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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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는 1950년 결성된 일본의 노동 단체이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출범했으나, 1951년 좌경 노선으로 전환하여 반미,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핵무기 금지, 미군 기지 반대 운동 등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1983년에는 451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 전체 조직 노동자의 36%를 차지했다. 1989년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해산되었으며, 총평의 정치 활동은 이후 별도의 조직을 통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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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력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 미군정의 보호와 육성 아래 다시 시작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 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으며, 일본공산당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전환됨에 따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련) 등으로 대표되던 종래의 노동 운동은 한계를 보였다. 한편, 생디칼리슴과 공산주의의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ICFTU, 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진행되었다. 그 조류의 노총으로서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총평이 결성되었다.[12]
미군정 원조하에 반공 노총으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인 1951년 3월 제2회 대회에서 행동 강령으로서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ICFTU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좌경 반미 노선으로 전향했다. 요시다 내각이 파괴활동방지법의 전신인 국가공안보장법, 집회데모취체법, 총파업금지법, 노동삼법개정을 도모하자 1951년 6월 「노동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1952년에는 노동악법들의 국회 심의에 맞서 정치총파업을 4차에 걸쳐 실시했다(노투 파업). 총평은 일본탄광노동조합(탄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전투적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변화를 “닭이 오리가 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미군정의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레임덕(쓸모없는 것)이 되었다”고 욕한 것을 통역사가 “오리 되었다”고 직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내부 우파가 제안한 ICFTU 일괄가맹안이 부결되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면서 좌파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52년 12월 전국섬유산업노동조합동맹(전섬동맹), 전일본해원조합(해원조합), 전국영화연극노동조합(전영연), 일본방송노동조합(일방노) 4개 단산은 총평의 정치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비판―민주적노동조합의 입장에 서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우파계 노조들과 지도부의 불화가 표면화되었다(4단산비판 사건).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제4회 대회를 거쳐 1953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방노를 제외한 우파계 3개 단산이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951년 6월 재건된 우파 노총인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과 1954년 새로운 연락협의체인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의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는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평화운동을 추진했으며, “옛날 육군 지금 총평”이라는 야유를 들을 정도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총평의 좌파 노선에는 노농파 마르크스주의 연구집단인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1952년 5월 1일, 총평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일방적인 성격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쿄 황궁 밖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로 여러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여 "피의 메이데이"로 기억되었다.[3]
1950년대 후반, 총평은 핵무기 금지 운동, 일본 내 미국 군사 기지 반대 운동 등 여러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과 큐슈 북부 미이케 탄광에서 벌어진 미이케 투쟁에서 총평의 과격한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총평은 안보 조약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64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노력은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총평은 논쟁적인 파업보다는 더 온건한 직장 내 활동으로 점차 전환했다.[4]
1958년 8월 15일, 와카야마현에서 근무 평정 반대, 민주 교육을 지키는 국민 대회를 개최하고 데모를 열었으나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산하 노동자 자녀의 등교 거부를 지지했다.[15]
일본 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일본 공산당과는 개별 과제에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다. 1964년의 4.17 제네럴 스트라이크 문제로 일본 공산당이 파업에 반대하는 방침을 취한 결과, 일부 노조에서는 노조 내의 일본 공산당원에 대한 공격이 있기도 했다.[16]
1961년 5월 18일, 주간지 『신주간』을 창간했으나, 1962년 7월 5일 폐간되었다.
1978년에는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에 참가했다.
1983년 당시 총평은 산하에 49개 단산 451만 명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의 전체 조직노동자의 36%가 총평 조합원이었다. 그 중 70%가 관공서 공공부문 노동자였다. 매년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중립노련)과 함께 춘투공투회의를 조직하고 춘계생활투쟁(춘투)를 임금결정기구로 정착시켰다.
1987년 발족한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1989년 해산되었다. 전민노련은 이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이 되었다.[6][7]
총평의 정치 활동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1989년 9월 '''총평 센터'''가 만들어졌고, 1992년 10월 '''사회당과 연대하는 노조 회의'''로 전환되었다. 이 조직은 일본사회당 및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지만, 민주당 결성 이후 지지축을 민주당으로 옮기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1997년 '''민주리버럴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1999년 5월에는 연합정치센터의 결성에 따라 민주리버럴노조회의는 해산하면서 총평계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2. 1. 결성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보호와 육성 하에 재출발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졌으며, 일본 공산당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냉전이 발발하면서 GHQ가 반공 자세(소위 "역코스")를 강화함에 따라, 1947년의 2·1 제너럴 스트라이크 중단, 도호 사건에 대한 미군 출동 등 일본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던 산별회의나 전노련 등에 집약되어 있던 노동 운동은 곤경에 빠졌다. 1948년에는 GHQ의 의향에 따라 정령 201호가 공포되어, 공무원의 쟁의권이 박탈되었다. 게다가 1950년에는 레드 퍼지로 공산당원과 싱파가 대량 해고되었다.[1]이러한 배경에서 노동조합주의와 일본 공산당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결성 대회가 도쿄도 미나토구의 도쿄회관에서 열렸다.[12] 초대 의장에는 탄노 출신의 무토 타케오, 사무국장에는 도시교 출신의 시마가미 젠고로가 선출되었다. 총동맹, 국철, 일교조, 도노련, 해원조합, 사철총련 등 주요 나셔널 센터와 단산(산업별 단일 노동조합의 약칭[13])이 참가했다. 총평 결성에는 GHQ의 강한 의향이 작용했으며, 결성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 배제 및 국제자유노련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대회 선언을 채택하여 산별회의·전노련과는 선을 긋는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2. 2. 결성과 초기 활동 (1950년 ~ 1954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보호와 육성 아래 재출발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졌으며, 일본 공산당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냉전이 발발하면서 GHQ가 반공 자세("역코스")를 강화함에 따라, 1947년의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중단, 도호 사건에 대한 미군 출동 등 일본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던 산별회의나 전노련 등에 집약되어 있던 노동 운동은 곤경에 빠졌다. 1948년에는 GHQ의 의향에 따라 정령 201호가 공포되어, 공무원의 쟁의권이 박탈되었다. 1950년에는 레드 퍼지로 공산당원과 싱파가 대량 해고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주의와 일본 공산당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세계노련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의 분기 및 결집이 진행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결성 대회가 도쿄도 미나토구의 도쿄회관에서 열렸다.[12] 초대 의장에는 탄노 출신의 무토 타케오, 사무국장에는 도시교 출신의 시마가미 젠고로가 선출되었다. 총동맹, 국철, 일교조, 도노련, 해원조합, 사철총련 등 주요 나셔널 센터와 단산(산업별 단일 노동조합[13])이 참가했다. 총평 결성에는 GHQ의 강한 의향이 작용했으며, 결성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 배제 및 국제자유노련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대회 선언을 채택, 산별회의・전노련과는 선을 긋는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GHQ의 원조 하에 반공적 색채가 강한 나셔널 센터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 1951년 3월 10일 제2회 대회에서 강화 조약을 둘러싸고 민주・좌우가 대립하며, 행동 강령으로 재군비 반대・전면 강화・중립 견지・군사 기지 반대의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국제자유노련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우파가 후퇴하고 좌경・반미로 방향 전환했다. 사무국장으로 타카노 미노루를 선출했다. 요시다 내각이 국가공안보장법(후에 파방법으로 성립), 집회 데모 단속법, 제네럴 스트라이크 금지법, 노동 3법 개정을 꾀한 것에 대해, 1951년 6월에 "노동 법규 개악 반대 투쟁 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국회 심의 중인 1952년에는 정치 제네럴 스트라이크를 4차례에 걸쳐 진행했다(노투 파업). 일본탄광노동조합연합회(탄노)와 전력 회사의 단산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가맹 단산도 전투적인 노동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총평의 이러한 변화를 "닭에서 오리로"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총평의 변화를 당시 GHQ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쓸모 없게 되었다(lame duck, 레임덕)"라고 욕한 것을, 통역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리가 되었다"라고 직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우파의 국제자유노련 일괄 가맹안이 부결되었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여 좌파 노선을 명확히 했다. 인사에서도 전산 위원장 후지타 스스무가 새로 선출됨과 동시에 타카노 미노루가 사무국장으로 재선출되어 민주화 동맹(민주동.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중단 후에 노조 내에서 일본 공산당의 세력을 배제하는[14]) 좌파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한편 우파는 임원을 내지 않아, 총평 내 좌우 대립은 깊어졌다.
1952년 12월 25일, 전섬동맹・해원조합・전영연・일방로 4개 단산은 총평 지도부의 정치 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 비판――민주적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우파 계열 조합과 집행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4단산 비판).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7월 8일 제4회 대회를 거친 1953년 7월부터 11월에 걸쳐 일방로를 제외한 우파 계열 3개 단산은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우파 내셔널 센터인 총동맹을 1951년 6월에 재건, 1954년 4월 22일에는 새로운 연락 협의체로서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아 제2회 대회 이래의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 평화 운동을 진행했다. 총평의 정치적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종종 억지스러운 행동이 물의를 일으켰고 "옛 육군, 지금 총평" 등으로 조롱받았다. 총평의 좌파 노선 형성에는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관계자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총평 본부 전임자는 거의 사회주의협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2. 3. 좌파 노선의 확립과 활동 (1955년 ~ 1980년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 미군정의 보호와 육성 아래 다시 시작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 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으며, 일본공산당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전환됨에 따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련) 등으로 대표되던 종래의 노동 운동은 한계를 보였다. 한편, 생디칼리슴과 공산주의의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ICFTU, 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진행되었다. 그 조류의 노총으로서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총평이 결성되었다.[12]미군정 원조하에 반공 노총으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인 1951년 3월 제2회 대회에서 행동 강령으로서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ICFTU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좌경 반미 노선으로 전향했다. 요시다 내각이 파괴활동방지법의 전신인 국가공안보장법, 집회데모취체법, 총파업금지법, 노동삼법개정을 도모하자 1951년 6월 「노동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1952년에는 노동악법들의 국회 심의에 맞서 정치총파업을 4차에 걸쳐 실시했다(노투 파업). 총평은 일본탄광노동조합(탄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전투적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변화를 “닭이 오리가 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미군정의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레임덕(쓸모없는 것)이 되었다”고 욕한 것을 통역사가 “오리 되었다”고 직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내부 우파가 제안한 ICFTU 일괄가맹안이 부결되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면서 좌파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52년 12월 전국섬유산업노동조합동맹(전섬동맹), 전일본해원조합(해원조합), 전국영화연극노동조합(전영연), 일본방송노동조합(일방노) 4개 단산은 총평의 정치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비판―민주적노동조합의 입장에 서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우파계 노조들과 지도부의 불화가 표면화되었다(4단산비판 사건).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제4회 대회를 거쳐 1953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방노를 제외한 우파계 3개 단산이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951년 6월 재건된 우파 노총인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과 1954년 새로운 연락협의체인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의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는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평화운동을 추진했으며, “옛날 육군 지금 총평”이라는 야유를 들을 정도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총평의 좌파 노선에는 노농파 마르크스주의 연구집단인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1952년 5월 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점령 종식에 관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일방적인 성격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쿄 황궁 밖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로 여러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여 "피의 메이데이"로 기억되었다.[3]
1950년대 후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핵무기 금지 운동, 일본 내 미국 군사 기지 반대 운동 등 여러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과 큐슈 북부 미이케 탄광에서 벌어진 미이케 투쟁에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과격한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안보 조약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64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노력은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논쟁적인 파업보다는 더 온건한 직장 내 활동으로 점차 전환했다.[4]
1958년 8월 15일, 와카야마현에서 근무 평정 반대, 민주 교육을 지키는 국민 대회를 개최하고 데모를 열었으나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산하 노동자 자녀의 등교 거부를 지지했다.[15]
일본 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일본 공산당과는 개별 과제에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다. 1964년의 4.17 제네럴 스트라이크 문제로 일본 공산당이 파업에 반대하는 방침을 취한 결과, 일부 노조에서는 노조 내의 일본 공산당원에 대한 공격이 있기도 했다.[16]
1978년에는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에 참가했다.
1983년 당시 총평은 산하에 49개 단산 451만 명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의 전체 조직노동자의 36%가 총평 조합원이었다. 그 중 70%가 관공서 공공부문 노동자였다. 매년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중립노련)과 함께 춘투공투회의를 조직하고 춘계생활투쟁(춘투)를 임금결정기구로 정착시켰다.
2. 4. 해산과 그 이후 (1980년대 ~ 현재)
1987년 발족한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1989년 해산되었다. 전민노련은 이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이 되었다.[6][7]우경화된 연합과 달리 총평의 정치활동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1989년 9월 '''총평센터'''가 만들어졌고, 1992년 10월 '''사회당과 연대하는 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이 조직은 일본사회당 및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지만, 민주당 결성 이후 지지축을 민주당으로 옮기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1997년 '''민주리버럴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1999년 5월에는 연합정치센터의 결성에 따라 민주리버럴노조회의는 해산하면서 총평계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3. 가맹 조합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해산 직전인 1989년 7월 당시 가맹 조합은 다음과 같다.[25]
총평 결성 초기에는 민간 기간산업 단체도 많이 가맹했지만, 총평이 좌경화되면서 민간 기업 노조들은 대부분 탈퇴하고 우파 노총인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에 가맹했다. 이에 따라 총평은 공공부문 노조가 중심이 되었다.
다음은 1958년, 1970년, 1985년 연맹 가맹 노조와 조합원 수 현황이다.[7][8][9]
4. 역대 지도부
참조
[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Prospects of Japanese Labor
1954
[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뉴스
EDITORIAL - Rengo's uphill battle October 31, 2005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05-10-31
[6]
웹사이트
Rengo 2010 website
http://www.jtuc-reng[...]
2012-02-06
[7]
서적
Gewerkschaften in der japanischen Politik von 1970 bis 1990
VS Verlag für Sozialwissenschaften
2013-03-13
[8]
서적
Directory of Labor Organizations, Asia and Australasia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1958
[9]
서적
Labor Law and Practice in Japan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1970
[10]
문서
Figure is for 1980
[11]
문서
1989年11月解散大会時点。以下同じ。
[12]
문서
『戦後20年写真集』共同通信社、1965年8月1日。
[13]
웹사이트
単産(タンサン)とは
https://kotobank.jp/[...]
2020-04-25
[14]
웹사이트
民同(ミンドウ)とは
https://kotobank.jp/[...]
2020-04-25
[15]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16]
문서
この問題に取材した小説として、佐藤貴美子『桜子』(新日本出版社)がある
[17]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60集/1990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90-07-05
[18]
웹사이트
https://www.jmd.co.jp/article.php?no=97109
https://www.jmd.co.j[...]
[19]
웹사이트
https://www.jmd.co.jp/article.php?no=97312
https://www.jmd.co.j[...]
[20]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57集/1987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87-06-25
[21]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58集/1988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88-06-2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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総評とは
https://kotobank.jp/[...]
2021-10-2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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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労働総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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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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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労働組合総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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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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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労働年鑑 第60集/1990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90-07-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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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労働総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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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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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労働組合総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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