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르바니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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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85년경에 태어난 아시리아의 왕으로, 에사르하돈의 아들이자 센나케립의 손자이다. 그는 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하며, 이집트와 엘람을 정복하고 아랍 부족들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여 니네베에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을 건설하였으며,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사후 아시리아는 급격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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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르바니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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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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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Aššur-bāni-apli |
별칭 | 아슈르바니팔 2세 (오류), 아슈르바니팔 3세 (오류) |
통치 정보 | |
직함 | 아시리아 왕 슈메르와 아카드 왕 땅의 왕 사방 세계의 왕 우주의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669년 – 기원전 631년경 |
선임자 | 에사르하돈 |
후임자 | 아슈르 에틸 일라니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전 685년경 |
사망 | 기원전 631년 (54세) |
배우자 | 리발리-샤라트 |
자녀 | 아슈르 에틸 일라니 신 샤르 이쉬쿤 니누르타-샤루-우수르 |
왕조 | |
왕가 | 사르곤 왕조 |
부모 | |
아버지 | 에사르하돈 |
어머니 | 에샤라-함마트(?) 또는 아시리아 출신 여성 |
2. 초기 생애 및 즉위
기원전 685년경에 태어난 아슈르바니팔은 에사르하돈의 아들이자 센나케립의 손자였다.[1] 아슈르바니팔은 에사르하돈의 넷째 아들이었으며, 왕세자 신-나딘-아플리와 샤마쉬-슈무-우킨, 샤마쉬-메투-우발리트보다 어렸다.[2] 그는 누나 세루아-에테라트와 여러 명의 남동생을 두었다.[3]
기원전 672년 에사르하돈은 왕실 내분을 우려하여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으로, 이복형제 샴슈-슈무-우킨을 바빌론의 왕으로 임명하고 사후 반역 금지를 맹세하게 했다.[2] 아슈르바니팔은 뛰어난 지략, 수메르와 아카드의 어려운 문자 해독 능력, 사냥, 궁술, 승마 실력을 갖춰 아버지의 신임을 받았다.[2]
기원전 674년 신-나딘-아플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시리아 궁정은 혼란에 빠졌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상속자가 죽은 후, 새로운 계승 계획을 세워,[4] 어린 아들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 황제로, 맏아들 샤마쉬-슈무-우킨을 바빌론 왕(남부 메소포타미아)으로 임명하여 두 사람이 "동등한 형제"로 통치하게 했다.[5] 그는 아슈르바니팔보다 나이가 많은 셋째 아들 샤마쉬-메투-우발리트를 완전히 제쳐두었는데, 아마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을 것이다.[6]
학자들은 아시리아의 단일 통치 전통에서 벗어난 분할된 계승에 대한 에사르하돈의 이유에 대해 추측해 왔다.[7] 이 배치는 어린 동생 아슈르바니팔에 대한 형 샤마쉬-슈무-우킨의 질투심을 달래고 미래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8] 일설에는 아슈르바니팔의 어머니가 아시리아인인 반면 샤마쉬-슈무-우킨의 어머니는 바빌로니아인이어서 그가 아시리아 왕위를 얻는 데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9] 그러나 두 상속자가 어머니를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다.[10]
두 왕자는 기원전 672년 5월,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에 함께 도착하여 외국 대표, 아시리아 귀족 및 군 사령관들과 함께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11] 아슈르바니팔(Aššur-bāni-apli)이라는 이름은 "아수르가 상속자를 창조했다"는 뜻이므로, 아마도 이때 부여되었을 것이다.[12] 이 시기에 아슈르바니팔은 여왕 리발리-샤랏과 결혼했을 것이다.[13]
아슈르바니팔은 왕세자의 궁전인 "계승의 집"에 들어갔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하여 사냥, 승마, 학문과 지혜, 궁술, 전차술 및 기타 군사 기술을 배웠다.[14] 아버지 에사르하돈은 말년에 끊임없이 병을 앓았기 때문에 제국의 행정 업무의 많은 부분이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슈무킨에게 넘어갔다.[15] 이 시기의 두 상속자 간의 서신에 따르면 아슈르바니팔은 제국의 정보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해외에서 전략 정보를 수집하여 아버지에게 보고서를 작성했다.[16]
669년 말 에사르하돈의 죽음 이후,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왕세자 자리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이었다.[17] 그의 주권은 안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의 할머니 나키아는 자쿠투 조약을 작성하여 왕족, 귀족 및 모든 아시리아인들이 아슈바니팔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18] 그러나 아슈르바니팔의 권력 상승에 대한 강력한 반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샤마쉬-슈무킨은 다음 해 봄에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식은 아슈르바니팔이 20년 전에 산헤립에 의해 바빌론에서 훔쳐진 신성한 마르두크 상을 선물한 것으로 기념되었다. 샤마쉬-슈무킨은 16년 동안 바빌론을 통치할 것이며, 동생과 공개적인 갈등 없이 지냈지만 그의 독립의 정도에 대해 반복적인 이견이 있었다.[20]
에사르하돈의 계승 법령은 두 상속자 간의 권력 균형에 대해 모호하게 표현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제국의 주요 상속자였고, 샤마쉬-슈무킨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아슈르바니팔은 샤마쉬-슈무킨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21] 아슈르바니팔은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권력 균형을 바꿨는데, 아마도 진정한 독립이 그의 형에게 그의 통치를 위협할 수단을 제공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22]
3. 통치
기원전 669년 에사르하돈이 이집트 원정 중 하란에서 급사하자, 아슈르바니팔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왕실과 신하의 충성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샴슈-슈무-우킨을 바빌론 왕위에 앉혔다.[2] 기록상 두 왕위는 동등했으나, 아슈르바니팔이 진정한 후계자였다.[2]
샴슈-슈무-우킨과의 관계는 16년간 순탄했지만, 그는 아시리아 피지배민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꾀했다.[2] 아슈르바니팔은 경고와 특별 조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3년간의 군사행동 끝에 반란을 진압했다.[2] 바빌론은 포위되어 굶주림에 시달렸고, 기원전 648년 샴슈-슈무-우킨은 불타는 궁전에서 자살했다.[2] 아슈르바니팔은 도시를 재건하고 독립적 지위를 보장했지만, 칸달라누는 제의적 왕 역할만 허용했다.[2]
아슈르바니팔 연대기에 따르면, 통치 3년(기원전 665년) 리디아 왕 귀게스가 킴메르인 공격을 받자 아슈르 신이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도록 신탁했다.[16] 귀게스는 사자를 보내 킴메르인을 격파하고 수장 두 명을 공물로 보냈다.[16] 이후 귀게스는 아시리아와 단절하고 이집트 프삼티크 1세와 동맹을 꾀했고, 아슈르바니팔은 귀게스를 저주하고 킴메르인 편에 섰다.[16] 기원전 652-650년경 리디아는 킴메르인에게 제압되었고, 귀게스 사후 리디아 왕위를 이은 아들은 아슈르바니팔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6]
말년 기록은 거의 없어 사망 시기는 불확실하다(기원전 631년 또는 627년).[2] 대체로 평온했지만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했고, 그는 두 아들 아슈르 에텔 일라니와 신 샤르 이슈쿤에게 권력을 나누어 공동 통치하게 했다.[2]
3. 1. 이집트 원정
기원전 669년 12월, 에사르하돈이 이집트 원정 중 갑자기 하란에서 죽자,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2] 기원전 667년 쿠시의 왕인 타하르카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슈르바니팔은 군대를 보내 멤피스에서 곧 진압했고 타하르카는 쿠시로 도망갔다.[2] 반란을 도왔던 이집트의 신하들은 모두 니네베로 붙잡아 왔고, 반란은 철저히 진압되었다.[2] 정복지에 그 지역 출신 왕을 세운다는 방침으로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에 네코 1세를 왕으로 세우고 아시리아에 충성을 다짐받았다.[2]
기원전 664년 타하르카가 죽고 그의 조카인 타누타카가 다시 이집트를 침범해 테베를 점령했다.[2] 아슈르바니팔은 이번에도 군사를 보내어 반란을 진압하고 타누타카를 쿠시로 쫓아보냈다.[2] 네코 1세는 전쟁 중에 죽었으며, 아시리아는 다시 프삼메티코스 1세를 이집트의 왕위에 임명했다.[2]
이후 아시리아 군대는 이집트에서 쫓겨났지만, 무역은 계속 유지되었다.[2]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를 도운 티레와 리디아를 징벌하고 아시리아의 영향력을 과시하였다.[3]
3. 2. 엘람과의 전쟁
Ú-ra-áš-tak|우르타크sux[1]는 기원전 665년 엘람의 왕으로, 바빌로니아를 기습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테우만이 엘람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 군주와 관련이 없었고, 정적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켜야 했다.[1] 우르타크의 세 아들은 엘람 왕위의 주요 경쟁자였기 때문에 아시리아로 도망쳤고, 테우만이 그들을 엘람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슈르바니팔은 그들을 보호했다.[1]
665년 엘람과의 승리 이후, 아슈르바니팔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일련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다. 바빌로니아의 감불리안족(아람족) 족장 벨-이키샤는 엘람의 침공을 지원한 혐의로 연루되어 자신의 권한 일부를 포기해야 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2] 이 반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아슈르바니팔이 우루크의 총독 나부-우삽시에게 벨-이키샤를 공격하라고 명령하는 편지가 보존되어 있다.[2] 벨-이키샤의 반란은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는 반란 직후 멧돼지에게 살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63년, 벨-이키샤의 아들 두나누도 아슈르바니팔에게 항복했다.[3]
오랜 평화 시기 이후, 테우만은 653년에 바빌로니아를 공격했다.[4] 아슈르바니팔의 군대는 먼저 남쪽으로 진격하여 데르(수메르)시를 확보했다. 테우만이 아시리아인들을 만나기 위해 진군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엘람의 수도 수사로 후퇴했다. 테우만과의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울라이 전투는 수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엘람 군대의 배신으로 인해 결정적인 아시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테우만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봉신 중 하나인 히달루의 슈트루크-나훈테도 사망했다.[4] 승리 후, 아슈르바니팔은 우르타크의 아들 둘을 통치자로 임명하여 움마니가쉬를 마닥투와 수사의 왕으로, 타마리투 1세를 히달루의 왕으로 선포했다.[4] 이 엘람 왕위 계승에 대한 개입은 아시리아에 대한 엘람의 반대와 엘람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켰다.[5]
전쟁에 엘람인들과 합류했던 두나누는 그의 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감불리안족은 아슈르바니팔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잔혹하게 처벌받았으며, 그들의 수도 샤피벨은 침수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다나누 대신,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 왕에게 상당한 양의 조공을 지불하기로 동의한 리무투라는 귀족을 새로운 감불리안 족장으로 임명했다.[3]
엘람이 내전에서 샤마슈-슈마-우킨을 지원하려는 노력은 데르(수메르) 근처에서 움마니가쉬의 군대가 조기에 패배하면서 거의 끝이 났다. 움마니가쉬의 패배로 인해 그는 엘람에서 타마리투 2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타마리투 2세는 왕위를 차지했다. 움마니가쉬는 아시리아 궁정으로 도망쳐 아슈르바니팔의 보호를 받았다. 타마리투 2세의 통치는 짧았고, 아시리아와의 일부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자였던 총독 나부-벨-슈마티와 함께 기원전 649년에 또 다른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새로운 왕 인다비비는 극도로 짧은 통치를 했고, 아슈르바니팔이 엘람이 샤마슈-슈마-우킨과 그의 다른 적들을 지원한 역할 때문에 다시 엘람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한 후 살해되었다.[5]
인다비비 대신에 훔반-할타쉬 3세가 엘람의 왕이 되었다. 나부-벨-슈마티는 엘람 내의 전초 기지에서 아슈르바니팔에 대항하여 계속 싸웠고, 훔반-할타쉬는 칼데아 반역자를 포기하는 것을 찬성했지만, 나부-벨-슈마티는 이 일이 성사되기에는 엘람에 너무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 훔반-할타쉬는 아슈르바니팔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시리아는 기원전 647년에 다시 엘람을 침공했다. 엘람의 방어가 붕괴된 후, 훔반-할타쉬는 마닥투의 자리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5] 그는 잠시 타마리투 2세에 의해 왕으로 교체되었고, 타마리투 2세는 왕위를 되찾았다. 아시리아가 후제스탄 지역을 약탈한 후 집으로 돌아오자, 훔반-할타쉬는 산에서 다시 나와 왕위를 되찾았다.[7]
아시리아는 기원전 646년에 엘람으로 돌아왔고, 훔반-할타쉬는 다시 마닥투를 버리고, 먼저 도시 두르-운타쉬로 도망친 다음 엘람 동부의 산으로 도망쳤다. 아슈르바니팔의 군대는 그를 추격하며 가는 길에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엘람의 모든 주요 정치 중심지가 파괴되었고, 이전에 엘람 왕에게 조공을 바쳤던 인근 족장들과 소왕국들이 대신 아슈르바니팔에게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 왕국들 중에는 파르수아가 있었는데, 이는 1세기 후에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세워질 제국의 전신일 가능성이 있다.[7] 파르수아의 왕 키루스(아마도 키루스 1세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키루스 대왕의 할아버지)는 캠페인 초기에 엘람과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아루쿠를 인질로 제공해야 했다. 이전에 아시리아와 접촉한 적이 없는 왕국들, 예를 들어 "엘람 너머까지 뻗어 있는" 후디미리라는 왕이 통치하는 왕국도 처음으로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8]
아시리아 군대는 캠페인에서 돌아오는 길에 잔혹하게 수사를 약탈했다. 아슈르바니팔의 승리 기념 비문에는 이 약탈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시리아가 왕실 무덤을 모독하고, 사원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엘람 신들의 조각상을 훔치고 땅에 소금을 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7] 고대 엘람의 수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아슈르바니팔은 대규모로 엘람 정착촌 파괴를 계속했다. 수많은 도시 파괴 외에도, 살해되지 않은 수천 명의 엘람인들이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엘람에 대한 잔혹한 진압은 때때로 집단 학살로 여겨진다.[9]
그 철저하고 잔혹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엘람인들은 한동안 정치적 실체로 존속했다.[11] 아슈르바니팔은 엘람을 합병하지 않고, 대신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12] 훔반-할타쉬 3세는 마닥투에서 통치하기 위해 돌아왔고 (늦게나마) 나부-벨-슈마티를 아슈르바니팔에게 보냈지만, 칼데아는 니네베로 가는 길에 자살했다. 훔반-할타쉬가 얼마 후 반란으로 폐위되고, 체포되어 아시리아인들에게 보내진 후, 아시리아 기록은 더 이상 엘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11] 엘람은 궁극적으로 기원전 646년 아슈르바니팔의 노력에서 완전히 회복할 수 없었고, 주변 지역의 부족과 왕들의 공격에 열려 있었으며, 결국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12]
3. 3. 샤마슈-슈무-우킨의 반란
Šamaš-šuma-ukinakk은 기원전 652년에 아슈르바니팔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전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샤마슈-슈무-킨은 반란 당시 아슈르바니팔에 대한 비방을 바빌론 사람들에게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 시민들에게 샤마슈-슈무-킨의 말을 믿지 말고, 반란에 가담한 죄에 대해 관용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편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서한이 남아있다. 그는 이 서한에서 "이 (우리) 형제가 아닌 자가 너희에게 한 (근거 없는) 바람의 (같은) 말, 나에 관해 말한 모든 말을 나는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이다. 그를 믿지 마라"라고 시작한다. 샤마슈-슈무-킨을 언급하는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샤마슈-슈무-킨이 반란을 일으킨 직후, 다른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그와 함께 아슈르바니팔에 반란을 일으켰다.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에 따르면, 샤마슈-슈무-킨은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 상대를 찾는 데 성공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샤마슈-슈무-킨의 동맹자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칼데아인, 아람인, 기타 바빌로니아인들이다. 둘째는 엘람인이다. 셋째는 구티인, 아무르인(아모리인), 멜루하의 왕들이다. 마지막 그룹의 왕들은 아마도 메디아인을 가리키지만 (구티인, 아무르인, 그리고 멜루하는 이 시점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불확실하다. 멜루하는 이집트일 수 있지만, 이집트는 이 반란에서 샤마슈-슈무-킨을 지원하지 않았다. 샤마슈-슈무-킨이 엘람에 보낸 대사는 선물을 전달했으며 (아슈르바니팔은 이를 "뇌물"이라고 부른다), 엘람 왕 Ummanigašakk는 Undašeakk를 사령관으로 샤마슈-슈무-킨의 반란에 원군을 파견했다.
겉으로는 강력해 보이는 이 동맹이었지만, 샤마슈-슈무-킨의 상황은 기원전 650년까지 어려워졌다. 아슈르바니팔의 군대는 시파르, 보르시파, 쿠타, 그리고 바빌론 자체를 포위했다. 포위 속에서 바빌론은 기아와 역병에 시달렸지만, 결국 기원전 648년 5월경에 함락되어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약탈당했다. 샤마슈-슈무-킨은 궁전에서 분신자살하여 자신과 가족에게 불을 질렀다. 아슈르바니팔은 그의 승리와 샤마슈-슈무-킨의 지지자들에 대한 복수를 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샤마슈-슈무-킨이 패배한 후,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의 새로운 왕으로 칸달라누를 임명했다. 칸달라누는 아마도 아슈르바니팔의 형제 중 한 명일 것이다. 샤마슈-슈무-킨의 영지가 칸달라누의 영지가 되었고, 동시에 아슈르바니팔은 니푸르 시를 확장하여 아시리아의 강력한 요새로 만들었다. 칸달라누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바빌론에서의 그의 통치에 대한 현존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만약 칸달라누가 아슈르바니팔의 형제가 아니라면, 아마 그는 샤마슈-슈무-킨의 반란에서 아슈르바니팔과 결탁한 바빌로니아 귀족이었고, 포상으로 왕좌를 받았을 것이다. 칸달라누는 아마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군사적 실력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아시리아의 손에 확실하게 쥐어져 있었다.
3. 4. 아라비아 원정
레반트와 다른 서부 영토에 대한 아시리아의 관심은 때때로 아랍인 부족 집단이 아시리아 영토를 약탈하거나 무역을 방해하면서 도전을 받았다. 아슈르바니팔은 아랍 부족을 상대로 두 차례 원정을 실시했지만, 그 연대기는 다소 불확실하며, 이 갈등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통치 후반기에 걸쳐 바뀌었다. 아랍 원정은 현대 역사가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아슈르바니팔 자신의 저술에 가장 길고 상세한 기록이 있는 갈등이다.
아슈르바니팔의 아랍에 대한 첫 번째 원정은 샤마슈 슈마 우킨과의 전쟁 전, 주로 케다르인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케다르인에 대한 원정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기원전 649년에 작성되었으며, 하자일의 아들인 야우타, 케다르인 왕이 또 다른 아랍 왕인 아물라딘과 함께 아슈르바니팔에게 반란을 일으켜 아시리아 제국의 서부 영토를 약탈한 방법을 설명한다. 아슈르바니팔의 기록에 따르면 아시리아 군대는 모압의 카마스할타 군대와 함께 반군을 격파했다. 암물라딘은 사슬에 묶여 아시리아로 보내졌지만 야우타는 탈출했다. 야우타 대신 충성스러운 아랍 군벌인 아비야테가 케다르인의 왕권을 받았다. 1년 후에 작성된 이야기의 두 번째 버전에는 아슈르바니팔이 아랍의 여왕인 아디야를 격파했고 야우타가 다른 추장인 나바야테의 나트누에게 도망쳤지만 그가 그를 거절하고 아슈르바니팔에게 충성을 유지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훨씬 더 나중의 이야기 버전에는 야우타가 수년 전에 에사르하돈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 두 기록 모두에서 케다르인 영토는 전쟁이 끝날 때 철저히 약탈되었다.
일부 아랍인 부족 지도자들은 아시리아 내전에서 샤마슈 슈마 우킨에 합류했다. 그중에는 아슈르바니팔 군대에 의해 왕이 된 아비야테와 그의 형제 아야무가 있으며, 이들은 바빌로니아로 병사를 보냈다. 아슈르바니팔이 엘람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에는 보복과 처벌을 면했다. 엘람 전쟁이 질질 끌면서 여러 아랍 통치자들이 아슈르바니팔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인근 아시리아 정착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여 무역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이 발전은 아슈르바니팔의 장군들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주요 원정을 조직하기에 충분했다. 이 갈등에 대한 아슈르바니팔의 기록은 주로 고대 시리아에서 우이아테(야우타와 혼동되지만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음)와 그의 아랍 병사를 찾기 위해 그의 군대가 이동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시리아 군대는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로 행군한 다음 Hulhuliti로 행군한 후 아비아테를 점령하고 우쇼와 아코를 격파했다. 아시리아인들은 이 전쟁 동안 익숙하지 않고 적대적인 지형으로 인해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한다. 이전 원정에서 아슈르바니팔을 도왔던 나바야테는 아랍에 대한 두 번째 전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언급되었지만, 두 원정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이끈 요인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없다. 아랍 서사의 마지막 알려진 버전은 두 원정을 아슈르바니팔의 아홉 번째 원정으로 특정하고 더 많은 세부 사항으로 확장한다. 이 버전에서는 아비아테와 암물라딘이 샤마슈-슈마-우킨에 합류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 버전에서 아슈르바니팔은 또한 처음으로 원정의 승리를 개인적으로 인정받았다.
4. 문화적 업적
아슈르바니팔은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스스로 문자를 해독하고 수학을 이해했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2] 그는 니네베에 고대 중동 최초로 체계적인 도서관을 건설하여 수많은 점토판 문서를 수집하고 보관했다.[2]
이 도서관, 즉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한 중요한 문학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3]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이 도서관을 자신의 통치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비문에서 자신의 지능과 도서관 건설에 대해 자랑했다.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은 세계 최초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도서관이었다. 아슈르바니팔은 서기관들을 제국 곳곳으로 보내 사원 도서관에서 모든 유형과 장르의 텍스트를 수집하고 복사하도록 했다. 수집된 텍스트의 대부분은 사건과 징후에 대한 관찰, 특정 사람과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세부 정보,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텍스트 등이었다. 도서관에는 수메르어, 아카드어 및 기타 언어에 대한 사전과 의례, 우화, 기도 및 주문과 같은 많은 종교 텍스트도 있었다.
오늘날 알려진 대부분의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이야기와 설화는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대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여기에는 ''길가메시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바빌론 창조 신화), ''에라'', ''에타나의 신화'' 및 ''안주의 서사시'' 등이 포함된다. 이 도서관은 민담(예: ''니푸르의 가난한 남자'', ''천일야화''의 이야기 중 하나의 전신), 핸드북 및 과학 텍스트도 포함했다.
5. 말년과 죽음
아슈르바니팔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631년 또는 627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1] 그의 말년에는 아시리아 제국이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그는 두 아들 아슈르 에텔 일라니와 신 샤르 이슈쿤에게 권력을 나누어 공동으로 통치하게 했다.[1]
아슈르바니팔 통치 말기와 그의 아들인 아슈르에틸일라니 통치 초기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2] 기원전 649년 이후의 사건들은 비교적 기록이 적다. 기원전 639년 이후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은 단 두 개만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전 시기의 풍부한 기록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기록 부족은 심각한 내부 정치적 위기를 반영한다.[3] 아슈르바니팔은 귀족 계급에 불이익을 주면서 환관을 요직에 대거 기용했다. 통치 말년에 수석 가수 불루투(Bullutu)는 연호가 되었다.[4]
에크하르트 프람 같은 일부 아시리아학자들은 아슈르바니팔의 말년 통치에 대한 희소한 증거와 아슈르바니팔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로마 문학 전통에서 아시리아의 타락한 마지막 왕인 사르다나팔루스 간의 유사성을 언급했다.[3] 아슈르바니팔 자신은 아시리아 제국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비문 중 하나에서 질병으로 인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제국의 상태를 한탄했다.[5]
아슈르에틸일라니의 비문은 그의 아버지가 자연사했음을 시사하지만,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2] 아슈르바니팔이 살아있었고 왕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마지막 동시대 증거는 기원전 631년에 제작된 니푸르의 계약이다.[6] 아슈르바니팔의 통치가 기원전 627년에 끝났다면, 그의 계승자 아슈르에틸일라니와 신샤리슈쿤의 바빌론의 비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전 626년에 그 도시가 나보폴라사르에게 점령되었고 다시는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7] 그의 계승자들의 통치 기간이 일치하도록 하려면, 아슈르바니팔이 기원전 631년 또는 630년에 사망했거나, 퇴위했거나, 폐위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합의된다.[8] 기원전 631년이 그의 사망 연도로 일반적으로 선호된다.[9]
6. 유산
아슈르바니팔은 센나케립의 손자이자 에사르하돈의 아들로,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다.[4] 그의 통치 기간은 아시리아의 전성기였지만, 사후 아시리아는 급격히 멸망했다.
아슈르바니팔의 치세는 아시리아 군대가 중동 전역에서 원정 활동을 벌인 마지막 시기였다. 그는 엘람을 정복하고 이복형제 샴슈-슈무-우킨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샴슈-슈무-우킨의 패배는 아슈르바니팔의 가장 문제적인 승리였으며, 내전은 아시리아 지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으로 여겨지지만, 일부 학자들은 에사르하돈의 통치를 절정으로 보기도 한다. 아슈르바니팔 사후 아시리아 제국이 빠르게 멸망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의 문화적 업적, 특히 니네베 도서관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이 도서관을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생각했다. 종교, 지침서, 메소포타미아 전통 이야기 등 다양한 장르의 3만 점에 달하는 점토판 문서를 수집하여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고대 문학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아시리아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예술의 후원자로도 여겨진다. 그는 니네베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한 많은 조각과 부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아슈르바니팔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리아 제국 쇠퇴 이후 수세기 동안 근동의 문화적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성경 에스라기 (4:10)에 언급된 "아스나파르"와 동일시되며, 유딧기에서 "느부갓네살"로 가장 일반적으로 식별되었다.[5][6][7] 또한 아슈르바니팔과 다른 고대 아시리아 왕 및 인물들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민속과 문학 전통에 계속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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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東・オリエント文化事典 2020| 中東・オリエント文化事典 2020]], p. 108 「3. 人と言語」(赤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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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senbra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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