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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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벽 대전은 후한 말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자 유비와 손권 연합군이 이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조조는 하북을 평정하고 형주를 공격하여 유표 사후 유종의 항복을 받았으나, 유비는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했다. 손권은 주유, 노숙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군과 대치했다. 조조는 수군을 정비하고 남하했으나, 역병과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황개의 화공 작전으로 조조군은 대패하고, 유비와 손권 연합군은 남군을 차지하며 형주를 분할했다. 이 전투는 삼국 시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으며,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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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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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교전 명칭 | 적벽 대전 |
부분 전쟁 | 후한 말의 전쟁 |
관련 전역 | 후한 말 전역, 적벽 전역 |
![]() | |
시기 | 208년 겨울 |
장소 | 양쯔 강, 중국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조조는 양쯔 강 남쪽에 발판을 마련하는 데 실패 유비는 형주를 얻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손권, 유비, 유기 |
교전국 2 | 조조 |
지휘관 1 | 주유, 정포, 유비, 유기 |
지휘관 2 | 조조 |
병력 규모 1 | 50,000명 |
병력 규모 2 | 800,000명 (조조의 주장) 220,000–240,000명 (주유의 추정) |
사상자 규모 1 | 알 수 없음 |
사상자 규모 2 | 심각한 피해 |
중국어 명칭 | |
중국어 간체 | 赤壁之战 |
중국어 정체 | 赤壁之戰 |
병음 | Chìbì zhī zhàn |
민난어 | Chhek-pek chi chiàn |
광동어 병음 | cek3 bik1 zi1 zin3 |
가타카나 | 치ービー ヂー ヂャン |
히라가나 | せきへき の たたかい |
영어 명칭 | Battle of Red Cliffs |
2. 배경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여 중국 북부를 재통일하고 화북 평원을 장악한 조조는, 205년 원담, 206년 고간, 207년 오환 · 원상 연합군을 차례로 격파하여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
208년 승상에 오른 조조는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했다. 형주를 통치하던 유표가 병사하자,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는 강릉으로 향했으나, 피난민들 때문에 속도가 느려 당양에서 조조군에게 따라잡혀 위기에 빠졌다. 이후 한진에서 수로를 따라 하구에 주둔하는 유기에게 피신했다.
유기와 손권은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손권은 주유, 노숙, 정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 유기 등과 연합해 조조에게 맞서기로 결정했다.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간 유표 가문에 대해 이러한 손권의 조치는 파격적이었다.
서기 3세기 초, 한나라는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헌제는 지방 군벌들을 통제할 수 없는 허수아비였다. 조조는 가장 강력한 군벌 중 한 명으로 황제를 자신의 수도인 업에 머물게 하여 황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2. 1. 후한 말의 혼란과 조조의 세력 확장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여 중국 북부를 재통일하고 화북 평원을 장악한 조조는, 205년 원담, 206년 고간, 207년 오환 · 원상 연합군을 차례로 격파하여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1]208년 업으로 돌아온 조조는 승상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황실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2] 같은 해, 조조는 남쪽 원정을 시작하여 형주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형주 자사였던 유표가 사망하고 유종이 항복하면서, 조조는 상당한 함대와 강릉을 전진 기지로 확보했다.[3]
유비는 조조에게 쫓겨 남쪽으로 후퇴했으나, 장판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구로 탈출하여 손권의 사자 노숙과 연락을 취했다. 제갈량은 손권과의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채상(柴桑|채상lzh)으로 보내졌다.
2. 2. 형주 정벌과 유종의 항복
208년 7월, 조조는 형주의 자사였던 유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그해 8월에 유표가 죽자, 뒤를 이은 유종은 9월에 조조에게 항복했다.[1] 형주의 일부 사람들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표의 객장이었던 유비를 따랐다. 유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수만 명에 달해 행군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유비는 관우가 이끄는 수백 척의 배에 이들을 나누어 태워 한수를 따라 남하시켰다.2. 3. 손권-유비 연합의 형성
유비는 장판파에서 조조군에게 패배한 후, 하구에 주둔하던 유기에게 의탁했다.[1]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동맹을 제안했고,[14] 주유, 노숙 등 주전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와의 동맹을 결심했다.[2] 손견이 유표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는등 유표 가문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해 유비와의 연합을 선택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조조에 대항하는 손권-유비 연합군이 결성되었다.3. 준비 과정
유종이 항복하고 유비가 피신한 이후, 조조는 형주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강릉에 주둔하면서 수군을 재정비했다. 조조군은 대부분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주 수군을 새로 편입하고 대규모 함선을 건조하는 등 수전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배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쇠고리로 연결했으나, 이는 훗날 화공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15] 조조군은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오림까지의 늪지대 등으로 인해 역병이 도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손권의 수군이 강에서 우세하다는 것이 판명되자 적극적인 행동을 자제했다.
유비는 유기에게 의탁한 후 하구에서 하류에 위치한 번구에 자리잡고 군무를 위임받았다. 이후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동맹을 맺고, 주유와 함께 적벽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해 군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장강 남안에 포진하여 조조군과 대치했다. 양측 모두 적극적인 공격을 자제하며 대규모 충돌 없이 208년 말을 맞이했다.[15]
3. 1. 조조군의 수군 정비
조조는 형주를 점령한 후 강릉에 주둔하면서 수군을 정비했다. 원래 조조군은 보병 중심이었기 때문에 수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항복한 형주 수군을 편입하고 대규모 함선을 건조하며 수전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조조군은 배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훗날 화공에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15] 조조군은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풍토병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3. 2. 손권-유비 연합군의 전략
유비는 하구에서 번구로 이동하여 유기와 함께 병력을 재정비했다.[14] 제갈량은 손권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며 동맹을 공고히 했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하여 군 지휘권을 일임하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하며 후방을 지원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조조군과 대치하며, 장강 남안에 포진했다.[15]4. 전투 경과
적벽 전투는 조조 군대가 양쯔강을 건너려다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측은 양쯔강 양쪽으로 물러나 해전을 벌였고, 연합군의 육상 공격이 이어졌다. 조조 군대는 격파되었고, 퇴각 과정에서 진흙과 질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조조는 화용관에서 탈출했다.
손권-유비 연합군은 하구(Xiakou) 또는 번구(Fankou)에서 적벽으로 올라가 조조의 선봉군과 마주쳤다. 조조 군대는 질병과 낮은 사기로 인해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강 북쪽 오림으로 퇴각했고, 연합군은 남쪽으로 물러났다.
조조는 북방 출신 병사들의 배멀미를 줄이기 위해 배들을 밧줄로 묶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개는 이를 이용해 조조에게 항복을 가장한 편지를 보내고, 군함들을 화공선으로 개조했다. 황개의 함대가 강의 중간 지점에 접근하자, 선원들은 작은 배로 갈아타기 전에 배에 불을 질렀다. 남동풍을 타고 가던 무인 화공선은 조조의 함대로 돌진하여 불을 질렀고, 많은 병사와 말이 불에 타 죽거나 익사했다.
주유와 연합군은 가볍게 무장한 부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북방 군대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조조는 퇴각 명령을 내리고 남은 배들을 파괴한 후 물러났다. 조조 군대는 화용도로 퇴각하려 했으나, 폭우로 길이 험난하여 많은 병사들이 진흙에 빠져 죽었다. 주유와 유비는 육로와 수로로 남군까지 추격했고, 조조의 남은 군대는 기근과 질병으로 괴멸되었다. 조조는 업(Yecheng)으로 퇴각하여 조인, 서황에게 강릉을, 악진에게 양양(Xiangyang)을, 만총에게 당양(Dangyang)을 지키게 했다.
연합군은 양쯔강을 건너려 했으나 혼란에 빠졌다. 감녕이 이끄는 별동대가 북쪽 의릉(Yiling)에 교두보를 확보했고, 조인의 후위 부대가 더 큰 재앙을 막았다.
208년 겨울, 남군으로 진격한 주유 군은 조인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감녕은 이릉성 탈취를 제안했고, 주유는 이를 채택하여 감녕은 수백 명의 부대로 이릉성을 탈취했다. 조인은 5,000명 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여 이릉을 포위했으나, 감녕은 태연하게 지휘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여 능통 부대에게 수비를 맡기고, 이릉성을 포위한 적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이릉을 확보했다.
이후, 주유의 선봉 부대에게 포위된 우금을 조인이 구출했다. 주유는 정면 결전에서 유시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조인의 공격을 물리쳤다. 교전 1년 후, 조인은 주유 등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다. 유비는 장비에게 1,000명을 맡겨 주유와 협력하여 조인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고, 주유는 동의했다. 남부 4군(무릉, 장사, 계양, 영릉) 태수는 유비에게 항복하거나 전사했다. 유비는 유기를 형주 자사로 세우고 형주 남쪽 4군을 병합하여 확고한 기반을 얻었다. 이 성과는 손권·주유의 승리에 편승한 것이었기에, 유비와 손권은 4군의 귀속을 놓고 다투게 된다.
관우는 북쪽 길이 봉쇄되었다. 이통, 만총 등이 관우를 공격하여 조인 군을 구출했고, 조인 등은 강릉을 버리고 철수했다. 주유 등은 강릉을 점거하여 남군을 평정했다.
조조는 양주에서 진란, 매성, 뇌서 등의 반란 진압에 하후연, 장료, 우금, 장합, 장패를 파견했지만, 형주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손을 쓰지 못하고 형주 남군 이남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양양 교외 청니까지 진출했던 관우와 소비를 악진이 공격하여 철수시키고, 주변 이민족까지 항복시켜 양양 일대만은 확보할 수 있었다.
4. 1. 정사(正史) 기록
정사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위서〉 무제기: "조조는 적벽에서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많은 병사와 관리가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14]
- 〈선주(유비)전〉: "손권은 주유· 정보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
- 〈제갈량전〉: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조에 대항하였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14]
- 〈주유전〉: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조와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조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조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15]
- 〈오주전〉: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조가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16]
-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 "(정보)와 주유가 좌·우독이 되어, 조조를 오림(烏林)에서 물리쳤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적벽대전은 대규모 해전보다는 육상전과 소규모 해전이 결합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조군의 퇴각에는 역병의 영향도 컸음을 알 수 있다.[15][16]
황개전에는 "주유를 따라 적벽에서 조조를 막을때, 화공을 할 꾀를 짰다"라고만 나온다.
주유전에 따르면, 첫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머물렀고, 주유 등은 남쪽 강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는 적군이 많고 아군이 적어 장기전은 불리하며, 조조군의 배가 앞뒤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격퇴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주유는 이 계책을 받아들여 배 수십 척에 풀을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뒤 깃발을 세우고 조조에게 항복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큰 배 뒤에 매고 함께 나아갔다. 황개가 여러 배에 동시에 불을 지르자, 강한 바람을 타고 불길이 강가의 진영까지 번졌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달아났다.

조조의 전략적 실수와 황개의 계략이 결합하여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주유는 조조의 장수와 병사들이 대부분 기병과 보병 출신이며 해상전에 경험이 거의 없고, 형주 백성들의 지지도 받지 못해 안전한 작전 기지가 부족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조조는 수적 우세를 믿고 해군을 섣불리 투입했지만, 뱃멀미와 물에서의 경험 부족, 남부의 질병 등으로 인해 군대가 약화된 상태였다.
가후는 조조에게 휴식과 보충을 권고했지만, 조조는 이를 무시했다. 조조는 자신의 패배 원인을 적의 전략보다는 자신의 행동과 불운으로 돌렸다.
손권 진영에서는 장소 등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노숙과 주유는 항전을 주장했다. 주유는 조조군의 약점(수군 전투 경험 부족, 역병, 형주/하북 병사들의 낮은 충성도)을 분석하며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노숙의 설득으로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을 맺었다. 제갈량은 조조군의 피폐함과 형주 백성들의 불만을 언급하며, 유비군과 손권군이 협력하면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손권은 주유, 정보 등이 지휘하는 수륙 2만 병사를 파견했고, 연합군은 적벽과 오림에서 조조군을 격파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는 조조가 적벽에서 유비와 싸웠으나 불리했고, 역병으로 인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양공재기》에는 조조군이 배를 불태우고 육로로 퇴각하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오서 주유전에는 주유가 유비군과 함께 조조군을 역습했고, 역병으로 인해 조조군이 패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황개의 화계와 거짓 항복으로 조조군의 배와 진영이 불타고, 유비와 주유가 추격하여 조조는 조인에게 강릉성을 맡기고 북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강표전》에는 동남풍이 불어 조조군의 배가 불타고, 주유 등이 육상에서 추격하여 조조군이 크게 궤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는 유비가 손권이 보낸 주유, 정보 등의 수군과 힘을 합쳐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하고 배를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는 주유와 정보가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군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범엽의 《후한서》 헌제기에는 조조가 수군으로 손권을 토벌했지만, 오림과 적벽에서 주유에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굉의 《후한기》 헌제기에는 조조와 주유가 적벽에서 싸웠고, 조조가 대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어람》이 인용하는 《영웅기》에는 조조가 적벽에서 장강 남안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배가 없어 뗏목을 만들었고, 주유가 밤에 불을 질러 조조가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는 조조군의 대부분이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주유와 유비는 남군까지 조조를 추격했고, 조조는 강릉을 조인에게, 상양을 악진에게 맡기고 북방으로 철수했다.
적벽 대전 전후 손권은 합비를 공격했지만, 조조는 장희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조조 휘하의 장제가 흘린 거짓 정보를 믿은 손권은 철수했다.
4. 2. 연의(演義)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 대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극적인 창작이 많이 가미되었다.[17]조조는 유표 사후, 유종과 채모의 항복으로 형주 군사를 흡수하여 100만 대군이라 칭하며 남하를 시작했다. 유비는 장판 전투에서 조운과 장비의 활약으로 유기에게 의탁한다.
손권은 조조의 남하에 제갈량, 노숙의 설득과 주유의 주전론으로 개전을 결심한다. 주유는 제갈량이 조조가 "이교"(대교와 소교)를 탐낸다고 하자 격분하여 주전론을 편다.
주유는 화공을 계획하고, 채모와 장윤을 암살한다. 거짓 항복한 채중, 채화를 이용해 조조군에 거짓 정보를 흘리고, 황개는 고육계로 거짓 항복한다.
제갈량은 주유의 견제에도 '초선차전의 계'[18]로 10만 개의 화살을 얻고, 방통을 통해 조조군에 '연환의 계'를 진언하게 한다. 서서는 이를 간파했지만 전장을 떠난다.
주유는 제갈량의 기도로 동남풍[19]이 불자, 황개를 시켜 '연환의 계'로 묶인 조조군 배에 불을 지르게 하고, 조조군은 궤멸된다. 제갈량은 동남풍을 이용해 유비에게 도망친다.
유비군은 조조의 퇴각로에 복병을 배치하지만, 제갈량의 판단으로 관우는 조조를 놓아준다. 조조는 형주 대부분을 포기하고, 형주는 유비와 손권의 분쟁 지역이 된다.
4. 3. 실제와 허구 논란
일부 학자들은 정사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을 들어 적벽대전의 규모나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김운회 교수는 저서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적벽대전과 관도대전을 비교하면서 《삼국지》 〈위서〉에 기록이 세 줄에 불과하고, 〈촉서〉나 〈오서〉를 합쳐도 70자에 불과하여 정사에 남겨진 양이 매우 짧다는 것을 근거로 적벽대전이 허구라고 주장했다.[23] 그러나 오나라 쪽 정사를 보면 전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으므로, 허구 논란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반론도 있다.다만, 일부 장수의 경우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실제로는 적벽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거나 이미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다. 태사자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는 206년에 풍토병으로 병사했으나,[23]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에 참가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사 〈오서〉 태사자전을 보면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어, 적벽대전 참전은 완전한 허구임을 알 수 있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적을 토벌하러 갔었는데, 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망루 위에서 욕을 했다. 그 도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사자가 활을 끌고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자,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훌륭한 활솜씨)는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써서 상자속에 편지를 봉했는데, 그가(태사자가)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 태사자에게 유반을 제압할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 건안 11년(206년)에 세상을 떠났다.|태사자의 신장은 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중략) ... 건안 11년(206년)에 세상을 떠났다.중국어
5. 전후
적벽 대전 이후,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가고 조인, 서황 등에게 남군을 맡겼지만, 유비와 주유의 공격으로 결국 주유가 남군을 차지했다.[1] 유비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무릉, 장사, 계양, 영릉 4군을 점령하여 형주 남부를 장악했다.[1] 이로써 조조는 형주 남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와 양양 이북만을 유지하게 되었다.[1]
209년 조조가 강릉에 설치한 전초 기지는 주유에게 함락되었고 조조의 영토는 160km가량 축소되어 샹양 주변으로 좁혀졌다.[2] 한편, 손권은 합비를 공격했으나, 조조의 계략으로 인해 실패하고 퇴각했다.
5. 1. 조조의 퇴각과 형주 분할
적벽에서의 패배로 조조는 형주를 떠나 허창으로 돌아갔고, 조인, 서황 등에게 남군을 맡겼다.[1] 유비와 주유는 남군까지 진격하여 조조군과 싸웠고, 결국 주유가 남군을 차지했다.[1] 유비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무릉, 장사, 계양, 영릉 4군을 점령하고, 형주 남부를 장악했다.[1] 조조는 형주 남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와 양양 이북만을 유지하게 되었다.[1]209년 말, 조조가 강릉에 설치한 전초 기지는 주유에게 함락되었다.[2] 조조의 영토는 약 160km 축소되어 샹양 주변 지역으로 좁혀졌다.[2] 유비는 양쯔강 남쪽의 무릉, 장사, 영릉, 계양의 네 군을 장악했다.[2] 210년 주유의 죽음은 형주에서 손권의 세력을 약화시켰다.[2]
적벽 대전과 유비의 형주 점령은 중국 남부가 황하 유역의 북부 중심부로부터 분리되었음을 확인했고, 수 세기 동안 지속될 북-남 대립의 축을 예고했다.[2]
208년 겨울, 남군으로 진격한 주유 군은 조인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3]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했고, 주유는 이 제안을 채택하여 감녕은 이릉성을 점령했다.[3] 조인은 감녕에게 즉시 5,000명 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여 이릉을 포위했지만, 주유는 여몽의 계책으로 이릉성을 완전히 확보했다.[3]
정면 결전 끝에 주유는 유시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중상인 채로 싸움에 임하여 조인의 공격을 물리쳤다.[3] 1년 후, 조인은 주유 등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다.[3] 유비는 장비에게 1,000명을 맡겨 주유와 협력하여 조인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고, 주유는 이에 동의했다.[3] 유비는 유기를 형주 자사로 세우고 형주의 남쪽 4군을 병합하여 확고한 기반을 얻었다.[3]
관우에게 북쪽 길이 봉쇄되었고, 이통, 만총 등이 관우를 공격했다.[3] 결국 조인 등은 강릉을 버리고 철수했고, 주유는 강릉을 점거하여 남군을 평정했다.[3]
조조는 하후연, 장료 등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지만, 형주 남부를 모두 잃었다.[3] 그러나 악진이 관우와 소비를 격퇴하고 주변 이민족까지 항복시켜 양양 일대만은 확보할 수 있었다.[3]
5. 2. 손권의 합비 공격과 형주 공방전
209년, 조조가 형주를 떠나 허창으로 귀환한 후, 손권은 주유에게 형주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장희(張憙)에게 기병 1,000명을 주어 합비로 보냈는데, 장제가 40,000명 대군을 파견했다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 합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합비성과 손권 군 양측에 모두 전해지자, 손권은 이를 믿고 진영을 불태우고 달아났다.한편, 조조가 강릉에 설치한 전초 기지는 주유에게 함락되었고, 조조의 영토는 샹양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자들 사이에서 전리품 분배 문제가 발생했다. 유비와 유기가 모두 보상을 기대했지만, 유기는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영토는 대부분 손권에게 흡수되었다. 유비는 형주 자사를 자처하며 양자강 남쪽의 무릉, 장사군, 영릉, 계양군을 장악했다.
유비가 형주를 점령하면서 양자강의 전략적 요충지를 얻었고, 이는 익주로 가는 통로와 오 (중국 남동부)로 가는 중요한 수로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훗날 황하 유역의 북부와 남부의 대립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6. 참전 장수들
6. 1. 조조 진영
조조는 대부분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었고, 해상전에 익숙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형주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작전 기지가 부족했다. 조조는 병력을 해군으로 전환했지만, 훈련 부족과 뱃멀미,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가후는 휴식을 권고했지만 조조는 이를 무시했다. 조조는 패배의 원인을 자신의 실수와 불운으로 돌렸다.
주유 군은 조인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감녕의 제안으로 이릉성을 탈취했고, 조인의 공격을 격퇴했다. 주유는 유시에 맞아 중상을 입었지만, 조인의 공격을 물리쳤다. 조인은 주유 등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고, 유비와 주유는 협력하여 조인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 관우는 북쪽 길이 봉쇄되었고, 이통·만총 등이 관우를 공격했다. 결국 조인 등은 강릉을 버리고 철수했다.
조조는 하후연, 장료, 우금, 장합, 장패를 파견하여 진란, 매성, 뇌서 등의 반란을 진압했다. 악진은 양양 교외의 관우와 소비를 공격하여 철수시키고, 주변의 이민족까지 항복시켜 양양 일대만은 확보할 수 있었다.
6. 2. 손권 진영
손권은 지휘를 주유(대도독)에게 위임했다. 손권 진영에는 주유, 노숙, 여몽, 능통, 정보(부도독), 황개(선봉), 한당, 감녕, 감택, 여범, 서성, 육손, 주태 등이 있었다.수십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조정을 등에 업은 조조의 대군을 앞에 두고, 손권의 진영은 두려움에 휩싸여 장소 등은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노숙만이 항전을 설파했고, 파양에 나가 있던 주유를 불러들였다.
주유는 "중원 출신인 조조군은 수군에 의한 전투에 익숙하지 않고, 땅의 풍토에 익숙하지 않아 역병이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조조군의 수군의 주력이 되는 형주의 병사나, 원소를 물리치고 편입한 하북의 병사들은, 진심으로 조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뭉쳐짐이 약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라고 분석하며 손권에게 항전을 권했다.
『삼국지』 오서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으로부터 손권과 동맹을 맺고 조조에 대항할 것을 설득당한 유비는, 제갈량을 사자로 파견하여 손권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손권과의 동맹을 제안하고, 유표의 조문으로 왔던 노숙을 데리고 손권과 면회했다.[14] 제갈량은 "조조의 병력이 강행군으로 피폐해진 것, 형주의 인간들이 조조에게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을 들고, 관우가 지휘하는 정예 수군과 유기가 지휘하는 강하군이 손권군에 협력하면 반드시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라고 설득했다.
제갈량의 발언에 크게 기뻐한 손권은 즉시 주유, 정보 등이 지휘하는 수륙 2만의 병사를 파견하고, 유비, 주유 등은 연합하여 역병에 시달리고 있던 조조군을 적벽・오림에서 격파하여 패주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지』 오서 주유전에는, (주유는) "적벽에서 조우한 조공의 군대를 유비의 군대와 함께 역습했다. 이때, 군대에 역병이 유행했기 때문에, 한 차례 싸움을 벌이자 패주하여, 장강 북안으로 물러났다"라고 쓰여 있다.[15] 게다가 황개의 건책에 의한 화계와 거짓 항복을 걸고, "방심한 조조 병선에 기름을 먹인 땔감을 몰래 탑재한 작은 배(주가)를 접근시켜, 동시에 발화시켰으므로, 강풍에 날려 해안가 진영까지 모두 불타, 소사・익사자가 늘어나 (조조) 군은 패퇴했다. 유비와 주유가 추격했으므로, 조공은, 조인에게 강릉성에서 후군을 맡기고 북귀했다"라고 쓰여 있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 배송지가 주석을 단 『강표전』에는, "때에 동남풍이 격렬하게 몰아쳐 북쪽 배(조조군 배)를 불태워 해안가 진영까지 연소시킨 후에 주유 등은 도하하여 육상에서 추격을 가했고, 북군은 크게 궤멸되었으며, 조공은 패주했다"라고 쓰여 있다.
『삼국지』 오서 오주전에는, "주유와 정보를 좌우의 독으로 삼아,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게 하고, 유비와 함께 진군하여 적벽에서 조공을 크게 격파했다"라고 쓰여 있다. "조공군의 대부분이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했다"라고 쓰여 있다.[16]
주유, 유비 등은 수륙 병행하여 더욱 조조를 추격하여, 남군까지 병사를 진격시켰다.
208년 겨울, 남군으로 진격한 주유 군은 조인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할 것을 제안했고, 주유는 이 제안을 채택하여 감녕은 수백 명의 부대로 이릉성을 탈취했다. 조인은 감녕에게 즉시 5,000명 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여 이릉을 포위했다. 이때 감녕은 항복한 병사들을 합쳐 겨우 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포위당했음에도 태연하게 지휘했다. 주유는 여몽의 헌책을 받아들여 능통의 부대에게 수비를 맡기고, 스스로 이릉성을 포위한 적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여 이릉을 완전히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강을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주유의 선봉 부대(수천 명)에게 포위된 부하 장수 우금을 조인은 겨우 수십 명으로 포위망에 돌입하여 구출했는데, 이를 본 부하들은 "장군은 진정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감탄했다. 쌍방의 군대가 대치를 시작했지만, 이때 정면 결전 끝에 주유는 유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조인은 주유의 중상 소식을 듣고 주유 군에게 진격했다. 그러나 주유는 중상인 채로 싸움에 임하여 조인의 공격을 물리쳤다. 교전 개시 후 1년이 지나 조인은 주유 등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렸다. 유비는 장비에게 1,000명을 맡겨 주유의 지휘하에 넣고, 한편 주유로부터 2,000명을 빌려 서로 군세를 주고받으며 협력하여 조인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 주유는 이에 동의하여 자군에서 2,000명의 병사를 선택하여 유비에게 맡겼다.
6. 3. 유비 진영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다.[14] 제갈량은 조조군의 피로와 형주 백성의 불만을 언급하며, 관우의 정예 수군과 유기의 강하군이 손권군과 협력하면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손권은 주유, 정보 등을 파견했고, 유비와 주유 등은 연합하여 적벽・오림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고 패주시켰다.[15]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는 유비가 손권이 파견한 주유, 정보 등의 수군과 힘을 합쳐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하고 배를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는 오군과 함께 남군까지 추격했고, 조조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아 귀환했다.
미축, 미방, 손건은 유비를 섬긴 신하였다.
7. 적벽 대전을 소재로 한 작품
적벽 대전은 소설, 만화,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물에서 자주 등장한다.
영화로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과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이 있다.
7. 1. 영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중국),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 (중국)참조
[1]
서적
Jiangbiao zhuan
[2]
서적
Jiangbiao zhuan
[3]
기타
1994
[4]
간행물
关于湖北省蒲圻市更名为赤壁市的批复
https://www.gov.cn/g[...]
State Council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1998-06-11
[5]
서적
His Stubbornship: Prime Minister Wang Anshi (1021–1086), Reformer and Poet
Brill
2021
[6]
웹사이트
Huanggang celebrates life and works of Su Dongpo
https://www.chinadai[...]
2010-09-28
[7]
논문
Fanning the Flames of War: Considering the Military Valu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in Chinese History at the Battle of Chi Bi
American Association of Chinese Studies
2010
[8]
서적
Chinese Stardom in Participatory Cybercultu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8
[9]
웹사이트
John Woo breaks Chinese box-office record
https://www.france24[...]
France Médias Monde
2008
[10]
문서
三国志呉書呉主伝による
[11]
문서
江表伝による
[12]
문서
三国志蜀書諸葛亮伝による
[13]
문서
呉録、江表伝による
[14]
문서
『三国志』に注を加えた[[裴松之]]は、同一の人物から出た史書が食い違っているのは蜀と呉がそれぞれ自国に都合のいいように記録したからであろうかと述べている。
[15]
문서
『三国志』呉書周瑜伝「與備并力逆曹公、遇於赤壁。時曹公軍、衆已有疾病、初一交戦、公軍敗退、引次江北」
[16]
문서
『三国志』呉書周瑜伝に裴松之が付注した『江表伝』には、 曹操は「病が流行したから船を焼いて退却したのだが、周瑜に虚名を得させる事になった」と孫権への手紙に書いたとある。曹操は、疑惑を植え付けようと周瑜を誹謗したと思われる。
[17]
문서
『三国志演義』の著者・[[羅貫中]]は[[朱元璋]]・[[陳友諒]]と元末の覇を争った[[張士誠]]に仕えたとされ、朱元璋が陳友諒を打ち破った[[鄱陽湖の戦い]]を元にしているという説がある。
[18]
문서
『[[三国志 (歴史書)|三国志]]』の裴松之註には、船で偵察に出た孫権が矢を片舷に受けて船が傾いたため、反対側を敵に向けて矢を受けてバランスを取った(『魏略』)という記述がある。
[19]
문서
民間伝承には、諸葛亮はこの時期に東南の風が吹く日があるのを初めから知っていたと言う話や、ドジョウを使って東南の風を吹く日を知ったなどの話がある。
[20]
웹사이트
湖北省咸宁市三国赤壁古战场景区
https://www.mct.gov.[...]
中華人民共和国文化観光部
2023-02-03
[21]
서적
続 校注 唐詩解釈辞典〔付〕歴代詩
大修館書店
2001
[22]
문서
현재 후베이성 츠비시
[23]
문서
오서에 이르기를 태사자는 임종할 때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7척 칼을 지니고 천자의 계단에 올라야 하거늘, 아직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는데 어찌 죽으랴!"라고 탄식했다. 손권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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