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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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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희는 한나라 초기의 무장으로, 유방을 도와 초한 쟁패에서 활약했다. 그는 장도 토벌에 기여하여 양하후에 봉해졌으나, 흉노와의 관계, 유방의 의심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한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반란은 한나라의 안정을 위협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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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
진희 (陳豨)
생애
출생?
사망기원전 196년
활동 시기기원전 2세기
주요 활동한나라에 대한 반란
관직 및 작위
작위양성후 (陽夏侯)
관직거록군 상 (守相)
가족 관계
군주유방 (한고조)
상관주발
기타
반란 진압유방 (한고조)가 직접 반란을 진압함.
최후주발에게 참수됨.

2. 생애

진희는 원곡 출신으로, 현재 산둥성 허쩌시 무단구 롱왕먀오촌에 있는 옛 도시였다. 그의 어린 시절과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방은 그와 그의 능력에 큰 신뢰를 갖게 되었다.[5] 기원전 208년, 진희는 유방에게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합류하여 초한 쟁패에서 활약했다.[2] 진희는 현재의 시안시(장안) 근처 패상(패상)을 점령했고, 유방의 "게릴라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2]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이 승리하면서 한나라가 건국되었다.

중국 국가들의 다른 왕들 중 일부는 제국 통치의 부활에 불만을 품었다. 장도항우에 의해 연왕으로 임명되었고, 이전 통치자 한광을 무력으로 제거하여 그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유방에 의해 연과 요동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202년 말 전에 그는 새로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북부의 중앙 군을 침공했는데, 이는 과거 그 이름의 왕국에서 유래된 "대"로 통칭되었으며, 현재 허베이성 북부와 산시성에 위치해 있었다.[3] 진희는 대에서 장도에 저항했고, 황제의 연으로의 진격을 도왔으며,[2] 그곳에서 장도가 체포, 처형되었고, 황제의 오랜 동지 노관으로 대체되었다.[3] 진희는 장도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양가후(陽夏侯)에 봉해졌다.[10]

다음 해인 기원전 201년, 흉노 유목민들은—장도와 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기록되지 않았다[3]—대를 침공하여 한 신의 항복을 강요했다. 한 신은 한나라의 전 왕이었고, 황제에 의해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진양(현재의 타이위안) 대신 마읍(현재 산시성 북부의 수저우시)과 같이 노출된 변방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유방에 대한 오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은 반란 혐의를 받게 되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흉노의 선우 묵돌과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기원전 200년에 북쪽으로 진군하여 전투에서 한 신을 격파했다. 그러나 한은 유목민들 사이로 도망칠 수 있었고, 흉노는 백등산 (현재 다퉁시)에서 유방의 영토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진희는 이 전투에서도 뛰어난 공을 세웠지만,[5]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전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2]

연 또는 대 작전에 대한 공로로, 진희는 양하후(양하후)에 봉해졌고, 일반적인 등급이 아닌 "열후" (열후/列侯중국어)로 임명되었다.[5]

기원전 200년에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자, 진희는 고제에게서 조나라상국으로 임명되어 조나라와 대나라 변경의 군대를 지휘해, 북방의 요충지를 방위하는 임무를 맡았다.[11] 진희는 평소 신릉군을 존경하여 빈객을 많이 모았는데, 조나라 상국 주창이 이를 의심하여 고제에게 보고했다.[12] 고제가 진희의 빈객들을 조사한 결과, 여러 불법 사항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진희는 두려움을 품었다.[12]

고제 10년(기원전 197년), 태상황이 죽자 고제에게서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한왕 신이 왕황(王黃)과 만구신(曼丘臣)을 보내니, 왕황과 만구신 등과 상의한 끝에 고제의 소환 명령에 불응하고 도리어 대나라와 조나라를 들어 8월에 반란을 일으켰다.[12] 한단 이북을 모조리 장악하고 항산군 25성 중 20성을 함락시켰으며, 또 상당군도 공격했다. 고제는 주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9월에 친정에 나서니, 태위 주발[13]·번쾌[23]·우승상 역상[14]·태복 하후영[15]·관영[16]·호군중위 진평·어사대부 조요·거기장군 근흡[17]·위장군 왕염[10]·장군 진조[10]·하간 장상여[10]·낭중 공손이[10]·장군 유택[10][18]·정위 선의[10]·하간 조연[10]·도위 여신[10]·낭중 허천[10]·양나라 장군 위거[10]제나라 상국 조참[19]·제나라 상국 부관[20]이 종군했다. 한단에 방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제에게 쉽게 빼앗겼고, 고제에게서 비웃음을 당했다. 상당군은 군수 임오가 굳게 지켰기에 함락시킬 수 없었다.[21] 또 만구신·왕황 등을 비롯해 반란군에는 상인 출신 장군이 많았는데, 고제가 이를 듣고 돈으로 매수하여 많은 장군들이 한나라에 항복했다.[11][12]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고제는 계속 한단에 주둔하니, 진희의 장군인 승상 후창(侯敞)이 유격군을 이끌었고, 왕황은 곡역에 있었고, 장춘(張春)은 강을 건너 요성을 공격했다. 이들은 한나라 장군 곽몽·관영[16], 근흡[17] 과 제나라 군대와 싸워 모두 패배했다.[11] 후창은 특장(特將) 다섯 명과 함께 곡역 아래에서 관영의 병사들에게 살해됐고, 관영에게 곡역·노노·상곡양·안평·안국이 모조리 항복했으며, 관영은 이후 동원 공성전에 합류했다.[22] 주발이 별군을 이끌고 태원 방면으로 쳐들어와 대가 함몰됐고, 마읍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 도륙됐으며 장군 승마치(乘馬絺)도 전사했다.[11][13] 12월, 고제가 동원을 공격해 조리(趙利)를 파견해 지키게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동원을 지키는 병사들이 고제를 모욕했고, 고제는 분노해 동원의 항복을 받아낸 후 욕한 자들은 베고 욕하지 않은 자들은 경형에 처했다. 그리고 동원은 진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이은 승리 이후 고제는 낙양으로 돌아갔고, 대나라가 조나라와 산으로 분리되어 있어 조나라에서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대나라를 분할해 아들 유항을 왕으로 삼았다. 왕황은 유택에게 사로잡혔고 만구신도 산 채로 사로잡혔으니, 이는 고제가 왕황과 만구신에게 현상금을 걸고 휘하 병사들을 매수했기 때문이다.[12] 왕황은 곡역 아래에서 베어졌다.[12] 그리고 대나라 상국으로는 제나라 상국이었다가 승상 번쾌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한 부관을 임명해, 대나라에 군사를 주둔하게 했다.[20]

그 사이 진희 자신은 만구신과 함께 양국에서 번쾌와 싸웠으나 박인이 함락됐고, 청하와 항산 일대 27현도 상실했으며, 번쾌는 동원 공성전에 합류했다.[23] 또 한왕 신·조리와 합류해 누번에서 주발과 싸웠으나 져 장군 송최(宋最)와 안문수 혼(圂)이 사로잡혔다. 그리고 다시 운중에서 주발의 공격을 받아 운중수 속(遬)·승상 기사(箕肆)·장군 훈(勳)이 사로잡혀, 안문군 17현과 운중군 12현을 상실했다.[13]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은 번쾌에게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사로잡혔다. 진희의 별장인 호인 왕황은 대남에서 번쾌의 공격을 받아 격파됐다. 진희의 호기(胡騎)도 격파돼 장군 조기(趙旣)도 번쾌와의 싸움에서 전사했고, 승상 풍량(馮梁)·손분(孫奮)·왕황·

고제 12년 겨울(기원전 196년)[24] 결국 한나라의 진압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혹은 번쾌의 별장의 공격을 받아 당성에서 죽었다고도 하고,[11] 혹은 주발의 공격을 받아 영구(靈丘)에서 격파돼 베어졌다고도 하며,[13] 혹은 공손이에게 베어졌다고도 한다.[10] 승상 정종(程縱)·장군 진무(陳武)·도위 고사(高肆)가 사로잡혔고, 대군 9현도 평정됐다.[13] 이렇게 총 진희의 세력권이던 대의 73향·읍이 모두 평정됐다.[23]

기원전 195년경, 서한 한 제국의 대략적인 경계선. 진희의 반란이 진압된 지 1년 후이다. 대, 조, 연의 제후국들은 북쪽과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한나라 건국

진희는 원곡 출신으로, 현재 산둥성 허쩌시 무단구 롱왕먀오촌에 있는 옛 도시였다. 그의 어린 시절과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방은 그와 그의 능력에 큰 신뢰를 갖게 되었다.[5] 기원전 208년, 진희는 유방에게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합류하여 초한 쟁패에서 활약했다.[2] 진희는 현재의 시안시(장안) 근처 패상(패상)을 점령했고, 유방의 "게릴라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2]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이 승리하면서 한나라가 건국되었다.

중국 국가들의 다른 왕들 중 일부는 제국 통치의 부활에 불만을 품었다. 장도항우에 의해 연왕으로 임명되었고, 이전 통치자 한광을 무력으로 제거하여 그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유방에 의해 연과 요동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202년 말 전에 그는 새로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북부의 중앙 군을 침공했는데, 이는 과거 그 이름의 왕국에서 유래된 "대"로 통칭되었으며, 현재 허베이성 북부와 산시성에 위치해 있었다.[3] 진희는 대에서 장도에 저항했고, 황제의 연으로의 진격을 도왔으며,[2] 그곳에서 장도가 체포, 처형되었고, 황제의 오랜 동지 노관으로 대체되었다.[3] 진희는 장도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양가후(陽夏侯)에 봉해졌다.[10]

다음 해인 기원전 201년, 흉노 유목민들은—장도와 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기록되지 않았다[3]—대를 침공하여 한 신의 항복을 강요했다. 한 신은 한나라의 전 왕이었고, 황제에 의해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진양(현재의 타이위안) 대신 마읍(현재 산시성 북부의 수저우시)과 같이 노출된 변방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유방에 대한 오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은 반란 혐의를 받게 되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흉노의 선우 묵돌과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기원전 200년에 북쪽으로 진군하여 전투에서 한 신을 격파했다. 그러나 한은 유목민들 사이로 도망칠 수 있었고, 흉노는 백등산 (현재 다퉁시)에서 유방의 영토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진희는 이 전투에서도 뛰어난 공을 세웠지만,[5]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전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2]

연 또는 대 작전에 대한 공로로, 진희는 양하후(양하후)에 봉해졌고, 일반적인 등급이 아닌 "열후" (열후/列侯중국어)로 임명되었다.[5]

2. 2. 흉노와의 관계와 조나라 부임

기원전 201년, 흉노가 대 지역을 침공하여 한왕 신이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1] 진희는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5] 기원전 200년에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자, 진희는 조나라 상국으로 임명되어 조나라와 대나라 변경의 군대를 지휘하며 북방의 요충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11]

진희는 평소 신릉군을 존경하여 빈객을 많이 모았는데, 조나라 상국 주창이 이를 의심하여 고제에게 보고했다.[12] 고제가 진희의 빈객들을 조사한 결과, 여러 불법 사항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진희는 두려움을 품었다.[12]

2. 3. 진희의 반란

유방의 감시관들이 진희와 그의 관리들이 불법 행위에 연루되었다고 보고하자, 위협을 느낀 진희는 반란을 결심했다.[12] 기원전 197년, 유태공의 죽음으로 유방이 진희를 소환했으나, 진희는 이에 불응하고 왕황(王黃), 만구신(曼丘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2] 진희는 스스로를 "대왕(代王)"이라 칭하고 한단 이북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2]

유방은 친정에 나서며[13], 진희의 세력 중 상인 출신 장군이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뇌물로 매수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1][12]

기원전 196년, 진희의 장군들은 한나라 군대에 연이어 패배했다.[11] 진희는 한 신과 연합하여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전사했다.[13][11][10]

2. 4. 반란 진압과 최후

기원전 197년, 진희는 왕황(王黃)과 만구신(曼丘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나라와 조나라를 장악하고 한단 이북을 점령했다.[12] 이에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희를 진압하기 시작했다.[13][23][14][15][16] 진희는 상당군을 공격했으나 군수 임오(任敖)가 굳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21] 또한 상인 출신 장군들이 많았는데, 유방이 돈으로 매수하여 많은 장군들이 한나라에 항복했다.[11][12]

기원전 196년, 한나라 장군 곽몽, 관영[16], 근흡[17]은 진희의 장군들을 각지에서 격파했다. 관영은 곡역·노노·상곡양·안평·안국을 항복시켰고[22], 주발은 태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대를 함락시키고 마읍을 도륙했다.[11][13] 유방은 동원을 공격하여 한 달 만에 함락시키고, 진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21] 이후 유방은 낙양으로 돌아가고, 대나라를 분할하여 아들 유항을 대왕으로 삼았다.[21] 왕황과 만구신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12]

진희는 번쾌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청하와 항산 일대 27현을 상실했다.[23] 또한 한왕 신, 조리와 함께 안문에서 주발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운중에서 다시 주발의 공격을 받아 안문군과 운중군을 상실했다.[13] 결국 진희는 한나라 군대에 패하여 전사했다. 전사한 장소는 여러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당성에서 번쾌에게 죽었다고도 하고,[11] 영구에서 주발에게 격파되어 베어졌다고도 하며,[13] 공손이에게 베어졌다고도 한다.[10] 진희의 패배 이후 대의 73향·읍이 모두 평정되었다.[23]

3. 역사적 평가

진희는 원곡 출신으로, 유방이 초한 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2] 특히 기원전 201년, 흉노가 한 신과 연합하여 대 지역을 침공했을 때, 진희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5] 비록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진희는 이 공로로 양하후(陽夏侯)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지위에 올랐다.[5]

기원전 198년, 조의 오왕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어 후작으로 강등되고, 유여의가 조왕을 계승했다. 기원전 197년, 진희는 어린 조왕의 재상으로 파견되어 북방의 흉노를 방어하는 한나라 군대의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5]

진희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안정을 위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5] 그는 기원전 197년, 유태공의 죽음으로 조문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왕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왕이라 칭했다.[4]

진희는 민심을 얻지 못하고 외세인 흉노에 의존하려 한 점도 비판받는다.[6] 한 신은 왕황(繁體字,}} 简体字,}} ''Wáng Huáng'')과 만구신(,}} ''Mànqiū Chén'')을 파견하여 진희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4] 진희는 흉노의 ''선우''인 묵돌에게 왕황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6]

결국, 진희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몰락한 인물로 평가된다.[4][5][6][8][9]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서 진희의 몰락을 두고 "아, 얼마나 비극적인가!"라고 탄식했다.

3. 1. 긍정적 평가

진희는 원곡 출신으로, 유방이 초한 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2] 특히 기원전 201년, 흉노가 한 신과 연합하여 대 지역을 침공했을 때, 진희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5] 비록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진희는 이 공로로 양하후(陽夏侯)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지위에 올랐다.[5]

기원전 198년, 조의 오왕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어 후작으로 강등되고, 유여의가 조왕을 계승했다. 기원전 197년, 진희는 어린 조왕의 재상으로 파견되어 북방의 흉노를 방어하는 한나라 군대의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5]

3. 2. 부정적 평가

진희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안정을 위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5] 그는 기원전 197년, 유태공의 죽음으로 조문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왕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왕이라 칭했다.[4]

진희는 민심을 얻지 못하고 외세인 흉노에 의존하려 한 점도 비판받는다.[6] 한 신은 왕황(繁體字,}} 简体字,}} ''Wáng Huáng'')과 만구신(,}} ''Mànqiū Chén'')을 파견하여 진희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4] 진희는 흉노의 ''선우''인 묵돌에게 왕황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6]

결국, 진희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몰락한 인물로 평가된다.[4][5][6][8][9]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서 진희의 몰락을 두고 "아, 얼마나 비극적인가!"라고 탄식했다.

4. 한국 역사와의 관련성

참조

[1] 간행물 Zizhi Tongjian
[2] 서적 https://backendstagi[...]
[3] 서적 https://backendstagi[...]
[4] 서적 https://books.google[...]
[5] 서적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서적 https://books.google[...]
[8] 서적 https://books.google[...]
[9] 서적 https://books.google[...]
[10] 위키문헌 사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6 https://zh.wikisourc[...]
[11] 서적 사기
[12] 위키문헌 https://zh.wikisourc[...]
[13] 서적 사기
[14] 서적 사기
[15] 서적 사기
[16] 서적 사기
[17] 서적 사기
[18] 서적 사기
[19] 서적 사기
[20] 서적 사기
[21] 서적 사기
[22] 서적 사기
[23] 서적 사기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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