모 군사 원정을 주장했다.[3] 1383년 플랑드르의 겐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군은 로제베케 전투에서 반란군이 패배한 뒤 뒤늦게 도착하여 별다른 성과 없이 막대한 재정만 낭비했다. 1385년에는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코틀랜드 왕국을 직접 공격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의 초토 작전으로 인해 별다른 교전 없이 철수해야 했다.[31][32] 이러한 군사적 실패와 측근들에 대한 과도한 총애, 의회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귀족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1386년 7월, 왕과 귀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던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원정을 떠나자[3]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그해 10월 열린 의회(훗날 기적의 의회로 불림)에서 재무장관이던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은 막대한 규모의 세금을 요구했으나,[34] 의회는 그의 해임을 먼저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35] 의회는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3][36] 리처드 2세는 처음에는 "부엌의 하찮은 보조조차 해고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버텼으나,[37] 폐위될 위협에 직면하자 결국 드 라 폴을 해임하고 1년간 왕실 재정을 감독할 위원회 설치를 승인했다.[38][39]

라드콧 다리 전투에서 도망치는 로버트 드 베어 (장 프로이사르의 에서 발췌)


왕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 리처드 2세는 1387년 전국을 순회하며 지지 세력을 모으고,[40] 드 비어를 체셔 지역의 체스터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군사적 기반을 다지려 했다.[41] 또한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언으로부터 의회의 조치가 불법이며 반역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42]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글로스터 공작, 아룬델 백작, 워릭 백작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들은 왕의 측근인 드 라 폴, 드 베어, 트레실리언,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등을 반역죄로 고발(appeal)했다. 리처드 2세는 드 베어가 체셔에서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을 기대하며 협상을 지연시켰으나,[45] 세 귀족은 곤트의 아들인 더비 백작 헨리 볼링브룩과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합세하여 의회파 귀족들(Lords Appellant)을 결성했다. 1387년 12월 20일, 이들은 라드콧 다리 전투에서 드 베어가 이끌던 왕당파 군대를 격파했고, 드 베어는 국외로 도망쳤다.[46]

1388년 2월, 리처드 2세는 의회파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의회'(Merciless Parliament)가 소집되어 왕의 측근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브렘브레와 트레실리언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이미 국외로 도피한 드 베어와 드 라 폴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45] 요크 대주교 네빌은 성직자 신분 덕분에 사형은 면했으나 세속적 권한을 박탈당했으며,[47] 그 외에도 여러 왕의 기사들이 처형되었다.[48] 이로써 의회파 귀족들은 왕 주변의 측근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그들이 참여하는 평의회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3]

하지만 의회파 귀족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회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1388년 오터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에게 패배하면서 평의회에 대한 지지도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리처드 2세는 1389년 5월 친정을 선포하고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을 평의회에서 해임했으며, 임기가 만료된 상설 평의회는 폐지되었다. 그해 11월, 카스티야 원정에서 돌아온 곤트의 존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정국의 안정을 꾀했다. 리처드 2세는 곤트의 존을 조언자로 신임하여 1390년 그에게 아키텐 공작위를 양도하고, 윌리엄 위컴을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등 온건한 통치를 펼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평화 속에서도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평화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과거 자신에게 굴욕을 안겼던 의회파 귀족들에 대한 반격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2. 4. 전제 정치 강화와 몰락

1386년 양 세력을 중재하던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 계승 문제로 자리를 비우자 리처드 2세와 의회의 불화는 표면화되었다. 그해 10월, 프랑스의 침공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3] 리처드 2세의 재무장관 마이클 드 라 폴은 의회에 막대한 규모의 조세를 요구했다.[34] 그러나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 등의 지원을 받은 의회(기적의 의회)는 국왕의 최측근인 드 라 폴의 해임을 요구하며 조세 승인을 거부했다.[3][35][36] 리처드 2세는 처음에는 "부엌의 주방 보조(scullion)조차 해고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맞섰으나,[37] 폐위 위협에 직면하자 결국 드 라 폴을 해임하고 1년 동안 왕실 재정을 감독할 11인 위원회 설치를 승인해야 했다.[38][39]

왕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 리처드 2세는 1387년 2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지지 세력 규합에 나섰다.[40] 그는 로버트 드 베어를 체스터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체셔에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41]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언으로부터 의회의 조치가 불법적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42]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글로스터, 아룬델, 워릭 백작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들은 드 라 폴, 드 베어, 트레실리언,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등 국왕 측근 5명에 대한 반역죄 고발(appeal)을 제기했다. 중세 영미법에서 'appeal'은 상급 기관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반역죄와 같은 형사 고발을 의미했다.[3][43] 리처드 2세는 드 베어가 체셔에서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며 협상을 지연시켰으나,[45] 글로스터 등 3명의 귀족은 곤트의 아들인 더비 백작 헨리 4세와 노팅엄 백작과 합세하여 청원파 귀족을 결성했다. 1387년 12월 20일, 청원파 귀족들은 라드콧 다리 전투에서 드 베어의 군대를 격파했고, 드 베어는 해외로 도주했다.[46]

결국 리처드 2세는 청원파 귀족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388년 2월 열린 무자비한 의회에서 브렘브레와 트레실리언은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이미 국외로 도피한 드 베어와 드 라 폴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45] 성직자인 네빌 대주교 역시 궐석 재판으로 세속적 권한을 박탈당했다.[47] 국왕의 다른 측근 기사들도 처형당하면서[48] 청원파 귀족들은 왕 주변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3] 이후 1397년까지 양측은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했다.

리처드 2세는 백년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진했다. 1389년 3년간의 휴전을 시작으로 협상을 지속하여 1396년 3월 11일 파리에서 1398년부터 1426년까지 28년간의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같은 해 11월, 리처드 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어린 딸 이자벨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과 프랑스 북부의 브레스트 항구를 프랑스에 양도한 결정은 잉글랜드 내에서 큰 반발을 샀다. 특히 호전적인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 등은 평화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리처드 2세는 1394년부터 1395년까지 아일랜드 원정을 단행하여 현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397년부터 리처드 2세는 이전의 굴욕을 만회하고 절대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는 후대 역사가들에게 "폭정"의 시기로 평가받는다.[60] 1397년 7월, 리처드 2세는 과거 자신에게 맞섰던 청원파 귀족 중 글로스터 공작, 아룬델 백작, 워릭 백작을 체포했다. 체포 명분은 불분명하지만, 1386년~1388년 사건에 대한 보복이자 잠재적 위협 제거 목적으로 해석된다.[61][62] 9월 의회에서 아룬델 백작은 국왕과의 격렬한 언쟁 끝에 반역죄로 처형되었고,[63] 글로스터 공작은 재판을 앞두고 칼레에서 의문사했는데, 국왕의 암살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64]

1397년 칼레에서의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의 살해


워릭 백작은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아룬델 백작의 형제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은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65] 리처드 2세는 지방으로까지 박해를 확대하여 과거 청원파 귀족들에게 충성했던 이들을 기소하고 벌금을 부과하며 왕실 수입을 늘렸으나, 이러한 조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3]

리처드 2세는 숙청된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들에게 나누어 주며 새로운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작위를 받았는데, 경멸적으로 "소공작(duketti영어)"이라 불리기도 했다.[66] 여기에는 과거 청원파 귀족이었던 헨리 4세(헤리퍼드 공작으로 승격)와 토머스 드 모브레이(노퍽 공작으로 승격)도 포함되었다. 또한 국왕의 이복형제 존 홀랜드(엑서터 공작), 조카 토머스 홀랜드(서리 공작), 사촌 루틀랜드 백작 에드워드(오말 공작), 곤트의 아들 존 보퍼(서머싯 후작 및 도싯 후작), 존 몽태규, 토머스 르 디스펜서 경(글로스터 백작) 등이 주요 수혜자였다.[67][68]

30년 이상 영국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던 곤트의 존의 1399년 사망은 불안정을 야기했다.


그러나 강력한 랭커스터 가문의 수장 곤트의 존과 그의 아들 헤리퍼드 공작 헨리 볼링브로크는 여전히 리처드 2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랭커스터 가문은 막대한 부와 왕족 혈통을 지녔으며, 자녀가 없는 리처드 2세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었다.[69] 1397년 12월, 헤리퍼드 공작 헨리와 노퍽 공작 토머스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 헨리는 토머스가 "왕이 다음으로 우리를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반역에 해당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토머스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리처드 2세는 의회 위원회가 결투로 해결하라고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개입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국외 추방령을 내렸다. 토머스는 종신 추방, 헨리는 10년 추방이었다.[70]

1398년 리처드 2세는 슈루즈베리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1388년 무자비한 의회의 모든 결정을 무효화하고, 국왕에게 어떠한 법적 제약도 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의회의 모든 권한을 자신이 선정한 18명의 위원회(귀족 12명, 평민 6명)에 위임함으로써 사실상 의회 없이 통치할 수 있는 절대 군주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71]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의 유력 귀족인 헨리 퍼시와 그의 아들 핫스퍼의 변경 수호직을 박탈하여 북부 귀족들과도 등을 돌렸다.

1399년 2월 3일,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망명 중인 헨리 볼링브로크의 랭커스터 공작령 상속을 불허하고 그의 추방 기간을 종신으로 연장했으며,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72] 이는 귀족들의 재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받아들여져 귀족들의 이반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리처드 2세는 파리에 머물던 헨리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안심했으나,[73] 1399년 5월, 아일랜드에서 머치 백작이 게일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보복과 진압을 위해 아일랜드로 두 번째 원정을 떠났다.[74] 이는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내린 치명적인 결정이었다.

웨일스의 플린트 성에서 헨리에게 항복하는 리처드 2세


리처드 2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프랑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헨리 볼링브로크의 잉글랜드행을 허락했다.[96] 1399년 6월 말, 헨리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요크셔의 래번스펀에 상륙했다.[97] 그는 자신의 유일한 목표가 빼앗긴 랭커스터 공작령을 되찾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노섬벌랜드 백작 등 북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거나 최소한 중립을 확보했다.[98] 국왕의 부재와 귀족들의 불만 속에 헨리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남하했고, 국왕 대리였던 요크 공작마저 헨리에게 합류했다.[99]

리처드 2세는 뒤늦게 7월 24일 웨일스에 상륙했으나[100]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는 8월 19일 플린트 성에서 헨리에게 항복했고, 목숨만 보장된다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102] 리처드 2세는 체스터 성[103]을 거쳐 런던으로 압송되어 9월 1일 런던탑에 투옥되었다.[104]

헨리에게 왕관을 넘겨주는 리처드 2세


헨리 볼링브로크는 왕위 찬탈을 결심했으나 정당성 확보가 문제였다.[3] 리처드 2세의 폭정과 실정으로 왕의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105] 왕위 계승 서열상으로는 에드워드 3세의 차남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증손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우선이었다. 헨리의 아버지 곤트의 존은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이었다.[106] 헨리는 부계 혈통을 강조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399년 9월 30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열린 의회에서 리처드 2세는 자발적으로 왕위를 포기하고 퇴위를 승인했다는 공식 기록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격렬하게 저항했다고도 한다.[108] 의회는 리처드 2세의 퇴위를 만장일치로 승인했고,[105] 10월 1일 리처드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10월 13일,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1]

헨리 4세는 리처드 2세의 생명을 보장했지만, 1400년 1월 리처드 2세의 복위를 꾀하는 주현절 봉기가 발각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전 헌팅던 백작, 전 켄트 백작, 전 솔즈베리 백작, 전 글로스터 백작 등 리처드 2세 시절의 인물들이 연루된 이 음모는 실패로 끝났지만, 폐위된 왕을 살려두는 것의 위험성을 드러냈다.[109] 결국 리처드 2세는 1400년 2월 14일경 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에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굶주림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며, 헨리 4세의 개입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3] 그의 시신은 세인트 폴 대성당을 거쳐 킹스 랭글리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리처드 2세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돌기도 했으나,[110] 잉글랜드 내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1413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속죄와 생존설을 잠재우기 위해 리처드 2세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장하여 그가 생전에 준비했던 왕비 앤의 무덤 옆에 안치했다.[114][111]

3. 문화 정책과 예술 후원

리처드 2세 통치 말기, 특히 1397년 귀족 반역자들을 진압한 이후[75]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전과는 다른 궁정 문화를 조성했다. 이는 대륙 궁정들, 즉 리처드의 두 아내가 온 프랑스보헤미아 궁정,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아키텐에서 유지했던 궁정의 영향을 받은 것[77]으로, 국왕의 위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가 귀족들과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었던 방식[79]을 거부하고 귀족들에게 군사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피했으며,[80] 대신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구했다. 이를 위해 이전 어떤 영국 국왕보다 규모가 큰 자신의 사병 집단을 육성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상징인 흰사슴 문장이 새겨진 휘장을 수여했다.[81] 이러한 왕권 강화와 안정 속에서 리처드는 국왕이 멀리서 존경받는 존재가 되고, 전쟁 대신 예술과 문화가 중심이 되는 궁정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으며,[82] 예술과 문학의 중요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시각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이전의 영국 국왕들과 달리 자신의 모습을 숭고한 위엄을 갖춘 초상화로 남기는 데 힘썼다.[83]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실제 크기보다 큰 웨스트민스터 사원 초상화(약 1390년)와 윌턴 이중 초상화(1394~1399년)가 있다.[84] 특히 윌턴 이중 초상화는 프라하파리 등 유럽 대륙 궁정에서 발전한 궁정풍 국제 고딕 양식 회화가 영국에서 발전한 몇 안 되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85] 리처드는 회화보다 보석, 고급 직물, 금속 세공에 훨씬 많은 돈을 썼지만, 삽화 사본과 마찬가지로 그와 관련된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86] 그의 첫 부인 보헤미아의 앤에게 속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관("고딕 시대 금세공의 가장 훌륭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86])은 예외적으로 남아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건축 분야에서 리처드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웨스트민스터 홀의 대대적인 재건축이다.[87] 이 공사는 헨리 3세에 의해 1245년에 시작되었지만, 리처드 시대까지 1세기 이상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다.[89] 아마도 1391년에 완공된 존 오브 곤트의 케닐워스 성 홀의 영향을 받았을[88] 이 재건축에서 왕실 목수 휴 허랜드가 설계한 해머빔 지붕은 "중세 목조 건축의 가장 위대한 창작물"로 평가받으며, 기존의 로마네스크 양식 회랑을 하나의 거대한 개방 공간으로 만들었다. 홀의 벽에는 15개의 실물 크기 왕 조각상이 벽감에 배치되었고, 홀 끝에는 리처드가 홀로 위엄있게 앉을 수 있는 단상이 마련되었다.[88]

리처드 2세의 궁정은 영어가 문학 언어로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비록 왕이 직접 시 창작을 후원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그의 궁정은 당대 문인들이 활동하는 중심지였다.[90] 당대 최고의 시인 제프리 초서는 왕을 위해 외교관, 세관원, 왕실 공사청 서기로 일하면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썼다.[91][92] 초서는 왕의 숙부인 존 오브 곤트 휘하에서도 일했으며, 곤트의 아내 블랑슈를 애도하는 시인 ''공작 부인의 책''을 썼다.[93] 초서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존 고워는 리처드의 요청으로 ''연인의 고백''을 썼으나, 후에는 왕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94]

리처드는 점성술과 같은 오컬트 주제에 관심이 있었으며, 이를 철학, 과학, 연금술적 요소를 포함하는 더 큰 학문으로 여기고 이에 관한 책을 의뢰했으며,[95] 그의 궁정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한 저술과 토론을 후원했다.

4. 인물 및 평가

당대 기록들은 리처드 2세를 "매우 아름다운 왕"으로 묘사하면서도, "창백하고 둥글고 여성적인 얼굴"을 가졌다고 언급한다.[112] 그는 키가 크고 (1871년 유해 조사 결과 약 1.83m로 밝혀짐[113]) 운동 능력이 뛰어났으며[117], 지적이고 독서를 즐겼으나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경향이 있었다.[114]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초상화가 그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고 여겨지지만, 윌턴 이중 초상화는 실제보다 훨씬 젊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115]

리처드 2세는 옷차림, 외모, 머리 모양에 신경 쓰는 멋쟁이였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규칙적으로 목욕했으며 손수건을 고안하기도 했다.[138]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어머니나 아내 등 가족과 측근에게는 관대했다.[138] 종교적으로는 정통 신앙을 따랐으며, 특히 말년에는 로라드파 이단에 강경하게 대처했다.[116] 에드워드 참회왕을 깊이 존경하여 1395년경 자신의 문장에 참회왕의 전설적인 문장을 합장하기도 했다.[3]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처럼 전쟁터를 누비는 군주는 아니었으나, 중세 토너먼트와 사냥을 즐겼다.[117]

문화적으로 리처드 2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국제 고딕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화려한 의복을 선호했으며, 존 고워나 제프리 초서 같은 문인들을 보호하고 지원했는데, 특히 초서에게는 수입이 좋은 관직과 연금을 제공하며 우대했다. 또한 신하들에게 문장 사용을 늘리는 것(증강)을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1383년 친정을 시작한 이후 점차 자신의 판단만을 중시하고 측근들을 중심으로 독단적인 통치를 펼치면서 경솔함과 허영심이 두드러졌다. 특히 첫 부인 보헤미아의 앤이 사망한 후에는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 장례식에 늦은 아룬델 백작을 지팡이로 폭행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이러한 성격과 화려한 궁정 생활로 인한 과도한 지출은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1397년 의회파 귀족들을 숙청한 이후에는 주변으로부터 폭군으로 여겨질 만한 행동을 반복하며 인망을 잃었고, 결국 폐위되는 결과를 맞았다.

리처드 2세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잔인하고, 변덕스러우며, 무책임한 왕으로 묘사했고, 권력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비극적인 위엄을 얻는 인물로 그렸다.[118] 셰익스피어는 에드워드 홀이나 새뮤얼 대니얼과 같은 작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는데, 이들은 다시 토마스 월싱엄 등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119] 홀과 대니얼은 리처드 2세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튜더 왕조 시대의 역사관을 반영했으며,[120] 이 관점은 리처드의 잘못된 통치가 장미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민 분열의 시작이었다고 보았다.[121] 리처드 2세가 장미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시각은 19세기 후반까지 널리 퍼졌으나, 20세기 들어 도전을 받기 시작했고,[122] 최근의 일부 역사가들은 장미 전쟁을 리처드 2세의 통치와 분리해서 보기도 한다.[123]

현대 역사학계에서 리처드 2세의 정신 상태는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초창기 역사가인 비스숍 스터브스는 리처드의 정신이 말년에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고 주장했다.[124] 앤서니 스틸은 정신의학적 접근을 통해 리처드가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결론지었으나,[125] V. H. 갈브레이스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했으며,[126] 앤서니 굿맨과 앤서니 턱 등 후대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했다.[3] 나이젤 솔은 정신 질환의 증거는 없지만, 명백한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징후를 보였고 말년에는 현실 감각이 약해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127]

리처드 2세의 정치적 목표와 실패 원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의 통치가 튜더 왕조에서 나타나는 초기 근대 절대 군주제의 요소를 보인다는 시각이 있었으나,[128] 최근에는 그의 군주관이 선대 왕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군주제의 틀 안에서 활동했기에 그나마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129] 그러나 그의 정책 실행 방식은 너무 극단적이고 갑작스러웠다는 평가가 많다. 예를 들어, 전쟁을 피함으로써 세금 부담을 줄이고 의회 하원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총신들에 대한 막대한 지출은 전쟁 비용만큼이나 재정에 부담을 주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80] 또한, 군사력을 특정 지역(체셔)에만 의존한 정책은 다른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130] 역사가 사이먼 워커는 "그가 추구한 목표 자체는 당시 기준으로 부당하거나 달성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129]

5. 가족 관계



리처드 2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켄트 백작 부인 조앤의 둘째 아들이었다.[2] 그의 형인 앙굴렘의 에드워드는 1370년에 사망했다.[5] 리처드 2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리처드 2세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흑태자 에드워드에드워드 3세의 장남, 리처드 2세 즉위 전 사망[2]
어머니켄트 백작 부인 조앤
앙굴렘의 에드워드1370년 사망[5]
첫 번째 배우자앤 오브 보헤미아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딸. 1382년 결혼하였으며, 결혼 생활은 원만했으나 1394년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리처드 2세는 그녀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함께 지내던 별궁(후일 리치먼드 궁전)의 파괴를 명령했다. 자녀는 없었다.
두 번째 배우자이자벨라 드 발루아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1397년 정략결혼으로 당시 7세였다. 리처드 2세가 폐위되고 사망한 후 1401년 프랑스로 돌아가 1406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재혼했다. 리처드 2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6. 리처드 2세가 등장하는 작품

; 희곡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 만화

:* 가모우 소우 『리처드 2세 Splendour of king』 (1998년 가도카와쇼텐에서 제1권 출판, 현재 절판)

:* 아오이케 야스코 『알카사르-왕성-』 외전 1 「공작 부인의 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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