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다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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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토다마시(大和魂)는 일본 정신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녀왔다. 헤이안 시대에는 중국 문화를 일본식으로 소화하는 실용적인 능력, 즉 '실무 능력'을 의미했다. 에도 시대에는 국학의 발달과 함께 '모노노아와레'와 같은 일본 고유의 정신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변화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서양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화혼양재'와 연결되어 일본 정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러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가 대두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타국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포함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쇼와 시대에는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돌격 정신을 고취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패전 이후에는 원래 의미에 가까운 일본 문화론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현대에는 일본 민족주의와 관련되어 스포츠 등에서 일본인의 정신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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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다마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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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다마시/야마토 고코로 개요 | |
야마토 다마시 (로마자 표기) | Yamato-damashii |
야마토 고코로 (로마자 표기) | Yamato-gokoro |
와콘 (로마자 표기) | Wakon |
의미 | 일본인의 마음, 정신, 영혼, 기질, 재능 등을 포괄하는 개념 |
기원 및 역사 | |
어원 | 야마토 (大和): 일본의 옛 이름 다마시 (魂): 영혼, 정신 |
유래 |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중기 |
초기 의미 | 일본 고유의 뛰어난 재능과 기질 |
발전 과정 | 가마쿠라 시대 (鎌倉時代) 이후 무사도 (武士道)와 결합하며 용기와 충성심 강조 에도 시대 (江戸時代) 유학자 (儒学者)들에 의해 일본인의 도덕적 이상으로 발전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 국가주의 (国家主義) 이념과 결합하며 애국심 고취 수단으로 이용 |
근대적 의미 | 일본 문화와 정신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民族主義)적 이념으로 변질 |
현대적 의미 | 긍정적 측면: 일본 문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 부정적 측면: 배타적 민족주의 (民族主義)의 잔재라는 비판 |
와콘칸사이 (和魂漢才) | |
와콘 (로마자 표기) | Wakon |
칸사이 (로마자 표기) | Kanzai |
의미 | 일본 고유의 정신 (和魂)과 중국의 학문 (漢才)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상 |
유래 | 일본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와키야스노미야 모로스케 (和気 恭成/wake no miyasukeno morosuke)가 처음 사용 |
목적 |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면서 외래 문물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것 |
중요성 | 일본 문화의 독자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사상 |
참고 용어 | |
야마토 고코로 (大和心) | 야마토 다마시 (大和魂)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 |
와콘요사이 (和魂洋才) | 일본 정신 (和魂)과 서양의 학문 (洋才)을 결합해야 한다는 사상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에 등장) |
보수주의 (保守主義) | 일본 보수주의 (保守主義) 일본의 보수주의 (保守主義)와 관련된 정보 (정치, 사상 등)는 관련 문서 참고 |
비판적 시각 | |
민족주의적 악용 | 과거 일본 제국주의 (日本帝国主義) 시절,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 현재 일본의 극우 세력 (極右勢力)에 의해 배타적 민족주의 (民族主義)를 고취하는 데 사용된다는 비판 존재 |
고정관념화의 위험 | 일본인의 특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고정관념화 (固定觀念化)할 수 있다는 지적 |
시대착오적 개념 | 현대 사회의 다양성과 개방성에 부합하지 않는 낡은 개념이라는 비판 |
2. 역사
야마토다마시(大和魂)라는 말은 헤이안 시대 《겐지모노가타리》의 〈소녀〉 편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당시에는 중국에서 유래한 학문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한재(漢才)'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책상머리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문제에 적용하는 실무 능력이나 판단력을 주로 의미했다. 이후 시대 변화에 따라 야마토다마시의 의미는 계속 변해왔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국학의 발달과 함께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에 의해 불교나 유학의 영향 이전의 일본 고유 정신으로 재해석되었고, 점차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구호 아래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되 일본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나, 점차 국가주의, 제국주의와 결합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희생, 타국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강조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4][12]
특히 쇼와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군국주의 사상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여, 기술이나 물자의 부족함을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고 '돌격정신'을 고무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군국주의적 색채로 인해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이후 일본 문화론 등에서는 본래 의미에 가깝게 재조명되기도 했다.[5][6] 현대에는 주로 스포츠계 등에서 정신력이나 투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 등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7][8][9][10][14][15][16][17][18]
2. 1. 헤이안 시대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일본어)라는 말은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인 《겐지모노가타리》의 〈소녀〉 편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이 시기는 국풍문화가 발달했던 때로, 야마토다마시는 중국에서 전래된 학문이나 지식을 뜻하는 '한재(漢才일본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2][4]《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단순히 일본 고유의 정신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학문(才|zae일본어)을 탄탄히 익힌 바탕 위에서 발휘될 때 야마토다마시(大和魂|yamato-damashii일본어)가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 아니다, 그에게 훌륭하고 탄탄한 지식을 심어주는 것이 안전하다. 중국 학문(才|zae일본어)의 기반이 있을 때, 일본 정신 (大和魂|yamato-damashii일본어)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것이다.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번역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1976, 1:362)
즉, 헤이안 시대의 야마토다마시는 책상머리 지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지식을 응용하는 판단력이나 실무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점차 일본적인 특성을 강조하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일본어)'는 야마토다마시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는데, 헤이안 시대의 시인 아카조메 에몬이 1086년에 편찬된 《고슈이 와카슈》(後拾遺和歌集)에서 처음 사용했다.
또한 '와콘(和魂일본어)'은 야마토다마시의 줄임말로, 1120년경 편찬된 《곤자쿠 모노가타리슈》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중국 고전 지식만 내세우던 학자가 강도에게 살해당한 일화를 소개하며 "기요하라노 요시즈미(清原善澄)는 훌륭한 학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 정신(和魂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고 평가했다. (Carr 1994:283 번역 인용).
이처럼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야마토다마시는 이후 에도 시대 말기까지 문헌 기록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2.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중기 이후 국학이 발전함에 따라 야마토다마시라는 개념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국학자들은 상고 문학 연구를 통해 야마토다마시를 새롭게 해석했는데, 대표적으로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를 한의(漢意, 가라코코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았다[2]. 그는 야마토다마시를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 사물의 정취를 느끼는 감수성), 거짓 없이 솔직하고 올곧은 마음, 그리고 불교나 유학의 영향에서 벗어난 일본 고유의 전통 정신과 연결지었다.에도 시대 후기로 가면서 야마토다마시는 점차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견당사 폐지를 건의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실제와는 다르게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야마토다마시 개념의 변화와 강조는 유학의 심화, 미토학 및 국학의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존황론의 확산과 맥을 같이했으며, 이후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 서양의 지식, 학문, 문화가 대거 유입되면서, 오카쿠라 덴신 등은 이를 일본식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야마토다마시와 함께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화혼한재(和魂漢才)를 본뜬 말로, 서양의 기술 문명은 받아들이되 일본 고유의 정신은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과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내포하고 있었다.[4][12]이후 일본은 열강에 맞설 수 있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유럽을 모방하여 중앙 주권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의 사상(엘란 비탈)과 국민 통제 교육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자유주의적 경향의 교육 정책은 중앙 집권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야마토다마시(일본 정신)'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제국주의가 부상하면서, 야마토다마시는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과 더불어 다른 나라에 대한 배타적이고 확장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 시기 야마토다마시는 일본 정신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용어로 해석되었다.
2. 4. 쇼와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쇼와 시대 초기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더욱 강해져, 야마토다마시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 '돌격정신'을 고무하는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관동군에서는 "포의 부족함은 야마토다마시로 채워라"는 식의 비합리적인 주장이 공공연히 이루어졌으며, 부족한 물자나 기술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방어 강판의 얇음을 야마토다마시로 채운다"는 식의 주장을 예로 들며, 군부가 야마토다마시를 내세워 전차의 기술적 열세와 근대전의 기본 원리조차 외면했던 현실을 비판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야마토다마시는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군인들에게 비합리적인 희생과 맹목적인 돌격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2. 5. 전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직후에는 군국주의와 강하게 연결되었던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의 사용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문화론에서는 본래 야마토다마시가 가졌던 의미, 즉 헤이안 시대에 논의되었던 것처럼 외래의 지식이나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실정에 맞게 응용하는 능력[5]에 가까운 개념으로 다시 주목하고 논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6].헤이세이 이후에도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스포츠계 등에서 정신력이나 투지를 강조하는 의미로 종종 찾아볼 수 있다[7][8][9][10]. 오늘날 야마토다마시는 과거의 군국주의적 색채는 상당히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일본 민족주의나 니혼진론과 관련되어 언급되기도 한다.
2. 6. 헤이세이 시대 이후
헤이세이 이후로도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여러 상황에서 쓰이고 있다.[14][15][16][17][18]3. 의미와 특징
'야마토다마시'(大和魂)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 온 개념이다. 처음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의 문학 작품 《겐지모노가타리》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학문적 지식인 '한재'(漢才)에 대응하여, 현실 문제에 지식을 응용하는 실무 능력이나 분별력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 이는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가 발달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외래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그것을 일본의 실정에 맞게 활용하는 지혜를 강조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 국학이 발달하면서 '야마토다마시'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이 주장한 '한의(漢意, 중국적인 사고방식)'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때부터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사물의 정취를 아는 감수성)'나 꾸밈없는 순수한 마음, 불교나 유학 이전의 일본 고유 정신과 같은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2]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독자성을 내세우는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존왕론의 대두와 근대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 기술을 받아들임)'라는 말이 등장했다.[12] 이는 야마토다마시의 본래 의미를 일부 계승하면서도, 서양 문화를 일본식으로 소화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승리 이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야마토다마시는 점차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 자기 희생, 배타적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비합리적인 정신력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군국주의적 구호로 악용되기도 했다.
패전 후에는 사용 빈도가 줄었으나, 일본문화론 등에서 본래 의미에 가깝게 재조명되기도 했으며[13], 헤이세이 이후 현대에도 스포츠나 대중문화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14][15][16][17][18]
3. 1. 초기 의미 (헤이안 시대)
'야마토다마시'(大和魂)라는 말은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인 《겐지모노가타리》의 〈乙女〉 편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개념은 당시 중요하게 여겨지던 중국의 학문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한재'(漢才, からざえ)에 대응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겐지모노가타리》가 쓰여진 헤이안 시대 중기는 견당사 파견이 중지되고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가 발달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중국에서 들여온 지식과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정도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야마토다마시'는 단순한 학문적 지식(한재)에 대비되어, 배운 지식을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응용하는 능력이나 비판적인 판단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주로 '실무 능력' 이나 '실용적인 지혜' 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중국 학문(才)의 기반이 있을 때, 일본 정신(大和魂)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것"이라고 하여, 외국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탄탄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발휘되는 일본 고유의 실용적 정신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초기 '야마토다마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능력들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었다.[3]
- 세상 물정에 밝아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가는 상식과 현실 대처 능력.
- 전문적인 학문이나 교양, 기술 등을 실제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재능과 수완.
- 중국 등 외래문화와 문명을 접했을 때, 이를 일본의 실정에 맞게 이해하고 대응하는 일본적인 방식이나 마음가짐 (大和心|야마토고코로jpn).
- 지나치게 이론이나 논리에 치우치기보다 감성적인 이해나 인간관계 속에서의 공감을 중시하는 능력이나 감수성. 이는 후에 모노노아와레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처럼 초기의 '야마토다마시'는 후대에 나타나는 호전적이거나 이념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3. 2. 국학에서의 의미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기 이후 국학의 흐름 속에서 상대문자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주창한 한의(漢意)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국학자들은 야마토다마시에 '모노노아와레'(사물의 정취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수성), '의뭉스러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올곧은 마음', 그리고 '불교나 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본 고래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고유의 정신'과 같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2] 이러한 해석은 일본 고유의 정신성을 강조하려는 움직임과 연결되었다.근세까지의 일본에서 '야마토다마시'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3]
- 세상일에 대응하며 사회 속에서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상식과 능력.
- 전문적인 학문, 교양, 기술 등을 사회에서 실제로 활용하는 재능과 수완.
- 중국 등 외래 문화 및 문명과 비교하여 드러나는 일본인 특유의 상식적이고 일본적인 대응 능력 (야마토고코로).
- 지적인 논리나 윤리가 아닌, 감정적인 정서나 인정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능력 및 감수성 (모노노아와레).
- 이러한 능력들의 근본이 되는, 뛰어난 인물이 갖춘 영적인 힘.
- 일본 민족 고유의 용감하고 깨끗하며, 특히 주군이나 천황에 대한 충성스러운 기질 및 정신성.
에도 시대 후기로 가면서 야마토다마시는 점차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존황론의 부상과 함께 근대화로 나아가는 사상적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3. 3. 근대 이후의 의미
메이지 시대에 들어 서양의 지식과 문화가 유입되면서, 오카쿠라 덴신 등은 이를 일본식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화혼한재(和魂漢才)에서 '한(漢)'을 '양(洋)'으로 바꾼 것이다.[12] 화혼양재는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되, 일본의 실정에 맞게 응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야마토다마시의 본래 의미를 일부 포함하면서도 서양 문화에 대한 과도한 수용을 경계하는 태도를 내포했다.이후 구미열강에 맞설 국가 건설을 목표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의 사상(엘란 비탈)과 국민 통제교육이 도입되면서 교육 정책은 자유주의적 경향에서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마토다마시(일본정신)'는 본래 의미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러일전쟁 승리 이후 제국주의가 부상하면서, 야마토다마시는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과 함께 다른 나라에 대한 배타적이고 확장적인 태도를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정신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쇼와 초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더욱 강해져, 현실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돌격 정신을 강조하는 의미가 핵심이 되었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았으나, 이후 일본문화론 등에서는 본래 의미에 가까운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13] 헤이세이 이후에도 야마토다마시라는 말은 스포츠나 종합 격투기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14][15][16][17][18] 현대 일본어 사전들에서는 대체로 '중국 학문에 대비되는 일본 고유의 실무 처리 능력'과 '국가주의/군국주의와 연결된 희생적이고 용감한 정신'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설명된다.
4. 한국의 관점
大和魂|야마토다마시일본어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지만, 그 의미와 사용 방식에는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이 용어가 민족적 우월감을 나타내는 '명백한 운명'이나 '선택된 민족'과 유사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어 사전들은 일반적으로 야마토다마시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의미는 중국 문화(漢才|카라사에일본어)와 대비되는 일본 고유의 실용적인 지혜나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뜻하는 和魂|와콘일본어 또는 大和心|야마토고코로일본어이다. 이는 학문적 지식보다는 실제 생활에서의 경험과 판단력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겐지 이야기에서는 학문적 기초가 없는 '일본 정신'은 실용성이 부족하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두 번째 의미는 근세 이후 국수주의 사상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일본 민족 고유의 정신력을 강조한다. 이는 종종 용맹함(勇猛|유모일본어), 담대함(果敢|카칸일본어), 순수함(清浄|세이죠일본어, 潔い|이사기요이일본어), 그리고 국가나 중요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기희생 정신(身命をも惜しまない|신메이오 모 오시마나이일본어) 등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두 번째 의미는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 시기에 강조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우익 세력에 의해 이용될 소지가 있어 경계가 필요하다.
학자 마이클 카(Michael Carr)는 야마토다마시가 노골적인 인종 비하와는 다르지만, '민족적 아첨'의 성격을 띠며 특정 민족 집단 전체가 고유한 정신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믿음은 지나친 일반화이거나 심하면 인종차별적일 수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일부 사전들이 이러한 특징을 객관적 사실처럼 기술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영어권 사전 중에서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 등이 야마토다마시를 '일본 정신(the Japanese spirit)'으로 정의하며 등재하고 있다. 온라인 신토 백과사전 역시 야마토다마시를 大和魂|야마토다마시일본어로 표기하며, '중국 학습'과 대비되는 일본 고유의 상식적 지혜, 실용적 능력, 그리고 국가를 위한 강인한 정신과 감정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5. 야마토다마시를 소재로 한 작품
(내용 없음)
5. 1. 와카(和歌)
- 무슨 이유로 깨어질 몸이냐 누군가 묻거든 거기에 야마토다마시라 답하노라(何故に砕きし身ぞと人問はばそれと答む日本魂일본어)
:: 다니가와 고도스가가 지은 시로, 호고즈카(反古塚)의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19] 원문은 만요가나로 쓰였다.
- 시키시마의 야마토고코로를 누군가 묻거든 아침해에 풍기는 산벚나무라 하노라(敷島の大和心を人問はば 朝日に匂ふ山桜花일본어)
::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지은 시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모토오리 노리나가 상'의 모델이 된 '육십일세자화자찬상(六十一歳自画自賛像)'에 쓰인 시이다. 이 시는 후대에 담배 상표('시키시마', '야마토', '아사히', '야마자쿠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20] 일본문학보국회가 선정한 '애국 백인일수'에도 포함되었다.[21]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의 여러 부대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2][23] 이는 야마토다마시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연결되면서도, 이후 군국주의적으로 이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 그리하면 그리될 줄 알면서도 부득불 그만두지 못하는 야마토다마시(かくすればかくなるものと知りながらやむにやまれぬ大和魂일본어)
:: 요시다 쇼인이 지은 시이다. 죄인으로 붙잡혀 시모다에서 에도로 호송되던 중, 센가쿠지 앞을 지날 때 읊었다고 전해진다.[24] 이 시는 가와다 준이 선정한 '애국 백인일수'에도 포함되었다.[25]
- 설령 몸은 무사시의 들판에 썩을지라도 남겨두고 싶구나 야마토다마시(身はたとひ武蔵の野辺に朽ちぬとも留め置かまし大和魂일본어)
:: 요시다 쇼인이 남긴 《유혼록》(留魂録)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이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야마토다마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시 역시 일본문학보국회가 선정한 '애국 백인일수'에 포함되었다.[21]
- 시키시마의 야마토고코로를 누군가 묻거든 몽고의 목을 친 도키무네라 하노라(しきしまの大和心を人問はば蒙古のつかひ斬りし時宗일본어)
:: 무라타 세이후가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시를 본떠 지은 시이다.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도키무네를 야마토다마시의 표상으로 내세우며 국가주의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 시는 가와다 준이 선정한 '애국 백인일수'에 포함되었다.[25]
- 그 누구의 몸에도 있음을 모르고 갈팡대누나 신이 남겨주신 야마토다마시(誰が身にもありとは知らでまどふめり神のかたみの大和魂일본어)
:: 노무라 모토니가 지은 시로, 가집 《향릉집》(向陵集)에 수록되어 있다.[26] 야마토다마시가 신에게서 비롯된 고유한 정신임을 강조한다. 이 시는 가와다 준이 선정한 '애국 백인일수'에 포함되었다.[25]
- 무사의 야마토고코로를 한데 뭉치어 단 한줄기 대승(大繩)으로 화하라(もののふの大和心をよりあはせ末ひとすぢの大繩にせよ일본어)
:: 노무라 모토니의 시로, 가집 《향릉집》에 수록되어 있다.[26] 무사들의 야마토다마시를 하나로 모아 강한 힘을 만들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 부운이 떠 있더라도 무사의 야마토고코로의 하나가 될 수 있다면야(浮雲のかかるもよしやもののふの大和心のかずにいりなば일본어)
:: 노무라 모토니가 후쿠오카번으로부터 자택 근신 명령을 받았을 때 지은 시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사로서 야마토다마시를 지키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 몸은 이끼 아래 썩을망정 야마토다마시가 장맛비의 이슬로 사라질쏜가(身は苔の下に朽つとも五月雨の露とは消えじやまと魂일본어)
:: 시모노 간페이의 시로, 《근왕전》(勤王傳)에 수록되어 있다.[27] 육신은 사라져도 야마토다마시는 영원히 남는다는 불멸성을 노래한다.
- 일본의 야마토고코로의 덧거친 바닷가에 깨어져 돌아가는 먼바다의 흰물결(日本のやまと心のあらいそにくだけて歸れ沖ノ白浪일본어)
:: 이노우에 후미오의 시로, 《조학집》(調鶴集)에 수록되어 있다.[28] 야마토다마시의 강인함을 거친 바다와 파도에 비유하였다.
- 해 뜨는 곳의 야마토고코로의 흔들림없는 증표는 후지의 고령일레라(日の本のやまと心の動きなきしるしは富士の高根なりけり일본어)
:: 이노우에 후미오의 시로, 《조학집》에 수록되어 있다.[28] 후지산을 야마토다마시의 굳건함과 영원함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 미늘창의 길 험할지언정 나아가는 야마토고코로의 말 끊임이 없으리(玉鉾の道はあれても進み行くやまと心の駒はたゆまじ일본어)
:: 구로사와 도기의 시로, 《흥풍집》(興風集)에 수록되어 있다.[26]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야마토다마시의 기상을 표현했다.
- 무사의 야마토고코로 갈고닦아 찬 태도에 맑게 깃들은 달이여(武士のやまと心をとぎて佩く太刀のさやかにすめる月かな일본어)
:: 오고 가즈토시의 시로, 《유방첩》(遺芳帖)에 수록되어 있다.[29] 잘 벼린 칼과 맑은 달빛에 비추어 무사의 순수하고 강인한 야마토다마시를 묘사했다.
5. 2. 수필
-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글 애국심에서 야마토다마시에 대한 관점을 드러냈다.
- 전위예술가이자 작가인 아카세가와 겐페이 역시 야마토다마시라는 제목의 수필을 남겼다.
- 브라질 출신의 귀화 축구 선수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도 같은 제목의 수필 야마토다마시를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했다.
참조
[1]
논문
Études Anciennes et Études Nationales dans le Japon du XVIIIème siècle : la Nature, l'Artifice et le Mal chez Ogyû Sorai et Motoori Norinaga
https://www.persee.f[...]
1994
[2]
서적
大和魂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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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例えば[[千葉工業大学]]の歴史の講義でも「大和魂」については同様の事柄について教えられている
[4]
서적
和魂漢才
2011-11
[5]
문서
多くは「日本文化は、外来文化を独自に、実際的に消化したものだ」という趣旨の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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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6月24日(金)
講談社
1955-11
[7]
뉴스
豪栄道 大関昇進決まる、伝達式口上は「大和魂を貫いてまいります」
https://www.sponichi[...]
2015-07-16
[8]
뉴스
K1渡部「大和魂で戦う」繰り上げ出場で気合い
https://www.nikka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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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2日本が快勝!リオ五輪へ「大和魂」(1/2ページ)
https://www.daily.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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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2日本が快勝!リオ五輪へ「大和魂」(2/2ページ)
https://www.daily.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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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わ‐こん【和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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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24日(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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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寺島しのぶさんが男児出産「大和魂、大和の美しさ忘れない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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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栄道 大関昇進決まる、伝達式口上は「大和魂を貫いてまい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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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논문
百人一首と佐佐木信綱・愛国百人一首前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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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典社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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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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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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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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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古典全集刊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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尽忠報国歌集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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