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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탁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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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탁족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다. 역사를 통해 힌두교, 불교, 토착 신앙을 융합한 종교를 믿었으며, 8세기부터 중국과의 교역에 참여했다. 바탁족은 가부장적인 씨족 사회를 이루며, 전통적인 직업으로 농업과 사냥에 종사했다. 식인 풍습이 기록되어 있으나, 근대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다. 바탁족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신앙과 기독교, 이슬람교를 혼합한 종교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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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탁족
지도
기본 정보
민족명바탁족
현지어 명칭할락 바탁
바탁족의 국기
인구8,466,969명 (2010년 인구 조사)
주요 거주 지역인도네시아
거주 지역 (인도네시아)북수마트라주 (5,785,716명)
리아우주 (691,399명)
서자바주 (467,438명)
자카르타 (326,645명)
서수마트라주 (222,549명)
리아우 제도 (208,678명)
아체 (147,295명)
반텐 (139,259명)
잠비 (106,249명)
거주 지역 (말레이시아)30,000명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으로 통합 집계)
거주 지역 (싱가포르)불명 (싱가포르 말레이인으로 통합 집계)
거주 지역 (네덜란드)불명
거주 지역 (오스트레일리아)불명
언어고유어
바탁어군 (카로어, 파크파크어, 시말룽군어, 토바바탁어, 앙콜라어, 만다일링어)
추가
인도네시아어
종교기독교 (개신교, 가톨릭) 55.62%
수니파 이슬람교 44.17%
불교 0.11%
힌두교 0.017%
전통 종교 (파르말림, 페메나 등) 0.08%
관련 민족
관련 민족오스트로네시아인
니아스족
미낭카바우족
말레이인

2. 역사

전통적인 토바 바탁 가옥 (바탁 건축 참조).


수마트라 남부의 고고학적 증거는 신석기 시대 정착민의 존재를 보여주지만, 수마트라 북부는 훨씬 후기에 농경민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바탁족은 내륙에 위치하여 해양 유럽 식민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립된 민족으로 여겨지지만, 인근 왕국과 1000년 이상 무역을 해왔다는 증거가 있다.

2. 1. 타밀족의 영향

타파눌리의 중요한 항구인 바루스에서 10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타밀어 비문이 발견되었으며,[6], 중국과 타밀 상인들과의 접촉은 현재 북부 메단에 위치한 11세기에 설립된 무역 도시인 코타 치나에서 이루어졌으며, 12세기에는 1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바타크 땅으로 이어지는 주요 무역로에서 타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무역 기회는 파크팍과 토바에서 현재의 카로와 시말룽군 '국경' 지역으로 바타크족의 이주를 초래했을 수 있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방문하는 타밀 상인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카로 마르가(marga) 또는 부족인 셈비링(Sembiring, "검은 자")은 타밀 상인과의 관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브라흐마나(Brahmana), 콜리아(Colia), 판디아(Pandia), 데파리(Depari), 멜리아라(Meliala), 무함(Muham), 펠라위(Pelawi), 테칸(Tekan) 등의 셈비링 하위 마르가는 모두 인도 기원이다. 카로의 종교 의식에 대한 타밀의 영향도 주목할 만하며, 페쿠알루(pekualuh) 2차 화장 의식은 카로와 다이리 사람들에게 특징적이다. 게다가 셈비링 켐바렌(Sembiring Kembaren)의 기원 이야기인 푸스타카 켐바렌(Pustaka Kembaren)은 미낭카바우 고원의 파가루융과의 연관성을 시사한다.[7]

3. 언어

바탁족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언어들은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북부 계통으로 팍팍-다이리어, 알라스-클루에트어, 카로어가 포함되며 서로 비슷하다. 다른 하나는 남부 계통으로 상호 이해 가능한 세 가지 방언, 즉 토바어, 안골라어, 만다일링어가 포함된다. 시말룬군어는 남부 계통에서 일찍 갈라져 나온 언어이다. 시말룬군어의 일부 방언은 바탁 카로어 화자들이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일부 방언은 토바어 화자들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종종 바탁 방언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언어적 연속체의 존재 때문이다. 바탁 방언은 오늘날에도 메단 시의 방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토착 바탁 문자로 부적이 적힌 나무껍질 책, 1910년.


바탁족은 ''수랏 바탁''으로 알려진 자체 문자를 가지고 있다.[8] 이 문자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에서 주로 의례적인 중요성을 지니며, 이러한 이유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바탁족은 원래 수마트라 남부에서 문자 체계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4. 사회

2021년 메단 케사완에서 토르토르 춤(Manortor)을 추는 토바, 카로, 팍팍, 만달링 바탁 소부족


바탁족은 전통적으로 직조, 목각, 화려한 돌 무덤으로 유명하다.[14]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배 이전에는 사나운 전사로 알려졌다.

오늘날 바탁족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며, 일부는 무슬림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는 HKBP(Huria Kristen Batak Protestan)이다. 기독교 신학은 19세기에 루드비히 잉거 놈멘센(Ludwig Ingwer Nommensen)을 포함한 독일 루터교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카로족에게는 네덜란드 칼뱅주의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했고, 가장 큰 교회는 GBKP(Gereja Batak Karo Protestan)이다. 만달링과 안골라 바탁족은 19세기 초 파드리 전쟁(Padri War) 동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5] 그러나 상당수는 기독교나 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아가마 시 데카(agama si dekah)" (옛 종교)를 따르는데, "퍼르베구(perbegu)" 또는 "페메나(pemena)"라고도 한다.[16]

현대 인도네시아에서 바탁족은 교육열이 높고, 교사, 엔지니어,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 많이 종사한다.[14]

4. 1. 씨족 제도

바탁 사회는 마르가(Marga)라고 알려진 씨족을 중심으로 가부장제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토바 바탁 족은 자신들이 "시 라자 바탁(Si Raja Batak)"이라는 단일 조상에서 유래했으며, 모든 마르가가 그에게서 나왔다고 믿는다. 바탁 족 사이에서 부자 관계를 정의하는 가계도를 타롬보(tarombo)라고 한다.[14]

''달리한 나 톨루''(세 발 화로)는 바탁족의 삶의 철학이다. 바탁 사회에는 세 가지 일반적인 규칙이 있다.[17]

규칙설명
솜바 마르훌라훌라아내의 가족에 대한 존중. 솜바는 숭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달리한 나 톨루에서는 아내의 가족과 같은 씨족(마르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할아버지의 아내, 아버지의 아내, 자녀의 아내가 포함된다.[18]
엘렉 마르보루모든 여성에 대한 친절. 이기적인 동기나 사적 이익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맥락에서 여성은 딸과 결혼하는 가족, 딸 자신을 포함한다.[18]
마낫 마르동안 투부가까운 친척과의 조심스러운 생활. 관습 전통 행사를 시행할 때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동일한 마르가 사람들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의미한다. 바탁 속담 "하우 나 조녹 도 나 보이 마르시오고손"(정말 가까운 나무만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18]



이 가르침의 본질은 상호 존중(''마시파상아폰'')을 포함하는 도덕 규범으로, 상호 존중과 도움이라는 도덕적 규칙을 바탕으로 한다.[17]

가계도 또는 혈통은 바탁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혈통을 모르는 사람은 길을 잃은(‘’nalilu’’) 바탁 사람으로 간주된다. 바탁 사람들은 자신의 혈통, 또는 적어도 가문 이름(마르가)과 관련 부족(‘’dongan tubu’’)의 기원이 된 조상을 알아야 한다. 이는 부족 내 친족 관계(‘’partuturanna’’) 또는 단순히 성씨(마르가) 자체를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4. 2. 달리한 나 톨루

''달리한 나 톨루''(세 발 화로)는 바탁족의 삶의 철학이다.[17] 바탁 사회에는 다음 세 가지 일반적인 규칙이 있다.[17]

  • '''솜바 마르훌라훌라'''(아내의 가족에 대한 존중): ''솜바''는 숭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달리한 나 톨루에서는 아내의 가족과 같은 씨족(마르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할아버지의 아내, 아버지의 아내, 자녀의 아내가 포함된다.[18]
  • '''엘렉 마르보루'''(모든 여성에 대한 친절): 이 맥락에서 친절은 이기적인 동기나 사적 이익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맥락에서 여성은 딸과 결혼하는 가족, 딸 자신을 포함한다.[18]
  • '''마낫 마르동안 투부'''(가까운 친척과의 조심스러운 생활): 조심스러운 생활은 관습 전통 행사를 시행할 때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동일한 마르가 사람들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바탁 속담 "''하우 나 조녹 도 나 보이 마르시오고손''"(정말 가까운 나무만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에 반영되어 있다. 이 속담은 밀접하고 빈번한 교류에서 이익, 지위 등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18]


이 가르침의 본질은 상호 존중(''마시파상아폰'')을 포함하는 도덕 규범으로, 상호 존중과 도움이라는 도덕적 규칙을 바탕으로 한다.[17]

5. 전통

바탁족의 다양한 문화는 식민지 이전의 종교적 사상과 여러 문화적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남부 바탁족인 만달링과 안골라의 오래된 종교 사상에 대한 정보는 불완전하며, 팍팍과 시말룽군 바탁의 종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반면 토바와 카로에 대해서는 선교사와 식민 행정관들의 글에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료가 남아있다. 바탁 전통 종교에 대한 정보는 주로 19세기 말 바탁의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독일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의 글에서 얻어진다.[35]

사모시르 섬 후타 시알라간의 바탁 마을


타파눌리 근처 동해안과 서해안, 특히 타파눌리에 있는 파당 라와스 사원 단지와 바루스 등지에서 타밀과 자바 상인 및 정착민과의 접촉을 통해 바탁에 다양한 영향이 미쳤다. 이러한 접촉은 수세기 전에 일어났으며, 이들의 종교 사상이 바탁에 의해 얼마나 채택되고 재구성되었는지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탁은 대승불교, 시바교, 탄트라적 관행을 자신의 관습 안에서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19] [36]

현대 인도네시아 국가는 '오직 한 분의 신만을 믿는다'는 신앙과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교, 이슬람교, 불교 또는 힌두교 중 하나를 실천해야 하며, 그중 하나는 개인의 KTP에 기재되어야 하는 판차실라 원칙에 기초하여 설립되었다. 전통 종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소외되고 있지만, 전통 바탁 종교의 일부는 여전히 기독교와 함께 실천되고 있다.

5. 1. 직업

전통적으로 바탁족의 직업은 농업, 사냥, 농사였다. 토바 호의 광대한 호수는 고대부터 담수 양식에 광범위한 기회를 제공했다. 내륙의 바탁족 농촌 공동체는 벼농사, 원예 및 기타 식물과 상품 작물에 크게 의존했으며, 어느 정도 경목, 식물 수지, 야생 동물과 같은 산림 제품을 획득하기도 했다.[11]

북수마트라(North Sumatera) 하랑가올(Haranggaol)에서 새들로부터 벼 논을 지키는 사람. 농업은 토바 호 주변의 주요 생계 수단 중 하나이다.


바탁족 땅 서해안에 있는 바루스(Barus) 항구는 '카푸르 바루스'(장뇌(camphor))의 원산지로 유명해졌다. 고대에는 바탁족 전사들이 종종 이웃 말레이 궁정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식민 시대에 네덜란드는 커피, 사윗(sawit) 팜유(palm oil), 고무(rubber)와 같은 상업용 상품 작물을 도입하여 바탁족 땅의 일부를 농장으로 전환했다.[11]

현대 인도네시아 역사를 통틀어 바탁족은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소규모 타이어 정비 작업장 운영부터 장관으로서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해왔으며, 버스 및 택시 운전사, 정비사, 기술자, 가수 및 음악가, 작가 및 언론인, 교사, 경제학자, 과학자, 군 장교, 변호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탁족은 인도네시아 인구 중 소수 민족(3.58%; 20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2억 3600만 명 중 800만~900만 명)이지만, 많은 바탁족이 특히 법 분야에서 저명한 자리에 올랐다.[11] 예를 들어 자카르타 법률 지원 기관(LBH Jakarta)을 설립한 아드난 부융 나수티온(Adnan Buyung Nasution)[12], 토둥 뮬리아 루비스(Todung Mulya Lubis), 루훗 시톰풀(Ruhut Sitompul), 핫만 파리스 후타페아(Hotman Paris Hutapea) 등이 있다.[13]

5. 2. 식인 풍습

식민지 이전 바탁족 사회에서는 식인 풍습이 널리 행해졌으며, 이는 희생자의 ''텐디''를 강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19] 특히 피, 심장, 손바닥, 발바닥은 ''텐디''가 풍부한 부위로 여겨졌다.

마르코 폴로는 1292년 수마트라 동해안 체류 기록에서 "인육을 먹는 자들"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바타족"의 의례적 식인 풍습을 기록했다.[20] 그는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사형수를 요리해 먹고 뼈까지 빨아먹는 풍습을 묘사했다.[21] 니콜로 데 콘티 역시 1421년 수마트라 체류 중 바탁족을 "이웃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식인종"이라고 간략하게 언급했다.[22][23]

스탬퍼드 래플스는 1820년대에 바탁족의 식인 풍습과 관련 법률을 연구하여, 노부모를 먹는 풍습과 특정 범죄에 대해 산 채로 먹는 형벌을 기록했다.[24] 그는 고기를 날것으로 먹거나 석회, 소금, 쌀과 함께 구워 먹는다고 덧붙였다.[25]

프란츠 빌헬름 융후른은 1840년대 바탁 땅을 방문하여, 바탁족이 전쟁, 격분, 또는 특정 법적 상황에서만 인육을 먹는다고 기록했다.[26] 그는 바탁족이 침입자를 겁주기 위해 식인 풍습을 과장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7] 오스카 폰 케셀은 1844년 간통죄를 저지른 사람이 산 채로 먹히는 것을 목격하며, 식인 풍습이 사법적 행위로 제한되었다고 기록했다.[28] 이다 라우라 파이퍼는 1852년 바탁족을 방문하여 식인 풍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포로의 피를 마시고 신체 부위를 분배하는 관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29]

미국 선교사 새뮤얼 먼슨과 헨리 라이먼은 1834년 바탁족에게 먹혔다.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독일 선교사들은 식인 풍습 사례를 관찰하고 끔찍한 묘사를 본국에 보냈다.[30]

1872년 카로족 반란은 네덜란드와 말레이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카로족의 저항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31] 1890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통제 지역에서 식인 풍습을 금지했다.[32] 20세기 초까지 식인 풍습에 대한 소문이 남아 있었지만, 이슬람의 영향 등으로 1816년 이후로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33]

5. 3. 장례 전통

바탁족의 매장 풍습은 매우 풍부하고 복잡하다. 사망 직후, 고인의 영혼(''begu'')이 이제부터 자신의 세계가 친척들의 세계와 분리되었음을 이해하도록 다양한 의례 행위가 수행된다. 상징적으로 시신이 놓인 자리의 요를 뒤집어 시신의 머리가 요의 발쪽을 향하도록 한다.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각각 묶고, 온몸에 장뇌를 문지르고 구멍에는 장뇌를 막은 후 흰 면포로 감싼다. 이 ''perumah begu'' 의식 중에 ''guru sibaso''는 고인의 ''begu''에게 확실히 죽었으니 친척들과 작별해야 한다고 선언한다.[47]

부유한 가족들은 케미리 나무(''Aleurites moluccanus'')로 만든 관(카로어: ''pelangkah'')을 사용하는데, 배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활 모양의 앞부분에는 뿔새, 말, 또는 싱가로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의 조각된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뚜껑은 수지로 봉하고, 재매장 의식이 있을 때까지 가족 집 근처 특별한 장소에 놓을 수 있다. 부유하지 않은 가족들은 간단한 나무 관을 사용하거나 시신을 짚으로 만든 요에 감싼다.

시신은 보통 여성들이 집 주변을 몇 번 돌린 후, ''곤당''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계속되는 총소리와 함께 묘지로 운구한다. 교차로에서는 시신을 내려놓고 열한 명이 네 번 빙빙 돌아 ''begu''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면 ''begu''가 마을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장례 행렬이 묘지에 도착하면 무덤을 파고 시신을 똑바로 눕혀 놓는다. 머리가 마을을 향하도록 주의하는데, 만약 시신이 일어날 경우 마을을 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datuk''과 벼락으로 죽은 사람들은 손을 묶고 앉은 채로 매장된다. 손바닥을 함께 묶고 그 사이에 빈랑을 놓는다.[47]

1984년 12월, 토바 호수 사모시르 섬의 바탁족 ''투구''


매장 전통에는 사후 수년 후 조상의 유골을 다시 매장하는 재매장 의식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차 매장은 토바 바탁족 사이에서는 ''망콩칼 홀리''(mangongkal holi), 카로족 사이에서는 ''누룬-누룬''(nurun-nurun)으로 알려져 있다. 수일간 지속되는 의식에서 특히 존경받는 조상과 그 후손들의 유골을 발굴하여 깨끗하게 하고, 애도하며, 마지막으로 ''투구''(tugu) 또는 ''탐박''(tambak)으로 알려진 뼈 집에 다시 안치한다.[48]

축제 첫날 아침, 묘지의 무덤이 열리고 아직 남아 있는 조상들의 유골이 제거된다. 두개골 발굴은 특히 감동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유골은 흰 천으로 깔린 바구니에 모은 다음, 여러 가지 감귤류 과일의 주스를 사용하여 여성들이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한다. 유골의 발굴과 세척에는 애가가 함께 불린다. 유골은 다음날 아침까지 ''투구''에 있는 바구니에 보관되며, 그때 유골은 전통적인 천(''울로스''(ulos))으로 싸서 바구니에서 작은 나무 관으로 옮긴다. 긴 연설과 공동 기도 후 관에 못을 박고 ''투구''의 방에 놓는다. 고기와 밥으로 구성된 잔치가 이어지고 전통 무용이 공연된다.[48]

고대에는 이러한 석관들이 돌로 조각되거나 나무로, 후에는 벽돌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는 시멘트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다. 크고 매우 화려한 ''투구''는 토바 호수 주변과 사모시르 섬에서 볼 수 있다.

재매장 의식의 한 가지 목적은 사망자의 ''베구''(begu)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다. 전통적인 바탁족의 믿음은 죽은 자들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와 유사한 계층적 지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즉, 부유하고 권력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며, 가족이 재매장 의식을 거행하면 이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 부유한 후손은 웅장한 의식과 최대 7일간 지속될 수 있는 ''호르자''(horja) 잔치를 통해 ''베구''를 ''수망곳''(sumangot)의 지위로 승격시킬 수 있다. 고대에는 이러한 축제에서 수많은 돼지, 소 또는 심지어 물소가 도살되었고, ''곤당''(gondang)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제공했다.

''수망곳''보다 한 단계 위는 10~12대 전에 살았던 중요한 조상의 영혼인 ''솜바온''(sombaon)이다. ''수망곳''을 ''솜바온''으로 승격시키려면, 종종 몇 달 동안 지속되는 또 다른 큰 축제인 ''산티 레아''(santi rea)가 필요하며, 이 기간 동안 전체 지역의 주민들이 모인다. 이러한 강력한 조상의 영혼은 후손들에게 보호와 행운을 제공하지만, 이 의식은 또한 이렇게 존경받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새로운 혈족 집단을 확립하는 역할도 한다.[49]

6. 종교

바탁족은 수천 년 동안 힌두교 샤이바교, 불교 및 지역 문화가 융합된 종교를 믿었다. 1905년까지 네덜란드 제국주의자들과 용감하게 싸운 마지막 바탁 왕은 인도네시아의 샤이바교 왕이었다.[19] 19세기 말 독일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바탁의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글을 통해 바탁 전통 종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35]

대승불교, 시바교, 탄트라적 관행이 바탁에 영향을 미쳤다.[36] 현대 인도네시아는 판차실라 원칙에 따라 '오직 한 분의 신'을 믿는 종교(개신교, 가톨릭,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를 믿어야 하며, 전통 종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 바탁 종교는 기독교와 함께 실천되고 있다.

2010년 인도네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바탁족의 종교는 다음과 같다.[55]

종교총계
기독교 (개신교 & 가톨릭교회)4,707,658
수니파 이슬람3,738,660
불교9,190
힌두교1,476
기타6,620
합계8,463,604



기독교는 HKBP(Huria Kristen Batak Protestan)와 GBKP(Gereja Batak Karo Protestan)등이 있으며, 19세기 루드비히 잉거 놈멘센(Ludwig Ingwer Nommensen)을 포함한 독일 루터교 선교사들과 네덜란드 칼뱅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다.[15]

만달링과 안골라 바탁은 19세기 초 민랑카바우의 파드리 전쟁(Padri War)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5] 그러나 상당수의 바탁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아가마 시 데카(agama si dekah)" (옛 종교) 또는 "퍼르베구(perbegu)", "페메나(pemena)"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관습을 따른다.[16]

6. 1. 전통 신앙

바타크족은 수천 년 동안 힌두교 샤이바교, 불교 및 지역 문화가 융합된 종교를 믿었다.[19] 13세기 문헌에 '바타(Ba-ta)'로 언급되며, 스리비자야의 속국으로 나타난다. 15세기 문헌에도 파사이아루 왕국에 둘러싸인 바타(Bata) 왕국이 언급된다.[6]

바타크족은 8세기 또는 9세기부터 중국과의 무역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타크 남성들이 상품을 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파눌리의 항구 바루스는 바타크족이 형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바루스에서는 1088년 타밀어 비문이 발견되었고, 코타 치나에서는 중국과 타밀 상인들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무역 기회는 바타크족의 이주를 초래했을 수 있으며, 카로 마르가(marga) 또는 부족인 셈비링(Sembiring)은 타밀 상인과의 관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카로의 종교 의식에 대한 타밀의 영향도 주목할 만하며, 페쿠알루(pekualuh) 2차 화장 의식은 카로와 다이리 사람들에게 특징적이다.[7]

16세기부터 아체는 후추 생산량을 늘렸고, 바타크 습지에서 잘 자라는 쌀과 교환했다. 쌀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농업의 성공을 책임지는 바타크 대사제의 권력이 커졌다.

남부 바탁 땅의 종교 사상에 대한 정보는 불완전하며, 팍팍과 시말룽군 바탁의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반면 토바와 카로에 대해서는 선교사와 식민 행정관들의 글에 상대적으로 풍부한 증거가 있다. 바탁 전통 종교 형태에 대한 정보는 주로 19세기 말 독일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의 글에서 얻어진다.[35]

대승불교, 시바교, 탄트라적 관행이 바탁에 영향을 미쳤다.[36] 현대 인도네시아 국가는 '오직 한 분의 신만을 믿는다'는 판차실라 원칙에 기초하여 설립되었고, 전통 종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소외되고 있지만, 전통 바탁 종교의 측면은 여전히 기독교와 함께 실천되고 있다.

1952년경, 푸스타하(Pustaha) 또는 바탁 마법사 책을 들고 있는 바탁 사제 또는 다툭(Datuk)


태초에는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었다. 하늘에는 신들이 살았고 바다는 나가 파도하(Naga Padoha)의 집이었다. 남아있는 모든 신화는 창조의 시작에는 뮬라 자디 나 볼론(Mula Jadi Na Bolon)이라는 신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세 아들은 뮬라 자디가 수정한 암탉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 뮬라 자디는 세 딸을 낳아 세 아들에게 아내로 준다. 인류는 세 쌍의 결합의 결과이다. 저승의 지배자는 뱀 용인 나가 파도하(Naga Padoha)이다. 그 또한 시작 전에 존재했으며 뮬라 자디의 적대자로 여겨진다.

북수마트라주 사모시르 섬에 위치한 시라자 바탁(Siraja Batak, 바탁 왕)의 역사를 묘사한 소포 구루 타에아 불란(Sopo Guru Taea Bulan) 기념비


지구와 인류의 기원은 바타라 구루(Batara Guru)의 딸인 시데악 파루자르(Sideak Parujar)와 관련이 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하늘에서 중간 세계로 내려온다. 뮬라 자디(Mula Jadi)는 손녀에게 살 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한 줌의 흙을 보낸다. 시데악 파루자르(Sideak Parudjar)는 이 흙을 넓게 펼쳐 지구가 되었다. 지구는 물속에 사는 나가 파도하(Naga Padoha)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고, 그는 몸부림치며 지구를 없애려고 했다. 시데악 파루자르(Sideak Parudjar)는 용을 극복하고, 그의 몸에 칼을 꽂았다. 나가 파도하(Naga Padoha)가 몸부림칠 때마다 지진이 발생한다. 시데악 파루자르(Sideak Parujar)는 만갈라불란(Mangalabulan)과 결혼하여 쌍둥이를 낳는다. 인류는 그들의 근친상간적인 결합의 결과이다. 부부는 토바 호 서쪽 해안에 있는 푸숙 부힛(Pusuk Buhit) 화산에 정착하여 시 안주르 뮬라뮬라(Si Anjur Mulamula) 마을을 세운다. 바탁족의 신화적 조상인 시 라자 바탁(Si Raja Batak)은 그들의 손자 중 한 명이다.[39]

20세기 조각된 뼈로 만든 포르할란 바탁 달력.


토바족과 카로족 바탁족의 종교 세계에서 신과 인류의 창조는 ''텐디''(카로) 또는 ''톤디''(토바)와 ''베구''와 관련된 개념만큼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물라 자디 나 볼론''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의 영혼"(''텐디'')를 받는다. 개인 ''텐디''의 운명은 태어나기 전에 ''텐디''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40] 카로족과 토바족 사이에는 ''텐디''가 어디에 거주하며 몇 개의 ''텐디''가 있는지에 대한 다른 버전이 있다. 토바족에 따르면 사람은 일곱 개의 ''텐디''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 ''텐디''는 신생아의 태반양수에서 발견되며,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태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41]

모든 바탁족은 ''텐디''의 상실을 큰 위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긴다. ''텐디''는 부주의로 인해 또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다투''의 흑마법의 결과로 소유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텐디''의 최종 상실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초래한다. 질병은 ''텐디''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며, ''텐디''를 되찾는 것이 치료의 주요 방법이다. ''텐디''는 ''수르담''(대나무 피리) 소리를 좋아한다. ''텐디''가 환자의 몸을 버렸다면, ''랄렝 텐디'' 의식에서 ''수르담''을 연주하는 것이 ''텐디''가 병든 사람의 몸으로 돌아오는 데 기여할 수 있다.[43]

바탁 토템


죽음에 이르면 '텐디'(tendi)는 인체를 떠나고 "죽음의 영혼"('베구'(begu))이 자유로워진다. '텐디'는 사라지고, 어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베구'만이 계속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바탁족은 '베구'가 이전 거주지 근처에서 계속 살고 후손들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악몽, 특별한 불행 등은 조상의 '베구'가 후손들의 행동에 만족하지 않는 징후일 수 있다. 음식과 음료 제물과 기도를 통해 화난 '베구'를 달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베구'는 불멸하지 않다. 죽음은 죽은 자들의 땅에도 지배하기 때문이다. '베구'는 짚으로 변하기 전에 일곱 번 죽고, 마침내 흙이 된다.[45]

바탁족은 세 가지 종류의 '베구'가 있다고 믿는다.[46] '비차라 구루'(bicara guru)는 사산아 또는 이가 나기 전에 죽은 아기의 '베구'이다. '구루 시바소'(guru sibaso)의 도움으로 '비차라 구루'를 가족의 수호령으로 만들 수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마테 사다-우아리'(mate sada-uari))을 당한 가족 구성원의 '베구'도 가족의 수호령 역할을 할 수 있다. 세 번째 종류는 죽은 처녀('퉁춥'(tungkup))의 '베구'로 구성된다.

1984년, 라구보티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토바 ''구루 시바소''(guru sibaso) 시토루스 여사. 그녀는 ''푸스타하'' 대신 소책자 형태의 신약 성경을 참고하고 있다.


전통 바탁 사회에서 ''다투''(animist priests, 무당)와 ''구루''(gurus)는 민간 의료를 행했지만, 전자는 남성 전용이었다. 두 직업 모두 초자연적인 능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졌다. 19세기 후반 토바와 카로 바탁의 기독교화 이후, 선교사들은 전통적인 치유와 점술을 억제했고, 이는 대부분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활동이 되었다.[50]

''다투''와 ''구루'' 치유자들은 모두 ''푸스타하''(pustaha)를 참고하여 점술을 행했다. 푸스타하는 나무껍질과 나무로 만든 손으로 쓴 책으로, 치유법, 주문과 노래, 예측 달력, 그리고 ''포다''(poda)로 쓰여진 마법, 치유, 점술에 대한 다른 메모들이 적혀 있는 고대 바탁 속기이다. 윙클러[51]에 따르면, 사용 목적에 따라 세 가지 종류의 ''푸스타하''가 있다.

:1. '''보호 마법''': 진단, 치료, 부적과 같은 마법적 속성을 가진 약재 혼합물, ''파르마니산''(love charms, 사랑의 부적) 등을 포함한다.

:2. '''파괴 마법''': 독을 만드는 기술, 특정 영혼의 힘을 통제하거나 활용하는 기술, ''팡굴루발랑''(pangulubalang)을 부르는 기술, ''도르마''(dorma,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 공식)를 만드는 기술을 포함한다.

:3. '''점술''': 신탁(신들의 말씀), 영혼의 소망, 신들과 조상의 영혼으로부터의 명령, 그리고 역서 또는 달력 시스템(''포르할란''(porhalaan)), 그리고 특정 행동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좋은 날짜와 달을 결정하는 점성술을 포함한다.[52]

토바와 카로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치유 의식 중 하나는 ''지누중''(jinujung, 개인 수호령)을 불러들이는 의식이다. 토바와 카로 우주론에 따르면, 각 사람은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에 ''지누중''을 받고, 불행하게도 잃어버리지 않는 한 평생 동안 간직한다. 잃어버릴 경우 병에 걸린다. ''지누중''을 불러들이기 위해 여성 ''구루''(''구루 시바소''(guru sibaso) in Karo)는 무아지경에 빠지고, ''지누중''이 그녀에게 들어와 그녀의 입을 통해 말한다.[53]

6. 2. 기독교

바탁족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며 소수의 무슬림이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는 HKBP(Huria Kristen Batak Protestan)이다. 19세기 루드비히 잉거 놈멘센(Ludwig Ingwer Nommensen)을 포함한 독일 루터교 선교사들이 기독교 신학을 전파했다.[15] 네덜란드 칼뱅주의 선교사들은 카로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카로족의 가장 큰 교회는 GBKP(Gereja Batak Karo Protestan)이다. 만달링과 안골라 바탁은 19세기 초 민랑카바우의 파드리 전쟁(Padri War) 기간 동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5] 그러나 상당수의 바탁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을 따르지 않고 "아가마 시 데카(agama si dekah)" (옛 종교) 또는 "퍼르베구(perbegu)", "페메나(pemena)"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관습을 따른다.[16]

노멘센 동상 (인도네시아 타루퉁, 다메 사이니후타). 그는 19세기 바탁 땅에 루터교를 전파한 독일 출신의 개신교 전도사이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은 바탁 땅을 이슬람 아체와 미낭 왕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인식하고 기독교 선교 활동을 장려했다.[57] 네덜란드인들은 이 정책을 계속 이어갔고, 비이슬람 지역을 '바탁랜던(Bataklanden)'이라고 불렀다.

1824년, 영국 침례교 선교사 리처드 버튼과 내덜니얼 워드는 시볼가에서 출발하여 바탁 땅을 걸어서 여행했다.[58] 1834년 미국 해외선교위원회의 헨리 라임과 새뮤얼 먼슨은 바탁인들에게 더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59] 이다 파이퍼에 따르면, 바탁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침략자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죽이고 먹었다고 한다.[60]

허먼 노이브로너 반 더 투크는 1850년대 네덜란드 성서 협회(Nederlands Bijbel Genootschap)에 고용되어 바탁어-네덜란드어 문법 책과 사전을 만들었다. 이는 미래의 네덜란드와 독일 선교사들이 토바와 시말룽간 바탁을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61]

최초의 독일 선교사들은 1861년 토바 호 지역에 도착했고, 1881년 독일 라인 선교회의 루드비히 잉거 노멘센에 의해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1869년 노멘센 박사가 신약 성경을 토바 바탁어로 처음 번역했고, 1891년 P. H. 요한센이 구약 성경 번역을 완료했다. 1893년 메단에서 라틴 문자로 완전한 성경 본문이 인쇄되었지만, 한 논문은 이 번역본이 "읽기 어렵고, 딱딱하며, 유창하지 않고, 바탁인들에게 이상하게 들린다"고 평가했다.[62]

토바와 카로 바탁은 기독교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20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63]

인도네시아 북타파나울리 시파후타르의 개신교 선교회 교회를 나서는 사람들


이 시기 네덜란드 식민지 주민들이 도착했고, 대부분의 바탁 사람들은 네덜란드인들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바 바탁은 20세기 초까지 게릴라전을 벌였다. 마법과 무기를 사용하여 제1차 토바 전쟁에서 네덜란드인들과 싸웠던 카리스마 넘치는 사제이자 전사이자 왕인 시싱아망가라자 12세가 1907년 사망하면서 게릴라전은 종식되었다.[64]

후리아 크리스텐 바탁 프로테스탄(HKBP)(HKBP) 교회는 1917년 9월 발리게에서 설립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간호사 조산사를 양성하는 간호 학교가 설립되었다. 1941년에는 게레자 바탁 카로 프로테스탄(GBKP)이 설립되었다.[65]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선교사들은 바탁 개종자들에게 많은 권한을 양도했다. 그러나 바탁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떠나도록 압력을 가한 적이 없었고, 1942년 일본군의 수마트라 침공 이후 수천 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수용되거나 강제로 추방되면서[66] 바탁인들이 교회 활동을 장악하게 되었다.[67]

게레자 크리스텐 프로테스탄 시말룬군(GKPS)은 원래 HKBP의 일부로 바탁 토바어로 설교했지만, 결국 시말룬군 교회로 독립하여 시말룬군의 관습과 언어를 채택한 후 1963년 GKPS로 최종 설립되었다.

6. 3. 이슬람교

만다일링족과 안골라족은 남부 바탁 땅에 거주하며, 파드리 전쟁(1821~1837)의 결과로 인접한 이슬람교도인 미낭카바우족의 영향을 받았다.[57] 일부 만다일링족은 이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파드리 전쟁은 분수령이 되었고, 파드리들은 전통 관습을 억압하고 '순수한' 이슬람 신앙을 장려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다일링 이슬람은 다른 이슬람 실천자들과의 담론과 하즈의 실천으로 인해 남동부 샤피이 이슬람 학파에 더 가까워졌지만, 모든 자녀에게 상속을 분배하는 등의 전통적인 요소는 남아 있으며, 이는 이슬람 관습이 아닌 만다일링 관습이다. 이슬람은 마르가의 중요성을 감소시켰고, 많은 만다일링족이 마르가를 버리고 무슬림 이름을 사용했지만, 북쪽의 안골라족 사이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적었다.

메카에서 하즈를 하러 가는 만다일링족 그룹


이슬람의 출현은 또한 다툭을 의술사로 강등시켰고, 전통적인 벼농사 의식과 기타 전통 문화의 잔재는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조상에게 공동체를 돕도록 간청하는 의식인 '파수수르 베구'도 억압되었다. 그러나 다른 관습의 측면은 허용되었고, 만다일링 이슬람 이데올로기는 이슬람 법과 같은 수준으로 관습을 두었는데, 이는 미낭 관습에서 이슬람 법을 관습보다 우위에 두는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에는 해외에서 유학한 이슬람 학자(울라마)들이 세습 지도자와 같은 많은 전통적인 만다일링 관습이 이슬람과 상충한다고 제안했다. 이슬람주의 울라마는 관습만큼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마을 법률 실무자 남노라-나토라와 권위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1834년부터 북부 만다일링족 사이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했지만, 새로 개종한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갈등을 우려한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그들의 진전은 제한되었다. 또한 정부의 공용어는 무슬림과 관련된 말레이어였고, 정부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슬람이 현대성과 진보의 종교라는 인식이 생겼다. 선교사들은 이슬람교도 만다일링족의 기독교에 대한 저항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그들을 '닿을 수 없는 사람들'로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토바를 개종시켰다.

20세기 초, 거의 모든 만다일링족과 안골라족은 무슬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행정부는 그들을 바탁 땅의 일부로, 따라서 이교도 또는 기독교인으로 표시했다. 이러한 인식은 부정확했고, 많은 만다일링족은 '바탁'이라는 표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68] 1920년대에 글을 쓴 압둘라 루비스는 만다일링족이 바탁 마르가 관습을 따랐지만 바탁 종교를 따른 적이 없으며, 만다일링족이 토바보다 앞서 '힌두교' 방문객으로부터 직접 마르가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인구 조사에서 만다일링족은 인구 조사에서 '바탁 만다일링'으로 분류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6. 4. 파르말림/페메나

''우가모 말림''(Ugamo Malim) 또는 말림(Malim)은 토바 바탁족(Toba Batak people)의 현대적인 종교 형태이다. 말림을 따르는 사람들을 파르말림(Parmalim)이라고 부른다.[69]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토바 지역에서 시작된 파르말림 운동은 바탁 지역의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20세기 전환기에 하부 카로 지역에서는 말림 종교가 식민지 반대 정서의 표현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파르말림은 토바 바탁족이다. 여러 파르말림 그룹 중 가장 큰 그룹은 토바 호수 남쪽 해안의 라구보티(Laguboti) 근처 후타 팅기(Huta Tinggi)에 중심지를 두고 있다.[70][71]

말림이 아닌 바탁 사람들(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종 전통적인 바탁 정신적 신앙의 특정 측면을 계속 믿는다.

바탁의 또 다른 전통 종교는 인도네시아 카로족의 부족 종교인 ''페메나''(Pemena)이다.[72] 페메나는 '첫 번째' 또는 '시작'을 의미한다.[72] 페메나는 카로족의 최초 종교로 여겨진다.[72] 페메나의 교리 중 하나는 ''디바타''(Dibata)의 개념이다.[72]

1960년대 카로족 사이에서 일어난 '페로닥-오닥'(Perodak-odak) 운동은 전통적인 카로 종교를 재확인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사라졌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카로족이 이름만이라도 인도네시아의 공인된 종교 중 하나인 힌두교로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실제로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르고 있다.[73]

7. 지리

바탁족의 땅은 니아스섬을 제외한 북수마트라 주, 동해안과 미낭카바우족의 서해안의 역사적으로 말레이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다.[34] 카로족의 땅 일부는 현재 아체 주의 동아체 현으로 확장되는 반면, 만달링족의 땅 일부는 리아우 주의 로칸훌루 현에 위치해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수의 바탁족이 번영하는 이웃 리아우 주로 이주했다.

북수마트라의 남쪽에는 서수마트라의 무슬림 미낭카바우족이 있는 반면, 북쪽에는 다양한 무슬림 아체네스족이 있다.

8. 저명한 인물


  • 압둘 하리스 나스티온 - 군인이자 전 인도네시아 국방·치안부 장관이었다.
  • 라자 나잉골란 - 축구 선수로 아버지는 바탁족이며 어머니는 벨기에인이다.
  • 시싱아망가라자 12세 - 바탁족의 마지막 왕으로, 인도네시아의 국민 영웅이다.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제1차 토바 전쟁에서 네덜란드인들과 싸웠다.[64]
  • 알메인 파네 -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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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웹사이트 Articles - Selnajaya Recruitment http://www.selnaj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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