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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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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즈미 씨는 일본 규슈 북부 출신으로 서일본의 바다를 항해하는 집단으로, 3세기부터 5세기 초 야마토 시대에 일본 제국의 해군력 역할을 했다. 아즈미족은 중국, 한국과 무역을 했으며, 특히 밤에 항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633년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일본 각지로 흩어졌으며, 이후 황실의 음식 준비를 담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며, 묘진 연못과 호타카 신사, 시카우미 신사 등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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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미씨
개요
위치규슈 북부
민족아즈미족
언어일본어족 또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종교신토
씨족 정보
씨족명아즈미 씨 (阿曇氏, 安曇氏)
씨성아즈미 스쿠네
시조와타츠미 (綿津見命)
출자불명
씨조불명
종별신별 (地祇)
본관지쿠젠 국 가스야 군 아즈미 향
신사 정보
씨족 신시카우미 신사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관련 정보
아마츠미|아마츠미}}

2. 역사

아즈미씨(阿曇氏)는 고대 일본의 유력 씨족 중 하나로, 주로 규슈 북부를 거점으로 활동한 해상 세력이다.[2] 이들은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한반도, 중국 등과 교류했으며,[1][3] 야마토 시대에는 조정의 해상 활동에 깊이 관여하여 사실상 해군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4][5]

고사기』, 『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 사료에도 아즈미씨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며, 이들은 바다의 신 와타츠미의 자손으로 여겨졌다.[21] 씨족의 명칭은 본래 '아즈미(阿曇)'였으나, 731년 이전에 '아즈미(安曇)'로 표기가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21][22]

아즈미씨는 야마토 조정 초기부터 관계를 맺어왔으며, 오진 천황 대에는 해인(海人) 집단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25] 아즈미노 히라후와 같이 백제 구원전에 참전하는 등[25] 조정의 군사 활동에도 참여했으나,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세력이 약화되고 일부는 일본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1] 이들 중 일부는 내륙인 시나노국(현재 나가노현) 아즈미노 지역에 정착하여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10][19]

율령제 하에서는 궁내성의 내선사 장관직을 세습하며 천황의 식사를 담당하는 등[25] 조정 내에서 일정 역할을 유지했으나, 7세기 말 덴무 천황 대를 거치며 중앙 권력과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1][8]

아즈미씨는 해신 '아즈미노 이소라'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1] 이들의 활동 흔적은 시카노시마 섬, 아와지섬, 아즈미노 등 일본 각지에 지명이나 신사 형태로 남아 있다.[1][12][19]

2. 1. 기원과 초기 활동

아즈미족은 일본 남부 규슈 북부 출신의 부족이었다.[2] 이들은 서일본(쓰시마), 한국, 중국의 바다를 항해했던 해상 집단인 "아마"(海人) 중 가장 오래된 집단이자 지도자 격으로 여겨진다.[1] 중국 및 한국과의 무역에 종사했으며, 특히 한반도에서 규슈 북부로 철을 운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 일부 역사가들은 아즈미족을 "일본의 신흥 제국에서 가장 오래 알려진 해상 세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 일본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아족 계통으로 하야토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9][1]

아즈미족은 매우 숙련된 항해사였으며, 해류, 조수 변화, 날씨 및 별자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은 대대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1] 이들의 뛰어난 항해 능력, 특히 야간 항해 능력은 3세기부터 5세기 초까지 야마토 조정에게 매우 유용했고, 사실상 야마토 조정의 해군력 역할을 수행했다.[4][5] 이러한 역할을 통해 아즈미족은 내해 항로, 특히 규슈로 향하는 여러 항로의 통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 아즈미족의 일원인 아즈미노 히라후는 천황이 그와 그의 일행이 머리에 사슴 뿔을 달고 바다에서 헤엄쳐 오는 것을 보고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토 신앙에서 사슴은 신의 사자로 여겨지는데, 이 일화는 아즈미족의 해상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준다.[6]

야요이 시대의 주요 부족 중 하나였던 아즈미족은 '아즈미노 이소라'라는 신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항해 전에 이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아즈미노 이소라는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고 일본 주변의 바다 자체를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다.[1] 아즈미노 이소라는 무로마치 시대에 나타난 와타츠미 3신(소코츠, 우와츠, 오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1]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고기』, 『고사기』, 『일본서기』 등에도 아즈미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사기』에는 "아즈미노 무라지(阿曇連)는 와타츠미의 자식인 우츠시히카네사쿠노미코토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21] 『일본서기』 오진 천황 조에는 "해인(海人)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찬성씨록』에서는 "아즈미노 무라지는 와타츠미노카미(綿津見神)의 아들인 호타카미노미코토(穂高見命)의 후예"라고 전한다.

아즈미씨는 전국의 아즈미부(海部, 해인 집단)를 관장했던 반조(伴造, 특정 직무를 세습적으로 담당하던 가문)로서 유력한 씨족이었다.[24] 그 발상지에 대해서는 지쿠젠국 카스야군 아즈미향·시카향(현재의 후쿠오카시 동부) 설과 아와지섬 설 등이 존재한다.[24] 아즈미씨는 본래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해인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6세기 이후 야마토 왕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씨족으로 통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3] 이들은 야마토 시대 초기에 조정과 접촉하여 중요한 해상 무역로를 제공했으며, 조정의 해상 군사 및 외교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

『일본서기』와 『풍토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오진 천황 3년에는 각지의 해인들이 소란을 피우자 아즈미 무라지의 선조인 오하마노 스쿠네가 파견되어 이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해인의 우두머리(宰)가 되었다고 한다.[25] 이는 아즈미씨가 초기 야마토 정권 하에서 해상 세력을 통솔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보여준다.

2. 2. 야마토 조정과의 관계

아즈미씨는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3세기부터 5세기 초까지 야마토 조정에게 중요한 해상 세력이었고, 사실상 야마토의 해군 역할을 수행했다.[4][5] 야마토 조정은 아즈미씨에게 일본 내해 항로의 통제권을 부여했고,[1]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해군 대장군 직책을 두었다. 아즈미씨의 일원인 아즈미노 히라후는 천황의 눈에 띄어 대장군으로 임명되기도 했다.[6]

일본서기풍토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25], 게이코 천황 시기에는 지쿠시의 츠치구모 토벌에 참여했으며[25], 아즈미노 모모타리는 천황의 명으로 섬을 시찰하여 츠치구모를 붙잡는 등[23][25] 초기부터 야마토 조정과 관계를 맺었다. 주아이 천황 9년, 진구 황후신라 출정을 위해 이소시카의 아즈미족 해인을 정찰에 파견하기도 했다.[25]

오진 천황 3년에는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지 않는 해인들의 소란이 발생하자, 아즈미씨의 선조인 오하마노 스쿠네가 파견되어 이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해인의 재상(海人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5] 일본서기 응신 천황 5년 8월 조에는 해부(海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28], 이 시기에 해인의 재상으로서의 아즈미씨와 해부가 함께 성립된 점을 들어 아즈미씨가 해부의 반조(伴造, 특정 집단을 관리하는 직책)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28] 그러나 아즈미씨가 사료상에서 해인의 재령(宰領, 통솔자)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기록은 스이코 천황 시대에 나타나며[28], 모든 해인을 관장했다기보다는 일부 지역의 해민을 통괄하여 야마토 정권의 지배 체제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8]

리추 천황 즉위 전, 스미요시노 나카노코의 반란 때는 아즈미노 하마코가 아와지섬의 해인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처벌받는 사건도 있었다.[25] 하마코는 사형 대신 얼굴에 먹물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받았고, 이로 인해 문신 새긴 눈을 '아즈미메(阿曇目)'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25] 스이코 천황 31년에는 아즈미노 무라지(이름 미상)가 신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소가노 우마코에게 신라 파병을 촉구했다는 기록도 있다.[25]

아즈미노 히라후조메이 천황백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에는 백제 구원군의 장군으로 참전했다.[25] 다음 해에는 백제 왕자 부여풍장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수군 170척을 이끌고 백제로 건너갔고, 덴지 천황 2년(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5]

율령제 하에서 아즈미씨는 궁내성 소속 내선사(內膳司, 천황의 식사를 담당하는 관청)의 장관(정육위상 상당) 직위를 세습하며 황실의 식사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7][25] 이는 과거 아즈미씨가 황실에 해산물을 공급했던 역사적 역할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7][1]

7세기 말까지 아즈미씨는 야마토 조정의 해상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전쟁 시 주요 동맹 세력으로 활동했다.[1] 그러나 682년 덴무 천황규슈 남부를 침공했을 때, 아즈미씨는 야마토 조정에 직접 맞서지 않고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덴무 천황은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보냈다.[1] 이 행동은 오히려 야마토 조정 내에서 아즈미씨의 충성심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1] 결국 아즈미씨는 8세기 이전에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으로 보인다.[8]

2. 3. 분산과 정착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즈미씨 분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이 전투에서 씨족의 유력 인물인 아즈미노 히라후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25] 패배 이후 아즈미씨의 많은 구성원들은 전통적인 거점이었던 규슈 북부 해협을 떠나 일본 각지로 흩어졌다.[1]

분산된 아즈미씨 중 일부는 기존의 해상 활동을 이어갔지만,[1] 상당수는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다른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정착지로는 내륙인 시나노국 아즈미 군(현재 나가노현 아즈미노시)이 있다.[1][19] 이곳에 정착한 아즈미씨는 주로 농업에 종사했으며,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감사하며 조상 대대로 섬겨온 해신 이소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고유의 신앙을 유지하려 했다.[19] 또한 아즈미 분지에 정착한 이들은 작은 어촌을 이루고 독자적인 언어를 발전시키며 이소라 신앙을 중심으로 생활하여 "바다에 사는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다.[2]

분산 이후에도 아즈미씨는 야마토 조정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율령제 하에서는 궁내성에 속한 내선사의 장관직을 세습하며 천황의 식사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과거 황실에 해산물을 공급했던 역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7][1]

아즈미씨가 내륙인 시나노국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 오바 이와오는 에치고 국 연안에서 히메카와를 따라 비취를 찾으며 거슬러 올라가 아즈미노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4]
  • 미야지 나오이치는 도카이 지방에서 마츠모토 평야를 거쳐 고분 시대 후기 이후에 아즈미노로 진출했다고 보았다.[24]
  • 코아나 요시미는 아즈미씨가 5세기경 왕권을 지지하던 유력 씨족이었으며, 동쪽으로의 확장은 그 이후의 일로, 시나노 정착은 6세기 후반 이전으로는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야요이 시대 이주설을 부정했다.[24]
  • 사사카와 나오키는 아즈미씨의 부곡인 아즈미부가 후에 아즈미 군이 되는 지역 주민 일부로 형성되었으며, 아즈미씨가 소 가 씨와의 관계 속에서 둔창 관리자로 시나노에 파견되었다고 보았다.[24]
  • 마츠자키 이와오는 해상 활동만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이 커져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공납 의무를 지는 부민으로서 아즈미부가 설치되었다고 설명했다.[27]


7세기 말까지 아즈미씨는 야마토 조정의 해상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전쟁에서 중요한 동맹 역할을 수행했다.[1] 그러나 682년 덴무 천황이 규슈 남부를 침공했을 때, 아즈미씨에 대한 야마토 조정의 신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덴무 천황이 아즈미씨에게 보인 온건한 태도는 오히려 조정 내에서 아즈미씨의 충성심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1] 결국 아즈미씨는 8세기 이전에 통치 왕조에 의해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것으로 여겨진다.[8]

아즈미씨가 정착하고 활동했던 지역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아즈미노의 호타카 신사는 이 지역 아즈미씨가 조상신(호타카미노 미코토)과 해신(와타츠미)을 모신 신사로, 내륙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배 모양의 수레(다시)를 사용하는 어선(御船) 축제로 유명하다.[19] 가코지마, 가고시마, 가시마, 시카시마 등의 지명도 아즈미씨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 그 외에도 셋츠 국 니시나리군(아즈미데라 터 추정), 아와지섬(노지마 해인 통솔 기록), 그리고 오키 국, 비추 국, 스오 국, 아와 국, 이요 국 등 서일본 각지에서 아즈미씨 또는 아즈미베가 해산물을 공납했다는 기록은 이들이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활동했음을 보여준다.[24]

3. 분포

아즈미족은 본래 일본 남부 규슈 북부 출신의 부족이었다.[2] 이들은 고대 일본의 아마(海人, 해인) 집단 중 가장 오래된 그룹이자 지도자 격으로, 서일본의 쓰시마를 포함하여 한반도, 중국 대륙 연안까지 항해했다.[1] 중국 및 한반도와 교역했으며, 특히 한반도에서 규슈 북부로 을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 일부 역사가들은 아즈미족을 "고대 일본의 신흥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해상 세력"으로 평가한다.[1]

뛰어난 항해술을 지녔던 아즈미족은 야마토 시대 (3세기 ~ 5세기 초)에 야마토 왕권의 실질적인 해군력으로 활동했다.[4][5] 이들은 세토 내해를 비롯한 주요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해상 방위를 책임졌다.[1]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하쿠스키노에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아즈미노 히라후를 비롯한 아즈미족 다수는 기존의 거점이었던 규슈 북부 해협을 떠나 일본 각지로 흩어졌다.[1] 일부는 전통적인 해상 생활을 유지했지만,[1] 많은 이들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다른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부는 황실의 음식을 준비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7][1]

아즈미씨의 분포는 서일본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주요 거점 및 활동 지역은 다음과 같다.

지역관련 기록 및 내용
규슈 북부발상지, 초기 거점[2]
셋쓰국 (오사카부)오사카시 니시나리구 호리에 지역 (아즈미노 모즈쿠 거주, 아즈미데라 위치 추정)[24]
아와지섬 (효고현)아즈미노 하마코가 노지마 해인 통솔[24]
나가노현 아즈미노일부 일족이 내륙으로 이주하여 정착[10][1] (상세 내용)
오키국, 비추국, 스오국, 아와국, 이요국아즈미씨 또는 아즈미베(阿曇部, 아즈미씨의 예속민)에 의한 해산물 공납 기록[24]



이처럼 아즈미씨는 해인 집단으로서 서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했으며,[24] 일부는 내륙 지역인 나가노현아즈미노 계곡(아즈미 분지)까지 진출하여 정착하기도 했다.[10][1] 오늘날에도 시카노시마(志賀島) 등 아즈미족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으며, 쓰시마 해협의 섬들, 규슈, 시코쿠, 아와지섬 등 이들이 활동했던 지역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1]

3. 1. 시나노국(信濃国)과의 관계

아즈미씨는 해안 지역 외에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의 아즈미노 지역에도 정착하여 그 이름을 남겼다. 일부 아즈미 일족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현재 나가노현에 위치한 아즈미노 계곡 또는 아즈미 분지에 정착하였다.[10][1] 이 지역의 호타카 신사는 아즈미씨가 조상을 모신 오래된 신사로, 해발 3190m의 오쿠호타카다케 산 정상에 영궁(奥宮)이 있다. 신사의 주신(主祭神)은 호타카미노 미코토(穂高見命)이며, 좌전(左殿)에는 와타츠미노 미코토(綿津見命) 등 바다의 신들을 모시고 있다. 내륙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신사의 중요한 제사인 예대제(御船祭)에서는 큰 배 모양의 다시(山車, 축제용 수레)가 등장한다. 이는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 전국으로 흩어진 아즈미 일족의 일부가 시나노국의 아즈미 군(현재 나가노현 아즈미노시)에 정착했다는 전승과 관련이 있다.

시나노국에 아즈미씨가 정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 오바 이와오(大場磐雄)는 지쿠젠국 카스야군(糟屋郡) 아즈미고(安曇郷)·시카고(志珂郷)를 거점으로 한 아즈미씨가 에치고국 쿠비키군(頸城郡)에서 히메카와 강을 따라 비취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아즈미노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24]
  • 사토 유이치(佐藤雄一) 역시 여러 문헌 기록을 근거로 아즈미씨의 발상지가 지쿠젠국 카스야군 시카고 및 인접한 아즈미고 주변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26]
  • 미야지 나오이치(宮地直一)는 아즈미씨 관련 씨족이 산인, 세토 내해, 긴키, 도카이 지방에 분포하지만 중부 지방 동쪽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도카이 지방에서 마쓰모토 평야로 들어온 아즈미씨가 고분 시대 후기 이후 아즈미노로 진출했다고 추정했다.[24]


그러나 야요이 시대에 아즈미씨가 이주했다는 설은 현재 고대사 연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코아나 요시미(小穴芳美)는 아즈미씨가 5세기경 왕권을 지지하던 유력 씨족이었으며, 동일본으로의 진출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분 및 출토 유물의 상황으로 볼 때, 아즈미씨의 시나노 정착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4]

사사카와 나오키(笹川尚紀)는 아즈미씨의 부곡(部曲, 예속 집단)인 아즈미베(安曇部)가 후에 아즈미군이 되는 지역 주민 일부로 구성되었으며, 아즈미씨는 해인을 통솔하고 천황의 식사를 공급하는 직무를 바탕으로 둔창(屯倉, 미야케, 왕실 직할령 또는 창고) 관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누카이(犬養) 지명과 미야케(屯倉) 지명이 가까운 점을 들어, 지쿠마군 카라인누고(辛犬甘郷) 부근에 둔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지쿠마군에 소가씨(蘇我氏)와 관련된 숭가군(崇賀郡)이 보이는 점, 아즈미씨가 소가씨와 깊은 관계였던 점을 들어, 아즈미씨가 소가씨에 의해 둔창 관리자로 시나노에 파견되었다고 결론지었다.[24] 마츠자키 이와오(松崎岩夫)는 해상 생산 활동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공납형 부민(部民)으로서 아즈미베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27]

최근 연구에서는 시나노국과 아즈미씨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6세기 이후 소씨(蘇我氏)가 동일본 지역에 둔창(屯倉) 설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씨와 깊은 관계였던 아즈미씨가 시나노국의 둔창에 파견되어 지역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 결과 후의 아즈미 군 영역에 아즈미베(安曇部)가 설치되었다" (혹은 아즈미씨 자체는 중앙에 머물고 아즈미베만이 시나노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4] 이 견해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아즈미씨는 규슈나 세토 내해 연안에 넓게 분포하는 반면, 동해안에서는 오키국, 가가국 등 일부 지역에서만 확인된다. 반면 동일본에서는 가이국, 시나노국, 미노국 같은 내륙 산악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 이는 동해안의 아즈미씨와 세토 내해 연안의 아즈미씨가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정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특히 동일본의 아즈미씨는 본래의 해양 집단적 성격만으로 이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소씨가 시라이노 둔전(白猪屯倉), 고지마 둔전(児島屯倉) 등을 설치한 사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가쓰라기현(葛城県) 할양 요구 사자로 아베노 마로(阿倍摩侶)와 아즈미무라지(阿曇連, 이름 미상)를 파견한 점 등은 아즈미씨가 소씨와 깊은 관계였으며, 소씨가 아즈미씨를 통해 둔창 경영에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 오키국에서도 소가베(宗我部), 아즈미베, 아마베(海部)가 다수 존재하고, 아마군(해사군, 海士郡)에 미야케고(御宅郷)가 있었으며, 아즈미노 미오(阿曇三雄)라는 인물이 군사(郡司)로 기록되고, 야하라 유적(矢原遺跡)에서 "다베(多倍)"라는 먹글씨 토기가 출토된 점 등은 소씨, 아즈미씨, 둔창 간의 깊은 연관성을 시사한다.
  • 시나노국의 둔창은 문헌상 명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지쿠마시의 야시로 유적(屋代遺跡)에서 "미야케진베(三家人部)", "이시다베(石田部)", "토다베(戸田部)" 등의 글자가 적힌 목간(木簡)이 출토되었다. 또한 야시로 유적 맞은편 사라시나군(更級郡)에는 고시키 조리 유적(更埴条里遺跡)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와묘쇼(和名抄)』에 따르면 사라시나군과 하니시나군(埴科郡)에 존재했던 16개 향(郷)은 시나노국 전체 향(62개)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인구 밀집과 높은 생산력이 추정된다. 따라서 이 경직(更埴) 지역에는 둔창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설치되었다면 『와묘쇼』에 기록된 하니시나군 에이다고(英多郷)가 "아가타고(アガタ郷)"로서 둔창 관련 지명일 수 있다.
  • 시나노국과 마찬가지로 "내륙 동일본"에 아즈미씨가 존재했던 미노국에서도 미야케고(三家郷)가 확인된다.
  • 시나노국 지쿠마군(현재 마쓰모토시)에는 둔창 수비 담당 집단인 이누카이(犬飼) 집단의 일족 신켄칸씨(辛犬甘氏)가 있었고, 같은 군 남부(현재 시오지리시 소가 지구 ~ 마쓰모토시 가미바야시 지구)에는 숭가고(崇賀郷, 소가고(蘇我郷)라고도 기록됨)가 확인된다. 이는 소가씨와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 소씨는 오와리씨(尾張氏)를 둔창 관리자로 삼기도 했는데, 야시로 유적에서도 "오와리베(尾張部)" 목간이 출토되었고, 『와묘쇼』에는 미노치군(水内郡)에 오와리고(尾張郷)가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나가노시 동부에는 "니시오와리베(西尾張部)", "키타오와리베(北尾張部)"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4. 신앙과 문화

아즈미씨는 일본 남부 규슈 북부 출신의 고대 해양 부족이었다.[2]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서일본 연안, 한반도, 중국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1] 특히 야마토 시대 초기 일본 조정의 해상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4][5] 고대 한반도와의 교역에도 관여하여 철 등을 운송했다.[3]

아즈미씨의 문화는 바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바다의 신 '아즈미노 이소라'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해신 신앙을 발전시켰다.[1] 이러한 신앙은 독특한 의례와 춤, 민담 등으로 이어졌으며,[1] 나라가스가타이샤 사슴 숭배와 연관 짓는 시각도 존재한다.[6]

시간이 흐르면서 아즈미씨의 역할과 거주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633년 백강 전투 패배 이후 일부는 흩어져[1] 황실의 음식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7][1] 또 다른 일부는 내륙인 나가노현의 아즈미노 분지 등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10][19] 내륙 정착 후에도 물의 신에게 기도하며 해양 신앙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려 했다.[19]

7세기 말까지 야마토 조정의 해상 세력으로 활동했으나,[1] 682년 덴무 천황과의 관계 변화 등을 겪으며[1] 8세기 이전에 정치적 중심부에서 점차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8]

아즈미씨의 존재는 가고시마, 시카노시마 등 일본 각지의 지명과[1] 시카우미 신사, 호타카 신사 등 여러 신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1][2]고사기』,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등의 고대 문헌에도 아즈미씨의 계보와 활동 기록이 남아 있으며, 와타츠미 신의 자손 등으로 묘사된다. '아즈미(阿曇)'라는 표기는 원래 '아마(海人)'였으나 8세기 초에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21][22]

4. 1. 해신 신앙

야요이 시대의 주요 부족이었던 아즈미씨는 바다를 항해하기 전 안전을 기원하며 신에게 기도하는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이들의 신앙 중심에는 '아즈미노 이소라'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 주변 바다 자체를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졌다.[1]

'아즈미노 이소라'는 무로마치 시대에 나타난 세 와타츠미 신(소코츠, 우와츠, 오진)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 본래 바다를 대표하던 이 세 신이 '이소라'라는 하나의 존재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1] 이소라의 정신은 해마로 상징되며,[13] 순수함의 표상으로서 아즈미 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쳐 영적인 지침을 제공했다.[1]

아즈미씨의 기원과 조상신에 관한 민담 중 "다케미카츠치의 화산탄 출생" 이야기는 신토의 창조신 이자나미이자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일본 열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겪은 시련 후, 이자나기가 부정을 씻기 위해 정화 의식을 행할 때 와타츠미 신과 스미요시 산진이 나타났다.[15] 이 두 신은 아즈미 부족의 조상신으로 여겨지며, 이소라와 함께 항해 기술, 전략 등과 관련하여 아즈미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이 되었다.[16][15]

또 다른 민담은 '이소라' 신의 힘에 관한 것이다. 해저 용궁에 숨겨진 그의 보석이 조수와 날씨를 다스린다고 전해진다. 전복, 따개비, 조개류로 뒤덮인 외모 때문에 모습을 감춘 용궁의 왕룡을 '카구라'라는 춤으로 유인하여, 아즈미 사람들이 바다에 대한 그의 신성한 지식, 즉 '보물'을 얻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1] '카구라'는 '신의 공연'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신토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현재는 신토 기원 설화를 재현하는 가면극 형태로 남아있다.[1][17]

아즈미노 이소라는 "세이노노"(세이노 또는 쿠와시-오라고도 함)라는 춤 의식을 처음 행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1] 이 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중간에 흰 머리 노인으로 묘사되는 신 이소라와 여신 토요가 대화하는 시간이 있다.[14] 네 명의 남성 무용수가 밤에 피리 소리에 맞춰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추는 형태로 묘사된다.[1] "세이노노" 춤은 '카구라'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며,[1] 아즈미노 이소라와의 관계를 기리고 찬양하는 의식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졌다.[1]

또한, 아즈미노 이소라의 첫 추종자로 여겨지는 '우라베 점술사'는 바다 거북의 껍질을 이용해 항해에 안전한 날을 점쳤으며, 이들의 관계는 바다 거북 모양의 신성한 돌 세 개로 상징된다.[1]

약 1000년 전 아즈미씨가 아즈미 분지에 정착했을 때는 물가 근처의 위험을 경고하는 민담도 생겨났다. 강이나 해안에 혼자 있으면 황금 잉어가 물에서 튀어나와 아이들을 낚아챈다는 이야기였다.[2]

고대 문헌에서도 아즈미씨의 해신 신앙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사기』는 "아즈미노 무라지는 와타츠미의 자식, 우츠시히카네사쿠노미코토의 자손"이라 기록했고, 『일본서기오진 천황 조에는 "해인의 종으로 임명되었다"고 나온다. 『신찬성씨록』은 "아즈미노 무라지는 와타츠토요타마히코(와타츠미 신의 다른 이름)의 자식, 호타카미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오늘날에도 아즈미씨 신앙의 흔적은 여러 신사에 남아 있다. 시카노시마 섬 겐카이 만의 신사에는 아즈미노 이소라에게 봉헌된 바다 거북 모양의 신성한 돌과 1,000개가 넘는 사슴 뿔이 보존되어 있다.[1] 북알프스 지역의 호다카 신사는 아즈미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작은 박물관' 역할을 한다.[1] 시카노시마 섬의 시카우미 신사 오키츠구 등은 이소라 숭배와 관련 민담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거점이다.[2]

4. 2. 민속과 전설

아즈미씨는 야요이 시대부터 활동한 주요 부족으로,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 전에 기도하면 안전한 항해를 돕는다고 믿었던 신, '아즈미노 이소라'에 대한 공통된 신앙을 가졌다.[1] 이 신은 아즈미 전통의 중심이며 일본 주변 바다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1] 아즈미노 이소라는 무로마치 시대에 나타난 와타츠미 신(소코츠, 우와츠, 오진)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고도 하며, 이 세 신이 하나의 존재인 이소라로 합쳐졌다는 설도 있다.[1] 이소라의 정령은 해마로 표현되며,[13] 순수의 상징으로 여겨져 아즈미 사람들의 영적 지침이 되었다.[1]

아즈미씨는 항해 전에 바다 신에게 숭배 의식을 행했는데, 이를 통해 바다에서의 통제력과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1] 또한 '세이노노'(세이노 또는 쿠와시-오라고도 함)라는 춤 의식이 전해지는데, 아즈미노 이소라가 처음으로 춘 춤으로 여겨진다.[1] 이 춤은 신 이소라와 여신 토요의 대화가 중간에 포함된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소라는 흰 머리의 노인으로 묘사된다.[14] '세이노노'는 네 명의 남성 무용수가 밤에 피리 소리에 맞춰 추는 춤으로,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가린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 이 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아즈미노 이소라와의 관계를 기리고 찬양하는 의식으로 전승되었다. '우라베 점술사'들은 바다거북 등껍질을 이용해 이 춤을 추며 항해에 안전한 날을 점쳤다고 한다.[1] 바다거북 모양의 신성한 돌 세 개는 아즈미 사람들과 우라베 점술사 간의 관계 및 역사를 상징한다.[1]

아즈미씨와 관련된 첫 민담은 약 1000년 전 그들이 아즈미 분지로 이주했을 때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2] 이곳에서 아즈미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물가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강가나 해안에 혼자 있으면 황금 잉어가 물에서 튀어나와 아이들을 낚아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2]

아즈미 사람들의 기원과 조상신에 관한 민담으로는 "다케미카츠치의 화산탄 출생"이 전해진다. 이는 신토의 신인 이자나미이자나기가 일본 열도를 창조하는 이야기와 연결된다.[15] 창조 과정에서의 실패와 정화 과정에서 아즈미 부족의 조상신으로 여겨지는 와타츠미의 카미와 스미요시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16] 이 두 카미는 이소라와 함께 아즈미 사람들이 항해 기술과 관련하여 숭배하는 신이 되었다.[15]

또 다른 민담은 신성한 신 '이소라'의 힘을 다룬다. 이소라는 해저 용궁에 살며, 그가 가진 숨겨진 보석이 조수와 기상 패턴을 제어한다고 전해진다. 그는 전복, 따개비, 조개류로 뒤덮인 자신의 외모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카구라' 춤(세이노노 춤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추정[1])을 통해 용을 유인하여 그의 '보물', 즉 바다에 대한 신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1] '카구라'는 신토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었으며, 현재는 신토 기원 이야기를 재현하는 가면극 형태로 남아있다.[17]

고대 기록에서도 아즈미씨의 신화적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고기』에 등장하며, 『고사기』에는 "아즈미노 무라(阿曇連)는 와타츠미의 자식, 우츠시히카네사쿠노미코토의 자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오진 천황 조에는 "해인(海人)의 종(宗)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찬성씨록』에는 "아즈미노 무라(安曇連)는 와타츠토요타마히코(綿津豊玉彦)의 자식, 호타카미노미코토(穂高見命)의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아즈미씨를 기리는 여러 신사가 남아 있다. 시카노시마 섬 겐카이 만의 시카우미 신사는 아즈미노 이소라에게 헌정된 대표적인 신사로, 바다거북을 상징하는 신성한 돌과 천 개가 넘는 사슴뿔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소라 숭배와 관련 민담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1][2] 또한 호타카 신사는 아즈미씨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는 '미니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1]

4. 3. 의례와 춤

야요이 시대부터 아즈미족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 전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신에게 기도하는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아즈미노 이소라'라고 알려진 이 신은 아즈미 전통의 중심에 있으며 일본을 둘러싼 바다를 구현하는 존재로 여겨진다.[1]

'아즈미노 이소라'는 무로마치 시대에 나타난 세 와타츠미 신, 즉 底津|소코쓰일본어, 中津|우와쓰일본어, 表津|오진일본어과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고 여겨진다. 한때 일본 주변 바다를 대표했던 이 세 신이 이소라라는 단일 존재로 합쳐졌다는 설도 있다.[1] 이소라의 정신은 해마로 표현되며,[13] 순수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아즈미 사람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영적인 지침을 제공했다.[1]

또한, 아즈미노 이소라는 "세이노노"(세이노 또는 쿠와시-오라고도 함)로 알려진 춤 의식을 처음 수행한 인물로서, 최초의 인간 조상으로 추정된다.[1] 이 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중간에는 신 이소라(흰 머리의 노인으로 묘사됨)와 여신 토요가 나누는 대화 휴식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14] "세이노노"는 네 명의 남성 무용수가 추는데, 두 명은 움직임을 돕는 작은 북을 가지고 있고 두 명은 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네 명 모두 밤에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묘사되었다.[1] 이 춤은 아즈미 부족의 여러 세대에 걸쳐 아즈미노 이소라와의 관계를 탐구하고 그들을 찬양하는 의식적인 방식으로 전해져 내려왔다.[1]

'우라베 점술사'(아즈미노 이소라의 첫 번째 추종자)들은 바다 여행에 안전한 날을 결정하기 위한 관문으로 바다 거북의 껍질을 사용하여 이 춤을 수행했다.[1] 또한, 아즈미 사람들의 우라베 점술사와의 친족 관계와 그들의 역사는 바다 거북 모양의 세 개의 신석으로 상징된다.[1]

다른 민담에서는 그들의 신성한 신 '이소라'의 힘이 언급된다. 아즈미 세대는 이소라가 한때 해저 용궁에 숨겨둔 보석이 조수와 기상 패턴을 제어한다고 전했다. 그들은 궁전에 사는 왕룡(이소라)이 전복, 따개비 및 조개류로 덮인 흉한 외모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카구라' 춤이 용을 유인하여 아즈미 사람들이 그의 끝없는 '보물', 즉 바다에 대한 신성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1] '카구라'는 '신의 공연'으로 직접 번역되며 신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구라'는 "세이노노" 춤과 비슷하거나 동일하며,[1]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지고 이어져 왔다. 현재, 그것은 신토의 기원 이야기를 재현하는 가면극 연극을 포함한다.[17]

오늘날, 아즈미 사람들에게 헌정된 여러 신사가 있다. 시카노시마 섬의 겐카이 만에는 바다 거북을 나타내는 신성한 돌과 신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천 개가 넘는 사슴 뿔이 있는 아즈미노 이소라에게 헌정된 시카우미 신사가 있다.[1][2] 일본 북알프스에는 호타카 신사라고 불리는 또 다른 신사가 있다. 이 의식적인 신사는 아즈미 사람들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헌신하는 '미니 박물관'으로 여겨진다.[1]

5. 유적과 유물

아즈미씨와 관련된 주요 유적과 유물은 일본 각지에 분포하며, 특히 그들의 이동 경로와 정착지를 따라 신사와 관련 장소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나가노현 가미코치의 묘진 연못, 아즈미노시의 호타카 신사, 그리고 후쿠오카현의 시카우미 신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장소들은 아즈미씨의 신앙 체계, 생활 방식, 그리고 역사적 발자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묘진 연못은 아즈미씨의 성소 중 하나로 여겨지며,[18] 호타카 신사는 내륙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해신을 모시고 제례에 배 모형을 사용하는 등 아즈미씨의 해양적 기원을 보여준다. 시카우미 신사는 아즈미씨의 조상신을 모시는 곳으로, 독특한 제례 의식과 사슴 문양 등으로 유명하다.[20][1]

5. 1. 묘진 연못

거울처럼 맑은 묘진 연못의 모습.


일본 가미코치에 위치한 묘진 연못은 아즈미 씨 후손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 있는 장소이다. 연못은 매우 맑고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비추며, 아즈미 씨의 신을 모시는 중요한 성소 중 하나로 여겨진다.[18]

아즈미노 시에 있는 '''호타카 신사'''에서는 매년 물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 지역은 아즈사 강, 카라스 강, 나카부사 강의 물과 가미코치 산에서 녹아내린 눈의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 가미코치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과거 아즈미 씨가 농작물을 기르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9] 이 물을 이용해 일본 사람들은 "오미즈토리"(물을 길어옴)와 "오미즈가에시"(물을 돌려보냄)라는 의식을 행하며, 이 의식을 통해 물이 묘진 연못으로 되돌아간다고 믿는다.[19] 이 축제는 아즈미 씨가 물과의 깊은 관계를 기념하고, 뛰어난 뱃사람이자 농부였던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도움을 주었던 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이다.[1]

오늘날 묘진 연못은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연못의 물은 아즈미 씨의 문화, 전통,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2]

5. 2. 호타카 신사

아즈미 씨는 해변뿐만 아니라 강을 거슬러 내륙의 아즈미노에도 이름을 남겼다. 호타카 신사는 이 지역의 아즈미 씨가 조상을 모신 오래된 신사로, 영궁은 해발 3190m의 오쿠호타카다케 산정에 있다. 신사에서는 주된 제사 신으로 "호타카미노 미코토"를, 좌측 전각에는 "와타츠미노 미코토" 등 해신을 모신다. 내륙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예대제(어선 신사)에서는 큰 배 모양의 다시(산차)가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시가 섬에서 전국으로 흩어진 아즈미 씨 일족의 일부가 시나노국의 아즈미 군(나가노현 아즈미노시)에 정착했다는 전승과 관련이 있다.

5. 3. 시카우미 신사

후쿠오카현에는 아즈미 씨족의 조상 신사로 여겨지는 시카우미 신사가 있다. 이 신사는 아즈미 씨족의 후손인 신관이 주재하며, 격년으로 열리는 ''고진코사이'' 의식은 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20] 신사와 그 의식은 역사적인 아즈미 씨족에게 흔했던 사슴 문양을 사용한다.[1]

참조

[1] 서적 The Sea and The Sacred in Japan Bloomsbury Academic Publishing
[2] 웹사이트 The Azumi Basin in Japan and Its Ancient People http://voices.yahoo.[...] 2011-03-15
[3] 서적 The Spaciality of Awaji Island: An Essay regarding the Place of Gossa-Kaito Archaelogical Site and Environs Gossa Walking Museum
[4] 서적 The Protocol of the Gods: A Study of the Kasuga Cult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5] 서적 Harima Fudoki: A Record of Ancient Japan Reinterpreted, Translated, Annotated with Commentary Brill
[6] 웹사이트 Dealing with Japan's Sacred Deer https://www.patheos.[...] 2017-08-05
[7] 서적 The Protocol of the Gods: a study of the Kasuga Cult in Japanese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 서적 Unlocking the Prehistory of America https://books.google[...] Rosen Publishing Group 2013
[9] 웹사이트 蝦夷とアテルイ http://masakawai.sup[...] 2019-03-26
[10] 웹사이트 Explore Azumino! - Hotaka Shrine https://www.azumino-[...] 2020-04-16
[11] 서적 Wani shi : chūgoku kōnan kara kita watatsumizoku no nagare Aogakishuppan
[12] 웹사이트 The Spaciality of Awaji Island: A Essay regarding the Place of Gossa-Kaito Archaeological Site and Environs http://www.gossa-wal[...] 2020-04-16
[13] 서적 Myths and Legends of Japan Dover Publications
[14] 서적 Supernatural Elements in No Drama University of London
[15] 서적 The Protocol of the Gods: a study of the Kasuga Cult in Japanese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6] 서적 The Dynamics of The Archetypes in Japanese Shinto Mythology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17] 웹사이트 Asian Traditional Theatre & Dance https://disco.teak.f[...] 2018
[18] 웹사이트 Myojin-ike Pond https://www.findnewj[...] 2019-10-03
[19] 웹사이트 Azusa - Nature and Culture Flow as One in the Sacred River http://www.kamikochi[...] 2012-06-12
[20] 웹사이트 Shikaumi Jinja Gojinkosai http://www.dydo-mats[...] 2020-04-16
[21] 서적 田中卓著作集 7 住吉大社神代記の研究 国書刊行会
[22] 서적 穂高神社とその伝統文化 穂高神社社務所
[23] 간행물 阿曇氏に関する予備的考察 山川出版
[24] 서적 古代信濃の氏族と信仰 吉川弘文館
[25] 웹사이트 安曇氏の系譜と歴史 http://azuminorekish[...]
[26] 논문 信濃国の阿曇氏について http://repo.komazawa[...]
[27] 서적 信濃古代史の中の人々 信濃古代文化研究所
[28] 간행물 尾張国造・海部・伴造・屯倉 塙書房
[29] 서적 穂高神社史 穂高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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