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 연립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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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공 연립 정권은 일본의 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이 함께하는 연립 정권을 의미한다. 1990년대 후반 자유당과의 연립을 거쳐 1999년 정식 출범했으며, 이후 자유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후에는 보수당과 함께 자공보 연립을 구성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자민당의 압승과 함께 자공 연립이 강화되었으나, 2009년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2012년 자민당의 재집권과 함께 부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자민당이 주도하고 공명당은 '정권의 브레이크' 역할을 자임하며 정책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자공 연립 정권은 다양한 법률 제정 및 개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선거 협력 및 정책 결정 과정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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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사 연립 정권은 1994년 일본에서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 3당이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구성한 연립 정권으로, 일본 정치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이념적 차이와 사회당 지지율 하락 등으로 1998년 해소되었다.
자공 연립 정권 | |
---|---|
기본 정보 | |
유형 | 연립 정권 |
지지 기반 | 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의 연립 |
역사 | |
시작 | 1999년 (자유민주당과 자유당의 연립) |
주요 사건 | 2000년 총선 이후 보수당 참여 2009년 총선으로 잠시 해산 2012년 총선 이후 재개 |
특징 | |
정치적 안정성 | 일본 정치의 중요한 부분으로 장기간 유지 |
정책 결정 | 자유민주당의 주도 하에 공명당의 의견 반영 |
선거 협력 | 선거구 조정 및 공동 지지 |
관련 정권 | |
이전 | 자유자주 연립 정권 |
관련 | 자유자공보 연립 정권 |
2. 역사
2. 1. 55년 체제와 공명당의 등장
1955년 거대 여당인 자민당과 중소 야당인 일본사회당을 중심으로 40년 가까이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하게 될 55년 체제가 등장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사회당은 야당 생활에 안주하면서 정권 견제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지나치게 이념에 경도된 사회당의 지지세도 줄어들었다. 이 지지세를 흡수하며 등장한 정당이 민주사회당과 공명당이었다.공명당은 중도 성향으로, 친자민 노선과 비자민 노선 사이에서 노선 갈등을 겪었다. 지지 기반인 창가학회 내부에서도 장년부(40세 이상 남성 회원)는 친자민 또는 자공민 노선을, 부인부(기혼 여성 회원)와 청년부(40세 미만 남녀 회원)는 비자민 또는 사공민 노선을 지지하는 등 내부 노선 대립이 존재했다. 특히 선거 결과에 따라 미일 안보·자위대에 대한 입장이 바뀌는 등 외교·안보·방위 정책에서 불분명한 입장을 보였다.
1970년, 창가학회가 일으킨 언론 출판 방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공산당 등 혁신 세력을 견제하길 원했던 자민당 간사장 다나카 가쿠에이가 중도 성향의 공명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두 정당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후 다나카파와 다케시타파에 속한 의원들 중에는 창가학회 및 공명당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이들 간에 개인적인 파이프가 구축되었다.
2. 2. 55년 체제의 붕괴와 공명당의 연립 참여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추대하고 사회당, 민사당, 공명당 등을 끌어들여 비자민 연립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38년간 집권해 온 자민당은 야당으로 전락했고, 55년 체제는 붕괴했다.하지만 오자와의 독단적인 정책 결정 방식은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의 반발을 샀고, 두 정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소수 정권이 된 연립 정권은 곧 무너졌고, 사회당과 사키가케는 자민당과 손을 잡아 자사사 연립 정권을 출범시켰다. 한편, 오자와는 여러 야당들을 통합하여 신진당을 창당했고, 여기에는 공명당도 참여했다.
자사사 연립 정권은 1995년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과 사키가케가 대패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신진당에 합류한 구 공명당의 지지 기반인 창가학회에 대한 맹공을 펼쳤는데, 종교법인법을 개정하고 이케다 다이사쿠 창가학회 명예회장을 증인으로 국회에 불러 성폭행 의혹을 추궁했으며, 자민당의 기관지인 「자유신보」를 통해 반 창가학회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였다.[1]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은 정권 획득에 실패하고 오히려 의석이 4개 감소하면서 파벌 다툼이 심해졌다. 과반수 획득에 실패한 자민당은 신진당 의원들을 영입하는 공작을 벌였고, 구 공명당 의원들은 신진당과 더 이상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서 신진당은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결국 1997년 12월 31일 신진당은 자유당 등 6개의 정당으로 분열했다.
1998년 거대 야당이 분열한 상황에서 치러진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예상 밖의 패배를 당했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가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후임으로 오부치 게이조가 취임했고, 이 무렵 다케시타 노보루가 창가학회장 아키야 에이노스케와 은밀히 만나 창가학회의 협조를 받아냈다.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여 과반수를 상실한 자민당은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오자와의 자유당과 연립 협의를 시작해 11월 연정의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신진당에서 갈라져 나온 몇몇 정당들이 공명당을 재결성했는데, 대표로 취임한 간자키 다케노리는 "자민당의 보완 세력은 되지 않는다. 자공 연계나 자공 연립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자유당과 연립하는 것만으로는 참의원에서 과반수를 회복하지 못했기에 자민당은 공명당과의 연립을 강력하게 필요로 했다. 하지만 자민당과의 연립을 부담스러워하는 공명당을 배려하여 자민당은 공명당과 정책 협의부터 시작해 나갔다. 우선 두 정당은 11월에 공명당이 주장한 지역진흥권을 추경에 반영했으며, 1999년 3월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나카무라 쇼자부로 법무상을 공명당이 경질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공명당도 11월 오키나와현지사 선거 때 혁신 세력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자민당 후보 이나미네 게이이치를 지원하여 그의 당선을 도왔다.
1999년 1월 14일 자자 연립 정권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공명당은 형식상 여전히 야당이었지만, 주변사태법, 국기·국가법, 통신감청법, 주민기본대장법 등 자민당이 추진하던 주요 법률의 제·개정에 협력했다. 이는 연립 정권에 입성하기 위한 교두보를 다지는 과정이나 다름없었고, 그해 10월 5일 공명당이 연립에 참여하면서 자자공 연립 정권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2. 3. 자공보 연립
자유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후, 오기 지카게를 중심으로 보수당이 창당되어 연립에 잔류했다. 이로써 자민당-공명당-자유당 연립(자자공 연립)은 자민당-공명당-보수당 연립(자공보 연립)으로 바뀌었다.오부치 게이조는 오자와 이치로와 회동하여 소비세를 복지 목적세로 전환하기 위한 협의를 시도했으나, 오자와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결렬되었다. 오자와는 오히려 양당 해산 후 정계 재편을 요구했고, 오부치가 이를 거부하자 자유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은 각각 의석이 줄었지만, 연립 정권으로서 과반수를 유지하여 자공보 연립은 계속 이어졌다.
2. 4. 고이즈미와 자공 연립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 총재로 취임했다. 총재 선거 때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고이즈미는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2003년 보수신당을 흡수한 뒤 우정 해산으로 치러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 승리로 이끌었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이 탄생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인기에 힘입어 자민당 인기가 부활했다. 선거마다 고이즈미 인기에 비례하여 승리를 거듭하고, 자민당과 공명당은 의석을 늘렸다. 한편, 보수신당은 의석을 줄였고, 2003년(헤이세이 15년) 11월, 자민당에 흡수되는 형태로 해산, 자공 연립 정권이 되었다. 2005년(헤이세이 17년), 우정 민영화를 둘러싼 다툼으로 중의원이 해산되어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자민당은 압승했지만 공명당은 반대로 의석을 줄이는 결과가 되었다.2. 5.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
2006년 아베 신조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했지만, 연금 기록 문제와 각료들의 스캔들이 잇따르면서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했다.[2]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은 의석을 크게 잃고 민주당에 참의원 제1당 자리를 내주었다.[2]이후에도 자민당과 공명당은 연립 정권을 유지했지만, 아베 끌어내리기 이후 총재가 된 후쿠다 야스오와 아소 다로도 각각 후쿠다 끌어내리기와 아소 끌어내리기에 휘말리는 등 자민당 내 권력 투쟁은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공명당은 조기 총선 실시를 희망하게 되었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임기 만료에 가까운 시점인 2009년 8월에 실시되었고, 자민당과 공명당은 전례 없는 참패를 당했다. 그 결과,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신당이 연립하여 민사국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아소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자자공 > 자공보 > 자공으로 이어져 온 연립 정권은 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2. 6. 자민당의 재집권과 자공 연립의 부활
국정 경험이 없던 민주당은 정권을 넘겨받았음에도 미숙한 모습을 보였고, 집권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10년 7월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패배했다. 반면 자민당은 개선 51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며 여당의 참의원 과반수 획득을 저지했다.[3]2011년 9월 동일본 대진재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간 나오토는 대표직을 사임했고, 후임으로 노다 요시히코가 집권했다.[3] 하지만 노다 내각도 잦은 스캔들로 지지율을 잃었고,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인 294석을 획득해 여당으로 복귀했다. 자민당을 다시 이끌게 된 아베 신조는 31석을 얻은 공명당과 연립에 합의하여 3년 3개월 만에 자공 연립 정권이 부활했다.[3]
이후 민주당은 당이 해체되었고 야당은 사분오열되어 재집권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공명당과 함께 과반수 붕괴를 해소하고,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현행 의석을 거의 유지하는 등 여당 우위 체제가 지속되었다.[3]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추가 공인을 포함해 56석(비개선 포함 121석)을 획득하고, 공명당도 선거구 7명이 당선되는 등 압승을 거두었다.[3] 이른바 "개헌 세력"이 중참 양원에서 3분의 2를 넘어 헌법 개정 발의 요건을 충족하게 되었다.[3]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야당이 분열된 가운데 자민당이 소선거구 218석, 비례대표 66석으로 총 284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다.[4]
3. 연립 여당 사이의 관계
3. 1. 자유민주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자공 연립 정권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대 다수파 정당이다. 연립 정권이 구성될 경우 내각총리대신은 자유민주당 총재가 맡는다. 또한 국무대신, 부대신, 대신정무관의 대부분을 자민당 소속 의원이 차지한다.3. 2. 공명당
공명당은 연립 정권이 구성될 경우 국토교통대신직을 맡는 것이 관례이다.[6] 사이토 데쓰오가 환경대신으로 입각한 적이 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예외가 없었다. 또한, 공명당 대표가 직접 입각하는 사례는 없다.[7]공명당은 '복지당', '평화당'을 표방하며 자민당의 폭주를 막는 "정권의 브레이크 역할"을 자임한다.[8] 그러나 특정 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성립 등 여러 면에서 자민당 정책에 협력하고 있으며, 대립하더라도 결국 자민당의 주장을 수용하는 경우가 많아 "자민당의 보완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는다.[8]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지극히 실태를 보지 않은 말"이라고 반론했다.[9] 그는 공명당의 역할을 "나막신의 코걸이"에 비유하며, 코걸이가 끊어지면 나막신은 쓸모없어지듯 자민당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9] [10]
2010년대부터는 부대표 키타가와 카즈오가 여당 협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11] 야마구치는 2020년 타하라 소이치로와의 대담에서 1999년 자자공 연립 정권 참여에 대해 "금융 위기로 정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공명당 후보 전원이 낙선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분함"이었다고 회상했다.[12] 그는 민주당의 인내력, 협조성 부족과 실현성 없는 정책을 비판하며, 연금, 실업 대책 등 국민의 감성에 와닿는 정책은 자민당에서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특별 정액 급부금 지급 방식 변경에 대해서는 "국민의 요구에 정책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회상했다.[12]
4. 자공 연립 정권에 대한 비판
4. 1. 선거
"선거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자민당 후보의 후원회 명부가 창가학회 측에 넘어가 자민당 선거 대책 관계자나 지지자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1] 연립 정권 수립 후 첫 총선거인 2000년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도쿄 17구에서 자민당 히라사와 가쓰에이가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를[13], 고치 1구에서 자민당 후쿠이 아키라가 공명당 이시다 노리토시를 꺾었다. 같은 선거에서 지바 2구의 자민당 에구치 가즈오와 공명당 도미타 시게요키, 시즈오카 1구의 자민당 도츠카 신야와 공명당 오구치 요시노리가 대결하여 여당 후보가 공멸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도쿄 4구, 도쿄 20구, 시즈오카 1구, 아이치 1구에서는 공명당 후보 옹립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한 인물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도쿄 4구의 모리타 겐사쿠와 시즈오카 1구[14]의 가미카와 요코가 당선되었다.2003년 총선거 이후 중의원 소선거구에서 자공의 직접 대결은 없지만, 2005년 우정 민영화에 반대해 자민당을 탈당한 야시로 에이타와 공명당 오타 아키히로가 도쿄 12구에서 대결한 사례, 2017년 오사카 3구에서 공명당 사토 시게키에 대해 자민당원 나카조 에이타로가 무소속으로 도전한 사례가 있다. 이바라키 7구에서는 2017년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까지 공명당이 자민당 나가오카 게이코가 아닌 무소속 나카무라 기시로를 추천했다(이후 나카무라의 입헌민주당 입당으로 나가오카 추천으로 변경). 후쿠시마 4구에서도 2000년 및 2003년 총선거에서 자민당 야마우치 히데오가 아닌 무소속의 회 와타나베 고조를 추천했다(와타나베 고조의 민주당 입당으로 2005년 이후 추천 보류).
창가학회와 대립하는 신흥 종교 단체들은 자민당 지지에서 다른 정당 지지로 전환하거나 시시비비 방침을 취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릿쇼 코세이카이는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부터 민주당 지원으로 전환했고, 2010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이후 신일본 종교 단체 연합회(신종련)도 민주당 지지로 전환하여 민진당, 입헌민주당으로 이어졌다. 니치렌정종 계열 후지 다이세이지 겐쇼카이도 공명당의 여당 입성을 계기로 자민당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쇼와노이에는 1990년대 본류 운동으로 교단 간부 대립이 발생하여, 자민당 중심 정치 활동에서 철수하고 제2차 아베 내각 이후 일본 회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4. 2. 정책
공명당은 연립 정권 수립 전에는 "복지의 당", "평화의 당"을 외치며 "보수적인 자민당의 폭주를 방지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15]5. 자공 연립 정권에서 성립, 개정된 주요 법률
자공 연립 정권에서는 미일 방위 협력을 위한 지침 관련 법률(주변 사태법, 자위대법 개정 등), 주민기본대장법 개정, 국기·국가법, 통신 감청법 등이 제정 및 개정되었다. 또한, 후기 고령자 의료 제도에 관한 법률(고령자의 의료 확보에 관한 법률), 국회법 개정, 국적법 개정, 우정 민영화법, 장애인 자립 지원법 등이 제정되었다.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 국민 투표법, 교육 기본법 개정, 방위성 설치법 제정 및 개정, 해적 대처법, 공문서 관리법 등도 이 시기에 제정 및 개정되었다. 국가 공무원법 개정, 자동차 운전 처벌법 제정 및 개정, 특정 비밀 보호법, 거리·사람·일 창생법, 마이 넘버법 제정 및 개정, 노동자 파견법 개정 등도 이루어졌다.
공직 선거법 개정, 평화 안전 법제 관련 법률, 중요 시설의 주변 지역 상공에서의 소형 무인기 등의 비행 금지에 관한 법률, 전기 사업법 개정,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 통합형 리조트 정비 추진법 등이 제정되었다. 조직적인 범죄의 처벌 및 범죄 수익 규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 전범 특례법, 식품 낭비 삭감 추진법, 일하는 방식 개혁 관련법 제정 및 개정,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 개정, 수도법 개정, 종묘법 개정, 신형 인플루엔자 등 대책 특별 조치법 개정 등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디지털청 설치법, 디지털 사회 형성 기본법, 중요 시설 주변 및 국경 낙도 등에서의 토지 등의 이용 상황의 조사 및 이용 규제 등에 관한 법률, 경제 시책을 일체적으로 강구함으로써 안전 보장의 확보를 추진하는 법률 등이 제정되었다.
참조
[1]
서적
創価学会とは何か
新潮社
2004-04-15
[2]
뉴스
週刊ポスト2007年8月27日号、週刊新潮2010年8月30日号等
[3]
뉴스
衆院選2012特集
https://www.yomiuri.[...]
2012-12-21
[4]
뉴스
自民圧勝、与党310超…立憲民主が野党第1党
https://www.yomiuri.[...]
2017-10-23
[5]
뉴스
衆院選公明、小選挙区落とす
https://mainichi.jp/[...]
毎日新聞社
2017-12-20
[6]
뉴스
国交相はなぜ「公明党」が独占しているのか 小泉政権から11年...自民が「ずぶずぶ」のポスト手放した理由
https://www.j-cast.c[...]
2020-09-21
[7]
문서
1955年(昭和30年)以降の歴代連立政権を見ると[[自由党 (日本 1998-2003)|自由党]]も党首([[小沢一郎]])が入閣しなかったが、自由党の連立政権参画期間は約1年間にとどまり、自由党から分党した[[保守新党|保守党]]では現職党首([[扇千景]])の入閣歴がある。
[8]
뉴스
公明、補完勢力化進む 持論より自民に配慮 秘密保護法案
http://www.asahi.com[...]
2015-04-29
[9]
뉴스
公明・山口代表「軽減税率実行に役割」(党首に聞く)
http://www.asahi.com[...]
2015-04-29
[10]
뉴스
「公明は『げたの雪』ではない。『げたの鼻緒』だ」党首インタビュー(4)公明・山口代表(4/4ページ)
https://web.archive.[...]
2015-04-29
[11]
문서
[[集団的自衛権]]の一部行使解禁の協議においても、与党協議の場に現れ、「'''北側3原則'''」を提示するなどした。
[12]
뉴스
公明山口代表が対談本 「口を開けば、『憲法改正、日米同盟、安保法制』」と自民を指摘
https://mainichi.jp/[...]
毎日新聞社
2020-09-08
[13]
문서
自公連立成立以前の1996年(平成8年)にも同様の対決があり平沢が山口を下していた(山口は当時[[新進党]]所属)。平沢に敗れた山口はその後、[[参議院]][[東京都選挙区]]に鞍替えした。
[14]
문서
静岡1区に関しては自民公認の戸塚、公明公認の大口との事実上の与党三つ巴対決となった。
[15]
뉴스
"「自民暴走ならブレーキ役に」 公明・神崎代表"
http://www2.asahi.co[...]
200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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