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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나가 후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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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나가 후토시는 1961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난 연쇄 살인범으로, 2002년 체포되어 2011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1990년대에 걸쳐 여러 여성과 그 가족들을 감금하고 고문, 살해했으며, 피해자들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수법(마인드 컨트롤)을 사용했다. 그의 범행은 전기 고문, 시체 훼손 등 잔혹한 수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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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나가 후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명칭북규슈 감금 살인사건
일본어 명칭北九州連続殺人事件
발생 장소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 가타노 1초메 소재의 맨션
발생 기간1996년 ~ 2002년 3월 6일
사건 상세
무기사건에 따라 다름
공격 측 인원사건에 따라 다름
표적A
B의 조카
B의 여자 형제
기타 희생자들
사망자7명 (사건화된 것만 해당)
부상자다수 (사건화된 것은 소녀 A와 또 다른 여성 1명에 대한 것만 해당)
범인M (주범)
F
A (B의 조카와 여자 형제 살해 관여)
B (7명 살해 공범)
동기불명
사죄M: 없음
B: 사건 발각 후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
대응M과 B를 체포 및 기소
형사 소송주범 M: 사형 (미집행)
B: 무기징역
관할후쿠오카현 경찰 (수사 1과, 고쿠라키타 경찰서)
후쿠오카 지방 검찰청
관련 정보
관련 사건기타큐슈 연속 감금 살인 사건
후토시 마쓰나가 (범인)
이름마쓰나가 후토시 (松永太)
출생일1961년 4월 28일
출생지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사망일알 수 없음
국적일본
직업연쇄 살인범
활동 기간1996년 - 1998년
배우자오가타 준코
범죄 정보피해자 수: 7–9명
국가: 일본
지역: 기타큐슈시, 후쿠오카현
범행 시작 연도: 1996년
범행 종료 연도: 1998년
체포: 2002년
형벌: 사형
유죄 판결: 살인 (6건), 과실치사
범죄 상태: 수감, 현재 사형 집행 대기 중

2. 범인

마쓰나가 후토시는 1961년 4월 28일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서 출생했다.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 출신이다. 후쿠오카 구치소에 사형수로서 수감되어 있다。

집안은 다다미 가게를 했고, 7살 때 아버지가 집안의 가업을 잇기 위해 후쿠오카현야나가와시로 이사했다。경제적으로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응석받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전 학년에서 대부분의 과목의 평정이 "5"였고, 학급 위원장이나 학생회 임원을 맡았으며, 중학교 1학년 때는 교내 웅변 대회에서 3학년을 제치고 우승했고, 부활동에서는 캡틴을 맡았지만, 당시부터 허언증이 있어 교사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실제로 초중학생 시절 동창생에 대한 취재에서는 "그가 웅변 대회에서 우승한 기억은 없다. 부활동의 캡틴은 본인이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에 억지로 밀어붙여진 것이었고, 팀 플레이를 하지 못해 레귤러는 아니었다" 또한 다른 동창생으로부터 "성적은 좋았지만 특출나지는 않았고, 진학 학교도 중 정도의 학력이었다"고 말해 라이터 오노 잇코는 "변호 측의 모두 진술에서 나온 내용과 사실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B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풍기 위원장이 되었지만, 불순 이성 교제가 발각되어 남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전학 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아 가업을 이불 판매업으로 전환, 유한회사로 한 뒤 주식회사로 변경(사명 월드)。1992년에 지명 수배될 때까지 사기 상법을 반복했다。1980년에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두었지만, 1992년에 전처와 이혼。그 후에 내연녀 B와 아들 2명(C・D)을 두었다.

병적인 거짓말쟁이이며, 자의식이 강하고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한다. 유창하고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엘리트를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하지만, 猜疑心(시기심), 질투심이 강하다(애정 결핍 성향). 비정상적으로 끈질기고 가학적이다.

또한, 허세를 부리는 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신경질적이고 겁이 많은 소심한 사람이었던 듯하며,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폭력 조직으로부터 심한 빚 독촉을 받았을 때는 방에서 웅크리고 틀어박혀 있었다. 또한, 출소한 M의 감옥 동료에 따르면, 수감 중인 M은 다른 죄수나 교도관에게는 허리를 낮추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교도관으로부터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내뱉어졌다고 한다.

M은 "도쿄대 출신 컴퓨터 기술자", "교토대 출신 학원 강사로 물리학자의 인재로 소설가 지망", "집안은 무라카미 수군의 당주", "형은 도쿄대 출신 의사" 등 다양한 거짓 경력을 칭했다.

M은 용모와 말솜씨로 여성에게 호감을 얻는 매력이 있어, 그것으로 다양한 여성 편력을 가졌다. M은 동시에 여러 여성과 육체 관계를 맺고 있었고, 교제 여성과 그 어머니와 동시에 육체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21]。B와 전처는 M이 동시에 여러 여성과 육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M과 좀처럼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M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 관계자인 내연녀 B의 가정에 대해서는 B뿐만 아니라 B의 어머니 G와 B의 여동생 H와도 동시 병행으로 육체 관계를 가졌다. M은 이에 대해 "기묘한 인간 관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G와 H의 육체 관계에 대해서는 상대가 먼저 유혹해 왔다고 M은 주장하고 있지만, B와 전처 등 M과 교제하고 생존하고 있는 여성에 따르면, 교제의 계기는 M으로부터 유혹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M은 여성과 성행위를 할 때 사진을 촬영하는 경우가 있으며, M이 촬영한 성행위 사진은 B뿐만 아니라 G와 H의 것도 존재하여 감금 사건에서 재료로 사용되었고, 사건 발각 후에 경찰에 압수되었다고 한다。

B를 포함한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교제 여성, 회사의 직원, 고객 등도 표적으로 삼아 가혹한 폭력을 휘둘렀으며, 때로는 표적으로 삼은 사람들을 마인드 컨트롤에 걸어, 본 사건과 비슷한 형태로 폭행의 공범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행동했다.

사건 발각 후 전처는 "M은 어쨌든 자신만만하고 큰 소리만 치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준다", "M은 자신을 '세상의 구세주'라고 말했지만, M을 만난 사람은 모두 불행해졌다", "M 때문에 언젠가 죽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거짓말로 덧칠을 해 가면, M 안에서는 진짜가 된다", "저런 인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부모를 포함한 친족은 취재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M이 경영했던 회사의 전 직원은 "M은 폭력단 간부와 교제했다. M의 친부로부터 권총을 본 적이 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또한 M의 친척 중에 결혼 사기나 어음 사기 등 사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인물이 있어, 사건 전에 사망했지만, M가나 M이 경영하는 회사에 출입했고, M의 사기는 이 친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에 따르면, 복역 중에 당뇨병을 앓은 듯하며, 현재는 눈도 보이지 않아 일상생활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2. 1. 마쓰나가 후토시

마쓰나가 후토시는 1961년 4월 28일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 구에서 태어나 야나가와에서 성장했다.[4] 다다미 가게를 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부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학급 위원, 학생회 임원을 맡는 등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교내 웅변 대회에서 3학년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시 동창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웅변 대회에서 우승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또한, 부활동의 캡틴을 맡았다는 기록과 달리 "본인이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에 억지로 밀어붙여진 것"이며, "팀 플레이를 하지 못해 레귤러는 아니었다"는 증언도 있다.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


고등학교 시절에는 풍기 위원장을 맡았으나, 불순 이성 교제가 발각되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19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4] 결혼 후에도 최소 10명의 여성과 동시에 불륜 관계를 맺는 등 복잡한 여성 편력을 보였다.[4]

1982년, 오가타 준코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4] 당시 마쓰나가는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1982년 12월 24일에는 "밴드를 하고 있다"고 꼬드겨,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악기나 음향 기기를 갖추고 직원들에게 한 달 동안 특훈을 시켜, 1100명 수용 규모의 구루메의 대홀에서 50명 정도의 관객 앞에서 밴드 연주에 맞춰 마쓰나가는 보컬을 담당하며, 음악을 좋아하는 여성에게 "최고의 이브!"라고 외쳤다. 이때 홀의 관객 중에는 마쓰나가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뿐만 아니라, 마쓰나가와 수개월 전에 육체관계를 맺은 애인 오가타 준코가 있었고, 그 외에도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 1984년에는 준코에게 결혼을 약속했으나, 준코의 어머니는 마쓰나가가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알고 교제를 반대했다.[4]

1983년 마쓰나가는 "월드"라는 이불 판매 회사를 설립하고, 사기, 협박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사업을 확장했다.[6] 종업원들에게는 판매 할당량을 부과하고, 이를 채우지 못하거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종업원들을 방음 처리된 방에 가두고 전기 충격을 가하는 등 가혹 행위를 일삼았다.[5] 또한, 폭력 조직과의 연계를 과시하거나 종교 의식을 연상시키는 언행으로 종업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다.[6]

1992년에는 지명 수배될 때까지 사기 상법을 반복했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쓰나가는 폭력 조직으로부터 심한 빚 독촉을 받았을 때는 방에서 웅크리고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2007년 9월, 2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2011년 사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구치소에 사형수로서 수감되어 있다. 복역 중 당뇨병을 앓아 시력을 잃고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2. 2. 오가타 준코

오가타 준코는 1962년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태어났다.[4] 1982년 10월, 마쓰나가 후토시는 야나가와 시절의 동창인 오가타 준코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4] 1984년, 마쓰나가는 준코와 결혼할 것을 약속했지만, 준코의 어머니 오가타 시즈미는 마쓰나가가 딸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마쓰나가는 시즈미를 강간했다. 1985년, 마쓰나가는 준코에게 그녀의 가족이 그녀의 자살 시도 때문에 그녀를 싫어한다고 설득하여 그와 함께 살도록 설득했다.[4] 마쓰나가는 준코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폭행하며,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범행을 강요했다. 준코는 마쓰나가의 협박과 폭력에 의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는 데 가담하는 등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다. 이후 준코는 체포되어 2007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11년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4][5][6]

3. 사건의 배경

3. 1. 마쓰나가와 오가타의 관계

마쓰나가 후토시는 결혼한 상태에서 1982년 10월, 야나가와 시절의 동창인 오가타 준코(B)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4] 1980년 여름, 마쓰나가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입수하여 동급생 B에게 전화하였고, 두 번째 만났을 때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M은 B를 강제로 유혹하여 육체 관계를 맺고 교제를 시작했다.

1984년 여름, B는 유부남 M과의 교제를 숙모에게 털어놓았고, B의 부모는 M과 헤어지도록 B에게 요구했다.[26] M은 B의 부모에게 예의 바르고 호청년처럼 행동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B와 재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을 약속하는 "사실 확인서"를 작성하여, B의 부모는 M을 마음에 들어하게 되었다.[26][27]

M은 B에게 처음에는 상냥하게 대했지만, B가 옛날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한 것을 계기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M은 B에게 낡은 일기장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자세하게 추궁하면서 구타했다. M은 B의 오른쪽 유방에 담배 자국, 오른쪽 허벅지에 문신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 또한, B는 M의 지시로 B의 지인 남성들을 욕하며 관계를 끊었다.

1985년 2월, M에게 폭력을 당하던 B는 과로로 쓰러졌고, 2월 13일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다.[4][26] M은 B를 2월 15일에 퇴원시켜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가, "자살당하면 원인을 찾고, 자신도 경찰에 불려가 곤란하다"며 B에 대한 폭력을 더욱 가속화했다.[26] M은 자살 미수뿐만 아니라, 불륜 관계가 아내에게 발각되면 손해 배상을 청구당한다고 협박하거나, B의 나체 사진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게다가 M은 B를 유치원 교사를 그만두게 하고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B를 친가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분적시켰다.[26]

마쓰나가는 준코의 어머니 오가타 시즈미(G)를 강간했다.[4] M의 증언에 따르면, M은 G에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제안하여 그녀를 교외의 러브호텔로 데려가 육체관계를 맺었고, 그 후 만날 때마다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한편 "G는 B를 걱정하지 않고, 나(M)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M의 말을 들은 B는 G에게 혐오감을 느껴, 일기에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싫어진다"라고 썼다. B는 사건으로 인한 체포 후 법정 증언에서 M과 G의 남녀 관계의 계기에 대해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 강간이라는 형태로 관계를 맺었다"고 추측하며, 어머니 G에 대해 옹호했다.

3. 2. 초기 범죄 행각

마쓰나가 후토시는 1983년 무렵부터 이불 판매업을 시작했다. 그는 헐값의 이불을 고가에 판매하기 위해 폭력이나 "야쿠자"라는 말을 사용해 협박하는 등 사기적인 상술을 동원했다. 1987년 5월에는 회사명을 M상점에서 월드로 변경하고, 대형 상사의 등기부를 복사하여 영업 항목을 "무역업, 선박, 석유, 항공기, , 자동차, 해운"으로 했지만, 사기적인 상술은 변함이 없었다.

마쓰나가는 이 상술로 1억 8000만 엔을 벌어들였으나, 폭력을 휘두르자 사원들이 잇따라 탈주하고 실적이 악화되었다. 그는 종업원들에게 서열을 매겨 하위자를 학대하거나 상위자에게 하위자를 학대하게 했으며, 특히 전기 충격을 가하는 가혹 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전기 충격을 "통전"이라 불렀으며, 발가벗긴 전선 끝에 클립을 달아 신체에 끼워 순간적으로 전류를 흘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통전 부위는 , , 다리, 허벅지, 젖꼭지, 이나 등 얼굴, 성기등 다양했다.

결국 1992년 7월, 이러한 사기적인 상술이 경찰에 알려지면서 사기죄와 협박죄로 지명 수배되었고, 마쓰나가는 도주했다. 이 사기 및 협박 사건의 공소 시효는 1999년 7월에 성립되었다.

4. 사건의 전개

1996년 1월부터 마쓰나가는 도라야 구미오(도라야 구미오/虎谷久美雄일본어)와 당시 17세였던 그의 딸을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했다.[7] 마쓰나가는 도라야를 욕실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전기 고문, 자신의 대변을 먹게 하는 등의 가혹한 학대를 가했다.[7] 또한, 딸에게 아버지를 물도록 강요하기도 했다.[7]

1996년 2월 26일, 계속된 감금과 고문으로 인해 도라야는 쇠약사하였다.[71][7] 마쓰나가는 도라야의 딸에게 아버지의 시신 처리를 강요했으며, 시신은 분쇄된 후 구니사키 반도 근처 바다에 유기되었다.[7]

구니사키 반도(왼쪽)와 그 주변


마쓰나가는 도라야의 딸에게 사망 직전의 도라야에게 이빨 자국이 생길 정도로 물게 한 후 사진을 찍고, "아버지 도라야를 죽인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 관계 확인서를 작성하게 하여, 아버지 살해에 가담한 죄악감을 심어주고 학대를 반복하며 감시했다. 마쓰나가는 직접 실행하지 않았지만, 오가타 준코 등을 대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살인 및 시체 처리를 실행했다.

4. 1. 도라야 구미오와 딸 감금 및 살해

1996년 1월부터 마쓰나가는 도라야 구미오()와 당시 17세였던 그의 딸을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했다.[7] 마쓰나가는 도라야를 욕실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전기 고문, 자신의 대변을 먹게 하는 등의 가혹한 학대를 가했다.[7] 또한, 딸에게 아버지를 물도록 강요하기도 했다.[7]

1996년 2월 26일, 계속된 감금과 고문으로 인해 도라야는 쇠약사하였다.[71][7] 마쓰나가는 도라야의 딸에게 아버지의 시신 처리를 강요했으며, 시신은 분쇄된 후 구니사키 반도 근처 바다에 유기되었다.[7]

마쓰나가는 A에게 사망 직전의 E에게 이빨 자국이 생길 정도로 물게 한 후 사진을 찍고, A에게 "아버지 E를 죽인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 관계 확인서를 작성하게 하여, 아버지 살해에 가담한 죄악감을 심어주고 학대를 반복하며 감시했다. M은 직접 실행하지 않았지만, B 등을 대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살인 및 시체처리를 실행했다.

4. 2. 오가타 일가 감금 및 살해

1997년 4월, 오가타 준코가 도주를 시도하자, 마쓰나가 후토시는 오가타의 가족들을 협박하여 감금했다.[71] 마쓰나가는 오가타 준코의 가족들에게 아사하라 쇼코의 방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심리적 통제를 가하며 가혹한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8] 또한, 오가타의 가족들에게 서로를 살해하도록 강요했다.[8]

마쓰나가는 오가타 준코가 도망간 것을 알고, 그녀와 육체 관계가 있던 어머니를 통해 오가타 준코가 유후인정으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마쓰나가는 오가타 준코에게 지시하여 E 살해(최초의 살인)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E 살해 사건을 구실로 오가타 준코의 가족들을 불러 협박했다. 그는 가족 중에 살인범(오가타 준코)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체면이 깎인다는 점을 이용했다. 또한, 마쓰나가는 자신의 자살과 장례식을 조작하여 오가타 준코를 다시 불러들여 감금하고, 이전보다 더 심한 학대를 가했다.[8]

1997년 5월 중순, B(오가타 준코)는 모지역에서 도주를 시도했으나, 감시역 A가 뒤쫓아 실패했다. B는 후지산아오키가하라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역 앞에서 A에게 붙잡혔다. A는 휴대 전화로 M에게 연락하여 B의 도주 미수를 알렸다.

이후, 마쓰나가는 오가타 준코의 가족들을 기타큐슈시로 불러 모아 감금하고,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며 지속적으로 학대했다. 그는 가족 간의 불만을 듣고 약점을 잡아, 그들을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돈을 갈취했다. 또한, F(오가타 준코의 아버지)에게 E 살해 현장의 배관을 교체하게 하여 증거 인멸에 가담시키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6월까지, 마쓰나가의 강요와 학대로 인해 오가타 준코의 가족들은 차례로 살해되었다.

  • 1997년 12월 21일, 오가타 준코의 아버지 오가타 다카시게/緒方 誉일본어(당시 61세)가 감전사했다.[8]
  • 1998년 1월 20일에는 오가타 준코의 어머니 오가타 시즈미/緒方静美일본어(당시 58세)가 교살되었다.[8]
  • 1998년 2월 10일에는 오가타 준코의 여동생 오가타 리에코/緒方理恵子일본어(당시 33세)가 교살되었다.[8]
  • 1998년 4월 13일에는 오가타 리에코의 남편 오가타 가즈야/緒方主也일본어(당시 38세)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8]
  • 1998년 5월 17일에는 오가타 리에코의 아들 오가타 유키/緒方優貴일본어(당시 5세)가 교살되었다.[8]
  • 1998년 6월 7일에는 오가타 리에코의 딸 오가타 아야/緒方彩일본어(당시 10세)가 교살되었다.[8]


마쓰나가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토막 내어 냄비에 삶은 다음, 구니사키 반도 근처 바다나 화장실에 버렸다.[7]

4. 3. 추가 피해자

마쓰나가는 199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당시 44세의 여성과 당시 3세인 그 딸을 감금, 협박하고 560만 엔을 강탈했다.[71] 이 여성에게는 불화했던 남편이 있었고,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이혼한 후 장남은 전 남편에게 친권을 넘기고, 장녀는 입시 공부를 위해 친가에 맡겼으며, 차녀(당시 3세)를 데려오게 하여 마쓰나가, 오가타 준코(B), 장남 C와 동거를 시작했다.[7] 그는 그 여자에게 자신이 교토 대학 졸업생이라고 설득하고 결혼을 약속했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서 560만 엔(약 69,066달러)을 갈취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여자와 그녀의 딸은 마쓰나가의 아파트에 갇혔다. M에 의해 여성은 직장을 퇴직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은 이혼 직후 M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지금 낳으면 사생아가 된다. 이번만은 낙태해 달라"는 M의 의향을 받아들여 낙태했다.

1996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997년 3월 16일에 걸쳐, M은 여성과 차녀를 기타큐슈시의 아파트 2층의 다다미 4조 반 방에 가두고, 연일 학대했다. 학대는 B에게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M의 명령으로 여성이 차녀를 학대하기도 했다. 3월 16일 새벽, 여성은 틈을 봐서 방의 창문에서 길가로 뛰어내려 탈출했다. 그녀는 정신 병원의 치료를 받았고 그녀의 딸은 풀려났다. 여성의 도주 후, M은 차녀를 여성의 전 남편 집 현관 앞에 버려두고, 동거하고 있던 아파트를 곧바로 비우고 모습을 감췄다. 여성은 그 후, 정신과에 장기 입원했다. 2002년에 사건이 발각되었을 무렵, 이 여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으며 섭식 장애로 고통받았고, 생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M은 사망 전 E에 의해 기타큐슈의 맨션을 거처로 삼은 후, 동창생이었던 여성과 접촉한다. 이 여성은 남편이 있었지만, M으로부터 결혼을 제안받아 남편과 이혼했다. 그 후 M은 결혼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고, 여성은 헤어진 남편이나 그 부모에게서 여러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여 총 1880만 엔의 돈이 M에게 흘러 들어갔다. 이윽고 남편이나 부모로부터의 송금이 끊기게 되자, 1994년 3월 31일에 여성 (당시 32세)은 오이타현 벳푸만에 투신 자살했다. 사망한 여성의 아버지에 따르면 "시신을 찾으러 갔을 때, 집을 나설 때와 같은 복장이었다. 1300만 엔 가까운 금액을 송금했는데, 예금 계좌에는 3000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5개월 전인 1993년 10월 29일에는 여성의 둘째 딸 (당시 1세)이 머리 부위 강타 형태로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사망했다. 그 당시에 지명 수배 중이던 B가 당시 생존해 있던 둘째 딸의 어머니를 사칭하여 이송된 병원에 동행했지만,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부딪혔다"고 설명했다. 둘째 딸의 어머니를 사칭한 여성이 남긴 서류는 사건 발각 후 수사 기관에 압수되었고, 인감 대신 찍힌 손가락 지문이 B와 일치하면서, B가 당시 생존해 있던 둘째 딸의 어머니를 사칭했다는 것이 물증으로 밝혀졌다.

2002년에 M 등이 체포된 이후, 이 사건에 대해 M 등에 의한 범행이 의심되었다. 체포 후 B는 "여아 사망에 대해서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모른다", "여성은 사망하는 날까지 M으로부터 구타나 감전과 같은 학대를 받았다. 사망한 날은 M과 함께 벳푸시호텔에 가서, 호텔 프런트에서 여성에게 안겨 있던 자신의 장남을 건네받은 후, 여성이 바다를 향해 달려나가 투신 자살했다. 그 후,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서 기타큐슈로 도망쳤다"고 진술했다. 이 모녀의 사망은 "한없이 타살에 가깝다"고 표현되었지만, 형사 사건으로는 되지 않았다.

일가족 6명이 사망한 직후 M은 B에게 "너와 아이들이 있어서 나는 곤란해. A와 둘이 되면 나는 E로 위장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며, C와 D를 죽이고 자살하라는 부자 3명의 동반자살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C와 D는 M에게 B가 얼마나 나쁜 어머니인지 들어왔기 때문에, B는 부자 3명의 동반자살을 실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C 자신도 M에게 "너는 진짜 아들이 아니야", "너만 없으면 B와 헤어질 수 있어" 등 수십, 수백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M은 새로운 돈주로서 남편과의 불화로 고민하는 전업주부에게 초점을 맞춘다. M은 여성의 고민을 들어주고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과 함께할 것을 요구했다. M은 여성에게 "남편의 노림수는 아이들이니 아이들만이라도 내가 맡아서 숨기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여성의 두 아이(쌍둥이)를 맡는 한편, 양육비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 여성이 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자 M은 소개한 유흥업소에서 여성을 일하게 하여, 여성으로부터 약 2500만 엔을 갈취했다.

여성의 두 아이(쌍둥이)와 C와 D의 총 4명은 A와 B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C는 외출 중인 M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A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피해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아 형사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5. 체포 및 재판

2002년 1월 30일, 마쓰나가 후토시에게 감금되어 있던 도라야 구미오(가명)의 딸 A는 마쓰나가로부터 탈출하여 기타큐슈에 사는 조부모의 집으로 도망쳤다.[3] A는 보름 정도 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생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지만, 2월 14일 마쓰나가의 교제 상대인 A의 백모에 의해 발각되었다.[35] 마쓰나가는 A의 조부모와 백모를 속여 A를 강제로 데려왔고, 이후 A에게 심한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

2002년 3월 6일, A는 다시 탈출하여 할아버지 댁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사건이 발각되었다.[35] 다음 날인 3월 7일,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는 A에 대한 감금치상 혐의로 체포되었다.[35] 체포 당시 이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신원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가타 준코가 소지하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 사진첩을 통해 신원이 밝혀졌다.

처음에는 단순 감금 사건으로 여겨졌으나, A의 증언에 따라 마쓰나가와 오가타가 E의 지인이며, 5-6년 전부터 4명이 함께 살았지만,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약 1년 후에 E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며칠 후, A와 오가타 준코가 돌보던 4명의 아이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2명(C, D)은 DNA 감정을 통해 마쓰나가와 오가타의 아이임이 확인되었다.[20]

A는 "아버지는 M과 B에게 살해당했다"고 증언하면서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고, A는 F 일가 6명이 살해당했고 시신이 해체되어 바다나 공중 변소 등에 버려졌다고 증언하여 대량 살인 사건으로 수사가 확대되었다.[20] 후쿠오카현 경찰은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DNA 감정을 실시했으나, 마쓰나가의 증거 은폐 공작과 시신 소멸로 인해 물적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A와 오가타 준코의 진술, 협박과 학대를 받으며 피해자들이 작성한 서류, 시체 처리 도구 구입 영수증, 톱의 발견, 맨션 주민의 증언 등 간접 증거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오가타 준코는 2002년 10월 23일에 자백했다.

오가타 준코는 체포 후 구치소 생활에 대해 "식사도 할 수 있고, 목욕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화장실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독서 시간까지 있다"고 말하며, 마쓰나가의 지배하에서의 생활의 가혹함을 이야기했다.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는 2002년 9월 18일 아야 살인 혐의를 시작으로 2003년 5월 30일 카즈야 살인 혐의까지 총 7건의 살인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40] 오가타 준코는 살인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지만,[38] 마쓰나가는 여성들이 자신에 대해 허위 진술을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범행을 부인했다.[38]

경찰은 시신을 찾지 못하고 물리적 증거도 발견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었으나,[38] 쿠미오와 준코의 딸들의 증언과 간접 증거를 통해 범행을 입증했다. 특히, 아버지를 살해당하고 학대당한 A는 비디오 링크 방식을 통해 "마쓰나가와 오가타는 악마로 보였다"며 "아버지의 원수는 제가 갚겠다. 둘 다 사형이 되어야 한다"고 증언했다.[38]

2005년 3월 2일, 검찰은 마쓰나가와 오가타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41][42] 검찰은 논고에서 "선악의 굴레가 벗겨진 발안자 마쓰나가와 지시에 묵묵히 따르는 실행자 오가타는 수레바퀴의 양륜과 같은 관계"라며, "희대의 연쇄 대량 살인 사건으로 양 피고인의 형사 책임은 우리나라 범죄사상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고 주장했다.[38]

2005년 9월 28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 고쿠라 지부(와카미야 도시노부 재판장)는 마쓰나가와 오가타에게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46][47] 법원은 마쓰나가를 "일련의 사건의 주모자"로, 오가타를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판시했다. 다만, 오가타에 대해서는 "진상 해명에 기여"했고 "마쓰나가의 지시 없이 B만의 의사로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사형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판결에 항소했다. 2007년 9월 26일, 후쿠오카 고등 법원은 마쓰나가의 원심을 유지했지만, 오가타의 형량은 마쓰나가가 오가타에게 피해자를 살해하도록 강요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형에서 무기 징역으로 변경되었다.[9]

2011년 12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마쓰나가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했고, 오가타에 대한 검찰 측 상고도 기각하여 무기 징역을 확정했다.

2005년 9월 28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 고쿠라 지부(와카미야 도시노부 재판장)는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에게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46][47] 재판부는 마쓰나가가 주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오가타 역시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판단했다.[46] 다만, 오가타의 아버지에 대한 범행은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 인정했다.[46]

두 사람은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다. 2007년 9월 26일, 후쿠오카 고등 법원(토라이 야스오 재판장)은 마쓰나가의 사형을 유지했지만, 오가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9] 이는 마쓰나가가 오가타에게 피해자 살해를 강요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였다.[9]

2011년 12월 12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미야가와 미쓰하루 재판장)은 마쓰나가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57][58] 같은 날, 오가타에 대한 검찰 측의 상고 역시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59][60]

5. 1. 체포

2002년 1월 30일, 마쓰나가 후토시에게 감금되어 있던 도라야 구미오(가명)의 딸 A는 마쓰나가로부터 탈출하여 기타큐슈에 사는 조부모의 집으로 도망쳤다.[3] A는 보름 정도 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생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지만, 2월 14일 마쓰나가의 교제 상대인 A의 백모에 의해 발각되었다.[35] 마쓰나가는 A의 조부모와 백모를 속여 A를 강제로 데려왔고, 이후 A에게 심한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

2002년 3월 6일, A는 다시 탈출하여 할아버지 댁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사건이 발각되었다.[35] 다음 날인 3월 7일,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는 A에 대한 감금치상 혐의로 체포되었다.[35] 체포 당시 이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신원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가타 준코가 소지하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 사진첩을 통해 신원이 밝혀졌다.

처음에는 단순 감금 사건으로 여겨졌으나, A의 증언에 따라 마쓰나가와 오가타가 E의 지인이며, 5-6년 전부터 4명이 함께 살았지만,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약 1년 후에 E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며칠 후, A와 오가타 준코가 돌보던 4명의 아이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2명(C, D)은 DNA 감정을 통해 마쓰나가와 오가타의 아이임이 확인되었다.[20]

A는 "아버지는 M과 B에게 살해당했다"고 증언하면서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고, A는 F 일가 6명이 살해당했고 시신이 해체되어 바다나 공중 변소 등에 버려졌다고 증언하여 대량 살인 사건으로 수사가 확대되었다.[20] 후쿠오카현 경찰은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DNA 감정을 실시했으나, 마쓰나가의 증거 은폐 공작과 시신 소멸로 인해 물적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A와 오가타 준코의 진술, 협박과 학대를 받으며 피해자들이 작성한 서류, 시체 처리 도구 구입 영수증, 톱의 발견, 맨션 주민의 증언 등 간접 증거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오가타 준코는 2002년 10월 23일에 자백했다.

오가타 준코는 체포 후 구치소 생활에 대해 "식사도 할 수 있고, 목욕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화장실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독서 시간까지 있다"고 말하며, 마쓰나가의 지배하에서의 생활의 가혹함을 이야기했다.

5. 2. 재판 과정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는 2002년 9월 18일 아야 살인 혐의를 시작으로 2003년 5월 30일 카즈야 살인 혐의까지 총 7건의 살인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40] 오가타 준코는 살인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지만,[38] 마쓰나가는 여성들이 자신에 대해 허위 진술을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범행을 부인했다.[38]

경찰은 시신을 찾지 못하고 물리적 증거도 발견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었으나,[38] 쿠미오와 준코의 딸들의 증언과 간접 증거를 통해 범행을 입증했다. 특히, 아버지를 살해당하고 학대당한 A는 비디오 링크 방식을 통해 "마쓰나가와 오가타는 악마로 보였다"며 "아버지의 원수는 제가 갚겠다. 둘 다 사형이 되어야 한다"고 증언했다.[38]

2005년 3월 2일, 검찰은 마쓰나가와 오가타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41][42] 검찰은 논고에서 "선악의 굴레가 벗겨진 발안자 마쓰나가와 지시에 묵묵히 따르는 실행자 오가타는 수레바퀴의 양륜과 같은 관계"라며, "희대의 연쇄 대량 살인 사건으로 양 피고인의 형사 책임은 우리나라 범죄사상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고 주장했다.[38]

2005년 9월 28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 고쿠라 지부(와카미야 도시노부 재판장)는 마쓰나가와 오가타에게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46][47] 법원은 마쓰나가를 "일련의 사건의 주모자"로, 오가타를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판시했다. 다만, 오가타에 대해서는 "진상 해명에 기여"했고 "마쓰나가의 지시 없이 B만의 의사로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사형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판결에 항소했다. 2007년 9월 26일, 후쿠오카 고등 법원은 마쓰나가의 원심을 유지했지만, 오가타의 형량은 마쓰나가가 오가타에게 피해자를 살해하도록 강요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형에서 무기 징역으로 변경되었다.[9]

2011년 12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마쓰나가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했고, 오가타에 대한 검찰 측 상고도 기각하여 무기 징역을 확정했다.

5. 3. 판결

2005년 9월 28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 고쿠라 지부(와카미야 도시노부 재판장)는 마쓰나가 후토시와 오가타 준코에게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46][47] 재판부는 마쓰나가가 주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오가타 역시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판단했다.[46] 다만, 오가타의 아버지에 대한 범행은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 인정했다.[46]

두 사람은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다. 2007년 9월 26일, 후쿠오카 고등 법원(토라이 야스오 재판장)은 마쓰나가의 사형을 유지했지만, 오가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9] 이는 마쓰나가가 오가타에게 피해자 살해를 강요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였다.[9]

2011년 12월 12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미야가와 미쓰하루 재판장)은 마쓰나가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57][58] 같은 날, 오가타에 대한 검찰 측의 상고 역시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59][60]

6. 사건의 특징 및 영향

6. 1. 잔혹한 범행 수법

마쓰나가 후토시는 피해자들의 약점을 잡아 폭력을 가했으며, 특히 전기 충격을 주요 지배 수단으로 사용했다. 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직원의 지식을 바탕으로 고안된 전기 고문은 "통전"이라 불렸으며, 클립을 전선 끝에 달아 신체에 끼워 전류를 흘리는 방식이었다. 통전 부위는 , , 다리, 젖꼭지, 성기 등 다양했으며,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마쓰나가는 통전을 "질서형"과 "격앙형"으로 구분하여 훈육 또는 분풀이 목적으로 사용했다. 3세 여아를 포함한 어린아이들까지 통전 대상이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공포, 굴욕감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마쓰나가는 피해자들에게 살인을 지시하고, , 믹서, 냄비 등을 사용해 시체를 처리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시체 처리 방법을 쯔쿠다니 제조에 비유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증거 인멸을 위해 수도관 및 욕실 타일을 교체하여, 수사 기관은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가족 간 살해를 강요하고, 아동을 범행에 가담시키거나 살해하는 등 마쓰나가의 범행은 극도로 잔혹했다. 1심 판결은 아동 학대 및 살해에 대해 "범행의 잔혹하고 냉혹한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6. 2. 마인드 컨트롤

마쓰나가 후토시는 피해자들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심리적으로 지배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약점을 털어놓게 한 뒤, 이를 빌미로 금전을 요구하거나 가족 간의 불신을 조장했다.

마쓰나가는 피해자들에게 "금주"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이들은 "순수한 성격", "경계심이 얇다", "얼빠졌다", "체면을 중시한다", "본가가 어느 정도 부유하다", "자녀가 있다"는 특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피해자들의 "약점", "학대", "문서"를 이용하여 "식사", "배설", "수면", "외출" 등 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 구조를 만들어냈다.

또한, 마쓰나가는 피해자들 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었다.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의 험담을 하면 서열 하위에서 면제되도록 유도하고, 그 험담을 당사자에게 알려 피해자들끼리 증오하게 했다. 또한 도청을 암시하여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거역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피해자들은 마쓰나가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으며, 상위 피해자가 하위 피해자에게 감전시키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마쓰나가의 교묘한 세뇌 수법으로, 피해자들은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고립되었고, 마쓰나가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살인이나 시체 해체를 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마쓰나가에 의한 계층 구조는 "「원맨 리더 M」과 「M의 이익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M의 지시를 절대시하고 절대 복종하는 복수의 노예」", "지배와 복종의 밀실", "인간을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M류 교리", "질서도 없는 밀실", "밀실 안에서의 절대적인 권력",[68] "정점에 서 있는 M 아래에 B가 있고, 틀 밖에 A, 최하층에 C 일가" 등으로 표현되었다.

6. 3. 사건의 영향

마쓰나가 후토시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범죄 피해자 지원 및 가해자 처벌 강화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또한 마인드 컨트롤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유사 범죄 예방을 위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매우 잔혹하고 악질적인 대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 처음에는 지역 언론 기관을 중심으로 보도되었지만, 중간부터 보도량이 줄어들어 전국 언론 기관에서의 집중 보도로 이어지지 못했다. 보도량이 줄어든 이유로는 "너무나도 잔혹한 사건 내용 때문에 표현 방법이 극히 어려운 점"과 "가족끼리 서로 죽인 사건의 성격상, 피해자 유족이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노출되어 피해를 호소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7.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8. 관련 작품

소노 시온마쓰나가 후토시의 범죄를 바탕으로 한 러브 앤 팝: 숲 제작을 2019년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2019년 10월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11] 사카이다 슌 감독의 영화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는 이 사건의 사형수 M과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의 타쿠마 마모루를 모델로 하고 있다.[70] 마나베 쇼헤이의 만화 『암흑 금전 우시지마 군』의 「세뇌 군」편은 이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드라마판 시즌 3에서 텔레비전 드라마화되었다. 영화 『사랑 없는 숲에서 외쳐라』는 이 사건의 사형수 M을 모델로 하고 있다. 드라마 『미만 경찰 미드나잇 러너』 (제1화)는 이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8. 1. 영화

소노 시온은 마쓰나가의 범죄를 바탕으로 한 러브 앤 팝: 숲 제작을 2019년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2019년 10월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11]

8. 2. 드라마

8. 3. 만화

8. 4. 도서

오노 잇코의 《완전 다큐멘터리 기타큐슈 감금 연쇄 살인 사건》(분게이슌주, 2023년, ISBN 9784163916590), 《연속 살인범》(분슌 문고, 2019년, ISBN 9784167912314), 도요타 마사요시의 《지워진 한 가족 - 기타큐슈·연속 감금 살인 사건 -》(신초 문고, 2009년, ISBN 9784101368511), 연보·사형 폐지 편집 위원회의 《포퓰리즘과 사형 연보·사형 폐지 2017》(임팩트 출판사, 2017년, ISBN 9784755402807), 사키 류조의 《어째서 가족은 서로 죽였는가》(세이슌 출판사, 2005년, ISBN 9784413041201), 고후 기이치의 《기타큐슈 연쇄 살인 사건의 교훈》(분게이샤, 2007년, ISBN 9784286029603), 나카오 코지의 《절망 재판 - 헤이세이 「흉악 사건 & 이상 범죄」 방청 파일》(쇼가쿠칸, 2009년, ISBN 9784093798020), 「신초45」 편집부의 《살육자는 두 번 웃는다 - 풀려난 업, 횡행하는 9사건》 (신초샤, 2004년, ISBN 9784101239163) 등이 있다.

8. 5. 다큐멘터리

참조

[1] 뉴스 http://news.rkb.ne.j[...] RKB Mainichi Broadcasting 2008-06-26
[2] 뉴스 http://www.jnocnews.[...] JNOC NEWS 2008-02-12
[3] 뉴스 Pair accused of slaying 7 face gallows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WEEKLY 2008-02-10
[4] 뉴스 Pair to hang for seven murders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08-02-10
[5] 웹사이트 http://kyushu.yomiur[...] Yomiuri Shimbun 2008-03-17
[6] 웹사이트 http://kyushu.yomiur[...] Yomiuri Shimbun 2008-03-17
[7] 웹사이트 http://www8.ocn.ne.j[...] MONSTER 2007-11-29
[8] 웹사이트 http://www.mm-labo.c[...] Mitsuharu Matsumoto Laboratory 200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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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http://www.chubun.co[...] Chubun Doho 201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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