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모토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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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모토 타로는 일본의 화가, 조각가, 작가로, 1911년에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그는 기존의 예술 개념에 반항하며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예술관을 가졌으며, "예술은 폭발이다"와 같은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파리 유학 시절에는 추상 미술을 접하고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재발견하는 데 힘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태양의 탑'과 멕시코에서 제작된 벽화 '내일의 신화' 등이 있다. 그는 조몬 시대의 토기에 주목하여 일본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그의 작품은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과 도쿄 아오야마의 오카모토 타로 기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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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다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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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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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카모토 다로 |
출생 | 1911년 2월 26일 |
출생지 | 일본 가나가와현 다치바나군 다카쓰촌 오아자 후타코 (현재의 가와사키시 다카쓰구 후타코) |
사망 | 1996년 1월 7일 (만 84세)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 35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 |
국적 | 일본 |
직업 | 화가, 조각가, 도예가, 서예가, 사진가, 예술 이론가 |
학력 | |
교육 | 도쿄 미술학교 (현재의 도쿄 예술대학) 중퇴, 파리 대학교 철학과 이수 |
예술 활동 | |
사조 | 추상 미술, 초현실주의, 원시 미술 |
영향 | 오카모토 잇페이 · 오카모토 가노코 (부모), 마르셀 모스, 파블로 피카소, 미르체아 엘리아데,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
영향 받은 사람 | 겔다 타로 |
주요 작품 | 상처 입은 팔 중공업 내일의 신화 마미 회관 태양의 탑 외 다수 |
수상 | |
수상 내역 | 예술문화훈장 (프랑스, 1984년, 1989년) |
가족 | |
부모 | 아버지: 오카모토 잇페이, 어머니: 가노코 |
자녀 | 양녀: 오카모토 도시코 |
기타 정보 |
2. 생애
1911년 2월 26일, 가나가와현 다치바나군 다카쓰촌 후타고(현재의 가와사키시 다카쓰구 후타고)에서 오카모토 잇페이와 오카모토 가노코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도쿄 아오야마의 세이난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번 전학을 거듭하다 게이오 유치사에 입학했다. 1929년 게이오기주쿠 보통부를 졸업하고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반년 후 중퇴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런던 군축 회의 취재에 동행하여 유럽으로 건너갔다.
파리 대학교 소르본교에서 철학, 미학, 심리학, 민족학(문화인류학)을 배웠다. 1936년 유화 『슬픈 팔』을 제작했으며, 1940년 파리 함락 직전에 귀국했다.
1942년 징병 검사에서 갑종 합격을 받고 소집되어 중국 대륙에서 군 복무를 했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파리 시대 작품이 모두 소실되었고, 1946년 복원하여 도쿄도 세타가야구 가미노게에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1947년 훗날 양녀가 되는 히라노 도시코를 만났다.
1948년 하나다 기요테루, 하니야 유타카 등과 "밤의 모임"을 결성했다. 1951년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조몬 토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1952년 「사차원과의 대화-조몬 토기론」을 발표했다. 같은 해 다시 도항하여 파리와 뉴욕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54년 사카쿠라 준조가 설계한 아틀리에를 아오야마로 이전하고 "현대 예술 연구소"를 설립했다. 1956년 구 도쿄 도청사에 『해의 벽』, 『달의 벽』 등 11개의 도판 부조를 제작했다. 1959년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하고 조각을 시작했다.
1961년 구사쓰 시라네 산에서 스키 중 골절상을 입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 메달의 앞면을 디자인했다. 1967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테마 전시 프로듀서로 취임하여 1970년 태양의 탑을 완성했다.
1973년 오카모토 타로 디자인의 비행선 레인보우호가 하늘을 날았다. 1981년 히타치 맥셀의 CM에 출연하여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198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했다. 1985년 쓰쿠바 엑스포의 심볼 모뉴먼트 《미래를 보다》를 제작했다. 198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 코만되르를 수훈했다.
1996년 1월 7일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급성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다(향년 84세). 사후 1998년 아오야마의 주거 겸 아틀리에가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으로 공개되었고, 1999년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이 개관했다.
2003년 멕시코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내일의 신화가 발견되어 복원 후 2006년 시오도메 닛테레 플라자에서 기간 한정으로 공개되었고, 현재는 게이오 이노카시라선시부야역 연락 통로에 설치되어 있다.
2011년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탄생 100년 오카모토 타로"전이 개최되었다. 2022년 "전람회 오카모토 타로"가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도쿄도 미술관・아이치현 미술관 순으로 개최되었다.
2. 1. 초기 생애 (1911–1929)
오카모토 잇페이와 오카모토 가노코의 아들로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다카쓰구에서 태어났다.[1] 1917년(다이쇼 6년) 4월,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세이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한 학기 만에 퇴학했다. 이후 니혼바시 도리 하타고초의 사숙·닛신 학교, 토시 초등학교로 전학을 반복했지만, 게이오기주쿠 유치사에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교사 이조 키요시를 만났다. 게이오기주쿠 보통부를 졸업한 후, 화가가 될지 고민하면서도 도쿄미술학교에 진학했다.[1]어린 시절 오카모토는 복잡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잇페이는 아사히 신문에서 "만화만문"이라는 독자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지만,[42] 수입 대부분을 술값으로 써버리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어머니 가노코는 대지주의 장녀로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열중했다. 가노코는 잇페이의 공인 하에 호리키리 시게오를 자택에 함께 살게 하기도 했다. 훗날 오카모토는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로서는 최악의 사람이었다."라고 말했지만, 평생 존경하며 사랑했다.
1929년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했다.
2. 2. 유럽 유학 (1929–1940)
192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취재를 위해 아버지 일평이 아사히 신문 특파원으로 가게 되면서, 오카모토 다로는 도쿄 미술 학교를 휴학하고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갔다. 일행은 1930년 1월에 파리에 도착했고, 이후 오카모토는 약 10년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43]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 교외의 리세(일본의 구제 중학교에 해당)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언어를 습득했다. 1932년경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빅토르 바슈 교수의 미학을 배웠고, 1938년경부터는 마르셀 모스 밑에서 민족학을 배웠다.[1]
1932년 부모가 먼저 귀국하면서 파리에 남게 되었고, 같은 해 우연히 들른 폴 로젠베르 갤러리에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물병과 과일 접시》[44]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피카소를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회화 제작에 매달렸다.[4] 오카모토는 이때의 감동을 저서 『청춘 피카소』 (1953년)에서 "나는 추상화에서 그림의 길을 찾았다. (중략) 이 양식이야말로 전통과 민족, 국경의 장벽을 돌파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적인 20세기의 예술 양식이었다"라고 회고했다.
1932년 장 아르프 등의 권유로 미술 단체 아브스트락시옹 크레아시옹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피에트 몬드리안, 바실리 칸딘스키 등과 교류했다.[45]
1936년부터는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파트너였던 보도 사진가 게르다 포호릴레가 오카모토의 이름을 비즈니스 네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게르다는 1937년 스페인 내전 취재 중 사망했다.[6]
1938년 초현실주의 창시자 앙드레 브르통이 제작한 "쉬르레알리슴 간이 사전"[46]에 오카모토의 "슬픈 팔"이 게재되었다. 이 그림을 계기로 오카모토는 아브스트락시옹 크레아시옹 협회를 탈퇴하고, 파리 대학교 소르본교 철학과 청강생으로 다니다가 민족학과로 옮겨 마르셀 모스 교수와 조르주 바타유를 만났다.[45]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1940–1946)
1940년 어머니의 사망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일본에서 예술적 성공을 거두어 1942년 제28회 니카 미술 전시회에서 니카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유럽에서 완성한 작품들을 가지고 긴자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7]1942년, 대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중일 전쟁에 참전, 중국으로 파견되었다.[8] 창안에서 몇 달 동안 포로 수용소에 갇힌 후 1946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가 부재한 동안, 그의 가족 집과 모든 작품은 일본 공습으로 파괴되었다.[7]
2. 4. 조몬 토기 연구와 일본 문화 재발견 (1950년대)
오카모토는 1952년 조몬 시대 도자기에 대한 영향력 있는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는 선사 시대 일본과의 오랜 관계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미학이 고대 조몬 시대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 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8] 그는 일본 전통에 대해 계속 글을 썼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전통을 재평가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한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이 되었다.[14]이후 오카모토는 일본 문화의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 전역을 여행했으며, 《일본 재발견 - 예술 풍토기》(1962)와 《신비한 일본》(1964)을 출판했다. 이 책들은 그가 연구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로 풍부하게 채워져 있으며, 그의 민족지학적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관찰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공했다.
2. 5. 멕시코 체류와 《내일의 신화》 (1960년대)
1960년대 후반, 오카모토 다로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50] 등의 영향을 받아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67년 멕시코를 방문하여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는 내일의 신화이다.[51]오카모토는 멕시코 회화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으며, 일본 미술계의 관심이 서구에서 멀어지게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본과 멕시코 미술계가 새로운 비서구적 현대 미술 미학을 시작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본 조몬 시대 문화와 멕시코 선콜럼비아 미술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멕시코 미술의 영향은 그의 후속 작품에 나타난다.[19] 그는 "새로운 세계: 오카모토 타로, 라틴 아메리카를 탐험하다"라는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도 했다.[18]
2. 6. 《태양의 탑》과 만국 박람회 (1970)
1970년 (쇼와 45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개최가 결정되자, 통상 관료 사카이야 다이치 등 주최 측은 테마 전시 프로듀서로 오카모토 다로에게 취임을 요청했다. 오카모토는 이를 승낙하고 "어쨌든 터무니없는 것을 만들겠다"는 구상으로 『태양의 탑』을 완성했다.
1975년 (쇼와 50년), 『태양의 탑』은 영구 보존이 결정되어 현재까지 오사카 엑스포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다.
오카모토는 『태양의 탑』과 동시에 『내일의 신화』도 제작했으나, 제작 의뢰자의 파산으로 오랫동안 행방불명되었다가 21세기에 들어 발견되었다.[52]
2. 7. 만년과 사후 (1971-1996)
오카모토는 1970년대에도 꾸준히 여행하며 글을 쓰고 공공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실크스크린과 동판화를 실험하며 판화 제작에도 힘썼다.1970년대 오카모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엑스포 '70)와 관련된 것이다. 그는 이 박람회를 위해 중앙 테마 파빌리온을 설계하고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조각상인 ''태양의 탑'', 탑 안팎의 전시, 그리고 두 개의 작은 탑이 포함되었다.[20] ''태양의 탑''의 독특한 외관은 오카모토의 유럽 초현실주의 배경, 멕시코 미술에 대한 관심, 그리고 조몬 시대 도자기의 영향을 받았다.[21] 이 파빌리온은 엑스포 '70 기간 동안 900만 명 이상이 방문했으며, 오늘날 만국기념공원에 보존되어 있다.[22]
말년에도 오카모토의 개인전은 더욱 많아졌다. 1986년, 그의 초기 회화 작품 여러 점이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주요 전시회인 ''Japon des Avant-Gardes 1910-1970''에 포함되었다.[23] 1991년, 그의 주요 작품들은 가와사키시에 기증되었으며, 1996년 사망한 후 1999년에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개관했다.


나이가 들어도 오카모토의 창작 의욕은 쇠퇴하지 않고, 전시회 출품 등의 활동을 계속했지만, 80세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거의 모든 작품을 가와사키시에 기증했다. 시는 미술관 건설을 계획한다.
1996년 1월 7일, 이전부터 앓고 있던 파킨슨병에 의한 급성 호흡 부전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84세).[40] 생전 "죽음은 축제다"라고 말하며, 장례식을 몹시 싫어했던 오카모토를 배려하여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고, 다음 달 2월 26일에 고별 행사로 "오카모토 타로와 이야기하는 광장"이 소게츠 회관에서 열렸다. 회장에는 작품이 전시되었고, 참가자들은 아쉬움을 달랬다.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으며, 같은 곳에 있는 아버지 잇페이, 어머니 카노코의 묘비 맞은편에 타로의 묘가 세워졌으며, 묘석으로는 1967년에 타로가 제작한 조각상 ''''오후의 해'''''의 복제품이 놓여져 있다.
1998년, 아오야마의 오카모토의 주거 겸 아틀리에가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으로 일반 공개되었다.
1999년 10월 30일,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이 개관(가와사키시 타마구 마스가타의 이쿠타 녹지 내에 소재).
2003년, 멕시코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내일의 신화'가 발견되었다. 에히메현도온시에서 복원된 후, 2006년, 시오도메 닛테레 플라자에서 기간 한정으로 공개되어, 재평가의 기운이 높아졌다. 현재는 게이오 이노카시라선시부야역 연락 통로에 설치되어, 공공 미술로서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2011년, "탄생 100년 오카모토 타로"전이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2013년, "오카모토 타로의 샤머니즘"전이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이에 맞춰 학술 단체 협력에 의한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1950년경 이후의 창작 활동에 종교학자 미르차 엘리아데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014년, "오카모토 타로와 잠재적 이미지"전이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교수인 다리오 감보니 박사의 저서 '잠재적 이미지'에 기초하여 구성된 것으로, 오카모토의 예술을 서양 근현대 미술사의 관점에서 검증한 첫 전시회였다(사사키 히데노리 "오카모토 타로와 잠재적 이미지").
2022년, "전람회 오카모토 타로"가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도쿄도 미술관・아이치현 미술관 순으로 개최되었다.[54] 새롭게 발견된 오카모토 타로의 작품 "작품 A", "작품 B", "작품 C"가 전시되었다.
3. 주요 작품
오카모토 다로의 주요 작품은 회화, 조각, 저서로 나뉜다.
회화오카모토는 전쟁 전에는 추상 미술에 관심을 가졌으나, 순수 추상 미술의 한계에 불만을 느끼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추상과 구상을 융합한 작품을 선보였다.[24] 전후에는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의 영향 외에도 극성 이론과 선사 시대 예술의 영향도 받았다.[25]
제목 | 제작 연도 | 비고 |
---|---|---|
패참의 탄식 | 1924년 | 현존하는 타로의 가장 오래된 작품 |
공간 | 1933년 (1954년 재제작) | 전쟁으로 소실 |
콘트르푸앵 | 1935년 (1954년 재제작)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전쟁으로 소실 |
슬픈 팔 | 1936년 (1949년 재제작) | 전쟁으로 소실 |
노점 | 1937년 (1949년 재제작) |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전쟁으로 소실 |
우수 | 1947년 | 소게츠 미술관 소장 |
중공업 | 1949년 | |
붉은 토끼 | 1949년 | 도야마 현립 근대 미술관 소장 |
숲의 규칙 | 1950년 | |
타오르는 사람 | 1955년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
찢어진 얼굴 | 1960년 | |
유희 | 1961년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
꾸민 전사 | 1963년 | |
애무 | 1964년 | |
천수 | 1965년 | |
내일의 신화 | 1968년 | 시부야 마크 시티 연락 통로에 설치 |
앙천대소 | 1972년 | |
기념 촬영 | 1975년 | |
검은 태양 | 1979년 | 리토그래프 |
조우 | 1981년 | |
도전 | 1981년 | 후쿠오카시 신텐초 상점가 내 "신텐초 클럽"에 전시 |
숲의 가족 | 1983년 | |
질주하는 눈 | 1992년 |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 소장 |
조각오사카 엑스포 '70의 상징이었던 ''태양의 탑''은 높이 70m의 인형 형태 조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낸다.[29]
제목 | 제작 연도 | 설명 |
---|---|---|
얼굴 | 1952년 | 3점 중 1점은 잇페이의 묘비 |
해의 벽・달의 벽 | 1956년 | 구 도쿄도청 도판 레리프[68] |
무적 동물 | 1959년 | 나가노현 도쿠라정 "하쿠초엔" 부지 내 전시 |
앉기를 거부하는 의자 | 1963년 | |
범종・환희 | 1965년 | 나고야 구코쿠지 경내 범종 |
젊은 시계탑 | 1966년 | 긴자 스키야바시 공원 내 설치 |
태양의 종 | 1966년 | 이즈노쿠니시 닛통이즈 후지미 랜드 설치, 2018년 마에바시시 히로세가와 하반 녹지 설치 |
오후의 해 | 1967년 | 도쿄도립 다마 영원 오카모토 타로 묘비 |
탄생 | 1967년 | 구로카와 기쇼 설계 사가에시 시청 샹들리에 |
젊은 태양의 탑 | 1969년 | 이누야마시 일본 몽키 파크 내 현존 |
녹색 태양 | 1969년 | 벳푸시 타노유마치 선드럭 빌딩 도판 벽화[69] |
태양의 탑 | 1970년 | 일본 만국 박람회 축제 광장 설치, 만박 기념 공원 현존 |
어머니의 탑 | 1970년 | 태양의 탑 서쪽, 철거 |
청춘의 탑 | 1970년 | 태양의 탑 동쪽, 철거 |
논 | 1970년 | |
나무 사람 | 1971년 |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 야마나시현립 미술관 상설 |
약진 | 1972년 | RSK 홀딩스 의뢰, 오카야마역 제작 도판 벽화, 2020년 산요 방송 신사옥 이전 |
젊은 샘 | 1974년 | 버즈 타운(히메지시 유메사키초) 내 분수 |
천수 | 1975년 | |
환희 | 1978년 | 모치다 제약 본사 빌딩 현관 앞 |
발자국 광장 | 1978년 | 후쿠야마시 마쓰나가초 일본 신발 박물관 정원 |
카파상 | 1981년 | |
조몬인 | 1982년 | |
신화 | 1982년 | 마쓰에시 마쓰에 종합 운동 공원 기념물 |
꿈의 나무 | 1983년 | 가누마시 가누마 시민 문화 센터 심볼, 2012년 신카누마역 로터리 이전[70][71] |
미래를 보다 | 1985년 | 국제 과학 기술 박람회 심볼, 2005년 만박 기념 공원역 앞 이전 |
아이의 나무 | 1985년 | 어린이의 성 심볼, 폐관 후 존치 예정[72] |
태양 | 1985년 | 소고 요코하마점 옥상 오리지널 기념물 |
평화를 부르는 상 | 1988년 | 후나바시시 평화 도시 선언 기념, 안데르센 공원 내 |
미래를 열어갈 탑 | 1988년 | 기후 주부 미래 박람회 심볼, 기후 메모리얼 센터 내 |
어머니의 탑 | 원작 | |
기쁨 | 1985년 | 가와사키 시립 후지사키 초등학교 창립 30주년 기념 작품 |
숲의 신화 | 1991년 |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류 호텔 로비[73] |
약동의 문 | 1993년 | 우라야스시 운동 공원 |
오대륙 | 1993년 | 우라야스시 운동 공원 |
하신 | 1995년 |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류 호텔 내 난로 조각[73] |
꽃불 | 1995년 | 사가현 아리타정 재팬 엑스포 "세계 불꽃 박람회" 기념, "역사와 문화의 숲 공원" 존치[74][75] |
저서오카모토 타로는 회화, 조각 외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오늘의 예술』
- 『일본의 전통』
- 『오키나와 문화론』
- 『나의 현대 예술』
- 『원색의 주문』
- 『오카모토 타로 저작집』 전 9권 등
3. 1. 회화
오카모토의 전쟁 전 그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파리에서의 초기 경력 동안 그는 추상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추상-창조 그룹과 함께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수한 추상 미술의 한계에 불만을 느끼고, 그림에 더 많은 구상적 이미지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추상과 구상을 융합한 '이타마시키 우데'(傷ましき腕|상처 입은 팔일본어)의 완성을 통해 오카모토는 추상-창조 그룹을 떠나 다른 화풍을 탐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팔, 어깨, 머리카락, 밝은 빨간색 리본의 묘사를 통해 어린 소녀를 묘사하는 듯한 '이타마시키 우데'는 충격적이게도 인간의 머리나 몸이 없고, 팔 자체도 추상적인 살색 줄무늬와 버블검 핑크색으로 기대를 저버린다. 이 작품은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오카모토는 그룹에 합류하지 않기로 했다.[24]오카모토의 전후 그림은 그의 벽화 및 공공 조각품과 마찬가지로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계속 받았지만, 그의 극성 이론과 선사 시대 예술의 발견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정글의 법칙'(1950)은 거대한 지퍼 모양의 척추를 가진 괴물 같은 붉은 물고기 모양의 생물이 인간 형상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묘사한다.[25] 생생한 삼원색의 작은 인간 및 동물 형태가 빛나는 녹색 정글 배경을 배경으로 중앙 생물을 둘러싸고 있다. 추상과 초현실적인 의인화 형태의 혼합, 생생한 색상, 평평한 그림 평면 등 이 작품의 많은 주요 특징은 그의 경력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의 그림에서 계속되었다.
조르주 바타유와의 만남이 오카모토의 일생을 바꾸었다고 회고하고 있다.[55] 1936년, 《컨트라 아타크》의 집회에 참가하여 앙드레 브르통이나 모리스 에이느에 이어 바타유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비판의 연설을 하자 "맨손으로 영혼을 긁힌 듯 감동했다"라고 회고했다. 오카모토는 그 후 바타유를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에 참가했지만, 사상적 차이로 1939년경에 결별했다고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소장처 미기재는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 소장)
제목 | 제작 연도 | 기법 | 비고 |
---|---|---|---|
패참의 탄식 | 1924년 | 현존하는 타로의 가장 오래된 작품. | |
공간 | 1933년 (1954년 재제작) | 유채 | 전쟁으로 소실 |
콘트르푸앵 | 1935년 (1954년 재제작) | 유채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전쟁으로 소실 |
슬픈 팔 | 1936년 (1949년 재제작) | 유채 | 전쟁으로 소실 |
노점 | 1937년 (1949년 재제작) | 유채 |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전쟁으로 소실 |
우수 | 1947년 | 유채 | 소게츠 미술관 소장 |
중공업 | 1949년 | 유채 | |
붉은 토끼 | 1949년 | 유채 | 도야마 현립 근대 미술관 소장 |
숲의 규칙 | 1950년 | 유채 | |
타오르는 사람 | 1955년 | 유채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
찢어진 얼굴 | 1960년 | 유채 | |
유희 | 1961년 | 유채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
꾸민 전사 | 1963년 | 유채 | |
애무 | 1964년 | 유채 | |
천수 | 1965년 | 유채 | |
내일의 신화 | 1968년 | 유채 | 시부야 마크 시티의 연락 통로에 설치 |
앙천대소 | 1972년 | 유채 | |
기념 촬영 | 1975년 | 유채 | |
검은 태양 | 1979년 | 리토그래프 | |
조우 | 1981년 | 유채 | |
도전 | 1981년 | 유채 | 후쿠오카시 신텐초 상점가 내 "신텐초 클럽"에 전시 |
숲의 가족 | 1983년 | 유채 | |
질주하는 눈 | 1992년 | 유채 |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 소장 |
3. 2. 조각
오카모토의 ''태양의 탑''은 오사카 엑스포 '70의 상징이었다. 높이 70m에 달하는 이 인형 형태는 콘크리트와 스프레이 스투코로 만들어졌으며, 뿔 모양의 두 개의 팔, 두 개의 원형 얼굴, 그리고 가장 높은 지점에 부착된 하나의 금속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과거(아랫부분), 현재(중간 부분), 그리고 인류의 미래(얼굴)를 나타낸다. 방문객들은 조각품의 기저부를 통해 들어가 일명 "생명의 나무" 옆의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올라갔으며, 이는 원시 유기체에서 더 복잡한 생명체로의 진화를 보여주는 조각된 나무였다. 그 후 방문객들은 조각품의 팔을 통해 나왔다.[29] 오카모토가 멕시코를 방문한 직후에 건설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는 콜럼버스 이전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았다. 동시에, 탑의 형태는 조몬 토우(''도구'') 조형물과 유사하며 입체주의 피카소의 초상화를 암시했다.[20] 종말론적인 ''아스노 신와''("내일의 신화")와 달리, 태양의 탑은 궁극적으로 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영감은 더 세계적인 현대 미술의 가능성을 시사했고, 오카모토는 탑과 그 주변 광장이 대규모 파괴가 아닌 사람들의 대규모 모임을 촉진할 것이라고 상상했다.[22]''아스노 신와''와 ''태양의 탑'' 모두 오카모토의 많은 공공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으로는 도쿄 긴자의 ''와카이 토케이 다이''("젊은 시계탑")(1966), 아이치현 이누야마의 ''와카이 타이요노 토'' (젊은 태양의 탑)(1969), 그리고 도쿄 아오야마의 ''코도모노 키''("어린이의 나무")(1985) 등이 있다.
오카모토의 조각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재료 | 제작 연도 | 설명 |
---|---|---|---|
얼굴 | 도자 | 1952년 | 총 3점이 제작되었으며, 그 중 1점은 잇페이의 묘비이다. |
해의 벽・달의 벽 | 도자 | 1956년 | 구 도쿄도청 도판 레리프[68] |
무적 동물 | 1959년 | 나가노현도쿠라정의 온천 시설 "하쿠초엔" 부지 내에 전시되어 있다. | |
앉기를 거부하는 의자 | 도자기 | 1963년 | |
범종・환희 | 청동 | 1965년 | 나고야의 구코쿠지 경내에 범종으로 걸려 있다. |
젊은 시계탑 | 콘크리트, 알루미늄 | 1966년 | 긴자 스키야바시 공원 내에 설치. |
태양의 종 | 청동 | 1966년 | 시즈오카현다카타군니라야마정(현재의 이즈노쿠니시)의 닛통이즈 후지미 랜드에 설치되어 있었다. 1999년 폐원 후, 일본통운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2017년 군마현마에바시시로의 기증이 결정되어 2018년 히로세가와 하반 녹지에 설치되었다. |
오후의 해 | 청동 | 1967년 | 도쿄도립 다마 영원에 있는 오카모토 타로의 묘비이기도 하다. |
탄생 | 1967년 |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하여 1967년 준공된 야마가타현사가에 시청의 샹들리에로 기증. 시청 5층부 천장에서 쇠사슬로 매달려 2층 홀에 상설. | |
젊은 태양의 탑 | 1969년 | 아이치현이누야마시의 일본 몽키 파크 내에 현존. | |
녹색 태양 | 도판 | 1969년 | 오이타현 벳푸시 타노유마치 선드럭 빌딩의 도판 벽화. 시가라키야키 타일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변색되지 않고 남아 있다. JR벳푸역 홈에서도 볼 수 있다.[69] |
태양의 탑 | 철근 콘크리트, 강화 플라스틱, 유리, 도판 | 1970년 | 일본 만국 박람회(오사카 만박)의 축제 광장에 설치되었으며, 대지붕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만박 기념 공원에 현존. |
어머니의 탑 | 1970년 | 태양의 탑 서쪽에 있었으며 대지붕과 함께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 |
청춘의 탑 | 1970년 | 태양의 탑 동쪽에 있었으며 어머니의 탑과 마찬가지로 대지붕과 함께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 |
논 | FRP | 1970년 | |
나무 사람 | FRP | 1971년 | 파리의 포브르 생토노레 거리의 예술제 "거리의 미술관"에서 축제의 왕으로 선정.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 야마나시현립 미술관에 상설. |
약진 | 도자 | 1972년 | 오카야마현의 민영 방송인 산요 방송(현재의 RSK 산요 방송)의 의뢰로 산요 신칸센오카야마역 개업 시 제작된 도판 벽화. "산요 방송의 광고"라는 명목으로 설치되어 오랫동안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았다. 2019년에 철거되어 정비 후 2020년에 준공된 산요 방송 신사옥으로 이전. |
젊은 샘 | 알루미늄 | 1974년 | 버즈 타운(히메지시 유메사키초) 내에 현존하는 분수. |
천수 | 알루미늄 | 1975년 | |
환희 | 청동 | 1978년 | 모치다 제약 본사 빌딩 현관 앞. |
발자국 광장 | 조원 | 1978년 | 히로시마현후쿠야마시 마쓰나가초 일본 신발 박물관 정원에 조성. |
카파상 | FRP | 1981년 | |
조몬인 | 청동 | 1982년 | |
신화 | 1982년 | 시마네현마쓰에시마쓰에 종합 운동 공원 기념물. | |
꿈의 나무 | 알루미늄 | 1983년 | 도치기현가누마시의 가누마 시민 문화 센터의 심볼 기념물.[70][71] 오카모토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2012년 도부 닛코선신카누마역 로터리로 이전.[70][71] |
미래를 보다 | FRP | 1985년 | 쓰쿠바 과학 만박의 심볼 기념물. 2005년에 쓰쿠바 익스프레스만박 기념 공원역 앞으로 이전. |
아이의 나무 | FRP | 1985년 | 어린이의 성의 심볼 기념물. 2015년의 어린이의 성 폐관 후에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토지와 건물을 구입할 예정인 도쿄도에 따르면, 구입 후에도 부지에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72] |
태양 | 1985년 | 9월에 소고 요코하마점의 오픈에 맞춰 옥상에 건립된, 만박의 태양의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오리지널 기념물. | |
평화를 부르는 상 | 1988년 | 10월에 후나바시시의 평화 도시 선언 기념 심볼상으로 건립. 안데르센 공원 내에 존재. | |
미래를 열어갈 탑 | 1988년 | 기후 주부 미래 박람회의 심볼로 건립. 부지에 만들어진 기후 메모리얼 센터 내에 현존. | |
어머니의 탑 | 원작 | ||
기쁨 | 청동 | 1985년 | 가와사키 시립 후지사키 초등학교 창립 30주년 기념 작품. 빨간 리본의 소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숲의 신화 | 1991년 |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류 호텔 로비에 전시.[73] | |
약동의 문 | 1993년 | 우라야스시 운동 공원 | |
오대륙 | 1993년 | 우라야스시 운동 공원 | |
하신 | 알루미늄 합금 | 1995년 |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류 호텔 내의 난로 조각.[73] |
꽃불 | 도자 | 1995년 | 1996년 7월, 사가현 아리타정에서 개최된 재팬 엑스포 "세계 불꽃 박람회"의 기념 기념물. 도시코와 타로의 조수를 맡았던 장인의 지원을 받아 완성.[74] 회기 종료 후, 부지는 "역사와 문화의 숲 공원"이 되어 현재에 이름.[75] |
3. 3. 저서
- 『OKAMOTO』(G.L.M.사, 1937년) - 평론가 피에르 쿠르티옹 편저에 의한 최초의 화집. 프랑스에서 출판. 특장판 30부, 보급판 다수
- 『화문집 아방가르드』(월요서방, 1948년)
- 『T.OKAMOTO』(미술출판사, 1954년) - 화집, 불어판도 동시 출판
- 『화문집 검은 태양』(미술출판사, 1959년)
- 『오카모토 타로』(미술출판사, 1968년) - 화집, 카이토 히데오 편
- 『절대적, 그리고 무목적으로』(세리그라피, 판화집, 1974년)
- 『데리쉬르』(판화집, 1976년)
- 『TARO OKAMOTO 대극에서 노는 남자』(1976년) - 화집, 프랑스에서 출판
- 『화문집 도전하다』(고단샤 문고, 1977년)
- 『오카모토 타로』(헤이본샤, 1979년, 복간 2011년), 망라적 작품집
- 『노는 글자』(일본예술출판사, 1981년), 묵적집
- 『오카모토 타로 아사히 미술관 일본편 2』(아사히 신문사, 1995년), 회화·입체 작품집
- 『오카모토 타로 환희』(오카모토 토시코 편, 이현사, 1997년), 화문집을 망라
- 『오카모토 타로의 오키나와』(오카모토 토시코 편, NHK출판, 2000년)
- 『오카모토 타로가 찍은 "일본"』(오카모토 토시코·야마시타 유지 편, 마이니치 신문 출판, 2001년)
- 『오카모토 타로 신비』(오카모토 토시코·나이토 마사토시 편, 이현사, 2004년) - 사진 관련 서적
- 『TARO 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 소장 작품집』(이현사, 2005년), 망라적 작품집
- 『두근거려버려 오카모토 타로의 "서"』(쇼가쿠칸, 2010년)
- 『지금부터 오카모토 타로의 "서"』(쇼가쿠칸, 2012년) - 각 묵적집의 재편판, 히라노 아키오미 구성
- 『오카모토 타로와 일본의 축제』(가와사키시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 편, 이현사, 2011년)
- 『오카모토 타로 폭발대전』(가와데 서방 신사, 2011년), 대저
- 『어머니의 편지』부녀계사(1940년), 월요서방(1950년), 치쿠마슈판사(1979년, 동・신장판 1993년)
- 『피카소』(홍문당) 아테네 미술 문고(1952년). 편집은 우스이 시로(후에 단고샤 부사장)가 담당.
- 『꿈과 맹세』보문관(1952년). 아래 일본도서센터판에 초판 수록
- 『청춘 피카소』신초사 한 시간 문고(1953년), 신정・신초문고(2000년, ISBN 978-4101346229)
- 『오늘의 예술 시대를 창조하는 자는 누구인가』광문사(1954년), 광문사 캇파북스(1963년), 고단샤 문고(1973년), 광문사 지혜의 숲 문고(1999년)
- 『일본의 전통』광문사(1956년), 각천문고(1964년), 고단샤 현대 신서(1973년), 신정・광문사 지혜의 숲 문고(2005년, 개정판 2022년, ISBN 978-4334793111)
- 『예술과 청춘』가와데 서방・가와데 신서(1956년), 신정・광문사 지혜의 숲 문고(2002년, ISBN 978-4334781880)
- 『일본 재발견 예술 풍토기』신초사(1958년), 신정・각천 소피아 문고(2015년)
- 『잊혀진 일본――오키나와 문화론』→『오키나와 문화론――잊혀진 일본』주오코론샤(1961년, 보급판 1964년) - 매일 출판 문화상 수상, 중공 총서판(개제: 1972년, 신장판 2002년), 중공 문고(1996년, 뒤표지 오카모토 도시코, 신장 개정판 2024년, 해설 토마 모리요시, 아카사카 노리오, ISBN 978-4122075054), 전자 서적도 간행
- 『나의 현대 예술』신초사 (1963년)
- 『신비 일본』주오코론샤(1964년), 신정・각천 소피아 문고(2015년)
- 『오카모토 타로의 눈』 아사히 신문사(1966년) / 신정・각천 문고(2020년)
- 『오늘을 여는 태양과의 대화』고단샤(1967년)
- 『원색의 주문』시리즈인과 사상: 분게이슌주(1968년), 선집, 『원색의 주문 현대의 예술 정신』고단샤 문예 문고(2016년, ISBN 978-4062903011)
- 『미의 주력』신초사(1971년) / "저작집 제6권"(고단샤), 신정・신초 문고(2004년, ISBN 978-4101346229)
- 『눈싸움』반초 서방(1975년) / "저작집 제7·8권"(고단샤, 1980년), 이스트 프레스 "인간은 순간순간에, 생명을 버리기 위해 살고 있다."(2007년 / 동・문고 긴가당, 2009년)
- 『오카모토 타로의 도전하는 스키 하얀 세계에 타오르는 환희』고단샤(ASIN B000J8SPZU, 1977년), "저작집 제8권"(고단샤, 1980년)
- 『'''오카모토 타로 저작집'''』전 9권 (고단샤, 1979-1980년)
- 『미의 세계 여행』신초사(1982년), 신초 문고(2016년, ISBN 978-4101346236)
- 『잇페이 카노코 마음에 살아있는 굉장한 부모』(치쿠마슈판사, 1995년)
- 『오카모토 타로 도전한다 / 꿈과 맹세(초) : "인간의 기록" 시리즈 (77)』일본 도서 센터(1998년, ISBN 978-4820543220)
- 『오카모토 타로의 책』 전 5권(미스즈 서방) - 다이제스트 편집으로 신판 선집
- #『주술 탄생』(1999년, ISBN 978-4622042563)
- #『일본의 전통』(1999년, ISBN 978-4622042570)
- #『신비 일본』(1999년, ISBN 978-4622042587)
- #『우리 세계 미술사 미의 주력』(1999년, ISBN 978-4622042594)
- #『우주를 나는 눈』(2000년, ISBN 978-4622042600)
- 『리리컬한 자화상』, 속편 『질주하는 자화상』(미스즈 서방, 2001년)
- 『오카모토 타로의 우주』(전 6권, 치쿠마 학예 문고, 2011년)
- 『세계의 가면과 신상』(아사히 신문사, 1970년) - 이즈미 야스이치, 우메사오 타다오와 공편
- 파블로 피카소 [화] / 가에탕 피콩[문]'''『이카로스의 추락』'''「총서 창조의 소경」신초샤, 1974년, 번역・해설
- 편 『미궁 환상』(놀이의 백과전서⑩, 일본 브리타니카, 1980년 12월, 기획 제작: [https://kamarusya.wixsite.com/kamaru 카마루사・쿠와바라 시게오]), 『미궁의 인생』아톤(2004년)
- 후쿠다 카즈히코 편 『일본 명품 취방』 전 3권 (하가 서점)
- #『비권 부세화』(1973년) - 고바야시 가즈사쿠, 하니야 유타카와 공동 감수 (명의만)
- #『비권 부세화 대금』(1973년) - 동상
- #『비권 육필 부세화』(1973년) - 동상
- 후쿠다 카즈히코 편 『초지본 부세화 명품선』 전 4권 (하가 서점)
- #『비판 에이센』(1974년) - 고바야시 가즈사쿠, 하니야 유타카와 공동 감수 (명의만)
- #『비판 쿠니사다』(1975년) - 하니야 유타카와 공동 감수 (명의만)
- #『비판 쿠니요시』(1975년) - 동상
- #『비판 호쿠사이』(1975년) - 동상
4. 예술관
오카모토 다로는 스포츠에도 능했는데, 특히 스키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는 흰색 스키판과 의상이 유행하던 시절, 화려한 디자인의 판과 의상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으며, 자신의 스키 경험을 담은 "오카모토 타로의 도전하는 스키"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스키의 매력에 대해 "어떤 급경사면이라도 직활강으로 타는 것이 스키의 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처음 스키를 배울 때 급경사 코스에 도전하여 크게 넘어졌지만, "머리부터 신설 속으로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기뻤다. 뭔가 내가 넘어졌다기보다는, 내 눈앞에서 지구가 뒤집혔다는 느낌. 지구에 매우 친밀감을 느꼈다"라고 회상하며, 이 경험을 통해 지구에 대한 친밀감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오카모토 다로의 예술관은 그의 이러한 도전 정신과 맞닿아 있다. 그는 극점주의와 조몬 미학이라는 독특한 관점을 통해 기존의 예술 체제에 도전하고, 일본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4. 1. 극점주의
오카모토의 '타이쿄쿠슈기'(Polarism, 극점주의)라는 개념은 파리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으면서 생겨났다. 그는 변증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반합의 개념을 거부했다. 오히려 정립과 반정립(극단적인 반대)이 실제로 분리된 채로 남아 통일이나 해결보다는 영구적인 파편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30] 이 이론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제시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일본 전쟁 시기 회화의 시각적 전체성과 조화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미학이었다.[31] 미술에 적용할 때, 오카모토는 추상 회화를 종합이라고 보았다. 즉, 색, 움직임, 그리고 다양한 감각을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글의 법칙'(1950)은 영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개별 요소는 선과 색으로 명확하게 묘사되지만, 어떤 동일시도 거부하고,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로 칠해진 공간에 떠 있다. 또한 평면성과 깊이, 명확성과 모호함, 전경과 배경, 구상과 추상 사이의 강한 긴장이 존재한다. '새벽'(1948)과 '중공업'(1949)도 극점주의의 예시로 여겨진다.[32]4. 2. 조몬 미학
오카모토 다로의 조몬 이론은 20세기 일본 미학과 문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33] 1952년 잡지 ''미즈에''에 게재된 "조몬 도기론: 시지겐토노 타이와" (조몬 도기에 관하여: 제4차원과의 대화)에서 처음 소개되었다.[34]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조몬 시대의 토기 및 ''도구''를 관람한 후, 오카모토는 일본 미학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주장했다.[34]당시 일본 미학은 단순하고 절제된 야요이 시대 도자기의 미학에 기초하고 있었고, ''와비사비''와 같은 개념을 낳았다.[35][36] 반면, 조몬 도자기의 역동적이고 거친 패턴과 디자인은 현대 일본에 부족했던 진정한 표현을 제공했다. 오카모토는 일본 예술가들이 조상들의 "원시적인"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에 역동적인 힘과 신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오카모토는 조몬의 대상을 사용하여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 실천을 위한 토착적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다.[34] 1954년에 출판된 ''콘니치노 게이주쓰''(오늘의 예술)에서 젊은 예술가들에게 과거의 모든 예술 체제를 파괴하고 서양 예술 세계와 동등한 일본 예술 세계를 재건하도록 권장했다.[25]
5. 평가 및 영향
오카모토 다로는 20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회화, 조각, 도예, 서예,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형태로 유명하며,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명언은 그의 예술관을 잘 보여준다.
193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며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민족학을 공부하며 원시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51년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조몬 토기를 본 후, 일본 고유의 미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26] 1952년 미술 잡지 『미즈에』에 「사차원과의 대화-조몬 토기론」을 발표하며 조몬 토기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예찬했다.[27]
1970년 일본 만국 박람회의 상징인 태양의 탑은 오카모토 다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높이 70m의 거대한 조형물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오카모토 다로는 "예술은 대중의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대중과 소통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81년 히타치 맥셀의 CM에 출연하여 "예술은 폭발이다!"라고 외친 장면은 큰 화제를 모았으며, 같은 해 유행어 대상 어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55]
198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 오피시에를, 1989년에는 코만되르를 수훈하며 국제적으로도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57][61]
5. 1. 한국과의 관계
오카모토 다로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의 작품과 관련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2011년, 오카모토 다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출신지인 가와사키 시를 연고지로 하는 J리그 소속 가와사키 프론탈레는 유니폼 디자인의 일부로 생전에 제작한 디자인 문자 "도전"을 채용했다.[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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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멕시코의 예술가, 활동가로,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와 나란히 멕시코 3대 벽화가로도 불리며, 1910년의 멕시코 혁명 후, 1920 - 40년대에 일어난 멕시코 벽화 운동의 중심 인물. 벽화 운동은, 종래의 유럽주의적인 예술이 아니고, 멕시코의 선주민이나 민중을 향해서, 루트 회귀나 역사, 사람들의 결속을 호소하는 것이며, 말을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벽화를 본 것만으로 메시지가 전해지도록, 공공의 장소에 그려지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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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らのレリーフ計11点は、1957年に都庁舎が建てられた際、1階正面ロビーや中二階などに設置された。特に、1階正面ロビーの「日の壁」は縦横7×6メートルの壁面を覆い、来庁者がまず目にする「都庁の顔」ともいうべき作品だった。1991年に都庁舎を解体する際、作品の材質や傷みを理由にいったんは廃棄が決まり、太郎も了承したが、瀬木慎一らが反対。最終的に太郎が個人的に引き取ることとなった。(朝日新聞 1991年3月10日 朝刊31面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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駅前で「強烈な存在感」 8000万円かけた岡本太郎作品が鹿沼に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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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沼の緑に魅せられた 岡本太郎の『夢の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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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岡本太郎作品の「こどもの樹」、都が残す方針表明:朝日新聞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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リゾートホテル|星野リゾート 奥入瀬渓流ホテル 【公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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