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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렐무스 티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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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렐무스 티렌시스는 1130년경 예루살렘 왕국에서 태어난 성직자이자 역사가이다. 그는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아크레의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 티레의 부제, 티레 대주교를 역임했다. 윌렐무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와 제1차 십자군을 다룬 23권의 라틴어 연대기인 《역사》를 저술했으며, 이 작품은 십자군 국가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 편견과 오류를 보이기도 했지만, 중세 시대의 뛰어난 역사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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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윌리엄은 십자군 시대인 1130년경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5] 그의 부모는 프랑스이탈리아 출신의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되며,[3][4] 그는 우트르메르(십자군 국가)에서 태어난 2세대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예루살렘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뒤,[6] 1145년경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 볼로냐 등지에서 약 20년간 자유 교양, 신학, 법학 등 당대 최고의 학문을 수학했다.[8][11][12] 이는 그가 십자군 국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지식인들과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1165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윌리엄은 뛰어난 학식과 현지 출신이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직자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아크레의 참사회원을 시작으로[13] 1167년 티레의 부제장이 되었고,[14] 아말리크 국왕의 신임을 얻어 외교 사절로 활동하기도 했다.[15] 1170년경에는 왕자 발두인의 가정교사가 되어 그의 나병을 처음 발견했으며,[17][18] 왕국의 역사서 집필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174년 발두인 4세가 즉위하자 윌리엄은 왕국의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1175년에는 티레 대주교로 선출되어[22] 왕국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이끄는 토착 귀족 파벌과 가까웠으며,[19] 이는 왕모 아그네스가 중심이 된 궁정 파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1180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거에서 유력한 후보였으나, 아그네스의 영향력으로 인해 헤라클리우스에게 밀려 낙선했다.[27]

이후 정치 일선에서는 다소 멀어졌으나, 티레 대주교직을 유지하며 역사서 집필에 몰두했다.[28] 그의 주요 저작인 《해외 영토에서 일어난 일들의 역사》(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는 제1차 십자군부터 당대까지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윌리엄은 왕국의 내부 분열과 살라딘의 위협 속에서 조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며 글을 썼고,[29] 1186년 9월 29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0][31] 그의 우려대로 이듬해 왕국은 하틴 전투에서 참패하고 예루살렘살라딘에게 빼앗기게 된다.[3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130년경 ~ 1165년)

1165년 십자군 국가


윌리엄은 1130년경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5] 그의 가족은 프랑스이탈리아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며,[3] 왕국에 정착한 부유한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 그의 부모가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이후에 도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윌리엄에게는 랄프라는 이름의 형제가 적어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도시의 부르주아, 즉 상인 공동체의 비귀족 지도자였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1165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사실 외에는 더 알려진 바가 없다.[5]

어린 시절 윌리엄은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교 교사였던 피사의 존(John of Pisa)은 윌리엄에게 읽고 쓰는 법과 라틴어를 가르쳤다.[6] 그의 저술인 ''역사''를 통해 그가 프랑스어와 어쩌면 이탈리아어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를 배웠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다.[7]

1145년경, 윌리엄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볼로냐 등지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도시들은 "12세기의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지적 중심지"였다.[8] 당시 이 학교들은 아직 공식적인 중세 대학교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미 예술과 과학 분야의 많은 학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학교들은 대성당 학교와는 별개로, 각 분야의 권위 있는 독립적인 교수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유럽 전역의 학생들이 이들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9]

윌리엄은 파리오를레앙에서 약 10년간 자유 교양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스승 중에는 샤르트르의 티에리와 포레의 길버트의 제자들이 있었으며, 멜런의 로버트와 파르보 폰테의 아담 등에게서도 배웠다. 고전 연구의 중심지였던 오를레앙에서는[10] 오를레앙의 힐러리와 함께 고대 로마 문학(당시에는 단순히 "저자들"로 불림)을 읽고, 윌리엄 오브 수아송에게서는 수학(특히 유클리드)을 배웠다. 이후 6년간 피터 롬바드와 술리의 모리스에게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 볼로냐로 가서 시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했으며, 당시 유명했던 "볼로냐의 4명의 박사"인 휴고 데 포르타 라베나테, 불가루스, 마르티누스 고시아,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1] 윌리엄이 수학한 스승들의 명단은 소위 12세기 르네상스의 주요 문법학자, 철학자, 신학자, 법학 교수들을 거의 망라하며,[12] 그가 당시 유럽의 어떤 성직자 못지않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동시대 인물인 솔즈베리의 존 역시 다수의 동일한 스승들에게서 배웠다.[12] 그의 유럽 유학은 약 20년간 이어져 1165년경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2. 2.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활동 (1165년 ~ 1186년)

1165년 성지로 돌아온 윌리엄은 아크 대성당의 캐논이 되었다.[13] 유럽에서 교육받은 현지 출신 인재가 드물었기에 그는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1167년에는 티레 대주교 프레데릭 드 라 로슈와 아말리크 국왕의 지지를 받아 티레 대성당의 부제로 임명되었다.[14]

당시 아말리크 국왕은 이집트 정복을 추진하고 있었다. 동쪽의 이슬람 영토가 강력한 잔기 술탄 누르 앗딘의 통제하에 들어가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남서쪽의 약화된 파티마 왕조 이집트로의 확장을 모색했다.[15] 1168년 아말리크는 윌리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비잔티움 제국과의 연합 이집트 원정을 위한 조약을 마무리하도록 했다.[15] 이 원정은 비잔티움 해군의 지원을 받은 첫 시도였으나, 결국 살라딘에 의해 이집트에서 밀려나게 된다.[15]

윌리엄은 왕국 내에서 계속해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1169년 로마를 방문했으며,[16] 1170년 귀국 후에는 아말리크 국왕으로부터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임무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발두인 4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18] 윌리엄은 어린 발두인이 친구들과 놀던 중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병의 초기 증상을 발견하게 된다.[17][18]

중세 필사본의 축소판 그림으로, 두 패널로 나뉜다. 왼쪽 패널에는 몇몇 소년들이 놀고 있고, 팔에 상처가 보인다. 오른쪽 패널에는 한 남자가 소년 중 한 명의 팔에 있는 상처를 검사한다.
윌리엄이 발두인 4세의 나병 초기 증상을 발견하는 모습 (윌리엄의 ''Historia'' 프랑스어 번역본 ''L'Estoire d'Eracles'' 삽화, 13세기). ''영국 도서관, 런던''.


1174년 아말리크 국왕이 사망하고 어린 발두인 4세가 즉위했다. 같은 해 누르 앗딘도 사망하면서 그의 장군이었던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왕국 내부는 발두인 4세의 모후 아그네스를 중심으로 한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중심으로 한 '귀족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궁정파는 주로 유럽에서 새로 온 인사들로 구성되어 살라딘과의 강경한 전쟁을 선호했고, 귀족파는 왕국의 토착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이슬람 세력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했다. 윌리엄 자신은 역사 기록에서 이러한 구도를 제시했는데, 귀족파의 레몽 3세와 정치적으로 가까웠기에 그의 서술이 편향되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19] 최근의 연구들은 이러한 분열을 토착 귀족과 외부 세력 간의 갈등보다는 왕의 모계와 부계 친족 사이의 왕조적 투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0]

플랑시의 마일이 잠시 섭정을 맡았으나 1174년 암살당했고,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새로운 섭정이 되었다.[21] 레몽 3세는 윌리엄을 예루살렘 재상 및 나사렛의 부제로 임명했으며, 1175년 6월 6일에는 티레 대주교로 선출되도록 지원했다.[22] 윌리엄은 재상직보다는 대주교로서의 직무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1177년에는 몬페라토의 윌리엄과 시빌라의 장례식을 집전하기도 했다.[23]

1179년 윌리엄은 예루살렘 총대주교 네슬의 아말리크를 대신하여 카이사레아 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요시우스 등 다른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로마에서 열린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24] 공의회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명으로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1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이후 안티오키아 공국 관련 임무를 수행한 뒤 1180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25]

윌리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예루살렘에서는 나병으로 인해 후사를 보기 어려운 발두인 4세의 후계 문제가 정치적 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특히 왕의 누이이자 몬페라토의 윌리엄 사후 과부가 된 시빌라의 재혼 상대를 두고 궁정파와 귀족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180년 부활절,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가 이벨린의 보두앵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왕모 아그네스와 발두인 4세는 시빌라를 푸아투 출신의 신참 귀족 뤼지냥의 기와 결혼시켰다.[26]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1180년 10월 예루살렘 총대주교 네슬의 아말리크 사후 후임자 선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은 유력한 후보였으나, 궁정파의 핵심 인물인 아그네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카이사레아의 헤라클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윌리엄은 이 선거 결과와 헤라클리우스에 대해 자신의 역사서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깊은 실망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27]

중세 필사본의 미니어처 그림. 말 탄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불타는 성을 지나가고 있다. 성은 해안에 있으며, 물에는 배가 있다. 그림 위와 아래에 텍스트가 있다.
살라딘이 도시를 불태우는 모습, 윌리엄의 ''Historia'' 프랑스어 번역본 삽화


총대주교 선거 패배 이후에도 윌리엄은 티레 대주교이자 왕국의 재상직을 유지했지만, 정치적 중심에서는 점차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교회 관련 직무와 역사 저술에 집중했으며, 1184년까지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역사서 후반부는 살라딘의 군사적 위협과 왕국 내부 분열로 인해 점증하는 위기감과 암울한 전망을 담고 있다.[29] 후대 기록에는 헤라클리우스가 윌리엄을 파문했으며 로마에서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정치적 반대파였던 후대 역사가들의 근거 없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28] 윌리엄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 1186년 9월 29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0][31]

윌리엄이 깊이 우려했던 왕국의 불행은 현실이 되었다. 그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187년, 살라딘하틴 전투에서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 주력군을 섬멸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으며 티레를 제외한 왕국의 거의 모든 도시를 점령했다.[32]

3. 《역사》(Historia)

윌렐무스 티렌시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그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보통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해외에서 이루어진 사적의 역사lat, Historia Ierosolimitana|예루살렘의 역사lat, 또는 단순히 Historia|역사lat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61] 윌렐무스 자신이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역사서는 1170년1184년 사이에 라틴어로 쓰인 연대기로,[36] 총 2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23권은 1183년1184년 초의 사건을 다루지만 서문과 한 개의 장만 남아 있어 미완성 상태이거나 일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37] 책의 내용은 7세기 시리아의 무슬림 정복부터 시작하지만, 주로 제1차 십자군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를 다룬다.[36][37]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양한 연대기, 공식 문서,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 등을 활용했다.[40]

윌렐무스의 사후, 이 《역사》는 십자군 국가와 유럽에 전해져 후대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59] 라틴어 원본은 1549년 바젤에서 처음 인쇄되었고, 이후 여러 판본을 거쳐 1986년 R. B. C. 하위건스가 편집한 비평판이 표준 판본으로 인정받고 있다.[62] 1943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63]

윌렐무스는 《역사》 외에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대한 기록과 무함마드 시대부터 1184년까지의 성지 역사를 다룬 책을 저술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두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67]

3. 1. 내용 구성

윌렐무스 티렌시스는 1130년경 십자군 제2세대로서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 또는 이탈리아 출신의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는 보두앵 3세와 함께 공부했다. 이후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서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165년 예루살렘 왕국으로 돌아와 아크레의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이 되었다. 이후 티레의 부제장이 되었고, 왕국의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1170년에는 보두앵 4세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보두앵 4세가 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1174년 보두앵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윌렐무스는 왕국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고, 1175년에는 티레 대주교가 되었다. 1177년에는 병든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대신하여 몬페라토 후작 기욤의 장례식을 집전하기도 했다. 1179년에는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여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180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유력한 차기 예루살렘 총대주교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 왕국 내 궁정파와 귀족파 간의 파벌 싸움에 휘말렸다. 귀족파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지지자로 여겨졌던 윌렐무스는 궁정파의 핵심 인물인 왕의 어머니 아녜스의 견제를 받아 총대주교로 선출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티레 대주교직을 유지하며 역사 기록에 힘썼으나, 1186년에 사망했다.

그의 주요 저작은 총 23권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왕국 연대기이다. 이 책은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해외에서 이루어진 사적의 역사lat, Historia Ierosolimitana|예루살렘의 역사lat, 또는 단순히 Historia|역사lat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용은 십자군 이전의 시리아 역사에서 시작하여 제1차 십자군예루살렘 왕국의 성립 과정을 거쳐, 그가 활동했던 118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의 저작에서는 왕의 어머니 아녜스를 비롯한 궁정파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가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출 문제 등으로 궁정파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3. 2. 사료와 역사 서술

윌렐무스의 주요 저작은 1170년에서 1184년 사이에 라틴어로 쓰인 연대기,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해외에서 이루어진 사적의 역사lat 또는 Historia Ierosolimitana|예루살렘의 역사lat, 혹은 단순히 Historia|역사lat로 알려진 작품이다.[36] 총 2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책은 1183년과 1184년 초의 사건을 다루지만 서문과 한 개의 장만 남아 있어 미완성이거나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첫 권은 7세기 우마르의 시리아의 무슬림 정복으로 시작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제1차 십자군의 등장과 그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정치사를 다룬다. 연대기 순서로 배열되었으나, 집필 순서는 달라서 1167년 이집트 침공에 대한 장들이 가장 먼저 상세하게 쓰였으며, 이는 파티마 왕조가 멸망하기 전인 1171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내용은 윌렐무스가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기 전에 완성되었지만, 1180년 귀국 후 유럽 독자들의 관심을 고려하여 새로운 내용 추가와 수정이 이루어졌다. 1184년에는 서문과 23권의 시작 부분을 작성했다.[37]

윌렐무스는 역사 서술을 위해 다양한 자료를 활용했다. 오거스트 C. 크레이는 윌렐무스가 1154년 보두앵 3세가 난파선에서 약탈한 다마스쿠스 외교관 우사마 이븐 문키드의 도서관 자료를 아랍 출처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했다.[38] 그러나 앨런 V. 머레이는 윌렐무스가 페르시아와 튀르크 관련 기록에서 실제 역사보다는 성경이나 중세 초기 전설에 더 의존했으며, 그의 지식은 동방 민족에 대한 이해보다는 서방의 신화적 관점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39] 그는 풀처 오브 샤르트르, 아익스의 알베르트, 아귈레의 레이먼드, 돌의 발드릭, 그리고 ''게스타 프랑코룸'' 등 제1차 십자군 관련 연대기들과 왕국의 기록 보관소 문서들을 참고했다. 안티오크 공국의 역사를 위해서는 재상 월터의 기록 등 현재는 소실된 자료들을 활용했다. 1127년 풀처의 연대기가 끝난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윌렐무스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유일한 정보원으로, 동시대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을 목격한 연장자들을 인터뷰하거나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했다.[40]

윌렐무스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노력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 작품에서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난관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의 흐름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는 왕들의 성격, 삶, 개인적인 특성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을 이 연구에 포함시켰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칭찬할 만한 것이든 비판의 대상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 우리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한, 전염병처럼 이 두 가지 비난(거짓말쟁이 혹은 질투심 많은 사람)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35]

그의 고전 교육 배경 덕분에 당시 많은 중세 작가들보다 뛰어난 라틴어 문체를 구사했으며, 고대 로마 및 초기 기독교 작가들의 글을 인용하거나 구성의 영감으로 삼았다.[41] 그의 어휘는 대부분 고전적이지만, "loricator"(갑옷 제작자, 아랍어 'zarra'의 직역)나 "assellare"(배변하다)와 같은 중세적인 표현도 일부 사용했다.[42] 그는 능숙한 말장난과 수사 기법을 사용했지만, 특정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는 경향도 보였다. 그의 라틴어는 순수한 고전 라틴어에서는 드물지만 중세 라틴어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여준다.[43]

  • 재귀 대명사와 소유 대명사의 혼동
  • 전치사 'in' 뒤에서 대격탈격 사용의 혼동
  • 라틴어 이중모음 'ae', 'oe'를 'e'로 축약하여 표기
  • 여격 'mihi'(나에게)를 'michi'로 표기
  • 단일 's'를 이중으로 표기 (예: 형용사 지명 어미 '-ensis'를 '-enssis'로 표기). 이 방식은 라틴어에 없는 아랍어 'sh' 소리를 표기하는 데도 사용됨 (예: 샤와르를 'Ssauar'로 표기).


윌렐무스의 역사 서술은 방대한 자료와 뛰어난 문체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출 과정에서 왕모 아녜스 등 궁정파와 대립했으며, 그의 후원자였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등 귀족파 인물들과 가까웠다. 이 때문에 그의 저작에서는 궁정파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나타나므로,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기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3. 역사관과 정치적 입장

수염이 긴 기사의 조각상. 그는 가시 면류관과 정교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그는 왼손에 칼을 들고 있고 오른 다리에 방패가 기대어져 있다.
16세기 청동 조각상 고드프루아 드 부용. 호프키르헤, 인스브루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기념비를 둘러싼 영웅 그룹에 속한다. 윌리엄 시대에 고드프루아는 제1차 십자군의 영웅적인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그의 힘과 미덕은 전설이 되었다.


윌렐무스는 기독교 작가로서 성경과 다른 기독교 문헌을 인용했지만, 역사 서술에 있어 인간사에 대한 신의 직접적인 개입을 크게 강조하지 않아 비교적 "세속적인" 관점을 보여준다.[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에는 제1차 십자군과 관련된 전설적인 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에도 제1차 십자군 시대가 위대한 기독교 영웅들의 시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알베르 드 엑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은자 피터가 제1차 십자군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심지어 교황 우르바노 2세보다 먼저 십자군을 구상했다고 서술하기까지 했다.[45] 예루살렘 왕국의 첫 통치자였던 고드프루아 드 부용 역시 처음부터 십자군의 지도자로 묘사되었고, 윌렐무스는 그에게 전설적인 힘과 미덕을 부여했다. 이는 12세기 후반 예루살렘 주민들 사이에서 고드프루아를 비롯한 제1차 십자군 참가자들이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분위기를 반영한다.[46]

당대 왕들에 대한 윌렐무스의 평가는 더 복합적이다. 그는 아말릭 1세의 요청으로 역사를 저술했다고 밝혔지만, 왕을 무조건적으로 칭송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아말릭이 교회의 권리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으며,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말릭의 학식과 역사 및 법률에 대한 관심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외모("허리까지 늘어진 여성의 가슴과 같은" 가슴)에 대해 언급하거나[47] 왕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표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48]

반면, 아말릭의 아들 보두앵 4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49] 보두앵은 나병으로 쇠약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졌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에 맞서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고 묘사된다. 윌렐무스는 보두앵이 직접 지휘하지 않은 작전은 간략하게 넘어가고, 그의 칭찬을 주로 고통받는 왕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50] 윌렐무스의 역사는 왕국, 특히 보두앵의 통치를 변호하는 일종의 ''옹호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1170년대와 1180년대 서유럽에서는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지원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는 지리적 거리와 유럽 내부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나병이 신의 형벌로 여겨졌던 편견 때문이기도 했다.[51]

윌렐무스는 성전 기사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기사단이 세속 권력과 교회의 위계질서를 모두 무시하며 오만하다고 보았다. 성전 기사단은 십일조 납부 의무가 면제되었고, 법적으로 오직 교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윌렐무스는 성전 기사단의 실제 창설 과정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후 글을 쓰면서 초기에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당대에 그들이 누리던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에는 분개했다.[52] 그는 성전 기사단이 1153년 아스칼론 포위전을 방해했고, 1165년에는 동굴 요새 방어에 실패하여 12명의 기사가 아말릭 왕에게 처형당했으며, 1168년 이집트 침공을 방해하고, 1173년에는 암살자 사절단을 살해했다고 비난했다.[53]

12세기 다른 라틴 작가들과 비교할 때, 윌렐무스는 비잔틴 제국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인 시각을 보인다. 그는 공식 사절로서 비잔틴 궁정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다른 라틴 연대기 작가들보다 비잔틴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1차 십자군 당시 형성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공유했지만, 십자군이 알렉시우스와 맺은 일부 협약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54] 그는 알렉시우스의 아들 요한 2세 콤네노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요한이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을 비잔틴의 지배하에 두려 한 시도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리스인과 라틴인 공동의 적인 이슬람 세력에 대한 군사 원정은 칭찬할 만하다고 여겼다.[55] 콘스탄티노플 방문 중 만났던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는 아말릭 왕처럼 복합적으로 묘사된다. 윌렐무스는 개인적으로 그를 존경했지만, 제국이 누르 앗딘과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도울 힘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식했다. 특히 1169년 이집트에 대한 공동 군사 작전의 실패에 실망감을 표했다. 그의 역사서 ''Historia''의 마지막 부분은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 학살과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의 쿠데타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와 맞물리는데, 이 사건들을 묘사하면서 서유럽 자료에서 흔히 발견되는 극단적인 반-그리스 수사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6]

중세 기독교 작가로서 윌렐무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이슬람 이웃 국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방의 이슬람 세계 속에서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슬람에 대해 단순히 논쟁적이거나 무지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무슬림을 이교도로 간주하기보다는, 기독교의 한 이단 종파에 속하며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57] 그는 당대의 이슬람 지도자들에 대해 종종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비록 그들의 세력 강화가 기독교 왕국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러했다. 무인 앗딘 우누르, 누르 앗딘, 쉬르쿠, 그리고 예루살렘의 최종 정복자인 살라딘과 같은 이슬람 통치자들은 존경스럽고 경건한 인물로 제시되는데, 이는 윌렐무스가 동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거의 부여하지 않았던 특징이다.[58]

윌렐무스의 역사 서술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궁정파와 귀족파 사이의 파벌 싸움에 휘말렸는데, 귀족파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지지자로 여겨져 궁정파의 핵심 인물인 왕모 아녜스 드 코르트네의 미움을 샀다. 이로 인해 1180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거에서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출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 관계는 그의 저작에서 왕모 아녜스를 비롯한 궁정파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4. 윌리엄의 유산과 영향



윌리엄은 티레의 대주교이자 왕국의 재상으로 활동했으나, 말년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13세기 계속 저술가들은 에라클리우스 총대주교가 1183년에 윌리엄을 파문했으며, 윌리엄이 로마로 항소하러 갔다가 에라클리우스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나 신빙성은 낮으며,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윌리엄이 정치보다는 교회 문제와 역사 저술에 집중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파문과 독살 이야기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28] 윌리엄은 1184년까지 왕국에 남아 저술 활동을 계속했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내부적으로 정치 파벌로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슬픔에 잠긴 나라의 재앙과 그 다양한 불행만이 나타나며, 이는 단지 비탄과 눈물을 자아낼 뿐이다"라고 기록했다.[29]

아녜스와 그 지지자들이 세력을 얻고, 보두앵 5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윌리엄의 정치적 영향력은 감소했다. 병약했던 보두앵 5세가 이듬해 사망하자, 1186년 그의 어머니 시빌라와 두 번째 남편 기 드 뤼지냥이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 무렵 윌리엄의 건강도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망 날짜는 9월 29일로 밝혀졌으나 연도는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1185년 5월에 새로운 재상이 임명되었고 1186년 10월까지 새로운 티레 대주교가 임명된 점[30], 그리고 한스 E. 마이어의 연구[31] 등을 근거로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윌리엄이 1186년에 사망했다고 본다.

윌리엄이 예견했던 왕국의 불행은 그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살라딘은 1187년 하틴 전투에서 기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윌리엄의 대교구였던 티레를 제외한 왕국의 거의 모든 도시를 함락시켰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제3차 십자군 파병 계획으로 이어졌다.[32] 웬도버의 로저는 윌리엄이 1188년 프랑스 기소르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참전을 결정할 때 교황 특사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기록했으나,[33] 이는 로저의 착각으로, 실제 참석자는 윌리엄의 후임자인 조시우스였다.[34]

4. 1. 중세 시대의 영향

윌리엄 사후, 그의 저작 『역사』는 복사되어 십자군 국가에 유통되었고,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다. 13세기 아크레의 주교였던 비트리의 제임스는 이 책의 사본을 접했으며, 바조슈의 가이, 매튜 파리, 로저 오브 웬도버 등은 자신의 연대기 작성에 이 책을 활용했다. 그러나 라틴어 연대기가 담긴 필사본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발견된 것이 10개에 불과하여, 윌리엄의 저작이 원래 형태로 널리 읽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59] 잉글랜드에서는 『역사』가 라틴어로 확장되었는데, 『리처드 왕의 여정』과 로저 호베덴의 연대기에서 추가 정보를 얻어 1220년경에 이 확장판이 작성되었다.[60]

윌리엄 자신이 연대기에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필사본에서는 『해외에서 일어난 일들의 역사』(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la)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다른 필사본에서는 『예루살렘 역사』(Historia Ierosolimitanala)라는 제목을 사용한다.[61] 라틴어 텍스트는 1549년 바젤에서 니콜라스 브릴링거에 의해 처음 인쇄되었다. 이후 1611년 자크 봉가르의 『프랑크족에 의한 신의 업적』(Gesta Dei per Francosla)과 1844년 오귀스트 아르튀르 뵈뇨와 오귀스트 르 프레보의 『십자군 역사가들의 수집』(Recueil des historiens des croisades프랑스어)에도 실렸다. 봉가르의 텍스트는 1855년 자크 폴 미뉴의 『라틴어 교부학』(Patrologia Latinala)에 다시 게재되었다. 현재 표준 라틴어 비평판은 현존하는 필사본 6개를 기반으로 R. B. C. 하위건스가 편집하고 한스 E. 마이어와 게르하르트 뢰쉬가 주석을 단 『윌렐무스 티렌시스 대주교 연대기』(Willelmi Tyrensis Archiepiscopi Chroniconla)로, 1986년 『Corpus Christianorum』 시리즈의 일부로 출판되었다.[62] RHC 판은 1943년 에밀리 A. 밥콕과 어거스트 C. 크레이에 의해 "해외에서 행해진 업적의 역사"(A History of Deeds Done Beyond the Sea영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으나, 이 번역은 때때로 내용이 불완전하거나 부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63]

윌리엄의 『역사』는 1223년경 고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번역본은 라틴어 원본보다 훨씬 널리 유통되었으며 13세기에는 많은 익명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현존하는 라틴어 필사본과 비교했을 때, 고대 프랑스어 번역본은 "최소 59개의 필사본 또는 필사본 조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64] 에르누와 베르나르 르 트레조리에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적인 프랑스어 속편도 존재한다. 이 번역본은 때때로 《정복의 서》(Livre dou conquestefro)라고 불렸으며, 유럽 전역뿐만 아니라 십자군 국가였던 키프로스 왕국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에서도 알려졌다. 14세기 베네치아의 지리학자 마리노 사누토 일 베키오도 이 번역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고대 프랑스어 번역본은 13세기 말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해외 대정복》(Gran conquista de Ultramare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65] 프랑스어 번역본은 매우 널리 퍼져서,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Francesco Pipino|프란체스코 피피노it는 라틴어 원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프랑스어 버전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5세기에는 윌리엄 캑스턴이 프랑스어 버전을 중세 영어로 번역했다.[66]

4. 2. 현대의 평가

윌리엄의 역사가로서의 중립성은 20세기 후반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다. 예를 들어, 오거스트 C. 크레이는 "그의 공정성은 ... 그의 비판 능력만큼이나 인상적이다."[68]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D. W. T. C. 베시는 윌리엄이 특히 1170년대와 1180년대의 사건을 다룰 때 결코 공정한 관찰자가 아니었음을 지적했다. 베시는 윌리엄이 아마릭의 의뢰로 역사를 썼다는 주장 자체가, 현명한 통치자가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고대 및 중세의 전형적인 토포스(문학적 주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69] 윌리엄 스스로 자신의 공정성을 내세우는 것 역시 당시 역사 서술의 흔한 ''토포스'' 중 하나였다.[70]

베시에 따르면, 윌리엄이 영웅으로 묘사한 보두앵 4세에 대한 서술은 "자신이 속한 파벌의 정치를 옹호하고, 반대파의 정치를 폄하하려는 시도"였다.[71] 윌리엄은 보두앵 4세의 어머니 아녜스, 예루살렘 총대주교 에라클리우스 및 그 지지자들에게 비판적이었으며, 보두앵 통치 시기 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중반 마샬 W. 볼드윈,[72] 스티븐 런시먼,[73] 한스 에버하르트 마이어[74] 등은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나, 베시, 피터 에드버리, 버나드 해밀턴 등의 최근 연구는 윌리엄의 서술을 재평가하며 그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재조정했다.

윌리엄의 ''Historia''에서 자주 지적되는 결점 중 하나는 날짜에 대한 부정확성이다. "연대기가 때때로 혼란스럽고, 날짜가 잘못 제시"되어[75] 심지어 예루살렘 왕들의 재위 기간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틀린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아마릭 1세가 1173년 7월 11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 사망 연도는 1174년이다.[76]

이러한 편견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은 "항상 가장 위대한 중세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져 왔다."[77] 런시먼은 "그는 폭넓은 시야를 가졌고, 자기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과 역사 속 인과 관계의 흐름을 이해했다."[78]고 평가했다. 크리스토퍼 타이먼은 그를 "역사가들의 역사가"[79]이자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십자군 역사가"[80]라고 칭했으며, 버나드 해밀턴은 "중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역사가 중 한 명으로 정당하게 평가받는다"[81]고 말했다. ''중세 사전'' 역시 "윌리엄이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하며, 훌륭하고 독창적인 라틴어로 비판적이고 신중하게 (비록 연대기적으로는 결함이 있지만) 서술한 업적은 그를 중세 기준으로 뛰어나고 현대 학문의 기준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역사가로 만든다."[82]고 결론짓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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