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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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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지문덕은 고구려 시대의 군사 지도자로, 특히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살수대첩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 사망 연도, 출신 등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평양 출신 설, 선비족 출신 설 등이 존재한다. 612년 수나라의 대규모 침략 당시, 을지문덕은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수나라 군을 살수(청천강)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을 기만하고, 시를 통해 심리전을 펼치는 등 다채로운 전략을 구사했다.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을지문덕은 이후 한국 역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영웅으로 숭앙받았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을지로, 무공훈장, 군사 훈련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으며, 그의 생애와 업적은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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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한제국 교과서 《초등 대한역사》에 실린 삽화
이름을지문덕
원어 이름乙支文德
본명을지문덕(乙支文德)
로마자 표기Eulji Mundeok
한자 표기乙支文德
일본어 표기いつし ぶんとく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チ・ムンド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국적고구려
성별남성
관직대장군
부친미상
모친미상
주군고구려 영양왕
다른 이름위지문덕(尉支文德)
본관미상
충성고구려
군사 경력
주요 참전 전투/전쟁고구려-수 전쟁
살수 대첩
기타 정보
관련 자료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2. 생애 및 업적

을지문덕은 6세기 중반에 태어나 618년 이후 언젠가 사망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18세기에 쓰여진 『해동명장전』에 따르면 평양 근처 석다산(石多山)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국가였으며, 이웃 국가들과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다. 을지문덕은 무예와 문장 모두에 능했고, 고구려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을지'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칭호일 가능성이 있다.[1] 을지문덕이 본래 선비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2][3][4][5]

589년 수나라 건국 후,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수년간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597년, 영양왕은 렴주관 전투에서 수나라를 공격했고,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매복과 불리한 날씨로 인해 실패했다.

7세기 초, 수양제는 고구려와 동돌궐 사이의 비밀 서신을 알고 영양왕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영양왕이 응하지 않자, 수양제는 612년 113만 명이 넘는 군대와 200만 명이 넘는 보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 국경 방어선을 점령하고 요하 강둑에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대장군으로서 위장 후퇴와 기습 공격을 사용하는 속임수 전략으로 수나라 군대에 맞섰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넌 후, 소규모 부대가 여동 성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장마가 계속되자 수나라 군대는 소규모 정찰 공격만 가했고,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큰 움직임을 자제했다.

비가 그치자 수양제는 군대를 압록강 강둑으로 이동시켰다. 을지문덕은 소규모 교전을 벌이며 수나라 군대를 보급 중심지에서 멀리 끌어들였다. 수양제는 30만 5천 명이 넘는 선봉대를 보내 평양을 점령하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

살수대첩 이후 겨울이 시작되었고, 보급이 부족했던 수나라 군대는 패배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을지문덕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613년 이후로는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6]

수나라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중국의 내란으로 인해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618년, 수나라는 당나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을지문덕의 전략과 지도력은 고구려를 중국의 한반도 진출로부터 보호했다.

2. 1. 출신 및 초기 생애

살수 대첩을 제외한 을지문덕의 삶은 출생, 사망 년도, 출신, 관직 등 모든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의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났다는 도 있지만[20]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을지는 '웃치'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윗사람을 뜻하거나,[22] 고구려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 가문에 귀인에 대한 존칭사인 지(支)를 붙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23] 역시 사료를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조선에서는 고구려 고유의 복성(複姓)으로 파악하였다.[24] 원전인 《삼국사기》에는 '가문의 계보는 알 수 없고,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과 문장력도 갖추었다.'라고만 적혀 있다.

18세기에 쓰여진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따르면 그는 평양(平壤) 근처 석다산(石多山) 출신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국가였으며, 이웃 국가들과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다. 을지문덕은 무예(武藝)와 문장(文章) 모두에 능한 인물이었고,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을지문덕이 본래 선비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2][3][4][5] 1979년 김원룡(金元龍)은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7] “乙支”와 선비족 귀족의 성씨인 “尉遲(울지)”는 음가가 매우 유사하며, 乙支文德이 선비족 귀화인 또는 그 자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7]

2. 2. 살수대첩 이전의 활동

을지문덕은 6세기 중반에 태어나 618년 이후 언젠가 사망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18세기에 쓰여진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따르면 그는 평양 근처 석다산(石多山) 출신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국가였으며, 이웃 국가들과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다.[1]

589년, 수나라가 주변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고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자 대규모 군사 원정을 여러 차례 감행했다. 을지문덕은 무예(武藝)와 문장(文章) 모두에 능한 인물이었고,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을지'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칭호일 가능성이 있다.[1]

을지문덕이 본래 선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2][3][4][5]

589년 수나라 건국 후, 새 중국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는 수년간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597년, 영양왕은 렴주관 전투에서 수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매복과 불리한 날씨로 인해 실패했다.[1]

7세기 초, 수양제는 고구려와 동돌궐 사이의 비밀 서신을 알고 영양왕에게 직접 복종하거나 "황제의 영토 순방"에 직면하라고 요구했다. 영양왕이 응하지 않자, 수양제는 전쟁을 준비하여 612년 113만 명이 넘는 군대와 200만 명이 넘는 보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국경 방어선을 점령하고 요하 강둑에 진을 쳤다.[1]

을지문덕은 대장군으로서 속임수 전략, 즉 위장 후퇴와 기습 공격을 사용하여 수나라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넌 후, 소규모 부대가 여동 성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장마가 계속되자 수나라 군대는 소규모 정찰 공격만 가했고,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큰 움직임을 자제했다.[1]

비가 그치자 수양제는 군대를 압록강 강둑으로 이동시켜 대규모 전투를 준비했다. 을지문덕은 소규모 교전을 벌이며 수나라 군대를 보급 중심지에서 멀리 끌어들였다. 수양제는 30만 5천 명이 넘는 선봉대를 보내 평양을 점령하려 했다.[1]

2. 3. 살수대첩 (612년)

612년 수 양제는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러나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히자, 우문술, 우중문 등에게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주어 평양성으로 바로 진격하게 했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 군대에 들어가 상황을 엿보았다. 수나라 군대는 식량이 부족했고,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을지문덕은 이를 이용해 수나라 군대를 피곤하게 만들고자 매번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져서 도망치는 작전을 펼쳤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근처까지 왔지만,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 서신에 속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끈질기게 추격하며 공격했다.

7월,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은 후방을 공격했다. 수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여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요동으로 돌아간 병사는 겨우 2,700명뿐이었고, 수많은 군수 물자와 공성 병기는 모두 잃어버렸다. 이 승리를 한국북한에서는 "살수대첩"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있다.

2. 3. 1.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이 지은 5언 4구의 고시이다. 정해진 제목이 없어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증수장우중문시(贈隋將于仲文詩), 유우중문(遺于仲文) 등으로 불린다. 한국에서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시는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권44, 을지문덕전에 수록되어 있다.[4]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책구천문 (수군의 뛰어난 계략은 천리(天理)를 꿰뚫고,)

: 묘산궁지리 (묘책은 지리(地理)까지 헤아릴 정도이다.)

: 전승공기고 (전승의 공적은 이미 매우 크고,)

: 지족원운지 (만족하여 그만두기를 바란다.)

7전 7패 끝에 수군을 교묘하게 유인한 을지문덕이 "수군은 이미 충분히 이겼으니 전쟁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전하며,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음을 보여 수군을 방심하게 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4]

2. 3. 2. 수공에 대한 논란

살수 대첩은 흔히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이러한 내용은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33], 이는 민간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34]이 변형되어 기록된 것이다.[35] 실제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

2. 4. 살수대첩 이후

살수대첩 이후 겨울이 시작되었고, 보급이 부족했던 수나라 군대는 패배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을지문덕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613년 이후로는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6]

수나라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양제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제국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지만, 이듬해 봄에 있었던 고구려에 대한 두 차례의 공격 또한 비슷한 참패로 끝났다. 결국 중국의 내란으로 인해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618년, 비교적 짧았던 수나라는 당나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과 지도력은 고구려를 중국의 한반도 진출로부터 보호했다.

3. 역사적 평가 및 의의

고구려 시대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인 을지문덕 장군의 지휘력과 전술적 기량은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결정적 요인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맞서 그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전략을 개발했다. 이러한 뛰어난 전술적 성공은 그를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3.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병자호란 이후, 을지문덕은 국난의 영웅으로 인식되어 자존심 회복과 사회 응집 차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28] 1645년 평양에, 1670년 평안도 안주에 사우가 건립되고 조선 숙종 때 각각 충무사(忠武祠), 청천사(淸川祠)로 사액되었다.[29] 그 이전에도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 여러 문인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31]

12세기 편찬된 『삼국사기』에서 편찬자 김부식은 을지문덕전(권 44) 말미에 대국 수나라의 전례 없는 대규모 원정을 소국 고구려가 격퇴하고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을지문덕의 공적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김유신전(하, 권 43) 말미의 평에서는 김유신의 공적을 칭찬하며 장보고의 무용과 함께 을지문덕의 지략을 칭송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동서고금 허다한 싸움이 있지만, 적은 군사로 강대국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쳐서 그림자도 못 돌아가게 하고, 백만 병 적진에 출입하기를 을지문덕같이 한 자가 있는가? 어린 아이도 그 위엄을 듣고 울음을 그치며 도 그 이름을 알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 끝 하나, 하나만 본받아도 독립을 보전하고 역사에 빛날지니, 을지문덕은 우리 4,000년 동안에 제일의 위인이요 온 세계에서도 그 짝이 드물다."라고 평하였다.[32]

고려 현종 재위 시절, 평양 근처에 을지문덕 장군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학자이자 고위 관료였던 양성지와 18세기 조선의 실학 사관이었던 안정복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다. 숙종은 1680년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는 또 다른 사당 건립을 명령했다.

일본 제국주의 압제 아래 고통받던 시기에, 한국의 역사가 신채호는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평가를 시작하여 1908년 그의 전기를 출판하고 그를 한국 전통의 민족주의 정신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20세기 한국의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인 이기백은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정복 시도를 저지한 노력이 외세의 지배를 막으려는 한국의 초기 시도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현대 한국 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승을 거둔 이순신과 함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영웅의 대표로 거론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인 을지로가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의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도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은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급 구축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7]

미한 합동 군사 훈련 코드네임에는 을지문덕이 대륙으로부터의 공격을 격퇴한 데서 유래하여 "을지"라는 이름이 많이 붙는다(예: 을지 프리덤 가디언).

3. 2.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재조명

고구려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던 을지문덕 장군의 지휘력과 전술은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압도적인 적군에 맞서 그는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개발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또한 수나라를 물리친 승리를 을지문덕 장군의 공으로 돌렸다.[32]

고려 현종 재위 시절, 평양 근처에 을지문덕 장군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양성지안정복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다. 숙종은 1680년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는 또 다른 사당 건립을 명령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역사가 신채호는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심도 있는 평가를 시작하여 1908년 그의 전기를 출판하고 그를 한국 전통 민족주의 정신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20세기 한국의 저명한 학자 이기백은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정복 시도를 저지한 노력이 외세 지배를 막으려는 한국의 초기 시도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인 을지로가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이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은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급 구축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7]

을지문덕 장군의 문학 작품인 을지문덕 한시는 한국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미국 사이의 반기별 연합군사령부 훈련 중 하나가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기 위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으로 불렸다. 현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강감찬, 이순신과 함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3. 3. 을지문덕 관련 명칭

4. 논란과 쟁점

을지문덕의 출신과 살수대첩에서 수공(水攻) 사용 여부는 주요 논쟁거리이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인설, 낙랑군·대방군 유민설, 선비족 귀화인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지만, 살수 대첩을 제외한 그의 삶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없다.[20] '을지'라는 이름이 고구려의 칭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확실한 사료는 없다.

살수대첩은 흔히 수공을 사용한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 《수서》 등 주요 역사책에는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없다. 이는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며, 민간 전설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33][34][35]

4. 1. 출신 논란

을지문덕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살수 대첩을 제외한 그의 삶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다.[20]

  • 고구려인설: 18세기 문헌인 『해동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1] 그러나 이는 후대의 기록이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신빙성이 낮다는 지적이 있다.[16]
  • 낙랑군·대방군 유민설: 을지문덕이 한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점을 근거로, 중국조선에 설치했던 낙랑군·대방군 유민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314년경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군·대방군이 붕괴된 후 고구려에 귀속된 세력으로 여겨진다.[16]
  • 선비족 출신 귀화인설: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가 선비족 귀족의 성씨인 '尉遲(울지)'와 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근거로, 을지문덕이 선비족 귀화인 또는 그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다.[17] 1979년 김원룡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 유사성, 『자치통감고이』 주석에 을지문덕이 울지문덕으로 기록된 점 등을 근거로 이 주장을 제기했다.[17]


'을지'라는 이름이 고구려의 칭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웃치'의 음차로서 윗사람을 뜻하거나,[22] 고구려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에 존칭 '지(支)'를 붙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23] 확실한 사료는 없다. 조선에서는 고구려 고유의 복성(複姓)으로 파악하였다.[24]

4. 2. 수공 사용 여부 논란

살수대첩은 흔히 귀주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을 사용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이러한 내용은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33], 이는 민간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34]이 변형되어 기록된 것이다.[35] 실제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

참조

[1] 서적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한 의론 일조각 1979
[2] 뉴스 을지문덕 https://www.culturec[...]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3] 뉴스 을지문덕 乙支文德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4] 뉴스 을지문덕(乙支文德) http://encykorea.aks[...] 2022-02-02
[5] 뉴스 을지문덕 乙支文德,?~? https://www.doopedia[...] 2022-02-02
[6] 웹사이트 을지문덕 https://terms.naver.[...] 2021-05-30
[7] 웹사이트 Gwanggaeto the Great Class / KDX-I Class Destroyer https://www.naval-te[...] Verdict Media Limited 2019-04-26
[8] 웹사이트 Ulchi-Focus Lens http://www.globalsec[...]
[9]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10] 뉴스 을지문덕 https://www.culturec[...] 韓国コンテンツ振興院
[11] 뉴스 을지문덕(乙支文德) http://encykorea.aks[...] 2021-09-22
[12] 뉴스 을지문덕 乙支文德,?~? https://www.doopedia[...] 2021-09-22
[13] 일반텍스트
[14] 일반텍스트
[15] 뉴스 乙支文徳 http://world.kbs.co.[...] KBSワールドラジオ 2010-06-25
[16] 뉴스 을지문덕 乙支文德 http://contents.hist[...] 국史編纂委員会
[17] 서적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한 의론 일조각 1979
[18] 인용
[19] 일반텍스트
[20] 서적 해동명장전 1794
[21] 서적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한 의론 일조각 1979
[22] 서적 고가연구
[23] 논문 고구려 인명표기에 나타난 용자법의 검토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5
[24] 서적 증보문헌비고
[25] 일반텍스트
[26] 서적 수서
[27] 서적 고구려대수당전쟁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91
[28] 논문 1847년 평안도 안주지역의 을지문덕비 건립과 의미 역사실학회 2013
[29] 서적 대동지지
[30] 서적 백상루에 제하다
[31] 서적 안주회고
[32] 서적 을지문덕전
[33] 서적 조선상고사
[34]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35] 논문 살수대첩에서의 칠불전설과 조선조 한시에의 수용 양상 우리한문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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