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7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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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1759년)는 에도 막부의 로주 수좌이자, 간세이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아들로 태어나 시라카와 번주를 거쳐, 1787년 로주 수좌에 임명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보좌했다. 주자학에 기반한 중농주의를 바탕으로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여 기근 대책, 검약령, 학문 장려 등을 시행했으나, 개혁의 한계와 고카쿠 천황, 도쿠가와 이에나리와의 갈등으로 1793년 사직했다. 이후 시라카와 번 경영에 전념하며 번의 재정을 안정시켰고, 1829년 사망했다. 그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쇄국 정책 속에서도 서양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등 다면적인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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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759년)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출생 | 1759년 1월 15일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 | 1829년 6월 14일 (70세) |
국적 | 일본 |
관직 | |
직위 | 제3대 시라카와 영주 노중 수좌, 장군 보좌 |
임기 시작 | 1783년 |
임기 종료 | 1812년 |
전임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
후임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
가계 | |
씨족 |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 →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사다카쓰 류 |
아버지 | 도쿠가와 무네타케 |
어머니 | 야마무라 씨의 딸, 고센인 |
양어머니 | 고노에 미치코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
배우자 | 정실: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딸 계실: 가토 야스타케의 딸, 하야히메 측실: 데이준인 |
자녀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사나다 유키쓰라 후쿠히메 세이쇼인 호주인 고토부키히메 신 마쓰다이라 데루타케 정실 |
양녀 | 마쓰다이라 노부시게 정실 호린인 |
생애 | |
어릴적 이름 | 도쿠가와 겐마루 |
별칭 | 라쿠옹, 가게쓰옹, 후게쓰옹, 시라카와 라쿠옹, 다소가레노쇼쇼 |
시호 | 수이코쿠 공 |
신호 | 수이코쿠 다이묘진 |
계명 | 수이코쿠인덴 스렌샤 덴요 호토쿠 라쿠오 다이코지 |
묘소 | 도쿄도고토구시라카와료겐인 |
관위 | |
관위 | 종5위하가즈사노스케, 엣추노카미, 종4위하, 시종, 좌근위권소장 증정3위 |
2. 생애
1759년 1월 15일 (宝暦|호레키일본어 8년 12월 27일) 에도 막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이자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당주 다야스 무네타케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릴 적 이름은 겐마루(賢丸)였다. 총명했던 사다노부는 병약하고 평범했던 친형 하루사토 대신 다야스가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고,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후계자 물망에도 올랐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를 '뇌물 정치'라고 비판했고,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당주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견제로 1774년 시라카와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덴메이 대기근이 한창이던 1783년 시라카와 번주가 되어 기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검약에 힘썼고, 식량 구호 대책을 신속히 수립하여 번에서는 기근으로 인한 아사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도호쿠 지방에서 대기근의 피해가 심했던 것에 비해 예외적인 상황이었다.[3] 또한 서민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 학문을 권장했다.[4]
1786년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1787년 고산케의 추천을 받아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보좌역 겸 로주 수좌를 맡게 되었다. 그는 다누마 일파를 몰아내고 교호 개혁을 모범으로 삼아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여 막부 재건을 꾀하였다.
사다노부는 주자학에 기반한 중농주의 정책으로 기근 대책, 검약령, 뇌물 인사 폐지, 하타모토에 대한 문무 장려 등을 시행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개혁은 형식적인 부분이 많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야시 시헤이 등의 여론 선동을 금지하고, 간세이 이학 금령을 통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삼고 난학을 단속했다. 다이코쿠야 고타유 등 일본인 표류민들을 돌려보내면서 통상을 요구한 러시아의 아담 락스만에게는 한정적인 통상을 시사하고 표류민 수용을 용인했으나, 에도만 등 해상 방비를 강화했다. 조선통신사 규모도 축소했다.
대정위임론으로 조정의 권위를 막부에 이용하려 했던 사다노부는 존호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과 대립, 1793년 해상 방어를 위해 출장 중 사직 명령을 받았다.[29] 이후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마키노 다다키요 등 사다노부파 로주들이 그의 정책을 계승했다.
실각 후 시라카와 번 경영에 전념, 말 생산 장려와 민정에 힘써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1810년 에도 만 경비 실시로 재정적 타격을 입었고, 1812년 장남 사다나가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하고 은퇴했지만 번의 실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1829년 72세로 사망, 묘는 도쿄도 고토구 레이간지에 있으며 1928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0]
사다노부의 연보(年譜)는 다음과 같다.
연도(和暦) | 연도(서력) | 내용 |
---|---|---|
안에이 4년 | 1775년 | |
덴메이 3년 | 1783년 | |
덴메이 7년 | 1787년 | 6월 19일 - 노중 상석. 캇테카타 토리시마리(勝手方取締掛)가 되고, 지주를 겸임. |
덴메이 8년 | 1788년 | 3월 4일 - 쇼군 보좌를 겸임. 츠키반(月番)과 캇테카타 토리시마리(勝手方取締掛)를 그만둔다. |
간세이 원년 | 1789년 | 12월 26일 - 캇테카케(勝手掛)를 겸무. |
간세이 5년 | 1793년 | 7월 23일 - 쇼군 보좌, 노중 등의 직에서 면직. 사콘에노곤쇼쇼로 전임. 엣추노카미는 그대로. 다마리마즈메 |
분카 9년 | 1812년 | 3월 6일 - 은거. 라쿠오(楽翁)를 호칭. |
분세이 12년 | 1829년 | 5월 12일 - 사망. |
메이지 41년 | 1908년 | 9월 7일 - 증 정3위 |
2. 1. 출생과 가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1759년 1월 15일 (宝暦|호레키일본어 8년 12월 27일) 에도 막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이자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당주 다야스 무네타케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릴 적 이름은 겐마루(賢丸)였다. 생모는 야마무라 씨(향선원)로, 오와리번의 가신 가문 출신이었다. 사다노부는 서자였지만, 무네타케의 아들 중 장남부터 넷째 아들까지 일찍 죽었고, 정실 소생의 다섯째 아들 도쿠가와 하루아키가 적자가 되었기 때문에, 동복 형인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와 함께 정실인 어렴중 고노에 씨(보련원전)의 양자가 되었다.1762년 2월 12일, 다야스 저택이 소실되어 에도성 혼마루에 일시 거주하기도 했다. 1763년에는 병에 걸려 위독했으나, 치료를 통해 회복했다. 하지만 사다노부는 유년기에 병이 잦았다.
총명했던 사다노부는 병약하고 평범했던 친형 하루사토 대신 다야스가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고,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후계자 물망에도 올랐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를 '뇌물 정치'라고 비판했고,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당주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견제로 1774년 시라카와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덴메이 대기근이 한창이던 1783년에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다.
사다노부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도쿠가와 무네타케 (1716-1771) | |
어머니 | 향선원 - 야마무라 씨의 딸 | |
양어머니 | 고노에 미치코 (1721-1786) | 도쿠가와 무네타케의 정실, 고노에 이에히사의 딸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1728-1790) | |
정실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딸 | |
계실 | 준히메 | 가토 야스다케의 딸 |
장남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1791-1838) | |
측실 | 정순원 - 나카가와 씨의 딸 | |
차남 | 사나다 유키쓰라 (1791-1852) | |
생모 불명의 자녀 | 후쿠히메 | 마쓰다이라 사다노리의 정실 |
세이쇼인 | 스와 타다히로의 정실 | |
호주인 | 가토 야스나리의 정실 | |
수히메 | 완히메, 마키노 타다시게의 정실, 이후 나이토 노부아쓰의 계실 | |
신 | 마쓰라 히로시의 정실 | |
마쓰다이라 테루타케의 정실 | ||
양자 | 마쓰다이라 노부시의 정실 | 가토 야스토키의 딸 |
호린인 | 쿠키 쓰나요의 계실, 사나다 유키쓰라의 딸 |
2. 2. 시라카와 번주 시대
덴메이 대기근이 한창이던 1783년에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다. 기근으로 고통받는 영지의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우선 자신부터 솔선수범하여 검약에 힘썼고, 백성에 대한 식량 구호 대책을 신속히 수립하여 시라카와 번에서는 기근으로 인한 아사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도호쿠 지방에서 대기근의 피해가 심했던 것에 비해 예외적인 상황이었다.[3] 또한 서민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 학문을 권장했다.[4]사다노부는 1783년 도호쿠 지방 대기근 때 부유한 가신과 마을 사람들이 쌀을 다른 곳에 팔아치우는 바람에 쌀 부족이 일어나 가신에게 봉록 지급이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에치고에서 쌀을 수송하고, 아이즈 번에 요청하여 쌀을 입수했다. 또한, 타 번이나 가미가타로부터 쌀 구매도 꾀하였다. 이러한 기아 대책은 사다노부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 사다노부는 가독을 상속하여 번주로서 번정 재건을 시작하게 된다. 인근 번주로 평소 친교가 두터웠던 혼다 타다카즈로부터 사다노부에게 보낸 당시의 서장에는 시라카와 번의 기아 대책이 오슈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으며, 기아민 구제 정책에 감명받아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 등을 적어 보냈다.
실각한 사다노부는 시라카와 번 경영에 전념했고, 산지가 많아 실제 수입이 적은 번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말 생산을 장려하였고, 민정에 진력하여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1810년, 로주 재임 당시에 계획한 에도 만 경비가 실시되면서 그 최초의 주둔 임무가 주창자인 사다노부가 있는 시라카와 번에 내려졌고, 이로 인해 재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2. 3. 간세이 개혁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이자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당주 다야스 무네타케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다. 1774년 시라카와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데릴사위로 들어갔으며, 1783년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다. 덴메이 대기근 당시 백성들을 위한 구휼 정책을 펼쳐 아사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등 뛰어난 정치 수완을 보였다.1786년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1787년 고산케의 추천을 받아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보좌역 겸 로주 수좌가 되었다. 사다노부는 다누마 일파를 몰아내고 교호 개혁을 모범으로 삼아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여 막부 재건을 꾀하였다.
사다노부는 주자학에 기반한 중농주의 정책을 펴 기근 대책, 검약령, 뇌물 인사 폐지, 하타모토에 대한 문무 장려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개혁은 형식적인 부분이 많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야시 시헤이 등의 여론 선동을 금지하고, 간세이 이학 금령을 통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삼고 난학을 단속했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를 축소했고, 러시아의 아담 락스만에게는 한정적인 통상을 시사하며 표류민 수용을 용인했지만, 에도만 등 해상 방비를 강화했다.
대정위임론을 펴서 조정의 권위를 막부에 이용하려 했던 사다노부는 존호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과 대립, 1793년 사직했다. 하지만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마키노 다다키요 등 사다노부파 로주들이 정책을 계승했다.
사다노부는 시라카와 번 경영에 전념하며 말 생산 장려, 민정 안정 등으로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810년 에도 만 경비 실시로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1812년 장남 사다나가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하고 은퇴했지만, 번의 실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1829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개혁 직전,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로 무사 세계는 돈과 연줄에 의한 출세가 횡행하고, 농촌에서는 빈부 격차가 심해져 몰락하는 빈농이 속출했다. 덴메이 연간의 기근으로 이촌한 농민들이 도시에 대량 유입되어 사회 질서를 붕괴시켰다. 간세이 개혁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기강 숙정, 재정 재건, 농촌 부흥, 민중 봉기 재발 방지 등에 힘썼다.
사다노부는 막부 재정 재건을 위해 우하인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요시무네 시대의 253만 냥에서 도쿠가와 이에시게 시대에 300만 냥까지 쌓였던 막부 금고가 덴메이 대기근으로 정권 취임 당시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자, 즉효성이 있는 엄격한 긴축 정책을 실행하여 재정 재건에 힘썼다. 검약령이나 오오쿠의 축소, 제반 경비 삭감 등 다누마 시대에도 시행했던 긴축 정책을 계승하고 절감한 결과, 막부의 적자 재정은 흑자로 전환되었고, 사다노부 실각 시점에는 비축금도 20만 냥 정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호 개혁에서는 검약을 중심으로 하는 재정 지출 억제 정책과 정면법 채용에 따른 연공 증징책이 취해졌지만, 간세이 개혁 시기에는 연공 증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소농 경영을 중핵으로 하는 마을의 유지와 재건에 힘을 쏟았다.[19] 농민의 부담을 경감할 목적으로 시행된 다양한 감세·부흥 정책은 다음과 같다.
정책 | 내용 |
---|---|
조향(助郷) 경감 | 경제 발달로 수송량과 통행자가 증가하면서 역참 주변 촌락에 부과되었던 조향 부역의 부담을 규정하고, 초과 시 화폐 지불. |
납숙(納宿) 폐지 | 1789년 오사카 미창의 납숙 전폐, 이듬해 에도 납숙도 전폐. 연공미를 마을의 직납으로 변경. 납숙 대신 에도 쌀 상인으로부터 상납을 일괄 인수하는 회미 납입인 임명. |
인구 증가 정책 | 덴메이 대기근으로부터의 회복을 위해 간비(間引き) 금지, 아동 수당 지급. 1790년 둘째 아이 양육에 금 1냥, 1799년 2냥으로 증액. |
기연령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타모토·고케닌을 구제하고자 1789년 삿사(札差)로부터 빌린 빚의 일부를 탕감하거나 저리로 연부 상환을 명한 법령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덴메이 4년 이전(6년 이상 전)의 빚은 이유 불문 기연.
- 덴메이 5년 4월부터 간세이 원년까지의 빚은 원금, 이자를 연리 6%로 낮추어 연부 상환.
- 간세이 원년 이후 이자는 연리 12%로 인하.
- 영세 삿사를 위해 막부 출자로 대여 회소 신설.
- 삿사의 배임을 인정하고, 금주(金主)가 봉행소에 소송해도 5년 이전의 것은 수리하지 않음.
- 하타모토·고케닌에 대한 대출은 계속 실행.
기연령 발포 전 삿사 경영 상태 조사 결과, 97건 중 7건만이 자기 자금으로 경영, 전체 7할 이상이 타처에서 자금 조달. 빚 탕감 시 삿사의 막대한 금전적 손해와 경영난, 하타모토에 대한 재융자 거부, 융자 길이 끊긴 하타모토·고케닌들의 빈궁 심화 등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 막부 측이 우려했다.[22]
간조 봉행(勘定奉行) 구제 히로타미는 삿사 지원을 위해 공금 대출, 사루야마치 회소 설립 제안. 에도, 교토, 오사카 유력 호상(豪商) 자금으로 경영 상태 좋은 삿사에게 회소 운영, 경영난 삿사에 연리 1할 저리 대출. 구제는 삿사의 영업 존속, 장기간 부호 곁에 쌓인 돈 유통으로 경제 활성화 평가.[22] 회소의 융자로 삿사 주의 가격 하락, 폐업자 속출 방지.
기연령 실시 시기는 겨울 옷 교체 후인 9월. 삿사 자금 출자 지연 방지 목적. 완전 탕감 대상은 6년 이전 빚으로 한정했다. 당시 표면 연리는 18%였지만, 삿사가 각종 수수료와 이자를 이중으로 징수하는 등 실질 금리가 18%를 초과했기 때문에, 6년 이후의 빚이라면 원금을 초과하는 금액을 이미 회수하여 기연해도 원금 손실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22]
기연령 7일 후, 삿사 28명이 탄원서 제출. 영세 영업, 타처 자금 차입, 기손에 이안(利安)으로 영업 어려움, 대출 불가 내용이었다. 막부는 즉시 대응하여 다음 날 삿사 대표에게 2만 냥 하사, 1만 냥 10년간 상환 면제, 1만 냥 회소 대출 자금 명시.[23] 삿사는 탄원서를 철회했지만 대출을 꺼리기 시작했다. 사다노부는 구제에게 편지를 보내 연말까지 해결하도록 재촉했다. 봉행과 삿사 간의 교섭 결과 연리 12% 중 2%였던 삿사 몫을 6%로 상향 조정하여 삿사가 동의했다. 조정에서 나온 돈을 그대로 무가(武家)에 중개하는 것만으로 이자의 절반을 얻을 수 있었고, 삿사로서도 이익이 컸다. 연말 전 타결로 회소 자금이 삿사를 경유하여 무가에게 전달되어 대규모 대출 꺼림 사태는 회피되었다. 이후 삿사에 대한 경제 지원은 계속되어 다음 해 7월 무가 차용 액수의 4할을 회소에서 저리로 대출하는 조치가 결정되었다.[22]
역사학자 야마무로 교코는 기연령이 막부, 무가, 상인 모두 이익을 얻는 성공적인 정책이었다고 평가하며, 덴포 무이자 연부 상환령 당시 간조 봉행 발언을 인용, 50년 주기 빚 파기 조치가 금은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목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에도 시대에는 은행 예금 융자 시스템이 없어 부유층 퇴장 시 화폐 유통량 감소,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막부는 주기적으로 상업 자금을 강제 유통시켜 화폐 정체를 방지했다. 기연령, 화폐 개주(改鑄) 등은 일시적 미봉책이 아닌 일정 간격 상인 대상 일괄 과세, 즉 부호 저축 과세였다. 이는 호상에게 화폐를 강제 유통시켜 화폐 공급량을 증가시키고, 경제 침체를 방지하며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부의 재분배 시책이었다.[22]
사다노부는 여러 관리들의 통제를 위해 계산방 30명, 토목방 20명 등 부정 관리를 파면하고, 대관도 2년 동안 8명 처단, 19명을 교체했다. 황무지, 농업용수 재개발을 위해 다액의 공금 대출을 실시하고, 대관을 장기간 근무하게 하여 농촌 부흥을 도모했다. 그 결과 테라니시 시게지로, 오카다 세이스케 등 '명대관'이 탄생했다.
개혁 초기, 러시아 등 외국 위협에 대해 사다노부는 에조치를 불모지로 유지하고 마쓰마에 번 통치 위탁을 주장했다. 혼다 다다카즈 등 막부 중신과 간조 봉행은 에조치 막부 직할 통치 및 개발을 주장했지만, 사다노부는 마쓰마에 번의 에조치 지배권이 막부에 이양될 경우를 예상하여 도호쿠 다이묘에게 분할하여 개발하는 구상을 하여 에조치 개발을 부정하지 않았다.[19] 아이누와의 어구 무역도 제안했다. 결국 사다노부의 주장이 관철되어 에조치는 마쓰마에 번이 계속 통치하게 되었지만, 혼다 다다카즈 등이 제안한 어구 무역은 관리를 파견하여 실행하였다.
에조치 개발 계획은 사다노부 실각 후 1799년 시작되어, 분세이 4년(1821년) 막부가 에조 직할을 중단하고 마쓰마에에 영지를 반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외국 배 출현에 따라 해방 강화를 위해 1791년 나가사키에 포술 연습장을, 1792년 에도 교외에 대통 연습장을 설치했다. 관료들의 기치와 갖춤을 조사하여 군역 동원의 참고 자료로 삼고, 군학자 후쿠시마 구니오에게 군역령을 제출하게 했다.
유럽 정세 변화 속에서[27] 1793년 사다노부는 소극적 개국 정책을 보였다. 고다유와 락스만 일행을 마쓰마에로 초청하여 막부의 교섭을 지시하고, 러시아의 무역 요구를 거절하는 형태로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과의 교섭 답변을 준비하여 고다유에게 동행을 지시했다. 사다노부는 락스만이 나가사키에 도착하면 무역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록했지만, 1793년 락스만은 나가사키를 경유하지 않고 귀환했다.
막부는 러시아 등 외국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해방 걸을 신설하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임명했다. 사다노부는 이즈, 사가미를 순검하여 에도 만 방비 체제 구축을 꾀하고, 봉행소를 이즈 4곳, 사가미 2곳에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에조치 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 방침을 결정하고 해방 강화를 추진했다.
- 마쓰마에 번 지배 유지, 막부 관리 순회, 대포 배치, 어구 무역 실시.
- 무쓰 연안 요충지 산마야를 천령으로 하고, 모리오카, 히로사키 양 번으로부터 3천 석~4천 석씩 영지를 수납하여 '호쿠코쿠 군대' 설치. 난부, 구보다 양 번 출병.
- 네덜란드 협력 하에 양식 군함 건조, 우라가, 호쿠코쿠 군대에 배치하고 절반은 북해 경비에 충당.
그러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노중에서 퇴임하자 에조치 방어 기본 정책은 중지되었다. 1804년 러시아 사절 레자노프가 락스만에게 준 신패를 지참하고 통상을 요구하며 나가사키에 내항하자, 당시 노중 도이 도시아쓰는 강경하게 거절했다. 사다노부는 이러한 태도가 후환을 초래한다고 막부에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분카 노략사건이 발생하여 사할린, 홋카이도, 이토로프섬, 리시리섬이 러시아 군함의 습격을 받았다.
조선 통신사 접대는 축소되었는데, 이는 덴메이 대기근 직후였기 때문에 통신사 접대 예산 삭감과 황폐한 국내 사정을 조선에 보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2. 3. 1. 간세이 개혁의 한계
러시아 제국의 위협이 커지는 가운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쇄국 정책을 유지하면서 에조 섬을 황폐하게 두는 것이 일본의 안보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마쓰마에 번이 섬을 계속 관리하도록 지지했다. 다른 쇼군 측근들은 에조를 여러 다이묘에게 분할하여 정착과 개발을 장려하려 했지만, 사다노부는 방어를 위해 다양한 번에 구역을 할당하고 아이누 민족과의 무역을 장려하는 절충안을 택했다.[7]사다노부는 1791년 나가사키에, 1792년 에도에 포술 훈련소를 설립하여 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1792년 러시아 장교 아담 락스만이 일본인 표류자 다이코쿠야 코다유를 돌려보내고 무역 협상을 위해 에조에 상륙했을 때, 사다노부는 락스만이 마쓰마에로 진입하도록 허용했다. 락스만은 나가사키에서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마쓰마에를 떠났다. 사다노부는 에도 만 주변에 해안 포병 기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우라가 해협에 배치할 서양식 군함을 건조하라고 명령했다.[7]
그러나 간세이 개혁의 가혹한 정책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고카쿠 천황과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을 포함한 많은 강력한 적들이 사다노부를 반대했다. 사다노부는 쇼군가의 재정을 회복하고 명성을 되찾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도쿠가와 관료 내에서 그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만이 생기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해상 방어를 조사하는 여행 중에 사임을 통보받았다. 그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행한 많은 정책은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고, 쇼군가의 말기까지 도쿠가와 정책의 기초로 남았다.[7]
사다노부는 막부 재정 재건을 위해 대담한 재정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우하인언에 따르면,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에 253만 냥이었던 막부 금고는 도쿠가와 이에시게 시대에 300만 냥까지 늘어났지만, 덴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사다노부 취임 당시에는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사다노부는 검약령, 오오쿠 축소, 경비 삭감 등 다누마 오키쓰구 시대의 긴축 정책을 계승하여 막부 재정을 흑자로 전환시켰고, 실각 시점에는 20만 냥 정도의 비축금을 확보했다.[7]
2. 4. 실각과 만년
1793년 존호 사건을 계기로 이에나리와 대립하여, 해상 방어를 위해 출장 중일 때 사직 명령을 받았다.[29] 1787년부터 6년간 로주 수좌 겸 쇼군 보좌역을 맡아 간세이 개혁을 추진했지만, 형식적인 부분이 많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평가를 받는다.사다노부는 실각 후에도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후임 로주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와 막부 대학 총장 하야시 즈사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8] 그는 시라카와번 경영에 전념하며, 말 생산 장려, 재정 개혁, 난코 공원 조성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난코 공원은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 대중에게 개방된 드문 사례였다.[7] 시라카와 번의 가신들 사이에서는 그의 엄격한 검약 정책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그는 대체로 훌륭한 통치자로 여겨졌다.[7]
1810년, 사다노부가 로주 재임 시절 계획했던 에도 만 경비가 실시되면서, 시라카와 번에 최초 주둔 임무가 내려져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9] 1812년 장남 사다나가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하고 은퇴했지만, 번의 실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사다나가의 구와나번으로의 영지 변경도 사다노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12]
1829년 초, 사다노부는 감기와 고열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에도에서 발생한 화재로 그의 저택들이 파괴되어 여러 차례 피난해야 했다. 그는 가마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통행을 막아 불편을 초래했고,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졌다. 그는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5월 13일 사망하였다.[10] 그의 묘는 도쿄도 고토구의 레이간지에 있으며, 1928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0]
사후, 그의 아들은 교토의 요시다 가문에 신격화된 칭호인 '슈코쿠-다이묘진'을 부여해 달라고 청원했다.[7] 이는 세 단계에 걸쳐 부여되었고,[11] 사다노부는 친코쿠-슈코쿠 신사에 안치되었다.[12] 이 신사는 구와나와 시라카와에 지점이 있다.[12]
3. 사상과 학문
사다노부는 필명 '라쿠오'(楽翁)로 활동한 작가이자 도덕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주요 저작으로는 『우게노 히토코토』, 『토젠 만피츠』, 『칸코 도리』, 『카게츠테이 닛키』, 『세이고』, 『오무노 코토바』 등이 있다.[13] 특히 사후에는 『다이묘 카타기』라는 다이묘의 생활을 패러디한 풍자적인 텍스트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는 사다노부가 공식적으로 반대했던 게사쿠의 범주에 속했기 때문이다.
간세이 개혁 시기에는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19]
- 조향(助郷) 경감: 역참 주변 촌락에 부과되던 조향 부역의 부담을 정하고, 규정을 초과했을 때는 화폐를 지불하도록 했다.
- 납숙(納宿) 폐지: 간세이 원년(1789년) 9월, 오사카 미창의 납숙을 전폐하고, 이듬해 에도의 납숙도 전폐하여 연공미를 마을의 직납으로 했다.
- 인구 증가 정책: 덴메이 대기근으로부터의 회복을 목표로, 간비(間引き) 금지, 아동 수당 지급을 실시했다. 1790년에는 둘째 아이 양육에 금 1냥, 1799년에는 2냥으로 증액했다.
교육 정책에서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심사를 실시하여 막부에 충실한 관료를 육성하려 했다. 안영 · 덴메이 시대에는 주자학에 대항하여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과 양명학이 유행했지만, 사다노부는 간세이 이학의 금을 통해 주자학을 정통 학문으로 삼고 다른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했다.[24]
간세이 2년(1790년) 5월 24일, 대학두 하야시 노부타카에게 하야시 가문의 문인이 고문사학이나 고학을 배우는 것을 금지하고, 막부의 유관인 시바노 리쓰잔 · 오카다 칸센에게도 같은 조치를 명령했다. 유시마 성당의 학문소 강의와 관리 등용 시험도 주자학만으로 실시하게 했다. 또한, 시바노 · 오카다 외에 오토 니슈나 고가 세이리를 막부 유관으로 임명하고, 유시마 성당을 개축했다.
간세이 5년(1793년) 4월, 하야시 노부타카가 급사하자, 막부는 하야시 짓사이를 양자로 보내 하야시 가의 영향력을 억제했다. 같은 해 7월 사다노부의 노중 사임 후에도 이 정책은 계승되어, 유시마 성당에서 학문소를 분리하여 막부 직할의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변경했다.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막신 자제 외에도 타번 유학생이나 낭인의 입학을 허가하고, 기숙사까지 완비하는 등 널리 입학 문호를 열었다.
주자학은 18세기 후반 서양 자연 과학의 그릇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중국에서도 명청조 학자들이 실증 과학을 거경궁리 · 격물치지의 이름으로 부르고, 주자학적 사유가 실증적 과학적 사고의 그릇이 되었다고 지적된다.[25][26]
사다노부는 서양 학문, 특히 군사 관계 지식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모리시마 추료 등을 고용하여 서양 서적을 번역하게 하고, 하르마 화해와 같은 사전을 편찬하게 했다. 모토키 료에이에게 지도를 번역하게 하고, 천문서를 헌상받기도 했다. 아오이도 덴젠에게 서양식 동판화 기술을 배우게 하여 지도 제작 등 해방(海防)에 활용하려 했다.
통설과는 달리, 사다노부는 주자학 추진을 관료 통제에 이용했을 뿐, 본인의 사상은 절충학파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수신록(修身録)』에서 "주자학은 이치가 먼저 서고, 배우면 편벽에 빠진다"고 언급하며 주자학에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간세이 개혁에서 비속한 예문을 단속했지만, 사적으로는 황표지풍의 희작을 집필하는 등 예문을 즐기는 면모도 보였다. 노중 퇴임 후에는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오타 난포 등 처벌받았던 자들에게 고서(詞書)를 의뢰하는 등 문화 활동 옹호자로 돌아섰다. 슈코 쥬슈(集古十種)라는 고보물 도록집을 제작하여 전국 규모의 문화재 보호를 위한 아카이브를 작성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사다노부는 막부 관료들이 문서를 제대로 읽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며, 수정해야 할 점을 즉시 지적하여 관료들이 "이번 어르신은 읽으시니,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다노부는 뇌물을 받지 않고 명예를 중시하는 일화를 남겼으며, 자신의 저작과 전기를 통해 유교적 정치가로서의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려 노력했다.
4. 저술 활동
사다노부는 '라쿠오'(楽翁)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이자 도덕가였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우게노 히토코토』, 『토젠 만피츠』, 『칸코 도리』, 『카게츠테이 닛키』, 『세이고』, 『오무노 코토바』 등이 있다.[13] 사후에는 다이묘의 생활을 풍자한 『다이묘 카타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게사쿠에 속하는 것으로 사다노부가 공식적으로 반대했던 것이기에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다노부는 서양 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네덜란드어를 배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모리시마 추료 등을 고용하여 서양 서적을 번역하게 했다. 이시이 쇼스케는 사다노부의 명으로 서양 군사 서적을 발췌, 번역하여 "원서군서고(遠西軍書考)"를 편찬했다. 또한, 이시이는 "란불사전(蘭仏辞典)"을 번역했고, 이나무라 산파쿠 등이 참여하여 일본 최초의 란일 사전인 "하르마 화해"가 완성되었다.[20]
모토키 료에이에게는 지도를 번역하게 하여 북방 지리와 러시아 정보를 얻고자 했다. 자연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진공 펌프 실험을 통해 생물에게 공기가 필수적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아오이도 덴젠에게 서양식 동판화 기술을 배우게 하여 지도 제작 등에 활용하려 했다.
그 외 저서로는 『한가함의 여유』, 『세키의 가을바람』, 『우하인언・수행록』, 『화월초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장서 목록』, 『퇴한잡기』, 『집고십종』, 『고화류취』, 『정어』 등이 있다. 특히 『집고십종』은 고화, 고물 모사 약 2000점으로 이루어진 도록집이다.[53]
5. 평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가미가타 일강'을 타파하고자 '에도 지마와리 경제'(관동 경제권) 활성화와 기술 성장을 촉진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에도 백성의 술값으로 간사이 지방에 돈이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에도 근교에서 만든 지마와리 술 보급을 장려하고, 가미가타 술의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21]
또한 에도의 상품 수요가 가미가타의 하리모노에 의존하면 운송비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높아지고, 막대한 금은이 에도에서 유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부는 간세이 2년(1790년)부터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다.[21] '하리모노'에 뒤지지 않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술', '면', '간장' 등의 개량을 장려했다. 간장이나 면 등은 조시시, 노다시, 쓰치우라시 등에서 성공을 거두어 '하리모노 간장' 수입이 줄었다. 분카 시대에 보급된 '진한 간장', '가즈사 면', '혼미린' 등은 사다노부 이후 막부의 지원과 장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주조는 간사이 지방에서 유입되는 '하리사케'에 대한 부의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관동 지방 주조업을 보호, 육성했지만, 가미가타 술의 품질을 넘어서지 못했고, 관동에서 술을 만들기 시작한 술집도 오래가지 못했다.[21] 관동 술 창고 품질의 발전은 메이지 시대 후기에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신설된 간조소 어용달에 에도 거주자만을 충당하여 에도 시장의 지위를 높이고, 난료니슈긴을 서국 및 중국 방면에 유통시켜 금본위제 통일 화폐 시장을 만들고자 했다.
계산방 30명, 토목방 20명의 부정 관리를 파면하고, 대관도 2년 동안 8명을 처단하고 19명을 교체했다. 황무지나 농업용수 재개발을 위해 공금 대출을 실시하고, 대관을 장기간 근무하게 하여 농촌 부흥을 도모했다. 테라니시 시게지로, 오카다 세이스케 등은 신사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명대관'으로 불렸다.
개혁 초기 러시아 등 외국 위협에 대해, 사다노부는 에조치를 불모지로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마쓰마에 번에 통치를 위탁하려 했다. 그러나 혼다 다다카즈 등은 막부 직할 통치 및 개발을 주장했다. 사다노부는 에조치를 도호쿠 다이묘에게 분할하여 맡기는 구상도 이야기하며 에조치 개발을 부정하지는 않았다.[19] 최종적으로 사다노부의 주장이 관철되어 에조치는 마쓰마에 번이 계속 통치하게 되었지만, 혼다 다다카즈 등이 제안한 어구 무역 관리를 파견하여 실행했다. 에조치 개발 계획은 사다노부 실각 후인 간세이 11년(1799년)에 시작되어 분세이 4년(1821년)까지 지속되었다.
나가사키에 포술 연습장, 에도 교외에 대통 연습장을 설치하고, 군학자 후쿠시마 구니오에게 군역령을 제출하게 했다.
간세이 5년(1793년) 6월 20일, 사다노부는 소극적 개국 정책을 보였다. 고다유와 락스만을 초청하여 러시아의 무역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형태로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과 교섭하도록 했다. 락스만이 나가사키에 오면 무역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록했지만, 락스만은 귀로에 올랐다.
막부는 해방 걸을 신설하고 사다노부를 임명했다. 사다노부는 에도 만 방비 체제 구축을 꾀하고, 에조치 방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 에조치 지배는 마쓰마에 번에 맡기고, 막부 관리를 순회시키며 대포 배치, 어구 무역을 한다.
- 무쓰 연안 요충지 산마야를 천령으로 하고 '호쿠코쿠 군대'를 설치, 난부, 구보다 양 번에 출병을 명한다.
- 네덜란드 협력 하에 양식 군함을 건조하여 우라가와 호쿠코쿠 군대에 배치하고 북해 경비에 충당한다.
사다노부 퇴임 후, 이러한 정책은 중지되었다. 1804년 레자노프가 통상을 요구하며 나가사키에 내항했을 때, 도이 도시아쓰는 강경하게 요구를 거절했다. 사다노부는 후환을 초래한다고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분카 노략사건을 일으켜 러시아 군함의 습격을 초래했다.
조선 통신사 접대를 축소하는 등에도 힘썼는데, 이는 덴메이 대기근 직후였기 때문에 예산 삭감과 국내 사정을 조선에 보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통설에서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책을 뒤엎었다고 여겨지지만, 최근에는 간세이 개혁에 다누마 정권과의 연속성이 있었다고 지적된다. 도쿠가와 린세이시 연구소는 "사다노부의 반 다누마 캠페인은 명분적인 면이 강하고, 현실 정치는 다누마 정치를 계승한 면이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35]
다카기 히사시는 사다노부와 다누마 정권 사이에 연속적인 면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통화 정책을 예로 들었다. 사다노부는 메이와 2슈긴 제조를 중단하고 겐분긴을 증산했지만, 통용은 중단하지 않았다. 금화·은화 시세를 바로잡으려 했고, 다누마 정권 통화 정책 자체를 부정하려 한 것은 아니다. 1790년에는 2슈긴을 서일본 각국에서도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하가와라 시게히데의 통화 정책을 뒤엎은 것과 대조적이다.
요시무네는 지폐 통용을 해금했지만, 다누마는 금찰·전찰, 허가된 것 이외의 은찰 통용을 중단하는 등 지폐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이세 신궁의 오시나 이세 야마다 상인이 발행하던 야마다 하가키를 야마다 봉행 발행으로 변경하고, 근대적인 지폐 정책을 실시했다. 야마다 하가키는 사실상 막부 발행 지폐였다.[38]
후지타 사토루는 "간세이부터 분카 시대 재정 경제 정책은 긴축을 통해 재정 수지 균형을 도모하고, 운상·묘가금 도급 사업 일부를 철회했지만, 기본적으로 다누마 시대를 계승하고 독자적인 증수책을 찾아볼 수 없다"고 언급했다.[41] 다카자와 겐지도 "막부가 개혁에서 강구한 경제 정책은 주식 회사나 묘가금, 난료 2슈반, 공금 대출 등 다누마 정권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 많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사다노부는 대부분의 주식 회사를 존속시켰다. 개혁 초기에 주식 회사 폐지 상소가 있었지만, 주식 회사에 물가 조정과 운상금 납부를 기대했기 때문에 극소수만 폐지했다. 덴메이 7년에는 전당포 주식 회사를 결성하여 고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다누마 시대 구상된 에조 개발을 부정했다는 통설과 달리, 간세이 개혁 당시 막부 내에서는 에조 개발 구상이 긍정적으로 지지되었다. 후지타 사토루는 에조 개발 구상이 다누마 실각 후에도 간조소를 중심으로 로주를 포함한 막부 상당 부분에 지지받았다고 언급했다. 사다노부 실각 후 간세이 11년에 히가시에조지 막부 직할 개발이 시작되었고, 분카 4년(1807년) 전 에조지가 막부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골로닌 사건 해결에 따른 일러 긴장 상태 완화를 이유로 분세이 4년(1821년) 중지되었다. 에조지는 마쓰마에 번에 복령되었고, 정부에 의한 에조 개발은 막말 개항기까지 중지되었다.[40]
통설에서는 다누마를 적극 재정, 사다노부를 긴축 재정이라고 하지만, 후지타 사토루는 다누마 정치를 "나가는 돈은 한 푼이라도 줄인다"는 긴축 재정이라고 기술하며, 다누마 시대를 긴축 재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41]
다누마 시대를 쿄호·간세이 개혁과 별개로 보지 않고, 쿄호기 정책이 결실을 맺은 결과로 보는 것이 현재 통설이다. 사다노부의 덴메이 7년 이후 3년간 검약령은 다누마 실각으로 실시되지 않았을 나머지 연수를 소화하려는 다누마 정책을 추인한 것이다. 사다노부의 긴축 정책은 다누마 정치로부터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통설 속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주자학에 미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실제 사다노부의 주의 사상은 「수신록」에서 "주자학은 이치가 먼저 서고, 배우면 편벽에 빠진다", "학문의 유파는 무엇이든 좋다" 등 주자학에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주자학 추진은 관료 통제에 이용했을 뿐이며, 본인 사상은 절충학파 사상에 가깝고, 통설과 괴리된 실상이 엿보인다.
간세이 개혁에서 비속한 예문을 단속했지만, 사사로이 싫어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즐기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이묘 가타기』(덴메이 4년경), 『고코로노 소시』(교와 2년 자서) 등 스스로 집필한 황표지풍 미간행 희작이 존재한다. 시정 화제를 다루는 등 공사에서 모순된 면이 있었지만, 위정자로서 세정을 이해하려는 측면이 보인다.
노중 퇴임 후 사다노부는 문화 활동 옹호자 입장에 섰다.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애장한 우키요에 고서를 오타 난포, 호세이도 키사니, 산토 쿄덴 등 처사 횡단 금지 때 처벌받은 자들에게 의뢰했다. 키타오 마사미, 산토 쿄덴에게 의뢰하여 「요시와라 12시 회권」을 제작하게 했다. 슈코 쥬슈라는 고보물 도록집을 제작하게 했다. 전국 규모로 처음으로 국내 문화재 보호를 목적으로 한 아카이브를 작성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사다노부는 문서를 제대로 읽고 이해했기 때문에 관료들이 "이번 어르신은 읽으시니,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노중을 맡기 시작한 지 2개월 반 만에 2332량 임시 지출이 있었다. 막부 관계 담당 관리 부정이 의심되었지만, 노중으로서 위엄을 세우고 등성·쇼군 명대로서 임무·등성 전 저택에 온 손님에 대한 응접비 등으로 많은 지출이 필요했던 것이 판명되었다.
사다노부는 뇌물을 받지 않고, 타인이 뇌물을 받으면 불쾌감을 나타내는 등 명예를 취하려는 일화가 보인다. 생전은 물론 죽은 후 후세에 대한 이미지 전략에 힘썼다. 자신의 저작물과 가신에게 편찬하게 한 전기에 의해 칭찬받는 유교적 정치가였다는 것을 남기고, 불편한 것을 은폐하려 노력했으며, 성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저서로는 『화월초지』, 『우하인언』, 『집고십종』 등 100권 이상을 남겼다. 라이산요 등 많은 학자들과 교류했다. 시라카와 번에 일본 최초 공원(난코 공원)을 조성했다.
- 시가에 능하여, "마음 가는 대로 바라본 저녁 노을의 꽃이 흩날려 찾아 헤매는 저녁 무렵의 집"에서 따와 '''타소가레의 소쇼'''라고 불렸다.[49]
- 미나모토 타로의 『풍운아들』에 "사다노부는 자기 영지 시라카와의 백성 13세 이상에게 읽고 쓰는 것을 금지했다"고 적혀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세이 11년에는 서민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 "간세이 이래, 막부 요직자는 천한 신분 출신뿐이며 무공을 세운 집안 자는 적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 하야시 시헤이가 처벌받은 이유는 막부에 대한 정치 비판을 금지했기 때문이며, 내용 유용성은 관계없다. 사다노부는 북방 방비를 구상하고, 에도만 방비 체제 구축을 꾀하는 등 하야시 시헤이가 주장한 해방에 따르는 행동을 했다. 하지만 사다노부 실각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 하야시 시헤이 처벌 이유 중 하나로 『해국병담』 출판 시기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도 존재한다. 당시 이국선 통보 직후 러시아에 의한 조선 침략 소문이 퍼졌고, 흉작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맞물려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시기에 이국 위협론은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것일 뿐이었다.
- 『우하인언』은 사다노부 자를 분해하여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우하, 신⇒인언). 『우하인언』에서 사다노부는 어린 시절 성미가 급했지만, 오쓰카 고샤쿠, 구로사와 지오카, 미즈노 타메나가 지도로 성격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고샤쿠는 타야스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 가문 번병으로서 주자학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다노부가 고문사학이나 고학에 통달했음에도 간세이 이학의 금을 내린 배경에는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다노부 학문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방사(성행위)라는 것은 자손을 늘리기 위해 하는 것이며, 욕망을 참기 어렵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우하인언』에 기록하고 있다. 침소를 함께 하여 시집갈 때 마음가짐 등을 가르쳐 타이른 적도 있다. 수행 목적으로 행한 것으로, "조금도 범정(욕망)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간세이 이학의 금의 이학이란 주자학 이외 유학을 가리키며, 유학 밖에 있는 란학 등 유학도 아닌 학문을 금지하지 않았다. 유학 안에서만 주자학을 정통으로 삼았을 뿐이다.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주자학 이외 강의를 금지했을 뿐, 전면적으로 탄압한 것은 아니다.
- 란학에 관해서는 『우하인언』에는 "란학은 유익하다"는 기술이 보인다. 서양 서적 번역 기관인 만서화해어용방이 만들어지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채용하려 했던 면이 엿보인다.
- 아버지 무네타케는 국학을 보호했지만, 사다노부는 『화월초지』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를 비판하는 등 반대 태도를 취했다. 가다 아리마쓰가 문밖 출입 금지된 다이조에 기록을 간행한 『다이조에빈모』 사건으로 타야스 가문 책임 문제로 발전한 경위에서 국학에 대한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노리나가에게 소개를 요구했지만, 고전 연구를 위한 인재 모집이었고, 노리나가가 추천한 인물을 거절했다. 노리나가는 간세이 개혁에 기대하여 저서 『타마쿠시게』를 사다노부에게 헌상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 우키요에에도 친숙하여, 우키요에사인 구와가타 케이사 필 『근세 직인 그림 묘사』(3권,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는 사다노부 구장품이다. 이 그림 두루마리 글은 시카타 아카라, 호세이도 키산지, 야마토 쿄덴 등 간세이 개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썼다. "구로가미 산 연기 그림 두루마리"도 케이사에게 그리게 했다 (모두 간에이지 소장, 비공개). 『고시야와』 3편 권 8에는 사다노부가 수집한 니시키에 판화를 붙여 모은 두꺼운 두루마리 5권을 비슈 공에게 빌려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퇴한잡기』 권 1에는 우키요에에는 당대 풍속을 묘사하여 후세에 전한다는 점에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50] 사다노부 자신도 그림을 그려, 솜씨는 일정 수준에 달한다. 화풍은 가노파풍, 혹은 난핀파로 30~40점 정도 작품이 확인되고 있다. 만년이 되면 젊은 시절 가신 등에게 주었던 그림을 회수하여 서와 교환했다고 하며, 남겨진 작품 수는 서에 비해 매우 적다.[51]
- 시라카와 다루마는 시라카와시 특산물로 2월 11일 "시라카와 다루마 시장"이라는 축제에서 팔리고 있다.
- 시라카와 소바를 특산물로 한 것도 사다노부이다.
- 1800년 (간세이 12년)에 사다노부는 문헌에서 시라카와 신사가 세워진 위치가 시라카와의 관이라는 고증을 했다. 1966년에 "시라카와 관터"로서 국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기토류유술 스즈키 구니노리 고제자로, 3000명 제자 중 가장 뛰어난 3명 중 한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가신에게 유술을 가르쳤고, 차남 사나다 유키츠라에게도 가르쳤다. 은퇴 후에도 유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고안했다. 병약하여 자기 단련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 번조 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갑을류 검술이 쇠퇴했지만, 야마모토 가문에 남아 있던 전서를 바탕으로 복원하고, 기토류 유술을 함께 연구하여, 갑을류를 검·유를 융합시킨 내용으로 고쳤다. "신갑을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 번교·릿쿄칸에서 지도되던 야마모토류 검술에 사다노부가 고안한 기술을 더하여 유파 개량을 했다. "어궁부의 검"이라고 불렸다.
- 포술에 대해서도 미키류, 오기노류, 나카지마류, 와타나베류 4류 모두 개전을 얻어, 4류 장점을 합쳐 미타노베류를 간세이 연간에 열었지만, 분카 연간에 어가류 포술을 열었다.
- 궁술에 있어서는 히키류를 수행하여 스승 조견 문좌위문으로부터 서를 받는 정도 실력이었지만, 독자적으로 고안하여 유파를 열었다. 히키류를 더하여 어가류 궁술을 열었다.
- 학문 심사 정책 일환과 인재 등용 수단으로 학력 시험을 실시했다. 막신들에게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시험을 생각했다고 한다.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시험 (학문 심사)을 실시했다. 곤도 주조는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등용되어 에조치 조사대 일원이 되었다.
- 에추노카미였기 때문에 "엣추 님", 니시노마루 아래에 저택이 있었기 때문에 "세이카 님"이라고도 불렸다.
5. 1. 긍정적 평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곤궁한 무사를 구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한 정책들을 펼쳤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기엔령(棄捐令):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빚을 탕감하고 저금리 융자를 제공하여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했다. 이 과정에서 삿사(札差, 어음 교환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장기적으로 경제 활성화를 유도했다.[22] 삿사의 경영난을 막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여, 다음 해 7월에는 무가에게 빌린 액수의 4할을 회소에서 저리로 대출하는 조치가 결정되었다.[22]
- 경제 정책: 주기적으로 부유층의 재산을 환수하여 화폐 유통량을 늘리고, 경제 침체를 막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단순한 미봉책이 아니라, 부의 재분배를 통해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장기적인 정책이었다.[22]
- 복지 정책: 각 번에 곡물 비축을 명하고, 에도에 구제 기금인 '칠분적금'을 설치하여 기근에 대비하고 사회 기반 시설을 정비했다. 칠분적금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치안 정책: 이시카와지마에 '인력 양성소'를 설치하여 무숙자와 부랑자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고 사회 복귀를 도왔다. 이는 범죄 예방 효과를 가져왔으며, 하세가와 헤이조의 활약이 컸다. 헤이조는 사다노부에 의한 돈의 실무도 담당하여, 그 이익은 인력 양성소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당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2. 부정적 평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엄격한 정치는 오타 난포에게 "'''시라카와'''의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으니, 예전의 흐린 물인 '''다누마'''가 그립구나"라는 풍자를 받았다.[28] 막부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이어졌고, 존호 사건까지 겹쳐 불과 6년 만에 노중에서 실각했다. 덴메이 대기근으로 막부 재정이 회복되어 가는 가운데, 대외 문제 등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사임이었기 때문에, 당시 풍자시에서는 "5, 6년 돈도 조금 모으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라고 노래했다.사다노부의 사임은 존호 사건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정 위임론에 따라 조정의 권위를 막정에 이용하려 했으나, 고카쿠 천황이 친아버지인 칸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에게 태상 천황 존호를 주려 하자 주자학을 받들던 사다노부는 반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 지사이에게 오고쇼 존호를 주려 했던 장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도 대립했다. 또한 잇키 지사이의 친형인 마쓰다이라 시게토미의 관위 승진이나 지사이의 니노마루 이전을 꾀했는데, 사다노부는 오와리, 미토 양가와 함께 이를 거부했다. 장군 이에나리와 대립하여 화가 난 이에나리가 코쇼로부터 칼을 받아 사다노부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오소바고용토리쓰기・히라오카 요리나가가 기지를 발휘하여 "엣추 공(사다노부), 어검을 하사하오니, 어서 받으십시오"라고 외친 덕분에 이에나리도 김이 새, 사다노부에게 칼을 하사하고 물러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1]
간세이 6년, 사다노부의 귀국이 예정된 가운데, 오와리, 미토 양가는 마쓰다이라 노부아키, 혼다 타다카즈에게 백성들이 사다노부를 아쉬워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어용방에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 막부 내부에서도 사다노부 정치의 독재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고 있었다.
6. 대중문화 속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990년~1992년 ||
방송 기간 | 배우 |
---|---|
1970년~1974년 | 호리 유지 |
1974년~1979년 | 쿠로카와 야타로 |
1979년~1984년 | 나가이 히데아키 |
1990년~1991년 | 타무라 타카히로 |
1991년~1992년 | 와카바야시 고 |
|-
| rowspan="2" | 드라마 || 베어 죽여라!(斬り捨て御免!) || 1980년~1983년 || (은퇴 후의 시라카와 라쿠오(白河楽翁)로서)
방송 기간 | 배우 |
---|---|
1980년 | 8대 마츠모토 코시로 |
1982년 | 타츠미 류타로 |
|-
| 드라마 || 어둠의 꼭두각시(闇の傀儡師) || 1982년 || 이시바시 렌지 (후지 TV)
|-
| 드라마 || 영화 이야기(栄花物語) || 1983년 || 무라이 쿠니오 (TBS)
|-
| 드라마 || 닌자의 한 글자(忍の一字) || 1985년 || 타쿠마 신 (NHK)
|-
| 드라마 || 에도 풍운전(大江戸風雲伝) || 1994년 || 아베 히로시 (NHK)
|-
| 드라마 || 영주님 방랑객 은밀 여행(殿さま風来坊隠れ旅) || 1994년 || 히카루 잇페이 (TV 아사히)
|-
| 드라마 || 히라리 마타시로 위기일발!(ひらり又四郎危機一髪!) || 1995년 || 히로오카 슌 (니혼 TV)
|-
| 드라마 || 바람이 비추는 검 ~ 팔악당 비문(風光る剣〜八嶽党秘聞) || 1997년 || 칸다 마사키 (NHK 정월 시대극)
|-
| 드라마 || 오니헤이 한카쵸(鬼平犯科帳) || 1998년 || 이치무라 우자에몬 (후지 TV)
|-
| 드라마 || 사천만 보의 남자 · 이노 타다타카(四千万歩の男・伊能忠敬) || 2001년 || 카타오카 니자에몬 (NHK)
|-
| 드라마 || 환십랑 필살검(幻十郎必殺剣) || 2008년 || 나카무라 아츠오 (TV 도쿄)
|-
| 드라마 || 검객 상업(剣客商売) || 2008년 || 후쿠시 세이지 (후지 TV, 스페셜 드라마 "봄의 폭풍")
|-
| 드라마 || 은밀 비첩(隠密秘帖) || 2011년 || 와타나베 다이 (NHK, 정월 시대극)
|-
| 드라마 || 은밀 팔백팔정(隠密八百八町) || 2011년 || 히라 간지 (NHK, 토요 시대극)
|-
| 드라마 || 다마시에 우타마로(だましゑ歌麿) || 2013년~2014년 || 우메자와 토미오 (TV 아사히)
|-
| 드라마 || 에도 수사망 2015 ~ 은밀 동심, 악을 베다! || 2015년 || 카토 마사야 (TV 도쿄)
|-
| 드라마 || 은한의 부(銀漢の賦) || 2015년 || 이케우치 만사쿠 (NHK)
|-
| 드라마 || 아지랑이의 츠지 완결편 ~ 낮잠 이와네 에도 소지 ~(陽炎の辻 完結編〜居眠り磐音 江戸双紙〜) || 2017년 || 쿠도 아스카 (NHK 정월 시대극)
|-
| 드라마 || 무용암 은거 수행(無用庵隠居修行) || 2017년 ~ || 스기모토 텟타 (BS 아사히)
|-
| 드라마 || 오오쿠(大奥) || 2023년 || 아다치 유미 (NHK, 남녀 역전 설정)
|-
| 드라마 || 오오쿠(大奥) || 2024년 || 미야다테 료타 (후지 TV)
|-
| 드라마 || 별난 ~ 츠타시게 영광의 꿈 이야기 ~(べらぼう〜蔦重栄華乃夢噺〜) || 2025년
(예정) || 테라다 코코로 (NHK 대하 드라마)
|}
참조
[1]
서적
Charismatic Bureaucrat: A Political Biography of Matsudaira Sadanobu, 1758–1829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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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in the Tokugawa Bakufu, 1600–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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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松平定信の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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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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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中首座に就任した同じ月に描かれた定信30歳時の自画像。画像には入っていないが、画面右上に「撥乱而反正 賞善而罰悪」(乱をおさめて正にかえし、善を賞して悪を罰す)という定信の改革に対する決意が記されている。定信の肖像にはこの他に、定信自筆の頭部のみの自画像を元に、松平定永が狩野養信に命じて全身の肖像画を描かせた「松平楽翁像[https://bunka.nii.ac.jp/heritages/detail/46825]」(福島県立博物館蔵)もある(桑名市・白河市合同企画展実行委員会編集・発行 『桑名市・白河市合同特別企画展 「大定信展 ─松平定信の軌跡─」』 2015年8月7日、34、84-85頁)。
[15]
간행물
故上杉輝虎外四名贈位ノ件
아시아역사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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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久松松平家は御連枝ではなく、譜代大名である。ただし、後に親藩扱いとなる。
[17]
문서
定信伝記『守国公御伝記』
[18]
문서
松平定信は物価論などの著書において「人々が利益ばかりを追求し、煙草を作ったり、養蚕をしたり、また藍や紅花を作るなどして地力を無駄に費やし、常に少ない労力で金を多く稼ぐことを好むので、米はいよいよ少なくなっている。農家も今は多く米を食べ、酒も濁り酒は好まず、かつ村々に髪結床などもあり、農業以外で生計を立てようとしている」「近年水害なども多く、豊作とよばれる年は数えるほどで、傾向として米は年をおって減少している。その減少した上に不時の凶作があれば、どれほど困難な事態が生じるであろうか。恐ろしいことである」と述べている。
[19]
서적
近世の三大改革
山川出版社
2002-03-01
[20]
서적
松平定信 政治改革に挑んだ老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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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07-25
[21]
논문
御免関東上酒 埼玉の旧家の記録から
[22]
서적
江戸の小判ゲーム
講談社
2013-02-15
[23]
문서
公儀から札差に2,3万両程融資することは、もとより計画段階から予定されていた
[24]
논문
寛政異学の禁と学制改革 ─老中松平定信から大学頭林述斎へ─
https://doi.org/10.2[...]
日本学士院
2023-05-12
[25]
서적
幕末から維新へ
岩波新書
2015
[26]
서적
朱子学と近世・近代の東アジア
国立台湾大学出版中心
2012
[27]
문서
同時期のヨーロッパでは、1792年4月20日にフランス第一共和政がハプスブルク君主国に宣戦布告してフランス革命戦争が勃発すると、フランスの隣に位置する南ネーデルラントも戦場となった。このことは、極東の千島列島で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が1643年に領土宣言をして以来、長崎との南北二極で日本列島を挟み他の欧米諸国を寄せ付けなかった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の海軍力が手薄になったことを意味した。更にロシア帝国が南下を開始し、1792年9月3日、日本人漂流民である大黒屋光太夫らの返還と交換に日本との通商を求めるアダム・ラクスマンが根室国に来航した。翌1793年、オランダの戦況はフランス軍による制圧の様相がますます強まり、フランス革命戦争はヨーロッパ全域に波及する勢いで広がっていた。
[28]
문서
後に水野忠成が老中になり再び賄賂時代を迎えると今度は「水野出て 元の田沼と なりにけり」と皮肉られることとなった
[29]
문서
尊号一件は、成長した家斉が、厳格で形式を重んじる定信を嫌い、疎んじていた時に、タイミングよく起きた事件を巧みに利用して、定信を遠ざけたのだという指摘もある。
[30]
문서
一方で国外では、オランダ正月を祝った月に、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が滅亡し、代わってフランスの衛星国「バタヴィア共和国」が建国を宣言した。そして1797年、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はアメリカ合衆国船と傭船契約を結び、滅亡したオランダの国旗を掲げさせて長崎での貿易を継続す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1799年に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も解散した。雇い主を失ったオランダ商館は、なおもオランダ国旗を掲げさせたアメリカ船と貿易を続けた。
[31]
문서
『徳川実紀』 - 文恭院殿御実紀
[32]
문서
「皮をかぶる」「皮かぶり」は、現代同様「包茎」の異称。越前福井藩の槍持は槍に熊革をかぶせていたことから、当時、「越前」は「包茎」の隠語であった。
[33]
문서
「越中褌」より。定信を揶揄したもの。
[34]
웹사이트
祭神
https://chinkokushuk[...]
鎭國守國神社
[35]
서적
江戸時代の古文書を読む―寛政の改革
東京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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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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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近世の歴史〈4〉田沼時代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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勘定奉行の江戸時代
ちくま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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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学術会議問題と「寛政異学の禁」から考える学問と政治の関係
https://www.yomiuri.[...]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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楽翁公の戯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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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殿様の定年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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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の参、松平定信と前田利保~花が教える江戸の趣味人たち
https://www.shuminoe[...]
2020-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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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物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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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江戸の組織人
新潮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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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生誕250年・松平定信公伝 15
https://www.minyu-ne[...]
福島民友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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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大名たちが愛でた逸品・絶品 浮世絵再発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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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平定信の絵画印章について
桑名市・白河市合同企画展実行委員会編集・発行
2015-08-07
[53]
웹사이트
集古十種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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