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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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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수관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으로, 12대 심수관(심수관 1세)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도예가 가문의 이름이다. 심수관 가문은 조선의 도예 기술을 계승하여 일본 사쓰마 도자기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2대 심수관은 '심수관요'를 설립하고 사쓰마 도자기를 국제적으로 알렸다. 14대 심수관은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를 역임하고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했으며, 15대 심수관 또한 한일 문화 교류에 힘쓰고 있다. 심수관 가문은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아픔을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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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관
기본 정보
조선 왕실 문장
조선 왕실 문장
국호대조선국 (大朝鮮國)
위치한반도
수도한성부
공용어한국어
역사
건국1392년 7월 17일
멸망1897년 10월 12일
정치
정치 체제절대군주제
국왕조선 국왕
경제
화폐조선통보
인구
1890년 추정치10,528,937명

2. 가계

심수관 가문은 정유재란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도공 심당길(청송 심씨)을 시조로 하며, 사쓰마번에서 대대로 사쓰마야키 제작에 종사해왔다.[2] 가문은 사쓰마야키의 묘대카와계(묘대카와야키)에 속하며, 특히 12대손부터는 '심수관(沈壽官)'이라는 이름을 습명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2. 1. 조선

심수관 가문의 시조인 '''초대 심당길'''의 조선에서의 본명은 심찬이다. 그는 경상북도 청송군본관으로 하는 청송 심씨 가문 출신이다. 정유재란 중이던 1598년(게이초 3년),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온 '강제 연행자' 중 한 명이었다.[2]

심찬 이전의 조선 시대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세대이름관직/칭호
1세심홍부위위시승
2세심연합문지후
3세심용전리정랑 증 문하시중
4세심덕부문하시중, 좌정승
5세심온영의정
6세심회영의정
7세심원내자시 판관 증 좌찬성
8세심순문사헌부 장령 증 영의정
9세심달원승문원 판교 증 이조판서
10세심수곡산군수 증 호조판서
11세심우인-
12세심찬초대 심당길


2. 2. 일본

사쓰마야키의 묘대카와계(묘대카와야키)에 속하며, 초대 심당길의 후예인 심(沈) 가문에서 메이지 시대 이후(12대 이후) 당주가 습명하는 이름이다.

심수관 가계 (일본)
대수이름/호칭비고
초대심당길 (沈當吉)조선 본명: 심찬, 사무라이
2대심당수 (沈當壽)사무라이
3대심도길 (沈陶吉)사무라이
4대심도원 (沈陶園)사무라이
5대심당길 (沈當吉) 2세사무라이
6대심당관 (沈當官)사무라이
7대심당수 (沈當壽) 2세사무라이
8대심당원 (沈當園)사무라이
9대심당영 (沈當榮)사무라이
10대심당진 (沈當珍)사무라이
11대심수장 (沈壽蔵)사무라이
12대심수관 (沈壽官)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신분 폐지, 심수관 이름 사용 시작
13대심수관 (沈壽官) 2세본명: 심 마사히코 (沈正彦), 심수관 이름 습명 시작
14대심수관 (沈壽官) 3세본명: 오오사코 게이키치 (大迫恵吉), 한국명: 심혜길
15대심수관 (沈壽官) 4세본명: 오오사코 가즈테루 (大迫一輝), 한국명: 심일휘



'''제12대 심수관'''(1835년(덴포 6년) ~ 1906년(메이지 39년))은 막말 메이지 유신기의 격동기를 살았다. 폐번치현 이후 번의 보호를 잃은 사쓰마 도자기 가마들이 잇따라 폐업하는 위기 속에서 민간 경영으로 전환하여 가문의 도자기 생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사쓰마 도자기 생산의 근대화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873년(메이지 6년) 빈 만국 박람회를 시작으로 여러 만국 박람회와 내국 권업 박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해외 판로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13대 심수관'''(1889년(메이지 22년) ~ 1964년(쇼와 39년))은 12대 심수관의 장남으로, 본명은 마사히코(正彦)이다. 1906년 부친의 사망 후 가문의 당주가 되면서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습명했다. 이후 심수관 가문의 당주는 대대로 이 이름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가고시마현의 도자기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전쟁 전후 시기 지역 경제 부흥에도 관여했다. 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문화 통치 시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예계와도 교류를 가졌다.

'''제14대 심수관'''(1926년(다이쇼 15년) ~ 2019년(레이와 원년))은 13대의 장남으로, 본명은 오사코 케이키치(大迫恵吉)이고 한국명은 심혜길이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64년 부친의 사망 후 심수관 이름을 이었다. 작가 시바 료타로와 친분이 깊었으며, 시바의 소설 《고향을 잊기 어려우니》(1969년 간행)의 주인공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일본 내 최초의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어 한일 문화 교류 증진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교로부터 예술 공로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 소수장을 받았다.

'''제15대 심수관'''은 14대의 장남으로, 본명은 오사코 가즈테루(大迫一輝)이고 한국명은 심일휘이다. 1983년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이탈리아 국립 미술 도예 학교를 수료했다. 1999년, 부친인 14대가 생존해 있을 때 15대 심수관 이름을 습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역사

심수관 가문은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일본 사쓰마번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 '''심당길'''(沈當吉, 조선 본명: 심찬)을 시조로 한다.[2] 심당길과 그의 후손들은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미야마) 지역에 정착하여 사쓰마 도자기(薩摩焼)를 제작하며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3]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사무라이 신분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3] 가업을 이어왔다.

12대부터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2대 심수관은 심수관요(沈壽官窯)를 설립하고 1873년 빈 만국박람회 출품을 통해 사쓰마 도자기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10][11] 이후 14대 심수관은 한일 문화 교류에 힘썼으며,[15][16]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가업을 잇고 있다.[18][19]

3. 1. 조선 도공의 일본 정착 (1대 ~ 11대)

1598년 정유재란사쓰마국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성에서 '''심당길'''(沈當吉, 조선 본명: 심찬)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사쓰마국으로 끌고 갔다.[2] 심당길은 경상북도 청송군본관을 둔 청송 심씨 가문 출신으로,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대표적인 강제 연행자 중 한 명이었다.[2]

1599년 심당길 등은 조선식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현지 주민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주 마찰을 겪었다. 1603년 이들은 히오키 군(日置郡) 苗代川|나에시로가와일본어(현재의 히오키시 東市来町美山|히가시이치키초 미야마일본어)로 이주하였다. 사쓰마 번은 이들에게 나에시로가와에 거주할 것을 명령했다.[3]

1604년부터 심당길 등은 이곳에 조선식 가마를 만들고 黑物|구로몬일본어이라 불리는 조선의 분청사기와 유사한 도자기를 생산했다. 같은 해, 나에시로가와에 옥산궁(玉山宮)을 지어 단군(檀君)을 모시고, 매년 음력 8월 15일이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국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이지 시대까지 한복을 입고 한국어를 사용했으며, 혼인도 같은 조선인 후손끼리만 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지키려 노력했다. 도자기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쓰마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심당길을 비롯한 나에시로가와의 도공들에게 사무라이(武士, 조선의 양반 관료에 해당) 신분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1614년 심당길 등은 白薩摩|시로사쓰마일본어 또는 白物|시로몬일본어이라 불리는 백색 사쓰마야키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1615년에는 박평의(朴平意)와 함께 사쓰마 번의 어용(御用) 도자기처 총책임자(장관급)로 임명되어 1628년까지 활동하며 苗代川火計り刀茶碗|나에시로가와 히바카리차완일본어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심당길의 후손들은 대대로 조선식 성명을 이어받으며[3] 나에시로가와에서 사쓰마야키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초대 심당길 이후 11대 심수장(沈壽蔵)까지 심수관 가문의 당주들은 모두 사무라이 신분을 유지했다. 2대 심당수(沈當壽)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628년부터 1648년까지 어용 도자기처 총책임자를 지냈으며, 3대 심도길(沈陶吉) 역시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사쓰마 번의 도자기 제작 총책임을 맡았다.[8][3] 이후 6대 심당관(沈當官), 7대 심당수 2세(沈當壽 II), 8대 심당원(沈當園) 등도 대대로 사쓰마 번 도공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며,[9] 특히 6대 당관 이후의 당주들은 종종 향역(鄕役)의 역인(役人)을 겸임하기도 했다.[3] 이들은 현재 15대에 이르기까지 사쓰마 도자기 제작을 주도하고 있다.

3. 2. 사쓰마 도자기의 발전과 국제적 명성 (12대 ~ 14대)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12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2대 심수관(沈壽官|심수관일본어, 1835년 ~ 1906년)은 개인 가마인 심수관요(沈壽官窯|심수관요일본어)를 만들어 사쓰마 도자기(薩摩焼|사쓰마야키일본어)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10] 그는 1857년부터 번에서 설립한 백자공장(藩立 白瓷工場)의 총책임자를 맡아 사쓰마 도자기 발전에 힘썼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번의 보호를 잃게 되자, 많은 사쓰마 도자기 가마들이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도 민간 경영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며 사쓰마 도자기 생산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높이 180cm에 달하는 대형 화병 한 쌍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의 정교한 기술과 아름다운 색감이 예술성을 인정받으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출품을 계기로 서구 세계에 사쓰마 도자기 수출이 활발해졌고, '사쓰마웨어(Satsuma ware)'라는 이름은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되었다.[11]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대형 화병 한 쌍은 이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12] 12대 심수관은 이후 여러 국제 박람회와 일본 국내 박람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01년에는 시조 심당길이 창시한 白薩摩|시로사쓰마일본어 스타일에 透彫|스카시보리일본어(투조 기법)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綠綬褒章|료쿠주호쇼일본어 작위를 받았다. 12대 심수관이 이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쌓으면서, 그의 후대 당주들은 선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본명 대신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대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13대 심수관(沈壽官|심수관일본어, 1889년 ~ 1964년)의 본명은 沈正彦|심 마사히코일본어이다. 1906년 12대 심수관이 세상을 떠나자 가문의 당주 자리를 물려받으며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습명(襲名, 선대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했다. 그는 교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나 가업을 이어 도공의 길을 걸었다. 가고시마현의 도자기 산업 진흥과 지역 경제 부흥에 기여했으며, 1920년대 이후 문화통치 시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예계와 교류하기도 했다. 그는 가고시마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3] 1964년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인 14대에게 정유재란으로 조상이 일본에 온 지 400주년이 되는 1998년을 기리는 일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15]
14대 심수관(沈壽官|심수관일본어, 1926년 ~ 2019년)의 본명은 大迫恵吉|오오사코 게이키치일본어이며, 한국 이름은 심혜길이다.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64년 부친의 뒤를 이어 14대 심수관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와 친분이 있었으며, 시바 료타로가 1969년 발표한 소설 『고향을 잊기 어려우니』(故郷忘じがたく候|고향을 잊기 어려우니일본어)의 주인공 모델이 되면서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15][16]

14대 심수관은 대한민국일본 간의 문화 교류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었다.[15][16]
  • 1998년: 정유재란 400주년을 맞아 선친의 유언대로 조상의 고향인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조선의 불씨'를 가져와 심수관요에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불씨로 구운 첫 도자기를 남원시에 기증했다.[14][15] 같은 해 7월,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家) 도예전'을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15]
  •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한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15][16]
  • 2004년: 한일 정상회담차 가고시마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심수관요를 찾았을 때 직접 안내하며 사쓰마 도자기의 역사와 특징을 설명했다.[16]
  • 2008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의 명예 시민으로 위촉되었다.[15][16]


이 외에도 2001년 대한민국 원광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0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 소수장을 수훈했다. 그는 1999년 장남인 오사코 가즈테루(大迫一輝|오오사코 가즈테루일본어, 한국명 심일휘)에게 15대 심수관 이름을 물려주었으며, 2019년 6월 16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15][16]

3. 3. 현재 (15대)

제15대 심수관은 14대 심수관의 장남으로, 본명은 잇키(一輝, 한국 이름: 심일휘)이다. 1983년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이탈리아 국립 미술 도예 학교를 수료했다. 1999년 아버지 14대 심수관이 생존해 있을 때 습명(襲名)하여 15대 심수관이 되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시의 명예 시민으로 위촉되었다.[17]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재임 당시, 아버지 14대 심수관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어 가업을 잇는 의미를 더했다.[18][19]

2022년 5월 10일에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아 참석했으며,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다.[20][21] 같은 해 7월 9일, 문화재청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포에 있는 청송 심씨 선조들의 묘소를 참배하였다.[20][21] 이는 1598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22]에 의해 사쓰마번(현재 규슈 가고시마현)으로 끌려간 지 424년 만의 일이다.[23][24]

4. 한일 관계와 심수관

정유재란이라는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 가문은 400년 넘게 도자기 기술을 계승하며 일본 가고시마현에서 사쓰마야키(薩摩焼)를 대표하는 명가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단순한 도자기 제작을 넘어 한일 양국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문화 교류의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히 '''14대 심수관'''(본명 오사코 게이키치, 大迫惠吉|오사코 게이키치일본어, 1927~2019)은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64년 14대 심수관 이름을 계승한 후, 가업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한일 관계 개선에 힘썼다. 1965년 첫 방한 당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며 과거를 넘어선 미래지향적 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27]

그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4)의 주인공으로 일본 사회에 조선 도공의 역사와 망향(望鄕)의 아픔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15][16] 한일 문화 교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었고,[16] 1999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16] 2001년에는 원광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남원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16]

14대 심수관은 선조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1998년, 선조 심당길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고향 남원시에서 가져온 불씨로 도자기를 구워 남원시에 기증했으며,[14] 이 불씨는 가고시마현 미야마(美山)의 심수관요(沈壽官窯)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15] 같은 해 서울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을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15]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심수관요를 방문하여 그의 설명을 듣기도 했다.[16] 그는 2019년 6월 16일,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15][16]

아버지의 뒤를 이어 '''15대 심수관'''(본명 오사코 가즈데루, 大迫一輝|오사코 가즈테루일본어, 한국 이름 심일휘)이 1999년 이름을 계승했다.[15][16] 그 역시 한일 교류에 힘쓰며 2011년 남원시 명예 시민이 되었고,[17] 2021년 문재인 정부에서 아버지에 이어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되었다.[18][19]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았으며,[20][21] 같은 해 7월 9일, 문화재청 초청으로 방한하여 정유재란 당시 선조가 끌려온 지 424년 만에 김포에 있는 청송 심씨 선조의 묘소를 참배했다.[23][24]

심수관 가문은 정유재란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에서 비롯되었지만, 4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도자기 예술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왔다. 이들의 역사는 단순한 도예가의 삶을 넘어, 강제로 이주당한 이들의 정체성 유지 노력과 한일 간의 복잡한 역사 속에서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과거사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모색하는 데 있어 심수관 가문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25][26]

5. 평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 심당길의 후예인 심수관가는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쓰마 도자기를 만들며 조선 도자기의 기술과 정신을 계승해 온 대표적인 가문이다.[25][26]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본 내 다도 문화 유행과 맞물려 우수한 조선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 도공 납치가 심했던 시기였다.[25]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삼평이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는 것처럼, 심수관가는 사쓰마 도자기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26] 특히 12대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사쓰마웨어(Satsuma ware)'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26] 당시 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천시받던 도공 기술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존중받았는데, 이러한 환경은 조선 도공의 기술이 일본에서 꽃피우는 배경이 되었다.[27] 그러나 이러한 문화 발전과 부의 축적이 이후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지적된다.[27]

심수관가는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았다. 이들의 삶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26][27] 14대 심수관은 선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도자기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1988년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어 한일 관계 개선에 힘썼다.[25][26] 그는 1998년 서울에서 '400년 만의 귀향전'을 개최하고 고향인 남원의 불씨를 미야마의 가마로 가져오는 등, 한일 양국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활동을 펼쳤다.[27]

또한 14대 심수관은 1965년한국 방문 당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한일 수교 반대 시위가 격렬했던 상황에서도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며 과거의 아픔을 넘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큰 울림을 주었다.[27]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과거사 문제 해결과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심수관가는 조선 도공의 후예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한일 간의 이해와 교류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 상징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25]

6. 전시관

심수관 가문의 도예 작품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 일본한국에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6. 1. 일본

6. 2. 한국

참조

[1] 웹사이트 15代沈寿官さん、新作と歴代一堂に 15日まで、山形屋文化ホール /鹿児島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10-11
[2] 뉴스 ルーツの韓国に先祖の墓見つかる 薩摩焼宗家十五代が初の墓参り https://mainichi.jp/[...] 2022-07-10
[3] 웹사이트 沈家のあゆみ http://www.chin-juka[...]
[4] 서적 薩摩・朝鮮陶工村の四百年
[5] 서적 薩摩・朝鮮陶工村の四百年
[6] 문서 前掲、「沈家のあゆみ」参照
[7] 웹사이트 沈家のあゆみ http://www.chin-juka[...] 2020-06-23
[8] 뉴스 경향신문 - 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9] 뉴스 경향신문 - 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10] 뉴스 경향신문 - 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11]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심수관(沈壽官) https://terms.naver.[...]
[12] 뉴스 전북일보 - 심수관과 남원 http://www.jjan.kr/n[...] 전북일보
[13] 뉴스 경향신문 - 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14] 뉴스 전북일보 - 심수관과 남원 http://www.jjan.kr/n[...] 전북일보
[15] 뉴스 ‘조선의 불씨’ 가져와 日도자기로…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16] 뉴스 한일 문화교류 기여한 ‘조선 도공 후예’ 하늘로…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17] 뉴스 전북일보 - 심수관과 남원 http://www.jjan.kr/n[...] 전북일보
[18] 뉴스 15대 심수관, 한일 복원 민간외교관 나선다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19] 뉴스 ‘조선 도공 후예’ 15대 심수관 “한일 가교 역할 하겠다”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 뉴스 일본 끌려간 도예 명장의 후손…424년만에 선조 묘 참배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1] 뉴스 김포서 ‘도예 명장’ 심수관 선생 뿌리 찾다 https://www.kyeonggi[...] 경기일보
[22] 문서 조선에선 심안돈오(沈安頓吾)로 불림
[23] 뉴스 日 끌려간 조선도공 심당길 후손, 424년 만에 선조 묘소 참배 https://n.news.naver[...] 채널A
[24] 뉴스 일본 도예명가 심수관, 424년 만에 ‘뿌리’ 찾아 한국 방문 https://n.news.naver[...] 경향신문
[25] 뉴스 경향신문 - 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6]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심수관(沈壽官) https://terms.naver.[...]
[27] 뉴스 심수관의 恨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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